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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

녹취문: 선민 개조를 위한 노예 프로젝트_태승철 (창 37:1~28)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4.10.06|조회수59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선민 개조를 위한 노예 프로젝트>의 줄거리 :

17세 청소년 요셉이 두 번에 걸쳐서 꾼 꿈과 더불어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프로젝트가 시동이 걸립니다. 선민 개조를 위하여 계획된 것으로서 기간만 430년이 소요되는 프로젝트입니다. 이 프로젝트가 실행되는 바람에 선민 이스라엘은 430년 동안을 애굽에서 노예로 지내게 됩니다. 반면에 같은 기간에 에서의 후손은 왕정 체제를 갖춘 독립 국가를 세워 발전과 번영을 이룹니다. 선민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선민 개조를 위한 노예 프로젝트

 

(창세기 37:1~28)

 

1.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

2.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4.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5.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6.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7.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8. 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9.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10. 그가 그의 꿈을 아버지와 형들에게 말하매 아버지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네가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11.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

12. 그의 형들이 세겜에 가서 아버지의 양 떼를 칠 때에

13.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느냐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요셉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14. 이스라엘이 그에게 이르되 가서 네 형들과 양 떼가 다 잘 있는지를 보고 돌아와 내게 말하라 하고 그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내니 그가 세겜으로 가니라

 

 

우리가 읽지 않은 28절까지는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 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맏아들 르우벤은 일단 요셉을 살려서 아버지께 돌려보내고자 자기들 손에 피를 묻히지 말자는 핑계를 대어 구덩이에 던져 넣게 합니다. 이때는 형들이 양 떼를 몰고 세겜을 떠나 도단으로 옮긴 후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도단을 지나가는 대상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이스마엘 사람과 미디안 사람들 같았습니다. 르우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유다는 형제들에게 요셉을 이들에게 노예로 팔 것을 제안하고 형제들은 그 말을 따릅니다.

야곱의 아들들의 패륜적인 행동은 끝이 없습니다. 집단 대량 학살을 하고, 아버지 첩의 침상을 범하고, 피를 나눈 동생을 노예로 팔아버립니다. 당시의 노예란 죽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악행이 계속해서 나타나는 이 사람들이 바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시조이고 선민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깡패요 양아치들이 선민의 시조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민이면서 영적인 깡패들을 상대하시기 위하여 계획하신 것이 바로 노예 프로젝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선민 개조를 위한 노예 프로젝트’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선민의 본업을 잃어버린 영적인 양아치의 모습을 보입니다. 이들은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내는 일은 의식에도 없고 안중에도 없습니다. 오직 죄와 저주에 찌들어 있기에 마음에서 이 세상 것들이 너무 맛있고 좋게 여겨집니다. 그리고 세상 것들을 너무 가지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것을 너무너무 맛있어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은 사랑하셔서 주시고 싶은 것을 주실 수 없고 받아서 누릴 수도 없습니다.

