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나는 서열 몇 번째 신의 아들일까?>의 줄거리 :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린 에서를 향하여 "장자의 명분을 소홀이 여겼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장자의 명분이란 우리와는 무슨 관계가 있고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나는 하나님에게 장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에게 서열 몇 번째의 아들일까요? 만 번째? 십만 번째? 예수님 믿으면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육체를 벗고 영으로만 말하자면 딸은 없지요. 모두가 예수님처럼 다 아들인데 과연 나는 몇 번째 신의 아들일까요?
나는 서열 몇 번째 신의 아들일까?
(창세기 25:19~34)
19.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20. 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
21.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22.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24.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둥이가 있었는데
25.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26.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아브라함은 아들을 낳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25년 만에 이삭을 얻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삭도 리브가와 결혼하고 20년이 지나서 에서와 야곱이라는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나머지 부분에는 에서가 야곱에게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리는 유명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34절을 보면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라고 그 내용이 정리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과 34절을 중심으로 하여 ‘나는 서열 몇 번째 신의 아들일까?’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29절에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장자의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본문에서의 장자의 문제, 사도 바울이 언급한 장자의 의미, 그리고 선택받았다고 믿는 나 자신은 어떤 관계를 갖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2~13절을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라는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혈통, 육정, 사람의 뜻이 아닌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났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예정하심이 예수님을 통하여 선택하시는 상황을 거꾸로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창세 전에 예정하심으로 예수님을 통하여 선택하시는 역사를 내가 믿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하나님의 자녀가 됨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한편 본문에서는 자녀 됨과 장자 됨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녀 중에서 장자를 염두에 두고 말하자면 여러분은 서열 몇 번째의 아들들일까요? 그 서열에 따라 하나님과 멀고 가까움도 결정됩니다. 우리는 아벨로부터 시작하여 에녹, 노아, 아브라함을 살펴보았고 이제 이삭과 야곱과 요셉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계보는 다시 모세를 거쳐 여호수아, 갈렙, 사무엘, 다윗으로 이어지고 신약에 이르러서는 사도 베드로, 사도 요한, 사도 바울 등이 등장하며, 이후로는 어거스틴를 비롯한 신앙의 선진들로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 아버지께 몇 번째 서열일까요?
다시 로마서 8장 29절을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맏아들이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모든 만물보다 먼저 나신 창조주이심을 언급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을 창세 전부터 계시던 영원하신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자 맏아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15장 20절을 보면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라고 말합니다. 사람 중에서 첫 번째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맏아들이나 부활의 첫 열매라 함은 하나님 아버지를 기준으로 예수님이 첫 번째 서열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나님 앞의 서열 속에 계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아버지 앞에서 서열 속에 계신 분이 아니고 아버지와 일체 되어 계십니다. 아버지 앞에서의 서열은 우리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나는 아버지 앞에서 몇 번째 서열에 해당할까요? 십만 번째, 이십만 번째, 백만 번째일까요? 설마 우리가 열 번째 안에 드는 서열에 포함될 수 있을까요?
이 서열의 의미를 잘 드러낸 구절이 히브리서 12장 23절입니다.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교회가 곧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 안에서 선택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자들이 장자라고 합니다. 마음이 예수님 마음 안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육체를 벗어버리면 남자와 여자라는 구분은 없습니다. 세상에 남자나 여자라는 개념이 없을 때부터 하나님은 아버지이시고 예수님은 아들이십니다. 그러므로 남녀의 구분으로 아들이 되고 아니고를 구분할 수는 없습니다. 육체를 벗어버리면 지금 여자로 살고 있더라도 하나님의 아들인 셈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에는 바로 이러한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통해 아들이 될 자들에게 서열이 있을까요? 사람에게는 장자도 있고 차자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도 사람 숫자만큼 서열이 있어서 열 번째, 스무 번째, 백 번째, 십만 번째, 백만 번째도 있을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말대로 교회는 장자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 34절을 보면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라고 합니다. 