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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

녹취문: 내 인생 사전에 ‘안정’이란 없다_태승철 (창 34:1~31)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4.09.30|조회수74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내 인생 사전에 ‘안정’이란 없다>의 줄거리 :

아! 이젠 됐다! 마음이 세상 것을 열심히 추구하다가 드디어 자기 삶의 형편을 향하여 가지게 되는 이 탄성. 아! 이젠 됐다! 성공의 고지에 올랐다는 안도감. 바라는 바가 이루어졌다는 감격. 이런 감탄이 나왔다면 이제부터 기대하면 됩니다. 내 인생의 핑크빛이 어떻게 핏빛으로 변하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내 삶에 어떻게 불행의 지옥문이 열리는가를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본래 이 지구 위에서 벌어지는 인생에는 안정이란 단어가 없음을 사람들은 모릅니다.

 

내 인생 사전에 안정이란 없다

 

(창세기 34:1~31)

 

11. 세겜도 디나의 아버지와 그의 남자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로 너희에게 은혜를 입게 하라 너희가 내게 말하는 것은 내가 다 주리니

12. 이 소녀만 내게 주어 아내가 되게 하라 아무리 큰 혼수와 예물을 청할지라도 너희가 내게 말한 대로 주리라

13.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과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속여 대답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그 누이 디나를 더럽혔음이라

14. 야곱의 아들들이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는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할례 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우리 누이를 줄 수 없노니 이는 우리의 수치가 됨이니라

15. 그런즉 이같이 하면 너희에게 허락하리라 만일 너희 중 남자가 다 할례를 받고 우리 같이 되면

16. 우리 딸을 너희에게 주며 너희 딸을 우리가 데려오며 너희와 함께 거주하여 한 민족이 되려니와

17. 너희가 만일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우리는 곧 우리 딸을 데리고 가리라

 

24. 성문으로 출입하는 모든 자가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의 말을 듣고 성문으로 출입하는 그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으니라

25. 제삼일에 아직 그들이 아파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버니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몰래 그 성읍을 기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

26. 칼로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오고

27. 야곱의 여러 아들이 그 시체 있는 성읍으로 가서 노략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그들의 누이를 더럽힌 까닭이라

28. 그들이 양과 소와 나귀와 그 성읍에 있는 것과 들에 있는 것과

29. 그들의 모든 재물을 빼앗으며 그들의 자녀와 그들의 아내들을 사로잡고 집 속의 물건을 다 노략한지라

30.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31. 그들이 이르되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같이 대우함이 옳으니이까

 

 

에서와 상봉한 이후 야곱은 세겜 땅에 정착합니다. 그런데 이 곳에서 레아가 낳은 딸 디나가 세겜 성의 여자들을 보러 나갔다가 세겜 성의 추장에게 강간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가 읽은 12~17절은 이로부터 일어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세겜을 속여 할례를 받도록 요구했고, 이에 넘어간 세겜은 성내의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받게 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야곱의 아들들이 한 성읍의 남자들을 모두 죽이고 재물을 노략질하고 부녀자와 아이들을 사로잡는 엄청난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러한 본문을 중심으로 ‘내 인생 사전에 안정이란 없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여러분은 사는 동안 ‘이제는 됐다!’라는 탄성이 마음에서든 입에서든 나와본 적이 있습니까? 마음으로 이 세상 것들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이 세상 것들을 열심히 추구하다가 드디어 자기 삶의 형편을 향하여 ‘이제는 됐다!’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원하는 궤도에 올라왔고, 성공의 고지에 올랐다는 안도감의 표현이자 바라는 바가 이루어졌다는 감격의 표현입니다. 예를 들어 남편의 사업이 흑자 궤도에 들어섰습니다. 자녀가 일류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건강검진 결과가 모든 면에서 정상입니다. 은퇴 후의 연금과 생활비가 두둑하게 준비되었습니다. 그럴 때 ‘이제는 됐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감탄이 나왔다면 내 인생의 핑크빛이 어떻게 핏빛으로 변하는가 지켜보면 됩니다. 내 삶에 불행의 지옥문이 어떻게 열리는가 보면 됩니다.

