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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슈퍼 甲에 애착하는 乙의 반전>의 줄거리 :
아브라함의 자손은 슈퍼 갑을 좋아하는 을들이다. 온 세상 만물에 대해서 슈퍼 갑이신 하나님을 좋아할 뿐이다. 하나님을 좋아함이 직업이다. 슈퍼 갑을 좋아하여 그 주권을 인정하기에 언제 어디서나 겸허하게 이 세상 적인 갑들을 인정한다. 슈퍼 갑 아래 있는 모든 상대방에게 관계의 주도권을 넘겨준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꾸 상황 전체를 이 을이 갑의 위치에 서게 인도하신다.
슈퍼 甲에 애착하는 乙의 반전
(창세기 21:22~34)
22. 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23.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24.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맹세하리라 하고
25.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은 일에 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
26. 아비멜렉이 이르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에야 들었노라
27.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가져다가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
28. 아브라함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으니
29.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냐
30. 아브라함이 이르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
31.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 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
32.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매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은 떠나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돌아갔고
33.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34. 그가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냈더라
애착이란 너무 좋아하고 사랑해서 도저히 떨어질 수 없음을 말합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이 ‘웃음이 아빠’가 되자마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비멜렉과 아브라함 사이에 상호불가침조약 내지는 상호우호조약이 체결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 계약 체결에는 분명한 갑과 을이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전세로 들어갈 때 계약서를 쓰면 집 주인이 갑이고 임차인은 을이 됩니다. 혹은 회사에서는 사장님은 갑이 되고 직원은 을이 됩니다. 이처럼 갑이란 관계의 주도권을 가진 사람이고, 을은 그 주도권을 따를 수밖에 없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2000년대에 들어서 사회적으로 갑질이라는 용어가 많이 쓰이게 되었습니다. 갑질이란 자신의 높은 지위나 힘을 내세워서 아랫사람이나 힘이 없는 사람을 마구잡이로 괴롭히거나 무례하게 행동하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하나님을 둘러싸고 인간들의 갑과 을의 관계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웃음이 아빠’ 아브라함은 이 세상에서 갑과 을의 계약이 체결되는 순간에 어떤 위치와 어떤 상태에 있었는가를 보여줍니다. 이것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인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일이기에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이 있게 하신 만물과 만인과 만사에 대해서 주권을 갖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은 슈퍼 갑이십니다. 한편 아브라함의 자손은 슈퍼 갑이신 하나님을 애착하는 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슈퍼 갑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마지못해 슈퍼 갑이신 하나님의 주도권을 따라가는 을이 아니라 슈퍼 갑이신 하나님을 애착하는 을들입니다. 슈퍼 갑이신 하나님께 달라붙어 잠시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좋아하는 자들이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을의 의식을 가진 자들입니다.
우리는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지속하여 보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좋아하고 사랑하여 붙어있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좋아하는 애착은 은퇴가 없는 평생의 직업이 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날마다 하나님께 도착하는 진리의 길로 인정하고, 하나님을 애착하여 은퇴 없는 평생의 직업으로 삼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은 우리의 직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연쇄 과정 중에 마음이 머물러서 하나님께 애착하다 보면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일은 아브라함처럼 ‘웃음이 아빠’가 됩니다. 사방에 다니면서 ‘웃음이’를 흘립니다.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머무는 동안 하나님의 좋음이 차곡차곡 쌓이고 기쁨이 넘쳐나 ‘웃음이’가 자꾸 태어납니다. 