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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

녹취문: 나 자신이 불쌍한 자기 연민을 찢어라_태승철 (창 16:1~16)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4.06.20|조회수128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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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나 자신이 불쌍한 자기 연민을 찢어라>의 줄거리 :

원치 않고 못마땅한 상황이 주어질 때 사람들이 보이는 태도 중에 자기 연민이 있습니다. 그렇게 못마땅한 처지에 놓인 자신을 자기 스스로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 자기 연민이 무서운 이유는 주변의 사람들과 상황과 심지어 하나님조차도 자기중심으로 판단하고 생각하고 이해합니다. 일종의 블랙홀로서 심각한 자기 중독 증세입니다. 사래와 아브람과 하갈의 태도가 뚜렷한 대조를 이루면서 나타납니다.

 

나 자신이 불쌍한 자기 연민을 찢어라

 

(창세기 16:1~16)

 

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

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6.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7.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8.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2.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14.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15.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16.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영광의 하나님을 늘 마음속에 바라보는 선민에게 자기 연민이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감정입니다. 나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는 자기 연민은 찢어버려야만 합니다. 본문은 많이 오해되는 부분 중 하나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로서 믿음을 지키지 못했다고 여깁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때와 방식으로 그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기다릴 수 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신뢰를 보이지 못했고, 스스로 약속을 이루려고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불신앙을 보였습니다. 그 결과 가정에 큰 불화가 생기고 이스마엘이라고 하는 선민의 영원한 대적이 생기게 되었다고 해석합니다. 실제로 지금도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이 전쟁 중인 것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해석은 그럴듯합니다.

그러나 본문이 과연 아브라함과 사라의 불신앙을 보여주는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 그리고 하갈의 태도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셨는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9절을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의 잘못을 분명히 지적하십니다. 반면에 아브라함과 사라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다. 사라가 잘못한 것이 있었다면 ‘네가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남편을 여종에게 들여보냈고 임신한 여종이 도망갈 정도로 핍박하였다.’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사라가 하갈을 핍박한 것에는 하갈이 임신한 것을 핑계로 주인을 멸시한 것에 원인이 있습니다. 하갈이 도망하였다는 것은 더 이상 여종이기를 거부하였다는 의미합니다. 말씀드렸듯이 이러한 일련의 상황에서 아브라함과 사라의 행실은 일반적으로 비난을 받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사라와 하갈의 태도를 각각 살펴봄을 통해 본문의 핵심을 확인해 봅니다.

 

먼저 하갈의 태도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갈은 자기 여주인 사라의 학대를 피해서 도망을 가다가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 돌아가서 네 여주인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의 잘못된 행실에 대해 질책만 하셨던 것이 아니라, 아들이 태어나면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을 지을 것이며 그가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는 말씀을 주십니다. 이 내용만을 보자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대단한 약속이라고 여겨집니다. 이에 하갈은 위로를 받고 돌아갑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부분은 13절입니다.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하갈의 태도가 잘 드러납니다. 아브라함은 영광의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한편 하갈은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하갈에게는 여전히 영광스럽게 보이는 존재는 자기 자신입니다. 하갈은 ‘영광의 하나님’을 본 것이 아니라 ‘영광의 나’를 본 것입니다.

영광이란 그 말대로 영화로운 광채입니다. 다시 말해 내 마음에서 일등을 한 상태의 대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갈이 영광 중에 보고 있는 대상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입니다. 그런데 하갈은 자기를 불쌍한 처지로 보고 있습니다. 하갈이 도망친 이유는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의 아기를 가진 자기는 그런 대우를 받을 사람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이처럼 하갈은 자기를 보고 있었고, 자기에게 마땅한 상황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주어진 상황은 하갈의 바람과는 다릅니다.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그러한 상황에 있는 자기를 불쌍하게 여긴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에 대해 연민을 드러내는 중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돌아가라는 명령과 함께 네 씨가 번성하게 되리라는 약속을 받습니다. 하갈은 이로부터 큰 위로를 받고 하나님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어서 14절을 보면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라고 하였습니다. 브엘라해로이의 뜻을 직역하면 ‘살아계셔서 지켜보시는 자의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은 자신을 향하지 않고 온통 하나님을 향해 있습니다. 이렇게 비교하면 아브라함과 하갈의 태도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전에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사랑하시며, 모든 것을 앞서서 생각하시며, 이끌어 가신다.’라는 말씀을 여러 차례 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갈은 하나님께서 바로 그런 분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그런 분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사실을 반복하여 기억하는 하는 이유는 나를 잊고 하나님만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나 자신에 대한 염려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사랑하시며, 모든 것을 앞서서 생각하시며, 이끌어 가시기에 내가 나를 염려할 필요도 없고 나를 불쌍히 여길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는 스스로 있는 자로서 있게 된 만물을 향하여 갖고 계신 생각입니다. 단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나 자신에 대한 염려나 연민에서 벗어나야만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연민에 빠진 사람은 ‘이런 처지가 나에게는 마땅치 않다.’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나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나의 대적과 같다.’라고 여깁니다. 이게 자기 연민에 빠진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갖는 특징입니다.