나폴레옹은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끝내 자기 일신의 안정조차 이루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합니다. 이 지구 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의 삶의 사전에는 안정이란 말은 없습니다. 내 인생의 사전에는 안정이라는 단어가 없음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이 세상에 갇혀서 세상 것을 뚫어지게 보고 있고, 세상 것을 애착하며 이 세상의 형편과 조건이 안정되기를 바라는 한 안정은 없습니다. 안정된 것처럼 착시현상이 일어나는 상황은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착시현상이 일어났다면 이제부터 인생이 어떻게 불안정의 정점을 찍게 되는지 반드시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이 세상에 유일한 주인 되시는 주권자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간은 마음이 이 세상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삶의 형편과 조건을 토대로 지속적인 참 안정을 얻을 수 없습니다. 지속적인 안정이란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서 가장 멍청하고도 용서받을 수 없는 악함이란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삶의 형편과 조건이 안정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구 위에서 안정감을 향하여 살지 않는 자가 몇 명이나 있을까요? 사업을 하는 자는 사업의 안정을 바라기 마련이고, 주부는 가정의 안정을 바라기 마련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미래가 안정되기를 바라고, 누구나 건강이 안정된 상태이기를 바랍니다. 어느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마음에서 영광의 빛을 발하고 있는 세상 것들에 대해 안정감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절대로 안 되게끔 만들어져 있는 것을 그토록 강렬하게 원하는 것은 천하에 멍청한 일입니다. 이런 멍청함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야곱의 삶을 보면 이제 큰 산들을 무사히 넘었습니다. 외삼촌 라반과 분가의 과정에서 갈등과 문제가 불거졌지만 결국 무사히 해결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보다 몇 배는 더 큰 두려움을 안겨주었던 20년 원한이 쌓인 에서와의 재회 역시 하나님의 강력한 군대의 개입과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하심에 의해서 기적처럼 은혜로운 화평의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자기편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 만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이끄심 속에서 이러한 고비들을 무사히 넘겼습니다.

그런데 에서와의 기적 같은 재회 이후에 야곱의 삶의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 33장 후반부에서 소개됩니다. 야곱은 에서와 헤어진 뒤에 얍복강가에서 북쪽으로 16km 정도 떨어진 숙곳에서 일단 머뭅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야곱은 외삼촌 라반에게 20년간 봉사하다가 분가했고, 에서와의 관계는 극적으로 타결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이 마무리 된 뒤에 숙곳에서 비로소 야곱은 독립적인 자기 가문의 틀을 구축하였습니다.

야곱이 숙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자녀들이 청소년기를 거쳐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중에서 딸 디나는 결혼 이야기가 나올 때였습니다. 이처럼 숙곳에서 독립적인 가문의 틀을 구축한 야곱은 이제 가나안 경내에 있는 세겜으로 이주하여 정착하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 야곱은 땅을 샀습니다. 숙곳에서 보냈던 시기가 야곱이 독립적인 가문의 기틀을 완성한 기간이었다면, 이제 야곱은 세겜에서 핑크빛 미래를 바라보며 삶의 장소를 정합니다. 야곱이 ‘이제 됐다!’라는 생각을 할 만한 상황이 주어졌던 것입니다.

야곱의 마음은 흐뭇했습니다. 77세에 형의 위협을 피해 혈혈단신으로 도망쳤던 야곱은 20년간 외삼촌 라반에게 봉사했습니다. 그리고 에서와의 상봉을 마친 후 숙곳에서 머물렀습니다. 학자들은 숙곳에서 머문 기간이 6~7년 정도 되었으리라 추측합니다. 이 동안에 아이들은 성인이 되었고, 가축 떼는 점점 더 불어났으며, 살만한 곳을 찾다가 가나안 경내 세겜에 땅을 사서 정착하였습니다. 도망자로서 집을 떠나왔던 시절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던 대로만 계속하면 안정은 주어질 것 같았습니다. 가축은 불어날 것이고, 자녀들은 결혼할 것이고, 자손들은 늘어날 것입니다. 이처럼 야곱은 핑크빛 미래의 전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핑크빛 미래 전망이 한 순간에 핏빛으로 물들어 버리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레아의 딸 디나가 세겜 성 여자들을 보러 나갔다가 세겜 성의 추장인 세겜에게 강제로 수욕을 당합니다. 이제 야곱은 100세가 훨씬 넘은 시점이었습니다. 혈혈단신 집을 떠난 뒤에 30여 년 만에 이루게 된 삶의 안정감이 한순간에 뒤집어지고 불안감의 극단으로 치닫게 됩니다. 본문에서는 영적인 믿음의 표현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 것을 마음에 담고 하나님을 부르는 종교적 표현조차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려는 것은 무엇일까요? 본문이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서 인생이 참 기묘하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일찍이 야곱이 느꼈던 형 에서의 위협은 주관적인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에서의 분노와 복수에 의해 잃게 될 것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환도뼈가 탈골되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고집을 부렸습니다. 하나님이 한 번만 더 치신다면 죽을 상황임에도 하나님을 놓지 않고 축복을 강청했습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으로 이미 에서의 복수심을 억제하신 상태였습니다.

