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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

녹취문: 마음의 포피인 오감각 할례의 해방감_태승철 (창 17:1~14)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4.06.22|조회수120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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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마음의 포피인 오감각 할례의 해방감>의 줄거리 :

전능한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신 뒤에 곧바로 아브람의 장막에 거하는 모든 남자의 할례를 명하십니다. 할례는 그러므로 완전함의 상징입니다. 이 완전함이란 무엇일까요? 완전함이란 채움을 통해 만족함에 도달해야 하는 마음이 이 세상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상태입니다. 즉 시청후미촉 오감각으로부터 마음이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례는 결국 마음에 포피처럼 덮여 있는 시청후미촉 오감각을 십자가로 베어내는 일이지요.

 

마음의 포피인 오감각 할례의 해방감

 

(창세기 17:1~14)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3.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1.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12.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13.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본문에서 말씀하신 할례 언약의 근본 취지를 따라서 내 마음을 뒤덮고 있는 포피인 오감각을 제거해버리면 우리는 당장이라도 해방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8장 36절에서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었다면 우리는 마음에 해방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해방감은 구원의 증거이고, 내 마음을 뒤덮고 있는 포피가 제거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뒤덮고 있는 포피란 육체의 오감각입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오감각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시청후미촉’이라고 줄여서 이야기해 봅니다. 할례란 아기가 태어난 지 팔 일 만에 포피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포피(包皮)라는 말 자체는 포위하여 덮고 있는 껍데기입니다. 이 껍데기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죄와 저주의 상태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앞서 우리는 눈이 밝아졌음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눈은 시청후미촉으로 구분되는 오감각의 대표입니다. 죄와 저주의 상태에서는 눈만 밝아진 것이 아닙니다. 소리를 듣는 청각이 밝아졌고, 냄새를 맡는 후각이 밝아졌고, 맛을 보는 미각이 밝아졌고, 만져서 느끼는 촉각도 밝아졌습니다. 죄와 저주의 상태는 시청후미촉으로 오감각이 마음을 뒤덮은 포피를 이루고 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비어있게 만드셨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기 때문에 자기 있음을 느끼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대상의 존재감을 느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 다른 존재를 느낌으로써만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마음의 공백이 채워지기 위해서는 좋다고 믿어지는 것들을 계속해서 흡입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작용이 일어나야 할 마음이 시청후미촉의 오감각으로 덮이게 되었습니다. 이제 사람은 오감각으로 접하는 것들 중에서 존재감을 느끼고 좋음을 찾아서 마음을 채우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죄와 저주의 상태에 놓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갓 태어난 아기의 고추에 비교하시며 할례의 언약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아기의 고추에서 포피를 자르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덮고 있는 포피를 잘라내는 것이 할례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포피를 잘라내는 일이 일어나야 함을 눈에 보이는 징표로 새기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아기가 태어난 지 팔 일 만에 행하는 할례 의식입니다. 13절을 보면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약의 표징을 살에 두었다는 것은 마음에서 오감각의 포피가 제거되어야 함을 잊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2장 11절에서 할례의 취지를 그대로 살려서 말하기를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육의 몸을 벗는다는 것은 몸이 죽을 때 영이 떠나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닌 육체의 특징을 벗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육의 특징은 시청후미촉의 오감각입니다. 마음에서 이것을 벗어버리는 것을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하며 예수님과 연합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결국 이 세상 좋음에 대해 죽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것들은 시청후미촉 오감각을 통하여 마음과 연결됩니다. 마음의 관점에서 보자면 시청후미촉이라는 다리를 통해 이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것들을 추구해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아기의 포피를 칼로 베듯이 십자가를 칼로 삼아 우리 마음을 덮고 있는 오감각이라는 포피를 제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몸에서 오감각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오감각이라는 포피가 제거되어야 할 대상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럴 때 마음은 십자가 예수님과 연합한 상태에서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채움을 위하여 좋음을 추구합니다. 자신의 존재감을 위해서 타자의 존재감을 필요로 합니다. 다른 존재를 통해 내가 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갈 때 이러한 마음의 기능은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면서 존재감을 갖습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을 통해서 나의 존재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비어있는 마음을 하나님으로만 채우고자 하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는 마음의 포피인 오감각을 제거하는 할례입니다. 이 할례가 일어남으로써 마음은 하나님을 직면하는 구원의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는 할례는 무척 중요한 사건이며 아브라함 자손들의 특징입니다. 시청후미촉 오감각을 마음에서 분리하고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갖게 되는 가장 공통적이고 가장 우선적인 특징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자손의 특징인 할례를 말씀하시는 장면을 봅니다. 10~11절을 보면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의외의 내용이 등장합니다. 12절을 보면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라고 말씀하셨고 할례를 받지 않는다면 백성들 중에서 끊어지리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앞서 할례는 아브라함의 자손들과 하나님 사이에 맺어지는 언약의 표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표징을 아브라함의 피를 받지 않은 돈으로 산 노예들에게까지 다 적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는 무척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으로 할례를 말씀하실 때부터 선민이 어떤 존재인지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십니다. 선민이란 단지 아브라함의 피를 물려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노예를 막론하고 할례를 받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아브라함의 자손들과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언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의 자손은 단순히 아브라함의 몸에서 태어난 자가 아니라 할례를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에 새긴 할례의 의미는 마음의 할례를 말하는 것입니다.

