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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 주권 신앙의 무저항 생활법>의 줄거리 :
살면서 만나는 문제와 위기와 특히 억울한 상실과 손해 등에 대응하는 기본 방침이 속수무책인 경우에도 과연 삶이 정상적으로 기능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오히려 속수무책의 대응법으로써만 우리의 삶은 비로소 정상적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은 우리 삶의 바탕이고 터전입니다. 집과 직장조차도 내 삶의 기본 바탕이나 터전이 아니고 하나님 주권의 바탕 위에 있는 극히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일시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주권의 바탕을 의식하고 사는 사람에게 인생 대응법은 속수무책이 기본입니다.
하나님 주권 신앙의 무저항 생활법
(창세기 26:12~25)
12.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13.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14.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15.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그 아버지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16.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
17. 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류하며
18.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19.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20.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으로 말미암아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21.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22.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하나님 주권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무저항 생활법을 따라 살게 됩니다. 무저항의 의미는 삶의 문제나 위기, 특별히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취해야 할 기본적인 대응 방침은 무저항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속수무책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실제로 믿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남에게 덕 보려고 한 적이 있습니까? 혹은 당하고는 못 사는 성격입니까? 한 대 맞으면 반드시 한 대로 갚든지 두 배로 갚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반대로 내성적이고 용기도 없어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되갚지 못하고 잠도 못 자고 분통만 터트리는 성격입니까? 남에게 갚아야 직성이 풀리든, 내성적이라서 당하고 분통이 터져 잠 못 이루든, 이러한 상황이 내게서 벌어지고 있다면 실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전혀 믿지 않은 채로 살고 있다는 진단을 내리면 맞습니다.
다만 무저항 속수무책 생활법이 답이라고 하면 무조건 저항하지 않는다는 율법을 지켜야 되는 것으로 압니다. 이렇게 되면 역시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은 내 마음이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은 결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교리를 알아서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고 있으니까 나는 무저항으로 나가야지.’라고 하는 것은 신앙과 믿음도 아닙니다. 처세술일 뿐입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에 올라가 보좌 우편에서 하나님을 마주할 때 땅에서는 생생하게 움직이시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이 보입니다.
무저항 속수무책은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속수무책(束手無策)은 손이 묶여서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에 손발이 못 박혔으니 대책을 세울 수 없고 저항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주님과 함께 죽었다’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무저항 속수무책 생활법’이라고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은 놀라운 언급으로부터 시작합니다. 12~15절을 보면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그 아버지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6절을 보면 이러한 이삭에 대한 아비멜렉의 요구가 등장합니다.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삭은 계속해서 우물을 빼앗깁니다. 우물을 파면 빼앗기고 그 자리를 떠나서 우물을 파면 또 빼앗기기를 반복합니다. 결국 이삭은 또 다시 떠나서 우물을 파야 했습니다.
중동 지방에서 물은 아주 귀합니다. 이 상황에서 내가 쓰는 우물을 누군가가 메워버린다는 것은 전쟁을 선포하는 것과 같습니다. 맞서 싸울 힘이 없다면 우물을 메우는 사람을 피해 도망가거나 쫓겨나야만 합니다. 실제로 이삭은 새로 우물을 파고도 쫓겨나기를 몇 번이고 반복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전해주시는 핵심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는 내막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물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이상하게도 본문에는 아브라함이 언급됩니다. 앞서 20장 21장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그랄 땅에 거주하던 때가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때도 아비멜렉이 있었습니다. 아비멜렉이란 블레셋의 왕을 지칭하는 칭호이기에 이삭이 아브라함의 아들인 것처럼 현재 아비멜렉은 이전 아비멜렉의 아들입니다. 아들끼리 만나게 된 셈입니다. 본문을 보면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랄 땅에 머물 때 팠던 우물을 사용하여 처음에 거주를 합니다. 아내 리브가의 사건이 있고 난 후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그랄 땅에 거주하라고 허락을 했을 때,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중심으로 놓인 땅에서 거주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은 이삭의 세력이 큼을 이유로 그곳에서 떠날 것을 요구하고, 이삭은 다시 이동하여 아브라함이 팠다가 메워버린 우물을 다시 팠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똑같이 처음에 팠던 우물에서 쫓겨났습니다. 