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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

녹취문: 하나님과 선민 간 축복 개념의 혈투_태승철 (창 32:21~32)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4.09.26|조회수77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과 선민 간 축복 개념의 혈투>의 줄거리 :

하나님과 선민 이스라엘의 대표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혈투를 벌입니다. 야곱이 야곱식의 축복을 목숨 걸고 요구하는데 하나님은 야곱의 환도뼈를 탈골되게 하시면서까지 야곱이 생각하는 방식을 따르는 축복을 거부하십니다. 그러나 환도뼈가 탈골되어도 굽히지 않는 야곱에게 결국 하나님이 지고 마십니다. 더 밀어붙였다가는 야곱을 죽여야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과 야곱 간에 벌어진 혈투의 의미를 알아봅니다.

 

하나님과 선민 간 축복 개념의 혈투

 

(창세기 32:21~32)

 

21. 그 예물은 그에 앞서 보내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밤을 지내다가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32.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우리는 그동안 얍복강가에서 벌어진 야곱과 하나님과의 씨름을 생사를 건 기도의 모범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이러한 기도를 통해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끌어냈을 뿐만 아니라 명예롭게도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29절을 보면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이 말씀 중에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라는 부분이 본문 전체를 신앙의 모범과 기도의 모범을 위한 생사를 건 싸움으로 보게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원하는 것 또한 생사를 건 각오를 하고 싸워서라도 하나님께 축복을 받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입니다.

29절을 언급한 김에 추가로 설명하자면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앞선 28절에서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라고 하였던 것으로부터, 야곱과 씨름한 그 사람이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의지가 형상화 되어서 나타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묘사는 예수님을 떠올리게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면 예수님에 대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하였고, 14절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묘사로부터 “그 사람”이라고 언급된 야곱과 씨름한 사람은 하나님의 의지가 형상을 띄고 나타났기에 육신을 입고 태어나기 이전에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그리스도이신 하나님과 씨름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하게 거론되는 것이 이름입니다. 야곱은 축복을 받고자 하나님과 씨름을 했습니다. 야곱 속에는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이미 규정해 놓은 바가 있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은 어떤 분이라고 규정해 놓았던 것입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하나님이란 내가 생각하는 축복을 주시는 분, 내가 생각하는 축복을 좌우하시는 분, 내가 생각하는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열쇠를 쥐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라는 말씀이 등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께서 ‘네 멋대로 나를 규정하고 있으면서 새삼스럽게 무슨 이름을 묻느냐?’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본문은 참 이상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축복받는 일이 왜 이렇게 어려울까요? 야곱은 왜 생사를 걸고 하나님과 싸워서 축복을 끌어내야만 했을까요? 이러한 모습은 아브라함과 비교할 때 대조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야곱처럼 생사를 걸고 축복을 바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이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사람들에게 항상 먼저 자발적으로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야곱은 왜 축복하지 않으시면 놓지 않겠다고 싸워야만 했습니까? 무엇 때문에 환도뼈가 탈골되어 죽을 지경에도 하나님을 놓지 않고 축복을 따내야만 했을까요?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에서 축복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기쁘고 자발적인 결정에 의해 먼저 약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에게 있어서 축복이란 생사를 건 싸움을 통해 얻어야 할 전리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얍복강가에서 벌어진 야곱의 씨름은 생사를 건 믿음을 지키고자 하는 모범적인 상황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점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근본부터 왜곡되었으며 모범으로 삼을 상황이 아닌 철저하게 배격해야 될 사건입니다. 야곱이 받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명예로운 이름이 아닙니다. 이 싸움의 진행 과정을 떠올려 봅니다. 하나님은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사람들에 대해서는 자발적으로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복을 구하지 않아도 먼저 당신이 약속하십니다. 이렇게 나를 축복하지 못해 안달하시는 분과 싸워서 이겨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은 내게 저주하는 자이지 축복을 주시려는 분과 싸워서 이긴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과 싸워서 이겼다는 이름을 받은 야곱의 태도는 우리 신앙과 기도의 모범이 될 수 없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다시 아브라함의 경우를 떠올려 봅니다. 아브라함은 마음에서 오직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주어진 모든 소중한 것들을 죽이고 버리는 일을 평생의 본업으로 삼았습니다. 한편 본문의 상황을 잘 생각해 보면 궁금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얍복강을 중심으로 야곱 자신과 야곱의 몸이 살아있어 주어진 소중한 모든 세상 것들이 일시적이나마 분리되었습니다. 야곱은 아내들, 자녀들, 노비들, 가축 떼를 먼저 얍복강을 건너게 한 상태에서 홀로 남았습니다. 하나님을 제치고 마음속 영광의 자리에 들어올 만한 것들과 분리되었습니다. 앞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마하나임이라는 하나님의 군대를 보여주심으로 당신이 주권자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얍복강을 중심으로 야곱은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과 분리된 상태가 됩니다. 얍복강을 건넌 것들은 전부 하나님의 주권에 들어가 있는 것임을 밝혀주셨습니다. 야곱은 이 모든 소중한 것들과 분리된 상태에서 하나님과 단둘이 있게 됩니다.