 

할례는 남성에게 행해지는 의식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여성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아기가 태어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받는 모습을 보면서 그 할례의 의미를 마음에 새길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 여성은 남편 혹은 자식에게 예속된 존재였습니다. 여성은 남편이 할례받는 것을 보고, 자기가 낳은 아기가 팔 일 만에 할례받는 모습을 보면서 할례의 취지를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로마서 2장 29절에서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율법 때문에 몸에 할례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음을 덮고 있는 시청후미촉 오감각을 끊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사람의 마음은 비어있어서 좋음을 추구하여 채워지고자 합니다. 그런데 시청후미촉 오감각이 덮인 상태에서는 절대로 하나님을 좋음으로 추구할 수 없습니다. 오직 육체의 오감각을 통해 접하게 되는 세상 것들만을 좋음으로 추구할 뿐입니다. 이것이 죄와 저주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할례를 행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여성은 물론이고 이방인도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할례를 이야기한 것은 사도 바울이 처음이 아닙니다. 이미 신명기 10장 15~16절에서 마음의 할례에 대한 언급이 등장합니다.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 /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라고 하였습니다. 목을 곧게 하지 말라는 것은 마음에서 좋음을 추구하는 일을 오감각의 포피에 쌓인 상태에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과 창조주 하나님의 의도는 인간들로 하여금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금욕주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쁨을 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만 참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좋음으로 채워야만 합니다. 그런데 목이 곧다는 것은 기쁨을 누리기 위하여 채움을 추구할 때, 죄와 저주에 덮인 오감각의 포피를 잘라내는 마음의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모세만 이러한 이야기를 했던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서 4장 4절을 보면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 또한 여호와께 속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포피를 베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할례에 대한 문제는 이처럼 구약시대부터 이미 이야기되고 있었습니다. 에스겔서 44장 9절에서도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있는 이방인 중에 마음과 몸에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은 내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 세계의 기독교인 중에서 팔 일 만에 아기의 포피를 베듯이, 자기 마음에서 오감각의 포피를 잘라내지 않으면 아무리 종교 생활과 예배당 생활을 열심히 하더라도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끊어진 채로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알았다면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려서 마음을 뒤덮고 있는 시청후미촉 오감각의 포피를 예수님의 십자가로 잘라내야 합니다. 그 잘라낸 증거는 하나님만을 원함으로 나타납니다. ‘되는 일도 없고, 건강도 안 좋지만 나는 하나님으로 만족하기를 원한다.’라고 스스로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확인할 수 없다면 감히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토록 마음의 할례에 대해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예배당 생활을 함에 있어서 마음의 할례를 조금도 염두에 두지 못했습니다. 시청후미촉 오감각이 마음을 덮어버린 상태를 방치했던 것입니다. 이방인과 똑같이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것들을 추구하면서도 구원받았다고 떠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14절에서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라고 말씀하셨고 에스겔서에서도 “…마음과 몸에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은 내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의 핏줄이 아닌 마음에서 시청후미촉 오감각의 포피를 제거한 자들입니다. 이는 곧 마음의 좋음이 오감각을 따라가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마음은 오직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만을 좋음으로 추구합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상태이고 두려움과 떨림으로 이루어야 할 구원의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장막에 거하는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표로 아브라함만 받아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장막에 거하는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으라고 하십니다. 이는 곧 결혼하는 모든 여자와 아들을 낳는 모든 어머니들도 할례의 의미를 마음에 새길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본문을 이해함에 있어서 할례라는 언약의 징표를 만드신 하나님의 근본 취지를 염두에 둘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1절에서 잘 드러납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할례의 언약을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라는 말씀대로 할례는 완전함의 상징입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으면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학자들은 이 완전함을 자꾸만 윤리적 도덕적 완전함으로 연관시킵니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이 하갈을 첩으로 들인 것도 완전하지 못한 것이었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브라함이 하갈을 첩으로 들인 것이 윤리적인 관점에서 봐야 할 사건이 아님을 살펴보았습니다. 하갈이라는 인물을 드러냄으로써 아브라함과 사라와 하갈의 마음 상태를 비교해 볼 수 있었습니다.