21장을 보면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메워버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피난을 가다시피 옮겨간 장소에서 우물을 새로 팠고, 브엘세바라 이름 붙인 곳에서 아비멜렉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33절을 보면 “그가 그 이름을 세바라 한지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더라”라고 한 것으로부터 이삭이 브엘세바 우물에 이르러 그곳 성읍의 이름을 세바라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삭이 아버지가 팠던 우물을 썼다는 것은 그 땅이 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민자들은 그곳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기 어렵습니다. 대한민국에서 높은 직책을 가졌던 사람들도 이민을 가면 힘들고 고된 일을 합니다. 그저 자녀가 이민 온 나라에서 번성하고 형통하여 높은 직책으로 올라가기를 바라며 고통을 참고 생계를 이어갑니다. 이삭 또한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이 우물을 팠던 땅이 비어있던 이유는 그랄 사람이 볼 때 그 땅이 농사가 잘 되거나 가축을 위한 목초지가 형성될 수 없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본문에 숨겨져 있는 내막입니다. 이삭은 그랄 사람이 차지한 옥토를 벗어납니다. 그리고 그랄 사람이 보기에는 도저히 농사를 지을 수 없고 가축을 기를 수 없다고 여겨지는 빈 땅을 거주지로 삼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백 배의 결실을 얻고, 수없이 많은 가축이 번성합니다. 그랄 사람은 이러한 모습을 보고 너무나 이상할 뿐만 아니라 분통이 터지고 시기심이 생겼습니다. ‘어떻게 저 사람이 버려진 땅에서 백 배의 결실을 얻고 무수한 가축 떼를 번성하게 하는가?’라고 여겨서 이삭을 쫓아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서울 중심에 3층 건물이 하나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2층과 3층은 주인이 쓰고 1층은 세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1층에 들어온 사람이 장사를 정말 잘합니다. 주인이 가만히 보니 자기 수입을 다 합쳐도 1층에서 장사하는 사람의 수입에 미치지 못합니다. 주인은 이제 1층의 세입자를 쫓아내고 그 자리에서 장사를 합니다. 1층에서 장사하던 사람은 그동안 터를 닦고 단골들을 만드느라 고생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을 다 빼앗기고 쫓겨나야만 합니다. 이삭의 형편이 이와 닮았습니다. 무척 억울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이 보인 태도가 매우 독특합니다. 무저항일 뿐만 아니라 속수무책입니다.
그랄 사람이 아버지가 팠던 우물을 다 메웠으니 더는 그 땅에서 머물 수 없습니다. 억울할 만도 한데 저항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속수무책입니다. 당장 풀을 뜯겨야 하는 가축들은 어떻게 해야 하고, 수하의 종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릅니다. 쫓겨난 이삭은 예전에 아버지가 팠던 다른 우물로 이동하여 다시 우물을 팠습니다. 그곳 역시도 그랄 땅에서 별 볼 일 없는 곳으로 여겨졌기에 우물은 메워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의 가축들이 많고 종도 많았기에 우물 하나로는 부족했습니다. 결국 종들이 우물을 더 파자 그랄 목자들이 와서 그 우물을 빼앗습니다. 이삭은 또 피신하여 우물을 팠지만 또 빼앗깁니다. 결국 이삭은 쫓겨서 그랄 영내 바깥으로 밀려납니다. 그러자 그랄 사람도 자기네 영역이라 주장할 명분이 없기에 비로소 우물로 인한 갈등은 종료됩니다.
이삭은 대체 왜 이토록 무저항 속수무책의 모습을 보인 것일까요? 그랄 사람이 버려둔 땅은 우물이 있었는데도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황무지였습니다. 아브라함 때는 괜찮은 땅이었을 것입니다. 건물주가 1층의 세입자를 쫓아내고 장사를 하려고 하는 것처럼 그랄 사람도 그 땅에서 농사도 지어보고 가축도 길러보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시도가 실패했고 그 땅을 비워두게 되었습니다. 장사가 안 되니 또 다른 세입자를 구하려고 내놓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이삭이 그러한 황무지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그 황무지에서 백 배의 결실을 이룹니다. 그랄 사람은 시기심이 나서 죽을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의 마음에서도 농사도 잘 되고 가축 떼가 번성하는 땅이 아깝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1층의 세입자가 장사가 왕성하게 되는 중에 쫓겨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백 배의 결실을 이루고 수많은 가축 떼가 번성할 목초지가 형성되어 있는 땅을 빼앗겨야 한다니 아깝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무저항 속수무책으로 떠납니다. 이럴 수 있던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삭은 온유한 성격이라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았다고 이해합니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본문은 또 하나의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혹은 우리로서는 따라 할 수도 없고 흉내 낼 수도 없는 이삭의 탁월한 인격적 특성을 드러내 주고 있을 뿐입니다. 이삭이 이렇게 무저항 속수무책으로 떠난 이유를 그렇게 설명한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해주시고자 하시는 메시지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설령 이삭이 그렇게 온유한 사람이었다고 한들 우리가 당장 보고 배워서 따라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본문은 역사적으로 이삭을 소개하는 내용일 뿐이지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메시지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삭의 무저항 속수무책의 태도는 무엇을 가르쳐주는 것일까요? 이삭은 마땅하고 쉽게 이 땅을 떠났습니다. 백 배의 결실을 하고 있고 가축 떼가 번성하고 있지만 이삭은 한 번도 자기 삶의 터전이 그랄 땅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삭이 생각하는 자기 삶의 바탕이자 터전이란 마음에서 놓치지 않고 있는 영광의 하나님이 이 땅을 향하여 내려보내고 계시는 주권입니다. 이삭은 아버지가 팠던 우물 주변의 땅을 삶의 바탕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바탕에 깔려있고 그 주권 위에 아버지가 우물을 팠던 땅이 놓여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이 그 땅의 양분이고 거름이라고 여긴 것이지, 그 땅 자체가 백 배의 결실을 하고 가축이 번성할 수 있을 만큼의 가치가 있다고는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이삭은 아버지가 팠던 우물에서 쫓겨났을 때도 변함이 없습니다. 애초에 그 땅을 삶의 터전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땅도 이전의 땅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주권이 바탕입니다. 이삭에게는 하나님의 주권만이 근원이자 터전입니다. 