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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

녹취문: 하나님 재벌 2세 (창 26:1~11)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4.09.02|조회수62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 재벌 2세>의 줄거리 :

아브라함은 영광의 하나님을 마음에서 지켜내는 은퇴 없는 직업을 통해 평생 하나님을 벌고 벌어서 하나님 재벌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 재벌 2세인 이삭이 전면에 등장을 합니다. 이삭에 대한 언급이 상대적으로 아주 작은 분량입니다. 그러나 그 작은 분량 안에 하나님 재벌 1세인 아브라함이 상속한 모든 영적 재산이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서야 할 자리가 바로 이렇게 하나님 재벌 2세인 이삭의 자리입니다.

 

하나님 재벌 2

 

(창세기 26:1~11)

 

1.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2.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3.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4.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5.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6. 이삭이 그랄에 거주하였더니

7. 그 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내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8. 이삭이 거기 오래 거주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

9.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분명히 네 아내거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로 말미암아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10. 아비멜렉이 이르되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할 뻔하였도다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

11. 아비멜렉이 이에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나 그의 아내를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하였더라

 

 

이삭의 이야기와 관련하여 ‘하나님 재벌 2세’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아브라함을 ‘하나님 재벌 1세’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본문에서 언급되는 대로 하나님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을 고스란히 상속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과 자손 번성에 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들 이삭에게 이 약속이 그대로 주어집니다. 그런데 이런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대전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아버지의 믿음을 본받아서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의 내용보다 하나님 자신을 더 좋아하여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주신 약속 또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삭이 영광스럽게 보아야 하는 일이란 약속과 그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입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을 영광의 대상으로 지켜냈던 아버지 아브라함의 믿음을 상속받을 수 없다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이루고자 하신 약속은 상속될 수 없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평생을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기 위하여 몸부림치며 사는 것을 은퇴 없는 직업으로 알았습니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은 매일매일 하나님을 엄청나게 버는 재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버는 모습은 모리아 산에서 아들을 번제로 바치는 장면에서 드러납니다. 아브라함이 이러한 일을 쉽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삭을 낳을 때부터 마음에서 날마다 죽였기 때문입니다. 영광의 이삭을 죽이고 영광의 하나님만을 붙잡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형용할 수 없는 가치였습니다. 그런데 마음에서 그 이삭을 죽이고 영광의 하나님만을 붙잡았다는 것은 다시 말해 이삭의 가치만큼 하나님을 벌었음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태어날 때부터 마음에서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이삭을 죽이고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 값어치만큼 하나님을 벌었다고 하더라도 이삭이 장성할 때까지 얼마를 벌었을지는 상상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심지어 아브라함은 이전에도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버렸고, 아내를 버림으로써 그것들의 가치만큼 하나님을 벌었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 재벌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하나님 재벌인 아브라함의 상속자가 이삭입니다. 그러므로 이삭도 소위 재벌 2세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은 이삭이 하나님 재벌 1세인 아브라함의 유산을 상속하여 하나님 재벌 2세가 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믿음의 시조 중에서 이삭의 비중이 가장 낮고 존재감이 약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이삭에 관한 언급의 분량이 적기 때문인데 그렇게 오해하면 안 됩니다. 이삭이 없다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이루어 가실 수 없습니다. 약속을 받은 사람은 아브라함이었지만 그 약속이 실제로 이루어지게 하는 고리 역할을 하는 자는 이삭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삭에 대한 언급이 적은 것일까요?

출애굽기 4장 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을 위해 모세를 부르실 때 스스로를 소개하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지금 나에 대해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모른다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과의 관계는 자기기만이 되고 맙니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과 관계하고 있다고 속이는 것이지 실제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영글어 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야곱의 하나님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는 아브라함과 이삭이 나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 중점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떤 영적 상태를 보여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영적 상태는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가 됩니다. 아브라함은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내는 은퇴 없는 평생 직업을 갖는 것의 원형을 드러내 보여주었습니다. 우리 인생의 목표는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영광의 하나님을 마음에서 지켜내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이것 외에 다른 목표가 없습니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 자녀가 형통하는 것, 사업이 잘되는 것, 세상에서 내 이름을 내는 것, 평안하게 사는 것들은 우리 인생의 목표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보여준 은퇴 없는 평생 직업을 나의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결국 이삭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삭이 될 수 있을까요?

