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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 주권 아래서 사람 상대하는 법>의 줄거리 :
영광의 하나님을 마음에서 잃지 않으면서 삶의 현장을 사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사람이란 어떤 존재일까요?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사람은 그 누구라도 신뢰의 대상도 불신의 대상도 아닙니다. 내가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고 있는 한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나를 향해 갖고 계시는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주권적 계획 안에서 이끌림을 받는 존재입니다. 그 어떤 사람의 그 어떤 인격적인 요소나 특징도 나를 향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넘어 내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주권 아래서 사람 상대하는 법
(창세기 24:1~9)
1.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2.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 허벅지 밑에 네 손을 넣으라
3. 내가 너에게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4.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5. 종이 이르되 여자가 나를 따라 이 땅으로 오려고 하지 아니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이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가리이까
6.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아니하도록 하라
7.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8. 만일 여자가 너를 따라오려고 하지 아니하면 나의 이 맹세가 너와 상관이 없나니 오직 내 아들을 데리고 그리로 가지 말지니라
9. 그 종이 이에 그의 주인 아브라함의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고 이 일에 대하여 그에게 맹세하였더라
‘하나님 주권 아래서 사람 상대하는 법’이라는 제목을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주권을 계속 인정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라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내가 아브라함처럼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으면 나는 이 세상을 향해 물 샐 틈 없이 내려오는 하나님의 주권을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해 하늘에 계신 영광의 하나님 바라보기를 그치지 않으면 이상하게 이 땅에 대해서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모든 대상 위에 물 샐 틈 없이 내려오고, 실시간으로 내려오는 하나님의 주권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을 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어떻게 상대할까요? 본문은 사람을 어떤 존재로 여기며 상대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앞서 읽은 대로 본문은 이삭의 결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서두 부분이 굉장히 길기 때문에 다음 시간에도 이어서 하겠습니다만 이삭의 결혼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22장에서 이미 예고되었습니다. 22장에서는 리브가가 이삭의 아내가 될 것이라는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을 받은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서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 뒤에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말씀하셨고 다시 한번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라는 약속을 하십니다. 이 뒤에 너무나 뜬금없이 아브라함의 형제인 나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홀의 아들 중에 브두엘이 있고, 브두엘에게는 리브가라는 딸이 있음이 언급됩니다.
모세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린 사건에 이어서 리브가에 대한 언급을 한 이유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마음에서 이삭을 죽였습니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는 먼저 이삭을 마음에서 죽여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번제로 드릴 것을 요구하시는 동안에도 이삭의 아내가 될 사람으로 아브라함 형제의 손녀인 리브가를 정해두셨습니다. 모세는 바로 이 점을 드러내기 위해서 뜬금없이 나홀에 대해 언급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마음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존재감을 느끼고 좋음을 욕구하게 되는 이 세상의 신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바로 이삭이 세상의 신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이삭과 같은 존재를 마음에서 번제의 희생제물로 여겨 십자가에서 죽여도 그 존재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계속 이어져 나갑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칠 것을 요구하시면서 이삭과 리브가의 결혼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계획은 계속해서 이어져 나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건 이후에 실제로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 될 사람을 찾기 위해 종을 보내게 됩니다. 이삭은 장성하였고 이삭의 아내가 될 리브가 또한 준비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정하신 계획대로 리브가가 실제로 이삭의 아내가 되는 사건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본문은 이러한 순간에 아브라함이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완전히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하늘에서 결정된 일이 땅에서 일어날 때 아브라함이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너무나 많은 시간 사람을 상대하게 됩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까지 사람을 상대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이 땅에서도 고스란히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본문은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한 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리브가를 이삭의 아내로 정하셨습니다. 다만 우리가 집중해서 보아야 할 부분은 리브가가 이삭의 실제 아내가 되는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아브라함이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삭의 결혼 또한 아브라함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 포함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동안에 아브라함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본문을 이해하기에 앞서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1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복에 대한 이해입니다. 우리는 전광석화와 같이 복에 대해 오해합니다. 