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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복이 의미 없어야 복지가 시작된다>의 줄거리 :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이루어지는 복지의 삶은 실제로 어떻게 시작하는지를 보여주시는 본문입니다. 이 땅에서 복이 넘치는 상태가 내 마음에 아무런 의미가 없을 때 실제로 복지의 삶은 시작됩니다. 정말 지독한 아이러니입니다. 즉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복된 삶이 아무런 의미가 없을 정도로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의 복됨이 마음에서 실제가 되고 실감이 될 때 복지의 삶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좋음은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으려는 나날을 통해서 쌓여야만 실감이 됩니다.
복이 의미 없어야 복지가 시작된다
(창세기 23:1~20)
1.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가 누린 햇수라
2.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3. 그 시신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4.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
16.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을 따라 에브론이 헷 족속이 듣는 데서 말한 대로 상인이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
17.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 곧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과 그 밭과 그 주위에 둘린 모든 나무가
18. 성문에 들어온 모든 헷 족속이 보는 데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된지라
19. 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 (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
20. 이와 같이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이 헷 족속으로부터 아브라함이 매장할 소유지로 확정되었더라
본문에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일기로 생을 마치게 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사라를 장사하기 위해 헷 족속 에브론에게서 막벨라 동굴을 매입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0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매장할 소유지로 확정되었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의 의미가 깊습니다. 이러한 본문 중심으로 ‘복이 의미 없어야 복지가 시작된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이 세상에서 복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것들이 내 마음에서 아무 의미가 없을 때 복지의 삶은 시작됩니다. 복이 내 마음에서 아무 의미가 없는 별것 아닌 것이 되어야 복지가 시작된다니 참으로 지독한 아이러니며 역설입니다.
본문에서 언급된 대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백이십칠 세를 일기로 죽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칠십오 세에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사라의 나이는 육십오 세였습니다. 사라는 62년간의 유랑생활 끝에 죽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사라는 어떤 존재였을까요? 사라는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지독할 정도로 가장 많이 죽여야 했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사라는 그만큼 가깝고 소중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 죽여야 될 마음속 존재들 중에서 사라는 일등이었던 셈입니다. 아브라함은 평생을 날마다 사라를 마음에서 죽이기를 반복했을 것입니다.
한편 이처럼 아브라함이 마음속에서 영광의 하나님만을 지키기 위하여 셀 수 없이 죽여왔던 사라를 하나님께서는 바로에게서 지키셨고, 아비멜렉에게서 지키셨으며, 여종 하갈의 위협에서도 지켜내셨습니다. 생리적 불임의 상태로부터 지켜내셔서 열국의 아버지 곁에서 열국의 어머니의 자리를 차지하도록 지켜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평생을 마음속에서 아내 사라를 죽이고 또 죽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아내 사라를 아브라함 곁에서 열국의 어머니가 되도록 지켜주셨던 것입니다. 이제 그 아내 사라가 죽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슬픔이 어느 정도였을까요? 아브라함이 날마다 사라를 마음에서 죽여야 했던 이유는 사라가 그만큼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켜주셨던 사라의 죽음 앞에서 인간적인 정이 끊어지는 아픔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사라의 시신을 매장하기 위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막벨라 동굴을 매장지로 매입하게 됩니다. 그런데 정작 본문에는 사라의 죽음이나 장례에 대한 설명은 거의 언급되지 않습니다. 죽었다는 이야기와 매장했다는 이야기만 나옵니다. 그리고 우리로서는 불필요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헷 사람 에브론과의 대화가 길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왜 매장지를 매입하기 위한 대화를 이렇게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을까요? 여기에 무슨 영적 메시지나 복음의 내용이 담겨있을까 의아합니다. 이처럼 장황하고 상세한 설명이 등장하게 된 이유는 사라의 죽음이 하나의 계기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가나안 땅을 처음으로 매입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의 아주 작은 부분을 매입한 사건에는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가나안 복지의 삶이 시작됨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성경을 통하여 약속하신 복지의 삶이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어떻게 시작되느냐를 가르쳐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복지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사라의 죽음 이후에야 그 한 조각 땅을 처음으로 매입하게 됩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복지의 삶이 어떻게 시작되는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지의 삶에 대해 아브라함과 그 혈통인 이스라엘 민족에게 허락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복지는 우리에게도 약속해 주신 복지입니다. 오히려 가나안 복지는 아브라함 자신보다도 우리에게 해당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내용들이 주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한다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어야만 마음에서 하나님이 영광스럽게 보입니다. 아브라함 자손의 특징은 영광의 하나님을 마음에서 지켜내는 자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을 암흑 속에 밀어 넣어야만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하며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내고자 한다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복지는 곧 나에게 주신 약속이 됩니다.
