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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지금 당장 에덴의 조건은 안식과 호흡>의 줄거리 :
지금 당장 삶의 현장에서 에덴의 삶을 살기 위한 조건은, 건강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성공도 형통도 외모도 신분도 지위도 명예도 인기도 아닙니다. 또 부모도 배우자도 형제자매도 자녀도 친구도 애인도 동료도 아닙니다. 지금 당장 에덴의 삶을 살기 위한 조건은 오직 안식과 호흡 두 가지뿐입니다. 마음은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을 마주하여 태초의 안식 상태를 유지하고 몸은 오직 이 땅에서 하나님의 생각만을 호흡하면 됩니다.
지금 당장 에덴의 조건은 안식과 호흡
(창세기 2:7~17)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10. 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 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 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14.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지금 당장 에덴을 살기 위한 조건은 안식과 호흡입니다. 에덴동산에 대한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너희는 이제 에덴을 잃어버렸다.’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3장의 기록대로 사람은 죄를 범함으로 인해서 에덴을 잃어버렸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이 에덴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를 가르쳐줍니다. 에덴은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죄와 타락에 찌들어 기쁨을 상실한 우리들이 에덴의 기쁨을 회복하려면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되는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창조의 이야기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 옆에서 창조의 모습을 다 지켜보다가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맨 마지막 날에 창조되었기 때문에 애초에 그럴 수가 없습니다. 창조의 이야기는 죄와 타락에 찌들어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들려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죄와 타락은 창조주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입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관계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창조주시라는 것을 알려주시며, 그러한 창조주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회복된 에덴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십니다. 이러한 에덴동산에 대한 이야기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의미는 우리의 삶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실제 삶의 현장에서 에덴동산을 살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본문을 통해 지금 당장 내 삶의 현장에서 에덴을 살 수 있는 조건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건강에 문제가 있어서 에덴을 살지 못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런데 본문에 의하면 건강은 에덴을 사는 조건이 아닙니다. 혹은 돈이 없어서 마음에 기쁨이 없는 채로 살고 계십니까? 그런데 돈이 없기 때문에 기쁨이 없다는 것은 사탄이 가르쳐준 언어체계를 아직도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돈이 없는 것은 에덴을 살지 못하는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 형통, 외모, 신분, 지위, 명예, 인기와 같은 것들이 없어서 에덴을 살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면, 전부 사탄이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가르쳐준 언어체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건강, 돈, 성공, 형통, 외모, 신분, 지위, 명예, 인기와 같은 세상의 가치들은 에덴을 살기 위한 조건이 아닙니다. 부모를 잘 만나는 것, 배우자를 잘 만나는 것도 에덴을 살 수 있는 조건이 아닙니다. 그 밖의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제자매, 자녀, 애인, 친구, 동료도 지금 내가 에덴을 살기 위한 조건은 아닙니다.
흔히 열대과일이 즐비하고, 비취색 바닷물이 넘실대며, 하얗고 깨끗한 백사장이 있는 남태평양의 섬을 낙원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로 에덴을 살기 위한 조건은 그런 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적 조건은 마음에 걱정거리 하나만 생겨도 눈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에덴동산의 삶은 눈에 보이는 환경적 조건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건강, 돈, 성공과 같은 세상의 가치들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 세상의 조건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것이 에덴의 삶입니다. 따라서 ‘나는 가난하기 때문에 에덴의 삶이 불가능하다. 나는 몸이 아파서 에덴의 삶이 불가능하다.’라는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본문에서 에덴의 삶을 살기 위한 조건을 두 가지로 보여줍니다. 바로 안식과 호흡입니다. 안식은 바로 앞에서 언급한 태초의 안식을 말합니다. 이 안식이 없다면 아무리 건강하고, 돈이 많고, 형통하고, 성공하고, 훌륭한 부모님과 멋진 배우자와 자녀가 있어도 에덴의 삶은 없습니다. 태초의 안식이란 존재감을 느끼고 좋음을 채우기 위하여 열망하는 우리의 마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직면하는 상태입니다. 아담이 처음으로 만난 상대자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태초의 안식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태초의 안식을 이루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지금 당장 에덴을 살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내 마음이 하나님을 직면하는 태초의 안식을 회복하는 일이 쉬울까요? 아니면 돈이 없다고 돈을 벌어오는 것이 쉬울까요? 혹은 건강이나 가족관계에 신경 쓰는 것이 쉬울까요? 우리는 이것을 따져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직면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몸으로 만나는 삶의 조건을 그대로 다 놔두고 마음이 태초의 안식 상태로 들어갈 수 있으면 됩니다. 아담은 갓난아기로 태어났던 것이 아닙니다. 하와와 곧바로 결혼을 할 수 있는 성인의 모습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른바 갓난 어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과 같은 갓난 어른의 상태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갓난 어른의 상태가 되어서 아무도 마음에 담지 않고, 아무것도 마음에 담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과 처음으로 만나는 것이 태초의 안식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음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갓난 어른인 아담이 태어나자마자 타락했던 것은 아닙니다. 아담은 하나님과 마주하는 상태를 얼마든지 가질 수 있었지만, 타락하였고 죄와 저주에 찌들게 되었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담았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삶의 조건을 담았습니다. 이 세상의 문제들을 직면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마음 밖으로 밀어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우리의 삶은 에덴이 될 수 없습니다.
