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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은퇴 없는 직업’ 계승자들 출현 내막>의 줄거리 :
아브라함이 175세를 일기로 죽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마음에서 잊지 않고 잃지 않는 일을 평생 은퇴 없는 직업으로 삼고 살던 믿음의 조상입니다. 문제는 이제 과연 누가 아브라함의 이 은퇴 없는 직업을 계승할 것인가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너무나 노골적인 예정과 선택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제2, 제3의 붕어빵들이 출현합니다. 이 예정과 선택에는 납득할 만한 다른 이유와 근거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공평한 이유입니다.
‘은퇴 없는 직업’ 계승자들 출현 내막
(창세기 25:1~18)
1. 아브라함이 후처를 맞이하였으니 그의 이름은 그두라라
2. 그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를 낳고
3. 욕산은 스바와 드단을 낳았으며 드단의 자손은 앗수르 족속과 르두시 족속과 르움미 족속이며
4. 미디안의 아들은 에바와 에벨과 하녹과 아비다와 엘다아이니 다 그두라의 자손이었더라
5.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었고
6. 자기 서자들에게도 재산을 주어 자기 생전에 그들로 하여금 자기 아들 이삭을 떠나 동방 곧 동쪽 땅으로 가게 하였더라
7. 아브라함의 향년이 백칠십오 세라
8. 그의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9. 그의 아들들인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마므레 앞 헷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으니
10. 이것은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산 밭이라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니라
11.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이삭은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본문 중에서 읽지 않은 12~18절까지는 애굽 출신의 여종 하갈의 아들인 이스마엘의 자손들이 소개됩니다. 이스마엘은 열두 방백을 낳았고 이들은 번성하여 한 종족을 이룹니다. 이들이 아랍 족속의 조상입니다.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상기하면 유익한 단어가 있습니다. 예정과 선택입니다. 에베소서 1장 4~5절을 보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예정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게 하시는 사람들 중에서 당신의 아들들이 되도록 결정하신 사람들이 예정입니다. 그리고 선택은 이러한 하나님의 예정을 실제로 실시하여 그리스도를 통해 진짜 아들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수많은 사람들을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의도 없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의도 위에 의도를 더하시는 자들이 있습니다.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내 아들로 삼겠다고 결정하신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이 예정입니다. 다만 이러한 의도를 통해 있게 된 자들 또한 아담의 죄를 유전으로 받아 죄와 저주에 찌든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들 중에서 당신의 아들들로 삼으시려는 예정을 실제로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예정을 따라 예수님 안에서 선택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이들에게는 특징이 있습니다. 마음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그 예수님 안에 마음이 들어가 있는 자들이 선택이 이루어진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은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직면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마음에서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감뿐입니다. 이 땅에서 몸으로 누구를 만나든지, 누구를 보고 있든지, 어떠한 상황을 만나든지, 그들의 마음속에서 존재감의 대상은 하나님뿐입니다. 이들의 마음이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의 마음은 본래 비어있기에 채움과 만족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그 채움을 위해서 예수님 안에 마음이 머뭅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을 보고 있는 동안에 마음은 하나님만을 상대합니다. 하나님만으로 채우려 하고 하나님만을 유일한 좋음으로 욕구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인류역사상 제일 먼저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직면하고 하나님만을 욕구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은 앞으로 오실 예수님 안에 들어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을 첫 번째로 느끼고, 하나님만을 유일한 좋음으로 욕구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 안에 마음이 들어있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십자가 사건 이전의 사람이든 이후의 사람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감만을 느끼고 하나님의 좋음만을 욕구하여 삶의 현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오직 불철주야하는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갖고 싶어 합니다. 이처럼 마음이 하나님으로 부자 되는 열망만을 갖는 상태를 영광의 하나님을 잃지 않고, 잊지 않음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한편 본문에서는 당시 사천 년 전 지구 전체에서 유일하게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영광의 하나님으로 바라보면서, 그 하나님을 잃지 않고, 잊지 않던 아브라함이 175세를 일기로 죽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부터 나타나게 될 가장 큰 관심사는 누가 아브라함의 뒤를 이을 것이냐는 것입니다. 누가 아브라함의 붕어빵이 될 수 있을까요? 아브라함은 영광의 하나님을 잃지 않고, 잊지 않기 위하여 삶의 현장에서 몸부림치는 것을 은퇴 없는 직업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누가 아브라함의 은퇴 없는 직업의 계승자가 될 것인가가 최대의 관심사입니다. 이 관심사와 관련해서 본문은 기록된 것입니다.