이러한 자기 연민은 함정입니다. 블랙홀처럼 내 곁의 사람들과 하나님까지도 다 끌어들여서 나 중심적으로 해석을 하게 됩니다. 주변 사람들의 존재 의미, 하나님의 존재 의미를 나 중심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면 나를 불쌍히 여길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사랑하시며, 모든 것을 앞서서 생각하시며, 이끌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자기 연민은 ‘나는 이 정도 상황은 누릴 만한 존재다.’라고 생각하는데 그러한 상황이 주어지지 않을 때 보이는 태도입니다. 어떤 사람은 분노하고,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이것도 결국 자기 연민의 반응입니다. 이처럼 내가 나를 불쌍히 여김에는 주어진 상황에 대한 억울함이 밑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나는 이런 대우를 받을 사람이 아니다. 나를 이렇게 대우하는 모든 사람들은 다 악하다. 세상은 잘못 됐다.’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자기 연민은 무섭습니다. 결코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갈에게서 드러나고 있는 태도입니다.

 

하갈은 자기 연민을 품고 있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고 계시고 사랑하신다는 점에서 지극히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하갈의 마음은 하나님을 만나고도 여전히 자기를 떠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자기 연민의 특징이 여기에 있습니다. 마음을 나 자신에 대한 관심의 테두리 안에 가둡니다. 한편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영광의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을 보고 객관적으로 나 자신을 떠나서 마음이 가야 할 대상으로 하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에게는 자기 상황의 좋고 나쁨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이처럼 영광의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께 빠졌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빠지는 자기 연민과는 전혀 다른 상태입니다.

자기 연민의 결과는 분노나 원망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자기주장으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빠진 상태를 신파조로 바꿉니다. 흔히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억지로 눈물을 강요하는 상황을 신파라고 부릅니다. 신파는 억지로 눈물을 강요하는 창작 방식입니다. 자기 연민은 아주 심각한 자기 중독입니다.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얘기하면 안 됩니다. 멋진 하나님, 너무 좋은 하나님이라면 보고 있어도 또 보고 싶어야지, 그 하나님이 나를 보고 있음에 위로를 받고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고 있는 나, 하나님이 살피시는 나’를 생각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에 대한 가치를 증대시키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오히려 불교적 영성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동원해서 나를 더 키웁니다. 내 안에서 자아의식을 팽창시킵니다. 세상에 대해서 죽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살피시는 나는 이 세상에서 특별한 사람이고 가치 있는 사람임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태도는 전혀 달랐습니다. 아브라함은 영광의 하나님을 보면서 자기를 잊었습니다. ‘하나님이 굉장하다! 하나님이 놀랍다!’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하갈이 ‘나는 하나님이 소상하게 계획하고 살피실 만큼 놀라운 사람이다.’라고 여겼던 것과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까?

 

아브라함을 하갈과 비교하여 살펴보았듯이 사라도 하갈과의 비교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흔히 본문은 하나님께서 하갈을 사랑하셔서 자비를 베푸셨음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해석합니다. 쉽게 말해 하갈의 억울함을 하나님이 풀어주셨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연히 아브라함과 사라는 불신앙적인 태도로 하나님의 약속을 자기들의 꼼수로 이루려 하다가 가정에 불화를 초래하게 되었다고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보았던 하갈과 ‘영광의 하나님’을 보았던 아브라함의 태도의 차이를 알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라의 태도를 봅니다. 2절을 보면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출산을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사라의 경수가 끊어짐으로 단산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에 사라는 여종 하갈을 남편에게 들여보내 양자를 얻고자 합니다. 그런데 하갈은 임신하지 못하는 사라를 멸시하게 되었고 이에 대해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호소합니다. 5절을 보면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라는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라가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고 있다면 왜 여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들여보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거듭하여 자손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12장, 13장, 15장에 기록된 약속의 내용을 보면, 아브라함의 몸에서 태어날 자가 상속자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사라가 낳은 자식이 상속자가 되리라는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사라는 이러한 약속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 사라는 경수가 끊어지고 아기를 가질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라는 자기 연민을 가질 만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라의 태도는 달랐습니다. 오히려 남편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에서 자기를 조용히 제외합니다. 자기를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약속은 10년 전부터 하시더니 경수가 끊어지도록 자식을 주시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면 도대체 나는 어쩌라는 것입니까?’라고 자기의 처지를 호소하며 간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같으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라는 조용히 자신의 단산을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볼 때 자꾸 기적을 염두에 둡니다. 기적을 바라는 이유는 지금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라는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자신을 단산시키셨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에서 단산이 이루어졌다고 한다면 하나님께 그 주권의 반대 방향으로 기적이 일어나기를 간구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씨가 사라를 통해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권리처럼 생각합니다. 내 인생이 예외적이고 특권적이기를 바라는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뻔히 알면서도 예외적인 하나님의 능력이 동원됨으로써 기적적으로 무슨 일이 이루어지리라는 생각을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사라 또한 영광의 하나님을 늘 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본다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몸에 병이 났습니다. 먼저 병이 난 몸을 보고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통해 병이 낫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 병의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 다 알고 계셨습니다. 정확히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병이 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 병을 고쳐 달라는 간구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병을 고쳐 달라는 간구가 나온다면 그만큼 하나님을 마음에서 보고 있었던 적이 없다는 방증입니다. 병이 시작되었던 시점부터 하나님이 보고 계셨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도 않으며, 하나님의 주권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병이 나자 내 주권을 가지고 하나님의 능력을 동원하려 할 뿐입니다.