이것이 을의 의식을 가지고 슈퍼 갑이신 하나님만을 애착하는 자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슈퍼 갑이신 하나님을 애착하는 동안에 사람을 상대합니다. 상대방은 내가 애착하는 슈퍼 갑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있게 된 사람입니다. 슈퍼 갑이신 하나님의 주도권을 넘어서는 상대방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슈퍼 갑이신 하나님의 주도권을 인정하다 보면 만나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나는 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의 주도권을 인정해서 을의 입장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 임하고 있는 슈퍼 갑이신 하나님의 주도권을 인정하기 때문에 을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집주인의 위치에서 전세를 내주는 상황일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약상 집주인은 갑으로 기록되고 계약을 맺는 당사자인 임차인은 을로 기록됩니다. 그런데 내 마음에서는 상황이 다릅니다. 나는 슈퍼 갑이신 하나님을 애착하는 사람이기에 좋은 전세인을 만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전세인과의 관계 중에서도 슈퍼 갑이신 하나님과 애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에 전세인을 더 이상 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세인의 생김새로부터 상황까지 모든 것을 슈퍼 갑이신 하나님께서 규정하고 계심을 알기에 내가 주도권을 쥐는 갑의 위치에 서지 않습니다. 계약상에는 내가 갑일지언정 내 마음에서는 언제나 을의 위치에 서게 됩니다. 이것이 ‘웃음이 아빠’들의 특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좋음이 쌓이고 쌓여서 그 좋음이 기쁨으로 넘쳐날 때 ‘웃음이’를 낳게 됩니다. 이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이들은 사람을 상대할 때 언제나 슈퍼 갑이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합니다. 그렇기에 슈퍼 갑이신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내 앞에 있게 된 사람을 을로 여길 수 없으며 갑으로 상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나는 슈퍼 갑이신 하나님을 애착하기에 운명적으로 누구 앞에서도 주도권을 쥘 수 없는 을이 됩니다. 그런데 실제 상황에서는 역전 현상이 발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을의 의식을 갖고 있는 나를 중심으로 갑의 위치에 있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말려들게 하십니다.
슈퍼 갑이신 하나님을 애착하는 을을 만난 세상의 모든 갑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을을 중심으로 움직여 가시는 하나님 섭리의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들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영적인 상황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슈퍼 갑이신 하나님을 좋아함이 쌓이고 쌓여서 ‘웃음이 아빠’가 될 정도가 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운명적으로 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와의 관계에서도 주도권을 쥐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로부터 갑과 을의 관계에 역전 현상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담입니다만 이번 휴무 기간에 많은 분들이 저와 첫 만남을 갖게 됩니다. 이 만남이 반복되면 정이 들고 친분이 두터워지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영광의 하나님을 잊지 않고 바라보는 것도 정이 들고 친분이 두터워지기 위함입니다. 실제로 하나님 좋음이 마음에 쌓이면 마음에는 외부적 환경과 무관하게 기쁨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웃음을 흘리고 다니는 ‘웃음이 아빠’들이 됩니다. 그럴 때 우리의 팔자는 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을이 된 자들을 어떻게 이끌어가시는지 아브라함을 통해 보여줍니다.
본문에는 다시 한번 블레셋의 아비멜렉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은 블레셋 그랄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이 군대 장관 비골을 대동하여 아브라함을 찾아옵니다. 군대 장관이란 말 그대로 군인을 통솔하는 자입니다. 따라서 아비멜렉이 군대 장관을 대동하였다는 것은 전쟁을 전제로 해서 아브라함을 방문하였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조약을 체결할 것을 요구합니다.
22~23절을 보면 “그때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조약을 맺기 위해 찾아온 아비멜렉이 하나님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앞서 아비멜렉은 사정을 모른 채 사라를 취하려고 하다 하나님께 혼쭐이 났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 후로 아비멜렉이 하나님을 믿었던 것은 아닙니다. 당시 사람들은 자기들의 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신은 자기를 믿는 사람을 강력하게 밀착하고 후원하는 참 대단한 신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의 신에게 깜짝 놀라며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군대 장관을 대동하여 불가침조약을 제안합니다.