보통 직업이라고 하면 근로의 대가로 보상이 주어지는 일들을 이야기합니다. 쉽게 말해 세상 사람들은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일이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그것을 진짜 직업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식의 직업이 있든 없든 예수님을 믿자마자 우리 모두에게는 은퇴 없는 직업이 생겼습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날마다 내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잃지 않고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은퇴 없는 직업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삶의 현장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나가는 직장은 직업 활동의 장소가 아닙니다. 직장은 내 본래 직업인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이 허락하신 특별한 곳입니다. 이 곳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 것이 내 진짜 직업입니다. 그렇게 하면 월급이라는 것도 부수적으로 주시는 것이지 내가 월급을 버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내가 일한 대가로 돈을 번다고 생각한다면 세상적이고 사탄의 언어 체계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내 진짜 직업은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직장이라는 장소에서 나의 진짜 직업을 수행하는 동안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먹고살 수 있도록 돈도 허락하십니다. 이 생각이 투철해야 되고 이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요 모든 것을 있게 하신 여호와이심이 사실이라면 직장에서도 그 여호와 하나님을 영광 중에 보는 것이 내 직업이 되어야 함도 사실입니다.
이 직업을 직장에서 수행함으로써 나는 하나님이 하늘에서 결정하신 것들을 이 땅에서도 이루시는 복을 받는 자가 됩니다. 그 복 중에 월급도 하나의 요소로 끼어있습니다. 우리는 월급을 목적으로 하여 직장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에서도 내 직업은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 것이고, 직장에서도 내 직업 활동은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이런 은퇴 없는 직업의 1호였습니다. 이제 그 1호인 아브라함이 죽게 되자 누가 아브라함의 붕어빵으로 등장할 것인가가 가장 큰 관심사입니다.
본문에서는 아브라함의 죽음이 언급되기에 앞서 다소 뜬금없는 내용이 선행됩니다. 아브라함이 사라가 죽은 뒤에 후처를 얻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후처로부터 여섯 명의 아들과 일곱 명의 손자와 세 명의 증손자가 언급됩니다. 이러한 상황이 기록된 것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지 않은 12~18절까지는 애굽 출신의 여종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이 낳은 열두 방백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방백(方伯)이란 이들이 모두 걸출한 인물들로서 영웅이나 위인과 같은 지도자였음을 가리킵니다. 결과적으로 애굽 출신의 여종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은 아랍 족속의 선조가 되었고, 후처인 그두라가 낳은 자손들은 아람 족속으로 편입됩니다. 본래 아브라함도 아람 족속이었고 이삭의 아내 리브가의 집안도 아람 족속입니다.
본문에는 많은 이름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아브라함의 생물학적 자손들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들을 모두 내보냅니다. 앞서 이스마엘을 내보냈던 것을 살펴보았고 본문에서는 그두라에게서 낳은 자손들 또한 다 내보냅니다. 이렇게 내보낸 자손들과 손자나 증손자의 이름까지 언급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러한 언급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가졌던 은퇴 없는 직업을 계승하게 될 사람을 예정하시고 선택하시는데 추리시고 추리시고 또 추리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는 곧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는 과정이 이렇게 추리시고 추리시고 추리신 하나님의 노골적이고 특별한 의도가 적용된 결과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특별한 의도를 통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선택을 받았고 은퇴 없는 직업을 잇게 된 것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내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하나님이 추리시고 추리신 결과로 예정되고 선택받은 자라는 것을 어떻게 스스로 확인할 수 있을까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삶의 현장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잃지 않고 잊지 않아야 함을 관심을 갖고, 신경 쓰고, 유의하고,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이 머리로라도 수긍이 되고, 인정이 되고, 공감이 되고, 동의한다면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그 간단한 사건에 대해 다만 이론적으로라도 그래야 한다고 인정함은 아무에게나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이론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삶의 현장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잃지 않고 잊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이 내 양심이 되는 것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아야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눈앞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어떤 사람이 나타나면 당장 그것들이 마음에서 영광을 받습니다. 그 사건이 영광의 사건이 되고, 그 사람이 영광의 사람이 됩니다. 그럴 때 ‘이러면 안 된다.’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이 양심입니다. 하나님만이 내 마음에서 일등이 되셔야 나의 양심으로 작동하는 것입니다. 내게서 이러한 양심이 작동한다면 본문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하나님이 추리시고 추리시고 추리셔서 이삭만 선택하시듯이 나를 선택하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렇게 선택하셨기 때문에 삶의 현장에서 우리 마음에 그러한 양심이 작동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추리시고 추리신 예정과 선택의 결과로써만 인간은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고 사는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 있습니다.
