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이 설정하신 우연만 가득한 삶>의 줄거리 :
'설정'이란 의도적으로 정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뜻과 의도가 배제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우연'이라는 말과는 그 의미가 서로 대립합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기를 중단하지 않는 사람들의 삶은 이처럼 하나님의 의도적인 설정으로 이루어진 우연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내 소원과 뜻과 의도가 완전히 십자가에서 죽어버리고 오직 내 뜻과 의도와는 무관한 우연함으로만 가득 채워진 삶을 혹시 맛이라도 보셨습니까? 정말 끝내줍니다.
하나님이 설정하신 우연만 가득한 삶
(창세기 24:10~53)
10. 이에 종이 그 주인의 낙타 중 열 필을 끌고 떠났는데 곧 그의 주인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떠나 메소보다미아로 가서 나홀의 성에 이르러
11. 그 낙타를 성 밖 우물 곁에 꿇렸으니 저녁 때라 여인들이 물을 길으러 나올 때였더라
12. 그가 이르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13. 성 중 사람의 딸들이 물 길으러 나오겠사오니 내가 우물 곁에 서 있다가
14.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하건대 너는 물동이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말미암아 주께서 내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
15. 말을 마치기도 전에 리브가가 물동이를 어깨에 메고 나오니 그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아내 밀가의 아들 브두엘의 소생이라
16. 그 소녀는 보기에 심히 아리땁고 지금까지 남자가 가까이 하지 아니한 처녀더라 그가 우물로 내려가서 물을 그 물동이에 채워가지고 올라오는지라
17. 종이 마주 달려가서 이르되 청하건대 네 물동이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게 하라
18. 그가 이르되 내 주여 마시소서 하며 급히 그 물동이를 손에 내려 마시게 하고
19. 마시게 하기를 다하고 이르되 당신의 낙타를 위하여서도 물을 길어 그것들도 배불리 마시게 하리이다 하고
20. 급히 물동이의 물을 구유에 붓고 다시 길으려고 우물로 달려가서 모든 낙타를 위하여 긷는지라
21. 그 사람이 그를 묵묵히 주목하며 여호와께서 과연 평탄한 길을 주신 여부를 알고자 하더니
22. 낙타가 마시기를 다하매 그가 반 세겔 무게의 금 코걸이 한 개와 열 세겔 무게의 금 손목고리 한 쌍을 그에게 주며
23. 이르되 네가 누구의 딸이냐 청하건대 내게 말하라 네 아버지의 집에 우리가 유숙할 곳이 있느냐
24. 그 여자가 그에게 이르되 나는 밀가가 나홀에게서 낳은 아들 브두엘의 딸이니이다
25. 또 이르되 우리에게 짚과 사료가 족하며 유숙할 곳도 있나이다
26. 이에 그 사람이 머리를 숙여 여호와께 경배하고
27. 이르되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주의 사랑과 성실을 그치지 아니하셨사오며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 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하니라
우리가 읽지 않은 28절 이후에는 엘리에셀이 나홀의 집에 가서 리브가를 이삭의 아내로 허락을 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이 설정하신 우연만 가득한 삶’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설정과 우연이라는 단어는 사실 그 의미가 대립합니다. 설정(設定)이 의도와 뜻을 가지고 미리 정하여 놓는 것을 의미한다면, 우연(偶然)은 내 뜻과 의도가 완전히 배제된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설정하신 우연만 가득한 삶’이라는 말 속에는 극한으로 대립하는 의미가 동시에 들어있습니다. 내게는 우연인데 그 모든 우연이 하나님의 지독한 목표지향적 의도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계획하셔서 설정하신 우연으로만 가득한 삶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혹시 그러한 삶을 맛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경험한 수준에서 볼 때 간혹 좋은 일이 우연히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일을 내가 소원하고 뜻하고 의도해서 열심히 노력하여 이루었다면 기쁨과 성취감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우연히 일어났다면 훨씬 더 좋고 기쁠 것입니다. 내 의도와 뜻을 집약하여 소원한 것을 이룬다면 성취감이 따라옵니다. 그런데 소원에 준하는 일이 우연히 일어났을 때는 성취감 대신에 감사가 뒤따릅니다. 성취감과 감사는 우리의 기쁨을 질적으로 다르게 해줍니다. 성취감은 교만으로 변하는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는 겸허함의 위치를 유지하게 해줍니다.