주권이라는 터전 위에 이런 환경에서 저런 환경으로 이런 조건에서 저 조건으로 바뀌는 것이지 하나님의 주권을 떠나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삶의 터전을 밟고 있고 그리고 주권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것이 아님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주권이란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 사람에게 그 삶의 바탕이고 터전이고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땅이 좋다 나쁘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의 바탕 위에서 일어나는 일이지 그 자체가 절대적 의미나 가치를 갖는 게 아닙니다. 이삭은 바로 이 점을 알았기에 쫓겨나도 상관이 없습니다. 어디로 가든 상관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바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삭의 모습을 우리의 삶에 적용해 봅니다. 여러분은 수입이 안정적이라서 마음에 안정감을 갖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안정된 수입이 여러분의 삶의 터전일까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선민이라면 하나님의 주권을 삶의 터전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내게 주어진 상황과 조건과 환경은 나의 터전이 아닙니다. 내 삶의 환경과 조건 자체가 하나님의 주권에 바탕을 두고 있고 하나님의 주권 위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권이 터전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선민이라면 여러분의 마음에 안정된다고 느끼는 수입을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하실 것입니다. 반대로 당장 끼닛거리가 없는 상황이라도 여러분이 하나님의 주권 위에 있음을 본다면 문제 없습니다. 이삭은 그랄 사람이 쓸데없다고 여겨서 버려둔 땅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처럼 여러분의 재정적인 형편이 너무나 열악한 상황에 놓여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주권의 바탕 위에서 살고 있음을 본다면, 제가 약속드리지만 죽을 때까지 먹고 사는 일에 아무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점을 가르쳐주십니다.
지금 이삭이 보여주고 있는 삶의 바탕과 터전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내가 지금 몸으로 느끼는 환경과 상황과 조건은 내 삶의 바탕이 아닙니다. 당면한 문제나 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이 내 삶의 바탕이라는 것을 선민 이스라엘에게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세우신 프로젝트가 광야 프로젝트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하여 광야로 나갑니다. 광야는 몸이 살 수 있는 조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죽음의 땅입니다. 그러한 죽음의 땅인 광야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바탕이 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갈지라도 몸으로 접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삶의 바탕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도 하나님의 주권을 바탕으로 그 위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주권이 내 삶의 바탕이고 터전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육체와 연관하여 일어나는 손해나 이익은 내 마음이 연연할 일이 아닙니다. 이삭은 땅을 빼앗겨도 빼앗긴 것이 아닙니다. 백 배의 결실을 얻었다고 해서 좋아할 일도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바탕 위에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위에서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상황이 좋다 안 좋다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몸으로 느끼기에 억울한 일이나 손해를 보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의 바탕 위에 있기에 전혀 신경 쓸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의 바탕 위에서는 사막에서도 주권의 손가락으로 샘을 만드시며, 오아시스도 모래 언덕으로 만드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의 바탕 위에서는 건강한 몸으로 살다가 내일 죽을 수도 있지만, 당장 내일 죽을 것같이 아픈 몸으로도 삼사십 년을 더 살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주권의 바탕 위에서는 하나님이 있으라 하시면 있는 것이고 없으라 하시면 없는 것입니다. 아픈 몸으로 더 살라 하시면 살 것이고, 건강하더라도 내일 죽으라 하시면 죽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내가 마음을 두고 안정감을 취하고 절대적인 조건이라고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육체로 느낄 수 있는 조건과 환경과 위기와 문제와 과제와 업무는 전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바탕 위에 있는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주권에 바탕을 깔고 산다면 잃어도 잃은 것이 없고 얻어도 얻은 것이 없습니다. 잃는 것이 있다면 하늘에 계신 영광의 하나님을 잃는 것이고, 얻는 것이 있다면 영광의 하나님을 더 많이 버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의 삶이란 하나님 주권의 카펫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 다른 사람들이 내게 해를 끼쳐서 억울한 일을 당할 것 같은 상황에서도 저항해야 될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옮기려고 하실 뿐이고, 백 백의 결실을 얻고 수많은 가축 떼가 먹을 목초지가 있더라도 아까워할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을 빼앗겼다고 억울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신앙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주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아야만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마음이 세상에 대해 무저항 속수무책이 된 상태가 유지되어야 합니다.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이 보이면 이 땅은 하나님 주권의 카펫이 깔리는 바탕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으면 삶에 대해서는 아까워 할 것도 없고 없다고 아쉬워 할 것도 없습니다. 세상 것은 잃어버린다고 해서 아까워 할 일이 아닙니다. 