아브라함의 영적인 재물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본문은 이삭에게 그 영적인 재물인 하나님이 고스란히 상속됨을 보여줍니다. 이삭은 기근 때문에 그랄로 이주합니다. 아브라함 또한 그랄로 이주했던 적이 있고 블레셋 지역의 왕을 의미하는 아비멜렉과 아내 사라를 두고 갈등을 빚었습니다. 그리고 이삭 또한 아내 리브가를 두고 아비멜렉과 갈등을 빚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아브라함과 똑같은 상황을 설정하심으로써 이삭이 아브라함의 영적인 재물을 모두 상속받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 재벌 1세인 아브라함의 모든 재물을 상속받은 재벌 2세임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도 이삭이 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삭은 본문에 기록된 사건을 제외하고는 전면에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언급의 분량이 적다고 해서 이삭의 존재감이 작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삭의 존재 의미를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본문을 제외하면 이삭이 주인공으로서 조명을 받는 분량은 적습니다. 그런데 앞서 아브라함과 관련하여 이야기된 모든 내용들은 결국 이삭과 관련이 있습니다. 물론 성경은 아브라함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기에 이삭에 대한 이해가 많이 끼어들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앞선 이야기들을 이삭에 초점을 맞추어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까지 살펴보았던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들이 이삭의 이야기가 된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에서 믿음이 최고조에 달한 시점은 바로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바칠 때로부터 시작해서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 종인 엘리에셀을 하란으로 보낼 때입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믿음이 최고조에 달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성경의 기록만으로 보자면 이삭이 없다면 아브라함의 믿음이 최고조에 달했음을 표현할 길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첫 번째 라이벌이었습니다. 이삭과 관련해서만 아브라함은 최고조에 달한 믿음을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이삭이 그만큼 영광의 하나님에 맞설 수 있는 존재였고, 아브라함의 마음을 차지할 수 있는 존재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의 최고조에 달한 믿음의 표현이 항상 이삭과 관련되어서 나타났다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이삭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은 하늘을 향한 최고조의 믿음을 보입니다. 그리고 엘리에셀에게 이삭의 아내를 데려오게 하는 장면에서는 땅을 향한 최고조의 믿음이 드러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죽이면서 영광의 하나님을 지키려고 했을 때 청년이 된 이삭은 이 상황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은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독자인 나조차도 죽일 수 있다.’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습니다. 이는 곧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지키기 위해서는 가장 소중한 존재까지도 죽이고 없애야 한다는 아버지의 신앙을 받아들여야 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면 이삭은 모리아 산의 사건 이후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이어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삭은 자신도 아버지처럼 해야만 한다는 것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입장이라도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아들을 죽였을 것이다.’라고 여겼습니다. 앞서 우리는 모리아 산의 번제 사건을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이해했기에 이삭의 이야기가 묻힌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삭에게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 없었다면 모리아 산의 사건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며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냈습니다. 그리고 이삭은 아버지의 칼 든 손에 자기 목숨을 버리며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엘리에셀을 보내 며느리를 찾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건의 진짜 당사자는 아내를 맞이하게 될 이삭입니다. 이후에 야곱은 레아와 라헬 사이에서 아내 될 사람에 대한 의사를 뚜렷하게 표현합니다. 적어도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표현할 수 있는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아버지가 보낸 엘리에셀에게 선택을 완전히 일임합니다. 엘리에셀의 여성관, 편견, 선입견, 성격과 같은 것들이 작동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 위에 있는 하나님의 주권을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엘리에셀이 하나님의 주권을 결코 이길 수 없음을 인정하여 위임하였습니다. 이삭은 이러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자신 또한 그대로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입니다. 그렇기에 따라나서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엘리에셀이 내 아내를 데려올 것이다. 그러나 엘리에셀의 그 어떤 인격적 요소도 아버지와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주권을 이길 수는 없다.’