이렇게 겸허한 마음을 유지하게 하는 감사가 범사에 이어질 만큼 좋은 일이 일어나는 우연으로만 가득 차게 되는 삶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삶이며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우연으로 가득 찬 삶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에덴은 낙원의 삶이고 기쁨의 삶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 삶의 환경 전체가 우연으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의도하거나 계획하거나 뜻한 바 없이 우연을 통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우연은 하나님의 강력한 목표지향적 의도에 의해 설정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지독할 정도로 강력한 목표지향적 의도를 가지고 설정해 놓으셨습니다. 그 설정하신 모든 내용이 나에게는 우연으로 주어집니다. 내 뜻과 내 의도가 배제된 채 우연으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연으로 가득 찬 삶이야말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약속하신 복지입니다. 그리고 1절에 기록된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라는 말씀에서 드러나는 복의 정체이기도 합니다. 이 복은 하나님의 목표지향적 의도에 따라 설정된 것으로써 아브라함에게 우연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 세상 삶을 향하여 내 의도와 뜻이 없고, 내 계획이 개입되지 않고, 내 소원이 없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지금 일어날 수 있는 일 중에 최고로 좋은 일만이 일어납니다. 나는 의도하려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뜻한 바를 이루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우연으로 주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약속하신 복지의 삶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느 정도로 의도와 계획과 소원이 배제된 채 우연으로 채워지고 있습니까? 본문을 통하여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에는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이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하여 하란에 도착한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곳에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이 살고 있습니다. 엘리에셀은 이제 이삭의 아내가 될 사람을 찾아서 데려가야만 합니다. 그런데 상황은 막연합니다. 엘리에셀은 나홀의 얼굴을 알지도 못했을 것이고, 나홀의 아들인 브두엘이나, 브두엘의 아들 라반에 관해서도 몰랐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엘리에셀은 우연을 설정하게 됩니다.
13~14절을 보면 엘리에셀이 “성 중 사람의 딸들이 물 길으러 나오겠사오니 내가 우물 곁에 서 있다가 /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하건대 너는 물동이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말미암아 주께서 내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라고 합니다. 누구를 처음으로 만날지도 모르고, 누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동네 여인들이 물을 길으러 나오는 시간에 하필이면 리브가가 눈에 띈 것은 전적으로 우연입니다. 엘리에셀이 의도할 수도 없는 일이고 리브가가 의도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지낼 때 중국 음식을 먹으러 가면 포천쿠키(Fortune cookie)라는 것을 하나씩 줬습니다. 속이 빈 과자 안에 오늘의 운세가 적힌 종이가 들어있는데, 무슨 운세가 나올지는 전적으로 운입니다. 만약 리브가가 포천쿠키를 하나 받았는데 ‘서쪽에서 귀인이 찾아오리라’라는 말이 적혀있었다면 어떨까요? 하란은 가나안 땅의 동쪽에 있기에, 가나안 땅에서 온 사람이라면 서쪽에서 온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엘리에셀과 리브가에게 바로 이러한 우연이 발생한 것입니다.
엘리에셀이 처음 만난 여인이 마침 아브라함의 혈족인 것은 의도치 않은 우연입니다. 그리고 엘리에셀이 간구했던 모든 포인트가 우연으로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우연들은 하나님의 철저한 설정입니다. 앞서 우리는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친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실제로 이삭을 죽이지는 않았으나 이미 아브라함은 마음에서 이삭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죽이라고 하신 이삭의 아내를 리브가로 정해놓으셨다는 사실을 모세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이 땅에서 이루어지기까지의 과정은 그 계획이 이루어질 현장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우연으로만 이어지면서 성취되어 갑니다.