만약 이 상황에 야곱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있었다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씨름했을 리가 없습니다. 이로부터 다시 한번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한 것은 보통 나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라면 이 상황을 오히려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으로 지켜내고 싶어 했던 영광의 하나님과 단둘이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신혼여행과도 같은 상황이기에 이 순간은 생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기쁘고 즐거운 시간입니다. 어차피 몸이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이 허락하신 모든 것들은 내 것이 아닙니다. 본래 그것들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주시기도 하시고 가져가시기도 하시며 장중에 붙들고 계십니다. 그저 하나님과 단둘이 보내는 시간을 ‘이게 웬 떡이냐!’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달랐습니다. 아브라함이라면 신혼여행처럼 즐겁게 보냈을 시간에 환도뼈가 탈골될 정도로 하나님은 야곱을 거부하셔야 했고 또 야곱은 그런 하나님을 붙잡고 축복해 달라고 씨름을 하면서 사투를 벌였습니다. 도대체 하나님과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선민 사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의아할 지경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세상 것들은 많거나 적거나, 있거나 없거나 내 마음과는 분리되어야 합니다. 얍복강을 경계선으로 야곱과 그의 소유가 분리된 것은 바로 십자가 복음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상황입니다. 내 몸이 살아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게 두신 모든 것들은 얍복강을 중심으로 야곱과 그의 소유가 분리된 것처럼 매 순간 십자가를 중심으로 분리되어야 합니다. 얍복강 건너에서 야곱이 하나님과 단둘이 있게 된 것 같은 시간을 우리는 매일 이루어야 합니다. 그 상황이야말로 참으로 가장 기쁜 상황이고 가장 복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을 직면해서 단둘이 있게 된 상황을 위해서 주님은 그리스도로서 당신의 몸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내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와라. 내 몸이 네 몸인 것처럼 아버지와 단둘이 있어봐라. 아버지와 더불어 행복해라. 아버지가 너에게 주어진 진짜 분깃이고 몫이고 재산이다. 그러므로 날마다 하늘로 올라와서 아버지를 많이 벌어라.’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이것이 얍복강가의 상황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러한 하나님의 축복의 개념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오히려 무시하고 멸시하고 박살을 냅니다.

성경은 항상 얍복강가의 상황을 이야기합니다. 욥기에서 하나님과 사탄이 경합을 벌입니다. 하나님은 욥의 마음에서 영광의 자리를 차지할 만한 세상 것들을 다 없애도록 사탄에게 허락하십니다. 그런데도 욥은 하나님 경외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사탄은 욥이 세상 것들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탄에게 그렇지 않음을 보여주십니다. 욥이 하나님을 좋아한 것은 하나님이 욥에게 세상 것을 많이 주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얍복강가의 야곱의 상황이 욥의 상황과 닮았습니다. 야곱이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것과 결별하는 상태입니다.

욥기 1장 21절을 보면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욥보다 한 차원 더 나가서 그러한 세상 것에 대해서는 마음 자체를 둔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아브라함이나 욥 같은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들에 대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주인으로서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을 동원하고자 합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역할을 정해놓고 이름을 물었기에 하나님은 기가 막혀 하시며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너는 이미 내 이름을 정해놓고 내 역할도 정해놨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이름을 묻느냐? 나는 네가 생각하는 축복을 줘야만 하는 자가 아니냐?’라고 말씀하시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싸움을 통해서 정말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얍복강가의 싸움을 루스 들판과 똑같은 상황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루스 들판에서 야곱은 혼자였습니다. 얍복강가에서 야곱은 다시 혼자입니다. 루스 들판에서 야곱은 자기에게 아직 주어지지 않은 세상 것들은 축복이라 생각하고 붙잡느라 사닥다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과 단 둘이 있기를 거부합니다. 얍복강가에서는 자기에게 이미 주어진 세상 것들을 지키기 위하여 하나님과 단 둘이 있는 상황에서도 하나님 자신이 복인 것을 전혀 감지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단 둘이 있는 시간은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여러분에게 세상 것이 많이 주어졌습니까? 적게 주어졌습니까? 많이 주어졌고 적게 주어진 것은 여러분이 평가하고 관심할 일이 아닙니다. 십자가라는 얍복강을 중심으로 내 마음 하나 달랑 남겨놓고 다 분리해야 합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과 단둘이 있던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얍복강으로 삼아 예수님 안에 들어감으로써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 나를 하나님과 단둘이 있게 만드시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얍복강가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야곱에게서 얻으려고 하셨던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축복을 야곱이 받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무엇을 얻으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축복의 개념과 야곱이 생각하는 축복의 개념은 달랐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야곱이 생각하는 축복을 거부하십니다. ‘네가 생각해서 나에게 달라고 하는 축복은 축복이 아니다. 제발 내가 너를 위하여 준비한 축복을 받고 누리면 안 되겠니?’라고 말씀하시는 셈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거부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나는 너를 예정하고 선택한 주인으로서 복이 아닌 것을 요구하는 너에게 그것을 줄 수 없다’라는 심정으로 환도뼈를 치십니다.