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삭은 들판에 나가 기다릴지언정 직접 나서서 자기 눈에 좋은 대로 아내를 얻겠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의 최고조에 달한 믿음이 드러나는 현장에는 이삭이 있었습니다. 이삭은 아버지가 하늘을 향하여 영광의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아까워하고, 하나님 버는 것을 자기 직업으로 삼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이 땅에서의 삶은 주권자 하나님의 직업이 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삭은 이러한 믿음이 가장 강렬하게 드러나는 현장에 있으면서 자신도 하늘을 향하여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 버는 것을 자기의 직업으로 삼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땅을 향해서는 주권자 하나님이 내 인생을 직업 삼아 이끌어 가심을 인정하였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삭은 하나님 재벌 2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이 그랄이라는 현장에서 아버지와 똑같은 사건이 일어나도록 설정하심으로써 이삭이 하나님 재벌 2세임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아비멜렉과 아내 리브가와의 관계 안에서 이삭이 어떻게 하나님 재벌 1세인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받았는지를 이 한 장면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정리해 봅니다. 이삭은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아까워하는 믿음이 정점에 달한 그 순간에 함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땅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아버지의 믿음이 정점에 달한 당사자로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하늘과 땅을 향한 아브라함의 믿음이 이삭에게 상속되었다는 사실을 그랄에서의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증거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삭이 하나님 재벌 1세인 아버지 아브라함의 모든 영적 유산을 상속받았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편 우리가 읽어서 알 수 있습니다만 본문을 읽을 때 해석을 어렵게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9절을 보면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분명히 네 아내거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로 말미암아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내 생각에 그로 말미암아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라는 부분이 우리를 헷갈리게 합니다. 이 부분은 이삭이 살고자 아내 리브가를 누이라고 속였다는 식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똑같은 상황을 아브라함 때도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누이라고 거짓말합니다. 20장 11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이르되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이 부분을 보면 아브라함도 사라를 누이라고 말한 것이 자기가 살기 위한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삭이 마치 아브라함의 이기심까지 상속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당시의 시대상을 염두에 두자면 일개 유랑민이 아름다운 아내를 지킬 방법은 없습니다. 권력자들에게 반드시 빼앗기기 마련입니다. 남편이 있는 여자라면 남편을 죽여서라도 빼앗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은 자기가 살겠다고 아내를 누이라 속이는 이기심의 표현처럼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본문을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어렵게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 대해 살펴볼 때도 말씀드렸듯이 실상은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먼저 이삭이 하나님 재벌 1세인 아브라함의 모든 영적 재물을 상속받았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성경은 이 사건을 그 증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 속에서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시대 상황입니다. 이삭의 마음은 이러한 시대 상황에 자신이 여호와로 믿는 하나님의 주권이 이미 임하고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아름다운 여인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남편을 죽이는 것도 당연하게 여기는 시대 상황을 하나님의 주권이 임한 결과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삭은 앞서 우리가 살펴보았던 대로 특권 의식을 발동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에게나 특권 의식은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다만 그 특권 의식이란 땅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영광 중에 바라볼 수 있음을 자신들의 특권으로 여겼습니다. 그 하나님을 지켜내고 벌 수 있음을 특권으로 국한했습니다. 이 세상 삶에 대해서 다른 사람보다 특별한 대우를 받고 싶다는 의식을 갖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특권 의식을 갖는다면 마음에는 하나님이 아닌 세상 것들이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차피 세상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다른 사람에 비해 특별대우 하지 않으셔도 그 주권과 뜻은 여전히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을 향해서 특권 의식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이삭이 마치 믿음 없는 것처럼 행동했던 이유입니다.

