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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웃음이’ 낳기까지 좋음을 쌓아가자>의 줄거리 :
이삭은 ‘웃는 자’라는 뜻입니다. 즉 이삭은 ‘웃음이’ 입니다. 드디어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약속하신 대로 아들이 태어납니다. 그래서 이 웃음을 많은 경우 오래도록 기다리던 아들의 출생에 의한 웃음으로 이해를 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기들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는 일을 자신들의 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웃음이’인 이삭의 출생에 담긴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웃음이’를 낳기까지 좋음을 쌓아가자
(창세기 21:1~21)
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2.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3.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4.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 만에 그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5.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
6.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7. 또 이르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의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
8.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
9.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10.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11.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13.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우리가 읽지 않은 14~21절에는 하나님께서 하갈과 이스마엘을 돌보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마엘은 장성하여 광야에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으며 애굽에서 아내를 얻어 장가를 갑니다. 본문 내용을 중심으로 ‘웃음이’를 낳기까지 좋음을 쌓아가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제목은 좋음을 쌓아서 웃음이 나오기까지 하라는 의미입니다.
본문은 대동소이하게 아브라함과 사라의 참으로 오랜 동안의 숙원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해석의 예를 읽어보면 이삭의 탄생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자손을 약속하시고 25년 동안 얼마나 고대하고 고대하던 아들이었던가!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라함의 성급한 기대와 반복되는 실수 속에서도 결코 취소되거나 변경되지 않았다. 오히려 아브라함의 부족함을 용서하시고 당신의 약속을 신실히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삭을 낳게 하였다. 그 오랜 기간을 지나면서 아들에 대한 기대와 바람은 더는 고조될 수 없을 만큼 고조되었고, 그 약속은 신실하고 어김 없이 성취되었다.’라고 합니다. 우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게 본문을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아브라함이 영광의 하나님을 마음에서 놓치지 않는 것을 인생의 목적이자 일상의 목적으로 하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삭의 탄생이 아브라함과 사라의 숙원이 이루어진 사건이었다고 보는 것은 올바른 해석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아브라함을 우리와 똑같은 수준에 놓고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 땅을 향해 이루시려는 계획을 약속해 주셨고,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기대하고 바랐다. 그리고 그 바람이 최고조에 이른 상태에서 드디어 이삭이 탄생하게 되었다.’라고 해석한다면 아브라함이 25년이나 아들을 마음에 품고 기다렸다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아브라함의 삶의 과정은 왜곡됩니다. ‘아브라함이 기다리다 지쳐서 인간적인 술책을 통해서 아들을 얻으려고 하갈과 동침해서 이스마엘을 낳았다. 또 이스마엘 탄생 이전에는 아들을 낳는 것을 믿지 못해서 집사인 엘리에셀을 자기의 상속자로 삼고자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년 이맘때 아들을 낳으리라 하실 때는 아브라함과 사라도 믿음이 없어서 웃기만 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아브라함의 불신앙적인 태도를 넘어서서 당신의 계획을 작정하신 대로 이루어가셨다.’라고 해석을 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상식적이고 우리에게 자연스러울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사실이 아닌 거짓말입니다.
