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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육체 입고 살던 과거 망령 퇴치법>의 줄거리 :
오늘 본문에서 보이는 야곱은 실상 형 에서와의 갈등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그런 갈등은 정말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야곱은 오히려 육체 입고 살던 과거의 자신과 싸움을 하는 중입니다. 육체를 입고 살던 과거의 자기와 싸우는 이유는 육체를 입고 살아야 할 자기 미래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참 신앙인은 지금 오직 하나님을 가지기 위해, 하나님을 잃지 않기 위해 싸우는 자입니다.
육체 입고 살던 과거 망령 퇴치법
(창세기 32:1~12)
1.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2.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3. 야곱이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자기보다 앞서 사자들을 보내며
4.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 주 에서에게 이같이 말하라 주의 종 야곱이 이같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과 함께 거류하며 지금까지 머물러 있었사오며
5. 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알리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라 하였더니
6.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7.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
8. 이르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
9.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10.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11.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12.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본문은 야곱이 고향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야곱이 복수심에 불타는 형 에서의 위협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이와 관련하여 ‘육체 입고 살던 과거 망령 처리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마음이 육체를 입고 살던 과거의 내가 망령처럼 되살아 날 때, 이 망령을 어떻게 퇴치할 수 있을까요?
본문에서 야곱은 큰 위기를 맞습니다만 영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에서와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은 아닙니다. 야곱은 개인적으로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자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다만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뒤에 진실하게 믿었다면 갈등은 없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20년 전에 에서와 아버지 이삭을 속이면서까지 장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에서와의 갈등은 바로 이러한 사건에 기인합니다. 그런데 그 뒤로 야곱이 모든 것을 다 잃고 거지 나사로와 같은 신세가 되었을 때 루스 들판에서 영광의 하나님이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진실한 만남으로 발전했다면 야곱은 본문과 같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20년 전 야곱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본문에서는 그 잘못이 망령처럼 살아납니다. 20년 전에 형을 속였던 야곱이 현재 야곱의 속에서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에서와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입고 살던 20년 전의 자기 과거의 모습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야곱은 이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에서로 상징되는 외부적 위협, 외부적 위기, 외부적 요인들로 인해 갈등을 겪고 싸움을 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하여 그리스도 연쇄 과정인 사닥다리 길을 통해 하늘로 가서 하나님을 마주하는 장자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육체를 입고 있던 과거에 어떤 일을 했고 어떤 잘못을 저질렀든지 과거의 나와 다시 맞닥뜨리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지금 내 마음은 육체를 벗고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 대하는 장자의 신분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장자의 신분이 허락되었음에도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땅에 머물러 있다면 문제가 다릅니다. 장자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상태라면 육체를 입고 있던 때의 나는 지금에 와서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나는 망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에는 과거의 망령을 실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망령(亡靈)이란 말 그대로 실제로 없는 것인데 있는 것처럼 느끼는 환각 상태입니다. 육체를 입고 살던 나는 잘했든지 못했든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과거에 잘못했던 일 때문에 갈등을 겪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과거에 훌륭한 전적을 이루었다는 것에 대한 망령에 시달립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신앙인은 육체를 입고 미래를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신앙인이라고 하면서도 육체를 입고 살던 과거의 망령에 시달리는 이유는 미래가 불투명하고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육체를 입은 상태를 유지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육체를 입고 살던 때의 내가 망령으로 되살아나서 그 망령과의 싸움을 해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야곱은 너무나 고단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의 고단했던 삶을 야곱에게서 그대로 봅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의 삶과 비교해 보면 야곱의 삶은 특별히 더 고단합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에는 하나님만이 보물입니다. 그렇기에 조카 롯의 관계에서 갈등의 소지가 보이자 통 크게 땅의 선택권을 넘겨줍니다. 이 세상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를 만들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지켜내고 하나님을 마주하는 상태만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은 이 세상의 재산이나 이권 다툼에 대해 주체적 활동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삭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물을 파는 대로 빼앗기고 또 빼앗기고 또 빼앗깁니다. 그래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모습을 본 아비멜렉은 ‘이 사람의 생애 속에 무언가 다른 인격체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라고 느끼며 소름이 돋습니다.
그런데 야곱에게서는 이러한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외삼촌과 헤어질 때는 외삼촌이 자기를 죽이고 소유를 빼앗아 갈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형을 마주하게 되자 이번에는 형이 자기를 죽이고 소유를 빼앗아 갈까 두려워합니다. 야곱의 두려움의 본질은 마음으로 붙잡고 있는 영광의 세상 것입니다. 야곱에게는 아내들과 자식들이 있고, 두 떼로 나눌 정도로 충분히 많은 재산이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 것들이 야곱의 마음에서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음에서 세상 것을 영광의 자리에 두고 붙잡고 있으면 두려움이 끝없이 이어져 나갑니다.
