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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

녹취문: 인간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우왕좌왕_태승철 (창 18:1~15)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4.06.27|조회수108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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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인간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우왕좌왕>의 줄거리 :

본문은 드디어 실제로 아들을 잉태하고 낳아야 할 때가 이르러서 나타난 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기적이 아니면 안 되는 상황에서 아들을 실제로 낳는 일이 벌어지게 하십니다. 왜 이렇게 오랫동안 실현을 유보하셨을까요? 약속의 아들임을 분명히 하시려고 그러셨나요? 그러나 말씀으로 약속에 따라 태어난 아들임을 명확히 밝히시면 되었을 일이 아닙니까? 아브라함 이야기 전체에 배어 있는 하나님의 우왕좌왕 하심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본문입니다.

 

인간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우왕좌왕

 

(창세기 18:1~15)

 

1.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3.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5.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6.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7.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8.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10.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5.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본문은 무척 인상 깊습니다. 드디어 25년 동안 약속만 해오시던 아들을 낳으리라는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질 시기가 임박했습니다. 아브라함은 1년 후면 아들을 낳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모습으로 두 천사를 거느리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영접을 받아 집안에 들어오셔서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한편 장막 뒤에서 이 이야기를 듣던 사라가 속으로 웃으며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라고 합니다.

앞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웃음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라가 웃습니다. 이 장면은 언뜻 불신앙적인 태도로 보입니다. 사라는 인간의 모습을 띠고 나타나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직접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14절에서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라는 말씀을 다시 하십니다. 이러한 문맥을 염두에 둘 때 사라가 정말로 불신앙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본문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오히려 사라의 믿음에 대해 의문을 품는 우리가 사탄의 언어체계 안에 있음을 염두에 둘 수 있어야 합니다.

 

제목에 ‘인간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우왕좌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임박했음을 말씀하시고 내년에는 사라가 아들을 품에 안을 것이라고 다시 한번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본문을 이해하기 편하도록 전체적 맥락을 떠올려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아들을 주신다는 약속의 실현을 오랫동안 유보하셨을까요? 약속의 아들임을 분명히 하시고 싶으셨다면, 이스마엘이 태어나기 전에 혹은 25년 전에 약속을 이루시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는 내 약속으로 태어난 아들이다.’라고 못을 박으시고 성장하는 동안 25년에 걸쳐서 계속 강조하시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지 않은 이유는 염려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전체에 스며들어 있는 하나님의 염려가 두드러집니다. 그 하나님의 염려가 25년 동안 계속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으로 일관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주신다고 말씀하시면서 25년 동안 주시지 않았습니다. 이 기간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신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마음에서 낳지도 않은 아들을 버리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신다는 약속을 하셨기에 이들도 기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악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기대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만 반복하시면서 실제로는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 세월이 무려 25년입니다.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모르시겠지만 저는 압니다. 저는 결혼하고 17년 만에 아이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결혼하자마자 태몽이라고 할 수 있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로부터 17년 동안 아이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태몽이 명확해도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기간이 25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 아들과 후손에 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런데 사라는 경수가 끊긴 지 오래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마음에서 주시겠다고 하신 아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버리게 하십니다. 완전히 포기한 상태에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을 주시리라 설득하신 후에 아들을 주십니다. 이것이 제목에서 말씀드린 하나님의 우왕좌왕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우왕하십니다. 그런데 마음에서 아들을 없애라고 25년 동안 주시지 않으시며 좌왕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주시겠다고 한 아들을 마음에서 바라볼 것을 염려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기대하며 바라보는 동안에는 아들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아브라함과 사라의 마음에서 철저하게 아들을 포기하게 만드십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우리와 다르게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이어지고 있음을 믿었습니다. 사라의 경수가 끊어지고 25년이 지나도록 아들을 주시지 않았기에 마음에서 포기하게 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또 본문에서처럼 아들을 줄 것을 왜 믿지 못하느냐며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이렇게 우왕좌왕하시는 것일까요?

 

아담 이후의 모든 인류에게 스며들어 있는 죄와 저주 때문에 하나님께는 염려가 생겼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우왕좌왕의 이유입니다. 죄의 특징은 마음 시선의 빗나감입니다. 다시 말해 마음에서 영광의 조명을 받는 대상이 하나님이 아닌 육체의 오감을 통해 만나는 것들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도 이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들을 낳아서 자손이 번성해야 하는데, 문제는 아기가 태어났을 때 그 마음에서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시청후미촉의 오감각으로 아기를 대할 때 죄의 기질을 타고난 인간이기에 마음을 아기에게 빼앗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주시겠다고 하신 아들을 주시지도 않은 채 마음에서 버리게 하십니다. 아들을 낳겠다는 생각을 아예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바람대로 아브라함과 사라는 아들을 낳으리라는 기대조차 못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해로부터 사라의 웃음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사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해서 웃었던 것이 아닙니다. 사라는 아들을 낳는다는 일이 자기의 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지난 25년 동안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우왕좌왕하시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주시겠다고 우왕하시고는 주시지도 않은 아들을 마음에서 버리시기를 바라시며 좌왕하십니다.

