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이스라엘 단계’ 선민에게 주시는 복>의 줄거리 :
하나님은 특별히 선민에게 복 주시기 전문가이십니다. 그러나 선민의 영적인 성숙 단계에 따라서 주시는 복이 달라집니다. 먼저 아브라함처럼 온전한 장자의 단계에서 주시는 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 온전한 장자의 위치에 서지 못한 선민에게 주시는 복은 두 가지입니다. 야곱 단계에서 주시는 복과 이스라엘의 단계에서 주시는 복이 있습니다. 이렇게 두 단계로 나뉘는 이유는 선민들의 이 세상 것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애착에서 하나님 사랑으로 바뀌기까지 필요한 단계입니다.
‘이스라엘 단계’ 선민에게 주시는 복
(창세기 35:1~29)
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2.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4.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5.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6. 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7.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8.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에 있는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9.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10.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11.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12.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13.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
14. 야곱이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 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5.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
16절 이하에는 야곱이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가 죽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라헬의 시신을 베들레헴 길에 장사합니다. 마지막으로 베냐민이 태어나면서 야곱의 열두 아들들이 소개됩니다.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이 소개되는 중에 첫째 아들 르우벤이 라헬의 몸종이자 단과 납달리의 어머니인 빌하를 범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후 야곱의 아버지 이삭이 백팔십 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 야곱이 벧엘로 가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해서 아버지 이삭의 죽음까지 이어지는 35장 전체가 뜻하는 바를 ‘이스라엘 단계 선민에게 주시는 복’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선민에게는 영적 단계가 있습니다. 그 단계에 따라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다릅니다. 하나님은 선민에게 복 주시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계시는 분입니다. 복 주시기의 전문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려는 복을 선민이 소화할 수 없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선민의 소화력을 고려하셔서 복을 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선민의 영적 단계는 크게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아브라함처럼 온전한 장자의 단계입니다. 장자의 자리에 머무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의 몸을 입어야만 가능합니다. 이것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에는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오실 예수님의 몸을 입고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을 마주하는 장자의 자리에 설 수 있고, 신약에는 오신 예수님의 몸을 십자가에서 갈아입어야만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마주하는 장자의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이 장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리고 아직 몸이 살아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 진행되는 삶은 하늘에서 이루신 뜻들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복이 범사에 임하게 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처럼 장자의 자리에 선 선민들이 받는 복입니다.
한편 장자의 자리에 서지 못한 선민은 어떨까요? 두 번째는 야곱 단계이고 세 번째는 이스라엘 단계입니다. 그중 야곱 단계는 선민이 자기 인격의 능력을 동원하고 자기 인격의 교활함으로 이 세상 것을 추구합니다. 다시 말해 세상 것이 좋다고 믿으며 세상 것을 추구하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할 여지가 없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복의 최대치는 하나님이 이 세상 것을 얻고 싶어 하는 자기 편이 되어주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 단계에서는 이 이상의 복을 주실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죄와 저주에 찌들어서 이 세상 것만을 좋아하는 야곱 단계의 선민과 관계를 해나가시고자 합니다. 관계를 하려면 어쨌든 하나님을 붙잡아야 됩니다. 그러나 야곱 단계의 선민은 세상 것 말고는 좋은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러한 야곱 단계의 선민과 관계를 시작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내 편이다.’라는 생각을 갖게 하십니다. 