아브라함은 백 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삭은 ‘웃는 자’라는 뜻입니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웃음이’라고 지은 셈입니다. 이름이 왜 ‘웃음이’가 되었는지는 1년 전으로 돌아가 봅니다. 아브라함이 구십구 세 때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할례의 언약을 주시며 아들을 낳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번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을 강조하십니다. 17장 19절을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웃음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신 셈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한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미래를 향해서 아들을 낳으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점을 기억할 때 본문은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게 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아브라함은 미래에 아들을 낳을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지금 영광의 하나님을 보는 것만을 업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웃음이’를 낳은 본문과 연결해 보면 아브라함이 좋음을 쌓아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으리라는 미래에 대한 기대를 쌓아간 것이 아니라 지금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지금 자기가 볼 수 있는 최고의 좋음을 쌓아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미래에 대한 기대를 했다면, 미래로 가야만 좋음을 내 것으로 삼을 수 있다고 믿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도 사라도 미래에 내 것이 될 수 있다는 좋음에 대한 기대를 쌓아가면서 살아 본 적이 없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지금 바라보고 있을 뿐입니다. 아브라함이 영광의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유일한 좋음으로 여기고 지금 좋음을 쌓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랬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25년 만에 실제로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언제나 영광의 하나님을 보며 그 좋음을 쌓아왔습니다. 그 좋음이 쌓이다 쌓이다 25년 만에 충만하게 된 것입니다. 기쁨이란 좋음이 쌓여 충만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기쁨이 충만할 때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이 바로 웃음입니다.
이러한 본문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을 것에 대한 기대를 쌓다가, 그 기대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이삭이 실제로 태어났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에 대한 약속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해주신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지금 바라보는 하나님의 좋음을 쌓아간 것입니다. 그렇게 좋음을 쌓아가던 아브라함과 사라가 ‘웃음이’를 낳은 것은 25년 동안 날마다 하나님을 보며 쌓아가던 기쁨이 충만한 상태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4장에서 아브라함에 대해 이야기하며 사라에게서 태어난 이삭은 약속과 은혜를 상징으로 보았고, 반면 하갈에게서 태어난 이스마엘에 대해서는 육체와 율법을 상징한다고 보았습니다. 이삭도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었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중에서 이삭은 약속을 따라 태어난 자를 대표하고,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태어난 자를 대표합니다. 4장 22~24절에서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자유 있는 여자인 사라에게서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이는 곧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의 자유를 뜻합니다. 여종인 하갈에게서는 이스마엘이 태어났습니다. 이는 곧 율법에 매여 종노릇 함을 뜻합니다.
이어서 사도 바울은 4장 29~30절에서 “그러나 그때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라고 하였고, 또 5장 1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라고 하였습니다.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사라의 아들 이삭을 괴롭혀서 쫓겨난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보며 같은 아브라함의 씨라도 유업을 같이 잇지 못할 자가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들 중에서 한쪽은 언약의 자손이고 다른 한쪽은 육체의 자손으로서 은혜와 율법으로 갈라져서 유업을 이을 자와 잇지 못할 자로 나누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해석할 때는 이삭의 이름에 담긴 의미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삭은 ‘웃는 자’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웃음이’가 태어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하면 이삭으로부터 이어진 자손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생리적으로는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아브라함처럼 되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되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듯이 우리도 이삭을 낳아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경이 말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이삭으로부터 내려온 혈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이삭으로 상징되는 웃음을 낳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좋음이 쌓이고 쌓여서 충만하게 된 상태가 기쁨입니다. 그리고 내 속에서 기쁨이 넘쳐날 때 드러나는 증상이 웃음입니다. 이러한 웃음은 기쁨의 자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삭의 탄생과 관련하여 좋음과 기쁨과 웃음이 강조되는 이유는 이것이 곧 에덴동산의 회복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에덴은 기쁨의 동산입니다. 따라서 에덴의 상실은 곧 진정한 기쁨을 상실한 죄와 저주의 찌든 삶입니다.
