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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도 죄인 복 주시기가 버겁다>의 줄거리 :
죄와 복은 상극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모조리 다 죄인입니다. 죄인은 복에 관해서 보이는 생각과 느낌조차도 죄에 찌들어 있습니다. 좋음과 나쁨에 관한 판단과 생각에도 이미 너무 깊숙이 죄가 스며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인이 간절히 바라고 원하는 복이 모조리 다 참 복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죄인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참된 복을 누리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죄인에게 복 주시기, 하나님도 버거워하십니다.
하나님도 죄인 복 주시기가 버겁다
(창세기 15:7~21)
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8. 그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9.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
10.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11.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12. 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14.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 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17.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죄와 복은 상극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자체를 복이라고 정의하신 아브라함의 생애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땅의 티끌 같고 하늘의 별처럼 번성하리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다만 아브라함이나 그 자손들 또한 죄인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복을 주시는 일에 있어서 너무 버거워하시는 모습이 본문에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죄인은 복에 관해서 가지는 생각이나 느낌조차 죄에 찌들어 있습니다. 좋음과 나쁨에 관한 판단과 생각과 느낌이 너무 깊숙이 죄에 찌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그 예를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지금 몸으로 살고 있는 세상에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일이 있다면 무조건 죄에 찌들어 있고 죄에 감염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죄에 감염된 상태에서 좋음에 대해 생각하는 죄인들에게 진짜 복을 가지게 하시고 누리게 하시는 일이 버겁습니다. 하나님은 로봇이 아닌 인격체이십니다. 그렇기에 죄인에게 복을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일은 너무 버겁고 힘든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죄인 중에 선택하신 선민입니다. 선민 역시 죄인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선민에게 참 복을 누리게 하시려고 얼마나 애를 쓰시는지가 잘 드러납니다.
본문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말을 보면 얼른 보기에 썩 편하지 않은 느낌이 드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6절에서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땅을 주시겠다고 반복하여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이 우리의 기분을 불편하게 합니다. 8절을 보면 “그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라고 대답합니다. 아브라함이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증거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대답에는 좀 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이 내용을 알기 위해서 이어지는 내용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대답을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다짜고짜 삼 년 된 암소, 삼 년 된 암염소,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를 가져오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따라서 짐승들을 반으로 쪼개서 양쪽으로 벌려놓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염두에 둘 때 8절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대답은 단순한 증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당시의 계약법입니다. 계약하는 쌍방은 짐승을 잡아서 반으로 쪼개어 양쪽으로 벌려 놓고 그 사이를 걷습니다. 계약을 어긴다면 이 짐승이 둘로 쪼개져 죽은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나도 마땅하다는 맹세를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계약이 체결됩니다. 아브라함이 8절에서 “그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라고 한 것은 증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땅의 소유는 계약을 거쳐서 소유주가 결정됩니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땅의 상황을 고려하며 하나님께 ‘제가 어떤 계약을 통해서 이 땅을 갖게 되겠습니까?’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의도를 이해하시고 세 마리 짐승과 두 마리 비둘기를 계약의 증거로 삼으십니다. 세 마리 짐승은 반으로 갈라 양쪽으로 펼쳤고, 두 마리 비둘기는 쪼개지 않고 그대로 놔두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계약 체결로 삼으신 것입니다. 삼 년 된 짐승 세 마리는 이 계약이 완전함을 상징합니다. 지금 가나안 땅에는 이미 거주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당장 그 땅의 소유주도 가나안 사람들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땅의 실제 소유주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와 계약하면 그 땅은 네 것이 될 것이다.’라는 의미에서 당시의 계약법을 따라 확인해 주신 것입니다.
한편 또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짐승들을 준비하여 하나님이 임하실 것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깊은 잠에 빠지게 되었고, 잠든 중에 꿈이나 계시를 통해 큰 흑암과 두려움이 임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큰 흑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두려워하면서 궁금해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임하십니다.
앞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손이 땅의 티끌 같고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리라는 축복의 내용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은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1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430년 동안을 노예로 지내게 됩니다. 참고로 16절에서는 이 기간에 대해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한 세대는 30~40년 정도로 추산되는데 사백 년을 사대라고 말씀하신 것은 당시 아브라함의 시대에는 100살을 넘게 살았기 때문에 한 세대를 100년으로 잡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백 년 동안을 이방 땅에서 노예로 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약속이 정말로 축복인지 의아합니다.
