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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창조주 생각 따라잡는 하나님 형상>의 줄거리 :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이 도대체 왜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는지에 관한 질문과 함께 풀어야 할 문제입니다.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필요했던 이유는 삼위 하나님의 일체 되심에 피조물인 사람이 참여하여 어우러지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이 어우러짐을 위하여 필수적인 조건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답이 나옵니다.
(S) 창조주 생각 따라잡는 하나님 형상
(창세기 1:26~31)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9.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은 창조주의 생각을 따라잡기 위하여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사람이라는 피조물에 왜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하고 싶으셨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과는 다르게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하셨습니다. 그 창조주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결과적으로 죄와 저주에 의해 그 의도는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의 깨어진 의도를 회복시키기 위해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의 사역을 완수하시고 마지막 기도하실 때의 내용을 보면, 죄와 저주로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에게 부여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저주로 깨어진 아버지의 본래 의도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사역을 통해 원하셨던 것은, 예수님과 아버지가 하나인 것처럼 당신을 믿는 모든 사람이 다 함께 하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에서 이러한 내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예수님의 그리스도 사역, 다시 말해 구세주로서의 사역이란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하실 때 창조주로서 가지셨던 의도를 회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님이 하나이신 것처럼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삼위 하나님의 일체 되심에 참여하여 어우러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일을 바라셨던 것입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하신 의도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의도는 바로 삼위 하나님과의 어우러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독생자 예수님과 성령님은 이미 삼위일체로 어우러지고 계십니다.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할 피조물인 사람을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에 참여하여 어우러질 수 있는 피조물을 만드시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 본문을 풀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 예수님과 성령님에게 ‘피조물 중에서 우리와 함께 어우러질 존재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예수님과 성령님이 ‘옳습니다. 아멘’이라고 대답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계속 말씀하십니다. ‘그러려면 우리와 같은 점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점을 부여함으로써 우리가 일체 되어 영원 전부터 함께 하듯이 그들도 우리의 일체 됨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자. 그렇게 참여하게 되면 창조주로서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받은 대리자로서 이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지 않겠느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이란 관계성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삼위 하나님의 일체 되심에 참여하여 어우러질 수 있으려면 공통점이 있어야 합니다. 그 공통점이란 바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곧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는 능력입니다. 인간의 고립적이고 독자적인 속성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로지 관계를 위해서만 부여하신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삼위 하나님 간의 사랑을 보면 그 특성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 17절을 보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삼위 하나님과의 관계가 사랑과 기쁨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과 기쁨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일까요? 사랑하시기에 삼위 하나님 안에서는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일까요? 어떤 일을 통해서 삼위 간의 사랑이 표현되고 있을까요? 다시 말해 삼위 하나님은 실제로 어떻게 사랑의 일체를 이루고 계실까요? 그 답은 바로 언어를 통해서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면 예수님에 대해 소개하기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이란 곧 속에 있던 생각이 밖으로 표현된 언어입니다. 생각과 말씀이 언어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영원 전부터 계신 말씀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창조주 하나님이 무슨 생각을 하시면 그 생각이 밖으로 나오는 것이 말씀입니다. 아버지 밖에 계시는 예수님이 그 아버지의 생각을 다 받아들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에게 생각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로부터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갖고 계신 생각을 다 받아들이고, 당신의 생각을 하나도 하지 않으심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은 표현되었습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 예수님이 스스로 생각하셔도 아버지와 같은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 생각하시지 않고 오직 창조주이신 아버지의 생각을 다 받아들일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만물이 창조되었다는 이야기가 요한복음 1장 1~3절에서 나오고,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장 15~18절에서 같은 맥락의 말씀을 하십니다. 세상에서 나타나고 모양을 보이는 모든 피조물은 단 하나도 예외 없이 창조주 하나님이 생각하신 것을 예수님이 다 받아들여서 당신의 생각으로 삼으십니다. 예수님이라는 언어의 인격체 안에는 오직 아버지의 생각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제 그렇게 받아들인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은 바깥으로 나와서 말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말씀을 따라서 성령님이 실제로 행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님은 언어로 통일체를 이루고 계십니다. 생각도 언어이고, 말씀도 언어이고, 말씀에 따른 행동도 언어에 의한 행위입니다. 결국 언어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님이 통일을 이루어 하나가 되어 계십니다. 이로부터 사람을 지으신 이유는 언어로 이루어진 삼위 하나님의 일체 되심에 참여할 피조물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도에서 피조물인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조건은 언어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하셨을 때 무엇 때문에 언어 능력을 허락하셨는지 그 의도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언어 능력 자체를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속성으로 이해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가장 으뜸 되게 하시기 위해 언어 능력을 부여하신 것이라고만 이해합니다. 그러나 언어 능력을 주신 진짜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일체 되심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언어 능력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이 생각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생각만을 받아들이고자 하실 때도 필요한 것은 언어 능력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받아들인 말씀을 성령님이 실제로 행하시려고 해도 필요한 것이 언어 능력이었습니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예를 들어봅니다. 