이처럼 사라는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지 못하시리라 여겨서 웃은 것이 아닙니다. 사라는 아이를 낳는 일이 자신에게는 일어날 수 없다고 마음에서 단단하게 붙잡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라가 붙잡고 싶어서 붙잡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25년 동안 하나님의 우왕좌왕을 보며 어쩔 수 없이 붙잡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라의 웃음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아이를 낳지 못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라를 웃게 만드신 것입니다. 사라는 아이를 낳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내게 무슨 그런 일이 일어날까?’하고 웃었습니다. 그런데 이 웃음의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염려에서 비롯된 우왕좌왕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도 오해하지만, 사라의 믿음에 대해서도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사라의 믿음에 대해서는 특별히 주어진 키워드가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 사라가 하갈의 문제로 아브라함에게 강력하게 주장하였던 바가 있음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사라도 이런 면이 있습니다. 자신의 부당함을 주장합니다.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들여보낸 것은 사라 자신입니다. 그런데 하갈은 임신했음을 핑계로 주인인 사라를 멸시합니다. 이것은 여러모로 이치에 맞지 않는 행동이었습니다. 하갈은 사라의 여종이었기에 하갈이 낳은 아이는 사라의 아이가 되는 것이 당시의 관습이었습니다. 애초에 사라는 이러한 관습을 따라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들여보냈던 것입니다. 사라가 이렇게 한 이유는 아들을 주시지도 않으면서 포기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좌왕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아들을 낳는 것은 내 일이 아니구나. 하나님께서 남편에게 약속하신 자손의 약속은 나를 통해 이루어질 일이 아니다.’라고 생각해서 아브라함에게 하갈을 들여보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라는 이제까지 인도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그로부터 자신을 제외하는 선택을 합니다. 한편 이와 별개로 하갈이 임신했음을 이유로 주인인 자신을 무시하는 것은 당시 관습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하갈의 문제를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이렇듯 사라는 자신의 의사를 충분히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바로에게로 들어가라고 할 때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조카 롯에게 땅의 선택권을 양보할 때도 아브라함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하갈을 들여보낸 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이 자신에게 아들을 낳지 못하게 하심을 받아들인 결과였습니다. 사라는 얼마든지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에게 들어가라고 할 때 ‘당신 미쳤어? 당신이 그러고도 남자야?’라고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보는 하나님을 사라도 보고 있었기에, 하갈의 문제가 생겼을 때도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라의 웃음에 대해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사라가 하나님을 못 믿어서 웃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사라야, 네가 나의 전능함은 믿는구나. 다만 내가 25년 동안 주권적으로 너의 임신을 막았기에 네 몸에서 아이가 태어나리라고는 믿지 못하는구나. 하지만 나는 너에게서 아이가 태어나게 하겠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우왕좌왕 속에 담긴 고민과 염려를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가나안 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우왕하셨습니다. 그러나 정작 가나안 땅에 갔을 때는 기근으로 덮으셔서 머물 수 없도록 좌왕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아들을 달라고 간구한 적이 없습니다. 먼저 아들을 주시겠다고 반복적으로 말씀하시며 우왕하셨던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25년 동안 아들을 주시지 않으며 좌왕하십니다. 정작 아브라함과 사라가 완전히 아들을 포기한 후에야 나타나셔서 내년에는 아들을 낳을 것이라며 우왕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왕좌왕하신 이유는 아브라함과 사라 속에 있는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염려하신 것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영광의 하나님 대신 영광의 가나안 땅을 보고, 영광의 하나님 대신 영광의 아들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을 염려하셔서 마음에서 완전히 버리기를 바라시며 우왕좌왕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향한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염려 때문에 그 계획을 그대로 이루어 가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죄의 체질 때문입니다. 마음이 눈에 보이지 않는 영광의 하나님을 향하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향해서 빗나갑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멋진 계획이 있어도 우리가 하나님 대신 그것들을 영광스럽게 여기고자 하는 죄의 체질이 있기에 이루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는 같은 주제가 반복됩니다. 그 주제가 오늘 본문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아브라함 이야기의 처음부터 밑바닥에 깔린 하나님의 염려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염려는 아브라함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영광 중에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을 염려하시고 걱정하시며 두려워하십니다. 그렇기에 가운데로 직진하지 못하시고 우왕좌왕하시는 모습을 보이십니다.

