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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여호와 이레, 준비된 대로만 사는 법>의 줄거리 :
여호와 이레. 여호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준비하신 것을 보게 되는 현장은 여호와의 산 모리아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이레로 준비된 대로 삶을 살려면 내 삶의 현장을 여호와의 산 모리아로 만들어야 합니다. 즉 이삭을 받치는 현장으로 만들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서는 하나님이 가장 아깝다는 사실을 실제로 보여야만 합니다. 그러면 내 삶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그대로 진행할 것입니다.
여호와 이레, 준비된 대로만 사는 법
(창세기 22:12~24)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15.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19. 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
여호와 이레는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하면 여호와께서 준비하신 대로 살 수 있을까요? 이러한 주제를 가지고 함께 하나님 말씀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대로 사는 삶을 경험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연히 적절한 만남을 경험한다든지, 적절한 상황이 주어진다든지, 적절한 사건이 주어진다든지 하는 것은 사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부부가 ‘그때 내가 대학로에 가서 연극을 보지 않았다면 당신을 만나서 결혼하지도 못했을 거야.’라고 합니다. 이런 식의 우연한 경험에 대한 고백은 없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여호와 이레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준비하신 대로 사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날 마지막으로 태어날 사람까지 아담 안에서 계획하신 바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내 삶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다 계획하시고 준비해 두셨습니다. 이것은 나의 죄와 악함을 고려하실 필요가 없을 때 성취될 수 있는 삶입니다. 그러나 아담이 죄를 지으면서 아담의 후손인 우리에게도 죄는 임했고, 하나님께서는 본래 계획하시고 준비하신 대로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하나님의 이끄심은 죄와 악을 깨닫게 하시고, 죄인 됨의 악함을 없애고 억제하고 죽일 수 있는 십자가로 향하게 하시는 섭리적 주권으로 바뀌었습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언급된 여호와 이레의 내용대로 사는 삶이란 십자가를 통과하기 전에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과함이란 곧 세상에 대한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올인하여 마음을 다 쓰고 하나님만을 추구하느라 몸이 놓여있는 이 세상 삶의 현장을 전혀 의식조차 못하는 상태가 될 때, 그 삶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대로 이끌려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의 경험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군에 입대했을 때 논산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민간인으로 살다가 군대에 들어가는 상황은 큰 변화입니다. 훈련소의 모든 상황이 낯설고 힘듭니다. 그렇기에 하루의 훈련이 끝나고 나면 다 곯아떨어집니다. 그런데 조교들이 불침번을 서며 돌아보다가 기겁을 할만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하루 종일 고된 훈련과 기합을 받았으면 잠을 자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님 생각하고 기도하느라 앉아있었습니다. 불침번을 서던 하사가 저를 보고는 ‘너, 이 자식 미쳤어?’하고 깜짝 놀라 외쳤던 것이 기억납니다. 당시를 생각해 보면 제 의식 속에서 입대하여 훈련을 받는 것은 삶의 주요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한 일이었고, 빨려 들어가듯이 하나님을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훈련을 받는 것조차도 곁다리로 여겼던 것입니다.
이것은 저에게만 국한되는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심각한 일이 주어져도 마음은 다른 곳을 향할 수 있습니다. 제가 스데반 집사님을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훈련받은 것을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와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람은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도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이 본래 창조적으로 준비하신 모든 일들이 여호와 이레의 내용대로 진행될 수 있습니다.