이때 야곱이 에서 때문에 잃을 수 있다고 여겼던 소유의 존재감의 무게가 어느 정도였을까요? 야곱에게는 아내들과 자녀들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46장을 보면 디나 이외의 다른 딸들이 있음이 언급됩니다. 또한 야곱에게는 가축 떼도 있었고 노비들도 있었습니다. 야곱은 에서에 의해 이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에서를 엄청난 위협으로 실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에 의해 잃게 될 수도 있다고 여겼던 소유 전체의 무게와 디나의 무게를 비교해 본다면 당시에는 여성의 인권이 매우 낮아 숫자에 넣지도 않았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모세가 이 사건을 기록하며 디나의 이름을 언급했지만 다른 딸들의 이름은 기록조차 되지 못했던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디나는 야곱의 소유 전체와 비교하자면 작은 존재였을 뿐입니다. 야곱은 디나라는 작은 존재를 통해서 엄청난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위협 앞에서는 소유 전체를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전체 소유의 무게감과 비교할 수 없는 디나라는 작은 존재를 통해서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야곱은 디나 때문에 자기 인생의 판도가 조금이라도 흔들릴 것이라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야곱의 인생을 좌우하기에 디나는 존재 자체가 너무 작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디나를 계기로 야곱이 집을 떠나 30년 만에 이룬 절정의 안정감의 판도가 한 번에 뒤집혀 버립니다.

이러한 과정을 보면 야곱의 집안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이 보였던 믿음을 보이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로부터 하나님이 아직 아브라함과 이삭의 신앙 수준에 미치지 못한 선민들에게서 절대로 용납하시지 않는 일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선민이 이 세상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선민이 틀림 없는 한 절대로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선민의 마음이 세상의 상황과 형편의 토대 위에서 ‘이제는 됐다!’라는 안정감이 생기는 것을 하나님은 절대로 그냥 놔두시지 않습니다.

때로는 안정적이라고 느낄 수 있는 착시현상이 일어날 수 있지만, 하나님은 본래 인간을 이 세상에서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존재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실제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안정감이란 이 세상에는 아예 없습니다. 그런데 죄와 타락에 찌든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가장 현저한 증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눈에 보이는 세상의 형편과 조건에서 마음의 안정감을 얻으려는 이상한 기질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인류 전체가 세상의 형편과 조건에서 안정감을 얻으려 하기에 이것은 마땅한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이상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왜 눈에 보이는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차원에서 안정감을 얻으려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사람을 그렇게 만드시지 않았기에 이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기에 오히려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차원에서 안정감을 얻으려 하지 않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민에게서 이러한 상황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세상 형편에 대해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을 놔두시지 않고 반드시 쪼개버리고 찢어버리고 박살 내 버리십니다. 이것이 본문이 가르쳐주는 첫 번째 내용입니다. 야곱은 안정감을 느끼기보다는 차라리 형 에서를 만났던 때처럼 두려워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이 세상을 향한 우리의 태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본래 우리의 마음은 세상을 향해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야곱과 같이 마음이 세상을 향해 있다면 안정감을 갖는 것보다 차라리 두려워하며 노심초사하는 편이 낫습니다.

 

두 번째로 본문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주관적으로 느끼기에 삶에서 발생하는 일은 아무리 크더라도 하나님의 주권이 붙잡으면 위기는 잔칫집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위기처럼 여기던 일도 너무나 사소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내 마음이 세상에서 안정된 상황을 찾기를 점점 더 가속한다면 이와는 반대의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주관적으로 사소하고 간단한 일이라고 여기는 일을 통해서 내 생애 전체를 불안과 지옥의 핏빛 속으로 던져 넣으실 수 있습니다.