우리 삶에 웃음이 없는 이유는 미래에 묶여있기 때문입니다. 현재는 웃음이라는 자식을 낳을 수 있을 만큼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기쁨이 없다는 것은 곧 좋음이 쌓이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실제로 좋음이 쌓이지 않았기에 웃음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웃음의 기근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미래에서 좋음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그 좋음에 도달할 때까지는 웃음이라는 자식은 낳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바로 이러한 상징성을 염두에 두고 이삭의 탄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염두에 둘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일차적인 좋음과 기쁨의 원인이 아닙니다. 자식에게 웃음이라는 뜻의 이름을 붙였다는 것은 이삭이 좋음과 기쁨의 결과임을 의미합니다. 말씀드렸듯이 웃음은 좋음이 충만한 기쁨의 상태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웃음을 낳았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마음에 기쁨이 이루어졌고, 그 기쁨은 25년 동안 좋음이 쌓인 결과입니다. 여기서 25년은 하나님께서 자손을 낳을 것이라고 약속하신 때로부터 기간이기도 하지만 아브라함이 영광의 하나님을 본 뒤로부터의 기간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이 영광의 하나님을 본 후로부터 25년 만에 태어난 아들에게 이삭이란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는 웃음을 낳을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웃음을 낳을 수 있으려면 좋음을 쌓아가야만 합니다. 십자가 복음 방송에서는 하나님이 유일한 있음이시고 유일한 좋음이시라는 것과 그리스도 연쇄 과정은 그 좋음이신 하나님을 가지기 위하여 하늘로 올라가는 길임을 말씀드립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의문이 생깁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에 대해서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 안에서 보좌 우편까지 따라가는 것을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다. 그런데 왜 나에게는 유일한 좋음이신 하나님을 가졌다는 기쁨이 생기지 않는가?’라고 하십니다.
말씀드렸듯이 기쁨이 있다면 웃음이 나와야 됩니다. 본문에서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삭을 낳은 것은 웃음을 낳은 것입니다. 웃음이 나오려면 기쁨이 있어야 하고, 기쁨은 좋음이 쌓여야만 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25년 동안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내용을 바라보았던 것이 아니라 약속을 해주신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날마다 영광의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과 친분이 두터워짐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게 지음 받았습니다. 이 마음에 하나님의 좋음을 쌓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한번 하나님을 보았다고 해서 마음에 하나님이 확 들어오셔서 기쁨을 꽉 채우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마음에 들었다고 해서 인간관계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친분이 두터워 지는데는 인격적인 만남을 쌓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듯이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웃음이’가 태어났다는 것은 하나님을 좋음으로 삼는 과정이 충분히 쌓였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심지어 돈에 대해서도 발견됩니다. 돈을 최고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처음에는 영광의 돈을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기쁜 것은 아닙니다. 계속해서 영광의 돈을 바라보면서 돈을 쌓아갑니다. 돈을 벌고 또 벌어서 결국 강남에 있는 20억 짜리 아파트를 샀습니다. 비로소 이 사람에게서 웃음이 나옵니다. 이처럼 웃음을 낳는다는 것은 내 속에 기쁨의 조건이 충족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좋음이 넘쳐흐를 만큼 쌓여서 기쁨이 될 때 웃음이 나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드디어 웃음을 낳았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야고보서 1장 15절이 연상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본문에 적용해 보자면 ‘하나님을 잉태한즉 좋음을 낳고 좋음이 장성한즉 웃음을 낳느니라’ 혹은 ‘하나님을 잉태한즉 기쁨을 낳고 기쁨이 장성한즉 웃음을 낳느니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의 좋음이 쌓여서 기쁨이 되고, 기쁨으로 인해 웃음이 나왔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곧 에덴의 회복입니다. 