에덴의 첫째 조건은 태초의 안식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태초의 안식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내 마음에서 삶의 대상들, 사람들, 물건들, 문제와 사건들, 삶의 조건들이 밖으로 밀려나고 하나님과 밀착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과 떨어지지 않는 밀착 상태에서만 이 땅에서 에덴의 삶은 시작됩니다. 타락 전에 갓난 어른이었던 아담이 하나님만을 직면했던 것처럼, 타락 후에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만을 직면하고 하나님과 내 마음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은 태초의 안식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타락 이전의 아담 같은 갓난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세상을 담은 내가 죽어야만 합니다.
마음에 세상이 담기면 신경 쓰면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세상 문제를 담은 시점에서 이미 하나님은 마음 밖으로 밀려나신 상태입니다. 세상 문제와 직면하고 밀착한 상태에서 밀어낸 하나님을 다시 찾고자 하지만, 이러한 상태에서는 절대로 하나님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담은 나의 마음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간 마음은 하나님만을 직면하여 하나님만을 담게 됩니다. 우리는 그 상태에서 삶으로 다가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에덴을 살기 위한 첫 번째 조건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에덴을 살기 위한 두 번째 조건으로 호흡을 제시합니다. 이 호흡은 다시 두 가지로 제시됩니다. 1장에서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이야기만 나올 뿐 구체적으로 어떻게 만드셨는지에 대해 언급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2장 7절을 보면 사람을 만드시는 구체적인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생기로 번역된 원문을 보면 히브리어 네샤마(נְשָׁמָה)로써 하나님의 숨, 하나님의 호흡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호흡에 관한 두 번째 이야기는 선악과나무와 관련이 있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지 않음이란 무엇이 좋고 나쁨을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판단은 생각의 기초이고 언어체계의 발판이 됩니다. 언어란 내게 무엇이 좋고 나쁜가에 대한 판단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의 체계를 형성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가치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이 좋다, 건강이 좋다, 장수가 좋다, 성공이 좋다, 자녀가 좋다, 결혼을 해야 한다 혹은 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는 식의 가치관을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마음에 있는 가치관을 중심으로 우리의 언어는 하나의 체계를 형성합니다.
선악과를 따 먹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별도의 언어체계를 갖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판단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내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의 판단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판단은 삶의 출발점입니다. 판단을 통해 활성화되는 사람의 인격은 결국 언어적 특성에 기반을 둡니다. 사람에게서 언어성을 빼면 인격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생각하는 인격이고 말하는 인격입니다. 이러한 언어적 인격은 판단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선악과를 따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호흡 맞추기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판단을 호흡하듯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 생각 없이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평소에는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는 사람이 큰 사업을 시작하려 할 때 ‘이 사업이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 물어봐야겠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과 호흡을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내 생각 대신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은 호흡과도 같습니다. 가끔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만 하나님의 생각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우리는 7절의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라는 말씀과 선악과나무의 이야기를 같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라는 표현에 담긴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어떻게 호흡을 하신다는 것일까요? 우리가 두 개의 허파로 숨을 쉬듯이, 하나님도 허파로 호흡을 하시는 것일까요? 인간의 형상을 진흙으로 만드시고 그 코에 하나님의 허파에서 나온 숨을 불어넣으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인격체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영이시며 인격체로서 숨을 쉬신다는 것은, 인격의 언어성 다시 말해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는 것은 ‘너는 이제부터 내 생각을 호흡해야만 살아있는 인격이 될 수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인간은 육체의 허파로 호흡합니다. 다시 7절을 보면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생령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네페쉬 하야(לנפש חיה)로써 직역하면 숨 쉬는 생명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 앞서 등장한 말씀과 부딪히는 부분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1장 20절을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라고 하였고, 24절을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생물, 즉 생명으로 번역된 부분 또한 네페쉬 하야(לנפש חיה)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도 결국 하나님이 창조하신 다른 생물들과 똑같다는 뜻일까요? 하나님은 생물들을 말씀으로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은 따로 흙으로 지으신 후에 코에다 생기를 불어넣으셨을까요?
