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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

녹취문: (S) 하나의 인간관계일 뿐, 결혼이 별거냐_태승철 (창 2:18~25)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4.04.22|조회수102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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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의 인간관계일 뿐, 결혼이 별거냐>의 줄거리 :

아담과 하와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본문입니다. 인류 최초의 인간끼리의 만남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이 결혼을 절대적인 원칙으로 선언합니까? 아닙니다. 그냥 최초의 '인간관계'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절대적인 원칙은 결혼이 아닙니다. 사람 간의 관계가 지속하는 중에도 절대로 잊혀서는 안 되는 각 사람의 하나님 관계입니다. 각 사람이 사람과 관계하는 동안에도 태초의 안식 상태를 유지하여야 함을 절대적으로 요구하시는 본문입니다.

 

(S) 하나의 인간관계일 뿐, 결혼이 별거냐

 

(창세기 2:18~25)

 

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결혼은 별것 아니고 수많은 인간관계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런데 남녀의 결혼이 모든 인간관계 중 첫 번째로 소개되고 있는 바람에, 우리는 결혼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그럼 결혼이 특별하지 않느냐?’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결혼이 특별한 관계로 인식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를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은 구조가 이상합니다. 18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19~20절을 보면 아담이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의 이름을 붙이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다시 21절 이후에서 하나님은 여자를 지으시고 24절에서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는 결론을 내리십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신 사건에 이어서, 아담이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의 이름을 붙이는 장면이 삽입된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을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왜 아담과 하와를 동시에 만드시지 않았을까요?’라는 질문으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신 후에 ‘아담 혼자는 안 되겠는데?’라고 생각하셔서 비로소 여자를 만드셨던 것일까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실 때 배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르셨을 리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동시에 만드시지 않고 따로 만드신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무조건 남자와 여자의 결합을 일심동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고자 합니다. 결혼을 하나님의 뜻이라고만 여기는 관점으로 본문을 본다면 앞서 언급된 내용들은 모두 망각하게 됩니다. 앞서 우리는 태초의 안식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첫 사람 아담을 만드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셨습니다. 원하셨다면 남자와 여자를 동시에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신 데에는 이유가 있고 이러한 과정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창세기 1장부터 죄와 저주에 찌든 우리를 염두에 두시고 창조주가 누구이며, 창조주와 관계해야 될 인간이 누구냐에 대해 가르쳐주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사람이 처음으로 다른 사람과 관계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사람과 사람이 서로 어떻게 관계해야 창조주와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서만 관계하는 것이 아닙니다. 첫 사람 아담은 이미 태초의 안식을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이로부터 사람이 다른 인격적인 사람을 관계할 때는 어떤 식으로 관계해야 하는지가 드러납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따로 지으신 것입니다.

 

앞서 우리는 사람의 마음은 첫 번째로 하나님을 상대해야 한다는 태초의 안식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사람의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는 다른 대상이 끼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도 끼어들어서는 안 되고, 어떤 일이나 문제도 끼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일을 하고, 어떤 문제를 마주하든지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과 밀착된 상태에서만 하나님의 생각을 호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상태의 아담에게 아담과 같은 사람 하나를 등장시켜서 관계하게 하십니다. 이때 하나님께 있어서 걱정이 하나 있다면 아담의 마음에 대한 것입니다. 아담의 마음과 하나님과의 밀착은 인격적이고 자발적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담이 늘 의식해야 되는 문제이지 기계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담에게 또 하나의 상대자로 사람을 주시고자 했던 하나님의 가장 큰 염려는, 아담이 하나님과의 밀착 상태를 버리고 눈에 보이는 사람과의 밀착 상태에 전념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본문은 단순히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자가 등장하며 결혼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지만, 본문의 주제는 사람이 사람을 관계하는 본질적 특성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결혼보다 인간관계의 본질이 더 우선되는 주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관계의 본질적 특성이란 사람을 창조하신 과정에서 잘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먼저 만드셔서 아담에게 첫 번째 상대자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와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22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끌어 오셨다는 표현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이 아담의 갈빗대를 취해 하와를 만드신 장소는 아담이 모르는 곳입니다. 아담과 마찬가지로 하와가 갓난 어른으로 태어나 의식이 깨었을 때 제일 먼저 상대한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하와의 마음이 먼저 하나님과 밀착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아담은 하나님과 밀착되었고, 따로 떨어져서 아담의 갈빗대로 만들어진 하와 또한 하나님과 밀착되었습니다. 그 이후에 하나님은 이 두 사람을 만나게 하십니다. 성경은 이것이 인간관계의 본질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동시에 만드시지 않은 이유는, 사람과 사람이 일심동체가 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남녀가 한 몸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마음만은 일심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신 피조의 세계에서 가장 꼴불견은 결혼한 남녀가 일심이 되는 것입니다. 결혼은 반드시 이심동체의 상황을 유지해야 됩니다. 각자의 마음이 서로 붙어서는 안 됩니다. 각자의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각자의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 상태에서 한 몸을 이루는 것이 진정한 결혼의 모습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몸이 하나 되는 결혼이 아닌, 사람이 사람을 관계할 때 드러나야 하는 관계의 본질적 특성입니다. 사람은 사람과 관계할 때 절대로 마음이 붙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로부터 우리는 본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의 이야기를 다 잘라내고 단지 본문의 내용만을 보고 결혼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큰 오해입니다. 이것은 내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해야 하는 절대불변이자 최우선의 원칙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본문을 해석한 결과입니다.