아비멜렉은 블레셋의 왕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자기 나라의 국민이 아닌 이주민입니다. 따라서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주도권은 아비멜렉에게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은 마치 그 주도권을 아브라함이 쥐고 있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아비멜렉이 보기에 아브라함의 신은 자기가 믿는 신과는 달랐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를 꺼내겠다고 안방까지 들어와서 자신을 혼쭐내는 극성맞은 신이었습니다. 불가침조약을 제안하며 하나님을 언급한 아비멜렉은 ‘너와 너의 하나님이 얼마나 친한 줄 알겠다. 하나님이 너를 얼마나 대단히 여기는 줄도 알겠다. 너는 그 하나님 앞에서 내게 갑질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라.’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여기서 굳이 거짓되게 행하지 말 것을 요구한 이유는 사라를 취할뻔했던 사건 때문입니다. 아비멜렉은 사정을 모른 채 사라를 취할뻔했다가 아브라함의 신인 하나님께 혼쭐이 났습니다. 여기서 거짓을 행하지 말라는 것은 거짓말을 윤리적으로 경계하거나 훈계하고자 했던 것이 아닙니다. 풀어보자면 ‘네가 거짓말을 하면 나는 그 말을 진실로 받아들여서 행동할 것이다. 그러한 나의 행동이 너의 신인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행하는 것이 된다면 나는 망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의 하나님 앞에서 잘못 행동할 계기를 제공하지 마라. 너의 신인 하나님이 대단한 분인 것을 알았다. 그리고 네가 하나님과 친하다는 것도 알았다. 네가 그것을 빌미로 나에게 거짓말을 한다면 그것은 갑질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셈입니다.
아비멜렉은 블레셋의 왕이고 아브라함은 일개 유랑민이자 이주민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을의 위치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아브라함이 갑의 위치에 서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이 칼자루를 쥔 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것을 정리해 보면 ‘아브라함, 내가 당신에게 잘못하는 일이 없도록 당신이 날 좀 도와주시오. 하나님의 측근으로써 제발 내게 거짓을 말하는 갑질을 하지 마시오. 내 행동이 하나님 눈 밖에 나서 망하지 않게 도우시오.’라고 말했던 셈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 안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자 하는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가 큽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언제나 슈퍼 갑이신 하나님을 애착하는 자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주권을 행하실 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좋아하여 떨어지기 싫어하는 을들을 중심축으로 삼으십니다. 성경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관계를 통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어떻게 보면 웃기기도 합니다. 아비멜렉이 지레 겁을 먹어서 그렇지, 아브라함은 상호불가침조약 따위를 체결할 상대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죽었다 깨어나도 아비멜렉이 두려워할 만큼 호전적 인물도 아니며, 아비멜렉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아비멜렉에게 손해를 끼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아비멜렉은 스스로 을의 위치가 됩니다. 또 한 번 아브라함에게 잘못을 저지른다면 아브라함의 신인 여호와 하나님에게 맞아 죽을 것이라고 여기며 마음에 두려움이 가득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웃음이 아빠’가 된 이후에 일어난 첫 번째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갑의 의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내가 애착하는 슈퍼 갑 하나님에 의해서 있게 되었다고 믿는 을의 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 또한 ‘웃음이 아빠’가 될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의 좋음이 쌓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두 팔 걷어붙이시고 마음 놓고 을의 의식을 갖고 있는 우리를 갑으로 세워서 삶의 역사를 이끌어가신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을 통해 보여줍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갑의 의식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실이 이후에 이어지는 우물 사건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아비멜렉과 군대 장관 비골은 아브라함과 협상합니다. 떠돌이 이주민 아브라함을 갑의 위치에 세우고 자신들을 을의 위치에 두고 조약을 체결하기를 요구합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그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합니다. 25절을 보면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은 일에 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책망하매’라고 번역된 부분은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훈계를 했다는 뜻이 아니라 사건을 알렸다는 뜻입니다. 