본문은 참 의미가 깊습니다. 본문에서 언급된 수많은 이름은 예외 없이 아브라함의 생물학적 자손들입니다. 이들의 이름이 또박또박 언급되는 중에 우리는 한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들 중에서 외모가 아브라함과 붕어빵이었던 사람이 없었을까요? 당연히 있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물학적 자손이기에 외모가 유난히 아브라함을 닮은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외모 뿐만 아니라 성격이나 행동거지가 닮은 경우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들들이 나이를 먹을수록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은 낯선 일이 아닙니다. 이스마엘과 그의 자손들, 그두라가 낳은 자손들은 아브라함을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로 삼는 이들입니다. 이들 중에는 유난히 아브라함의 인격적 특성을 닮은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삭이 아브라함을 별로 닮지 않았을 가능성도 많습니다. 외모로는 어머니 사라를 닮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생물학적으로 아브라함을 많이 닮았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도 다 제치시고 딱 한 명 이삭을 선택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은 너무나도 임의적입니다. 객관적 기준이나 공평한 잣대가 없습니다. 그리고 많은 자손들 중에서 이삭 한 명만을 선택하셨다는 점에서 그 선택의 폭이 굉장히 좁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아브라함의 많은 자손들 중에서 추리시고 추리시고 추리셔서 한 명만 선택하셨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내 마음이 삶의 현장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잊어버린 상태가 깨달아질 때마다 가슴을 치고 후회하며 회개하는 것이 영적 양심입니다. 이러한 영적 양심이 작동하는 이유는, 바로 오늘 본문에서 묘사되고 있는 좁디좁게 추리시고 추리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의도가,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나를 예정하시고 나를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사실을 전하고자 오늘 본문이 기록되었습니다.
우리의 은퇴 없는 평생 직업은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습니다. 예수님 안에 마음이 들어가 있어야만 영광의 하나님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야기가 이로부터 시작됩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보는 상태를 유지해야 이 땅에는 우연으로 바탕이 깔리고 하나님이 하늘에서 결정하신 모든 복을 범사에 주십니다.
11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말씀이 등장한 이유는 이삭이 아브라함의 은퇴 없는 직업을 물려 받았음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영광의 하나님을 잃지 않고 우연을 바탕으로 하늘에서 정하신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이삭도 아브라함에 대한 뜻 안에 포함된 존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면 당연히 이삭에게도 영향이 미치고 있었기에 따로 이삭을 언급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복을 주심은 이삭에게로 전가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의 직업을 승계한 것처럼 우리 각자는 아브라함의 직업을 승계하는 또 하나의 이삭이 되어야 합니다. 또 하나의 아브라함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범사에 복을 받는 자리에 들어서는 일은 철저하게 추리시고 추리시고 추리셔서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선택하심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본문은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심으로써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 사는 삶이 어떤 의미인지를 다시 한번 일깨워 주십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내보낼 때를 떠올려 봅니다. 이스마엘이 세상 의미에서 별 볼 일 없기에 내보냈던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이 아이 정도면 충분히 나의 상속자가 되고도 남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기에 17장에는 하나님이 사라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날 것을 또 다시 약속하실 때에 18절에서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20절에서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대로 이스마엘에게서는 열두 두령이라 부를만한 걸출한 인물들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모두 제치시고 이삭을 아브라함의 직업을 이어 받을 후계자로 삼으십니다.
이스마엘은 남자답고 용맹하였고 이로부터 열두 방백이 태어납니다. 영웅적 자질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이스마엘은 제치십니다. 반면 이삭은 이스마엘에 비교될 만한 영웅적이고 위인적인 모습을 보인 적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두라를 통해 낳은 자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아브라함 늘그막에 얻었습니다. 노년에 얻었기에 더 예쁠 수도 있습니다. 5~6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었고 / 자기 서자들에게도 재산을 주어…”라고 하였습니다. 그두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에게 재산을 다 분배한 후에 남은 것을 이삭에게 다 주었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재산을 아까워하지 않고 분배할 정도로 이들은 소중한 생물학적 자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들 또한 제치십니다.