남자나 여자는 똑같이 언어의 능력을 부여받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습니다. 따라서 여자에게 주어진 최우선의 과제 또한 하나님과 밀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결혼을 하든, 자녀를 낳든, 모든 일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으로 말려들게 됩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우리’로 묶이는 것을 염려하셨습니다. 하와는 갓난 어른으로 지어져 하나님께 인도를 받아 아담을 만나게 됩니다. 이때 하와는 여호와 하나님께 ‘여호와 하나님! 우리 지금 어디 가요?’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아담을 만나기 전 하와는 하나님과 우리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담도 하와를 처음 봤을 때 ‘여호와 하나님! 우리 말고 이 존재는 대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아담도 하나님과 자신을 우리로 여겼고, 하와도 하나님과 자신을 우리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죄와 저주에 찌든 상태의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우리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과의 관계는 당연하고 심지어 원수까지도 마음에 들여놓고 우리로 여깁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마음에 품어 우리가 되는 동안 하나님은 마음 바깥으로 내쳐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염려하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담의 타락은 선악과를 먹고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기 전, 사탄을 만나 미혹 당한 하와의 말을 들었습니다. 결국 아담은 하나님보다 하와를 먼저 마음에 담았던 것입니다. 하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에게 미혹 당했던 이유는 하나님과 밀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와가 하나님과 간격이 벌어진 이유 또한 아담을 먼저 마음에 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염려하셔서 따로 만드셨음에도 그러한 일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첫 번째 상대자가 당신임을 분명히 못 박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3장 12절을 보면 그 모습을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하와의 말을 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으로 호흡하지 않고 하와의 생각으로 호흡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의 밀착 상태가 끊어지자 결과적으로 타락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우리가 본문에서 생각해야 할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아담을 먼저 지으시고 아담의 갈빗대로 하와를 지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아담의 갈빗대로 하와를 지으셨다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이 필연적인 관계에 들어있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은 여자를 만드실 때 돕는 배필로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돕는 배필을 내조하는 아내의 모습으로 떠올립니다. 예를 들어 남편이 바깥에서 일을 하고 들어오면 옷을 빨아주고,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것이 돕는 배필로서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죄와 타락에 찌든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부부생활의 일반적 관습을 성경에 적용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돕는 배필’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에제르 네게드(עֵ֖זֶר כְּנֶגְדּֽוֹ)를 직역하면 에제르는 ‘도움’이고 네게드는 ‘눈앞’입니다. 다시 말해 ‘눈앞에 도움을 두다’라는 뜻입니다.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도움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여호와로서 아담과 밀착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생각하시며 이끌어 가십니다. 이러한 아담의 삶에 대해 돕는 배필은 필요치 않습니다. 아담 또한 하나님의 생각으로 호흡하고 있기에 ‘나는 이것이 부족하다. 나를 도와줄 배필이 필요하다.’라는 생각과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남자가 일을 하면 여자는 도와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기에 성경을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 안에는 아담을 위한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뜻이 실제로 일어나게 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보셨습니다. 아담에 대해 갖고 계신 하나님의 생각이 이루어지려면, 아담과 똑같이 언어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은 또 다른 인격적 존재가 있어야 했습니다. 이 관계를 통해 아담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관계는 남녀관계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순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영광의 순교 현장을 통해 스데반 집사님을 하나님 품으로 불러들이실 것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순교는 스데반 집사 혼자서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울이라는 청년을 동원하십니다. 사울이 돕는 배필의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돕는 배필이라는 표현으로부터 남녀관계를 생각하게 되는데, 히브리어 원문의 뜻을 보면 ‘눈앞에 도움을 두다’라는 뜻으로써 단순히 배필이나 조력자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와는 아담을 돕기 위해 지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아담을 통하여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생각이 이루어질 수 있게 돕는 존재입니다. 아담도 스스로 ‘내게는 이런 것이 필요하다.’라고 여겨서 하와가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돕는 배필을 단순히 아내로 이해한다면 본문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다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사울이라는 청년이 필요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울이라는 청년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다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스데반 집사님이 필요했습니다. 요셉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다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필요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아버지 야곱과 어머니 라헬이 있어야 했고, 열 명의 형들도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형들이 요셉을 팔 때 사막의 대상들이 있어야 했고, 이들에게서 요셉을 살 애굽의 보디발도 필요했습니다. 또한 보디발의 집에서 요셉에게 누명을 씌울 보디발의 아내도 필요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본문에서 말하는 하와의 위치에 서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이들이 하와의 위치에 서 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요셉을 팔아버린 형들 각자에게도 하나님의 생각이 있었습니다. 유다를 위해서는 팔려 가는 요셉이 하와의 역할을 했습니다.