창조주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닷속의 고래나 물고기들, 공중에 나는 새들, 땅의 짐승들은 하나님의 호흡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살아있는 것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육체의 허파로 숨을 쉬며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격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생각을 호흡하지 않으면 죽은 자로 여기셨습니다. 모든 생물들은 하나님의 생각대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인간만은 하나님의 생각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생각을 호흡해야만 살아있는 존재로 인정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은 허파로 숨을 쉬는 것은 다른 생물과 똑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만은 하나님의 생각을 호흡하지 않으면 살아있는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창세기 6장의 노아 홍수 사건을 보면 3절에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이 제 딴에는 만물의 영장이니 뭐니 하면서 잘난 척을 할지라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하나님의 생각을 호흡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생각을 호흡하지 않아도 생물이 된 짐승만도 못한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짐승을 그 자체로 살아있게 하셨지만, 인간만은 하나님의 생각을 인격적으로 호흡해야만 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호흡하지 않는다면 다른 생물들처럼 몸은 살아있어도, 움직이는 고깃덩어리이자 죽은 자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안식과 호흡은 성경이 말하는 에덴을 살기 위한 기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생각의 관점이자 하나님이 인간을 바라보실 때 갖고 계시는 판단의 기준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우리가 그동안 너무나 많은 세월을 잘못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 인격에서 하나님의 생각을 호흡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자면 고깃덩어리로 이 세상을 살아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삶에는 에덴으로 상징되는 진정한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고깃덩어리로 느끼는 기쁨 외에는 찾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 육체의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기쁨 외에는 다른 기쁨을 몰랐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이러한 성향이 짙게 남아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호흡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태초의 안식을 이루고 있는 상태에서, 이 땅에서 이루어져야 할 일이란 우리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생각을 호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호흡함이란 어떤 특별하고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만 하나님의 생각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은 하늘에서 태초의 안식으로 하나님을 직면하고, 땅에서는 하나님의 생각을 호흡할 때 지금 당장 에덴의 삶은 이루어집니다. 이 땅에서 우리 몸과 지정의(知情意)의 기능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고 의지를 발동합니다. 이러한 기능들은 육체의 뇌와 연결되어 작동합니다. 이러한 지정의가 연결된 몸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생각을 호흡하고, 하나님의 생각대로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바로 에덴의 삶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생각을 호흡하여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를 통해 하늘에 올라간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친분이 점점 더 두터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과 호흡 맞추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하늘에 올라간 내 마음과 하나님 사이의 친분이 두터워질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연인관계를 닮았습니다. 남녀가 서로 맘에 들어 사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사귀기로 약속을 하고서 정작 따로 놉니다. 연인이 되었다면 같이 영화도 보러 가고, 밥도 같이 먹고, 드라이브도 하면서 함께 호흡을 맞춰 같은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점점 친분이 두터워지며 정이 들게 됩니다.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은 죄와 저주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태초의 안식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가야만 됩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도 하나님과의 친분이 생기지 않는다면, 하나님과의 데이트 시간을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갔다면 하나님과 호흡을 맞추는 데이트를 해야, 정이 쌓여 친해지고 하나님을 많이 벌어서 하나님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호흡을 맞추는 데이트할 시간이 없으니,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갔다 한들 하나님과의 친분은 두터워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함께 살아야 정이 쌓입니다.
에덴동산의 가장 큰 특징은 열매와 강으로 표현됩니다. 9~10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 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창세기를 기록한 것은 모세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 모세의 시대에 중동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물이었습니다. 물이 있어야 열매도 맺힙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네 개의 강을 이루고 각종 열매가 맺히는 에덴은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곳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에덴이 상징하는 바가 우리의 삶에서는 어떻게 나타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삶에는 다양한 인간관계, 사건, 사물, 문제, 변수가 존재합니다. 지옥을 리허설하는 삶을 살고 싶다면 이러한 문제들을 마음에 담고 신경 쓰면서 살면 됩니다. 에덴을 살고 싶다면 지금 먼저 마음에 들어와 있는 삶의 문제들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들이 내 마음에 들어와 있어서 하나님과 밀착할 수 없다.’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태초의 안식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집니다. 어느 것이 더 쉬운지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는 내 마음속에 들어와 있는 문제들을 어떻게 하든지 내 힘으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마음에 삶의 문제가 들어온 나를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문제가 들어온 것은 선악과를 따 먹고 죄와 저주에 찌들어서 나타난 결과입니다.
