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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선민이기에 주어지는 삶의 핸디캡>의 줄거리 :
이스라엘과 에돔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인도하심이 비교 됩니다. 복 주시기 전문가이신 하나님이 복 주시려고 선택하신 선민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고자 하시는 복은 하늘에 계시는 당신 자신입니다. 선민들 각자의 마음이 땅을 떠나 하늘로 가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비선민의 역사에 비해서 빛이 바랜 열등한 모습이 되게 하십니다. 선민의 역사는 처음부터 핸디캡을 안고 시작합니다.
선민이기에 주어지는 삶의 핸디캡
(창세기 36:1~43)
1. 에서 곧 에돔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2. 에서가 가나안 여인 중 헷 족속 엘론의 딸 아다와 히위 족속 시브온의 딸인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를 자기 아내로 맞이하고
3. 또 이스마엘의 딸 느바욧의 누이 바스맛을 맞이하였더니
4. 아다는 엘리바스를 에서에게 낳았고 바스맛은 르우엘을 낳았고
5. 오홀리바마는 여우스와 얄람과 고라를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들들이요 가나안 땅에서 그에게 태어난 자들이더라
6.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의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모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
7.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이 거주하는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
8. 이에 에서 곧 에돔이 세일 산에 거주하니라
31.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는 왕이 있기 전에 에돔 땅을 다스리던 왕들은 이러하니라
우리가 읽지 않은 9~19절까지는 에서가 이주한 세일 산에서 낳은 자손들이 언급됩니다. 그리고 20~30절까지는 에서가 세일 산으로 이주하기 전에 그곳의 원주민으로 살고 있던 호리 족속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일곱 명의 족장의 이름과 그들의 자녀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리고 31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는 왕이 있기 전에 에돔 땅을 다스리던 왕들은 이러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뜬금없이 에서의 족보가 언급된 본문에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가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시는 핵심 구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의 형 에서가 에돔 국가와 민족을 이루면서 왕이 된 자들이 나옵니다. 이는 에서가 세일 산으로 이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왕정국가 체제를 완비하였음을 뜻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여덟 명의 왕과 여러 족장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본문을 중심으로 ‘선민이기에 주어지는 삶의 핸디캡’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신 선민이 아니라면 겪지 않아도 되는 삶의 핸디캡이 있습니다. 국가나 민족 혹은 단체나 개인을 막론하고 모든 인류의 역사는 발전과 번영을 향한 추구입니다. 지금 지구 위에 사는 타락한 인류가 추구하는 삶이란 발전과 번영을 이루기 위한 몸짓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특징적인 발전과 번영을 위한 여정에서 선민은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선택받았기 때문에 핸디캡을 갖게 됩니다. 쉽게 말해 불이익을 안고 살아갑니다. 선민이 아닌 사람들은 이런 핸디캡에서 자유롭습니다. 본문은 그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라와 민족과 개인의 역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주권은 선민이 아닌 사람에게도 임합니다. 그런데 선민이 아닌 사람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역사의 이끄심과 선민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역사의 이끄심은 그 주권의 내용이 너무나 다릅니다. 인간은 모두가 타락했습니다. 이러한 인간은 누구나 이 세상에 있는 좋은 것을 복이라고 여기고 그 복을 찾아 인생의 내용을 채우려고 합니다. 이것을 발전과 번영이라고 부릅니다. 누가 이 세상 것들을 많이 갖느냐가 발전과 번영을 결정짓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발전과 번영의 실제 내용인 복을 하늘에서 찾도록 선민을 이끄십니다. 다만 문제는 이 세상 것을 복이라고 여기며 좋아하는 기질의 강도를 보면 선민이 선민이 아닌 사람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선민의 마음 또한 철저하게 세상 친화적으로 경도되어 있고 중독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선민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진짜 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가지게 하시고 하나님 누리기를 바라십니다. 이를 위해 선민의 삶의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선민이 아닌 사람들과 똑같이 세상을 좋아하는 기질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하늘의 하나님을 최고의 복으로 여길 수 있는 기질로 바꾸시고자 하십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민은 발전과 번영을 추구하는 경쟁에서 극복할 수 없는 핸디캡을 갖고 삶을 출발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선민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이 세상의 발전과 번영의 경쟁에서 앞서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것이 완전한 착각임을 가르쳐줍니다.
