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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태초의 안식에서부터 스텝 바이 스텝>의 줄거리 :
엿새 동안의 창조가 끝나고 안식하시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이 태초의 안식 때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이 처음으로 만나게 됩니다. 이 만남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이 '여호와' 즉 '스스로 있는 자'로서 불리기를 원하십니다. 스스로 있는 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여호와로 부르면서 만남을 가진 인간에게 이제부터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인간의 삶은 어떤 삶이 될까요? 이 대답을 하기 전에 먼저 우리도 매일의 삶을 태초의 안식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태초의 안식에서부터 스텝 바이 스텝
(창세기 2:1~9)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4.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5.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저는 여러분의 삶의 형편과 처지와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먼저 태초의 안식을 회복하고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대로 한 걸음씩 따라가면, 해결되지 않을 문제가 없고 에덴동산이 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삶의 문제에 연연하지 말고 매일매일 태초의 안식을 이루어 가면 당황하거나, 불안해하고, 근심하고,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느긋한 마음을 가지고 태초의 안식을 회복하고, 이 세상의 삶은 창조주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버지로서 살아계시고,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사랑하시며, 모든 것을 생각하심으로 열리는 것이기에 스텝 바이 스텝으로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본문은 태초의 안식일에 관한 내용입니다. 구약과 신약에서 언급되는 모든 안식의 기본 정신이 바로 태초의 안식일 속에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의 창조 사역을 매듭지으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십니다. 이 안식하시는 날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하나님은 그냥 쉬셨을까요? 수억, 수조, 수경의 피조물들 하나하나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일하시고 지쳐서 쉬셨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 이루신 창조의 단계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만드신 사람을 안식일에 만나셨습니다. 이 만남을 위해서 하나님은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이 창조의 목적입니다. ‘우리’라고 하시는 삼위 하나님 이외에 인격적으로 그 삼위 하나님의 관계에 참여할 또 다른 존재를 만드시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늘의 해와 달과 별과 땅과 바다와 식물과 동물을 만드신 근본 목적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사람을 만나는 안식일은 하나님께도 기대가 큰 날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3절에서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태초의 안식을 회복하면 우리의 삶은 반드시 에덴으로 허락됩니다. 태초의 안식에서처럼 하나님을 만나면 삶은 반드시 에덴이 됩니다. 3절까지는 태초의 안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이어서 에덴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4~6절을 보면 태초의 안식에 이어서 또 다른 창조의 이야기가 반복되는데, 이것은 안식을 통해 이루어지는 만남의 의미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내용을 보면 다소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1장에서 셋째 날에 하나님은 온 땅의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섯째 날이 끝나고 안식에 도달하셨습니다. 그런데 아직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기에 땅을 갈 사람도 없었고, 들에는 초목이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고,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모순된 이야기로 본다면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창세기 1장은 단순히 창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소개한 것입니다. 창조에 관한 언급은 창조주 하나님을 소개하기 위하여 꼭 필요한 만큼만 등장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인 사람이 상대해야 될 창조주가 누구인가를 알려주시는 대목이지 창조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창세기 2장은 그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부르면서 인격적으로 관계해야 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단순히 창조의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은 사람이 상대해야 될 창조주 하나님이 누구냐를 보여주었다면, 창세기 2장은 하나님이 상대하실 사람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하며 ‘창조에 대한 이야기를 써야 한다.’라고 생각했다면 바보가 아니고서야 1장에서 셋째 날 온 식물을 다 만드셨다고 한 후에, 곧바로 이어지는 2장에서 들에는 초목이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없었다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삼류학자들은 이 부분을 다른 사람이 쓴 것을 갖다 붙인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행여나 다른 사람은 쓴 것을 갖다 붙였다고 할지라도 바보가 아니라면 모세가 모순되는 이야기를 그대로 붙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오해는 성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함으로부터 나타납니다.