환도뼈는 골반과 다리뼈를 연결하는 뼈입니다. 따라서 환도뼈가 탈골되면 제대로 걸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환도뼈란 활동력의 근원으로 여겨졌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환도뼈를 치셨다는 것은 이 세상을 향하여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상황을 근절시키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도 야곱은 끝까지 하나님을 붙잡고 자기가 생각하는 축복의 개념을 강요합니다. 이제 하나님이 환도뼈를 치신 것 이상으로 야곱을 이기기 위해서는 죽이시는 것밖에 없습니다.

환도뼈는 살아있는 활동력의 근원입니다. 일단 목숨을 붙여놓고 활동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모든 활동이 자기가 생각하는 축복 개념을 추구하는 활동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그러한 활동의 일환으로 하나님의 이름도 불렀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환도뼈가 탈골된 뒤에도 하나님을 놓지 않고 자기의 축복 개념을 강요합니다. 이제 하나님이 야곱을 이기기 위해서는 야곱을 죽이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선택하심의 의미는 사라지고 하나님의 실책이 되어버립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야곱에게 지십니다. 그리고 야곱의 이름을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라는 뜻의 이스라엘로 바꾸십니다.

 

이후 이스라엘은 선민의 이름이 됩니다. 그리고 선민은 그 이름대로 하나님과 겨루어 절대 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선택하지 않은 자들과는 씨름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이 어떤 축복의 개념을 갖고 추구하며 살든지 하나님이 그들과 씨름하실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기는 자들은 선민입니다. 선민만이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깁니다. 하나님이 선민을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실책입니다. 나 같은 사람을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것이 실수이기 때문에 지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기시려면 나를 죽여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영광의 하나님을 마음으로 붙잡는 대신에 영광의 세상 것을 붙잡는 힘이 너무나 강력합니다. 살아있기 때문에 활동을 못하게 막아도 마음에서 세상을 놓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놓고 하나님을 가지게 하려면 죽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죽이면 예정과 선택의 의미는 없어집니다. 이스라엘에는 바로 이러한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세상에 아무도 하나님과 싸워서 이기려는 존재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선민만이 선택하지 않은 자들과 마찬가지로 죄와 저주의 체질에 장악된 채로 자기가 생각하는 세상 것을 가짐이 축복이라 여기면서 하나님과 싸워 이기고자 합니다. 기어코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선택하셔서 주시려고 예비하신 모든 축복을 내팽개칩니다. 세상 것이 축복이니 주시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는 각오로 달려듭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선민에게 지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 들어있는 의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유대 종교에 묶여서 구원으로부터 떨어져 나갔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영광의 세상 것을 추구하는 축복의 개념을 고집해서 하나님을 이겼습니다. 이들의 하나님 이김은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 세상 것은 복이 아니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이스라엘은 또 하나님을 이기고자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세상 것이 복이라는 개념으로 하나님을 이기는 이김을 이어가는 자들이 선민입니다.

이러한 세상 좋아함은 죽이지 않으면 끝나지 않습니다. 세상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환도뼈를 치셔서 삶의 활동을 중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목숨이 붙어있는 한 세상 것을 놓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딜레마가 여기에 있습니다. 야곱이 원해서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실책입니다.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축복은 하나님 자신을 갖는 것입니다. 이 세상 것들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알아서 하실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하늘에서의 축복과 땅에서의 축복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상관하지도 않고 내팽개칩니다. 죄와 저주에 찌든 입맛에 맞는 것들을 복이라고 생각하고 추구합니다. 이 추진력을 이겨 낼 수 없어서 죽여야만 끝이 납니다.