사라는 그러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단산에 대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는 자식을 주지 않으셨음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2절을 보면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의 관습대로 하면 남편이 여종에게서 낳은 아이도 주인의 아이입니다. 그렇기에 사라는 자기가 아이를 못 낳는 것을 따지려 하지 않고 여종을 통해 아이를 얻으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애초에 후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구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 스스로 몇 번이나 약속하셨음에도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는 자식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한편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에서는 곧바로 아기가 생겼습니다. 이렇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자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부부에게는 자식을 안 주시고, 남편과 여종과의 관계에서는 곧바로 아기를 갖게 하시니 사라는 하나님을 탓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먼저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일어난 일을 빼버립니다. 우리 수준으로 아브라함과 사라에 대해 생각하면서 ‘왜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임신하게 하실 것을 믿지 않았느냐?’라고 생각합니다. 이제까지 진행되어 온 모든 일은 물 샐 틈 없는 하나님의 주권과 의지와 의도에 의한 일이었습니다. 사라가 임신하지 못한 것도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에 대해 ‘하나님, 이건 아니잖아요. 제가 바라는 대로 해주세요.’라고 간구하는 것은 믿음에 대한 착각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염두에 둔다면 어떻게 ‘병 낫게 해주세요. 경제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라고 다짜고짜 하나님의 의도의 흐름과는 반대 방향의 기도를 감히 드릴 수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아브라함은 늘 하나님을 보고 있었습니다. 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과 사라의 태도는 하갈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갈은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이러한 태도는 여전히 자기가 중심입니다. 나에 대해서 이러한 태도를 보이시는 하나님이기에 대단하시고 훌륭하시고 감사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부 하갈처럼 자기 연민의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나는 10에 해당하는 대우를 받을만한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3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억울하고 불쌍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연민으로 하나님을 부릅니다. 내가 나를 불쌍히 여기듯이 하나님도 나를 불쌍히 여겨야만 진짜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나를 잊어버릴 정도로 하나님을 좋아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영광의 하나님을 보았고 자기를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사랑하시며, 모든 것을 앞서서 생각하시며, 이끌어 가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하는 이유는 자기 연민으로부터 빠져나와야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함정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상 삶에 대해서 완전히 잊어버리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마엘을 태어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었습니다. 사라가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들여보낸 것도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이로부터 이스마엘이 태어나는 것도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을 보고 있었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있었음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사라의 경수가 끊어진 후에는 이들이 당대의 관습을 따를 것도 아셨습니다.