야곱은 그 두려움을 화친을 통해 해결하려고 하였습니다. 앞서 야곱은 외삼촌 라반과의 관계도 화친을 통해 해결하였습니다. 그리고 20년 전에 자기에게 속아서 장자의 축복을 받지 못하여 복수심에 불타는 에서에게 자기 재산의 일부를 보냄으로써 화친의 상황으로 바꾸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야곱의 착각입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에게서 안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화친을 맺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31장 43절을 보면 “라반이 야곱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딸들은 내 딸이요 자식들은 내 자식이요 양 떼는 내 양 떼요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 내가 오늘 내 딸들과 그들이 낳은 자식들에게 무엇을 하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라반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에 이제 안심해도 되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일이란 그렇게 돌아가지 않습니다.
야곱은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워서 에서와도 화친을 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13~15절을 보면 “야곱이 거기서 밤을 지내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 암염소가 이백이요 숫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숫양이 이십이요 / 젖 나는 낙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 나귀가 열이라”라고 하였습니다. 다 합쳐보면 580마리에 해당하는 가축을 에서에게 보냅니다. 이 가축들을 각각 나눠 보냄으로써 에서의 복수심의 불타는 마음을 점차 누그러뜨리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런데 이것은 야곱의 헛된 발버둥이었습니다.
야곱은 여전히 세상 것을 붙잡고 있는 소원을 위해서 하나님을 소환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용병처럼 취급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대한 적이 없습니다. 이 세상 것을 지켜달라는 기도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이들의 지킴의 과제는 마음속의 하나님입니다. 주어진 재산은 지킬 대상이 아닙니다. 심지어 아내나 아들까지도 지킬 대상으로 삼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바치면서까지 하나님을 지키려고 했고, 이삭은 고대 근동 지방에서 생존의 필수조건인 우물을 계속 빼앗기면서도 그것을 지켜달라고 기도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들은 필수조건에 위협이 가해지고 문제가 발생하고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그것으로 인해 마음에서 하나님을 빼앗기거나 잃는 것을 걱정했을 뿐입니다.
야곱은 20년 전에 육체를 입고 있을 때 형 에서를 속였습니다. 그 뒤로 도망을 가다 벧엘이라 이름 붙인 루스 들판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은 육체를 입고 살던 야곱이 없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이제 야곱의 마음은 사닥다리를 타고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로 올라가야 했습니다. 이 사닥다리가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입니다. 성령께서 오실 그리스도를 사닥다리로 제시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은 아브라함 때도 사닥다리였으며, 야곱에게도 사닥다리였고, 우리에게도 사닥다리입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라는 사닥다리를 통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은 몸과 관련된 재산이나 가족까지도 놔두고 하나님을 마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이외에 마음이 붙잡고 있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입고 있을 때 맺은 관계에서 잘못했거나 잘했거나 하는 것은 다 과거의 망령입니다. 그 어떤 과거의 나도 망령일 뿐입니다. 지금은 없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육체를 입고 살던 과거의 내가 없어졌다고 믿어집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은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가 마주할 수 있는 하나님을 만난 뒤에도 육체를 입고 있는 상태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육체가 있기 때문에 만나는 세상 것을 좋아하는 상태를 유지하면서, 20년 전에 육체를 입고 형을 속였던 그 순간을 자기 속에서 부활시킵니다. 재생시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하나님을 만난 뒤에 육체를 입고 있던 야곱이 사라질 만큼 새로운 야곱이 등장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마음속에는 20년 전에 육체를 입고 형 에서를 속였던 자기가 살아나게 됩니다.
야곱은 지금 에서와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20년 전에 육체를 입고 형을 속였던 자기와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죄 사함이 일어나지 않고 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사닥다리인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까지 이어지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육체의 옷을 벗음으로써 죄 사함을 받고, 예수님을 옷 입고 하늘로 올라가는 상황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일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야곱이 육체를 입고 있던 때의 자신을 진짜 나라고 믿는 이유는 지금도 육체를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육체를 입고 있다면 육체를 입고 살던 과거의 내가 다 살아납니다. 그리고 육체를 입고 살아야만 하는 미래가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벌벌 떨게 됩니다.
육체를 입고 있는 한 육체를 입고 살던 과거는 하나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육체를 입고 살아야 하는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하고 불안하게 됩니다. 야곱은 바로 이러한 상태에서 인생을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육체를 입고 살던 과거에 시달리고, 육체를 입고 살아야만 하는 미래에 대한 불안에 시달립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하나님이 유일한 보물로서 마음에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육체를 입고 살면서 영광의 세상 것들을 지켜내기 위하여 늘 야곱에게 소환되는 역할을 하셨습니다.
