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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사람 앞에서 비겁함과 떳떳함의 함정>의 줄거리 :
야곱은 비겁함의 바닥과 떳떳함의 정점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롤러코스터를 탑니다. 우리 마음이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마주하지 않는 한 이 땅에 남아 있는 내 마음에서도 반드시 일어나는 증상입니다. 하늘에 닿는 사닥다리를 생활화하지 않는 한 사람의 마음은 불필요한 비겁함과 의기소침 그리고 거짓된 떳떳함과 의기양양의 궤도를 무한 반복하게 됩니다.
사람 앞에서 비겁함과 떳떳함의 함정
(창세기 31:17~55)
17. 야곱이 일어나 자식들과 아내들을 낙타들에게 태우고
18. 그 모은 바 모든 가축과 모든 소유물 곧 그가 밧단아람에서 모은 가축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있는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로 가려 할새
19. 그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의 아버지의 드라빔을 도둑질하고
20. 야곱은 그 거취를 아람 사람 라반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가만히 떠났더라
21. 그가 그의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강을 건너 길르앗 산을 향하여 도망한 지
22. 삼 일 만에 야곱이 도망한 것이 라반에게 들린지라
23. 라반이 그의 형제를 거느리고 칠 일 길을 쫓아가 길르앗 산에서 그에게 이르렀더니
24.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이르시되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
25. 라반이 야곱을 뒤쫓아 이르렀으니 야곱이 그 산에 장막을 친지라 라반이 그 형제와 더불어 길르앗 산에 장막을 치고
26.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속이고 내 딸들을 칼에 사로잡힌 자 같이 끌고 갔으니 어찌 이같이 하였느냐
27. 내가 즐거움과 노래와 북과 수금으로 너를 보내겠거늘 어찌하여 네가 나를 속이고 가만히 도망하고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으며
28. 내가 내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 맞추지 못하게 하였으니 네 행위가 참으로 어리석도다
29.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
30. 이제 네가 네 아버지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옳거니와 어찌 내 신을 도둑질하였느냐
31.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생각하기를 외삼촌이 외삼촌의 딸들을 내게서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여 두려워하였음이니이다
32. 외삼촌의 신을 누구에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우리 형제들 앞에서 무엇이든지 외삼촌의 것이 발견되거든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소서 하니 야곱은 라헬이 그것을 도둑질한 줄을 알지 못함이었더라
33. 라반이 야곱의 장막에 들어가고 레아의 장막에 들어가고 두 여종의 장막에 들어갔으나 찾지 못하고 레아의 장막에서 나와 라헬의 장막에 들어가매
34. 라헬이 그 드라빔을 가져 낙타 안장 아래에 넣고 그 위에 앉은지라 라반이 그 장막에서 찾다가 찾아내지 못하매
35. 라헬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마침 생리가 있어 일어나서 영접할 수 없사오니 내 주는 노하지 마소서 하니라 라반이 그 드라빔을 두루 찾다가 찾아내지 못한지라
36. 야곱이 노하여 라반을 책망할새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 허물이 무엇이니이까 무슨 죄가 있기에 외삼촌께서 내 뒤를 급히 추격하나이까
37. 외삼촌께서 내 물건을 다 뒤져보셨으니 외삼촌의 집안 물건 중에서 무엇을 찾아내었나이까 여기 내 형제와 외삼촌의 형제 앞에 그것을 두고 우리 둘 사이에 판단하게 하소서
38. 내가 이 이십 년을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 떼의 숫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39.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낮에 도둑을 맞았든지 밤에 도둑을 맞았든지 외삼촌이 그것을 내 손에서 찾았으므로 내가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40.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
41. 내가 외삼촌의 집에 있는 이 이십 년 동안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사 년, 외삼촌의 양 떼를 위하여 육 년을 외삼촌에게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셨으며
42.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
읽지 않은 43절부터는 야곱과 라반이 화친 조약을 맺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본문 말씀 중심으로 ‘사람 앞에서 비겁함과 떳떳함의 함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사람 앞에서 비겁함도 떳떳함도 영적으로 함정이라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특별히 기억하면 좋은 두 구절이 있습니다. 20절을 보면 “야곱은 그 거취를 아람 사람 라반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가만히 떠났더라”라고 합니다. 이 구절이 비겁함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36절을 보면 “야곱이 노하여 라반을 책망할새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 허물이 무엇이니이까 무슨 죄가 있기에 외삼촌께서 내 뒤를 급히 추격하나이까”라고 합니다. 이 구절은 떳떳함의 모습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야곱의 모습을 통해 사람 앞에서 비겁함과 떳떳함이 왜 영적으로 함정이 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여러분은 사람 앞에서 비겁하십니까? 비겁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 앞에서 항상 의기소침하십니까? 아니면 나는 사람 앞에서 부끄러울 것도 없고 책잡힐 것도 없다고 떳떳하십니까? 그래서 때로는 의기양양하고 때로는 기세등등하십니까? 