복이란 하늘에서 정하신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언어 체계 안에서 복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개념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하늘에서 이루어진 아버지의 뜻이 내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범사에 주시는 복입니다. 본문은 그러한 복이 주어지기 위해서는 어떠한 과정을 통과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 과정은 철저하게 우연으로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리브가를 이삭의 아내로 결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은 그 일에 참여하는 아브라함, 엘리에셀, 이삭, 리브가 모두에게 우연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설정하셨으나 자신들에게는 우연히 일어날 사건들입니다. 이러한 우연을 통해 이삭과 리브가의 결혼은 성립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연이란 내 의도, 내 생각, 내 소원이 개입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님의 강력한 목표지향적 의도가 담겨있습니다. 이렇게 설정하신 일들이 엘리에셀을 통하여 우연으로 이루어져 가고, 리브가를 통하여 우연으로 이루어져 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본문을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엘리에셀의 기도가 즉각적으로 응답을 받았다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해한다면 성경은 성경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파괴하는 해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그가 이르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엘리에셀의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내용이 우연을 설정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물을 달라고 했을 때 물을 마시게 하고 낙타에게도 물을 주는 여인이라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정하신 이삭의 배우자로 알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5절을 보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리브가가 물동이를 어깨에 메고 나오니…”라고 하였습니다. 우연을 설정하는 기도가 채 끝나기도 전에 리브가는 이미 물동이에 물을 긷고 나오다 엘리에셀의 눈에 띄었습니다.
주석들은 이 부분을 성경에서 기도를 한 사람 중에 가장 빠르게 응답을 받은 경우라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어 체계로 살아야 하는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있어서 기도에 대한 잘못된 생각은 없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응답하시도록 코너로 몰아가는 행위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모세가 기록하였듯이 리브가가 이삭의 아내가 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이 정하신 일입니다. 엘리에셀은 따로 이삭의 아내를 찾고자 기도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합니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계획하신 바를 단지 우리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십니다. 계획하신 내용들을 이루려고 하실 때 우리가 기도를 한다는 것은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응답하시도록 코너로 밀어붙이려는 시도일 수 없습니다. 철저하게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사람들의 기도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들을 이루시는 과정 중에 나를 기도하도록 코너로 몰아가시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도란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코너로 몰아서 응답하시게끔 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계획하신 바를 우리를 통해서 이루려고 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를 코너로 몰아서 기도하게 하십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기를 중단 없이 해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세상에 대해 죽고 마음으로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있는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는 삶과 관련하여 기도를 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계획을 나를 통해 이루시기 위하여 나를 코너로 몰아서 이 세상 일에 대하여 생각이 떠오르게 하시고 그 떠오른 생각을 기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무런 생각이 없으시다가 우리가 어떤 기도를 하면 그것을 들으시고 ‘참 좋은 생각이구나. 내가 네 생각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을 일깨우거나 자극해서 코너로 몰아 들어주시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엘리에셀은 우연을 설정합니다. 그리고 설정된 우연대로 사건이 벌어진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이삭의 짝으로 알겠다는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이 기도가 가르쳐주는 것은 하나님이 나의 모든 삶에서 일어날 일들을 계획하시며, 우연을 통해서 그 계획을 이루어 가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목표지향적 계획들을 이루어 가실 때 우리를 엘리에셀이 설정한 것과 같은 우연으로만 이끌어 가십니다. 본문은 바로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어떤 세상일에 대해 기도를 하게 되었다면 그 기도 자체가 우연입니다. 내가 어제까지 소원하여 뜻하고 의도하는 일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면 그렇습니다. 내 의도가 있고 계획을 세운 후에 그것을 뜻하여 이루고자 하는 과정 중에서 생긴 생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엘리에셀의 생각조차 우연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설정하신 우연만 가득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리브가를 이삭의 아내로 정하셨습니다. 이제 이 일이 땅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 과정에 포함된 엘리에셀을 통하여 우연을 설정하게 하십니다. 이를 통해 하늘에서 하나님이 정하신 세상의 모든 일들이 다 우연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반대로 내 뜻과 계획과 의도가 삶에 관여한다면 하나님이 하늘에서 정하신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복을 주실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단 한 순간도 예외 없이 인생의 모든 순간을 하나님의 뜻으로 정해놓으셨습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다. 