동호회를 생각해 보면 같은 취미의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친척이나 가족은 같은 핏줄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동창회는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남자 전용, 여자 전용 시설이라면 남자나 여자라는 공통점을 가진 사람들이 이용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동서남북 교회의 공통점이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하나로 살겠다는 결심을 한 자들의 모임입니다. 지금 십자가 하나로 살기가 잘 되든 안 되든 십자가 하나로 살겠다는 결심을 한 자들의 모임입니다. 마찬가지로 삼위 하나님의 일체 되심의 관계에 참여하려면 언어 능력이라는 공통점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예수님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하셨던 것처럼 창세기 1장도 말씀이 중심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어떻게 말씀으로 나오게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아버지의 생각을 다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나온 말씀대로 성령님이 움직여서 창조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중심이 말씀, 즉 언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에 참여하기 위하여 꼭 필요한 조건이 언어 능력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언어 능력을 가진 인간이 참여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29절에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려 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다시 형상이 언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피조물인 사람이 삼위 하나님의 일체 되심에 참여하려면 부여된 언어 능력으로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아들의 형상을 본받음이란 스스로 절대 생각하지 않고 창조주 하나님이 갖고 계시는 모든 생각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집안에 무슨 문제가 생겼더라도 그 문제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창조주 아버지가 그 문제에 대해 생각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아버지의 생각을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이것이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자의 모습입니다.
문제는 죄와 저주의 습관 때문에 이러한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아들의 형상을 본받기를 바라시며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생각하시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을 받아들인 것처럼 우리도 그대로 해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고 그렇게 해야만 삼위 하나님의 일체 되심에 참여하여 어우러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독자적인 삶의 환경에서 주체적으로, 인격적으로, 책임지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결단하고, 행동하면서 삶을 잘 이끌어 가기를 바라시며 창조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힘든 일이 있으면 하나님과 예수님을 불러서 그 모든 어려운 점을 해결해달라고 하면서 삶을 책임지고 끌고 갑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보조수단으로 고용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삶에 문제가 생겼을 때 예수님처럼 절대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삶의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생각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아버지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삶의 목적은 이 세상의 삶을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 삼위 하나님의 일체 되심에 참여하여 어우러지는 것입니다.
그 어우러질 수 있는 방법은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생각을 다 받아들임으로써 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는 나, 불편해하는 나, 좋아하는 나를 죽이고 창조주 하나님의 생각만이 내 안에 들어올 수 있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처럼 본문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형상이란 일체 되심에 참여하기 위해 필요한 언어 능력입니다. 그런데 죄로 인한 타락으로 이 언어 능력을 스스로 주체가 되고 스스로 생각하는 일에 다 써버렸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어도 일단 내가 생각하고 나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찾습니다. 이것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타락한 이야기와 연결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피조물들을 정복하고 다스리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생각을 다 받아들인다면 하나님 아버지의 대리자가 됩니다. 우리의 생각대로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따져봐서 좋다고 생각하는 방식대로 정복하고 다스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생각을 다 받아들여서 삼위 하나님과 일체로 어우러지는 상태에서, 보이지 않는 삼위 하나님을 대신하는 대리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내 생각대로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려면 하나님을 상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 방법을 귀가 따갑도록 이야기해 왔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 안에서 보좌 우편에 앉힌 바 되어 하나님을 직면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직면하면 이 세상에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하나님의 존재감이 우선됩니다. 어떤 문제가 생겨도 문제의 존재감보다 하나님의 존재감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 마음은 오직 직면하고 있는 하나님만을 열망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말씀을 듣다가 떠나는 분들도 있습니다. 말씀은 맞는 것 같은데 잘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내 마음은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었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우리의 마음은 하늘로 올라갑니다. 이것은 약속입니다. 그런데 왜 날이 가고 달이 가도 하나님과 친해짐이 없을까요? 언어가 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하나님과 다른 언어를 쓰기 때문입니다. 언어가 다르기에 사귐과 교제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돈이나 건강은 모두 삶에서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내려다보시면서 나와 연관하여 돈과 건강에 관한 생각을 하십니다. 이제 나는 그 생각을 받아들여야 돈과 건강에 대해서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정작 나와 관련하여 돈과 건강에 대해 생각하시는 하나님의 언어와 나의 언어가 전혀 다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나와 관련된 하나님의 생각을 내 안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갖고 계신 생각이 알려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독일에 유학을 가서 처음으로 독일어 책을 펼쳤을 때와 똑같습니다. 영어책은 읽다 보면 단어 하나씩이라도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독일어 책은 봐도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창조주 아버지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가 이와 같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언어 체계에서 돈과 건강에 대해, 이 세상 문제에 대해, 형통에 대해,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에 대한 이해와 개념이 하나님과 다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처럼 창조주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언어가 달라서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기에 하나님과의 교제나 사귐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십 년, 백 년을 믿는다고 해도 하나님과 친해질 수가 없습니다.
