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창세기-3

녹취문: 야곱 눈치 보듯 장단 맞추시는 이유_태승철 (창 31:1~16)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4.09.19|조회수66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야곱 눈치 보듯 장단 맞추시는 이유>의 줄거리 :

야곱의 이야기는 앞에서 봐왔던 아브라함의 신앙을 기준으로 적용하지 않으면 절대로 올바른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을 기준으로 적용하지 않으면 야곱의 종교 심리를 하나님 신앙의 정수로 받아들이는 극단적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신앙의 기준을 적용하고 보면 참 이상한 면이 눈에 띕니다. 하나님이 마치 야곱의 눈치라도 살피시는 듯이 맞장구를 쳐주시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요?

 

야곱 눈치 보듯 장단 맞추시는 이유

 

(창세기 31:1~16)

 

1. 야곱이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을 들은즉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말미암아 이 모든 재물을 모았다 하는지라

2.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

3.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

4. 야곱이 사람을 보내어 라헬과 레아를 자기 양 떼가 있는 들로 불러다가

5.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러할지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

6. 그대들도 알거니와 내가 힘을 다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거늘

7.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막으사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하셨으며

8. 그가 이르기를 점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가 낳은 것이 점 있는 것이요 또 얼룩무늬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가 낳은 것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니

9.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가축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

10. 그 양 떼가 새끼 밸 때에 내가 꿈에 눈을 들어 보니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과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이었더라

11.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이르시되 네 눈을 들어 보라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13.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우리가 야곱의 이야기를 대할 때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운명처럼 아브라함의 신앙을 기준으로 야곱의 이야기를 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것은 야곱의 이야기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을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의 신앙도 아브라함의 신앙을 기준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신앙도 결국 아브라함이 보여주었던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신앙은 성경의 모든 인물들을 바라보는 기준이자 잣대입니다.

문제는 야곱의 신앙이 아브라함 신앙과는 너무 다르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에서 다름의 이유를 그때그때 발견할 수 있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을 향한 야곱의 신앙 상태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기준으로 볼 때 신앙도 아닙니다. 야곱은 종교 심리의 상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야곱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타락하여 죄와 저주에 찌든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신을 찾는 종교 심리가 있습니다. 이러한 종교 심리의 특징은 이 세상을 향해 소원을 갖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말해 소원을 가진 상태에서 신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것이 종교 심리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신앙을 기준으로 적용하지 않고 야곱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야곱에 의해 만들어진 종교 심리를 믿음이라고 오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가 종교 심리를 답습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아브라함의 신앙을 기준으로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 생각해도 큰 잘못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야곱의 이야기를 이해함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은 벧엘에서의 꿈 사건입니다. 루스 들판에서 돌 베개를 베고 자던 야곱은 꿈을 꾸고 그곳을 벧엘이라 이름합니다. 이때 야곱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로서 사닥다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서 반드시 하나님을 마주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첫 번째 대상이 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이 충만하도록 유지하고, 유일한 좋음인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소망하는 상태를 삶의 현장에서 유지하는 것을 자기 본업으로 삼을 수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모든 자의 본업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 본업을 내팽개치고 지구 위에서 건들거리는 건달의 상태로 삶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본문의 말씀이 바로 이러한 야곱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야곱을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야곱의 태도가 아브라함과 너무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영광의 하나님을 제쳐놓고 영광의 세상 것만을 추구하였습니다. 영광의 세상 것을 추구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부르고 찾았으며, 하나님이 자기 편이 되어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마치 하나님이 이러한 야곱의 눈치라도 보시는 것처럼 장단을 맞춰주신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신앙의 기준을 포기하거나 잊으면 안 됩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을 잊어버림과 동시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종교 서적으로 대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기준으로 바라볼 때 야곱은 그 기준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상대하실 때 당장에 벼락이라도 내리셔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야곱은 세상에 대한 소원을 품음으로써 영광의 하나님을 버리고 영광의 세상 것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자기 편이라고 생각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야곱의 생각에 장단을 맞추시는 듯한 모습을 보이십니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하나님이 무슨 큰 실수라도 하셔서 야곱의 눈치를 보시는 것 같습니다.

