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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매일 하나님을 속여서 이루는 구원>의 줄거리 :
창세 전에 예정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시는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의 장자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장자의 명분을 받는 것이 바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 하나님의 장자 자리에 마음이 머무름이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자 됨이 실제로 일어나려면 하나님이 속아 넘어가셔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장자다워서 장자가 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반드시 매일 하나님을 속여서 장자로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매일 하나님을 속여서 이루는 구원
(창세기 27:1~46)
1.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이르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2. 이삭이 이르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니
3. 그런즉 네 기구 곧 화살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4. 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와서 먹게 하여 내가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18. 야곱이 아버지에게 나아가서 내 아버지여 하고 부르니 이르되 내가 여기 있노라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
19. 야곱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원하건대 일어나 앉아서 내가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20. 이삭이 그의 아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 그가 이르되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조롭게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
21. 이삭이 야곱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가 과연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내가 너를 만져보려 하노라
22. 야곱이 그 아버지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 이르되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
23. 그의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분별하지 못하고 축복하였더라
하나님은 창세 전에 예정하시고 선택하십니다. 그 선택에 대한 아주 강렬한 말씀이 에서와 야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어머니 리브가에게 발꿈치를 잡고 태어나는 차자인 야곱이 장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단순히 야곱을 장자로 만들고자 하셨다면 야곱을 먼저 태어나게 하셨다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신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우리 눈에 확인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서 무조건 따라야 하는 절대적인 규칙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것은 지금 예수님을 통해 만나는 하나님 아버지가 지금 갖고 계시는 뜻입니다. 그 외에 다른 기준은 없습니다. 먼저 태어났음을 이유로 하나님이 그를 장자의 자리에 앉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 세상의 어떤 규칙이나 조건도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오직 지금 만나는 하나님이 지금 갖고 계시는 뜻과 의지와 결정만이 절대적입니다. 이것은 또한 모든 규칙과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가운데 지금 영광의 하나님을 찾으라는 명령과도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발꿈치를 잡고 태어난 차자 야곱을 장자의 자리에 서게 하시는 사건에 이러한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구원은 마음으로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버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영광의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자리가 내게 허락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 구원을 이룬다는 것은 그 자리에 장자답게 설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장자다움이란 영광의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서열 1위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장자의 자리에 서서 하나님을 마주하고 교통함으로써 날마다 하나님을 벌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장자의 명분을 받는 구원 얻음과 실제로 장자의 자리에 서서 아브라함과 이삭처럼 하나님 재벌이 되는 구원 사건이 어떻게 시작되는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나를 구원하신다는 의미는 ‘내가 내 아들 예수를 보내겠다. 이제 너희는 나를 속여라.’라는 뜻입니다. 마치 야곱이 몸에 염소 새끼의 가죽을 두르고 눈이 어두운 아버지를 속여서 장자로 여김을 받고 장자가 받는 축복 기도를 받은 것과 같습니다.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장자의 명분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곧 장자의 자리에 서서 장자의 특권을 누릴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날마다 그 하나님을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장자의 명분을 얻으려면 하나님을 속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본문에서는 이제까지 우리가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 보아왔던 집안의 믿음의 분위기가 너무 급격하게 변합니다. 조화롭고 균형 잡히고 감동적인 신앙으로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하나님은 이들의 삶을 책임져 주셨던 진정한 가정의 샬롬의 분위기는 완전히 박살이 납니다. 창세기의 기록이 아브라함과 이삭을 거쳐 이제 야곱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야곱에게 초점이 맞추어지자마자 발생한 첫 사건은 샬롬이 지배하던 신앙의 가문이 풍비박산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이삭이 137세 때 일어난 일입니다. 이삭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여겨서 상속받을 계승자에게 축복을 내리고 인생을 마감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삭은 이 사건 이후에도 43년을 더 살고 180세에 죽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43년을 이렇게 분별력이 무딘 채로 살았을까 하는 의심도 듭니다. 본문에 보면 이삭은 계속해서 야곱을 의심합니다. 22절을 보면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라고 하는데 사실 이게 말이 됩니까? 이때 에서와 야곱의 나이가 77세입니다. 에서는 40세에 헷 족속 여인 둘을 아내로 맞이한 후였습니다. 이삭에게는 77년을 같이한 아들들입니다. 그런데 눈이 좀 어두워졌다고 해서 아들들의 목소리를 구분하지 못한다니 참 의아합니다.
23절을 보면 “그의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분별하지 못하고 축복하였더라”라고 합니다만 말씀드렸듯이 이삭은 앞으로 43년을 더 삽니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자면 이삭이 알고도 속아준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리브가와 야곱은 공모하였고 야곱은 에서를 가장하여 이삭 앞으로 나갔습니다. 이삭이 이것을 거짓말이라고 야단친다면 야곱과 리브가의 처지가 무척 곤란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이유에서 속아준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느낌에는 이삭이 속은 것처럼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4절을 보면 “이삭이 이르되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 그가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라고 이삭은 야곱에게 다시 한번 에서가 맞느냐고 묻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시고자 하시는 바가 무엇일까요? 첫 번째는 장자의 자리에 선 자가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장자의 특권을 누리려면 야곱이 이삭을 속이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속여야만 함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입니다.