그런데 이것이 영적인 올가미에 씌워있는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사람 앞에서 비겁해도 안 되고 떳떳해도 안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마주한 상태에서 사람을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대해서는 비겁할 것도 없고 떳떳할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 앞에서 비겁하거나 떳떳한 것은 내가 지금 하나님과 묶여있지 않다는 증거이고 영적인 함정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떳떳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남에게 책잡힐 일은 없다고 은연중에라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비겁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럴 때 영적인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을 두려워하여 몰래 떠나는 비겁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런데 정작 삼촌을 마주했을 때는 의기양양하여 기세등등한 모습을 보입니다. 왜 야곱에게서 이러한 이중적인 모습이 나타났는지에 대한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야곱이 비겁한 이유는 31절에서 잘 드러납니다.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생각하기를 외삼촌이 외삼촌의 딸들을 내게서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여 두려워하였음이니이다”라고 합니다. 야곱은 단순히 아내들을 빼앗길까 두려워했던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자녀들과 야곱이 이룬 재산 전체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이 두려움 때문에 20년간 섬긴 라반을 야반도주하듯이 몰래 떠났습니다.
두려움은 항상 마음속 영광의 자리에서 붙잡고 있는 대상이 원인입니다. 내가 붙잡고 있는 대상을 상실할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설령 그것을 지금 갖고 있지 못하더라도 앞으로 가지지 못하게 될 것을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 자체는 아브라함에게도 있었습니다. 다만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대상은 하나님이셨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잠시라도 잃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습니다. 반면 야곱의 마음에서 영광의 자리를 차지했던 대상은 아내와 자녀와 재산이었습니다. 이것들을 잃어버릴까 두려워서 몰래 도망쳤던 것입니다.
두려움을 느끼면 반드시 비겁한 행동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것을 갖지 못하거나 잃어버릴 것을 두려워한다면 사람들 앞에서 비겁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비겁함이란 말 그대로 겁을 내며 천박하고 비열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천박함이란 어쩌다 옳지 않은 일을 행함이 아니라 옳지 않은 일을 당연시하며 행동함입니다. 사람이라면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다음에는 그래서는 안 되겠다고 여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비겁함에서 나온 천박함이란 옳지 않은 일이 몸에 붙은 상태입니다. 잘못을 아무런 문제로 여기지 않을 정도로 체질이 되어버린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 대신 영광의 세상 것을 붙잡고 있는 자는 가졌으면 잃어버릴까 가지지 못했으면 못 가질까 두려워합니다. 이 두려움은 사람을 비겁한 행동을 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 것에 대하여 잃어버릴까 두려움이 생긴 상태에서는 절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문제를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 두려움에 의해 모든 생각은 비겁함으로 몰려갑니다. 이러한 비겁함은 함정입니다. 세상 것을 마음에 품었을 때 갖게 되는 두려움의 본질은 피해망상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의 사닥다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면 하나님만을 보물로 여기며 하나님 부자가 되기를 간절히 열망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세상 것을 잃거나 얻음에 대한 관심 자체가 사라집니다. 그 이유는 보물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소중한 것을 잃을 때 두려움이 생기는데, 마음이 하나님께 올라간 사람은 하나님이 보물이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이 내게서 보물을 빼앗아 갈 수 없다는 확고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 것을 보물로 삼고 있는 상태에서는 이러한 확고함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피해망상이 생겨납니다. 본래 세상 것이라도 내게 주어졌거나 앞으로 주어질 것을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빼앗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세상 것을 보물로 삼고 있는 한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임을 알지 못합니다. 빼앗긴다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통속적으로는 먹고살기 위해 취직을 해서 월급을 받는다는 생각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사장님을 비롯한 윗사람들 앞에서 언제나 행동이 비겁해집니다. 겸손하고 온유함은 비겁함과는 다릅니다. 두려움은 우리에게 비겁함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피해망상입니다. 사장님은 절대로 나를 회사에서 자를 수 없습니다. 사장님의 회사일지라도 사장님 마음대로 나를 자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장님이 나를 잘랐다면 하나님의 주권이 허락하신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더 이상 그 회사에 있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에 사장으로 하여금 나를 자르게 하여 회사를 떠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장이 자르고 싶어서 자른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천하의 어떤 도둑도 내 물건을 멋대로 훔칠 수 없습니다.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집을 비우더라도 멋대로 훔칠 수 없습니다. 훔쳐 갔다면 오직 하나님의 주권이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것들에 대해서는 상실감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원초적인 불신앙이고 피해망상입니다.
