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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일개 인생살이 대신 주최측이 된 사람>의 줄거리 :
내 삶을 산다는 뜻은 이 세상을 마음의 만족과 기쁨을 위한 사냥꾼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자손은 이 세상을 향하여 주최측이 되어야 합니다. 주최측이 된다는 것은 이 세상 생사화복의 주관자이신 주권자 하나님과 함께 자유로운 소통 관계에 있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믿기 어려운 광경이 펼쳐집니다. 아브라함이 감히 주권자 여호와 하나님에게 생사화복의 실행에 대하여 자기 의견을 피력하고 어필합니다.
일개 인생살이 대신 주최측이 된 사람
(창세기 18:16~33)
16.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1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18.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20.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21.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23.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24.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2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려 하심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중재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례하게 여겨질 정도로 하나님께 이의를 제기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다시 한번 마음속에 분명히 새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마치 하나님을 가르치려는 것 같습니다. 23~25절에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 지라도 주께서 그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부당한 일을 행하실 수 있으며 정의가 아닌 일을 행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러한 하나님을 부당하다고 합니다. 또 이어지는 구절들을 보면 아브라함은 오십 명을 언급한 것으로는 부족했는지 사십오 명, 사십 명, 삼십 명, 이십 명, 그래도 안 되기에 열 명까지 언급하고 이야기가 끝납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에 차마 의인이 열 명도 없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대화 속에서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이 열 명도 없다는 하나님의 의중을 깨닫습니다. 여기서 참 특이한 점은 하나님의 부당함을 이야기하며 마치 하나님을 가르치려는 것 같은 아브라함의 태도를 다 수용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의인이라 생각해서 이런 태도를 보인 것이 아닙니다. 27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티끌이나 재와 같은 존재임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꾸하는 것이 얼마나 무례한 일인지도 잘 압니다. 또 31절에서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내가 감히 내 주께 아뢰나이다…”라고 하였고, 32절에서는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노하실 수 있음을 알면서도 대꾸하였던 것입니다. 도대체 아브라함이 왜 이러한 태도를 보이고 하나님은 어떠한 이유에서 이런 아브라함의 태도를 받아주셨을까요? 이러한 의문에 대해 ‘일개 인생살이 대신 주최측이 된 사람’이라는 제목을 통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개 개인의 인생을 살아가는 대신에 이 세상에 대해 주최측이 되어야 합니다. 현재 지구상에는 80억 가까운 인류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류는 각자 사냥꾼으로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모든 인간의 마음은 비어있습니다. 그렇기에 마음의 채움과 만족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죄와 저주에 찌든 상태에서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마음의 만족과 기쁨을 위한 좋음을 사냥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지고지순한 사랑도 실상은 자기 마음을 채우기 위한 사냥의 과정이었습니다. 로미오는 줄리엣을 자기 인생의 최고의 사냥감으로 삼았고, 줄리엣도 로미오를 자기 인생의 최고의 사냥감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본래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만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 당신을 가질 수 있게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사냥이 아닌 이유는 하나님께서 먼저 자신을 내주셨기 때문입니다. 한편 죄와 저주로 인해 타락한 이후로는 세상 것들을 좋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상에서 좋게 여기는 것들은 나에게서 도망가기에 사냥하듯이 가지려고 애써야만 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둘 때 본문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태도는 무척 특별합니다.
첫 번째 특이한 점은 아브라함의 무례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절대 주권자이십니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주권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 자기 의견을 강하게 피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특이합니다. 1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아브라함에게 숨기지 않고 하시려는 일을 전부 이야기해 주십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얼마나 자기 의견을 강하고 집요하게 피력하는지 기가 막힙니다.