본문에는 야곱이 레아와 라헬에게 친정집을 떠나자고 설득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7~9절을 보면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막으사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하셨으며 / 그가 이르기를 점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가 낳은 것이 점 있는 것이요 또 얼룩무늬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가 낳은 것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니/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가축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라고 합니다. 이것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야곱의 꿈에 나타나서 굳이 점 있는 것, 얼룩무늬 있는 것, 아롱진 것이 삯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앞장에서 라반과 처음 계약할 때의 내용을 떠올려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30장 32절을 보면 “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 떼에 두루 다니며 그 양 중에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과 검은 것을 가려내며 또 염소 중에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을 가려내리니 이 같은 것이 내 품삯이 되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라반은 야곱의 말을 따라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들을 주기로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간계를 허락하셨고 결과적으로 야곱의 품삯이 엄청나게 많아지는 결과가 나타납니다. 이에 라반은 다시 품삯을 조정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얼룩무늬 있는 것만을 삯으로 하라고 하면 이번에는 얼룩무늬 있는 것만 태어납니다. 또 안 되겠으니 점 있는 것만을 삯으로 하라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또 점 있는 것들만 태어나게 하십니다. 이렇게 열 번이나 계약을 번복했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영광의 하나님을 갖는 것보다 세상에서 부자 되고 싶은 마음을 우선시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과 너무나 다른 마음 상태였습니다. 마음이 사닥다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마주하지 않고, 자기 인생길을 택하여 세상 것을 마주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께서는 열성적으로 야곱에게 맞장구를 쳐주시는 모습을 보이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아브라함의 신앙의 기준을 놓친다면 야곱의 상태를 이상적인 믿음의 상태로 받아들이는 오해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 믿음의 진보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야곱에게 맞장구를 쳐주신 것일까요? 이 질문의 대답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죄가 무엇인지에 대해 떠올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비어있기에 제일 먼저 좋아하게 된 대상을 볼 수밖에 없고, 그것을 영광의 대상으로 붙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죄란 마음의 빗나감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보아야 할 마음으로 영광의 세상 것을 보게 된 상태가 죄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꿈에 나타나셔서 야곱의 인생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계획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의 계획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죄악으로 빗나간 야곱의 세상을 향한 소원에 장단을 맞추시는 모습을 보이실까요? 이것은 아브라함의 신앙의 기준을 끝까지 잡고 성경을 읽으면서 계속 반복하여 나타나게 되는 질문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야곱도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선택하셨습니다. 그런데 삶의 태도에서는 큰 차이가 보입니다. 야곱의 상태는 신앙이 아니고 영성 제로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야곱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태도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이러한 야곱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태도에는 안타까움이 배어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13절을 보면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루스 들판에서 간절하게 맹세했던 때를 떠올리게 하십니다.

벧엘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기 위한 사닥다리 길과 이 땅에서 자기 인생길의 이정표가 되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보시면서 ‘야곱아! 제발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와라.’라고 기대하시고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자기 인생의 미래를 향하여 걸어갔습니다. 자기의 영적 본업을 팽개치고 하나님이 책임지실 인생길을 향하여 중언부언하는 영적 건달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벧엘에서 사닥다리를 보고도 마음이 하늘로 올라오지 않고 왜 네 인생길을 갔느냐?’라는 하나님의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신앙과 차이가 나는 만큼 호되게 두들겨 패서라도 돌이키도록 만드셨어야 하지 않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고 마치 야곱의 눈치라도 보시며 맞장구를 쳐주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야곱은 완전히 죄와 저주에 정복 당하고 잠식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자연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야곱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죄와 저주에 찌든 상태를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야곱은 육체로 만나는 이 세상의 삶을 마음으로 등져야 한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못했고,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야만 한다는 생각을 꿈에도 하지 못했습니다. 벧엘에서 보았던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의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하늘로 올라간 마음은 하나님을 마주하게 되고 하나님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야곱의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마음이 하늘로 올라간다는 말은 야곱에게는 금시초문이었습니다. 결국 야곱은 130세가 되어서야 험악한 삶을 살았음을 고백하며 비로소 영광의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닥다리 길을 등지고 자기 인생길을 걷는 야곱을 안타까움을 갖고 보고 계십니다. 이와 동시에 세상과 야곱의 마음이 밀착하는 상태가 중지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야곱의 고집이 만만치 않습니다. 야곱이 루스 들판에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육체가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주어질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없애버리신 상태였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미래도 예측할 수 없게 어둠 속에 파묻어버리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물리적으로는 야곱에게서 세상 것을 다 가져가셨지만 야곱의 고집은 아직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보자마자 야곱은 하나님을 조명 삼아서 불투명했던 자기의 미래를 비추고자 합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주시면 불투명했던 미래가 핑크빛이 되겠구나!’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것들을 물리적으로는 가져가실 수 있지만 야곱의 마음에서까지 떼어내실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야곱의 마음에서 강제적으로 세상을 떼어내면 되는 것 아닌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야곱의 상태에서 이것은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세상을 향한 야곱의 마음의 밀착 상태가 너무나 강렬하고 빈틈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억지로 야곱의 마음에서 영광의 세상을 떼어내신다면 야곱의 마음은 찢어질 수밖에 없고 야곱이 그 상황을 견딜 수 없다는 것을 아셨기에 강제로 마음에서 세상을 떼어내고자 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제가 마음의 밀착 상태를 이야기할 때 자주 로미오와 줄리엣을 예로 듭니다. 두 가문은 억지로 로미오와 줄리엣을 떼어내려고 합니다. 그 결과 생떼 같은 아들과 딸을 죽음에 내어주고 맙니다. 정말로 두 사람을 떼어내고 싶었다면 오히려 적극적으로 밀어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랬다면 로미오와 줄리엣의 관계가 아무리 깊더라도 3년이면 끝이 났을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로미오는 줄리엣을 마음에서 밀어냈을 것이고, 줄리엣도 로미오를 마음에서 밀어내는 상황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결혼해서 살아본 분들은 이미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미 마음에서는 밀어냈지만 법적으로, 현상적으로 헤어져 살거나 이혼하기 힘들어서 그냥 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를 세상에서 데려가심으로 세상이 없어지는 것을 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서 세상이 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이혼하지 않고 한집에서 살아도 아내와 남편의 마음이 이미 떨어진 부부가 많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는 십자가로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로미오와 줄리엣은 외부에서 그 관계를 억지로 끊으려 했기에 결국 둘 다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맞장구를 쳐주십니다. 맞장구를 쳐주셔야 야곱은 하나님을 부를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마음으로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영광의 세상을 향하여 갖고 있는 소원을 위해 하나님을 자기 편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지금 당장 야곱을 향해 ‘네 이놈! 영광의 자리에 나 말고 세상 것을 들여놓다니’라고 하시면서 야곱의 마음에서 세상을 찢어내신다면 야곱은 죽을 것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더 이상 살아야 될 이유를 찾지 못한 채 자살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랜 세월 맞장구를 쳐주시는 모습을 보이십니다.