세상 것을 갖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가지고 더 많이 갖는 것을 본업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 것에 대해서는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게서 가져가는 것들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하늘에서 나와 하나 되어 계시는 아버지 주권의 손안에 있는 것들입니다. 내 육체로부터 빼앗기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아버지 주권의 손에서 벗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과 계획이 있으셔서 내게 가져다 놓으시기도 하고 가져가시기도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로부터 두려움을 갖거나 비겁하게 된다면 영적인 함정에 빠진 것임을 명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야곱의 이야기를 할 때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기준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얼마나 나에게 적용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시험과도 같습니다.
한편 비겁했던 야곱은 라반과 만나서는 갑자기 떳떳하고 기세등등한 모습을 보입니다. 쉽게 말해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라고 강하게 따지고 듭니다. 물론 야곱은 라헬이 외삼촌의 드라빔을 훔친 것을 몰랐습니다. 드라빔이란 나무나 은으로 조그맣게 만든 가정의 수호신 우상입니다. 라헬은 아버지 장막에 들어가서 드라빔을 훔쳤습니다. 그런데 라반이 드라빔을 찾는 모습이 특이합니다. 야곱의 장막에 들어가고 두 여종의 장막에 들어가고 레아의 장막에 들어가고 마지막에 라헬의 장막에 들어갑니다. 라반이 마지막으로 라헬의 장막을 뒤졌다는 것은 라헬을 제일 믿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정작 드라빔을 훔쳤던 것은 제일 믿었던 라헬이었습니다.
여기서 라헬도 야곱과 똑같이 비겁한 모습을 보입니다. 드라빔을 치마 밑에 깔고 앉은 뒤에 생리 중이라서 일어날 수 없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이에 라반은 라헬을 믿고 더는 뒤지지 못합니다. 라반이든 야곱이든 라헬이든 비겁하고 속이는 관계였던 것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라반이 드라빔을 찾지 못하자 돌연 태도를 바꾸어 떳떳하고 기세등등한 모습을 보입니다. 야곱이 이러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이유는 라반 앞에서 상대적으로 윤리적인 우월함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야곱이 잘못한 것이 없다고 여겼다면 야반도주하듯이 도망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라반이 드라빔을 찾지 못하자 비겁함은 순식간에 떳떳함을 지나 기세등등함으로 돌변합니다. 사람 앞에서 갖는 윤리적 우월함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그 사람이 나를 책잡을 일이 없다고 여길 때 우월한 입장에 서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착각입니다. 명동에서 도둑질했는데 한강에서 책잡지 못한다고 해서 떳떳할 수는 없습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땅에서 빈둥거리는 영적 건달들은 이러한 모습을 보입니다. 마주하는 사람이 나를 책잡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 윤리적으로 우월한 입장에 있다고 착각하며 상대합니다. 이렇게 기세등등해진 원인은 그 속에 너무나도 깊은 자기애와 자기연민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나는 당신 앞에서 책잡힐 일이 없는 사람이다. 나는 마땅히 대우받아야 할 사람이다. 나를 대우하지 않는 당신은 못된 사람이다.’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자기를 억울하다고 여기고, 자기를 불쌍하다고 여깁니다.