세상 것을 얻기 위한 경쟁에서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주신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면 하나님을 붙잡을 이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야곱 단계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실 수 있는 복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완전히 종교입니다. 종교는 타락한 인간이 영적 세계와 관계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종교적 단계에서 하나님이 자기 편이라고 생각하도록 허락하십니다. 이것이 야곱 단계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실 수 있는 복의 최대치입니다. 야곱 단계의 선민들이 끝없이 세상 것을 추구하는 동안 하나님과 밀고 당기기가 진행됩니다. 하나님은 선민에게 빼앗고 주심을 반복하시면서 하나님과 정이 들게 만드십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 세상 것을 얻게 되거나 이 세상 것을 추구하다 보면 아무리 하나님이 당신 자신이 복이라고 말씀하셔도 그것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복 개념이 완전히 제거되고 뿌리쳐지는 정점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단계입니다. ‘하나님은 내 편이다. 그러니 이 세상 것을 추구하고 가지려는 내 마음에 하나님이 전적으로 공감하셔야 한다.’라고 하나님께 강요하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을 강요하면서도 하나님이 주시려는 진짜 복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을 갖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내 편 정도가 아니라 내가 주인 된 입장에서 하나님을 강압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단계는 더 이상 불가능할 정도로 세상 것을 최고조로 좋아하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이긴 것이고, 하나님이 주시려는 하나님 자신을 완전히 뿌리치는 단계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단계가 되면 세상 것을 추구하되 하나님을 강압해서 추구하고 내가 완전히 주인이 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 단계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존댓말을 쓰지만 실은 세상을 너무나 좋아해서 세상 것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을 마치 하인처럼 부리고자 하는 상태입니다. 종과 주인의 관계입니다. 종은 주인의 생각에 항상 지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 하나님이 선민에게 복을 주시는 방법은 선민이 이 세상에서 마음 붙이고 있는 것들을 서서히 하나씩 제거해 나가십니다. 하나님조차도 하인처럼 강압하여 자기의 뜻을 관철하는 이스라엘의 단계에서 결국 그렇게 좋아하는 이 세상에서 마음 붙일 곳이 하나도 없는 단계까지 제거해 가십니다.
내가 마음 붙인 대상은 나 때문에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변을 당하든 사고를 당하든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이 포기하실 수 없는 선민인 한 그렇습니다. 내가 세상에 대해 갖고 있는 좋아하는 것들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하인처럼 강압해서라도 자기 의지를 관철하는 이스라엘 단계에서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복이란 마음을 붙이고 있던 세상 것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선민의 마음에서 세상 것을 제거하시는 과정에 필요하다면 물리적으로 환경적으로 그 대상을 제거하시기도 하십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단계에서 하나님이 야곱의 마음에서 어떻게 세상 것들을 제거해 나가시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세겜에서 야곱의 집안은 피바람의 폭풍 속으로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환도뼈가 탈골되면서까지 하나님을 강압해서 이기고 복을 받아냈습니다. 이러한 야곱은 자기 기도로 소유를 지켜냈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세겜에 이르러 디나가 강간을 당하는 사건이 있었지만, 야곱의 소유는 아직 하나도 없어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디나의 사건을 계기로 야곱은 심각하고도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간 시점으로 30년을 넘는 세월을 오직 세상 것을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자기 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고향에 돌아오며 형 에서의 위협에 의해 20년간 모은 소유가 다 없어질 위협을 느낍니다. 이때 야곱은 하나님을 강압하고 이김으로써 소유를 지켜냈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숙곳에서 7~8년 세월이 지나는 동안 독립 된 가문으로써의 기틀을 잡고 세겜 땅으로 이주한 뒤에는 땅을 사서 안정적 토대를 구축합니다. 형을 피해 도망치던 때부터 30년 만에 얻은 삶의 최전성기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는 사건이 터집니다. 야곱의 전체 소유에 비하자면 디나는 너무나 작아서 문제가 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사람을 셀 때 여자는 세지도 않았던 시절입니다. 그런데 그 사소하게 여긴 디나라는 영역에서 변수가 발생합니다. 이로부터 야곱은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세겜이 디나를 강간한 것은 분명한 잘못이었습니다. 세겜은 뉘우치는 모습을 보였고 야곱은 어쩔 수 없어서라도 디나를 세겜에게 보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아들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이들은 잔악함으로 세겜 성읍의 남자 전부를 죽이는 피바람을 불러일으켰지만, 여전히 야곱의 소유에는 피해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야곱이 세겜을 떠나 벧엘로 이주하는 동안에 하나님이 주변 사람들을 억누르셔서 야곱은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마음에는 안정감이 깨지고 평안이 사라지게 됩니다.