이 당시 아브라함은 예루살렘 아래쪽 가나안의 헤브론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이 열두 아들을 낳아서 퍼져나가는 길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굳이 아브라함 자손 전체를 이방 땅으로 옮기신 후에 무려 430년 동안 노예가 되어 살게 하시고, 애굽을 벌하시며 꺼내셔서 가나안 땅으로 오게 하는 복잡한 절차를 밟게 하십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노예 생활 430년 동안 태어났다 죽은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임에도 가나안 땅을 밟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16절에서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라는 말씀이 등장한 것으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읽지 않은 18~21절을 보면 가나안을 대표하는 열 족속이 언급됩니다. 그중에서 아모리 족속은 가나안을 대표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않았음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로부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자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는 것이 단순한 편애나 일방적인 사랑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죄악이 하나님의 기준을 넘쳐흐를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해 그 죄악에 대한 심판을 수행하도록 하시면서 가나안 땅을 갖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죄와 악의 차이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죄는 빗나감입니다. 쉽게 말해 마음에 하나님 이외에 눈에 보기에 좋은 세상 것을 담은 상태입니다. 악은 이로부터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죄악이 가득 차기까지 기다리신다는 말씀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대신 세상 것들을 마음에 담은 자들의 행위로 나타나는 악이 넘쳐날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게 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모리 사람들이 430년 동안 악을 자행하기를 기다리시는 동안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은 죄를 짓지 않았을까요? 마찬가지로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똑같이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 좋게 여겨지는 것을 마음에 담습니다. 똑같이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기간에 아브라함의 자손을 노예로 살게 하십니다.
노예는 자기 눈으로 보기에 좋은 것을 마음에 담을 수는 있어도 그것을 얻기 위해 말하고 행동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노예로 사는 기간이 무려 430년입니다. 430년이면 조선 시대 500년과 가까운 시간입니다. 바벨론 같은 대제국도 고작 150년 지탱된 것을 생각해 본다면 엄청난 시간을 노예로 지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긴 기간을 통해서 눈에 보이는 대로 세상의 좋음을 마음에 담고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람이나 희망조차 사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노예는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을 마음에 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애굽 생활 초기에는 여전히 그러한 경향을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애굽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좋은 것들을 마음에 담고 ‘나도 저랬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노예 생활이 200년 300년을 지나가면서 눈에 보이는 좋은 것을 마음에 담는 것 자체가 의미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마음에 담아도 그것을 이루기 위해 아무것도 시도할 수 없기에 마음의 고통만 커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눈에 보이는 좋은 것을 마음에 담는 것 자체를 포기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430년이라는 긴 기간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러한 모습이 나타나기를 바라셨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을 마음에 담고 말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민족이다.’라는 것을 깨닫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큰 흑암과 두려움으로 임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이 세상은 흑암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눈으로 밝히 보며 세상에서 좋은 것들을 마음에 담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며 삽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똑같이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참된 복을 주시기 위해서 고심 끝에 하나의 절차를 만드십니다. 그것이 바로 430년 동안이나 지속되는 노예 생활입니다. 당시 가장 강력한 나라인 애굽에 들어가서 노예로 살게 하심을 통해 이 세상을 향해 눈이 밝아져서 좋은 것을 자기 마음대로 담는 일조차 못하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에게는 이 세상 전체가 눈으로 봐서 좋은 것을 고를 수 없는 흑암이 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라는 말씀에는 바로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무서웠을 것입니다. 새카만 흑암이 임하는데 그 흑암이 자신의 자손들을 덮어버릴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죄악을 쌓아갈 수 없게 묶어버리십니다. 