이러한 사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서도 잘 드러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고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성전 중심의 생활을 통하여 선민의 삶을 이루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영광의 하나님 대신 가나안 땅을 마음에 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430년이라는 세월을 노예로 살게 하시며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싶다는 죄악에 근거한 자유로움을 묶어버리십니다. 마음이 하나님 대신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 상태가 되어야만 계획하시는 일들도 이루실 수 있습니다. 430년 노예의 삶을 운명이자 팔자로 받아들이게 하심으로써 무엇을 자유롭게 하고 싶다는 생각조차 못하는 상황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러한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본문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칠십 인 제자를 파송하신 후에 이들이 돌아와서 보고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7절을 보면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참 놀라운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특이합니다. 18~20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하늘에 내 이름이 쓰여있는 의자가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그 의자는 하나님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위치에 있습니다. 내 마음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면 그 의자에 앉아서 하나님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일매일 우리의 이름이 쓰인 의자를 보시면서 출석을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태승철’하고 부르실 때,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태승철’이라고 쓰여있는 의자에 앉아서 하나님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능력과 권능을 받아 이 땅에서 기적적인 일을 행함을 기뻐한다면 마음은 땅을 떠나 하늘로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출석을 부르실 때 대답할 수도 없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은혜는 무효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염려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칠십 인 제자들에게 능력과 권능을 주시며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을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받은 능력과 권능이 임해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 벌어지면 그것을 마음에서 기뻐하고 좋아하게 됩니다. 이들의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자기 이름이 쓰인 의자에 앉아서 하나님으로 기뻐하며 하나님을 영광중에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에는 처음부터 이러한 하나님의 염려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로부터 사라의 웃음에 대해서도 오해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사라의 웃음에는 25년 간의 우왕좌왕하신 하나님의 염려가 담겨 있습니다. 사라가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내년에는 아들을 낳게 하신다는데 왜 아멘으로 대답하지 못하나?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을 못 믿나?’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염려가 25년간 사라의 생각을 이렇게 바꿔온 것입니다.

저는 서울 연남동에서 태어나서 유아세례를 받고 고등학교 때까지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영락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때 부흥사들의 설교를 들으면 대부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이끌어 가시며 형통하게 하실 것을 믿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교인들은 아멘! 합니다. 또 ‘능히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불치병을 고치실 것을 믿습니까? 능히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사업을 흥왕하게 하실 것을 믿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또 교인들은 아멘!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믿음일까요?

이것은 믿음이 아닌 종교적 미신입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갖고 싶고 이루고 싶은 것을 밝히 보는 불신앙입니다. 부흥사들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언급하며 ‘바라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말하고 이것에 아멘!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상태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일을 하나님보다 밝히 보는 상태가 믿음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믿음이라 착각하며 존재하지 않는 신까지도 만들어 냅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가지고 싶고 이루고 싶은 것을 이루어주는 신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불상 앞에서 소원을 이루어달라고 빌고, 바알과 아세라 우상 앞에서 풍요와 다산을 기원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속에서 영광중에 바라보고 있는 세상 것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것은 불상에 절하고 바알과 아세라 우상 앞에서 비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닙니다.

내 삶에서 일어날 기적은 믿지도 말고 불신하지도 말고 상관도 하지 말아야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는 내 이름이 쓰인 의자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날마다 내 이름을 부르시며 마음이 올라왔나 보십니다. 하늘로 올라가야 할 사람들이 땅에서 일어날 기적을 바랄 수는 없습니다.