이처럼 인간관계란 하나님의 생각 안에서 필연적입니다. 성경은 바로 그러한 사실을 아담과 하와의 관계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에 대해 생각하시고 그 생각대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럴 때 다른 사람과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 그 사람만을 별도로 이끌어 가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람을 만날 때 애인이라고 마음을 붙여서는 안 되고, 원수라고 마음에서 떨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에서 떨치려고 하는 것도 결국 마음에 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향하신 아버지의 생각은 이 원수를 통해서 완성되어 갈 것이다.’라고 만남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본문의 취지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에 두고 본문을 보면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아담이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들의 이름을 붙이는 장면이 삽입된 이유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과 관계할 때 눈에 보이는 사람을 마음에 담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생각을 호흡해야만 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상대방을 향한 하나님 생각의 대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짓는 모습을 통해 대리자 역할을 제대로 하는지 보셨습니다. 본격적으로 사람과의 관계가 시작되기 전에 동물들의 이름을 짓는 역할을 통해서, 아담이 하나님과 호흡을 맞추고 있는지 확인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마음이 밀착된 상태에서 관계를 시작할 수 있는가를 보시기 위하여 워밍업 하게 하신 것입니다.

아담에게는 판단이 없습니다. 그런데 판단을 못하는 아담이 어떻게 다른 동물들과 구분되는 각 동물들의 정체성을 담은 이름을 지어줄 수 있었을까요? 예를 들어 태승철이라는 이름은 곧 다른 사람과 구분되는 정체성의 표시입니다. 동물의 이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판단이 없던 아담은 어떻게 이러한 구분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일까요? 하나님이 보셨던 것은 첫 번째로 아담의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되어 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아담이 동물들을 앞에 놓고 이름을 지을 때 하나님의 생각을 호흡하여 하나님의 생각대로 이름을 짓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아담이 하나님과 호흡을 맞춰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가를 보시며 워밍업 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와를 데려다 놓으시며 본격적으로 인간관계를 시작하셨습니다. 18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을 좋지 않게 보시고 돕는 배필을 만들어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에게 동물들의 이름을 짓게 하십니다. 그리고 아담이 동물들 이름을 잘 짓는 것을 보시며, 아담의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하여 하나님의 생각을 잘 받아들여 호흡하고 있음을 확인하십니다. 그 뒤에 이제 사람과 관계하도록 하와를 만들어서 데려오십니다.

 

본문의 핵심은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관계의 본질을 보여주십니다. 아담과 하와의 만남은 사람과 사람이 맺는 첫 번째 관계입니다. 우리는 남녀관계를 결혼의 관계로 이해하며 인간관계의 본질을 망각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혼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 속에서 남녀를 만들어야 이로부터 다른 사람들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24절의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는 말씀은 남자와 여자라는 관계의 특수성을 염두에 두신 말씀입니다. 다만 본문의 핵심은 남녀관계, 부모자식관계, 형제자매관계, 친구 관계, 애인 관계, 업무 관계를 비롯한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되어야 할 원칙이란 각자가 태초의 안식을 유지하여, 하나님과 마음이 밀착된 상태에서 인간관계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지어 몸이 하나가 되는 결혼 관계에 들어서는 두 남녀일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이 하나가 되는 관계일지라도 마음은 갈라져야만 합니다. 각각 하나님과 밀착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각각 만드셨으나 두 마음이 붙는 순간에 타락이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일심동체는 피조의 세계에서 가장 꼴불견 상태입니다. 일심동체의 상태에서 인간은 죄와 타락의 나락으로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일심동체라는 말은 멋집니다.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모든 남녀가 일심동체의 상대를 찾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서운 사탄의 계교입니다. 몸이 하나 되어야 하는 관계에서조차 마음은 각각 하나님께 밀착해야 한다는 것이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점을 강조하여 가르쳐주시기 위하여 인간관계 중에서도 몸이 하나가 되는 남녀관계를 제시하셨습니다. 몸이 하나가 되어야 함에도 마음은 각각 하나님과 붙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첫 번째 절대 원칙은 하나님과의 밀착입니다. 결혼은 절대 원칙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9장 6절에서 결혼에 대해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8절에서는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남편이 아내가 맘에 안 들 때 이혼증서를 여자 손에 들려주면 이혼이 가능했습니다. 모세가 이러한 법을 허락한 이유는, 남편에게 아내에 대한 불만이 생겼는데 억지로 계속 살게 하면 아내가 박해를 견뎌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때리더라도 속수무책이었던 시대였기에, 차라리 이혼증서를 주어서 내보내 다른 남자와 재혼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혼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을 믿어서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한 상태가 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한다면 아내가 밉게 보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이혼 이야기가 나올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다시 12절에서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혼하지 않고도 살 수 있다면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 또한 고린도전서 7장 1~2절에서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6~7절을 보면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허락이요 명령은 아니니라 /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을 대하며 결혼을 절대 원칙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절대 원칙은 결혼이 아닙니다. 남녀로 만들어졌으니 결혼을 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은 틀렸습니다. 절대 원칙은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하나님과 내 마음이 밀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밀착하여 하나님의 생각을 호흡할 때,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 속에 결혼이 있다면 결혼하면 됩니다. 그러나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 속에 결혼이 없다면 결혼하지 않으면 됩니다. 절대 불변의 원칙으로써의 결혼이란, 내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하는 결혼입니다. 본문은 바로 그 이야기를 해주십니다.