이 자기연민은 억울함과 울분을 점화시킵니다. 그렇기에 야곱은 드라빔을 훔치지 않았음이 증명된 상황에서 온갖 옛날 일을 들춰냅니다. 두 사람이 시시비비를 가리다가 어른이 오시면 일단 어른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 마련입니다. 하물며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하는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하나님의 존재감이 내게서 작아질까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좋음을 기억하며 하나님만을 열망함이 식을까 두려워합니다.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책잡힐 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사람 앞에서 떳떳한 나를 붙잡지 못합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더 가지고 싶어 합니다. 그렇기에 사람 앞에서 책잡힐 일이 없는 나를 사랑할 수 없고 자기 떳떳함을 붙잡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내게서 무엇을 빼앗아 가려고 하거나, 나를 죄인 취급할 수 있습니다. 내 명예를 빼앗아 갈 수도 있고, 내 자유를 빼앗아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면하고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내게서 무엇을 빼앗아 갈 수 있다는 것을 전혀 믿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고 피해망상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하고 있는 사람은 사람 앞에서 절대로 자기의 떳떳함이나 우월함 혹은 기세등등함을 드러낼 기회가 없습니다. 반대로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어?’라고 생각하며, 마주하는 사람 앞에서 책잡힐 일이 없는 나의 윤리적 근거를 찾고 있다면 함정에 빠진 것입니다. 마음이 십자가를 놓치고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마주하지 못했기에 이 땅에서 깊은 함정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죄악 중에서도 무서운 죄악은 자기 의를 찾으려 하는 것입니다.
한편 마음으로 세상 것을 붙잡고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 앞에서 떳떳한 모습을 보이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영광의 세상 것을 마음에 품고 경쟁적으로 윤리적 우월성을 따집니다. 야곱과 라반 사이의 대화에서 그것이 잘 드러납니다. 라반은 ‘내 것을 왜 훔쳐 갔느냐?’라고 따지고, 야곱은 ‘나는 훔치지 않았다. 오히려 외삼촌이 내 품삯을 떼먹지 않았느냐?’라고 따집니다.
서로 세상 것을 많이 가지고 싶어 하는 경쟁의 난장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난장판에 뛰어드셔서 선민에게 세상 것을 많이 안겨주시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하나님이 자기편을 들고 계신다고 착각합니다. 세상 것을 많이 갖고 싶어 하는 경쟁에서 하나님이 자기편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 될 수 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부터 시작해서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의 순교, 초대 교인들의 순교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통째로 버림받았던 유대 종교의 특징은 바로 왜곡된 선민의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들 편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였고 진실이었다면 이스라엘은 지금 중동 땅에서 헤즈볼라와 싸우는 처지가 아니라 미국 땅을 차지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 세상 것을 갖고 싶다고 아등바등하는 경쟁 판에 뛰어드셔서 선민의 편을 드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민에게서 세상 것을 빼앗아 가실 확률이 더 높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라반의 의지에 반하여 자기에게 재산을 많이 주셨다고 기세등등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에서 떨어져도 한참 떨어진 함정에 빠진 상태였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재밌는 점이 있습니다. 라헬은 아버지의 드라빔을 훔쳤습니다. 이에 대해 32절을 보면 “외삼촌의 신을 누구에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우리 형제들 앞에서 무엇이든지 외삼촌의 것이 발견되거든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소서 하니 야곱은 라헬이 그것을 도둑질한 줄을 알지 못함이었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비유적으로 전해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야곱은 라반 앞에서 절대 떳떳한 입장에 설 수 없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과 하나 되어야 할 마음으로 아내들을 붙잡았고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야곱이 하나 되었다고 생각한 아내는 아버지의 드라빔을 훔쳤습니다. 야곱은 그것도 모른 채 훔친 자를 죽이겠다고 합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아닌 영광의 세상 것을 마음에서 붙잡고 하는 모든 행동은 우상숭배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자신이 우상숭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사실을 비유적으로 보여줍니다.