선악과나무의 열매는 따 먹지 말아야 할 열매였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나무의 열매는 따 먹어야 할 열매입니다. 십자가 나무의 열매란 바로 예수님이 만드신 나의 죽음입니다. 이는 곧 삶의 문제를 담고 있는 내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마음은 하늘로 올라갑니다. 하나님과 마음이 밀착되어 태초의 안식을 누리고 있는 상태에서 이제 주어지는 삶의 문제로 나갑니다. 사람에게 다가가고, 문제에 다가가고, 사물에 다가가고, 과제에 다가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마음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동안에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효과는 십자가에 있습니다. 내가 당면하고 있는 사람, 사건, 사물, 과제 등의 모든 일에 대해서 내가 생각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내 마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태초의 안식을 이루게 됩니다. 이제 사람과의 관계, 사건과의 관계, 사물과의 관계, 과제와의 관계를 비롯한 모든 관계가 내 삶에서 맺히는 에덴동산의 과일나무가 됩니다. 어떤 문제이든 어떤 사람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원수를 마음에 담으면 삶은 지옥이 됩니다. 원수뿐만이 아닙니다. 애인이라도 마음에 담으면 삶은 지옥이 됩니다. 그러나 원수든 애인이든 상관없이 그것들을 담은 마음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이고 태초의 안식을 먼저 구합니다. 원수를 만났을 때 하나님의 생각을 호흡하면서 말하고 행동한다면 원수도 에덴동산의 과일나무가 됩니다.
에덴동산의 과일은 내 말과 행동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생각들입니다. 따라서 상대가 원수든 애인이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애인이라면 방심할 수 있으니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원수에 대해서는 태초의 안식을 찾고 하나님과 밀착하고자 할 것이기에 오히려 더 편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호흡하면서 하나님의 생각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원수나 애인을 계기로 삼아 에덴동산의 각종 나무에 열매가 맺혔던 것처럼, 하나님의 생각이 내 말과 행동을 통해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이 에덴동산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을 하나 할 수 있습니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실제 삶에서 에덴동산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태초의 안식이 깨졌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의식으로 기억하고, 그 과정을 따를 때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은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나는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승천하여 보좌 우편에 이르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하면 그 믿음이 하나님을 직면하게 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직면하는 상태가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에 있습니다. 땅에서 하나님의 생각을 호흡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삶의 문제를 받아들이는 상태를 십자가에서 죽여야 한다는 인식, 즉 믿음의 양심이 활발하게 움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아직도 죄와 저주에 찌든 상태에서 형성된 언어체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돈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자꾸 돈 문제를 언급하는 이유는 돈 문제가 그만큼 일반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돈 문제와 관계해서 두 가지 언어체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돈이 최고다, 돈 없으면 못산다, 돈이 있어야 대우 받는다, 돈이 있어야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자유롭게 잘 살 수 있다, 돈이 있어야 사람 노릇 한다, 돈이 있어야 행복하다.’라는 생각은 세상의 언어체계입니다. 오늘도 이러한 언어체계를 바탕으로 80억 사람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닙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 중심, 십자가 중심의 언어체계입니다. 마태복음 4장 4절에는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 받으실 때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나를 보고 계시며, 나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계시고, 나를 사랑하셔서 나와 관계된 모든 것들을 미리 생각하고 계시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사는 것이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라는 하나님 중심, 십자가 중심의 언어체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돈을 최고로 여기는 세상의 언어체계가 완전히 탈바꿈하지 못하여, 십자가 중심의 언어체계가 온전히 자리 잡지 못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돈 문제가 발생하면 금세 돈 없으면 못 산다는 세상의 언어체계가 발동합니다. 성경은 죽음의 땅 광야에서 이백오십만 명이 사십 년을 먹고 살았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 중심, 십자가 중심의 언어체계가 온전히 내 것이 되지 못했기에, 돈 문제 앞에서 세상의 언어체계가 금세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성경을 잘 알고 있을지라도 그것이 내 언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이 풍부할 뿐 그것이 내 언어가 되지 못했기에, 돈 문제가 발생하자마자 ‘돈 없으면 큰일 난다.’라고 하는 세상의 언어체계가 발동합니다. 이러한 세상의 언어체계는 겨우 예수님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하고 있는 마음을 확 잡아당깁니다. 돈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자녀 문제, 건강 문제를 비롯한 다양한 문제들이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이 모든 인간관계와 문제들을 어떤 언어로 이해하고 있습니까?