이번 올림픽에서 유도 경기를 보면 체구가 작은 선수들이 있는가 하면 무제한급 선수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120kg이 넘는 선수들일지라도 상대방 선수에게 옷깃을 잡히면 통째로 넘어갑니다. 그 큰 몸이 극히 일부인 소매 깃을 잡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온 몸이 당겨지고 전체가 넘어갑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안정감을 찾으려고 세상을 깊이 바라보고 바람과 열망을 가속해 나갑니다. 그런데 도저히 큰일이 될 수 없다고 여긴 가장 사소한 일에서 내 인생의 방향을 뒤집어엎는 엄청나게 불행한 사고가 터지게 됩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세겜과 거짓 계약을 맺고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받게 합니다. 할례의 상처가 다 낫지 않아 거동할 수 없는 상태에서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 성에 들어가 모든 남자를 학살하게 됩니다. 대량 학살을 당하는 것과 대량 학살을 하는 것과 어느 것이 더 큰 문제일까요? 대량 학살을 당하는 것보다 대량 학살을 하는 것이 훨씬 더 큰 문제입니다. 야곱은 숙곳에서 독립된 가문의 틀을 갖추고 가문이 정착하여 살 곳으로 세겜을 정하고 땅을 샀습니다. 이제 정착의 기틀을 이루고 안정감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아들들 속에서 나온 잔악무도함은 도대체 어디에서 유래하였을까요? 이것이 오늘 본문이 세 번째로 던져주는 메시지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숙곳에서 청소년기를 지내며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정주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성인이 되기까지 아버지 야곱의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걱정 없이 자랐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걱정 없이 자라 성인이 된 아들들 속에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잔악무도함과 교활함이 웅크리고 있었을까요? 죄와 저주에 찌든 인간의 심성에는 공통적인 잔악함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떨 때 이러한 잔악함을 거침없이 드러낼 수 있게 되는 것일까요? 바로 세상에서 문제가 없고 모든 면에서 풍족한 안정된 상황이 지속되고 있을 때입니다. 누구나 죄와 저주에 찌든 것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안정된 조건이 지속될 때 북돋아지는 기질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활함과 잔악함과 천박함입니다. 잔악함은 인간의 생명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게 됩니다.

내 마음에서 여유로운 세상의 형편이 영광의 빛을 발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가정해 봅니다. 마음에서 안정감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재물을 가진 상황이 지속되고 있을 때 이 사람의 마음에서는 반드시 죄와 저주에 숨겨져 있던 교활함과 잔악함과 천박함이 고개를 들고 뚫고 나옵니다. 많은 정치인들이 자기도 모르게 국민들을 개돼지 취급하는 식의 말실수를 합니다. 일류대학을 나오고, 재산적으로 여유가 있고, 세상에서 높은 지위를 갖는 기간이 오래 지속되다 보면 그것이 마음에서 영광의 빛을 발하는 시간도 길어집니다. 그럴 때 죄와 저주에 찌든 것은 똑같지만 그 속에 잠재되어 있던 교활함과 잔악함과 천박함이 뚫고 나옵니다. 그 속에서는 이미 사람을 죽인 것과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이다 보니 표를 얻으려고 비굴한 가면을 쓰고 있지만 그 마음에서는 이미 사람에 대한 진심 어린 존중이 없기에 사람을 죽인 것과 다름 없습니다.

 

세상에서 안정이 이루어졌다고 느낀다면 그 환경을 누리는 동안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족들과 가까운 사람들의 인간성은 반드시 파괴됩니다. 마음에 잠재된 온갖 악한 근성들이 주저 없이 표출되는 상황이 진행되어 가고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이 세상에 갇혀 있다면 지금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연결됨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연결되려 하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상의 안정됨이란 하나님을 향해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악함 중에 가장 지독한 악함입니다.