아비멜렉이 상호불가침조약을 요구하는데 이미 그 조약에 위배 되는 사건이 있었음을 알렸던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과의 관계에서 갈등이 없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아비멜렉의 마음과는 다르게 그 종들은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은 적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상호불가침조약을 체결하자고 하니 좋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우물은 죽고 사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가족들과 함께 판 우물을 당신의 종들이 빼앗은 일이 있습니다.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라고 물은 셈입니다. 26절을 보면 이에 대한 아비멜렉의 대답이 이어집니다. “아비멜렉이 이르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에야 들었노라”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런 일이 있는 줄도 몰랐다. 네가 나에게 와서 이야기했다면 당장 그 문제를 해결해 주었을 것이다.’라고 한 셈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우물을 빼앗겼을 때 왜 아비멜렉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을까요? 여기서 아브라함의 마음가짐이 드러납니다. 아브라함은 슈퍼 갑이신 하나님을 애착하고 있습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슈퍼 갑이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비멜렉의 종들이 와서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의 종들을 이 세상에서 갑으로 인정합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의 종들에게 우물에 대한 주도권이 있음을 인정한 이유는 그들 위에 계시는 슈퍼 갑이신 하나님을 애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슈퍼 갑이신 하나님을 놓치지 않으려면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 대해 슈퍼 갑의 주권과 주도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에 대해 스스로 주도권 갖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 대해서 슈퍼 갑이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가 갑이 되고자 한다면 슈퍼 갑이신 주권자 하나님을 놓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슈퍼 갑이신 하나님을 놓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자기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주도권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아비멜렉의 종들의 주도권조차 인정하여 그들 앞에서 을이 되었던 것입니다.
아비멜렉과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을 만나러 그랄을 방문하자 그곳에 있던 아비멜렉의 종들 또한 왕이 자기들의 영역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왕과 군대 장관이 하는 행동을 보니 자기들이 갑질을 해서 우물을 빼앗은 아브라함 앞에서 ‘너의 하나님이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네가 중간에서 역할을 잘 해달라’며 부탁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비멜렉의 종들은 자신들이 갑의 위치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은 자신을 을의 위치로 낮추고 아브라함을 갑의 위치로 올립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는 종들은 크게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절대로 갑의 위치가 되고자 한 적이 없습니다. 자신이 슈퍼 갑이신 하나님의 측근이고 하나님을 애착하고 있다고 해서 슈퍼 갑이신 하나님을 등에 업고 갑질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슈퍼 갑이신 하나님은 을의 의식을 갖고 있는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이 세상에서 갑의 위치에 세우시고 아브라함과 관계하는 사람들을 이끌어 가십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아브라함은 갑이 되고자 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가 아비멜렉에게 들어갔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지키셨는지를 알고 있었지만 그 슈퍼 갑이신 하나님을 등에 업고 세상 사람들에 대해 갑이 되고자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 봅니다. 예배당에서 교인들끼리 다툼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립하던 한쪽의 대표가 갑자기 암에 걸려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반대쪽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들 편을 들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들이 의롭고 정당하다는 느낌을 넘어서서 갑의 의식을 갖게 됩니다. 한편 대표가 암에 걸려서 죽은 사람들은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나 싶어서 크게 위축됩니다. 이것은 절대로 올바른 신앙인의 태도라 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사건을 통해서 아비멜렉이 혼비백산한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아비멜렉의 종들이 우물을 빼앗았을 때 아비멜렉을 찾아가 큰소리를 칠 수도 있었습니다. 아비멜렉에게 혼쭐을 내신 하나님의 측근으로서 기세등등할 수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이 말만 했다면 우물을 빼앗긴 문제는 금방 해결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의 종들에게도 슈퍼 갑이신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오직 슈퍼 갑이신 하나님을 잃고 싶지 않다는 바람만을 가지고 있었기에 을의 태도를 보였던 것입니다.