태초의 안식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가면 창조에 대한 이야기가 왜 반복되는지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1장에서 셋째 날에 식물을 만드셨다는 것과 모순되어 보이는 이야기가 왜 나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태초의 안식이란 사람이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를 상대하면서, 있게 된 자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1장에서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등장했지만, 2장에서는 여호와라는 이름이 불쑥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창조주’를 가리킨다면,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갑자기 여호와라는 이름이 등장한 이유는 태초의 안식이 언급되면서, 안식일에 창조주 하나님과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만남을 염두에 두시며 피조물인 사람에게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여호와로 불리시기를 바라셨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관계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여호와로 부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여호와 대신에 예수님에 의해 아버지로 대체됩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여호와로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 당신은 여호와로서 스스로 있는 자이십니다. 저는 스스로 있는 자이신 당신에 의해서 있게 된 자입니다. 있게 된 자가 스스로 있는 자이신 당신을 뵙고 만납니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본문 5~6절은 이 만남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상태의 말씀을 보면서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생각을 합니다. ‘이제부터 사람이 할 일이 태산같이 많겠구나. 땅을 개척하고 개간해야 되니 얼마나 많은 일을 해야 할까?’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와 저주에 찌든 상태에서 나오는 생각임을 가르쳐주시기 위해, 일부러 천지가 창조될 때의 상태를 말씀하시며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이 없고, 들에 초목이 없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않았으며, 안개만 지면을 적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를 좀 더 분명히 하기 위해 8~9절에 이어지는 에덴동산에 대한 언급을 비교해 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라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들에 초목이 없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않았으며, 안개만 지면을 적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 대해 모든 사람은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땅을 개척하고 개간해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사람이 온전하고 안정된 처지에서 살기 위해서는 개척과 개간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만 한다.’라는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7절에서 사람을 만드신 이야기를 하신 후에 곧바로 에덴을 창설하시고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가득한 환경을 삶의 터전으로 제공하십니다.
5~6절과 비교해 보라는 듯이 8~9절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5~6절을 읽으면서 ‘내가 삶의 터전을 확고하게 만들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갖은 수고와 노력을 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에덴동산을 주시는 하나님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생각임을 가르쳐주고 계신 것입니다. 사람이 개척과 개간을 위해 모든 노력을 쏟아부어야 할 것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은 그러한 상황을 사람에게 과제로 넘기시지 않습니다. ‘이제 네가 개척하고 개간해서 열심히 살아라.’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에덴동산을 만들어 제공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이 에덴동산은 어떻게 해야 이루어질 수 있고 무엇에 뒤따라오는 것일까요?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삶의 터전으로 만들어 주시는 곳이며, 에덴동산은 태초의 안식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 태초의 안식에서와 같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룰 수만 있다면, 하나님은 이 땅에서 나의 삶을 반드시 에덴동산으로 허락하십니다. 내가 노력해서 개척하고 개간해야 하는 상황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태초의 안식에 일어났던 일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아담에게 있어서 태초의 안식은 인생의 첫째 날이었습니다. 이 첫째 날에 아담에게 유일한 상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관계하면서 여호와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여호와로 부른다는 것에는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 저는 있게 된 자입니다.’라는 의식이 들어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담에게는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이 출발점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이 밀착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태를 인생의 시작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태초의 안식 상태에서는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재산도 없고, 집도 없고, 명예도 없고, 할 일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계실 뿐입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상대자이고, 하나님이 전부이며, 하나님 외에는 신경 쓸 대상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온통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과 밀착을 이룹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삶을 시작하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이 나타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제부터 개척하고 개간해야 한다. 인생의 평안한 바탕을 위해서 끝없이 노력해야만 한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태초의 안식에서 아담이 하나님을 만난 것처럼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유일한 대상이고 하나님이 전부입니다. 하나님과 밀착하고 신경 쓸 대상을 하나님 한 분만으로 붙잡습니다. 이러한 태초의 안식 상태에서는 자기 인생을 위하여 개척하고 개간하며, 평안한 바탕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생각은 완전히 사탄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기독교 종교인으로 이러한 생각을 갖고 살았습니다. 