사실 야곱도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복을 많이 가짐으로써 누구보다도 앞서 발전하고 번영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라고 생각하는 야곱 단계를 지나, 내가 세상을 향해 갖고 있는 소원으로 하나님을 강압해서라도 원하는 것을 이루려는 이스라엘 단계를 지나고 있습니다. 야곱이 이러한 모습을 보인 이유는 발전과 번영이라는 경쟁에서 이기고자 함이었습니다. 성경은 야곱이 열두 아들을 낳고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시작하려고 하는 시점에서 갑자기 에서의 족보를 끼워 넣으심으로써 비교하게 하십니다. 본문은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세상을 좋아하는 기질을 갖고 있는 선민과 선민이 아닌 사람들을 어떻게 인도하시고 어떤 마음으로 대하시는가를 알게 해주십니다. 이러한 본문을 살펴보며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과 어떻게 관계해야 하는가를 에서의 족보를 통해서 보여주십니다.
본문의 핵심 구절인 31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는 왕이 있기 전에 에돔 땅을 다스리던 왕들은 이러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을 통해 본문이 에서의 족보를 자세히 다루는 목적이 드러납니다. 풀어서 보면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는 왕이 있는 왕정 체제를 구축하기 전에, 에돔 땅을 다스리던 에서의 후예들은 수백 년 앞서 왕정 체제의 국가를 수립하며 살았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에서의 후손이자 왕들의 계보는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과 광야 사십 년 생활과 가나안 정복을 하려고 하는 시기까지입니다.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가 살아있을 당시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이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민족으로 번성해 가는 과정을 그리기 전에, 에서의 번성과 에서의 계보에서 나오는 왕들을 먼저 보여주시는데 그 기간이 BC. 1900~1400년까지 500년 정도입니다. BC. 1450년경에 출애굽 사건이 일어났고, 모세가 BC. 1410년경에 죽었으며 이후에 가나안 정복 전쟁이 있습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자면 본문은 500년 가까운 세월의 기록을 미리 비교하게 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에돔 왕국에 에서의 후예 중 왕들이 태어났고 족장들도 있었습니다. 중앙에 왕이 있고 지방을 다스리는 족장들이 있는 왕정 체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에돔에 비해 이스라엘은 아직 체제가 없었습니다. 모세가 기록했기에 그 뒤에 이스라엘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으로 내려간 뒤에 430년간 노예 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나온 후에는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배회합니다. 500여 년간 이스라엘은 국가의 정비를 완비하여 왕정 체제를 구축하기는커녕 가나안을 정복한 이후 사사시대를 맞이한 후에도 왕이 없는 기간은 480여 년이 더 이어집니다. 이스라엘은 BC. 1050년에 가서야 비로소 왕정국가를 세우게 됩니다. 발전과 번영의 단계가 선민이 아닌 에서보다 1000년 가까이 늦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내용을 통해 하나님이 세상에서 선민을 어떻게 다루시는가를 보여주십니다. 특별히 우리가 주의해서 기억할 대목은 에서 족보에서 나타난 왕정 체제의 발전상과 앞으로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발전하게 될 야곱의 후손들과 비교하면서 열등하게 뒤처진 이스라엘의 역사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를 기억해 내라는 것입니다.
이에 더해 본문은 세일 산에 살던 원주민이었던 호리 족속까지도 언급합니다. 호리 족속에는 일곱 족장이 있었고 이십 명 남짓한 후예들도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원주민이었던 호리 족속도 체제를 갖추고 살았음을 보여줍니다. 에서의 후손들은 이들을 흡수 통합하여 에돔이라는 왕정국가로 발전시켜 갑니다. 이는 곧 에서의 후손들이 다른 족속들을 흡수 통합할 정도로 강력했고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측면에서 선진국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보면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선민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로 이어지는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복을 주신다는 측면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실질적으로 얼마나 효용성을 갖고 있는 것일까요? 이 약속에만 의존해서 따져보자면 과연 선민이 될 필요가 있는가에 대한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반복하여 자손의 번성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아브라함과 롯이 헤어지던 때를 떠올려 봅니다. 롯은 소돔이 망하고 근친상간을 하는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만 결과적으로 모압과 암몬 족속이라는 민족을 이루며 번성하게 됩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선민 이삭과 이스마엘로 나누어집니다만 이스마엘은 아랍 족속으로 번성하게 됩니다. 이삭의 자손도 선민 야곱과 에서로 나누어집니다. 그리고 에서는 본문에 기록되었듯이 에돔 족속으로 번성하여 천년을 왕정 체제 국가를 이루며 발전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기에 선민은 어떤 발전을 이루었을까요? 하나님을 자기편이라고 생각하는 야곱의 단계와 세상을 향한 내 소원을 강요하여 축복을 받아내는 이스라엘의 단계를 살펴보았습니다. 롯과 이스마엘과 에서는 이러한 단계 없이도 야곱을 앞서는 발전과 번영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선민의 계보에서 생색을 내시듯이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번성할 것이고 그 자손 중에 왕들이 날 것이라는 약속을 반복하셨던 것일까요? 어차피 롯과 이스마엘과 에서에게 뒤처질 것이라면 왜 이런 약속을 하셨는지 의아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선민의 특별함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 31절은 바로 선민의 특별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왕이 없었는데 에서는 벌써 500년 동안 왕정 체제를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이스라엘은 모세가 죽고 500여 년이 더 지나고서 왕정 체제를 이룹니다. 1000년의 간격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과 에돔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인도하심의 목표가 다르다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세상에 중독된 기질을 갖고 있던 것은 이스라엘이나 에돔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만 이스라엘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목표는 이스라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유일한 복으로 인정하고 가지고 누리고 즐길 수 있게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삶에 역사하시고 인도해 가십니다. 