 

또한 아비멜렉과 아내 리브가를 두고 일어난 사건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두 번째 내용이 있습니다. 이삭은 리브가를 누이라고 말하며 마음에서 완전히 떠나보냅니다. 이삭이 리브가를 누이라고 말한 시점에서 누구라도 리브가를 데려갈 수 있습니다. 아내를 누이라고 말한 이삭의 마음은 아브라함 때와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리브가의 운명과 부부관계의 운명은 이 시대를 물 샐 틈 없이 실시간으로 지배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나와 아내를 지켜주실 것이다.’라고 믿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그러한 바람을 갖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의 특권 의식은 오직 하나님 자신을 갖는 것에 국한됩니다. 이 시대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주권 앞에 아내를 그대로 내놓았을 뿐입니다. 아내가 마음에서 영광의 자리를 차지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아내를 지켜내려고 하다가는 아내가 마음에서 영광의 자리를 차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자면 이기심이라는 말도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 결국 자기가 죽지 않으려고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것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실제로 아내가 이복 누이이기도 했지만 이삭의 경우 리브가는 조카뻘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살겠다는 이기심에는 보다 깊은 사정이 담겨있습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과 이삭은 ‘나는 영광의 아내를 마음속에 바라보는 중에 죽임을 당하고 싶지 않다.’라고 여긴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으로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특권을 누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아내를 마음에서 영광의 대상으로 담은 채로 죽는 것은 그야말로 개죽음입니다.

마음에서 영광의 아내를 바라보며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철저한 이기심이 맞습니다. 그러나 이 이기심이야말로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입니다. 사업이 잘 풀리면 마음에서 영광의 사업을 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영광의 사업을 보다가 심장마비가 와서 죽었다면 개죽음입니다. 사장님이 마음에서 사업을 버린다면 이기심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이기심을 발동해야만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영광의 아내를 보다가 죽임당하는 것을 싫어했듯이 영광의 사업을 보다가 죽는 것이 싫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당신을 계시하시는 선민으로서 영광의 세상 것들을 보다가 죽는다면 개죽음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만은 이기심을 발동해서 절대로 영광의 세상 것을 보고자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광의 아내를 보는 중에, 영광의 자녀를 보는 중에, 영광의 사업을 보는 중에, 영광의 건강을 보는 중에 죽지 않겠다는 이기심을 발동하는 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상속받는 재벌 2세들의 모습입니다. 만약 이러한 이기심이 없다면 멍청한 것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영광 중에 바라봄을 놓치고, 아내를 영광 중에 바라보다가 죽임을 당했다면 이런 개죽음은 없을 것입니다.

 

본문의 사건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세 번째 사실이 있습니다. 아내를 빼앗길 수 있는 상황에서 지키겠다고 나서는 태도가 옳은지 신앙의 기본적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내를 영광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 자체가 곧 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용기도 아니고 의무나 책임감도 아니며 성실한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똑같은 상황을 통해 이삭이 아브라함의 영적 유산을 상속받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위해 의도적으로 기근을 통해 이삭을 그랄로 보내십니다. 이 상황에서 이삭이 아내 리브가를 지키겠다고 대장부다운 마음가짐을 가지고 용기를 내서 왕 앞에서 ‘리브가는 내 아내이니 건드리지 마시오.’라고 말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아비멜렉은 리브가를 보며 ‘참 지독하게 아름다운 여인이다. 남편이 있다지만 이대로 놔둘 수 없다. 이삭을 죽이고 빼앗아야겠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비멜렉뿐만 아니라 그랄 지역의 사람들도 이삭과 리브가를 보면서 이삭을 죽이려고 모의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삭이 ‘올 테면 와봐라. 나는 내 아내를 기어코 지키고야 말리라.’라고 생각했다면 어떨까요? 주제 넘고 죄와 저주에 찌든 자기의 상태를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철이 없는 상태에서 나오는 일종의 꼴불견입니다. 점잖은 말 대신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죄와 저주에 찌든 자의 갸륵한 꼴값입니다. 아내를 지킨다니 웃기는 소리입니다. 정성스러운 육갑입니다.

유일한 있음이고 유일한 좋음인 하나님이 당신 스스로를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내지 못하면서, 영광 중에 아내를 보며 지켜내겠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웃기는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내의 출생과 아내의 죽음은 물론이고 그 외모와 몸의 세포 하나하나까지 다 조성하시고 주장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내의 속마음까지 훤히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내 머리털 하나조차도 희거나 검게 만들 수 없는 사람이 그 하나님 앞에서 아내를 지키겠다고 하니 말도 안 됩니다. 이것이 갸륵한 꼴값이고 정성스러운 육갑이 아니면 무엇일까요?