그동안 세상의 언어체계 안에서 세상 사람들이 동의하고 공감하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노년에 건강과 재정적 형편과 인간관계에 복을 주셨다고 떠올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이삭의 아내감으로 리브가를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이제 하늘에서 정하신 대로 리브가가 실제로 이삭의 아내가 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이 등장하기에 앞서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범사라고 하니 당연히 아들 이삭이 결혼하는 일에 대해서도 복을 주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삭이 결혼해야 하는 범사에서 복이란 하나님이 하늘에서 정하신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범사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하늘에서 결정하신 뜻대로만 이루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진짜 복이란 영광의 하나님입니다. 그 복을 받는 것은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존재감으로 충만해지고 하나님의 좋음을 향한 욕구로 충만해집니다. 이것이 복을 받은 상태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둘 때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는 말씀의 본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리브가를 이삭의 아내로 정하시고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지게 하신 것이 복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늘에서부터 주권적이고 자발적이고 창조적으로 나를 통해 이루시겠다는 계획이 있습니다. 그 계획들은 범사에 예외 없이 존재합니다. 모든 일과 모든 순간에 하나님의 계획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는 것은 하늘에서 하나님이 나를 향해 갖고 계신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계획들이 다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문제는 그렇게 하나님의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계획들이 범사에 다 이루어지기 위해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 대답이 이어지는 본문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의 결혼을 앞두고 엘리에셀이 관계하는 방식을 따를 때 우리의 범사에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범사에 복이란 하나님이 하늘에서 자발적이고 창조적으로 계획하신 일들이 방해받지 않고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을 받으려면 아브라함의 태도를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삶이란 결국 사람과의 관계이기에 사람을 올바르게 상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삭의 결혼은 아브라함이 며느리를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아브라함으로서는 누가 며느리가 될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러한 아브라함이 미지의 세계에 감추어져 있는 며느리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가 중요합니다. 이것이 범사에 복을 받는 복지의 관건이 됩니다.
아브라함은 엘리에셀에게 아들 이삭의 아내감을 데려오는 일을 일임합니다. 이것이 참 보통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이삭의 결혼으로 대표되는 범사에 아브라함이 어떻게 복을 받고 있으며, 이삭에 대해 하늘에서 정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어떻게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는가를 보게 됩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범사에 복을 받는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엘리에셀이 이삭의 아내감을 고를 때 많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늙었듯이 엘리에셀 또한 늙은 종입니다. 당연히 평생을 통해 자기의 경험치에 근거한 여성관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엘리에셀의 여성관에는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엘리에셀은 종이기에 주인에게 자신의 여성관이나 성향에 대해 피력할 기회나 시간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러한 엘리에셀에게 전권을 위임합니다. 이로부터 며느리를 찾는 일에 종인 엘리에셀이 평생 갖게 된 여성에 대한 가치관과 기준이 작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은 자손에 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 약속이 실제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삭에게 아내가 있어야 합니다. 이삭의 아내가 될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중차대한 위치에 있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아브라함은 이렇게 중요한 며느리를 고르는데 어떤 여성관을 갖고 어떤 편견과 선입견이 있을지 모르는 엘리에셀에게 전권을 위임합니다. 엘리에셀이 어떤 여성을 데리고 오면 아브라함이 보고 판단하겠다는 생각이 아닙니다. 엘리에셀이 데려오는 여성을 무조건 이삭과 결혼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한 가지를 요구합니다. 3~4절을 보면 “…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내를 가나안 땅이 아닌 고향 하란에서 찾게 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8절을 보면 특이한 추가 사항이 덧붙여집니다. “만일 여자가 너를 따라오려고 하지 아니하면 나의 이 맹세가 너와 상관이 없나니 오직 내 아들을 데리고 그리로 가지 말지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합당한 여자를 찾더라도 이삭을 데려가서 마주하게 하지 말고, 혹시 따라오지 않겠다고 하면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반드시 고향을 떠나올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면서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언급합니다. 이로부터 아브라함이 사람을 볼 때 어떤 점을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꼭 가나안 땅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복지를 주실 수 있습니다. 애초에 아브라함이 살던 하란에서 약 800km나 떨어진 가나안을 약속의 땅으로 주시기로 하시고 떠날 것을 요구하신 목적은 가나안 땅이 아니라 떠나라는 것에 방점이 있습니다. 마음이 붙어서 안정감을 느끼고 있는 이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사람을 볼 때는 영광의 하나님을 향하여 이 세상에서 마음 붙이고 있던 것들을 떨어뜨리고 떠나느냐 혹은 이 세상에 마음을 붙이고 주저앉으려고 하느냐를 보았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생각한 며느리의 최소한의 기준이란 자기가 마음 붙이고 있던 고향 땅을 떠나는 것입니다. 기존의 이 세상 상황에서 마음이 떠나지 않는다면 이삭의 아내가 될 수 없고 며느리가 될 수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늘에 계신 영광의 하나님을 향하여 이 세상에서 마음 붙이고 있던 것들을 떠남이 필요합니다. 아들을 고향으로 데려가지 말라고 하였고, 고향을 떠나오려 하지 않는다면 버리라고 한 것에는 바로 이러한 의도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사람을 대하는 기준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볼 때의 기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큰 범주 안에서 사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람이 지금 마음을 붙이고 있는 대상에서 떠나려고 하는지, 붙이고 있고 매여있으려고 하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아브라함은 직접 가서 며느리를 데려오려고 하지 않을까요? 직접 가서 눈으로 보고 합당한 여성을 며느리로 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엘리에셀에게 며느리 선택을 맡깁니다. 아브라함은 하늘에 계신 영광의 하나님을 보는 만큼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하나님의 주권을 보는 자가 사람을 어떻게 상대하느냐가 드러납니다.