이스마엘을 주신 것에는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육체의 씨를 받아 태어났다고 해서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났어도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한 자들만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이지, 아브라함의 혈육을 계승했다고 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마음으로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들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 믿음에 근거를 두고 있는 자들이라는 것을 이삭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스마엘의 출생을 통해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 31절에서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라고 육체의 자손과 약속의 자손을 구분합니다. 세례 요한 또한 마태복음 3장 9절에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비롯한 이스라엘 귀족층들을 향해 이 독사의 자식들아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는 자들이 선민이지, 혈육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자들이 선민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려면 이 세상에 대해서 나를 포함하여 나의 몸으로 만나는 세상 것들을 흑암 속으로 밀어 넣어야 합니다. 나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는데 내가 나를 불쌍히 여길 이유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태도를 봅니다. 사라가 ‘여호와 하나님이 나에게는 자식을 주시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손이 번성할 것이라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주권을 생각하고 자손에 대한 약속을 염두에 둔다면 나는 제외된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이라면 받아들이겠다. 내가 당신의 아이를 낳을 수 없음은 속상하지만 이제까지 주권적으로 빈틈없이 나의 삶을 이끌어 오신 여호와께서 아이를 주시지 않았으니, 당신을 통하여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나는 제외된 자다’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 태도와, 아기를 가졌다고 감히 그럴 수 없는 시대상을 뛰어넘어서 자기 여주인을 멸시하고 임신했음에 교만의 근거를 확보한 하갈이 도망을 갑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만났다고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 하나님이 나의 처지를 알고 계신다. 나에게 도움을 주시고 나에게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이다.’라고 자신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러한 하갈의 태도는 사라의 태도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하갈은 이 세상 상황에서 자기에게 주어지지 않은 부분에 대하여 하나님이 보충해 주시는 분으로 여겼습니다. 내가 나를 불쌍히 여기듯이, 하나님도 나와 같은 마음으로 나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굉장히 좋은 믿음이라고 착각해 왔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보며 나를 잊기보다는 나를 불쌍히 여기고 나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을 찾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볼 것이냐는 것입니다. 나를 지켜보시는 하나님만 생각한다면 결국 나를 보는 것에 불과합니다. 나를 도와주시는 하나님만을 찾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모든 종교인이 갖는 마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지켜보십니다. 여기까지는 하갈의 말대로입니다. 나에 대해서 다 알고 계십니다. 나를 사랑하십니다. 모든 것을 고려하여 생각하시고 이끌어가십니다. 그렇다면 나는 나를 잊어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나에 대해 관여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나를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대신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나를 포함한 이 세상 전체에 흑암으로 덮어버릴 수 있어야 됩니다. 흑암을 배경으로 하나님만이 조명을 받으시고, 내 마음에 보일 수 있도록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몸으로 대하는 처지가 불쌍하게 느껴진다면 그럴 필요 없습니다. 단산하게 된 사라는 조용히 하나님의 이 세상에 대한 계획과 약속과 축복으로부터 자기를 제외합니다. 자기가 받을 축복보다 하나님의 계획과 주권이 우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라에게는 자기 연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의도와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렇기에 자손의 번성을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자기를 조용히 제외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사라를 통해서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자손들의 계보를 시작하십니다.

남편에게 임한 축복의 약속이지만 하나님의 주권이라면 자기 스스로를 제외하는 사라의 믿음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반대로 하갈은 당시 관습상으로 자기가 낳은 아이가 여주인의 아이가 될 것임을 알면서도 교만하여 사라를 멸시했습니다. 하갈이 도망한 이유도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자기를 여주인에게 복종할 처지로 여기지 않고 여주인 이상의 대우를 받아야 할 존재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고 약속을 받았지만 여전히 자기 연민의 처지를 뛰어넘지 못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보았다면 ‘나는 이제 낳을 아이가 여주인의 것이 될지라도 하나님으로 기뻐하겠다.’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갈은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사라에게 아이를 주시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었습니다. 사라가 시대 상황을 고려하여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갈에게 들어갈 것을 권한 것도 하나님의 주권이었습니다. 하갈이 임신한 것도 하나님의 주권이었고, 사라가 하갈의 주인으로서 하갈에 대한 태도 또한 하나님의 주권이었으며, 하갈이 도망한 것도 하나님의 주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후손을 얻으려고 꼼수를 쓴 것이었다면 하갈을 쫓아내지 못하게 했을 것입니다. 자기 아기를 가진 여자를 도망하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한 사라를 타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꼼수를 통해 자손을 얻겠다고 수를 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의 주권으로 보고 자기 삶에 대해서는 죽은 자의 의식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동침하여 아기를 낳을 것을 요구했을 때도 아브라함은 주체적으로 행동했던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이것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구나.’라고 여겼을 뿐입니다.

이것은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상태에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모든 일을 하나님의 주권으로 여길 수 있고,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마음의 시선을 향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축복된 약속일지라도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제외된다면 그렇게 하면 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당신을 가지라고 선택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가지면 충분합니다. 하나님을 갖기 위해 약속으로부터 자기를 제외하는 사라의 태도를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태도가 사라를 영광의 하나님을 보는 선민들의 어머니가 되게 하였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보여준 태도는 결코 불신앙이 아닙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브라함과 사라와 하갈의 태도로부터 우리의 태도를 분명히 할 수 있기 위하여 오늘도 삶의 현장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아야 될 이유를 더욱더 강력하게 마음에 새길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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