선민의 이 세상에서의 삶이란 선택받았기 때문에 핸디캡을 안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핸디캡이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을 복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져지는 세상의 복들을 많이 가지려는 발전과 번영의 경주에서 도저히 선민이 아닌 사람들을 따라갈 조건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선민의 역사는 이러한 핸디캡을 갖고 이끌려집니다. 본문은 선민이 아닌 사람들의 번영과 발전을 언급하시며 ‘너희는 선민으로서 세상과 하늘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지 결정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발전과 번영 혹은 세상 사람들이 환호할 수 있는 인기와 성공 같은 것들은 선택받았다는 핸디캡,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을 복으로 여겨야 한다는 핸디캡으로 인해서 불가능해집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고, 이 세상의 기준을 따른 발전과 번영과 성공은 아예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생활화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마음에서는 이 세상 것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면면히 흐르고 있습니다. 본문은 선민이라면 마음에서 이러한 뿌리를 뽑아야 함을 가르쳐주십니다. 내가 그런 존재임을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이 지구에는 세계 4대 문명 발상지가 있습니다. 황하 문명, 인더스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에 더하자면 그리스 문명,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 문명, 마야 문명 등도 보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문명의 발상지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선민의 역사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오히려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그 하나님을 지켜내는 것을 복으로 여긴 아브라함은 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정착하는 대신에 나그네의 여정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 나그네의 여정은 이삭과 야곱을 지나서 430년 동안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을 하면서 정착하지 못하는 이스라엘 전체에까지 미치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과 세상에서 발전과 번영을 추구하는 삶의 결이 다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부터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배에서 같은 날 태어난 야곱과 에서의 후손들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역력합니다. 본문은 이 차이를 알고 하나님을 대하는 자세를 근본적으로 바로 정립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쉽게 말해 ‘언제까지 이 세상에 대해 양발을 걸치고 미련을 두고 있겠느냐?’라고 묻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내 역사를 이끄시는 주권적 의도와는 이 세상에서 발전과 번영을 이루려는 마음 자체가 용납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에서의 역사에 비해 처참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430년 노예로 살 동안에 에서는 왕정국가를 세우고 호리 족속을 흡수 통합하는 역량을 드러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복 이후에도 무려 480년 동안 사사시대를 지내며 사울 왕이 나타나기 전까지 또 500년 가까운 세월을 오합지졸로 살게 됩니다. 이러한 역사를 내다보고 비교하며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정하라는 것입니다. 세계사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스라엘처럼 처참한 민족의 역사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끈질기게 이어지는 역사도 없습니다.
이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역사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인간에게 주어질 수 있는 가장 처참한 조건과 자리와 위치입니다. 십자가는 종교적 낭만의 사건이 아닙니다. ‘십자가, 십자가’ 노래 한 번으로 정리될 사건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죄 사함을 받았다는 교리적인 고백으로 끝날 사건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처참함 그 자체입니다. 우리에게 이 처참함이 필요한 이유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복으로 누리고 이 세상을 사랑하고 중독되어 좋아하는 기질이 죽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중독된 기질이 죽으려면 세상적으로 처참함이 임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복으로 누릴 수 없습니다. 본문은 이것을 알라고 요청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선민을 430년 노예 생활에 그야말로 처박아두셨던 것일까요? 반면에 선민이 아닌 사람들은 선진 왕정국가를 이루도록 허락하신 것일까요? 야곱은 그토록 하나님이 자기편이라고 생각했고, 자기가 생각하는 세상의 소원을 강압하며 하나님을 이겼습니다. 야곱이 이렇게 하면서까지 얻은 것은 결국 후손들의 노예 생활입니다. 야곱이 그토록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한 결과 야곱의 열두 아들은 애굽으로 내려가 430년간 노예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애굽에서의 430년 노예 생활을 역사적인 사건으로 정리합니다만, 우리나라가 36년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일본의 식민지로 살아가고 있다면 어떨까요? 일본의 식민 지배가 지금까지 지속되더라도 100년 남짓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430년을 노예로 산 이스라엘 민족의 처참함의 의미를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을 앞에 두고 주판을 튕기시며 계산을 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서 선민의 삶이 아무리 처참하더라도 그 처참함을 통하여 세상 사랑의 중독이 끊어지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유일한 복으로 생각하는 전환이 일어나면 비교도 할 수 없는 이익이라는 것을 계산하고 계십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계산하십니까? 내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별 볼 일 없이 살고 처참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하늘에 계시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하나님을 복으로 느끼고 그 하나님을 가지고 그 하나님을 즐길 수 있다면 이익이라고 계산하십니까? 이 세상에서 거지 나사로와 같은 처참함,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처참함이 주어지더라도 내게 이익이라는 계산이 분명하십니까?