엘리에셀은 나이 많은 종입니다. 평생 새겨진 강력한 여성관이 있을 수 있고, 선입견과 편견과 기준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것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이삭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이길 수 없음을 믿었습니다. 엘리에셀이 잘났든 못났든 혹은 인격적 요소가 어떠하든지 아브라함이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 한 아들 이삭과 며느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은 방해받지 않는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 한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인격적 성향이나 성격 같은 것은 나를 향해 갖고 계신 하나님의 창조적인 계획이 주권적으로 이루어져 감에 있어서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물론 본문을 보면 엘리에셀이 편력을 가진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에셀이 독특한 여성관을 가지고 있고 아내나 며느리에 대한 기준이 있다고 가정해 볼 수는 있습니다. 엘리에셀이 순전히 자기 아들의 아내감을 얻는다는 마음으로 여자를 데려왔다고 한다면 완전히 엘리에셀의 편견과 선입견이 작용한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엘리에셀이 자신의 편견과 선입견을 작동시켜 이삭의 아내감을 구해왔다고 하더라도 그 상황 자체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음을 아브라함은 알고 있습니다. 막말로 엘리에셀이 미친 여자를 데려왔다고 하더라도 아브라함은 그 선택이 하나님의 주권을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엘리에셀을 보내며 좋은 며느리를 데려오기를 바랐다면 영광의 며느리를 바라본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엘리에셀이 설령 어떤 미친 짓을 하고 어떤 이상한 여자를 데려오더라도 하나님의 주권을 뚫고 나갈 수 없음을 믿었습니다.
우리는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브라함은 엘리에셀이 믿음직했기에 보낸 것이 아닙니다. 앞서 아브라함은 아들이 없어도 엘리에셀이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렇게 말했던 것은 엘리에셀의 인격을 신뢰했기 때문은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자는 땅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을 보는 사람은 자기가 만나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고 불신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얼마든지 신뢰할 만한 사람일지라도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주권을 보는 자는 그것을 신뢰의 이유로 삼지 않습니다. 반대로 모든 사람들이 의심할 만하다고 여기는 인격일지라도 하나님의 주권을 보는 자는 그 사람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보고 있는 자에게 사람은 신뢰의 대상도 아니며 불신의 대상도 아닙니다. 신뢰와 불신의 대상이 될 자격도 없습니다. 내가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한 나를 향해 갖고 계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을 세상의 어떤 사람도 상하거나 변경시키거나 훼방하거나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영광의 며느리를 바라보면 엘리에셀의 인격적 요소가 작용하여 좌지우지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아브라함과 아들 이삭을 향해 갖고 계신 하나님의 계획은 엘리에셀의 어떤 인격적 특징이나 요소를 통해서도 절대로 변경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엘리에셀이 데려온 여자가 사람들이 혀를 내두를 만한 이상한 사람이었더라도 아브라함은 ‘이 여자는 엘리에셀이 데려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삭의 아내로 정하신 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엘리에셀에게 이삭의 아내를 데려오도록 위임한 것에는 더 근원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마음으로 영광의 하나님 보기를 중단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 범사와 모든 사람과 모든 사건 위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꿈틀거리며 움직이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러한 사람은 절대로 자기 눈을 믿지 않습니다. 자기 눈이 보는 동안 갖게 되는 느낌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려면 내 눈을 십자가에서 못 박아 죽여야만 합니다. 눈으로 보면서 발생하는 느낌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며느리이자 아들 이삭의 아내를 선택하여 결정함에 있어서 자기의 눈을 죽이고, 눈으로 보는 자기의 느낌을 죽이기 위하여 엘리에셀을 보냅니다.