이 표현을 영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쉽게 말해 ‘예수님 믿는 것을 소홀히 여겼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 믿으면 장자가 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서열 첫 번째의 장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장자가 됩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는 말씀은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장자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라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장자들의 모임입니다. 앞으로 보겠습니다만 사실은 에서만 장자의 명분을 소홀히 여긴 것은 아닙니다. 야곱도 노년에 이르기까지 평생 장자의 명분을 소홀히 여겼던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이 팥죽 한 그릇에 사려고 했던 장자의 명분은 하나님 앞에서 자녀 된 자로서의 서열이 아닙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의 유산을 받는 일에서 장자가 되고자 했습니다. 히브리 문화에서 장자는 다른 아들들보다 두 배의 유산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바로 이러한 장자의 명분을 열망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 됨의 서열에서 장자 되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아버지 이삭이 가진 재산을 두 배 더 갖고 싶은 명분을 원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야곱을 선택하시고 에서를 버리신 예정과 선택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요? 앞서 살펴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은 무조건 나를 장자 삼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 장자의 명분을 버린다면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장자의 명분과 선택이 맞물려 들어가는 이유는 하나님의 선택은 당신 자신을 영광의 존재로 우리 마음에 어필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하나님만을 영광의 하나님으로 모셔 들일 수 있음이 특징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영광을 받아야 할 대상은 돈도 아니고 자녀도 아닙니다. 배우자나 애인 혹은 조국도 영광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영광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내 마음에 있음의 존재감이 가장 무겁고 가장 우선으로 느껴지는 대상입니다. 돈의 존재감을 가장 크게 느끼는 사람에게는 돈은 영광의 돈입니다. 선택받음이란 이렇게 각종 대상들을 영광으로 느끼는 사람 중에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하나님의 존재감만을 가장 무겁고 가장 우선으로 느끼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선택받은 목적입니다. 또한 사람은 누구나 마음의 채움을 원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유일한 좋음으로 믿고 하나님만을 열망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이 선택받음이 장자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장자는 서열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선택받은 자는 모두가 장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을 가장 우선으로 느끼고 하나님의 좋음만을 열망하려면 하나님을 직면해야 됩니다. 하나님과 내 마음 사이에 누군가 다른 대상이 끼어 있으면 안 됩니다. 끼어 있는 대상의 존재감을 먼저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선택받았다면 하나님의 존재감을 최우선으로 무겁게 느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좋음을 최우선으로 가장 크게 열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유일하게 열망하는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선택의 목적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다른 대상이 끼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을 마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마주 보는 상태는 서열이 첫 번째여야 가능합니다. 서열이 첫 번째가 아니면 하나님을 마주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감만을 느끼고 하나님의 좋음만을 열망하기를 바라시며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바라시는 일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예정하신 모든 사람을 장자로 선택하셨습니다. 이는 곧 모든 사람은 독립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위일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세상에 하나님의 선택받은 아들들이 십만 명이라고 해보겠습니다. 그러면 십만 명 중에서 일 번부터 십만 번까지 서열이 매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만 개의 사위일체가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로움입니다. 삼위 하나님은 십만 명의 아들들 각자와 사위일체를 이루실 수 있고 이루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로부터 장자의 명분을 소홀히 여김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영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음이란 곧 하나님을 직면하지 않음입니다.
돈 문제가 발생했을 때 내가 하나님의 존재감보다 돈 문제의 존재감을 먼저 느낍니다. 내 마음이 돈 문제에 몰두하고 있고, 돈 문제에 매이게 됩니다. 그 순간은 장자의 명분을 소홀히 여긴 것이고 돈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린 것입니다. 내 마음에서 자녀를 영광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면 그 순간은 하나님을 직면하고 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하나님을 직면하지 않는다는 것은 서열상 장자의 자리에서 벗어난 것이고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린 것입니다. 에서가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팔았듯이, 자녀에게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린 것입니다. 마음에서 자녀를 얻었으나 장자의 명분은 버린 것입니다. 선택은 영광의 하나님을 보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영광의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장자의 명분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경우에 영광의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몸이 좋지 않아서 영광의 건강을 봅니다. 그렇다면 건강이라는 팥죽을 먹고 영광의 하나님을 버림과 동시에 장자의 명분을 소홀히 여긴 것입니다.