삼위 하나님과의 일체 됨은 언어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같은 언어 체계를 갖고 계셨기에 아버지가 하시는 모든 생각을 다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성령님도 같은 언어 체계를 갖고 계셨기에 예수님에게 받아들여진 아버지의 생각을 그대로 실행해 나가실 수 있었습니다. 같은 언어라는 체계 아래에서 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술적으로 붙잡습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고백하는 자의 마음을 하늘로 데리고 가시는 것은 맞습니다. 이것은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기술적인 이야기가 아닌 인격적인 이야기입니다. 기술적으로 예수님을 따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기만 하면 하나님과 사귐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존재감이 눈에 보이는 사람이나 사건 앞에서 자꾸만 죽어버립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사귐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친해짐이 증진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친해져야만 내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은 묵직하게 느껴집니다.
하나님과 친해지지 못하는 이유는 언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언어 체계를 바꿀 수 있을까요? 내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해야만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문제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생각을 내 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과 언어 체계가 같아져서 하나님의 생각이 내 안에 들어오고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언어 체계가 다르기에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건강과 내가 생각하는 건강이 같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재정과 내가 생각하는 재정이 같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자녀와 내가 생각하는 자녀가 같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배우자와 내가 생각하는 배우자가 같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언어가 다른 상태에서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일체를 이루고 계시듯이 내가 삼위 하나님과 일체 될 수는 없습니다.
외국에서 살다 보면 어울림의 문제를 겪게 됩니다. 자기들끼리 무슨 이야기를 하면서 깔깔대고 웃는데 나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겨우 책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기에 생활 속에서 이야기되는 주제들에 함께 어울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어색하게 자리를 지킬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모습이 이와 같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로 올라가면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하나의 언어 체계를 가지고 서로 교통하고 계심을 봅니다. 그런데 정작 나는 그 관계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 속에 삼위 하나님의 일체 되심을 이루는 통일된 언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체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과의 사귐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어 체계를 어떻게 바꾸어 나갈 수 있을까요? 앞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흥왕해야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서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단지 성경을 많이 읽는다고 내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의 신학교 선배 중에는 속독으로 성경을 천 번 읽기로 목표한 분이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제가 볼 때는 성경을 모르는 상태입니다.
사람들은 하루에 정해 놓은 분량대로 성경을 읽는 것을 마음의 굉장한 안전장치처럼 생각합니다. 성경 읽는 것을 ‘나는 올바르다.’라는 확신을 갖는 용도로 삼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모든 이단과 사이비는 성경을 읽고 철저히 연구합니다. 오히려 정통 교단에 속한 종교인들보다도 성경에 대해 정통한 경우를 많이 봅니다. 엉터리 삼류 신학자들과 기독교 종교의 엉터리 사상가들도 성경을 읽고 연구합니다. 성경에 근거 되지 않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둘 다 성경을 붙잡고 있으면서 가톨릭은 개신교를 배척하고, 개신교는 가톨릭을 공격합니다. 단지 성경을 많이 읽는다고 내 마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는 것은 아닙니다. ‘책을 백 번 읽으면 그 뜻이 저절로 드러나게 된다.’라는 뜻의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意自見)’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세상의 책들은 그럴지 모르지만 성경은 다릅니다. ‘나는 성경을 읽어요.’라고 강조하는 사람이 있다면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 속에는 여전히 죄와 저주에 찌든 언어 체계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성경을 봐도 죄와 저주에 찌든 언어 체계를 통해 성경을 받아들임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QT도 조심해야 한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죄와 저주에 찌든 언어 체계는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그 상태에서 성경을 읽고 느끼는 대로 은혜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정말 강력하고 교활한 마귀와 귀신의 역사는 모조리 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납니다. 이단이나 사이비, 양아치 같은 삼류 신학자들, 엉터리 사상가들은 모두 성경을 근거로 합니다. 마귀가 자기의 정체를 가리기 위해 제일 선호하는 방식이 성경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성경을 앞세우는 자들이 예배당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성경을 읽어요. 성경이 최곱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무조건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모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전 설교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세 가지 형태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첫 번째는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이고, 두 번째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계시된 말씀입니다. 세 번째는 선포되는 말씀입니다. 제가 전하는 말씀은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세 가지 형태가 어떻게 해야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을까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로 기록된 성경을 해석하여,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한 하나님 사랑과 성령의 장갑이 되는 삶을 성경의 모든 구절에서 발견해 내는 것입니다. 발견해 냄이란 성경을 논리적으로 십자가에 귀결될 수밖에 없게 해석함을 의미합니다.