설령 우리가 그 목표를 정확하게 모를지라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신다면 우리가 목표를 모를지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시고 그 목표를 이루시기 위하여 이끌고 가시면 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목표를 향하여 우리를 이끌고 가시면서 오늘 이루어져야 할 일을 이루실 때 그 일은 철저하게 우연으로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본문은 가르쳐줍니다. 엘리에셀이 우연을 설정하면서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얻게 되는 상황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계획하신 모든 것을 우연으로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사는 동안 그 하나님과 어떻게 호흡을 맞추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내용을 포함한 창세기 24장 전체의 핵심 내용입니다. 리브가가 이삭의 아내가 되리라는 것은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과 엘리에셀과 이삭과 리브가 당사자에게는 오직 우연으로만 이루어져 갑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우연으로만 가득 차는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지향해야 할까요? 아브라함의 태도와 엘리에셀의 태도를 지닐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태도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다른 사람이 내게 어떤 일을 행하거나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 때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음을 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인격이 훌륭하든 아니든, 그 사람의 성격이 좋든 나쁘든 그 사람에게 관여하지 않습니다. ‘왜 나에게 못되게 구느냐? 왜 나에게 잘해주느냐?’라는 마음가짐을 갖지 않습니다. 오직 그 사람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만 봅니다. 그러면 나를 향해 갖고 계신 하나님의 계획은 그 사람이 나를 향해 아주 못 되게 할지라도 절대로 방해받지 않습니다. 내가 십자가 예수님을 붙잡고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 한 나를 향한 창조적이고 자발적인 하나님의 계획은 어떤 못된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방해받거나 망가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사람이 내게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내가 이 사람을 만나는 동안에 십자가 예수님을 놓치고 영광의 하나님을 놓칠 것을 두려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아무리 못되게 굴어도 하나님이 나를 향해 목표지향적으로 갖고 계신 계획을 위해 의도적으로 이끌어가심이 방해받을 수는 없습니다.
다시 12절을 보면 “그가 이르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 은혜가 임하기 위해서는 내가 좋은 사람만 만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사람을 만났더라도 그 사람이 영광의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여 하나님을 놓치게 된다면 그 사람은 내 인생의 가장 큰 원수입니다. 그 대표적인 관계가 가족입니다. 가족을 사랑함이 영광의 하나님을 제쳐버린다면 가족이 원수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원수 같은 사람이라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당신이 어떻게 나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을 넘어서서 행동할 수 있겠는가?’라고 여긴다면 그 사람은 원수가 아닙니다. 나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에 대해서는 어떤 악한 사람도 바늘구멍 하나도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무엇인가 행동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이러한 믿음으로 사람을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편 엘리에셀의 경우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엘리에셀의 행동이 자기에게 영향을 주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주권으로 봅니다. 반대로 엘리에셀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행동이 아브라함에게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위치에 설 수 있고 엘리에셀의 위치에도 있게 됩니다. 우리가 엘리에셀의 위치에 있을 때 어떻게 사람을 만나고 행동해야 할까요? “그가 이르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라는 말씀에 그 대답이 담겨있습니다.
엘리에셀은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는 곧 ‘아브라함의 며느리는 하나님이 하늘에서 정하신 그대로 이루어지게 해주시옵소서.’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라고 한 것은 하늘에서 정하신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 위하여 하나님의 주권적인 이끄심이 이루어져 갈 때 내 생각과 판단이 죽게 해달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내 눈으로 볼 때 판단이 생깁니다. 엘리에셀이 이삭의 아내를 찾고자 할 때 자기의 여성관이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계획이 땅에 이루어지는 주권적 이끄심에 갈등이 빚어지고 마찰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라는 기도는 하나님이 하늘에서 정하신 계획대로 이삭의 결혼을 이끌어 가실 때 자신의 여성관이나 판단과 느낌을 가지고 방해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한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엘리에셀에게 취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엘리에셀이 아브라함을 향해 취한 태도 또한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라는 표현은 꼭 엘리에셀이 아브라함을 대해서만 취할 수 있는 태도가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이십니다. 모든 존재를 있게 하신 유일한 있음입니다. 우리는 그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면서 사람을 상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우연으로만 가득 찬 삶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엘리에셀의 기도를 남편을 대하는 아내에게 적용해 봅니다. ‘저의 남편을 이러한 모습으로 있게 하신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행하게 하사 지금 눈앞에 있는 남편을 향해 갖고 계신 당신의 계획대로 말과 행동이 나타나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러한 태도를 유지해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사장님을 마주하고 있다면 ‘우리 회사의 사장님을 있게 하신 하나님 여호와여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우리 회사 사장님에게 은혜를 베푸심으로 사장님에게 일어날 일들을 나를 통해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이루어지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서 내 소원과 내 의도와 내 계획과 뜻을 배제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나에게 어떤 이익이 될 수 있는가를 본다면 내 의도가 들어가게 됩니다. ‘이 사람에게는 잘 대해줘야겠다, 저 사람은 나와 특별히 이익 관계가 없으니 잘해줄 필요는 없겠다.’