그렇다면 내게 주신 그 약속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고 그 시작을 알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바로 복지의 삶이 시작되는 상황이 어떠한 것인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자기의 소유로 삼을 수 있는 첫 번째 땅을 매입하는 과정을 통해 복지의 삶이 시작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복지의 삶이란 쉽게 말해 날마다 복으로 가득 찬 삶입니다. 그렇다면 복이 무엇일까요? 앞서 우리는 여호와 이레의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사라의 죽음과 매장지를 매입한 사건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이란 여호와 이레가 뜻하는 대로 하나님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를 위해 준비하신 것들이 이 땅에서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이 나를 위해 준비하신 내용물이 복입니다. ‘복을 받았다’ 혹은 ‘복이 주어졌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란 하나님이 나를 위해 준비하신 것들이 이 땅에서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을 받은 것이고 복지의 삶입니다.
우리는 사탄의 언어 체계를 갖고 살아가는 80억 인류가 말하는 복을 성경이 말하는 복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아직도 전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당에서는 그러한 잘못된 믿음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렇기에 세상에서 일이 안 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지 못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모인 예배당은 마귀의 집단이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실패한 사람들은 예배당 안에서도 믿음에서도 실패한 사람으로 여김을 받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반대입니다. 믿음과 영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세상에서의 실패는 성공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마음에서 세상을 버리고 영광의 하나님을 향해 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실패한 것을 믿음에서도 실패한 것으로 간주하는 사고방식은 사탄의 언어 체계를 가진 마귀의 집단이 하나님의 이름을 오남용하고 망령되게 일컬으며 종교집단으로 전락한 상황을 그대로 노출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복이란 여호와 이레의 뜻대로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들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는 육체의 가시 혹은 사탄의 사자라고 부를 정도로 건강상의 문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조차도 죄악 됨과 저주에 찌든 인격 상태를 고려하셔서 허락하신 복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완전한 복지와 완전한 복을 위해 필요한 것임을 깨달아 고백했습니다. 우리 또한 나에게 사탄의 언어 체계가 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나의 느낌, 내가 받는 인상,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전부 죄와 저주에 찌든 입맛에서 나오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잊는다면 성경이 올바르게 해석되지 못한 채 곡해되고 오남용되며 믿음도 끝나게 됩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지독한 아이러니를 제시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본문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 중에 한 조각을 매입하는 장면을 통해 복지의 삶이 시작되려면 어떠한 상황이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여호와 이레의 사건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에 대해 20장 12절에서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는 아까워함과 경외함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아까워하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까워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단지 입으로 아깝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삶의 모든 현장에서 제일 소중한 대상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죽이는 역사가 있어야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을 아까워함을 인정하십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에는 아브라함의 형제인 나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22장 20절을 보면 “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알리어 이르기를 밀가가 당신의 형제 나홀에게 자녀를 낳았다 하였더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홀은 브두엘을 낳고, 브두엘은 리브가를 낳았다는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리브가는 이삭의 아내가 될 여자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하나님께서 이삭의 아내가 될 여자까지 준비해 놓으시고 아브라함 마음에서 이삭을 죽일 것을 요구하셨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약속대로 준비된 것들이 이루어지는 복지의 중심에는 이삭이 있습니다. 이삭을 제외한다면 이 세상에서 아브라함의 생애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열국의 아버지라는 이름을 받은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이삭이라는 존재가 갖는 의미가 곧 자기 생애의 의미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이삭을 죽이길 바라셨고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였습니다.
이삭을 통해 후손들이 퍼져나가는 것은 가나안 복지의 삶을 통해 나타날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아브라함은 마음에서 이삭을 죽여야 했습니다. 죽이는 것은 한번 죽인다고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까워함이란 마음에서 이삭을 한번 죽이고 ‘이 정도로 하나님을 아까워했으니 이제 이삭을 품어도 되지요?’라고 해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약속의 땅에서 복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물이란 이삭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마음에서는 이삭을 죽여야 했고 이삭이 있어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곧 아브라함의 마음에서는 이삭이라는 준비된 복을 통하여 연달아 이루어질 복들이 아무 의미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는 일들이 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62년을 동고동락한 아내 사라가 죽었습니다. 이제까지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아내 사라를 죽이는 과정은 바로에게 들여보내고, 아비멜렉에게 들여보내는 사건들을 통하여 비유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졌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는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들을 마음에서 죽이는 과정으로 점철되어 왔습니다. 버리고 죽이는 일만 해왔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영광의 하나님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하나님 한 분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기 위해서 마음을 빼앗을 수 있을 만큼 소중하고 좋고 아까운 모든 것들을 죽이는 것만이 아브라함 인생의 전부였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과 같아야 합니다. 주어진 것들 중에서 소중하고 아까운 것들을 죽이는 것을 일생의 업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마음에서 아들 이삭을 죽였고 이제까지 계속해서 마음에서 죽여왔던 사라는 실제로 죽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브라함에게 복지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런데 이 순간에 복지가 시작됩니다.