하나님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서의 발전과 번영을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하늘에 계신 당신 자신을 복으로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그 복을 살아있는 동안에도 누릴 수 있음을 약속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창에 찔려 죽고, 가시 면류관을 쓰고 죽는 그 처참함을 당하더라도, 세상 사랑과 중독을 끊기 위하여 날마다 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여 처참함을 이어가는 삶이 이익이라는 것을 계산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계산의 명수이자 타산의 천재였습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서 주어질 수 있는 최고의 처참함을 아예 짊어지고 다녔고, 날마다 그 처참함을 자기의 처참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세상을 향해서는 처참해야만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발전과 번영과 성공과 결실을 추구하며 달려갑니다. 이러한 경쟁의 역사 속에서 십자가는 핸디캡입니다. 십자가는 이 경주를 마음 놓고 달려갈 수 없게 만듭니다. 인류 역사상 발전과 번영과 성공과 결실의 경주가 지배하는 지구 위에서 선민을 가장 처참한 자리에 처박는 십자가의 처참함이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운명적 핸디캡입니다. 그러나 이 핸디캡을 통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유일한 대상으로 마주하며 하나님만으로 즐길 수 있는 상황이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날마다 십자가의 처참함이 내 마음속 현실로 받아들여지더라도 엄청난 이익입니다. 이것이 본문이 가르쳐주는 하나님의 계산 방식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환경과 조건은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발전과 번영과 성공과 결실을 위한 경쟁장인 지구 위에서 여러분의 위치는 몇 등 정도입니까? 마음속에 십자가를 받아들임으로써 이 세상에서 여러분의 처지를 가장 처참함 속에 밀어 넣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이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죽은 자가 되었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는 발전과 번영과 성공과 결실을 위한 경쟁에서 꼴찌임을 자처하는 것입니다. 자존심을 내세울 수도 없으며 무슨 일을 했다고 자부심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설령 자부심을 가질만한 일을 했을지라도 나의 핸디캡을 생각하면 가질 수 없습니다. 자부심을 가질만한 일이 복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복으로 여기는 것이 나의 핸디캡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늘로 올라간 사람의 입장에서는 특권이지만 세상 입장에서는 핸디캡이고 게임을 시작하기도 전에 주어진 불리한 조건입니다. 이 입장을 명확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처참함까지 내려가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복으로 느끼고 하나님을 갖고 하나님을 누릴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처참함이 이 세상에서의 나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나는 예수님의 몸을 입은 자다.’라는 생각을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야곱의 열두 아들에게서 시작되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시작하기 전에 뜬금없이 에서의 족보를 보여줍니다. 에서가 왕정국가를 이루며 천 년의 역사를 보내는 동안 이스라엘은 노예 생활과 광야 생활과 오합지졸 사사시대를 거쳐 갑니다. 이러한 에돔과 이스라엘의 역사를 대비하여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선민이란 무지막지한 하늘의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처참함의 자리에 처하는 자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선택받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십자가라는 처참함에 갇혀있어야 하는 핸디캡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번영과 발전과 성공과 결실을 위한 경쟁에서 앞서겠다는 생각 자체를 아예 하지 마시고, 이 세상에서는 십자가의 처참함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방향으로 우리 의식의 방향을 결정짓고 삶에 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는 아브라함의 역사에서 노년의 모습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노년에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라는 말씀은 우리가 생각할 바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주시는 복은 아브라함의 몫이 아닙니다. 복은 하늘에서 정하신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땅에서 이루어져도 아브라함의 복이 아닙니다. 아무리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더라도 우리는 세상에서 처참함의 처지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십자가의 처참함 속에서 죽어버린 자들입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유일한 복으로 마주하여 사는 자들입니다. 선민이기에 이 지구 위에서 가질 수밖에 없는 핸디캡이야말로 우리의 특권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의 기준으로 핸디캡이 분명한데 이것이 어찌하여 내게 뼈가 저려올 정도의 특권이 되는지를 알았습니다. 이것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계산법으로 계산하며 세상을 살게 하시고 하나님께로 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