이제 본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에서와 야곱의 등장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9장 11~13절에서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택과 장자의 명분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선택은 영광의 하나님을 보는 자들로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보려면 하나님을 마주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나는 서열 첫 번째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볼 때는 하나님이 서열 첫 번째가 되셔야 합니다. 문제는 내가 영광의 하나님을 보지 않고 영광의 세상 것들을 보려 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모습이 장자의 명분을 소홀히 여기는 것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하심에는 패턴이 있습니다. 본문은 이것을 가르쳐 주고 있고 이것은 앞서 살펴보았던 이삭을 선택하심을 통해서도 드러났습니다. 아브라함은 하갈에게서 낳은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후처 그두라에게서 낳은 여섯 명의 아들과 일곱 명의 손자와 세 명의 증손자의 이름을 거명하셨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 후손의 이름을 언급하시면서 이삭을 제외한 모든 이들을 내보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한 명을 골라냄보다는 나머지를 버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고르시는 것이 아니라 버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란 나를 남겨두고 내 주변을 다 버리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기업에서 신입사원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이때 지원자들은 자기가 선택될 가능성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을 하게 됩니다. 지원하는 사람 중에 1%도 안 될 것을 알면서도 객기로 시도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99%는 한번 해볼 만하다고 여겨서 지원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시험을 보고 면접도 치르며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회사에 적절하고 알맞은 자들을 골라냅니다. 회사에 의한 선택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택은 세상의 선택과는 다릅니다. 웬만큼 자격을 갖춘 자들 중에서 가장 탁월한 자를 뽑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다 버리는 중에 안 버리는 사람으로 결정됩니다. 대기업에서 신입사원을 뽑는데 한 명도 예외 없이 자격 미달인 상황인 것과 같습니다. 뽑을만한 사람이 없어서 다 버립니다. 그런데 버리는 중에 어쩔 수 없이 무작위로 몇 명만 골라내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웬만한 자격을 갖춘 자들 중에서 더욱 탁월한 자를 뽑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다 자격이 없어서 버리는 중에 안 버리는 자를 골라내십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이삭도 이스마엘이나 그두라의 아들들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봅니다. 25톤 덤프트럭이 흙을 잔뜩 싣고 왔습니다. 이제 화물칸을 기울이면 어마어마한 흙더미가 쏟아져 내려옵니다. 인류는 덤프트럭에 실려 온 흙더미와 같습니다. 다 지옥으로 쓸려 내려가는 중입니다. 이것은 어느 나라의 대통령이든 총리대신이든 국회의원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명성 있는 정치인일지라도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있지 못하고, 그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면 덤프트럭에서 쏟아지는 흙더미 속의 흙 알갱이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지옥으로 쓸려 내려가는 흙더미 속에서 몇몇 알갱이들을 골라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왜 야곱은 취하시고 에서는 버리십니까? 굳이 버리실 에서를 왜 맏아들로 태어나게 하실까요? 애초에 야곱을 택하실 것이라면 야곱을 먼저 태어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야곱을 늦게 태어나게 하시고, 그로 인해 장자 권을 탐하게 하시고, 결국 팥죽 한 그릇에 팔게 하셨을까요? 덕분에 에서와 분란이 일어나서 이삭 집안의 평화는 풍비박산이 납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먼저 태어나게 하셨다면 이러한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에서가 태어나고 몇 년이 지난 후에 야곱이 태어나게 하신 것도 아닙니다. 마치 장난이라도 하시는 것처럼 야곱은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나게 하십니다. 발꿈치 하나 차이로 차남이 되고 말았으니 야곱 입장에서도 억울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대체 왜 이렇게 하실까요? 성경은 이러한 내용을 통해서 하나님의 절대주권 자의성이 농후한 의도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의 자의적이고 주권적인 의도가 있기에 우리가 잘났다 못났다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 기준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이 자의대로 하시는 중에 어쩌다 내가 걸려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에는 증거가 있습니다. 영광의 돈이 마음에서 보일 때 마치 입 속에 똥을 담은 것처럼 견딜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돈 문제가 급해도 돈 문제에 몰입하는 나 자신을 보고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면 못 견뎌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들의 특징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났더니 이전에 좋아해서 마음속에 영광의 자리에 두고 또 보고 싶어 하던 모든 것들이 배설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자녀를 영광의 대상으로 담고자 하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마치 입에 똥을 담은 것처럼 여깁니다. 마음에 자녀를 담고 있는 상황을 십자가에서 죽입니다. ‘이렇게 더러운 나는 한순간도 더 살아서는 안 된다.’라고 생각해서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주님의 보혈로 씻긴 마음이 부활하신 주님을 따라 승천하여 보좌 우편에서 하나님을 마주 대합니다. 장자의 자리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길은 영광의 세상 것들을 보고 있는 내가 죽는 길이고 부활하여 승천하는 길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임의성에 의하여 선택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자의적인 결정에 의해 얻어 걸리듯이 택함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장자입니다. 서열 첫 번째인 장자는 하나님과 내 마음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 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는 곧 24시간 하나님이 첫 번째 존재감의 대상이 되셔야 함을 의미합니다. 내 옆의 모든 사람들은 돈을 소원하고, 승진을 열망하고, 건강을 바라고, 자녀의 형통을 기원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나는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고 하나님 부자 되기만을 소원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모습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삭과 리브가는 결혼해서 20년이 지난 후에야 에서와 야곱을 낳게 됩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왜 이렇게 시간을 끄셨을까요?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는 것은 이삭이나 리브가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일입니다. 말이 20년이지 당시의 관습이나 결혼에 대한 심리상태를 고려해 본다면 20년은 평범하게 기다릴 만한 세월이 아닙니다.