형과 함께 아버지 이삭의 집에서 살았던 때에도 이 세상 것을 그렇게 좋아해서 추구했고 드디어 형에게 쫓겨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던 시점을 기준으로 30년이 지난 지금 완벽하게 세상 것이 이루어져 있고 아직도 세상 것은 그대로 보전되고 있습니다. 디나의 사건이라는 문제가 있었지만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소유는 여전히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아들들로 인해 피바람이 불었고 마음에서 평안이 사라집니다. 이것은 우리가 느끼기에는 너무나 당연한 심리적 변화일 수 있지만 야곱으로서는 처음 겪는 변화였습니다. ‘세상 것들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는데 어째서 내 마음에는 안정감과 평안이 깨졌는가?’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야곱의 세상에 대한 극강의 애착은 하나님을 종으로 동원하고 하나님을 이길 만큼 강했습니다. 그런데 세겜에서의 경험을 통해 야곱의 마음에 작은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모든 소유가 아직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마음에 안정감이 없고 평안이 없고 행복할 수 없다면 ‘정말로 세상 것이 대단한 것인가?’라는 의심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직 세상에 대한 사랑을 완전히 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야곱의 마음속의 안정감과 평안과 행복감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토록 꿈꾸며 추구해 왔던 하나님을 강압하면서까지 지켜냈던 세상의 소유가 버젓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행복이 유지될 수 없다면, 세상 것의 좋음이 어느 정도 효용성을 갖고 있는가에 대해 의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시점에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벧엘은 야곱이 꿈에서 보았던 하늘과 땅이 사닥다리를 통해 이어진 곳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집이라고 이름한 벧엘은 하늘로 올라가는 길이 시작되는 고속도로의 입구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곳으로 올라가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환기하시며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에게 약속하셨던 그 복을 다시 확인해 주신 후에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번 야곱에게 ‘너는 나를 하인처럼 강압하며 너의 주장을 관철했다. 그런데 그렇게 지켜냈던 이 세상 것들이 네 마음의 평안과 행복과 안정을 지켜주지 못한다면 한 번쯤 생각해 보아라. 네가 사닥다리를 보았던 그 벧엘에서 내가 또 하늘로 올라가니, 네 마음이 나를 따라 하늘로 올라와야 함을 생각해 보아라.’라는 힌트를 주시기 위해 벧엘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큰 변화는 있었습니다.
벧엘로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야곱이 먼저 했던 일은 집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방 신상들을 버리라고 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정결하게 하고 의복을 갈아입을 것을 명합니다. 이것은 야곱의 마음에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전까지 야곱과 하나님의 관계는 종과 하인 같았습니다. 야곱이 마음에서 영광의 세상 것들을 바라보며 소원을 갖습니다. 그 소원을 따라 하나님을 부릅니다. 얍복강가에서는 하나님을 하인의 위치까지 강압하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관철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야곱과 하나님의 관계는 세상을 관계하는 중에 발생하는 필요를 따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언제나 야곱이 먼저 좋아했던 세상과의 관계에 종속되어 있었고, 하나님은 하인의 위치에서 세상에 대한 야곱의 요구를 들어주셔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는 야곱을 거부하신다면 야곱을 죽이셔야만 했습니다. 그렇다면 관계 자체가 이어져 나갈 수 없었기에 야곱에게 져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겜의 피바람을 경험한 야곱의 마음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평생을 추구해 온 세상 것들을 다 이루었는데도 내 마음에 행복과 평안이 없다면 세상 것이 정말로 좋은 것인가?’라는 의심과 더불어, 처음으로 하나님을 독자적이고 독립적인 대상으로 관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관계해야 하고 어떤 태도와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을 세상에 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필요를 들어주는 하인처럼 관계했습니다. 이제는 세상과 관계 없이 처음으로 하나님을 독자적인 대상으로 관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먼저 내가 다스리는 집안에 속한 사람들 중에는 절대로 다른 우상이나 신을 섬기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기가 막히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정결이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정결이란 마음의 영광의 자리와 관련이 있습니다. 존재감을 느끼는 일등 대상을 모시는 곳, 좋음이라 확신하는 일등 대상을 모시는 곳이 마음의 영광의 자리입니다. 아브라함은 마음의 영광의 자리에 하나님을 모셨습니다. 반면 야곱은 이제까지 이 세상 것들을 마음의 영광의 자리에 모시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더러워진 것입니다.