야곱은 태어나기도 전에 장자의 자리에 서도록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선택받은 아들 야곱은 거짓말쟁이고 사기꾼입니다. 그것도 영광의 하나님이 아니라 영광의 세상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장자가 받을 수 있는 세상 것의 분깃을 차지하기 위하여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집안에서 세상 것들을 더 좋아하는 영적인 음란한 창녀의 모습을 띱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야곱을 그대로 선택하십니다.
선택받은 인간들의 상황이 야곱으로 대표되고 있습니다. 누구도 하나님을 마주 대하며 내 몫으로 가질 수 있는 장자의 자리에 설 수 없음을 야곱을 통해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야곱은 바로 나입니다. 선택받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나의 초상화를 야곱을 통해 그려 주신 것입니다.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이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장자의 명분을 따라 장자다운 모습으로 장자의 자리에 서기 위해서는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이듯이 하나님을 속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진행 과정을 보면 마치 하나님이 이삭과 리브가, 에서와 야곱에게 특정한 역할을 맡기신 것 같습니다. 네 사람의 역할을 통해 우리에게 장자의 명분을 얻는 ‘구원 얻음’과 그 자리에 서서 실제로 장자의 특권을 누리게 되는 ‘구원 이룸’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 핵심적인 메시지는 ‘너희가 나를 속이지 않는다면 나는 너희를 결코 장자로 여길 수 없다.’라는 것에 있습니다. 장자의 명분은 허락되었으나 그 자리에 서서 실제로 장자의 특권을 누리려면 야곱이 이삭을 속이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속여야만 한다는 것이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장자의 자리는 하나님 앞에 나가 하나님을 일대일로 마주하는 자리입니다. 이 장자의 자리에서 구원을 이루고 싶다면 하나님을 속여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속이지 않으면 우리는 야곱의 모습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영광의 세상 것을 향하여 야곱의 거짓 됨과 속임과 영적인 음란함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절대로 그 모습으로는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야곱이 이삭을 속인 것처럼 너희도 나를 속이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속아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본문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하나님이 속아 넘어가 주시겠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형을 제치고 아버지를 속여서 장자의 축복 기도를 받았습니다. 야곱은 영광의 세상을 바라보면서 세상 것을 얻기 위해 추구하고 세상 것을 얻기 위해 돌진하였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는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야곱에게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세상 재산을 가질 수 있었기에 장자의 명분이 필요했습니다. 속여서 빼앗는 장자의 명분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는 몰랐습니다. 그렇기에 20절을 보면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조롭게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라고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동원해서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야곱은 자기의 하나님 여호와가 아닌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를 부르고 있음으로부터 하나님이 안중에도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오직 세상 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이 정하시는 장자의 명분을 필요로 할 뿐입니다. 아버지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고 그 하나님께 받은 축복을 모두 장자에게 계승하리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제 장자의 축복을 가로 챈 야곱은 복수심에 불타는 에서에게 죽을까 무서워서 도망을 갑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때 신앙의 가문에서 보였던 아름답고 조화로웠던 모습은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리브가나 이삭은 아들이 떠난 뒤에 어떻게 살았을까요? 특히 리브가는 사랑하는 아들 야곱이 집을 나간 뒤에 다시는 상봉하지 못한 채 생을 마치게 됩니다. 창세기 35장을 보면 이삭이 죽기 전에 야곱은 아버지를 찾아갑니다. 야곱은 아버지의 재산을 차지하고 싶어서 사기를 쳤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도망가서 머나먼 하란 땅에서 20년을 외삼촌의 종으로 살게 됩니다. 그동안 아버지의 재산은 어쩔 수 없이 에서가 다 관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삭이 43년을 더 살았다지만 이미 연로하여 눈이 어두웠기에 집안의 관리는 에서가 맡아서 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에서가 아버지의 재산을 다 차지한 셈이 되었습니다.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장자의 특권이란 재산이 아닙니다. 구원 얻은 자, 장자의 명분을 얻은 자의 특권이란 야곱처럼 세상 것을 가짐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셨기에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장자의 복을 누릴 위치로 이끌어가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결국 어머니의 부추김을 받아 집안을 풍비박산 내고 말았습니다. 쌍둥이 형제가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 된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속이기 위해 계략을 짜고, 아들은 아버지가 목숨처럼 생각하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빌려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탈취합니다. 그리고는 첫째 아들의 분노를 피해서 도망간 둘째는 집에 돌아오지도 못하고 타지에서 종이 됩니다. 어머니는 둘째 아들을 다시는 보지도 못한 채 죽습니다.