우리가 애쓰고 노력해서 인생의 바탕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노력과 수고의 과제를 끌어안은 채 하나님을 만나려 했고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에서는 태초의 안식에서의 만남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상대자이고 전부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밀착될 수 없고, 하나님만 신경 쓰는 상태의 만남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미 마음속에는 이 세상이 밀착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 세상일, 세상 문제가 마음에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태초의 안식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태이기에 이제부터 내가 땅을 개척하고 개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있는 자와 있게 된 자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로 부른다는 것, 신약에서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나를 있게 된 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있게 된 자로서의 자리를 분명히 붙잡으면, 하나님은 이 세상의 삶을 내가 개척하고 개간하는 자가 되게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에덴동산을 만들어서 안겨 주십니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관계성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아담은 생애 첫날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로 좋은 대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인생이 아무리 길어도 첫날 갖게 된 하나님보다 더 좋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담의 생애란 처음부터 좋음을 가진 상태에서, 그 좋음 때문에 기쁨과 만족을 풀어내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5~6절까지의 내용을 보면서 ‘이제 사람이 개척하고 개간해야 한다. 이제부터 할 일이 많겠다.’라고 생각하는 언어체계와 가치체계의 세계관을 갖고 있는 사람의 인생이란 좋음을 풀어내는 과정이 아니라 좋음을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본래 좋음이란 인생의 시작에서, 하루의 시작에 갖지 않는다면 살면서 추구하거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열심히 살고, 수고롭게 살고, 땀 흘리며 살아도 좋음은 가질 수 없습니다. 시작 때 가질 수 없다면 영구히 가질 수 없습니다. 좋음은 추구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탄이 와서 ‘좋음을 추구해서 가져라! 개척하고 개간해서 좋음을 가져라!’라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천하의 모든 사람이 이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서 인생의 모토로 삼고 오늘도 기쁨을 향하여 좋음을 가지려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아침에 일어나면서 최고의 좋음을 가지셨습니까? 삶은 최고의 좋음을 가진 시작점에서부터 생긴 기쁨의 에너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내 생애의 연료이자 에너지의 원천입니다. 삶은 기쁨을 풀어내는 과정이지 기쁨을 가지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을 갖는 것은 태초의 안식을 통해 가능합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아무 대상도 신경 쓸 수 없을 때, 하나님과의 만남은 온전히 이루어지고 하나님과의 밀착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과 밀착함으로써 세상에서는 더 이상 얻을 수 없는 기쁨을 갖게 됩니다. 이로부터 삶의 과정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열리는 대로 스텝 바이 스텝으로 나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옮겨나가며 처음 만난 하나님으로 생겨난 기쁨을 풀어내는 과정이 인간에게 주어진 본래의 에덴동산에서의 삶입니다.
인간은 타락하고 삶의 내용이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기독교 종교인으로 사는 동안에도 타락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태초의 안식에서처럼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은 당신을 여호와로 부르게 하시고,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십니다. 그러하신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에게 ‘너의 삶을 개척하라. 너의 삶을 개간하라. 너의 삶의 바탕을 만들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삶의 형편과 처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태초의 안식에서처럼 하나님을 만났을 때 이루어지는 기쁨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습니다. 이 기쁨은 하나님과 밀착되어 생기는 기쁨입니다. 따라서 내 몸으로 만나는 삶의 환경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태초의 안식에서 아담이 하나님과 밀착했던 것처럼 하나님과 밀착할 수 있다면 삶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습니까? 가족관계나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습니까? 경제 사정이 문제입니까? 그러나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시장에서든 태초의 하나님과 만남을 이룰 수 있습니다. 문제가 되는 모든 요소가 없는 맨 마음의 상태로 하나님과 처음으로 만남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태초의 안식에서 이루어지는 만남입니다.
이러한 만남이 이루어진다면 아버지 때문에 생긴 기쁨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이제 문제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대로 순서를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 때문에 생긴 기쁨을 그대로 표현하면 에덴이 되는 것입니다. 돈이 많아야 에덴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하고 장수해야 에덴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문제가 형통해야 에덴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태초의 안식에서처럼 하나님을 만나면 그다음의 삶은 에덴이 됩니다. 돈이 있든 없든, 형통이든 불통이든, 가족관계가 좋은 나쁘든, 내 삶은 에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의 기도를 가르쳐주시며 첫머리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아버지는 구약에서의 여호와 하나님을 대신합니다.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의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선민 한 사람을 관계하실 때 당신을 부르기를 원하셔서 주신 이름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있는 자라는 것은 나는 곧 있게 된 자임을 의미합니다. 있게 되었음이란 태초의 안식에서처럼 하나님을 만날 때 매일매일 내 앞에 펼쳐지는 삶을 에덴으로 살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후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호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못 박으신 것은 우리의 마음 상태를 반영합니다. 지금 나의 마음은 하늘에 있지 못하고 땅에 있습니다.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매듭지어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더욱 아버지가 계시는 하늘로 가야만 합니다. 마음에 매듭짓고자 하는 중요하고 급한 일들이 있기에 태초의 안식에서처럼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마음이 하늘로 가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을 통해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길을 만드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며 땅을 떠나 하늘로 가라는 것입니다.