삶은 언제나 투 트랙(two track)으로 진행이 됩니다. 내 마음에서 잠시라도 하나님이 잊히고 잃어버릴까 두려워하여 하나님을 생각하느라 하나님께 올인합니다. 그럴 때 내 의식 속에서 몸이 처해 있는 상황은 첫 번째 대상이 아닙니다. 이제 내 삶은 의식에서 두 번째 세 번째 변두리로 밀려납니다. 그럴 때 여호와 이레의 내용대로 삶이 진행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13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급하게 하늘로부터 사자를 보내셔서 멈추게 하셨고, 이때 아브라함은 눈을 들어 살펴본즉 숫양의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어서 14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준비된다는 말은 ‘보게 된다.’라는 뜻입니다. 여호와 이레를 풀어보자면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된 것을 보게 되리라, 혹은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것을 여호와의 산에서 보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숫양을 이삭을 바치던 현장에서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삭을 바친 모리아 산은 앞으로 솔로몬 성전이 지어지게 될 장소가 됩니다. 성전의 핵심은 번제단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번제단은 중요합니다. 번제단은 어린 양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고백하는 장소입니다. 지성소의 법궤 안에는 십계명 돌판이 있었습니다. 이 돌판은 하나님의 이름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하나님의 존재감, 하나님의 좋음, 하나님의 주체성에 대해서 올바른 태도를 지니지 못하고 사는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예표하고 있는 어린 양과 함께 번제단에서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전의 존재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성전의 존재 의미는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간 내가 어린 양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소중하게 느끼며 마음에 담고 있는 자기를 죽여서 이삭이 없는 자기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이삭은 너무나 소중한 존재였기에 마음에서 하나님의 강력한 라이벌이 될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마음 안에 있고 하나님이 마음 밖에 계시는 상태를 죽여버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마음 안으로 들어오시고 이삭이 마음 바깥으로 던져지는 상태로 부활하게 됩니다. 이것은 십자가 사건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현장에서 여호와 이레라는 말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러한 본문을 보면 다소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여호와 이레는 ‘여호와의 산에서 여호와가 준비하신 것을 보게 되리라.’라는 뜻입니다. 이 말이 왜 굳이 이제야 등장하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살면서 마주하게 되는 것들 중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하시지 않은 것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죄악과 저주에 찌들어 있기에 본래 하나님께서 창조적이고 자발적으로 준비하신 것들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십자가까지 인도하시는 교정적 주권의 과정 중에서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드렸듯이 하나님께서는 창조적이고 자발적인 주권으로 우리의 삶을 준비하셨지만 죄악과 저주에 찌든 우리는 그대로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를 이끄시는 교정적 주권 속에서도 임시방편이나 임기응변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것이 아니라 준비하신 대로 이끌어 가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준비하심을 경험하는 것은 본문에서 언급된 여호와 이레의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염두에 두시고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십자가 복음 방송을 듣는 분들에게 ‘어떻게 십자가 복음 방송을 접하게 되셨느냐?’라는 질문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중에서는 ‘기분이 나쁠 정도로 보기 싫었는데 유튜브에서 자꾸 십자가 복음 방송의 섬네일이 뜨기에 보게 되었다.’라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뭐 이상한 것 하나가 떴다고 여겼는데 그것이 1년이나 반복됩니다. 결국 1년 만에 한 번 들어보았는데 ‘어! 이상하다?’라고 느끼시고 말씀을 듣게 되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교정적 주권대로 이루어진 일이지만 이것도 여호와 이레의 의미에 부합하지는 않습니다. 여호와 이레는 하나님께서 교정적 주권이 아닌 창조적 주권 아래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시는 내용들을 가리킵니다. 문제는 이렇게 준비된 일들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이 강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세상에 하나님께서 준비하시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을 개척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의 삶을 이루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죄와 타락만 없으면 준비된 곳이 에덴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이레의 삶을 산다는 것은 준비된 에덴을 산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죄악에 찌든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에덴 바깥으로 나가서 살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에덴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십자가로 인도해 주시는 과정을 진행하십니다. 그 과정에서 준비하신 대로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준비된 본래의 에덴을 회복하여 여호와 이레의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버려진 에덴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에덴입니다. 그 준비해 놓으신 에덴을 어떻게 살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여호와 이레의 내용이 드러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 삶의 현장을 모리아 산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14절에서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여호와의 산은 모리아 산입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직장이 여호와가 준비하신 에덴이 되기를 원한다면 먼저 직장을 여호와의 산 모리아 산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모리아 산에서 벌어진 일은 바로 이삭을 죽이는 곳입니다. 이삭을 죽임으로써 지금 주어진 현장을 여호와의 산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삶의 현장을 여호와의 산으로 바꾸면 하나님께서 창조적이고 자발적으로 준비해 놓으신 그 내용들이 현실로 보이고 나타납니다.