2절을 보면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육체를 입은 야곱을 인내하시며 20년 동안 보살피시고 곁에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영광의 세상 것 대신 영광의 하나님 보기를 계속해서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던 중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에서를 마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상황을 이용하셔서 다시 한번 야곱의 마음이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와 영광의 하나님을 마주하게 될 것을 기대하십니다. 야곱의 마음과 세상이 밀착된 상태로부터 틈을 벌리시고 이번에야말로 분리하고자 하십니다. 야곱의 마음이 육체를 벗고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라는 사닥다리를 통해 하늘로 올라와 하나님을 마주하게 될 것을 기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야곱에게 마하나임이라 불리는 하나님의 군대를 보는 이상한 현상을 보여주십니다.
야곱에게 하나님의 군대가 어떤 형태로 보였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야곱이 길을 가는 중에 환상으로 보았을 수도 있고, 실제로 사람의 군대로 보면서 하나님의 천사들로 느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하나님의 군대라는 것을 야곱이 의식할 수 있는 대상을 보여주셨다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 야곱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군대가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군대란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군대를 야곱에게 보여주셨다는 것에는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요?
야곱은 육체를 입은 상태를 유지하면서 마음이 육체를 통해 접하는 세상 것들을 영광의 자리에 앉혀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광의 자리에 앉혀놓은 것들을 상실할까 항상 두려워합니다. 그렇기에 복수심에 가득 찬 형으로부터 지켜내려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야곱에게 하나님의 군대를 보여주십니다.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이 내 육체와 관련해서 옆에 있도록 허락하신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군대가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지키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기에 하나님의 주권을 군대로 보았습니다. 마하나임은 하나님 주권의 여러 측면 중에 하나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이 세상 것들에 대하여 빼앗아 가시는 측면도 있고 지키시는 측면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그러한 측면이 군대로 나타난 것은 야곱이 지키고자 했던 가족이나 재산을 하나님이 지키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 너는 에서의 복수심의 불길 앞에 있다. 에서가 사백 명을 끌고 오고 있다고 하니 너는 어쩔 줄을 모르고 있구나. 그것은 걱정할 필요가 아무것도 없다. 이 땅에서 살고 있는 너의 삶을 향한 나의 주권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주권에는 네가 하나님의 군대 마하나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측면이 있다. 나는 주권자로서 너를 지킬 것이다. 에서가 사백 명이 아닌 사만 명을 끌고 오더라도 내가 너에게 있게 한 세상 것들에는 에서가 조금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에는 세상 것들은 본래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내 것처럼 여기는 도둑질을 그만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도둑질이 일어나는 이유는 육체를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마음에 갖고 있던 모든 세상 것들은 본래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군대를 동원해서 지키실 수 있는 것들입니다. 마하나임에는 스스로 지킨다고 생각하지 말고 육체를 벗고 하늘로 올라오라는 하나님의 바람과 기대가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앞서 외삼촌 라반과의 화친에서도 드러났습니다. 야곱은 죽을까 두려워 야반도주하듯이 라반을 피했지만 정작 라반은 ‘네 아내는 내 딸들이고, 네 자녀는 나의 외손자들인데 내가 침범할 수 있겠니?’라는 말을 듣고서야 안심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야곱은 사람의 말에 안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 지키고 계심을 볼 수 있어야 했습니다. 야곱이 라반 외삼촌과 화친을 맺은 사건과 그리고 가나안 땅에 돌아오는 상황에서 야곱은 20년 전에 잘못으로 인해 에서와의 갈등이 터질 위기에 처합니다. 이러한 사건 사이에 마하나임이라 불리는 하나님의 군대를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라반과의 화친에 안심했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그것으로 인해 네 삶이 보존되거나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너를 향한 나의 주권에는 하나님의 군대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한 측면이 있다. 내가 너의 육체를 중심으로 관계하는 것들을 지탱하고 유지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에서가 복수심에 불타 너를 공격하더라도 너를 지키는 마하나임의 측면을 받아들이고 두려움에서 벗어나라. 네가 전전긍긍하면서 지켜내야 할 것은 육체와 연관된 것들이 아닌 바로 나이다. 내가 없는 것을 상실감으로 느끼고 나를 지켜내라.’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군대를 보여주시면서까지 깨닫기를 바라셨음에도 야곱은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원하심을 알아들을 수 있어야 됩니다.
에서는 마하나임의 주권적 측면 앞에서 허깨비와 같습니다. 에서가 무언가를 빼앗을 수 있다면 그것은 에서의 힘이 발휘된 결과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이 빼앗아 가심으로 작동했기 때문입니다. 에서가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마하나임의 지키는 측면을 넘어서거나 뚫고 들어올 수는 없습니다.