두 번째 특이한 점은 아브라함의 집요함입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살펴보았던 아브라함은 자기 이익이나 필요에 대해 무골호인의 모습을 보여왔습니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버렸습니다. 아내 사라를 버렸습니다. 조카 롯을 버렸습니다. 자기가 살아야 될 땅을 버렸습니다. 이스마엘을 잉태한 하갈을 버렸습니다. 다 버렸습니다. 그런데 정작 생면부지의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상하게 집요함을 보입니다. 무례함을 알면서도 하나님께 여섯 번을 조르며 용서를 구합니다. 도대체 이러한 집요함이 어디서 생겼는지 의아할 지경입니다. 자기와 가까운 사람들은 바보 멍청이처럼 다 버리더니, 알지도 못하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위해서는 강렬한 집요함을 보이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브라함은 심지어 하나님의 부당함을 호소하고 정의를 행하셔야 한다고 가르치는 듯한 모습까지 보입니다. 이렇게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걸다시피 하는 모습, 한편으로 이러한 아브라함의 무례한 모습을 다 받아들여 주시는 하나님은 기괴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장면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이 땅을 살아갈 때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하는지를 아주 정확하게 알려주십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절대 이 세상에 있는 것으로 마음을 채워서 만족하고 기뻐하는 사냥꾼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 대신에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주최측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최측이 된다는 것은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주권자 하나님과 자유롭게 소통이 가능한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아브라함이 이 세상에 대해서 무엇을 생각하든지 주권자 하나님의 생각과 가치 기준이 똑같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은 완전히 하늘의 언어 체계를 갖추었기에 하나님과 소통이 가능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에서 아브라함은 주권자 하나님과 소통이 가능한 주최측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아브라함은 일개 인생살이를 산 것이 아닙니다. 앞서 모든 사람들은 사냥꾼으로 산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세상에서 좋음을 사냥해서 자기 마음의 만족과 기쁨을 채우려고 합니다. 소위 이득을 챙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80억 인류가 사는 방식입니다. 아브라함 또한 이런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하였기에 생사화복의 주권자 하나님과 같은 생각을 하는 주최측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살이의 핵심은 친함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야말로 생사화복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과 무지하게 친했습니다. 당시 기준으로는 육체로 사는 사람 중에서는 하나님과 유일하게 친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들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동원하고 이용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땅에서 벌어지는 삶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주권에 완전히 일임했습니다.
앞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폐허라는 뜻의 아이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의 벧엘 사이에 장막을 쳤던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세상일을 폐허로 놔둔 채 하나님의 돌보심과 주권에 완전히 일임하였고, 마음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갔습니다.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보는 상태를 유지해 나갔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은 있음을 느끼는 존재감과 좋음을 추구하는 욕망에서 하나님이 일등 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 이외에 이 땅에서는 좋은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한 번도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자기 삶에 동원하려는 마음을 가져 본 적이 없습니다.
언젠가 대형마트에서 경품행사를 했는데 고객들에게 추첨을 통해서 나눠줘야 할 상품을 직원들이 나눠 가진 것이 문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직원들이 상품을 탐낸 이유는 그것이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치를 탐할 수 없습니다.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주권자 하나님과 친하다고 해서,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 가지려고 한다면 경품을 빼돌린 대형마트 직원들과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주최측은 경품행사 상품에 대해 흑심을 보이면 안 됩니다. 우리는 바로 주최측이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주최측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에 대해 사심이나 흑심이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아브라함과 관련해서는 하나님의 정의롭고 공의로운 주권 행사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주권 행사에 아브라함을 참여시켜도 문제가 될 일이 아무것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똑같이 좋아하면서 자기와 친한 하나님의 능력을 동원하거나 써먹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주최측에 아브라함을 참여시키셔도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여기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생사화복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과 함께 의논할 수 있는 주최측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마음이 밀착할 정도로 친한 사람들의 특권입니다. 아브라함은 당시 인류 중 하나님과 제일 친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을 향해서는 그렇게 친근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사적으로 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좋아했기에 이 땅에서 좋아할 일이 따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종교인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위하여 신의 능력을 동원합니다. 신을 좋아하고 신을 인정하고 신과 친하되 세상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렇기에 세상 것을 얻기 위하여 신의 능력을 동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이러한 마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에게 세상을 주관하는 주최측의 자리에 받아들이십니다. 참 굉장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저는 미군 부대에서 카투사로 3년 복무했습니다. 당시 대학에서 교련을 하면 복무기간이 6개월 줄어드는데,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 삼수를 하다가 입대했기 때문에 거의 3년을 꼬박 채워야 했습니다. 그중 1년 반은 헬리콥터 부대인 비행대에 있었고, 나머지 1년 반은 사무를 보는 부관 중대에 있었습니다. 비행대에 있을 때 헬리콥터를 정비하는 서비스 소대에 있었는데 같은 섹션에서 일하던 한국계 미군이 있었습니다. 방도 같이 썼는데 저는 그분을 곽형이라고 불렀고, 그분은 저를 태선수라고 불렀습니다.