라는 생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을 이 모습 이대로 내 앞에 있게 하신 하나님 여호와여, 이 순간 나에게 순조롭게 행하게 하사 하나님의 주권과 생각에 마찰을 일으키지 않게 하여 주셔서, 이 사람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말과 행동을 하는 은혜를 베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복과 은혜란 하나님이 하늘에서 계획하신 바가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그 만남 자체로도 복을 받는 것이 됩니다. 그 사람에게 일어나야 할 일들을 나를 만나게 하시고, 내가 말하고 행동함을 통해 그에게 일어나게 하십니다. 이것을 위해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을 통하여 하늘에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바는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나와 만남을 통해 복을 받는 것이고 은혜를 받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을 만날 때는 말과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이 사람 앞에서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서로 기분이 좋을까?’를 생각한다면 벌써 내 의도와 계획과 뜻이 개입되는 것이기에 우연은 사라집니다. 사람을 만날 때 어떻게 영광의 하나님을 잃지 않을 것인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영광의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계획하신 바대로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이 사람에게 은혜와 복이 주어지게 할 것인가?’라는 생각만을 할 수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내가 뜻하지 않고 계획하지 않은 생각도 우연이 되고 말도 우연이 됩니다. 모든 것이 우연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가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마음에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지는 세상 것들이 자꾸 들어와 영광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렇기에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에 대해 죽습니다. 육체의 오감으로 접하는 것들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을 때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러면 마음에서 하나님만이 영광의 자리에 계시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은 이것을 은퇴 없는 일생의 직업으로 삼는 자들입니다. 죽을 때까지 이 직업을 가지고 살기에 실업자가 될 염려가 없습니다.
그렇게 영광의 하나님을 마음속에서 지켜내려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에 대해 죽기를 이어가는 사람이라면 어차피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는 죽었기에 내 생각과 내 의도와 내 계획과 뜻은 개입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은 이전에 계획한 것을 추진하기 위하여 뜻하고 의도한 바가 아니기에 모두가 다 우연이 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엘리에셀은 우연을 설정합니다. 그리고 설정된 우연을 따라서 이삭과 리브가의 만남이 진행됩니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본문이 의도하는 바는 하늘에서 정하신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뜻은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주여 최고의 며느리를 보내주시옵소서. 시아버지를 잘 섬기고 남편을 내조하고 자녀를 잘 기르는 현모양처를 보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한다고 해서 이루어질 일이 아닙니다. 내 계획, 내 의도, 내 관점, 내 판단이 다 들어가 있는 상태에서는 하나님이 목표지향적으로 계획하신 최고의 일들이 내게서 우연히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내 생각이나 계획의 기운이 개입된다면 그 일은 무조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일으키려고 하신 일조차도 내가 먼저 생각한다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지금 강릉에는 물이 부족합니다. 수원지인 오봉댐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지역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난리입니다. 강릉 사람들은 물에 대한 간절함이 있습니다. 일기예보를 보면 ‘오늘 오후 몇 시에 10mm 비가 올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기대하는 대로 비가 오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와 닮았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 비처럼 내리시려고 계획하신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 일에 관해서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들은 우연이 되지 못합니다. 내 마음에서 그 일이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고, 하늘로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의 과제는 계획하신 일을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이루어질 일이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나를 뜯어고치고 박살 내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저하게 죽어야 합니다. 오직 영광의 하나님만을 보전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지고 다녀야 합니다. 그럴 때 내 삶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최고로 좋은 우연한 일들로 채워지게 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 후손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면 어떤 사람이 내게 무엇을 하든지 나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보전됩니다. 또 내가 행동을 해야 할 때는 이 사람에게 일어날 일에 대해 내가 중간에서 매개하는 자가 되어야 함을 잊지 않고 살아갑니다. 내게 행동하는 사람이나 내가 행동을 해야 할 사람들 앞에서 오직 영광의 하나님만을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칠 때 최고의 일들이 우연으로만 내 삶을 채우게 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생활화가 더욱더 철저해짐으로써 내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기가 막힌 우연들로만 가득가득 채워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