사라의 웃음은 하나님의 우왕좌왕을 통해 만들어진 진짜 믿음입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는 기적적인 일이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여겼습니다. 이 마음이야말로 ‘기적이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아멘!’이라고 목이 터져라 외치는 것보다 훨씬 더 탁월한 믿음입니다. 사라는 아들을 낳는 기적은 자신과 상관 없는 일이라 여겼습니다. 어차피 이 상황에 이르는 동안 하나님의 주권이 단 한 순간도 멈춘 적이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이어진 결과가 지금 상황이라면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기적을 바란다면 하나님의 주권을 믿지 않는 것이기에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지금의 상황을 바라보며 기적을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기 위해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이것이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부합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에서 바라는 것을 가짐으로써 기뻐하려고 합니다. 정말로 땅에서 바라는 바가 없으면 기적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사라의 웃음이 진짜 믿음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라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이끌어 오신 결과 나는 팔십구 세가 되었다. 이제 구십 세에 아들을 낳는다고 말씀하시지만 그것은 나와는 상관이 없다.’라고 생각하고 웃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라의 웃음은 하나님의 좌왕의 결과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좌왕의 결과로 이 세상 것에 대해서 마음이 완전히 죽고 포기하셨습니까? 나에게는 하나님이 기적을 약속하시는 우왕만 필요하다고 여기신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여전히 죄의 유혹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우왕하시는 계획대로 다 이루셔도 여러분이 하나님만 바라보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들을 전혀 바라보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바라는 기적 같은 일들을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다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서처럼 좌왕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좌왕의 결과대로 이 세상 것을 사라처럼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편 본문을 보면 특이한 기록이 등장 합니다.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의미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본문이 전하고자 하는 전체적 주제가 무엇인지 염두에 둘 수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3장 1~2절을 보면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는 아브라함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자신을 찾아온 하나님을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손님으로 영접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 5절을 보면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손님을 위해 떡을 만들고 송아지를 잡아 요리를 만들고 엉긴 젖과 우유를 대접합니다. 마음을 상쾌하게 한다는 것은 원기를 회복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표현이 등장한 것은 1절에서 “날이 뜨거울 때”가 언급된 것과 연관됩니다. 날이 뜨겁다는 것은 지쳤음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실제로 지치실 리는 없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인간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 지치고 힘든 모습임을 보고 영접합니다. 무슨 이득을 보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영접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영접한 손님은 하나님이셨고 아들을 낳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는 동안 내게 유익하고 좋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하나님의 뜻만을 쏙 빼서 받을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뜻을 쏙 빼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무엇이 이득이 되고, 무엇이 해로운 것인가를 생각하는 이해관계 없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통째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면 내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아브라함이 손님으로 받아들인 하나님께서 아들을 낳으리라 약속하시는 장면이 의미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했습니다. 먼저 세상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세상 것과 연관된 하나님의 뜻만을 찾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해관계를 앞세웠던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시청후미촉의 오감각을 통하여 접할 수 있는 세상 것 중에 원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로부터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통해 내가 바라는 것들을 이루어 주시기를 바랐습니다. 이해관계를 분명히 했던 것입니다. 그 이해관계를 위해서 예배당 출석하고 봉사 충성하고 헌금도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런 것은 믿음이 아님을 가르쳐줍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을 아무런 이해관계 없는 손님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자발적으로 아브라함이 구한 적 없는 아들을 낳으리라고 하십니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이 본문을 통해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손님을 향해 쉬시며 원기를 회복하기를 권합니다. 이것은 상당히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날이 뜨거웠다는 것은 지치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은 쉬시며 기운을 회복하기를 권했습니다. 땀에 찌든 상황에서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나왔더니 맛있는 음식까지 차려져 있는 상황을 상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보지 않고 세상 것을 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삶을 주권적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지치실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죽어도 하나님을 보고자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감을 통하여 만나는 세상 것만을 마음으로 붙잡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고 목이 터져라 외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지치십니다.

아브라함이 떡과 송아지 요리를 대접한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마음을 드렸음을 상징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자였고, 이 세상에서 기적을 원하지 않는 자로서, 자기가 보는 세상 것을 위해 기적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적이 일어난다고 하는데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할 정도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이끌고 있는데 내가 다른 것을 위한 기적을 바랄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를 통해 쉼을 얻고 기운을 회복하십니다. 이 장면은 비유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죄 사함을 외치고, 십자가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죽어도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죽어도 세상 것만을 바라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주권적으로 인도하시지만, 이러한 상황은 마치 뜨거운 날 중동 땅을 오래 걸어가는 나그네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지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이 주님을 따라 올라가 하늘에 기록된 대로 내 이름이 쓰인 의자에 앉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이 손님을 위해 떡과 송아지 요리를 만들었듯이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마음을 드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쉼을 드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보실 때 기운을 차릴 수 있게 해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내 마음에 붙박이로 새김으로써 하나님께서 더 이상 우왕좌왕하시지 않아도 될 수 있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이든 우리 마음이 매이지 않을 만큼 십자가를 굳건히 붙잡음으로써 하나님의 우왕좌왕을 끝내시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쉬실 수 있게 해드리고 하나님이 기쁨으로 기운을 회복하실 수 있도록 해드리는 하나님의 선민이자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에게 와서 쉬시기를 바라며 기운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주님을 잊지 않음으로써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대단한 계획과 뜻을 이루시더라도,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주님과 함께 내 이름이 기록된 의자에 앉아 하늘에서 하나님만을 마주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미력이나마 하나님 사랑을 위하여 마음과 뜻과 힘을 다 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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