세상에서 나보다 잘난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똑똑히 아시기를 바랍니다. 나보다 잘난 사람들이 대통령을 하고 국회의원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이 삶의 현장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내 앞에서 그들을 제치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분명히 아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잘났다는 사람들을 다 제치시는 것은 나를 선택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있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러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세상의 모든 위인과 모든 영웅과 모든 탁월한 전문가들과 모든 훌륭한 사람들이 다 잊고 있습니다. 그들은 나라를 위해 애국자로 살고, 기술 발전에 획기적인 선을 긋기도 하며, 많은 사람을 돕기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에는 영광의 하나님이 아니라 영광의 대한민국이 보이고, 영광의 자리가 보이고, 영광의 재물이 보이고, 영광의 인류문명의 발전이 보입니다. 마음의 어느 구석에서도 영광의 하나님을 찾아볼 수 없다면 그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제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볼품 없습니다. 배운 것도 없습니다. 재정적인 능력도 별 볼 일 없습니다. 외모도 그렇고 다방면에 갖고 있는 재능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싶을 정도의 수준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속에서는 이상하게 하나님을 놓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이 일등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할 때마다 뉘우침과 후회가 발생합니다. 그렇게 하는 내가 밉고 하나님께 죄송해서 다시금 십자가 예수님을 붙잡습니다. 이것은 그냥 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땀나도록 열정적으로 제치시고 제치시고 또 제치셔서 선택하고 예정하심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노골적이고 임의적이고 불공평하기까지 한 의도에 의해서 예정 받고 선택 받았기 때문입니다.
박근혜 대통령 시절 비선 실세로 이름을 떨쳤던 최순실 씨의 딸이 ‘부모 잘 만나는 것도 자기 능력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천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보여주시지 않고, 우리의 부모가 되어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영광의 하나님을 놓침에 대해서 추호의 가책도 느낄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놓침에 대해 가책을 느낀다면 아브라함의 은퇴 없는 직업을 계승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계승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땀나도록 열정적인 예정과 선택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내 삶의 현장에서 눈앞에 보이는 배우자와 자녀와 부모 앞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나는지 분명히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냥 십자가 복음 방송을 듣다 보니 말씀이 마음에 와닿아서 한번 해본다는 마음으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얼마든지 잘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아브라함의 피를 받아 태어난 자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다 제치시고 이삭 한 사람을 남기십니다. 그리고 십자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를 이삭의 자리에 세우십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받아들였을지라도 죄 사함을 받았으니 끝났다고 여기고 세상으로 돌아가서 마음에 영광의 세상 것들을 담고 사는 자들은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과는 무관합니다. 예배당에 출석하는 것도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예배당에 출석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예배당 하나 없던 시절에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 은퇴 없는 직업의 1호로 살았습니다. 우리는 말도 안 되고, 불공평하기 이를 데 없고, 완전히 임의적이며, 정말 주최 측 농간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정되고 선택되었습니다. 어쩌다가 나를 예정하셨는지 놀라울 뿐입니다.
앞서 우리는 ‘하나님이 설정하신 우연만 가득한 삶’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십자가 복음 방송이 전파되는 모습을 봅니다. 동서남북 교회를 방문하고 대화를 하면서 예외 없이 느꼈던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가 우연히 십자가 복음 방송을 만났다고 합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내가 붙잡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잃지 않고 잊지 않는 것을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의도를 보일 수도 없고, 계획할 수도 없고, 내 뜻을 발휘할 수도 없었습니다. 우연히 듣고 나서야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말씀이 아예 들어오지 않다가 서서히 알게 된 분도 계십니다만, 어쨌든 영광의 하나님을 은퇴 없는 직업으로 삼는다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우연히 접했는데 지금 듣고 있는 분들은 십분의 일, 백분의 일도 안 됩니다. 듣다가 떨어져 나간 숫자가 그만큼 많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왜 보이지도 않는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으려고 삶의 현장에서 기를 쓰고 살아 갈까요? 왜 이것을 은퇴 없는 직업으로 채택하게 된 것일까요? 하나님을 놓칠 때마다 왜 후회하고 나를 미워하기까지 할까요? 그 이유를 본문이 가르쳐줍니다. 그동안 내가 생각하기에 잘났다고 여기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다 제치시고 하나님이 나를 임의로, 불공평하기 이를 데 없이, 근거 없이, 이유 없이 예정하시고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쩌다가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 제가 걸려들었을까요? 걸려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찔합니다. 이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은 임의로, 불공평하게, 이유 없이 내게 주어지게 되었음을 한시도 잊지 않고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