세상에서 안정되기를 바라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세상의 형편이 안정되더라도 그것에서 안정감을 찾으면 안 됩니다. 차라리 안정된 형편이 실제로 이루어졌더라도 에서의 위협 앞에서 두려워하던 야곱의 모습을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안정적으로 보이는 형편에 절대로 파묻혀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도저히 안정적일 수 없고, 안정감이라고는 가질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의 안정은 오직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마주하는 상태에서만 주어질 수 있고,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소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바로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첫째,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신앙에 미치지 못한 선민에게서는 세상 형편에서 안정감을 찾는 상황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둘째, 이 세상 일은 내가 아무리 굉장하다고 주관적으로 느끼더라도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또 너무나 사소해서 한 번도 문제의식을 느껴보지 않은 것도 내 인생을 뒤집을 수 있는 엄청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셋째, 안정적인 상황이 지속되면 죄와 저주에 찌든 인간의 본성 속에 잠재된 잔악함과 교활함과 천박함이 주저 없이 표출됩니다.

안정된 상황이 지속되는 가운데 더한 안정을 찾는 것은 용암이 부글부글 끓는 분출구에 비닐을 씌우고 안전하다고 믿고 싶어 하는 것과 같습니다. 야곱은 숙곳에서 틀을 잡고 세겜에서 정주하며 안정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 안정감을 느끼는 비닐 안에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용암 같은 자녀들의 잔악함과 교활함과 천박함이 들어있습니다. 야곱은 에서의 복수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서의 복수심에 가득 찬 마음을 풀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정작 야곱의 아들들은 디나의 복수를 스스로 해냅니다. 이로부터 주변의 다른 족속들은 야곱 집안의 사람들이 잔악하고 무도한 자들이라 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세겜 성의 사람들이 좋은 자들이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세겜이 디나를 욕보인 것은 사실입니다. 23절을 보면 “그러면 그들의 가축과 재산과 그들의 모든 짐승이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겠느냐 다만 그들의 말대로 하자 그러면 그들이 우리와 함께 거주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세겜이 이렇게 말한 것은 주민들을 설득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디나가 세겜에게 수욕을 당한 사건은 고통스러울 수 있었지만, 아브라함과 이삭이었다면 먼저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을 것입니다. 그리고 영광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지혜를 따라 움직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집안에서는 아무도 그러한 믿음의 본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이 사건에 대해 30절에서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라고 말합니다. 악취를 풍겼다는 것은 제거해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게 했다는 것입니다. 형 에서의 위협은 야곱 혼자만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아들들의 행위로 인해 이제 이들을 둘러싼 모든 종족이 야곱의 가문을 제거해야 할 오물로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31절을 보면 야곱의 아들들은 “그들이 이르되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같이 대우함이 옳으니이까”라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 야곱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만약 아브라함과 이삭이 이런 경우를 맞이했더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없었습니다. 자기도 이렇게 복수를 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이런 복수를 통해서 핑크빛 미래가 뒤집히고 피바람이 불게 되었습니다. 이제 정주할 땅조차도 얻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앞서 야곱은 제단을 쌓고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의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야곱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존재감이 싹트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을 보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야곱에게 계속해서 관여하셨고 야곱은 알게 모르게 하나님과 정이 붙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정이 붙은 야곱이 세상에서 안정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하나님께서는 그 안정감을 박살 내십니다.

여러분은 본문에 담겨있는 이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악취미를 갖고 계셔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안정감과 평안함을 땅에서 찾으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아무리 지구의 80억 인구가 다 그렇게 살더라도 주님의 십자가가 나를 위한 죽음으로 믿어져서 생활화하기로 결단한 선민이라면 절대로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상황이 안정적일수록 에서의 위협을 느낄 때의 야곱처럼 더 큰 두려움으로 대해야 됩니다.

천만 인이 봐서 모두가 안정적이라고 느끼는 상황일지라도 안정감을 느껴서는 안 됩니다. 차라리 에서의 위협 앞에서 야곱이 가졌던 두려움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십자가 붙잡고 예수님과 연합하여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가서 하나님을 마주함으로써만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고 싸워야 합니다. 이 싸움이 없으면 안정감을 찾으려는 나와 하나님이 싸우게 됩니다. 안정적으로 느껴지는 상황과 하나님이 싸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무나 안정적이라고 느끼는 상황에서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일을 끌어올리셔서 내 인생 판을 불안의 극점으로 엎어버리실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 사랑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에게서만 안정감을 느껴야 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죄와 저주에 찌들어 눈에 보이는 세상 형편에서 안정감을 찾으려 하는 우리가 오늘도 십자가에서 백번 천번 죽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백번 천번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마주함으로써 마음에 평안을 경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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