하갈은 하나님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다시 말해 ‘나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으로서 늘 마음에서 지켜봐야 할 하나님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께 붙인 이름대로 하나님과 관계하였습니다. 이로부터 하나님이 요구하신 완전함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행함이란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하는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함이 완전함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아브라함과 사라와 하갈의 마음 상태를 비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한다는 것은 언뜻 생각하면 하나님이 다 지켜보고 계신다는 뜻으로 여겨집니다. CCTV로 감시하듯 하나님이 지켜보고 계시니까 그에 합당한 행동을 하라는 식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너무나도 뒤틀리고 왜곡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감시자가 아닙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라는 말씀에 대해 소위 ‘코람데오(Coram Deo)’라고 하는 ‘하나님 앞에서’ 혹은 ‘신 앞에서’의 의식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고 계시는 감시자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감독과 하수인의 관계가 됩니다.

다만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세상에 하나님이 지켜보시지 않으시는 피조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 29절에서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고, 6장 28절에서는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라는 말씀을 단순히 하나님이 지켜보신다는 뜻으로 이해한다면 이것은 굳이 선민이나 아브라함에게만 하실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아니고 선민이 아니라더라도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지켜보십니다. 하나님 앞이 아닌 다른 곳에서 존재하는 대상은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라는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라는 부분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전능한 하나님이란 스스로 있을 뿐만 아니라 있게 된 모든 것들을 있게 한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전능함의 능력은 있게 하심에서 나타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능력은 없는 것을 있게 하는 것입니다. 전능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있게 하신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은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냄새도 맡을 수 없고, 맛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습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행하라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마음에서 첫 번째 대상으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말씀을 하신 후에 할례의 언약을 주십니다. 사람은 시청후미촉 오감각으로 다양한 대상들을 마주합니다. 그리고 마음은 그 대상들에게서 좋음을 찾고 그것으로 채워지고자 합니다. 이 상태는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상태가 아닌 세상 것들 앞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마음이 시청후미촉 오감각을 초월해 계신 하나님을 먼저 만날 수 있을까요? 마음에서 하나님을 먼저 만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대답을 할례 언약을 통해 제시하십니다.

 

사람은 오감각이 있고 마음이 있습니다. 오감각으로 붙잡는 것을 마음이 따라가면서 대응하고 반응하면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보고 계시지만 하나님 앞에서 행함이란 단순히 그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은 육체의 오감을 통해 사라의 존재를 느낄 수 있습니다. 마음이 오감각에 덮여 있는 상태에서 사라를 마주한다면 사라 앞에서 행하는 것이 됩니다. 마음이 오감각을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함이 되기 위해서는 마음이 하나님을 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냄새 맡을 수 없고, 맛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습니다. 이처럼 오감각을 초월해 계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마음을 덮고 있는 오감각을 잘라내야만 합니다. 오감각을 잘라낼 수 없다면 마음이 하나님을 제일 먼저 만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라고 말씀하신 뒤에 할례 언약을 주십니다.

이것이 이치에 맞는 이유는 있게 된 모든 것들은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있게 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있게 된 것들을 관계하려면 있게 하신 주인 하나님을 먼저 만나서 허락을 받아야 됩니다.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사라를 있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인이신 사라에게 말을 하려면 주인에게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내 아내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 내가 지금 이런 말을 아내에게 하려고 합니다. 당신이 있게 하시고 목숨을 지탱하고 계신 아내에게 이 말을 해도 되겠습니까?’라고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이 무슨 말을 하려면 생각과 판단이 있어야 됩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면 ‘제가 아내에 대해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고 이런 말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라고 묻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자이십니다. 돈 문제가 생겼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전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돈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있게 하신 일입니다. 그렇다면 돈 문제에 대해서 내가 이런 생각을 해도 되는가 안 되는가를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곧바로 돈 문제에 손을 대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건강 문제나 자녀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다못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행하는 것조차 마음에서 먼저 대한민국을 붙잡는다면 하나님이 아닌 대한민국 앞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이치에 허락되지 않습니다.