곽형이 소대를 떠나기 몇 달 전에 저에게 질문을 합니다. ‘태선수는 왜 나한테 부탁을 안 해?’라고 하기에 ‘뭘요?’라고 대답하니 PX 이용과 관련된 이야기였습니다. 미군들은 PX에서 물건을 싼값에 살 수 있습니다. 당시가 80년대 초였으니 지금에 비하면 생활이 열악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카투사들이 한국계 미군들을 만나면 계속 부탁을 해서 PX에서 물건을 샀습니다. 그런데 같은 일을 하고 같은 방을 쓰면서도 저는 곽형에게 뭘 부탁한 적이 없었습니다. 다른 카투사들은 계속 부탁하는데 정작 같은 방을 쓰고 있던 저는 2년이 지나도록 부탁을 한 번도 하지 않으니 의아했던 모양입니다.
방을 같이 쓰다 보면 이런저런 처지를 알기 마련입니다. 당시 저는 달동네에 살았기에 필요한 것이 많아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뭐든지 말만 해. 내가 다른 카투사 부탁은 안 들어줘도 태선수 부탁은 들어줄게.’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뭘 부탁할지 생각을 해봤는데 딱히 부탁할 것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카투사는 다섯 시인가 여섯 시에 근무가 끝나면 자유롭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고 묵상과 기도에 집중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따로 필요한 것들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읽다 보니 그 옛날 일이 떠오르며 하나님과 친하다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친함을 특권 의식과 예외 의식을 근거로 삼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친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하나님의 권능을 통해 더 많이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마음을 가지면 아브라함의 후손이 될 수 없습니다. 19절을 보면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과 친하고, 하나님께 선택받았다는 믿음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하나님의 능력을 동원해서 특별 대우를 받고 예외적 대우를 받으려는 사심을 가졌다면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은 의와 공도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의로움은 하나님 마음에 드는 상태입니다. 하나님 마음에 들기 위해서는 이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만을 좋아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의로움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 죽음이란 이 세상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빗나간 죄의 체질을 가진 내가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만을 마주할 때 마음에서는 하나님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로움을 유지하면서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정의인 공도입니다. 하나님만이 좋음인 상태를 유지하면서 사람을 상대할 때 하는 말과 행동은 정의입니다. 이처럼 하나님만을 좋아하는 의로움과 하나님만을 좋아하면서 사람을 상대하는 정의로움이 아브라함 자손의 특징입니다. 이러한 의와 공도를 행하는 사람은 주권자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들에게서 발생하는 모든 생각은 하나님께서 다 받아들이실 수 있는 것들입니다.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여섯 번을 조릅니다. 오십 명, 사십오 명, 사십 명, 삼십 명, 이십 명, 열 명까지 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얼핏 무례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아브라함의 요구를 다 받아들이십니다. 아브라함의 생각을 하나님께서도 옳다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전지전능하지 않기에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이 열 명도 없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부탁을 드린 것입니다만 하나님께서는 그 생각이 옳다고 여기셔서 받아들이십니다. 놀라운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친하지만 아직도 이 세상에서 갖고 싶은 것들이 많은 상태였다면 어떨까요? 사실 논리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가정은 불가능합니다. 정말로 하나님과 친하다면 하나님만 좋아하고 하나님만을 유일한 대상으로 삼은 상태이기에 세상에서 가지고 싶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이해를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억지로 가정을 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관계가 아주 친해서 뒷배가 되어줄 수 있다고 여기는 상태였다면 어떨까요? 소위 부정과 청탁이 가능한 관계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교 생활하던 때처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자기가 원하는 일에 동원하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절대로 본문에서처럼 하나님과 의논하고 소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진정한 소통은 완전함 속에 있습니다. 완전함이란 내 마음의 만족과 기쁨을 위해서 하나님 이외에 세상에서 다른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 세상의 삶은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보고 계시고, 알고 계셔서, 사랑하시며, 생각하심으로 끌고 가십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 삶은 그대로 하나님께 맡겨두면 되고, 이 세상 것을 좋아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나의 삶을 계획하시고 주권적으로 이끌고 계시기에 내 마음에 필요한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뿐이라는 생각을 갖는 것이 의로움입니다. 그리고 이 생각으로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정의로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본문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와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중보에 대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재든 중보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여전히 내 마음의 채움을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특권을 이용해 보겠다는 상태에서는 어떠한 중재나 중보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이 좋아하는 세상 것을 주시기를 바라는 사심과 흑심으로 가득한 사람이 중재나 중보를 한다는 것은 가소로운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은 가까이 있기 때문에 마음에 들어올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 관한 일,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취해야 하는 삶의 터전에 관한 일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주권에 일임하고 마음에서 버렸습니다. 그 상태를 유지하며 하나님만을 가지고 있었기에 사람을 볼 때 정의로움이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또한 이러한 상태가 될 때 비로소 중재나 중보라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사심을 가득 품고 중재나 중보를 언급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동안 중재를 한다, 중보 기도를 한다고 했던 일들이 얼마나 이상한 일이었는지를 떠올려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의 두 번째 특이한 점인 아브라함의 집요함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아브라함은 세상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바보처럼 무골호인처럼 다 놓아버립니다.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질 만한 것들을 하나님이 주신다고 하는데도 계속 사양하며 웃고만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 것을 약속하실 때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해 본 적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세상과 관계된 일에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약속하시는 하나님만을 갖고자 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아브라함은 바보나 무골호인처럼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버렸습니다. 아내 사라도 버렸습니다. 이스마엘을 잉태한 하갈을 버렸습니다. 조카 롯 앞에서 삶의 터전을 버렸습니다. 다 버리면서 웃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좋은 것을 준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제안을 사양하며 감사 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라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상하게 집요함을 보입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나 구해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에 천사들을 보내서 롯의 가족을 빼내십니다.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라는 말씀대로 이 계획도 아브라함에 알려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단순히 조카 롯이 구원받는 것을 문제시했던 것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가까이 있던 모든 것을 버렸던 아브라함이 정작 자기가 모르는 사람들의 멸망에 대해서는 무례함을 무릅쓰고 집요하게 여섯 번씩이나 하나님을 물고 늘어집니다.