야곱은 분명히 선민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간섭하십니다. 하지만 야곱은 생이 진행되는 동안에 마음에서 영광의 세상 것을 붙잡고 그에 따라 나타난 결과대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이러한 야곱은 우상을 숭배할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다만 마음에서 영광의 세상 것을 붙잡으면서도 하나님이 자기편이라는 확증을 갖고 살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실질적으로는 수호신 드라빔을 우상 숭배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야곱은 자기가 우상숭배를 하는 줄도 모른 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자기편이라고 여기며 기세등등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 앞에서 ‘나는 이 사람보다 떳떳하다.’라고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내가 딱히 문제 될 건 없다.’라는 정도의 생각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사람 앞에서 나를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염두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장자로 서 있는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있는 것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좋은 이유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있는 자임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을 비교해 봅니다. 아브라함은 아내를 누이라고 하며 이방 왕에게 들여보냈습니다. 이삭에게도 같은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삭은 들여보내는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버리는 모습을 보였던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은 아내를 버린 아브라함을 비겁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자기가 살려고 아내를 이방 왕에게 들여보냈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기 육체의 목숨을 지키려고 아내를 들여보냈던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영광의 아내를 보고 있는 중에 죽기를 원치 않았고 영광의 하나님을 보는 중에 죽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 속내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영광의 하나님을 보면서 하나님과 하나가 된 상태에서 아내를 보았습니다. 아내를 붙잡는 것이 자기가 아님을 알았고, 하나님의 주권이 아내를 붙잡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의 아내가 된 것은 아브라함이 붙잡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영광의 하나님을 뚜렷하게 보면 볼수록 이 세상에 대해 물 샐 틈 없이 실시간으로 내려오는 하나님의 주권을 뚜렷하게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살겠다고 사라를 버린 것이 아닙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마음속에서 지켜내려고 사라를 하나님의 주권으로 돌려보낸 것입니다. 반면 야곱은 영광의 아내들을 마음속으로 보며 지켜내려 합니다. 자기가 지켜내려 하다 보니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비겁해집니다.
야곱은 31절에서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생각하기를 외삼촌이 외삼촌의 딸들을 내게서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여 두려워하였음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라반은 이미 27~28절에서 “내가 즐거움과 노래와 북과 수금으로 너를 보내겠거늘 어찌하여 네가 나를 속이고 가만히 도망하고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으며 / 내가 내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 맞추지 못하게 하였으니 네 행위가 참으로 어리석도다”라고 합니다. 야곱에게 우회적인 태도를 보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마주하는 사람이 내게 잘해주겠다는 마음을 가졌다고 해서 믿거나 안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은 이처럼 외삼촌 라반이 우호적인 입장을 표방하였기에 안심하고 화친을 하고자 하지만 이것은 함정에 더 깊이 들어가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야곱이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있다면 라반이 하나님의 주권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라반의 우호적인 태도를 보고서야 화친을 맺고자 합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헤어질 때와 라반과 야곱이 헤어질 때의 상황을 비교해 봅니다. 아브라함의 재산과 롯의 재산이 풍부한 것은 하나님이 가져다 두신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렇기에 13장 9절에서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라고 하며 롯에게 선택권을 줍니다. 이것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대면하고 있는 자가 재산 문제를 놓고 사람을 맞닥뜨렸을 때 보이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하나님의 계획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영광의 하나님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야곱의 이야기는 내가 생활 속에서 얼마나 일상적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모든 순간에 적용하고 있는가를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던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이 야곱의 이야기를 보는 기준입니다. 앞으로 나올 야곱의 모든 이야기는 내가 생활 속에서 예수님의 몸을 입고 장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마주하는 것을 생활화하는 관점에서 읽어 내려갈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어떤 신앙을 가졌는지 모르고, 야곱을 읽을 때 아브라함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린다면 야곱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종교 심리의 발현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모른다면 야곱의 종교 심리의 발현을 그대로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이 개신교의 신앙에 발전이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상적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이상적 목표를 기준으로 성경을 읽으며 기도할 때 이상적 목표가 나를 이끌어갑니다. 나는 의식 속에서 붙잡고만 있으면 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라는 이상적 목표를 의식에서 놓쳐버린다면 이상적 목표에 도달할 길이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아브라함의 믿음의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수준을 붙잡고 있으면 그 수준이 나를 끌어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아무쪼록 사람을 대할 때 야곱이 보여주는 것처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 자로서 비겁함과 떳떳함의 양극의 영적인 함정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유롭게 생활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람을 대할 때 마음이 하나님과 하나로 묶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사람 앞에서 두려움으로 비겁하거나 의기소침하지 않게 하시고, 상대적인 우월감을 갖고 의기양양하거나 기세등등하지도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