성경을 해석하다 보면 십자가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로 귀결됨으로써 세상에 대해 죽으면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성령이 내 몸을 장갑 삼아 움직여 가십니다. 이러한 삼위 하나님의 일체 되심이 모든 성경 구절에서 십자가를 통하여 확인되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모든 말씀이 십자가로 귀결된다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십자가만 기록하면 된다는 것일까요? 이렇게 다양한 소재가 등장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동서남북 교회의 모임에서 대화하실 때 ‘나는 복잡한 것은 몰라요. 무조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하나만 붙잡고 살면 되는 것 아닌가요?’라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을 허락하신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괜히, 헛되게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첫 장부터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까지의 말씀은 다양한 재료들을 통해 십자가를 휘감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모든 부분에서 십자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을 살펴볼 때는 창세기 1장의 소재로 십자가를 말합니다. 창세기 2장에서는 다시 창세기 2장의 소재로 십자가를 말합니다. 그래야 내 속의 언어 체계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삶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속에 삼위 하나님과 어우러질 수 있는 언어 체계를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경은 십자가를 다양한 소재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결론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로 가고, 하나님께로 가야 성령이 이 땅에서 움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결론을 다양한 소재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결국 우리의 언어 체계를 바꾸기 위함입니다. 성경에는 창조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먹고사는 이야기도 있고, 일하는 이야기도 있으며, 돈에 관한 이야기도 있고, 건강에 관한 이야기도 있고, 친척 간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러한 삶의 모든 관계를 십자가로 감싸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십자가를 말함으로써 모든 영역과 관계되는 우리의 언어 체계를 바꾸어 가기 때문입니다.
죄와 저주에 찌든 언어 체계에서 삼위 하나님 간에 통용되는 하늘의 언어 체계로 바뀌어야 일체 되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내 삶에서도 창조주 하나님이 갖고 계시는 생각들이 술술 풀려나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과 같은 언어 체계를 갖추면 하나님과 사귐이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실 때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영원 전부터 사랑과 기쁨이 샘 솟는 삼위일체 되심의 관계에 함께 참여하여 어우러질 수 있는 특권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런 특권과 이런 은혜는 달리 없습니다. 이 특권과 이 은혜 앞에서 지금의 문제들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특권적 의도를 내 속에서 실현해 나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로마서 8장 29절의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라는 말씀처럼 아들의 자리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을 다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언어 체계가 바뀌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죄와 저주에 찌든 세상의 가치관에 의해 지배되는 언어 체계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수시로 죄와 저주에 찌든 언어가 떠오릅니다. 세상의 언어 체계가 발동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들을 부숴야 합니다. 삶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창조주로서 다 생각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삶의 문제가 급하며 급할수록 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도록 만드는 것뿐입니다. 거기에 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함은 우리가 생활화해야 될 십자가로 성경을 해석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저는 수도 없이 다양한 소재로 기록된 성경을 십자가로 해석하여 말씀을 전해드릴 것입니다. 우선 생활화해야 될 십자가로 해석된 성경 말씀을 받고, 그것을 내 것으로 삼아 내 입으로 말함을 통하여 언어 체계를 바꾸어 나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 방송 이외에도 십자가를 통해 성경을 해석하는 말씀이 있다면 그분은 진정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다면 십자가 복음 방송의 말씀을 신뢰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부족한 사람이지만 이 해석이 틀림없는 이유는 생활화해야 될 십자가로 말씀을 해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언어 체계를 겨냥하고 삼위 하나님의 일체 되심 가운데 통용되는 언어 체계로 바뀌기를 바라며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들었다면 내 언어로 만들고 내 입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언어 체계를 바꾸기 위해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으로 흥왕하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삶은 아버지께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당장은 예수님처럼 직접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 말하고 행동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흥왕하기를 원하고, 내 말씀으로 만든 것들을 내 입으로 말할 기회를 갖기 위하여 수고하다 보면, 삶의 모든 문제는 아버지께서 생각하시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창조주가 아버지이시고 살아계시고 생각하신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으로 흥왕하여 하루빨리 아버지와 전격적인 친교와 교제를 이룰 수 있으면 됩니다. 그러기 위해 내 언어 체계를 바꾸어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창조주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잡기 위하여 부여하신 언어 능력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의 언어가 삼위 하나님 안에서 통용되는 언어의 체계로 하루빨리 바뀔 수 있도록 은혜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