한편 이와 대비되는 모습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서 잘 드러납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온 세상이 유대 민족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측근 됨을 이용하여 세상에 갑질을 하려는 태도를 선민의식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특권 의식과 예외 의식이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특권 의식과 예외 의식이 인간관계에 적용되면 영적인 갑질이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원수가 생기면 하나님께 ‘저 원수를 죽여주시옵소서.’라고 영적인 갑질을 시도합니다. ‘감히 내 우물을 빼앗아? 두고 봐라.’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중동 땅에서 우물은 생존과 직결된 무척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우물을 빼앗긴 뒤에도 따지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우물을 팠을 것입니다. 이 우물을 빼앗은 종들은 자신들의 주인 아비멜렉이 아브라함 앞에서 을의 태도를 보고 무척 겁을 먹었을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뒤집힐 줄은 몰랐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마음에서 사라를 포기했던 것은 하나님이 가라고 해서 가는 곳마다 주도권을 쥔 갑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이 주도권을 쥐고 갑이 되는 것은 슈퍼 갑이신 하나님이 정하신 일이라고 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슈퍼 갑이신 하나님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의 주도권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이는 곧 아내 사라를 지킬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마음에서 슈퍼 갑이신 하나님을 지키기 위해 사라를 버리는 결정을 내렸던 것입니다. 사라와는 떨어질지언정 슈퍼 갑이신 하나님과는 떨어질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사라를 떠나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슈퍼 갑이신 하나님을 잃지 않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을이 되는 ‘웃음이 아빠’인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는 항상 갑의 위치에 세우십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두 번이나 버리면서까지 철저하게 을의 위치를 지키며 갑의 주도권을 인정했습니다. 슈퍼 갑이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갑이 되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하나님의 주권을 넘어서서 선할 수도 없고 악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슈퍼 갑이신 하나님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는 자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어떤 상태이든지 나와 만나는 동안에 주도권은 그에게 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사라 때나 우물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여지 없이 을의 의식을 가진 자를 중심으로 삼으실 것입니다. 을의 의식을 갖는 이유는 세상에서 만나는 사람이 주도권을 쥐고 있음이 슈퍼 갑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슈퍼 갑이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사람들 앞에서 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을의 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을의 의식을 갖는 자를 중심으로 삼으십니다.
모든 사람은 관계에서 갑이 되기를 원합니다. 심지어 계약상으로 을의 위치라고 명시된 사람도 자기에게 유리한 조건의 계약을 이루고자 주인에게 부탁합니다. 하지만 슈퍼 갑이신 하나님께 애착하는 사람들은 평생을 을의 의식에 갇혀 삽니다. 을이면서도 행복한 이유는 하나님의 좋음이 쌓여서 모든 상황에서 이삭으로 상징되는 ‘웃음이’를 낳기 때문입니다. ‘웃음이’를 낳은 자들의 을의 의식은 팔자와 운명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을의 의식을 가진 자들을 실질적인 갑의 위치에 세우시고 그 사람을 중심으로 주변 상황을 주권적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33~34절을 보면 이러한 사건 뒤 아브라함이 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 그가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냈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에셀 나무는 사막 같은 지형에서도 굳건하게 잘 자라는 단단한 나무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에서 여러 날을 지냈다는 것은 환경적으로도 안정적 상황이 오래 지속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에셀 나무를 심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불렀던 것은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맺은 계약을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었음을 의미합니다. 아비멜렉과의 계약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영원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을인 자임을 확인하였던 것입니다. 슈퍼 갑이신 하나님과 을의 관계만이 영원한 단단함이라는 것을 알고 노래하였던 것입니다.
슈퍼 갑이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웃음이 아빠’들은 하나님을 애착하여 잃기 싫어서라도 모든 것을 무릅쓰고 만나는 상대방의 주도권을 인정하며 갑으로 상대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그 ‘웃음이 아빠’들을 당신의 주권을 펼치시는 역사의 기준으로 삼으십니다. 이것이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슈퍼 갑이신 하나님을 애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 안에서 슈퍼 갑이신 하나님을 애착하는 것을 은퇴 없는 직업으로 삼고, 생을 마칠 때까지 철저한 을의 의식으로만 일관해 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안에서 마음 놓고 하나님께만 애착하는 은퇴 없는 직업을 주셨습니다. 이 직업 때문에 우리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죽을 때까지 그리스도 안에 마음이 머물며 슈퍼 갑이신 하나님을 잃지 않기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을의 의식을 갖게 하시고 상대방을 갑으로 섬기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