다만 이것은 단순히 야곱이 세상을 향해 갖고 있었던 소원을 들어주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서는 소원을 들어주신 형국이 되었습니다만 이것은 마치 낚시를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낚시꾼들은 대어가 저항하면 줄을 풀었다 감기를 반복하며 힘을 뺍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택하신 방법이 이와 같습니다. 야곱의 마음에서 살처럼 붙어버린 세상을 당장 떼어내려다 보면 찢어져서 그 아픔을 견디지 못한 채 죽겠기에 밀고 당기기를 통해서 시간을 벌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셨던 것은 이러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야곱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과 정이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정이 들수록 하나님에 대한 느낌은 달라집니다. 세상 것을 바라지만 이루어지지 않는데 하나님에 대한 느낌은 더욱 강해집니다. 그리고 정이 들고 들다가 언젠가 드디어 영광의 하나님을 보게 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야곱은 항상 세상만 바라보고 있었기에 하나님에 대해 정이 드는지도 몰랐습니다.

마치 어떤 청년이 곁에서 항상 챙겨주는 여자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고 다른 여자만 쫓아다니다 차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항상 자신을 챙겨주었던 여자가 이성으로 느껴져서 깜짝 놀라며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야곱은 세상만을 좋아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곁에서 챙겨주시는 내 편이라고만 여겼습니다. 세상을 좋아하는 상황에 대하여 조언해 주고, 충고해 주고, 도와주는 분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안중에 없던 하나님이 사랑의 대상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게 야곱이 130세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원하시며 야곱에게 맞장구를 쳐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때도 야곱의 상태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한다는 말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입고 사닥다리인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 하늘로 가서, 날마다 천국 일일생활권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마주하는 장자의 자리에 서야 한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야곱과 똑같았기에 이야기했어도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마음과 이 세상의 밀착 정도가 너무 강렬했기 때문에 마음에서 세상을 떼어내야 한다는 생각조차 없었습니다. 마음이 세상을 등지고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으로 만족한다, 하나님 부자가 된다는 말을 이따위 소리로 여겼습니다.

우리의 죄와 저주의 체질은 자꾸만 세상을 부여잡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을 부여잡으려는 내가 싫어서 자꾸 밀쳐내려고 하는 양심의 활동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이후로 생겨난 일입니다. 아브라함과 너무 차이가 나는 여러분들을 예정하시고 선택하셨다는 하나님의 실수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실수를 자책하시는 마음으로 우리를 품으시고 보듬으시며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신앙처럼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내기 위하여 발버둥 치는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는 그 순간까지, 하나님께서는 맞장구를 쳐주시면서 이끌어 오신 것입니다. 세상 것을 주시기도 하시고 빼앗기도 하시며 밀고 당기기를 하시면서 이제까지 이끌어 오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내와 기다림이 없었다면 우리는 살아있을 수조차 없습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벼락을 맞아서 죽은들 하나님께는 손해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존재인 나를 품으셨습니다.