 

두 번째 절대 원칙은 십자가를 붙잡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해야 하는데, 하나님과의 밀착은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남녀의 결혼은 절대 원칙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밀착하는 상태만이 성경이 말하는 절대 원칙입니다. 결혼은 수많은 인간관계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에서 믿지 않는 자와 결혼을 했다가 상대가 헤어지길 원한다면 헤어지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하나님은 나눌 수 있지 않을까요?

결혼이나 이혼하지 말라는 것은 절대 원칙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율법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절대 원칙은 하나뿐입니다. 지금 내 마음이 살아계신 하나님과 밀착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밀착이란 나와 하나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밀착되기 위해서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에 대해 죽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죽은 자이기에 결혼함에 대해서도 죽은 자이고, 결혼하지 않음에 대해서도 죽은 자입니다. 이혼함에도 죽은 자이고, 이혼하지 않음에도 죽은 자입니다. 나는 오직 하나님과 밀착해서 하나님의 생각만을 호흡하는 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십자가를 붙잡는 것이야말로 절대 원칙입니다.

 

세 번째 절대 원칙은 어우러짐입니다. 하나님과 밀착함을 절대로 고집하는 자, 그러기 위해서 주님의 십자가를 절대로 붙잡는 자는 절대로 어우러져야 합니다. 그동안 이러한 이야기를 하지 못했던 이유는, 이전에 말씀드린 대로 현재의 예배당 조직들이 진정한 교회로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12장 50절에서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생각을 호흡하는 자들이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생각을 호흡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밀착한 자들이 가족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새 예루살렘 성은,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하여 하나님의 생각을 호흡하며 사는 사람들 전체의 어우러짐입니다. 예수 믿으면 천당 가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밀착한 자들이 어우러져야 하늘의 새 예루살렘 성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진짜 가족은 하나님과 마음이 밀착하여 하나님의 생각대로 사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두세 사람이라도 어우러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절대 원칙입니다.

 

말씀드렸듯이 본문은 결혼을 절대 원칙으로 강조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관계할 첫 번째 사람으로 등장시킨 인물이 여자인 하와였기에 착각하는 것이지, 결혼은 수많은 인간관계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밀착하여 하나님의 생각을 호흡하며 하나님의 생각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혼을 해야만 한다는 법칙에 대해 죽고, 결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대해서도 죽고, 이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대해서도 죽고, 이혼할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해서도 죽어야 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원칙에 사로잡히지 말고 이 시간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하고, 하나님의 생각을 호흡하며,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갈 수 있으면 됩니다.

결혼은 별것 아닙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하는 일이 별것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십자가가 별것인 것이고,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하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하는 결혼이 별것입니다. 몸이 하나 되는 것이 대단하고 별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 37~38절에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몸으로 이루어지는 관계의 순위란 하나님과의 밀착보다 우선일 수 없습니다. 아무쪼록 본문이 힘주어 강조하는 바가 태초의 안식 상태임을 염두에 두시고, 어떤 인간관계에서도 내 마음은 하나님과의 밀착이 우선이라는 절대 원칙을 절대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결혼을 포함한 모든 인간관계에서 오직 마음이 예수님과 연합하여, 아버지와 결혼하는 이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아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반복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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