우리는 노아 홍수 이전에 일어났던 일을 기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인간을 홍수로 쓸어버리시고자 하십니다. 6장 2절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여호와 하나님을 유일한 있음으로 부르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자기 눈에 보기에 좋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대로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에게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쉽게 말해 고깃덩어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사람이기에 며느리가 될만한 여성들을 보면서 ‘내 아들의 아내가 되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눈으로 보고 느낌을 받는 일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것이 잘못된 일임을 알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엘리에셀을 하란에 보낼 필요 없이 스스로 갈 수도 있었습니다. 혹은 이삭을 보낼 수도 있었습니다. 굳이 엘리에셀에게 허벅지 밑에 손을 넣는 맹세를 시켜가며 보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스스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을 내세웁니다. 이삭을 죽일 때처럼 자기 눈을 죽이고 눈으로 받게 되는 마음의 느낌도 죽입니다. 눈으로 보는 대로 발생하는 마음의 느낌이 아들 이삭의 아내이자 자신의 며느리가 될 사람을 구하는 일에 절대 동원되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합니다. ‘눈으로 보고, 느낌을 받고, 그 느낌을 따라 주관적으로 좋고 나쁨을 판단하여 며느리를 골라서는 안 된다.’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눈으로 보는 대로 마음에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느낌대로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범사에 복을 주실 수 없게 됩니다. 하늘에서 창조적이고 자발적으로 계획하신 뜻을 이 땅에서 이루어 가실 수 없습니다. 중매쟁이들을 통해서 혼담이 오고 갈 때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눈앞에 사진을 들이미는 것입니다. 사진을 보고 느낌을 받아서 마음에 드는 것 같으면 만나보라 권합니다. 눈으로 보고 느낌을 받은 대로 행동하는 것은 결혼뿐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매사에 느낌을 받은 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범사에 복을 주실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범사에 주신 복이란 하나님이 창조적이고 자발적으로 계획하신 뜻이 이 땅에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다면 뜻대로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이루어져도 내 마음에서는 그 일들이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영광 중에 바라보며 기뻐하는 가운데 하늘에서 자발적으로 계획하신 일들이 땅에서도 이루어져 나가는 것이 복입니다. 그것들이 기쁨이 되면 내 마음은 땅의 것들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복을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제 아브라함에 대해서는 편안한 마음으로 당신이 계획하신 일을 다 이루어 가실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처럼 부족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 조금만 이루어지면 금방 마음이 그것들에 사로잡혀서 마음이 땅에 머무르려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침으로써 그 무엇에 의해서도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게 된 상태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아브라함은 막벨라 동굴에 아내를 묻으면서 자기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가나안 땅의 삶을 죽음을 통해서 보자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는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복이 의미가 없어진 상태에서 하나님은 마음 놓고 편안하게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실 수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아브라함이 사람을 대할 때 태도는 신뢰하지도 않고 의심하지도 않게 됩니다. 사람을 대하는 자기의 눈과 느낌을 죽여버립니다. 자기 인생에 대하여 눈으로 보면서 생기는 느낌을 개입시키지 않습니다.
인생을 사는데 내 눈과 내 눈을 통해 받는 느낌을 개입시키지 않는다면 내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서도 일어나기 위해서는 내 눈을 십자가에서 죽여야만 합니다. 눈을 통해 받게 되는 느낌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자니 눈으로 보는 사람은 신뢰하지도 않고 의심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마음은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있는 중에 내가 상대하고 있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 사람에 대한 느낌을 따라 내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나는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있으면 됩니다. 내 눈을 개입시키지 않고, 눈을 통해 받는 느낌을 개입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 악독한 인간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의 범주를 파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뚫고 나갈 수 없습니다. 어떤 신뢰할 만한 사람도 하나님을 제치고 들어와서 내 인생에 영향력을 끼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영광 중에 바라보라고 내어주신 아브라함의 자손들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한 사람을 한 사람을 향하여 범사에 하늘에서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어차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이 계획은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놓치지 않음으로써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한 방해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그리스도 얼굴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기억할 때에만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습니다. 그렇게 예수님 안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는 동안에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신뢰의 대상도 아니고 불신의 대상도 아닙니다. 내 마음에 드는 대상도 아니고, 내 마음이 뿌리쳐야 할 대상도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성격, 배경, 성질머리를 비롯한 무엇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주권에 대항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스데반 집사님을 돌로 치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는 자들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을 천국으로 끌어들이시기 위해 악역을 담당하게 하신 피조물일 뿐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있는 가운데 모든 사람은 신뢰의 대상도 불신의 대상도 아님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 또한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뜻만이 이루어져서 범사에 복을 주시는 삶으로 가득가득 채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십자가에 못 박혀 내 죽음을 이루신 주님을 바라보고 그 안에 머물며 부활 승천을 따라가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는 중에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만 사람을 대함으로써 범사에 하나님의 복이 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