앞으로 보겠습니다만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믿음을 유산으로 받았습니다. 20년 동안 이삭은 아들에 대한 생각이 날 때마다 마음에서 영광의 아들을 죽였을 것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만을 붙잡기 위하여 자기를 번제단에 올리고 죽이려 했을 때 이삭은 죽임을 당하는 입장에 섰던 피해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경험으로부터 이삭은 아버지의 믿음을 유산으로 받았습니다. 이삭은 마음에서 아들에 대한 생각이 날 때마다 자손 번성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들이 생각나고 바라게 될 때마다 아들을 죽여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삭이 기도했기에 하나님께서 아들을 낳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움직이셔서 응답하시는 것이라면 이삭은 20년이나 기다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삭에게 20년은 자식을 마음에서 죽이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안도감을 가지시고 자식을 낳아도 자식에게 매이지 않겠다고 확인하신 뒤에 이삭의 마음을 몰아붙여서 기도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절차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삭이 리브가와 결혼하자마자 에서와 야곱이 태어났다면 자칫 잊어버릴 수도 있을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이 의도를 기억하게 하시려고 20년 만에 에서와 야곱을 낳게 하십니다. 의도적으로 20년 간 늦추신 것입니다.
그리고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버려지는 자가 있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은 장자 권을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를 십자가에서 죽이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과 대면하는 장자를 회복한다면 선택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마어마하게 마음을 투자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에 의해서 이루어진 선택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선택하시고 이스마엘과 그두라의 아들들을 버리십니다. 에서와 야곱은 한 배에서 나온 형제입니다. 이들이 쌍둥이인 것은 이보다 더 가까울 수 없는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덤프트럭의 흙더미처럼 지옥에 쓸려 내려갈 자들 중에서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매달리도록 예수님을 통해 건져내신 몇몇 알갱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 세상에서 어머니의 태로부터 서로 엉켜있는 쌍둥이일지라도 둘 사이에 하나님이 끼실 수 있도록 서로 떨어져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끼시지 못할 정도로 서로를 붙잡고 있는 관계여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선택을 받아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의 있음과 좋음이 첫 번째가 되는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싶으십니까? 그렇지 않을 때마다 십자가에서 죽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어머니의 태로부터 밀착되어 엉켜있던 쌍둥이조차도 떨어져야만 합니다. 쌍둥이는 어머니보다도 더 가까운 존재입니다. 태중에서 마주하고 있고 밀착되어 있던 존재는 어머니가 아닌 서로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쌍둥이로 태어나게 하신 후에 한 명을 버리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그러면 선택받은 자가 인간관계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하나님을 가지기 위하여, 하나님과 마주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서열 첫 번째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장자가 되기 위해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위일체가 되기 위해서,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함께 밀착되어 있던 형제도 원수처럼 버려야 합니다. 육체적인 차원에서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원수 취급하듯이 버려야 합니다. 에서와 야곱은 철천지원수가 됩니다. 하나님을 직면하고 하나님과 내가 서열 첫 번째 장자와 아버지의 관계가 되기 위하여 육체로 맺은 관계 중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철천지원수처럼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원수는 원수로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내 마음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들어올 만큼 내 몸을 인연으로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에서와 야곱이 철천지원수가 되듯이 원수처럼 여기라는 것이 하나님의 선택의 뜻 안에 들어있는 요구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하나님의 장자입니다. 서열 첫 번째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을 직면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안에 마음이 들어가 있는 모든 사람은 하늘까지 따라 올라가 하나님을 직면하고 영광의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도 사는 동안에 내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영광의 세상 것들이 보인다면 세상 것을 먹고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리는 것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 것은 은퇴 없는 직업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 마음이 떠나고 몸으로 사는 인생은 죽을 때까지 은퇴 없는 하나님의 직업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직업을 방해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의 삶을 은퇴 없는 직업으로 삼으셔서 마음껏 수행하시도록 우리는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하늘의 장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선택과 장자 됨의 의미가 내게서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게 하시고, 영광의 세상 것이라는 팥죽을 먹음으로써 장자의 명분을 잃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