따라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상속받은 이삭의 태도가 비겁하다고 본다면 언어 체계를 의심해 볼 수 있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에 의해 선택받았다는 선민들이 도대체 어떠한 언어 체계를 가지면 아브라함과 이삭의 태도를 비겁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꼴값과 육갑 떠는 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의롭다고 보고, 성실하다고 보고, 충성스럽다고 보고, 좋게 보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영광의 하나님을 보는 일에 있어서만은 이기심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마음에서 영광의 아내를 바라보며 지켜내겠다고 꼴값을 떨다가 개죽음을 당할 수 없다는 이기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기심을 극대화해서 아내를 마음에서 완전히 버렸던 것입니다. 어차피 버린다고 버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아내의 운명과 부부관계의 운명을 하나님의 주권으로 내팽개쳤습니다.

천사들은 하늘에서 이 순간에도 살아계신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천사들이 이 세상에서 주어진 것들을 소중하게 여기며 영광의 자리에 앉혀놓고 지키겠다고 하는 것을 꼴값으로 볼 것입니다. ‘너 그러다가 개죽음당한다. 조심해라.’라고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이삭을 바치던 아브라함이 아내를 지키겠다고 하나님을 놓칠 수는 없습니다. 이삭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가 자기를 죽이면서 하나님을 지켜내는 현장에 있었습니다. 이삭은 자기 몸을 죽음에 내어주면서 아버지 속에 있던 영광의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내려고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 이삭은 우리처럼 멍청하고 바보처럼 행동하지 않습니다. 아내 리브가를 지키겠다고 개죽음을 당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이기심으로 바라보고 아브라함과 이삭을 비겁한 졸부 취급하는 언어 체계야말로 사탄이 가르친 결과입니다. 사탄은 영광의 하나님을 완전히 버리게 만들고 영광의 아내를 지키게 합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에 아내를 지키려 하지 말고 마음에서 하나님을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남편이나 자녀나 가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것을 지키려 하지 말고 하나님을 지켜야 합니다. 내 몸이나 건강을 지키려고 하다가 개죽음당합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을 지켜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라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매 순간 짊어지고 다녀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개죽음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내 마음에서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들어오려는 세상 것들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몸을 지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돌에 맞아 죽는 상황에서도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지켜내려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셔서 스데반 집사님의 간구대로 하나님이 지켜지게 하십니다. 몸은 누구에게나 중요합니다. 그런데 몸이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도 하나님을 지켜내는 자들이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날마다 마음에서 몸을 버리면서 몸의 가치만큼 하나님을 벌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안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내게 가장 소중한 것들을 십자가에서 죽이면서 그 가치만큼 날마다 하나님을 벌 수 있습니다. 마음에서 오늘 자녀를 죽이더라도 자녀들은 내일도 보이고 모레도 보일 것입니다. 매일매일 자녀의 가치만큼 하나님을 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 때 하나님 재벌이 됩니다. 여러분의 생애에 주어진 것들 중에서 지금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들을 영광의 대상으로 바라보며 지켜내려고 하는 것은 개죽음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갸륵한 꼴값이고 정성스러운 육갑입니다. 사탄의 언어 체계는 그 꼴값과 육갑을 의로움, 정직함, 대장부다움으로 이해하게 만듭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은 소중하고 대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쪼록 그 모든 것들을 아브라함과 이삭처럼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내기 위해서 주님의 십자가에서 끊임없이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버린 것들의 소중한 가치만큼 날마다 아버지를 벌어서 명실공히 재벌 2세 다운 모습으로 오늘도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서 드러난 이기심을 발동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이기심 속에서 내가 버리는 세상의 소중한 가치만큼 날마다 아버지를 벌게 해주셔서, 명실공히 재벌 2세의 모습을 드러내며 이 세상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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