심지어 사라의 매장지로 산 막벨라 동굴은 아브라함 자신이 묻힐 무덤이기도 했습니다. 창세기 49장 31절을 보면 야곱의 유언이 기록되어 있는데 자신을 막벨라 동굴에 매장할 것을 부탁하며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야곱과 레아가 묻힌 막벨라 동굴은 복지가 시작되던 순간에 아브라함이 매입한 첫 번째 땅입니다. 사라의 죽음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의 첫 부분을 매장지로 매입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첫 부분에서 아브라함은 자기의 죽음도 같이 보고 있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내가 죽어서 이 막벨라 동굴에 묻힐 것이다.’라고 본 것입니다.
우리는 새집으로 이사하면 목사님을 모셔서 이사 예배를 드리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으레 ‘이 새로운 장막을 허락하셨사오니 이 장막에서 번영하게 해주시옵소서. 형통하게 해주시옵소서. 이 장막에서 시작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해주시옵소서.’라는 식의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본격적으로 복지의 삶을 시작하는 아브라함에게서 이러한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찬란한 번영과 형통으로 가득 찬 미래를 보며, 그 끝에서 아지랑이처럼 보일 듯 말 듯한 인생의 끝을 떠올립니다. 새로운 약속의 땅에서 복지의 삶이 시작되니 당연히 찬란한 영광과 미래를 보고 죽음을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복지의 삶이 시작되는 사건 앞에서 죽음을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매입한 약속의 땅은 아내 사라를 묻을 매장지입니다. 그리고 그 무덤에 자기도 묻힐 것이라 여깁니다. 가나안 복지의 첫 번째 땅에서 자기의 죽음을 생각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죽음을 강하게 의식하면 의식할수록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복된 사건들은 의미가 없습니다. 마치 하얀 보드 판에 마커로 글씨도 쓰고 그림도 그릴 수 있지만 지우개로 지우면 다 지워집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여호와 이레의 내용의 복들이 내 삶에서 날마다 이루어지는데도 자기 죽음을 보는 자는 그 모든 복에 대해 지우개가 됩니다. 그 복이 내 마음에서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복지의 삶을 시작하는데 찬란한 미래, 번영하는 미래를 보지 않습니다. 그 대신 자기의 죽음을 봅니다. 죽음을 보고 있는 한 이 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복지는 바로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와 이레로 준비하신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적이고 자발적으로 이루고자 하시고, 이루어질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다고 하실 내용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이 이루어지는 것이 복이고, 이것들로 하루하루가 채워져 나가는 것이 복된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러한 복된 삶을 살 수 있도록 예수님을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약속을 내게도 주셨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지독한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여호와 이레의 내용물들은 내 마음에서 아무 의미가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복지는 시작됩니다.
여호와 이레로 준비하신 내용들이 이 땅에서 이루어질 때, 그 이루어 지는 것 하나하나에 마음이 달라붙어서 맛보고 즐기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드디어 이루어졌구나! 너무나 맛있다! 너무나 좋다! 할렐루야 감사합니다!’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좋은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복이 될 만한 좋은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좋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이 땅에서 허락하신 것들이 좋습니까? 여러분은 스데반 집사님처럼 돌에 맞아 죽어도 하나님을 좋아하실 수 있습니까? 솔로몬 같지는 않더라도 웬만큼 무사안일하게 살 수 있는 환경적 조건 때문에 그나마 하나님이 좋습니까? 이 땅에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으로 계획하신 그 어떤 대단한 일이 이루어져도 내 마음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을 때, 비로소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약속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내게도 주신 약속이 됩니다. 복지의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이 약속이 실제로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약속을 하시는 것일까요? 장난치시는 것도 아니고 내게 아무 의미가 없어야 하는 약속이라면 대체 왜 그런 약속을 하실까요? 이 땅에서 복지의 삶을 살도록 약속해 주신 이유는 간단합니다. 여호와 이레로 준비하신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질 수 있을 만큼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좋음을 쌓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준비하시고 이루시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언제나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좋도록 계획하고 준비한 모든 것을 이루려고 한다. 내가 이루는 것들이 너의 마음에서는 아무런 기쁨도 좋음의 이유가 될 수 없구나. 그것들이 의미 없는 일들이 될 정도로 너는 나를 좋아하는구나.’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그만큼 하나님 좋아함을 세상에 사는 동안 보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세상의 복을 약속해 주셨을까요? 왜 세상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일들을 이루시려고 계획하실까요? 그런 일들이 이루어질 때 그것들을 아무 의미 없는 것처럼 여길 정도로 하나님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제야 가나안 땅의 한 조각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자기의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막벨라 동굴이라는 매장지를 첫 번째 땅으로 매입하게 하십니다. 