분명히 예수님의 십자가는 약속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고 승천하여 태초의 안식을 이루었어도, 이 땅에서 하나님과 호흡을 맞춰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하나님과 십자가 중심의 언어체계가 전혀 형성이 되어있지 않다면 에덴은 불가능합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하늘로 올라갔다가, 세상 문제로 인해 다시 땅으로 내려오기를 반복할 뿐입니다. 하나님과 친해진 증거는 점점 더 세상일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실제로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세상일이 너무나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무슨 일만 일어나면 마음이 꼼짝하지 못하고 세상에 매여버립니다. 마음에 세상이 훅훅 들어와서 나를 점령합니다. 성경 말씀에 대한 지식은 많지만, 그것이 내 언어체계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나의 언어체계는 여전히 죄와 저주에 찌든 세상의 언어체계입니다. 성경 말씀은 지식으로 머리에 고여있을 뿐, 내 언어가 되지 못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아무리 생각을 갖고 계셔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최고로 좋음이며, 하나님께 이르기 위한 유일한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이다.’라는 가치관은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언어체계입니다. 이것을 지식으로만 알고 내 언어로 만들어 본 적이 없다면, 하나님과 호흡을 맞추는 삶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매일 십자가와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은 가득합니다. 그런데 마음은 항상 땅에서 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말씀이 내 언어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중심의 언어가 되지 못했기에 하나님과 호흡 맞추기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인류역사상 가장 다양한 소재를 다루고 있는 성경은 최고의 문학 서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경이 이렇게 다양한 소재로 십자가를 다루고 있고, 모든 구절에 십자가를 담고 있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우리의 언어체계를 바꾸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수없이 많은 분야에서 말을 합니다. 이 일상적 언어체계를 십자가 중심의 언어체계로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중심의 언어체계란 십자가를 붙잡았을 때 도달하는 하나님 중심의 언어체계이며 태초의 안식을 유지할 수 있는 언어체계입니다. 지금부터라도 이 언어체계를 우리 속에 만들어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늘로 올라간 마음이 다시 땅으로 내려오지 않습니다.
세상의 언어체계를 가지고 있다면 마음은 하늘로 올라갔더라도 반드시 다시 내려오게 됩니다. 세상일이 최고의 큰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반면 하나님 중심의 언어체계에서는 하나님이 최고입니다. 하나님이 최고라는 가치관에서 언어가 만들어지면 이 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최고의 가치인 하나님과의 관계에 아무 문제가 없기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마음이 흔들린다면 아직도 세상의 언어체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언어체계는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가치관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언어체계입니다. 건강이 최고라는 가치관을 따른다면 건강이 안 좋을 때 마음이 하늘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마음은 건강에 묶여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좋음은 지식이 아닌 내 언어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좋음을 내 언어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요?
동서남북 교회가 시작되면서 여러분이 많이 느꼈을 것입니다. 예전에는 말씀을 한번 듣고 은혜 받았다고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다음 말씀을 들었습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 말씀의 여인숙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 말씀이 뿌리를 내리도록 해야 합니다. 적어도 내가 맡은 설교 한 편에 대해서는 숙지해야만 합니다. 이것을 위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진작 그렇게 살았어야 했습니다.
말씀 하나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쓴 시간 동안 예전에는 무엇을 하셨습니까? 세상을 마음에 담고, 마음에 담은 세상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허비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세상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 생각 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생각을 호흡할 수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 생각을 호흡하지 못하며 살았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생각을 갖고 계셔도 언어체계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생각만 받아들일 수 있다면 내가 세상일들을 위해서 시간을 들이고 노력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제부터 우리의 할 일은 하나님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드는 일에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그것이 실제로 에덴을 사는 길입니다. 항상 기쁘고 싶다면, 쉬지 말고 기도하고 싶다면, 범사에 감사하고 싶다면 하나님의 언어체계를 만들어 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언어체계를 가지고 성경을 읽고, 말씀을 전하고 듣습니다. 모든 말씀이 지식에 머무는 상태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성경 말씀조차도 세상의 언어체계로 흡수된 상태이기에 내 말로 만들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복음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스럽고 쉽게 되는 일은 아닙니다. 공짜이지만 싸워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전체가 어린양 피로 싸울 것을 요청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싸워서 기필코 십자가 언어체계를 만들어 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언어체계가 형성되어야만 태초의 안식 상태는 유지될 수 있고, 하나님의 생각을 호흡하는 일이 가능해질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에덴의 삶이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발 우리의 마음을 십자가를 중심으로, 하나님이 최고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형성된 언어체계가 내 것이 될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태초의 안식을 유지하게 하시며, 하나님과 호흡을 맞춰 살게 하심으로 이 세상 조건에 상관 없는 진짜 기쁨의 동산 에덴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