죄가 활성화되지 못하게 아예 가두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14절을 보면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카만 흑암이 덮인 상태에서 눈이 밝아지려야 밝아질 수 없는 430년의 노예 생활을 사는 동안에 애굽이라는 나라는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하늘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이들이 노예 생활을 하던 430년 동안 애굽은 견고할 것이며 강력함을 유지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애굽보다 더 좋고 강력한 나라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오셔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가장 강력하게 느끼는 애굽과 바로를 초토화하십니다. 이로부터 흑암 속에 묻혀있던 아브라함의 자손들의 눈에 여호와 하나님이 밝은 조명을 받으시며 나타나게 됩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에서 아브라함이 영광의 하나님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일이 아브라함의 모든 자손에게도 일어나기를 바라셨습니다. 이것을 위해 이 세상에 대해서는 새카만 흑암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430년의 노예 생활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좋음을 찾으려야 찾을 수 없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430년의 노예 생활 끝에, 그 어둠을 뚫고 하나님께서는 초강대국 애굽을 멸절시키심을 통해 영광의 하나님으로 드러나십니다. ‘너희는 430년 동안 좋음을 찾기를 포기했다. 이제 진짜 좋음이자 참 복으로 나를 제시한다.’라고 자신을 드러내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만이 유일한 참 복임을 안 자들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선민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참 복인 하나님을 가지게 하시고 누리게 하심을 통해 만족과 기쁨 가운데 살게 하시고자 합니다. 이러한 과정에는 하나님의 고군분투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복 주시기가 이렇게 어렵습니다. 430년 동안 선민들을 흑암 속에 가두시고 세상에서는 좋음을 볼 수 없도록 노예로 묶어버리십니다. 선민의 노예 생활은 진짜 복을 받을 수 있는 준비 과정입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는 흑암이 되어 좋음을 찾을 수 없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광 됨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참 복이며 참 좋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고 나서도 죄의 기질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광야에 나간 선민들은 하나님이 유일한 참 복이라는 아브라함과 같은 마음가짐을 지켜내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는 430년의 흑암이 십자가로 압축되어 날마다 생활화할 수 있도록 제시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 생활을 하던 430년 동안 흑암에 갇혀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는 자기 눈으로 밝히 보면서 좋다고 하는 것을 선택하고 붙잡을 수 없었습니다. 이 어둠이 예수님의 십자가 안으로 빨려 들어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였고,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짐을 통해 430년 동안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임했던 흑암을 이 세상에서 일상적으로 생활화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는 눈이 멀어서 이 세상에 대해서 좋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볼 수 없고 찾을 수도 없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부활하여 하늘에 올라간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좋음을 찾아야 하고 채움이 필요한 내 마음의 눈은 육체의 눈과 연결되지 않고 오직 십자가 흑암 속에 갇혀 있다.’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는 430년의 노예 생활을 담고 있는 이 세상을 향한 흑암입니다. 아브라함은 환상 가운데 이 흑암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 후손이 430년간 이방 나라에서 노예로 살아야 된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예언으로 들었을 때 이것이 과연 축복으로 받아들여졌을까요? 이것이 축복으로 받아들여지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모르셨을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셨음에도 이렇게 하실 수밖에 없는 이유는 죄악의 기질이 그만큼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눈이 밝아져서 좋음을 찾고 마음에 들여놓는 일이 불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흑암이라는 압력밥솥으로 인격을 쪄내야만 됩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는 좋음을 보려야 볼 수 없어야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좋음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17절을 보면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반으로 가른 짐승 세 마리와 비둘기 두 마리로 하나님과 계약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400년간 노예살이를 하리라는 예언적 축복을 내리신 후에 횃불의 형태로 나타나셔서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십니다. 이것이 쌍방의 계약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맺은 계약은 아브라함이 자기의 의무를 다함으로써 준수될 수 있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혼자 이루시는 계약이었습니다.