 

이 가짜 복에 대한 집착과 애착과 유착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래서 일어난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세상과 유착되어서 목숨을 걸고 세상을 좋아하는 선민을 죽이시되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대신 죽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선민인 나의 죽음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바로 얍복강가의 야곱의 모습으로 상징되는 선민을 위해서 십자가 사건은 일어났습니다.

선민은 세상을 향한 복의 개념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시려는 복의 개념을 이기는 자들입니다. 도저히 복이 아니라서 주실 수 없다는 하나님께 강요하고 또 강요해서 자기가 원하는 방식의 축복을 받아내고야 끝이 나는 자들이 선민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죽여야만 하는데 진짜 죽인다면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에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얍복강에서 야곱과 그의 소유가 분리되듯이 내 마음과 세상이 분리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십자가 죽음이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을 향할 수 없습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복의 개념으로 하나님이 생각하는 복의 개념을 이기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것에 관심하지 말아라. 그것은 본래 내 것이다. 내가 주관할 것들이다. 너희의 마음을 세상에 빼앗기지 말고 진정으로 채울 수 있는 나를 향하라. 나를 지키는 것을 본업으로 삼으라.’라고 복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성경의 사건들이 일어난 것이 4,000년 전이고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진 지 2,000년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고 말씀하셔도 아무도 하나님의 복의 개념에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이기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십자가 사건을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이 진짜 선민을 갈라내는 시금석이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모든 기독교 종교 활동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십자가 사건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얍복강가의 야곱 이상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이긴 자라는 절대로 생겨서는 안 되는 이름이 끝까지 따라다닐 것입니다.

선민을 가리키는 이름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야곱의 이름을 따라서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거나 아브라함의 이름을 따라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선민의 이름을 가져야 할까요? 마태복음 1장 1절을 보면 예수님에 대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야곱의 계보, 이스라엘의 계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세상을 소원하는 가짜 선민들의 이름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만이 진짜 선민의 이름입니다. 물론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관용적으로 선민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과를 사과라고 부르듯이 그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관용적인 의미에서 쓰는 것입니다. 다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생긴 근원적 사건을 들여다보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진짜 선민의 이름이 아닙니다.

바람을 피우는 한 여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바람 피우는 남자와 계속 살게 해달라며 남편에게 부탁합니다. 남편은 그 남자를 버리고 이전처럼 함께 살자고 부탁하지만 아내는 바람 피우는 남자와 함께 살겠다고 남편의 부탁을 이겨버립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 담겨있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기가 생각하는 축복을 요구하는 야곱을 축복해 주십니다. 바람 피우는 남자가 없으면 죽게 생겼기에 일시적으로 아내 옆에 바람 피우는 남자를 용인하십니다. 이것이 본문 29절의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라는 말씀에 담긴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속에는 음란함과 하나님에 대한 배반이 들어있습니다. 그 배반이 얼마나 철저한지 목숨을 걸고 세상 것을 사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지신 이유는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하나님 스스로 예정하시고 선택하셔서 사랑하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대상을 향한 애착을 복으로 여기는 더럽고 추악하고 음란한 복의 개념에 어쩔 수 없이 일시적으로 지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야곱을 살려야 하셨기에 야곱이 생각하는 복의 개념대로 축복을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얍복강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얍복강가에서 야곱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리려고 하셨던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싸워서 이기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자입니다. ‘주님과 단둘이 연합하게 해주세요. 이것이 나의 가장 큰 기쁨입니다.’라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싸워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주시려는 축복은 하늘에 있는데 땅의 것들로 축복의 개념을 삼고 주님과 싸워 이기겠다는 자들이 기독교 종교인입니다.

다시는 우리의 소원하는 바로 하나님의 소원하는 바를 이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바라는 바로 하나님이 내게 주시기를 바라는 바를 이겨서는 안 됩니다. 내가 갖고 싶은 것에 대한 열망이 하나님이 내게 주시고 싶으신 것에 대한 열망을 이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죄와 저주에 찌들어 목숨을 걸고라도 세상 것을 지키려는 야곱의 근성만 십자가에서 죽일 수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당신이 생각하시는 복을 주시지 못해 병이 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지신 이유는 당신이 생각하신 복을 언젠가 주실 수 있음을 기다리시기 위함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복도 아닌 복을 주장하며 더러움과 음란함을 들이대는 야곱에게 져주신 것임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단순히 선민이라서 부르는 이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 담긴 근원적인 뜻대로 우리가 생각하는 축복의 개념으로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축복의 개념을 이기는 악하고 어리석고 음란하고 더럽고 추악한 야곱의 모습이 더 이상 우리 속에서 발견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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