물론 야곱은 아직 정결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할 차원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과 관계하려면 정결해야 되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몸을 씻고 의복을 갈아입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야곱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궁극적인 의미를 깨닫지 못했지만 이러한 변화가 중요한 이유는 정결이라는 개념을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장자의 자리에 서서 하나님을 마주 보고 관계하며 하나님을 내 몫이자 기업이자 복으로 가지려면 마음이 정결해야 합니다. 이는 곧 마음의 영광의 자리에 이 세상 것은 무엇도 담겨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제까지 야곱은 이 세상 것들을 마음 놓고 담았고, 그렇게 더러워진 마음 상태로 하나님을 하인처럼 부리며 자기가 세상에서 얻고 싶고 지키고 싶은 것들을 강압하며 이스라엘이라는 이름까지 도달했습니다. 그랬던 야곱이 하나님을 독립적으로 관계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정결이라는 개념을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상대하는 자는 깨끗해야 한다고 여긴 것입니다.
야곱이 생각한 깨끗함이란 아직도 피상적인 수준이었습니다. 육체의 깨끗함 정도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의복을 갈아입으라고 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우리 마음은 육체를 벗고 예수님의 몸을 입어야 장자의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야곱은 의복을 갈아입는다는 개념의 궁극적인 단계까지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처음으로 하나님을 독자적인 대상으로 상대해야 한다는 생각은 할 수 있었고, 의복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의복을 갈아입는다는 것은 신분 의식이 바뀌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저는 한 여자의 남편이고 한 아이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에서 이런 저런 일을 하던 의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하나님과 관계할 수는 없습니다. 거꾸로 하나님과 제일 먼저 관계하면서 하나님의 장자라는 신분 의식을 가지고 아내와 아들에게 보내져서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관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의 배우자로서, 누구의 아버지로서, 누구의 형제자매로서, 누구의 직장동료로서 하나님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옷을 갈아입어야만 합니다. 모든 옷을 다 벗고 오직 하나님 앞에 서는 장자의 신분 의식을 가지고서만 이 세상으로 보내져서 살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예수님을 옷 입고 장자의 신분 됨을 주장할 수 있어야 됩니다. ‘육체를 입은 나는 내가 아니다.’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전부 육체를 입은 나의 모습을 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속으로 다르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들은 지금 성령님의 장갑을 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 아버지를 마주하고 있는 자다. 당신들이 보는 육체는 진정한 내가 아니다.’라고 주장해야 합니다.