지키시거나 빼앗아 가심은 모두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사실 빼앗아 가심도 본래 하나님의 것이기에 빼앗아 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빼앗김은 내가 육체를 입고 있기 때문에 가지는 착각입니다. 하나님이 내 육체에 주셨다고 생각하기에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본래 나의 몸으로부터 시작하여 몸에 연관된 모든 것들은 내 것이 아닙니다. 죄와 저주에 찌들어서 내 것으로 착각하며 도둑질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의뢰한다, 내려놓는다’는 말들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지금 하나님 앞에서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당장 마음에서 그것들을 찢어내신다면 내가 견디지 못할 것이기에 참고 계실 뿐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이 과거의 망령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과거에 육체를 입고 있었을 때 잘못한 일이 육체를 입고 살아야 하는 나의 미래를 망칠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 됩니다. 다시 말해 마하나임의 측면을 갖고 있는 하나님의 주권을 삶의 현장에서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전히 육체를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에서가 ‘20년 전에 나를 속인 놈아, 잘 만났다. 이제 죽여주마!’라고 외치며 달려오리라 생각했습니다. 야곱이 이렇게 생각했던 이유는 자신이 육체를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전 설교에서 속이고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에게는 죄와 저주의 체질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육체를 입은 자라고 말하면 곧바로 수긍합니다. ‘그래, 20년 전에 형을 속인 자가 나다. 이제 그런 나의 미래는 끝날 위기에 봉착했다.’라고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주권의 마하나임의 측면이 살아서 작동하려면, 과거에 육체를 입고 살던 내가 아닌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과거의 망령을 퇴치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망령을 퇴치하면 지금 이 땅의 삶은 하나님의 마하나임의 측면이 책임지십니다.
마하나임의 측면이 삶의 현장에서 작동하려면 반드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야만 됩니다. 하나님을 잃지 않기 위해서 총력을 기울이는 강도가 강해질수록 이 땅에서 하나님의 군대인 마하나임의 주권적 측면은 강력하게 역사할 것입니다. 그럴수록 나는 세상 것들과는 상관이 없어집니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권 속에서 필요하다면 지켜내실 것이고 필요 없다면 가져가실 것입니다.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아직도 온 세상은 나에게 ‘너는 육체를 입고 있다.’라고 계속 말합니다. 내 속에 있는 죄와 저주의 체질은 그 말에 동의하고 수긍할 것입니다. 세상의 말을 용납하고 인정할 것입니다. 내 죄와 저주의 체질이 작동할 때 그것을 자연스럽고 마땅하고 타당하다고 여기는 것이 육체를 입고 있는 나입니다. 이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기 때문에 우리는 속여야만 합니다. 축복권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 이삭은 야곱의 음성을 의심했습니다. 그런데도 야곱은 염소 새끼의 가죽을 입고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너는 육체를 입은 자다.’라고 지적할 때 나의 죄와 저주의 체질은 그것을 수긍할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장자라고 속이고 주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육체를 입은 자임을 인정한다면 마음은 하늘로 갈 수 없습니다. 마음이 하늘로 못 가면 하나님의 마하나임의 측면도 이 세상에서 작동할 수 없습니다.
나의 육체로부터 시작해서 육체와 관계하여 주어진 모든 것들에 하나님의 마하나임의 측면이 작동하기 위해서라도 마음은 하늘로 올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로 올라가서 나는 하나님을 마주하는 장자라는 신분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죄와 저주에 찌든 나의 체질은 육체를 입고 있는 모습이 나라고 고발할 것입니다. 그럴 때 과거의 망령이 살아나고 미래의 망령도 살아납니다. 그러한 죄와 저주에 찌든 나 자신을 속이기 위해서라도 야곱이 축복권을 가진 아버지 이삭을 속였듯이 축복권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 앞에서 ‘나는 육체를 입고 있는 야곱이 아니라 예수님의 옷을 입은 장자’라고 속이고 우길 수 있어야 합니다.
속이고 우겨야 하는 이유는 ‘나는 육체를 입은 자다.’라는 생각이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죄와 저주의 체질은 그것이 진실이라고 나를 믿게 합니다. 육체를 입은 내가 진짜 나라는 무의식적인 생각은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짜 내가 아닙니다. 실체이지만 타락한 실체입니다. 이 타락한 실체로부터 벗어나려면 내가 예수님의 옷을 입은 자임을 속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속인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죄와 저주에 찌들어서 육체를 입은 것이 나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속임이 일어나지 않으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갈 수도 없고, 하나님을 마주하여 지금 장자의 의식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그럴 때 육체를 입고 살던 과거의 망령과 육체를 입고 살아야 되는 미래의 망령이 실체로 느껴지면서 나를 끊임없이 짓누를 것입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장자 됨을 주장함으로써 마하나임의 측면이 작동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육체를 입고 살던 과거의 망령을 반드시 퇴치해 내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주권의 모든 측면이 활발하게 작동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스도로 옷 입음으로써 육체를 입고 있던 과거의 모든 망령과 육체를 입고 살 미래의 모든 망령을 완전히 퇴치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