땅에서 할 일이 많이 있기에 떠나야 합니다. 땅에 있는 많은 일들을 개척하고 개간하는 것은 본래 나의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태초의 안식에서처럼 아무 다른 대상 없이, 오직 하나님만을 대상으로 삼아서 밀착하는 관계를 갖는다면, 이 땅에서는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생기는 기쁨의 에너지로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 앞에 놓아주시는 대로 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있게 된 자이고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이 있게 된 인간에게 상황을 펼쳐주시는 대로 스텝 바이 스텝으로 가는 것이 인간에게 허락하신 본래의 모습입니다. 마음이 하나님과 만나는 태초의 안식 상태가 유지된다면 생각나는 대로 하는 모든 일이 아버지의 생각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태초의 안식 상태가 유지되어 마음이 하나님을 유일한 대상으로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태초의 안식에서 나는 있게 된 자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이시며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내 앞에 있게 하신 것들을 스텝 바이 스텝으로 만나며 기쁨을 표현하면 됩니다. 문제는 우리 마음에 끊임없이 세상이 자리 잡고 들어앉아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종교가 복음을 잃고 망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목사의 마음에, 교인의 마음에, 교황의 마음에, 사제의 마음에, 세상이 들어와 앉았습니다. 그럴 때 세상 문제를 붙잡고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복음이 없어지고, 진정한 기독교인도 없어졌으며, 하나님을 실감하며 실제로 하나님과 연결된 자들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태초의 안식에서처럼 하나님은 아담에게 첫 번째 유일한 대상이자 전부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첫 번째 유일한 대상이자 전부일 때 실제 만남은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누구도 마음에 세상이 들어온 상태를 문제 삼지 않습니다. 들어온 문제 자체를 해결하려고 할 뿐, 내 안에 세상 문제가 들어와 있음을 문제 삼는 자가 없습니다. 이로부터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만 남았고, 교리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하나님과의 만남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짜 유일한 최고의 기쁨을 가지고 그 기쁨의 에너지로 살아가는 삶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삶이 마음에 들어온 상태에서 급한 일은 내가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찾더라도 삶이 마음에 들어온 후라면 결국 내가 나서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이자 아버지를 부르는 있게 된 자의 태도가 아닙니다. 스스로 있으려고 하는 자가 되어버렸고, 심지어 하나님까지 동원해서 스스로 있으려고 시도하는 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문제를 마음에 담은 나를 문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문제를 안고 있는 나는 십자가에서 통째로 죽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생활화해야 하는 이유는 태초에 아담이 하나님을 만날 때처럼 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최초이자 유일한 전부의 대상으로 만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내 속에는 하나님 이외에 세상 것들이 걱정, 근심, 염려, 야심, 소망과 같은 형태로 들러붙어 있습니다. 이러한 나를 죽이고 태초의 안식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야 합니다.
태초의 안식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집니다. 태초의 안식에서 아담과 하나님이 만났듯이 우리는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과 만나고 밀착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내 안에서 첫 번째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배우자가 첫 번째이고, 자녀가 첫 번째이고, 몸이 첫 번째이고, 내 인생이 첫 번째이고, 눈에 보이는 문제들이 첫 번째인 상태에서는 하나님은 첫 번째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마음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마음은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가고 비로소 하나님을 첫 번째 유일한 전부의 대상으로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태초의 안식에서처럼 당신을 만나는 사람에게 절대로 개척하고 개간해야 될 삶의 과제를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부터 나를 만나서 생긴 기쁨을 사방에 풀어내고 뿜어내라. 내가 너에게 허락하는 일들을 기쁨의 에너지로 한 걸음씩 따라와라.’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제목에서 말씀드린 태초의 안식에서부터 스텝 바이 스텝의 의미입니다.
삶에 어떤 문제가 생겼더라도 당황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걱정하거나 불안해하거나 근심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의 일들을 싫어하지도 말고 좋아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좋아해서 있기를 바람은 스스로 있는 자임을 자처함이고, 싫어서 없어지기를 바람도 스스로 있는 자임을 자처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나는 있게 된 자입니다. 내가 처한 상황은 내가 나서서 바꿀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상황도 있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할 일이란 스스로 있는 자로 착각하며 문제를 끌어안고 씨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세상을 담은 마음 자체를 죽여버리고, 하나님만을 최초의 유일한 전부로 상대하고 만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가지고 스텝 바이 스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에덴동산의 삶입니다.
아무쪼록 오늘 하루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아담과 하나님 사이에서 이루어졌던 태초의 안식에서의 만남으로부터 스텝 바이 스텝으로 살아가시며,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오늘도 에덴을 살았구나.’라는 말이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사람 눈에는 아무리 안 좋아 보여도, 내가 에덴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환경적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아버지를 최초의 유일한 전부로서 만나지 못하게 하는 세상 것들과 함께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태초의 안식에서처럼 만나게 해주셔서,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에덴을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맞이함으로써 기쁨을 표현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