야곱은 아직 이 궁극적인 단계까지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독자적으로 관계해야 될 상대로 파악했습니다. 그러면서 야곱은 세 가지 개념을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다른 신을 섬기지 말 것이고, 영광의 자리에 다른 대상의 존재감이나 좋음에 몰입하지 말 것이며, 그럼으로써 다른 것을 영광의 자리에 둠으로 불결해진 인격이 십자가의 보혈로 씻겨 죽음을 통과하면서 깨끗하고 정결하게 되어야 하며,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나님의 장자의 신분을 먼저 확보한 다음에 이 세상에 보내져서 관계할 것이라는 개념을 뚜렷하게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념들의 궁극적인 의미 파악에는 도달하지 못했을지라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반드시 세 가지 개념을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은 야곱에게 복을 주십니다. 이스라엘 단계에서 받는 복이란 선민이 이 세상에 마음을 붙이고 있는 대상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세상 것에 마음을 붙였습니다. 세상 것을 통해 마음에 평안이 주어질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겜의 피바람을 경험하면서 세상 것은 자기에게 주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평안이 깨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이로부터 야곱은 세상이 과연 마음 붙일 곳인가를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그 틈을 타서 하나님과 독자적인 관계를 이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세상과 관계 없이 하나님과 상대하는 관계를 이루려면 다른 신과 우상을 제거하고, 정결해야 하며, 의복을 갈아입듯이 신분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개념이 들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단계의 복이란 세겜의 피바람을 통해서 이 세상 소유가 마음 붙일 곳이 못 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한편 본문을 보면 특이한 부분이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먼저 야곱의 어머니인 리브가의 유모였던 드보라의 죽음이 언급됩니다. 어머니의 유모이니 나이가 굉장히 많았을 것입니다. 리브가는 이미 돌아가신 시점이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야곱이 어머니를 모시던 마음으로 어머니의 유모를 모셨기에 드보라의 죽음이 언급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야곱이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 라헬이 죽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이삭이 죽습니다. 본문에서는 이처럼 죽음이 계속됩니다.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렇기에 어머니 사후에 어머니의 유모였던 드보라를 잘 모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드보라도 죽고 어머니를 두 번 잃은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마음 붙일 곳이 또 하나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라헬이 베들레헴 길가에서 베냐민을 낳다가 죽고 맙니다. 또 마음 붙일 곳이 떨어져 나갑니다. 그리고 아버지 이삭이 죽습니다. 또 마음 붙일 곳이 떨어져 나갑니다. 얍복강가에서 목숨 걸고 지켰던 세상의 모든 소유가 야곱을 배반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로부터 야곱은 세상 소유가 마음의 평안을 지켜줄 수 없음을 더욱 깨닫기 시작합니다. 세상에 마음을 두어도 되는가를 의심하게 됩니다.
어머니를 대신했던 드보라가 죽고, 최고로 사랑했던 라헬이 죽고, 아버지가 죽었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중에 열두 아들 중에 첫째 아들 르우벤이 자신의 첩 빌하를 범했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야곱은 가만히 있습니다. 야곱은 아들들에게도 마음을 붙일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야곱은 세상의 소유가 풍족합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있습니다. 열두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모든 노비와 가축 떼가 그대로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점점 더 외로워지기 시작합니다. 지금은 형을 피해 도망갈 때 루스 들판에서 외로웠던 때와는 너무나 다릅니다.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음 붙일 곳은 점점 더 줄어듭니다.
하나님을 강압하고 하나님을 이김으로써 세상 것을 추구하는 이스라엘 단계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게 좋아하는 세상이 나를 배반하는 것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좋아하는 세상 중에 마음 붙일 곳들을 하나씩 하나씩 제거해 가십니다. 벧엘에서 봤던 그 사닥다리가 마음 붙일 곳을 위하여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며, 그 유일한 통로를 통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만나야만 마음 붙일 곳이 정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이 이스라엘 단계에 내리시는 복이란 세상에서 마음 붙이는 것들을 제거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야곱 단계에서 하나님께 복을 받고 계십니까? 이스라엘 단계에서 하나님께 복을 받고 계십니까? 아브라함처럼 장자의 자리를 유지하는 단계에서 복을 받고 계십니까? 아무쪼록 이스라엘이 된 야곱의 이야기가 나의 영적 위치를 진단해 낼 수 있는 청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마음 붙일 곳을 스스로 제거함으로써 하루빨리 아브라함처럼 장자의 위치에 서서 누릴 수 있는 복을 마음껏 내 것으로 삼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야곱을 통하여 나를 진단하게 하시고, 내가 장자의 단계에서 받을 수 있는 복들이 유보되고 있고 낭비되고 있음을 깨닫게 하셔서 오늘도 예수님 십자가를 붙잡음에 박차를 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세상에 혹시 마음 붙일 대상들이 있다면 다 십자가로 잘라내게 하시고, 한순간이라도 빨리 장자의 위치에 설 수 있도록 우리를 강제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