물론 에서 또한 문제는 있습니다. 26장의 마지막 부분인 34~35절을 보면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라고 하였습니다. 리브가도 이삭도 야곱이 없는 채로 에서의 헷 족속 며느리들로 인해 근심 어린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집안이 이 꼴이 된 것은 가문에 계승된 직업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을 은퇴 없는 직업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 직업을 포기했고 영광의 세상 것을 바라보며 달려갔습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이삭을 선택하셨고, 야곱을 선택하셨으며, 나를 선택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장 이상적인 상태를 보여준 우리의 목표입니다. 그리고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영광의 하나님을 마음에서 지켜내려고 할 때 본의 아니게 하나님의 최고의 라이벌이라는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아브라함이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내기 위하여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믿음의 정점을 보여주었던 자리에 참여하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범사에 복을 주실 정도로 아브라함 늘그막에 안도감을 느끼시면서 계획하신 모든 일을 이루어 가실 때, 이삭은 온전한 상태에 이른 아버지가 자기의 아내를 구하는 상황에서 아버지에게 동조하고 공감하고 동의함으로써 아버지의 신앙을 물려받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목표로 해서 달려가는 이삭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의 출발점은 바로 야곱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이 야곱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아무도 영광의 하나님을 보면서 살아본 자가 없습니다. 오직 영광의 세상 것만을 바라보며 그것을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그것을 추구하고 얻기 위하여 하나님과 예수님까지 동원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통해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염소 새끼의 가죽을 손과 목에 두르고 아버지 이삭 앞에 와서 속인 것처럼 너희도 나를 속여라. 그래야 너희를 장자로 삼은 나의 선택이 유효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속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속아 넘어가실 준비가 되어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내가 독자 예수를 너희에게 보낸다. 이 예수로 너희 마음의 옷을 입고 나를 속여라. 그러면 너희를 장자로 여기겠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속이라는 것은 아버지를 마주하는 장자의 자리에 설 수 없는 존재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장자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장자의 자리에 설 수 있는 자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 생활화를 하기 전에 무심코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해주세요. 저렇게 해주세요.’라고 예배당에 가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찬송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서려면 하나님을 속여야만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의식해 본 적이 없습니다. 속여야만 하는 존재인 이유는 도저히 장자의 자리에 서서 하나님을 마주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거짓말쟁이이며 속이는 자이고 세상 것을 좋아하는 음란한 창녀이며 더러운 자입니다. 정말로 장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자 한다면 하나님을 속여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당신 앞에 설 수 있는 장자로 여기실 수 있게끔 속여야만 합니다. 그대로는 절대로 장자의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속이는 방법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야곱이 염소 새끼의 가죽을 둘러서 아버지 이삭을 속인 것처럼 하나님을 속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하시는 말씀입니다. ‘너는 나를 속여라. 너는 내 앞에 설 수 없는 자다. 나를 가질 수 없는 자다.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세운 나의 창조적이고 자발적인 계획은 하나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람이다. 너는 세상 것을 좋아하는 창녀이며 더러운 자이고 거짓말하는 자이고 속이는 자이기 때문이다. 너는 세상 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일 뿐이다. 하지만 내가 너를 선택해서 장자의 명분을 주었다. 이제 네가 실제로 장자의 특권을 누리려면 내 앞에 설 수 없는 자임을 알아야 한다. 내 앞에서 설 수 있는 인간은 육체를 입고 태어난 예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예수로 옷 입고 네가 예수인 것처럼 나를 속여라. 내 독생자 예수 안에 네 마음이 들어있으면 나는 네 마음인 영혼을 장자로 여기겠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내는 싸움의 과정 중에 최고의 라이벌로 참여할 수밖에 없게 되면서 아버지의 신앙을 계승하였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130년이라는 험악한 세월을 살고 난 후에 비로소 영광의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을 때 야곱이 겪은 130년이라는 전체의 과정이 성취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는 야곱이 염소 새끼의 가죽을 두르고 장자의 흉내를 낸 것처럼, 날마다 어린 양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내 몸으로 입을 수 있어야 합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의 몸 속에 들어 있어야 됩니다.
야곱은 염소 새끼의 가죽을 두름으로써 이삭에게 장자로 여겨질 수 있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을 봄으로써만 우리의 마음인 영은 하나님에게 장자로 여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속임의 의미입니다. 나는 본래 장자의 특권을 누릴 수 없는 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가질 수 없는 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마주할 수 없는 자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낼 수 없는 자입니다. 오직 이 일이 가능한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내가 마치 예수님인 것처럼 하나님을 속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나에게 속으실 준비가 되어계십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기꺼이 속아 넘어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속으시는 유일한 방법은 내 마음이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어서 예수님의 몸을 입고 부활 승천의 과정을 따라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하나님을 마주 대하는 것뿐입니다. 날마다 예수님을 옷 입고 하나님을 속임으로써 아브라함과 이삭이 보였던 영적으로 조화롭고 균형 잡힌 샬롬의 생활이 매일매일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마음이 입을 몸이 되어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옷 입을 자리를 십자가로 정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옷 입고 하늘로 올라가 아버지가 예수님의 몸을 바라보시듯이 나를 바라보실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을 날마다 속임으로 아버지를 마주하며 장자의 특권을 누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속아 넘어가기를 바라시며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간절한 기다림에 오늘도 부응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