6절에서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은 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계획들을 이루어 가실 것을 믿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계획하시는 하나님이 절대로 자기에게서 떠나지 않겠다고 하신 약속을 믿었습니다. 1절에서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라고 말씀하셨던 것과 같습니다. 이 계약을 맺는 아브라함의 마음은 하나님께 가서 달라붙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은 하나님과 한편이 된 상태에서 자기 몸으로 이루어지는 생애를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고 있습니다. ‘저기 있는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의 생애 동안에 내가 마음으로 붙어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이 다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계약은 쌍방 계약이 아닌 일방적인 계약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이 하나님께 붙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마음이 하나님께 붙은 상태에서 마음과 분리된 몸으로 사는 생애를 바라봅니다. ‘하나님! 저 몸으로 사는 사람의 생애에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다 이루시옵소서. 저 사람의 사정 같은 것은 보지 마시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만 이루시옵소서.’라고 제삼자의 일처럼 여겼던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아니면 자기의 후손이 430년 동안 이방 나라의 노예로 살게 되리라는 말씀을 축복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430년 노예의 삶은 이 세상을 향하여 눈에 보이는 대로 좋음을 선택하여 마음에 담을 수 없는 흑암으로 덮인 삶이었습니다. 이것은 죄인이 진짜 축복이자 참된 복인 하나님 자신을 갖고 누릴 수 있기 위해 반드시 앞서서 일어나야 하는 조건입니다. 이 조건을 이루시는 일이 하나님께는 너무나 버겁습니다. 그 이유는 출애굽 한 이스라엘 민족으로부터 잘 드러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430년의 흑암이라는 압력밥솥에 넣고 인격을 찐 후에야 노예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런데 광야에 나오자마자 다시 죄가 활성화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한 20세 이상의 성인이 전부 죽을 때까지 광야를 맴돌게 하십니다.
선민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을 누림에 그 존재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도 선민입니다. 온전하지 못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하나로 살겠다고 결심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선민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선민은 복을 누리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복을 누리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죄 때문에 복을 제멋대로 생각합니다. 복이란 결국 내 마음을 채워줄 수 있는 좋음입니다. 가지면 만족을 주는 좋음이 복입니다. 죄에 찌든 상태에서 복을 제멋대로 생각하는 체질은 430년 간의 노예 생활이라는 흑암의 압력밥솥에 넣고 쪄내도 죽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서 끊임없이 좋음을 찾고 바라면서 마음에 담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세상 것들을 눈에 보이는 대로 선택하여 마음에 담음으로써 인격 전체가 부패하여 썩은 시체 덩어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 동안 노예로 있을 때는 죄악을 저지르고 싶어도 저지를 수 없었습니다. 마음에서 무엇인가 좋다고 여기는 것조차 사치라는 것을 알았고, 가지려야 가질 수 없었기에 괴롭기만 했습니다. 적어도 노예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좋다는 생각을 가질 수도 없었습니다. 진짜 흑암을 이루기 위해 430년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그 흑암의 압력밥솥에 넣고 찐 인격인데도 죄악의 기질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흑암의 압력밥솥에서 나오자마자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이스라엘 백성 전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습니다.
선민이 아니라면 참 복을 누리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의 주권적 소모품이라는 용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선민은 참 복을 누리지 못하면 이 세상에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선민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 됨을 참 복으로 삼고 마음속에서 유지해 나가기 위하여 생을 거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안 보이는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생을 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십자가를 붙잡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마음속에서 세상을 향한 흑암을 만들지 않으면 하나님은 볼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위대해서 한 말이 아닙니다. 선민이라면 마음이 영광의 하나님을 보는 복을 누릴 수 있어야만 됩니다. 이것을 하지 못한다면 선민의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다 죽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선민이냐? 너 같은 선민이라면 차라리 없는 편이 낫다.’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와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430년이라는 기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질 것인가도 잘 알고 계십니다. 선민들을 이 기간 흑암 속에 두시는 것은 하나님께도 힘드셨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셔야만 했습니다. 죄인에게 참된 복인 영광의 하나님을 마음으로 환하게 보는 것을 중단하지 않고 누리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도 버겁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면 내가 선택한 죄인들이 진짜 참된 복을 누리며 살 것인가?’를 생각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버거워하심을 보시다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430년 노예 생활이라는 흑암의 압력밥솥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노예 생활의 흑암이라고 하는 압력밥솥을 날마다 사용할 수 있고,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 바라보면서 이 세상을 향한 430년의 흑암을 만들어 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 도저히 좋음을 찾을 수 없는 흑암이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 흑암을 배경으로 영광된 하나님을 찬란하게 보는 일을 중단 없이 이어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아버지의 마음을 느낍니다. 죄인들에게 참 복을 누리게 하시려고 독생자가 이 땅에 내려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일까지 허락하신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가 깊이깊이 받아들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