자기 죽음을 보는 자는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기쁨의 이유로 삼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전에 폐암일 확률이 70% 이상이라고 진단을 받았습니다. 결국 그렇지 않았지만, 그 말 대로 제가 3개월을 살게 되었다고 가정해 봅니다. 그랬다면 3개월 동안 이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형통에 의미를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하는 그때에도 복지는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암에 걸려서 시한부 선고를 받지 않더라도 죽음을 확인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막벨라 동굴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나의 죽음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죽음이 실제가 되면 몸으로 살고 있는 이 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복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일들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복들이 쌓이고 쌓이더라도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내 마음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들이 이루어지는 복지의 삶은 시작됩니다. 복지의 삶은 누리라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복지의 삶이 의미가 없을 정도로 살아계신 하나님이 복임을 확인하고 느끼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을 낳기 전까지의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날마다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으려고 씨름을 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으려고 씨름하지만 잘되지 않습니다. 내 속에 있는 죄와 저주의 강함의 질김을 느낄 때마다 ‘나는 지독한 죄인이다. 영광의 하나님이 궁극적인 복인데도 그 하나님을 놓치고 몸으로 만나는 것들을 좋다고 하니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고 나쁜 놈이다. 그것들만을 생각하고 그것들만을 마음으로 붙잡고 바라보고 있으니 제일 지독한 멍청이다.’라고 한탄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자연인의 상태는 정상이 아닙니다. 절대로 내 느낌과 판단과 생각을 정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하지 않고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있지 못하는 동안 떠오르는 생각들이 정상일 수 없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 싸워야 합니다. 자꾸 넘어지지만 이 싸움 자체가 놀라운 은혜입니다. 이 싸움이 없으면 우리의 마음은 거룻줄이 풀린 배처럼 망망대해로 하염없이 빠져들어 가게 됩니다. 죽음의 지옥으로 빠져들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좋음이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바라보기를 날마다 실패합니다. 이러한 나를 안타까워하며 또 싸웁니다. 계속해서 십자가를 붙잡습니다. 이것은 무의미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는 동안 죄악의 망망대해로 빠져드는 내가 저지됩니다. 이것 자체도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이러한 싸움이 반복되는 중에 나도 모르게 하나님과 정이 쌓입니다. 하나님의 좋음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좋음을 느끼는지 못 느끼는지도 몰랐는데 어느덧 하나님을 아깝게 여기게 됩니다. 딱히 하나님의 좋음을 느껴보지 못했어도 십자가 붙잡기를 계속해 온 사람이라면 ‘네가 나의 좋음을 못 느껴서 답답하고 원망이 많다면 이제 결별하자.’라고 말씀하시는 상상만 해도 청천벽력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날마다 방송에서는 하나님이 유일한 좋음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나는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십자가 붙잡고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자 하고, 세상 것들이 들어와서 하나님을 놓칠까 생각하고 애쓰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러한 상태일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오셔서 ‘네가 그렇게 내 좋음을 못 느낀다고 원망을 하니 나는 이제 완전히 떠나겠다. 이제 십자가도 붙잡을 필요 없다.’라고 말씀하신다면 어떤 기분이 드시겠습니까? 청천벽력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좋음이 안 느껴진다고 생각하는 그 상황은 이미 대단한 수준으로 하나님을 좋아하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화가 날 정도로 왜 하나님의 좋음이 느껴지지 않을까?’라는 말을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그만큼 좋아한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좋음이 쌓인다면 기어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여호와 이레로 준비하신 것들이 다 이루어져 갈 때도 하나님이 너무 좋고, 하나님이 너무 아깝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무슨 일을 이루시든 내 마음에는 아무런 좋음의 의미가 없습니다. 그럴 때 복지는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복지를 약속하신 이유는 복으로만 가득가득 채워지는 매일의 삶을 살아가는 중에 그 복된 삶이 아무 의미가 없을 정도로 하나님을 궁극적인 복으로 느끼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가나안 복지의 삶을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그 약속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여호와 이레로 준비된 내용의 복들이 이루어질 때 그것들이 여러분 마음에 아무 의미가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마음에서 하나님만이 유일한 좋음이 되실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여호와 이레로 준비하신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들이 땅에서도 다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복들이 이루어질 때 내 마음에서는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여겨지게 하여 주시되, 무한히 좋으신 하나님을 나의 복으로 느끼게 하시고 실감할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