없다고 아쉬워 할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기름짐을 만드는 거름이고,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때마다 공급하시는 은행 계좌이며 금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을 잃으면 삶 전체를 다 잃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놓친다면 이제부터 내가 이 세상을 향해 주인이 됩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서 사는 삶이란 하나님이 계획한 삶이 없어진 상태에서 마귀가 추진하고 유혹하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삭은 계속해서 우물을 빼앗기지만 무저항 속수무책으로 대응합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통해 무저항 속수무책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이삭이 우물을 삶의 바탕이라고 생각했다면 우물을 빼앗기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삭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이삭의 모습을 통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 것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으려면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대해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위기가 닥치고, 억울한 일을 당할지라도 대응할 수 없습니다. 내 마음이 그것들에 대응하는 동안에는 마음을 다해야 지켜낼 수 있는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낼 수 없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문은 바로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내라는 이야기를 이 땅의 관점에서 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낼 수 있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무저항 속수무책으로 일관하라.’는 것입니다. 손해 보는 것 같고, 억울하게 당하는 것 같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백 배의 결실을 얻고, 가축들이 번성할 수도 있습니다. 그 옛날에 백 배의 결실을 얻고 가축이 셀 수 없이 번성할 수 있는 목초지를 갖는 것은 삶의 전부였습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벌 2세들이 상속을 놓고 다투는 모습을 보면 알짜배기 땅, 알짜배기 기업을 놓고 서로 이를 악물고 싸웁니다. 그런데 이삭이 보여주는 모습은 무저항 속수무책으로 대응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보는 자는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인격이 훌륭하고 온유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무저항 속수무책을 율법으로 준수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지키다 보면 내 삶의 터전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깔리는 것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것이 보이면 이 세상에서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것 중에는 아까운 것도 없고 아쉬운 것도 없습니다.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둡니다. 두 번째 판 우물을 메웠으면 다른 우물을 파면 됩니다. 세 번째 판 우물을 메워도 또 피하면 됩니다. 그래도 삶에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 것을 직업으로 삼아야만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게 하나님의 주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은 내가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내 직업을 분명히 하세요. 내 삶의 바탕과 터전은 지금 이 환경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환경과 조건은 너무나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것입니다. 아버지가 무엇인가 뜻이 있으셔서 그러한 형태로 만들고 계시는 것 뿐입니다.
여러분 삶의 터전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정말 내게 아까운 것도 없고, 아쉬운 것도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주권이 보이는가 보이지 않는가를 계속 진단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삶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면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벌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떨어져 나왔고 십자가를 놓쳤기 때문에 영광의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볼 수 없기에 이 세상에서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주권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볼 수 없기에 아까운 것도 많고 아쉬운 것도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억울한 일도 많고 업무와 과제를 앞에 두고 걱정도 많습니다.
한번 아까울 것도 없고 아쉬울 것도 없을 만큼 하나님의 주권이 보이는 상태에서 살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진짜 삶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맛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삭이 우물을 빼앗기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 옛날 백 배의 결실이 맺히고 무수한 가축이 번성할 수 있는 목초지를 빼앗기는 것은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남이 버린 황무지로 들어가 거주하게 되더라도 아쉬워하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다면 백 배의 결실이든 가축이 번성할 수 있는 풍성한 목초지 따위는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사람에게는 일도 아닙니다. 다만 지금 상황과 조건이 이런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 전체와의 관계를 고려할 때 필요하기에 규정하신 것입니다.
몸이 아프십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바탕으로 깔고 건강을 아쉬워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억울하게 많은 돈을 잃었습니까? 아쉬워 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주권을 바탕에 까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형제에게 당했어도 아까워할 것 없습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것이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아쉬워 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만 바탕에 깔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도 우리는 몸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모두 십자가 예수님에게 모여있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십자가 예수님에게 모여 하늘 아버지를 마주 보고 있는 사람들이 교회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삶의 바탕은 지금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이 아니고 만나는 문제나 상황도 아닙니다. 아버지의 주권임을 십자가 붙잡고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