지금 내 삶의 현장 상태가 어떤지는 상관없습니다. 돈이 없습니다. 몸이 너무 아픕니다. 자녀들에게 문제가 많습니다. 배우자와 사이가 아주 좋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의 상태가 아주 많이 나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여호와 이레의 조건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내 몸이 놓인 자리에서 이삭을 바침으로써 주어진 상황을 여호와의 산 모리아 산으로 바꾸면 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을 때 숫양의 뿔이 수풀에 걸린 것을 보았듯이, 우리의 삶을 모리아 산으로 바꾸면 여호와가 준비하신 일들이 보이고 나타나게 됩니다.
지금의 상황이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입니다. 배우자가 어떻다, 자녀가 어떻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상황이 어떻든지 하나님이 창조적이고 자발적으로 보시기에 좋도록 내 삶을 위해 계획하시고 준비하신 것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여호와 이레는 아브라함의 삶에서 새삼스럽게 단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쭉 진행되고 있습니다. 여호와 이레는 모든 사람의 삶에서 늘 준비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딴짓을 해서 여호와 이레의 삶이 나타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이 나타나기만 하면 에덴은 이루어집니다. 첫 번째 여호와 이레는 에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위해 준비하신 현장에 이들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죄와 악이 있습니다. 죄와 악이란 빗나간 상태에서 말하고 행동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를 가장 빗나가게 하는 것은 어떤 현장에서든지 내 마음에서 가장 심각하고 가장 중대하게 여겨지는 이삭들입니다. 그 이삭들이 내 마음을 계속 빗나가게 만듭니다. 그 이삭들을 놓치거나 잃을 때 마음에서 너무 아까워서 견딜 수 없고 심지어 두렵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계속해서 나를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가게 하는 죄를 활성화시킵니다. 죄가 활성화되면 하나님이 준비하신 에덴이 상실되었던 것처럼 여호와 이레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여호와 이레의 내용대로 살기 위해서는 내 마음에서 이삭을 죽여야 합니다. 이삭을 죽임으로써 그 현장을 여호와의 산 모리아 산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삭을 죽이는 방법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가정에 있든 직장에 있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몸이 있는 현장을 모리아 산으로 바꿉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사장님의 칭찬, 승진, 월급 같은 것들입니다. 사장님의 칭찬이라는 이삭, 승진이라는 이삭, 월급이라는 이삭을 마음에서 신경 쓰는 동안에는 직장에서 하나님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잊거나 잃어버리는 것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제가 훈련소에서도 잠을 안 자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추구했던 것처럼, 직장에서도 하나님만을 추구하고 하나님께만 마음을 드리기 위해서는 이삭을 죽여야 합니다. 사장님의 칭찬이라는 이삭, 승진이라는 이삭, 월급이라는 이삭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그러면 직장은 모리아 산이 됩니다. 그럴 때 뿔이 수풀에 걸린 숫양이 보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본문의 내용입니다.
하늘에는 나의 삶을 창조적이고 자발적으로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준비된 것들이 있습니다. 제가 경험한 바로는 정말로 하나님께 마음을 다 드리면 여호와 이레의 삶은 이루어집니다. 군대 훈련소에서도 하루 종일 뺑뺑이를 치느라 피곤해서 하나님 생각을 많이 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룻밤이라도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이 너무 무서워서 다른 훈련병들이 잠을 잘 때 일어나서 하나님을 찾고 추구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하나님을 찾고 잠깐 잠이 드는데 예닐곱 번을 카투사 비행대 마크를 보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카투사에 배정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왜 날마다 미군 부대 배지가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관심도 없었고 그냥 꿈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젊은 사람들이 몰빵한다는 표현을 쓰는데 정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붙잡고 하나님께 마음을 몰빵한다면 삶은 투 트랙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내 마음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찾고, 내 삶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대로만 이루어져 나가게 됩니다. 하나도 내가 사는 삶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까지 여호와 이레를 오해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들은 뽀얗게 먼지가 쌓여 있는데도, 몸으로 맞이하는 이 세상 삶을 얼마나 열심히 살고자 했는지 모릅니다. 그야말로 있는 힘을 다하면서 잘살아 보겠다고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이유조차도 내가 삶을 이끌어 가는 주체로서 잘살아 보겠다고 찾았던 것입니다. 이삭을 바쳐본 적이 없습니다. 가는 곳마다 이삭을 붙잡고 살았습니다. 하나님 아까운 줄 모르고 하나님을 내팽개쳤습니다.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이삭들을 붙잡고 그것들을 아까워하며 그것들을 잘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까지 동원했습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이 이 세상 삶을 위해 준비하신 여호와 이레의 내용물들까지 다 버리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한편 본문 12절을 보면 고개가 갸웃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하셨습니다. 