아브라함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는 것들을 갖고 싶어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동원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만이 좋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삶에 대해서는 완전히 하나님의 주권에 맡긴 채 자기 일이 아닌 것처럼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브라함의 눈에 이상하게 사람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린 자에게 다른 사람이 보입니다. 물론 사냥꾼으로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 눈에도 사람은 보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냥감으로 보입니다. 내 마음의 채움을 얻으려는 사냥꾼의 본능이 작용해서 다른 사람을 사냥감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부부간에도 서로를 사냥감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도 결국 상대를 사냥감으로 본 것입니다. 로미오는 줄리엣이 없으면 자기 마음이 채워지지 않는다고 여겼고, 줄리엣도 로미오가 없으면 자기 마음이 채워지지 않는다고 여겼습니다. 서로를 최고의 사냥감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예전에 로미오와 줄리엣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양가 부모들이 반대하지 않고 찬성했다면 3년이 못 되어서 이혼하겠다고 나섰을 것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뜨겁게 사랑해서 결혼했다면 뜨겁게 미워하게 됩니다. 결혼하면 마음을 채워줄 것이라 여긴 것에 대한 배반감이 그만큼 크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물론 개중에는 결혼하고도 끝까지 좋아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면서 끝까지 서로를 좋아한다면 오히려 정신적으로 병자인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죄악에 보태서 이상한 변태적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죄악과 저주에 찌든 상태에서는 결혼은 좋아할 수 있어도 결혼한 후에는 3년만 지나면 좋아할 수 없는 것이 정상입니다. 죽을 때까지 계속 좋다면 죄악에 더한 변태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람을 사냥감이 아닌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러자 진정으로 그들을 위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타인을 통해 얻을 것이 있어서 위하는 마음이 생겼다면 사냥감으로 본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을 통해 얻을 이익이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위하는 마음이 생긴 것은 이들이 사냥감이 아닌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보여야 하나님의 주체적 입장이 영입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당신의 생각을 이루어 가실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을 의와 공도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만이 좋은 사람,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있는 사람, 그러한 사람은 사람을 볼 때 사냥감으로 보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생각이 정의로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의로움에 대한 생각이 하나님께 다 받아들여집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마음 채움을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통해 이루려고 사냥감을 쫓아다니는 일개 사냥꾼의 인생살이를 하지 않습니다. 사냥꾼의 삶을 살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되었다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동원하려고 하는 것은 경품행사를 하는 주최측이 경품을 서로 나눠 갖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진짜 아브라함의 자손은 이 세상 것이 전혀 필요 없을 정도로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겠다는 결심을 하는 자들입니다. 그 결심이 유지되는 동안에 사람이 보입니다. 내 기쁨은 사람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로소 타인이 사냥감이 아닌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럴 때 타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나의 의로움을 통해 내려오고 나의 정의로움으로 전달되고 표현됩니다. 이것이 이 세상을 주최측으로 살아가는 모습이고, 십자가 예수님과 연합하여 아브라함의 믿음을 유산으로 받는 아브라함 자손들의 모습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을 잊지 않고 십자가에서 연합하게 하시고 하나님만 가지는 의로움과 사람이 사람으로 보여 말하고 행동하는 정의로움이 나타나 하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하여 주최측으로 살다 생을 마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