제가 야곱의 이야기를 전할 때 많은 분들이 ‘태 목사님은 아브라함의 팬이신데 야곱에 대해서는 안티팬이시네요.’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제가 야곱을 싫어한다고 느끼실 수 있지만 저는 야곱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야곱을 보면서 저 자신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야곱처럼 이 세상 것을 영광의 대상으로 붙잡고 그것들을 얻고 싶어 했던 나를 싫어하는 것이고, 여전히 세상 것을 향하여 밀착하고 싶어 하는 내 속의 죄와 저주의 체질이 야곱에게서 발견될 때마다 야곱에게 나를 투영하며 나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좋고 나쁨을 따져서 아브라함은 좋아하고 야곱은 싫어할 처지가 아닙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야곱에게 장단을 맞춰주시는 듯한 본문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세상을 살아오면서 아브라함의 신앙을 갖지 못했을 때 ‘하나님이 내 편이구나.’라고 생각했을 때도 있고, ‘하나님이 어쩌면 이렇게 혹독하게 하실까?’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야곱을 보니 하나님이 어떤 마음으로 그 모든 때를 주관하셨는지 알겠더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너무 이 세상 것을 좋아하고 밀착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도 내 마음에서 한 번에 세상 것을 떼어내지 못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면 나는 마음이 찢어지는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릴 것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 꼴이 날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숨통을 열어주시기도 하시고, 숨통을 막기도 하시며 세상에 대한 사랑이 줄어들고 하나님과 정들기를 기다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이끌어 가십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신 상황이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야곱을 통해 읽을 수 있습니다. 라반은 열 번이나 계약을 뒤집었습니다. 처음에는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을 야곱의 삯으로 삼기로 했으나 그 수가 너무 많아지자 얼룩무늬 있는 것만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얼룩무늬만 태어나게 하시자 라반은 점 있는 것만을 삯으로 삼게 합니다. 또 점 있는 것만 태어나자 또 아롱진 것만을 삯으로 주고자 합니다. 이런 식으로 라반이 야곱을 속일 때 하나님은 야곱이 세상에 대한 소원의 장단을 맞춰주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마치 하나님이 야곱에게 큰 실수라도 하신 것처럼 어쩔 수 없이 눈치 보시며 장단을 맞춰주시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너무나 이해되지 않지만 아브라함의 신앙을 기준으로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눈치 보실 정도로 잘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큰 부를 허락하셨을 때는 안도감이 있었습니다. 한편 야곱에 대해서는 반대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큰 부를 허락하신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가는 야곱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정들기를 노리십니다. 앞으로 전개될 내용을 보면 하나님이 주기도 하시고 빼앗기도 하시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이러한 밀고 당기기의 기간을 통해서 야곱의 눈이 영광의 세상 것에서 점점 옮겨집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첫 번째 대상으로 볼 수 있는 때가 오기를 기대하시며 야곱과 우리를 이끌어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실수하셨습니다. 나 같은 것을 예정하시고 선택하실 객관적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손해 보실 일은 없습니다. 나는 세상에 찌들고, 세상을 좋아하고, 세상과 밀착한 사람입니다. 당장 마음에서 세상을 찢어낸다면 못 살겠다고 죽을 사람입니다. 이런 나 같은 것을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선택하셨다는 것이 하나님의 결정적인 실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실책을 담당하셔서 끝까지 인내하시고 기다리시며 나의 마음에서 세상이 분리되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붙잡고 있는 한 이것을 강제로 찢어내면 나는 견디지 못해 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자발성입니다. 내가 마음에서 세상을 밀어내는 때가 오기를 기다리시며 나의 눈치를 보시듯이 장단을 맞춰주십니다. 나를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것이 하나님의 실책이었음을 책임지신다는 그런 마음으로 나를 떠나지 않으시고 밀고 당기시며 이끌어 가십니다. 언젠가 내 마음의 시선이 하나님께만 집중될 것인가를 기대하십니다.

우리가 야곱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해야 할 결심은 야곱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곧 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 뒤로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라는 사닥다리 길을 가려고 하지 않고 오직 세상 길을 향해서만 갔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나를 예정하시고 선택하셨기에 붙들고 계셔야만 했습니다. 억지로 나에게 장단을 맞춰주셔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입장에서 우리는 야곱에게서 나를 보며 미워해야 됩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나를 미워하는 것에 대해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해 끌려다니는 내가 미워서 십자가에서 죽는 사람들입니다. 아무쪼록 야곱의 눈치를 보시듯이 장단을 맞춰주시는 하나님의 깊은 안타까움과 아프신 속내를 우리 모두 충분히 공감하며 이해해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빨리 야곱과 같은 상태에서 벗어나 아브라함을 대하실 때 안도감을 가지셨던 하나님의 마음이 나를 볼 때도 생기실 수 있도록 발버둥 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 같은 건 없어도 아버지께 무슨 손해가 있겠습니까? 똥 덩어리 같은 나를 붙드시고 인내하시며 세상보다 아버지를 먼저 보기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안타까워하시고 아파하시는 마음을 우리가 잊지 않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