내 앞에 있는 모든 것들은 전능하시고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것들입니다. 따라서 시청후미촉의 오감각으로 포착되는 것들에 대해서 내가 직접 관여한다면 절대로 완전할 수 없습니다. 완전하기 위해서는 마음에서 오감각이 포피를 이루고 있는 상태를 잘라내야만 합니다. 오감각의 포피를 잘라낸다면 마음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냄새도 없으며, 맛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으로만 채우게 됩니다. 마음의 만족과 기쁨이 하나님께만 있음을 알고 하나님만을 추구합니다. 이 상태가 완전함입니다.

우리 마음은 채워지려는 본성이 있습니다. 의식으로 하나님을 붙잡으면 마음은 저절로 의식이 붙잡은 하나님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기쁨을 원해야지, 내가 만족해야지.’라고 의식하는 게 아닙니다. 마음이 존재하는 방식 자체가 기쁨과 만족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사랑하겠다는 의식을 가질 때 마음은 저절로 하나님을 목표와 과녁으로 삼습니다.

이것을 분명히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은 기쁨과 만족을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들지 않는 관계를 이루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보면 마음은 채움을 위한 좋음을 추구하게 돼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의식이 어떤 대상을 과녁으로 삼느냐가 중요합니다. 마음이 오감각으로 덮여 있을 때는 의식이 이 세상에서 좋음을 찾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와 타락이고 불완전함입니다.

 

앞서 우리는 노아의 완전함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대로 좋음을 추구해서 고깃덩어리가 된 상태였습니다. 이와 대비되는 노아의 완전함이란 눈에 보이는 것들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좋음을 추구했습니다. 이처럼 완전함은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 이 세상 것은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에 포피처럼 덮고 있는 오감각을 잘라내야만 합니다. 그럴 때 마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 역사가 십자가 죽음의 역사입니다.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은 마음을 뒤덮고 있는 포피인 시청후미촉의 오감각을 잘라내는 것입니다. 본성적으로 채움을 원하는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그 흡입력으로 하나님만을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마음은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기를 바랍니다. 예를 들어 돈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럴 때 세상 사람들은 시청후미촉의 오감으로 접하는 대로 돈을 원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는 자는 마음의 흡입력을 돈을 향해 소모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마음의 흡입력을 저축합니다. 매 순간 예수님과 함께 죽는다는 것은 세상을 향하여 갖고 싶다, 하고 싶다, 보고 싶다, 가고 싶다, 먹고 싶다 등등의 ‘무엇을 하고 싶다’라는 욕구를 십자가로 저축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저축한 욕구를 모조리 하나님께로 향합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강하게 욕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겠다고 십자가로 매듭짓는 것이 완전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나면 시청후미촉의 오감각은 이 완전함에서 발생하는 기쁨과 만족과 하늘 기운이 뻗어나가기 위한 대상을 찾는 레이더가 됩니다.

이 말씀을 자주 드리는 이유는 그만큼 십자가 생활화의 핵심이 되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자체가 이 말씀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완전할 수 있는지를 할례 언약을 통해 가르쳐주십니다. 마음이 오감각과 분리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첫 번째 대상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하라는 것은 마음이 하나님과 첫 번째 대상으로 밀착하는 상태가 되라는 것입니다. 완전함이란 오직 그렇게 밀착한 하나님만으로 마음 채움과 기쁨을 추구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나의 만족과 기쁨을 위해서는 하나님 이외의 이 세상 것들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본문에서 할례의 언약이 의미하는 대로 죄와 저주의 상태에서 마음을 뒤덮고 있는 포피인 시청후미촉의 오감각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잘라내야만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로 마음의 할례를 행할 때 복음이 주는 해방감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마음이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냄새 맡는 것, 맛보는 것, 만져지는 것들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가 시청후미촉의 오감각을 잘라버리는 할례를 위한 칼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의식하고 십자가를 붙잡으면 정말로 예수님을 믿어서 느끼는 해방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시청후미촉의 오감각이 어떻든지 마음은 아무런 상관없이 하나님을 추구합니다. 이로부터 오감각은 하나님을 만난 기쁨을 발사하고 표현하는 대상을 포착하는 레이더로 작동하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주시는 진정한 구원의 자유가 주어지게 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생활화의 목표가 마음의 할례인 것을 분명히 의식하여, 내 마음을 뒤덮고 있는 시청후미촉 오감각의 포피를 날마다 매순간마다 벗겨버리는 할례의 연속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그럼으로써 오감각으로 포착하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기쁨이 표현되고, 하늘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뜻이 표현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해방을 가져다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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