웃음이 왜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다는 본문을 사도 바울처럼 비유적이고 상징적으로 이해한다면, 왜 하나님이 좋음이라고 하는데 내게 기쁨이 없는가에 대해서도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영광의 하나님은 좋음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에 돈이 박혀버린 것처럼, 아브라함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박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은 날마다 돈 돈 하면서 살아갑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좋아하는 사람은 마음에 영광의 하나님이 박혔기 때문에 날마다 하나님 하나님 하면서 살아갑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 돈을 쌓아가듯이, 하나님을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또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 쌓인 돈을 보면서 웃듯이, 하나님을 좋아하는 사람은 쌓인 하나님을 보면서 웃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은 것입니다. 본문을 사도 바울처럼 상징적이고 비유적으로 이해한다면 이러한 의미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웃음이’를 낳을 만큼 매일매일 하나님으로 좋음을 쌓았습니까? 그 좋음이 쌓여서 기쁨이 되었습니까? 기쁨이 넘치면 ‘웃음이’는 나오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에서 율법과 은혜에 대해 이스마엘과 이삭이 한 지붕 밑에 같이 있을 수 없음을 이야기합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낳은 자이며 율법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본문 14절 이후를 보면 이스마엘에 대해 기록하기를 활 쏘는 자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활을 쏘는 자는 사냥꾼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먼저 은혜와 율법의 차이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은혜는 먼저 기쁘고, 그 기쁨이 넘쳐서 웃음이 나오는 가운데 살아갑니다. 내 마음에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좋음을 쌓아가는 과정이 지나서 기쁨이 이루어지면 그 기쁨에서 웃음을 낳게 됩니다. 웃음을 낳는 동안에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계속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좋음이 쌓여서 하나님 때문에 기뻐합니다. 웃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율법은 이와 반대입니다. 먼저 내가 내 힘으로 행위를 합니다. 그리고 그 행위의 결과에 따라 좋음을 얻고 기쁨을 얻고 웃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은혜는 좋음이 쌓여서 기쁨이 넘침으로써 웃음으로 삶을 시작하는 것이라면, 율법은 기쁨이 넘쳐 웃고 싶어서 먼저 내 힘을 짜내 행위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은혜는 기쁨이 출발점이고, 율법은 기쁨이 목표입니다. 달리 말하면 은혜는 웃음이 출발점이고, 율법은 웃음이 목표입니다. 예를 들어서 장사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은혜의 삶은 장사를 하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으로 좋음이 넘쳐서 기쁨이 충만한 가운데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웃음이’를 안고서 장사를 합니다. 그렇기에 장사의 결과와는 상관 없이 ‘웃음이’를 안고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우왕좌왕하시지 않고 아무런 염려와 주저 없이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반면 율법의 삶은 돈을 많이 벌어서 결과적으로 기쁨을 얻어 웃으려고 장사를 합니다. 비장한 각오와 결심으로 장사를 시작합니다. 돈으로 기뻐하며 웃을 수 있는 자리로 가기 위하여 도움이 필요해서 하나님을 부릅니다. 이제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웃을 수 있는 결과가 나오는가 아닌가가 결정이 됩니다. 근면하게 사느냐, 성실하게 사느냐에 따라서 ‘웃음이’가 나올지 결정이 됩니다.
그런데 은혜는 ‘웃음이’를 안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져 갑니다. 이로부터 사도 바울이 언급한 약속과 혈육을 따라 태어남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웃음이’가 에덴의 상실과 연결되어 있음을 기억해야 됩니다. 웃음이 반드시 주어진다는 것이 약속입니다. 그동안 삶은 ‘웃음이’를 낳기 전까지 좋음을 쌓아가는 과정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좋음을 쌓아가는 과정이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유일한 좋음으로 삼아 좋음을 쌓아가는 사람이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좋음을 쌓아가는 사람은 아브라함처럼 산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좋음이란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입니다. 그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좋음으로 받는 사람은 이 세상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보였던 것과 같은 완전한 죽음을 지향하여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죽음의 상태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을 통해 바로 이것을 보여줍니다.