경외란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런데 전지전능하시고 불꽃 같은 눈으로 만인을 통찰하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당신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야 아셨다고 하십니다. 어떻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의아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속을 들여다보지 못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입으로 ‘하나님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유일한 좋음이십니다.’라고 고백하고 찬양하고 심취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내 마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소중한 이삭들을 죽이지 않으면 하나님을 아까워한다는 말은 완전히 공치사가 됩니다. 말로만 하는 하나님 사랑은 의미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서 장작더미를 쌓고 이삭을 결박하여 죽이고자 했습니다. 마음에서는 이미 이삭을 죽였습니다. 그렇게 할 때 여호와의 산 모리아 산에서 뿔이 수풀에 걸린 숫양을 봅니다. 사람들은 청년 이삭이 아버지의 이상한 행동에 순종한 것을 칭찬합니다. 아버지가 미쳤다고 거부하고 반항할 수도 있었습니다. 다만 이 이야기의 초점은 아브라함에게 맞추어져 있습니다. 9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라고 하였습니다. 이삭이 장작 위에 올라갔던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올려 놓았다고 언급합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들어서 올려놓았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표현상으로는 아브라함이 올려 놓았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이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려고 하는 것은 반항하지 않은 이삭의 순종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마음에서 죽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음에서 이삭을 죽일 수 있어야 합니다. 가정에도 이삭이 있고, 직장에도 이삭이 있습니다. 심지어 부부관계에서 이삭은 자존심일 수 있습니다. 남편으로서의 자존심, 아내로서의 자존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이 이삭인데 그 이삭을 바침에 있어서 이삭이라는 존재가 거부하고 반항해서 안되는 법은 없습니다. 내 마음에서 죽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본문에서는 25살이 되었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이삭의 태도에 대해서는 언급이 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억지로 결박하여 장작 위에 놓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놓았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을 보면 이삭도 엄청난 믿음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의 초점은 이삭이 아닌 아브라함에게 맞춰져야 합니다. 내 안에서 이삭을 죽이는 일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반항하지 않고 거부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 마음에서 이삭을 죽일 때도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남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죽이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서 죽이는 일이기에 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죽이고 안 죽이는 것은 내가 하기에 달린 것입니다. 이삭이라고 여겨지는 대상은 내 마음에서 가장 비중이 크다는 점에서 원수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원수를 죽이려고 한다면 원수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서 죽이는 일이기에 원수를 백번 천번 죽여도 원수는 나에게 반항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원수라고 못 죽인다는 이야기는 말이 안 됩니다.
지금 내 마음에서 비중이 크게 자리 잡고 있는 대상이 이삭입니다. 지금 주어진 삶에서 이삭을 죽이는 현장을 여호와의 산 모리아 산으로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그 방법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이삭을 죽이면 그 자리가 여호와의 산 모리아 산이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삶의 현장에서 이삭을 죽일 때마다 여러분의 삶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창조적으로 준비하신 여호와 이레의 창고로부터 삶의 내용들이 나타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현장이든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이삭을 죽일 수 있어야 합니다.
가장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이 없어지면 너무 두려워하는 것보다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릴까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더 큰 것이 여호와 경외입니다. 훈련병이 잠을 안 자고 하나님을 찾듯이 그렇게 하나님을 찾는다면 여러분의 삶은 잃어버렸던 에덴이 회복되고, 그 에덴 안에서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들로만 꽉 찬 삶이 진행되어 갈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몸이 당한 상황이 아무리 급박하고 심각해도 마음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잃어버리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게 해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하여 십자가 붙잡고 예수님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만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은혜를 주셔서 우리 삶의 모든 현장을 여호와의 산 모리아 산으로 바꿀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적으로 준비하신 것들을 눈으로 보며 삶이 진행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