반면 혈육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웃음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삶을 통해서 기쁨과 웃음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활 쏘는 사냥꾼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냥꾼은 활을 쏴서 죽인 사냥감을 손에 넣었을 때 웃습니다. 예를 들어 승진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면 승진이 사냥감이기에 승진했을 때 웃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혈육의 자손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임에도 율법에 종노릇 하는 자들을 상징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스마엘과도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새 한 마리 떨어지는 것조차 주권적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만물 중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이스마엘과 이삭의 차이는 똑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사냥감으로 기뻐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 중에도 이스마엘의 계통이 있고 이삭의 계통이 있습니다. 이스마엘 계통의 직장인이라면 승진이라는 사냥감을 포획했을 때 비로소 웃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삭 계통의 직장인이라면 승진과는 무관하게 ‘웃음이’를 안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설령 아직 ‘웃음이’를 낳지 못하는 상태일지라도 날마다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기쁨을 쌓아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 기쁨은 하늘에 있는 기쁨이기 때문에 사냥꾼으로서 땅의 기쁨 거리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과는 말과 행동이 완전히 다르게 나타납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좋음을 쌓아가는 과정 중에 아브라함처럼 살다가 이제 그 좋음이 충만하게 쌓여서 기쁨이 넘치면 ‘웃음이’를 낳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그 ‘웃음이’를 안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웃음을 자식으로 삼아 웃음을 안고, 웃음을 업고, 웃음을 지고 살아갑니다. 웃음을 지고 사는 삶처럼 가볍고 기쁜 삶은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좋음을 쌓아가면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25년 간 했던 일은 하나님의 좋음을 날마다 쌓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날마다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과의 친분 관계를 두텁게 해나가면서 좋음이 쌓여 기쁨이 되고, 기쁨이 넘쳐서 웃음이 자식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나는 이삭 계열의 약속의 자손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지만 이스마엘 계열의 율법에 매여 종노릇 하는 자손일까요? 내 행위를 통해서만 웃음에 도달할 수 있다고 여기고 있다면 이스마엘 계열의 자손입니다. 처음부터 웃음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면 이삭 계열의 자손입니다. 물론 웃음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보여줬던 것처럼 25년의 과정을 거쳐야만 합니다. 이 과정이 꼭 25년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더 빠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영광의 하나님을 보며 좋음을 쌓아간다면 이삭 계열의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이 내게 주어졌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 복음 방송에 집적대고 추근거리고 기웃거립니다. 십자가 복음 방송에서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 안에서 보좌 우편에 이르러 하나님과 직면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 이야기가 마음에 꽂히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직면하여 하나님의 유일한 좋음을 마음에 쌓아갈 수 있는 길은,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 날마다 하늘로 올라가서 출석하듯이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 진리이고 내가 살아 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받아들인다면 약속의 자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 진리라는 사실이 끝내 믿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이스마엘 계열의 사람입니다. 이 세상을 활 쏘는 사냥꾼으로 살아가는 동안 기쁨과 웃음은 미래로 미뤄집니다. 지금은 좋음과 기쁨과 웃음의 기근 상태입니다. 내 행위를 통해 좋음이 충만해지는 기쁨에 도달하고 웃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세상에 속박된 종으로 살아 갈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연쇄 과정만이 우리를 이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며, 유일한 좋음이신 하나님을 날마다 쌓아가게 합니다. 날마다 좋음을 쌓아가는 자는 12장에서 20장까지 보였던 아브라함과 사라의 모습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21장에 도달해서 드디어 이삭이 태어났듯이 ‘웃음이’를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웃음을 향해 가는 자들이 아니라 웃음을 안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웃음을 안고 살기 위해서는 지금 좋음을 쌓아가야만 합니다. 우리의 좋음은 미래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좋음은 꿈이 아니고 비전이 아니고 지금 사실로써 존재합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 있고 그 끝에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이야말로 사실로써 존재하시는 유일한 좋음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행동함으로써 날마다 좋음을 쌓아감으로 좋음이 충만한 기쁨의 단계에 이르러서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웃음이’를 낳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웃음이’를 안고, 업고, 지고, 끼고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때문에 생기는 ‘웃음이’를 낳아서 안을 수 있어야 하나님께서도 웃으시면서 마음 놓고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웃음이’를 낳고, ‘웃음이’를 안고, ‘웃음이’를 업고, ‘웃음이’를 양팔에 끼고, 사방이 ‘웃음이’로 둘러싸인 상태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도 웃으시며 당신의 뜻을 우왕좌왕하심 없이 온전히 이루어 가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