세상 것이 마음에서 그렇게 맛있게 느껴집니다. 건강, 형통, 재물, 인기, 명예가 간절하고 맛있게 느껴집니다. 심지어 운동선수들이 경기에서 이기기를 바라는 것조차 실은 세상 것을 마음에서 맛있게 느끼는 상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승리와 성공이 맛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죄와 저주에 찌들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의 인격에서 죄와 저주를 싹 걷어낸다면 건강이나 장수 혹은 돈이나 형통 등을 좋아할 사람이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죄와 저주에 찌들고 중독되어서 세상 것을 먹고 싶어서 발버둥 치는 존재임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다는 선민들조차 세상 것을 바라며 곧바로 하나님께로 달려갑니다. 이로부터 야곱 단계와 이스라엘 단계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야곱 단계는 인간적인 교활함으로 맛있게 느껴지는 세상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단계는 하나님의 축복 개념을 이기면서까지 이 세상에 대한 축복을 강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실까요? 이것은 선민이 아니라면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서에게 에돔이라는 독립적인 주권 국가를 이루게 하시고 왕정 체제를 발전시킬 수 있도록 허락하십니다. 죄와 저주에 찌든 입맛의 기준을 따라서 발전하도록 내버려두신 것입니다. 그러나 선민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430년 간 노예 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선민들을 노예 프로젝트 속으로 던져 넣으십니다. 하나님은 왜 노예 프로젝트를 통하여 선민을 개조하시려는 것일까요? 본문은 430년간이나 지속될 노예 프로젝트가 필요한 이유를 가르쳐줍니다. 당시 요셉은 17세로서 우리식으로 하자면 고등학교 1학년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두 번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로부터 하나님의 선민 개조 프로젝트가 점화되어 가동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36장에서 에서의 족속인 에돔이 어떻게 발전했는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선민 프로젝트에 앞서 에돔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민을 사랑하시는 방식은 선민이 아닌 사람들을 대하시는 방식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같은 기간에 에서의 족속은 발전과 번영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야곱 족속 선민 이스라엘은 430년 세월을 노예로 살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430년간의 노예 생활을 하게 하심으로써 영적인 양아치 집단의 변화를 시도하십니다. 이러한 프로젝트가 필요했던 이유는 하나님만을 유일한 복으로 여길 수 있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노예가 되게 하시는 이유는 선민이 죄와 저주에 찌들어서 이 세상 것을 맛있게 여기는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마음에서 세상 것들이 너무너무 좋게 느껴집니다. 동시에 자기 삶에 대해 스스로 주인이 되고 주체가 되고자 합니다. 이로부터 ‘내가 이렇게 맛있는 세상 것을 더 많이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뜻과 계획을 세우고 의지를 가지고 추진해 나갑니다. 주체성이 활발하게 작용하는 만큼 죄와 저주가 활성화되는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죄와 저주 속에 잠들어 있던 괴물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선민이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자들이 되기 위해서는 애초에 주체성이 허락되어서는 안 됩니다. 죄와 저주에 찌든 입맛을 가지고 세상을 좋아함에 중독되어서 미쳐 날뛰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체적인 자유까지 주어져서 삶에 대해 주인 의식을 갖게 된다면 죄와 저주는 걷잡을 수 없이 활성화되고 맙니다. 그럴 때 사람은 순전히 귀신 들린 고깃덩어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에서의 후손들이 이룬 에돔이라는 족속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둔 결과였습니다. 이것은 에서의 후손들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아닙니다. 모든 인류는 죄와 저주에 찌들어 있고 그 마음에는 세상 것을 너무나 맛있게 여기고 있습니다. 갖고 싶고 먹고 싶어 죽을 지경입니다. 세상 중독에 걸려 귀신 들린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린 자들은 창조주 하나님이 보시기에 더 이상 인간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그대로 내버려 두십니다. 그리고 세상 중독자들의 기준에 맞게 발전하고 번영합니다. 이제까지 우리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세상 중독자들이 세운 기준을 따라 성공하려 했고 잘살아 보겠다고 발버둥 쳤습니다. 이러한 우리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진짜 유일하게 맛있고 좋은 대상임을 느끼기 위해서는 개조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죄와 저주가 활성화된 주체성을 죽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삶의 주인이라는 의식 자체가 죽어야만 합니다.

주인 의식의 반대는 바로 종과 노예 의식입니다. 하나님은 선민들의 주인 의식을 죽이시기 위해 43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애굽에서 참담한 노예 생활을 하게 하십니다. 영적 양아치 수준에 머물고 있던 야곱의 열두 아들을 노예 생활 속으로 집어넣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애굽에서 250만 명이라는 숫자로 번성하게 됩니다. 250만 전체가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선민을 향한 하나님 사랑의 본질적 요소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은 선민이었기에 430년을 노예로 살아야 했습니다. 선민은 하나님을 맛있어하는 사람들입니다. 선민은 하나님을 최고로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인격에서 죄와 저주가 싹 빠져나간다면 이 세상에서 돈을 벌겠다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겠다는 마음을 가질 사람도 없습니다. 이 세상 기준으로 성공하고 형통하기를 바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충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속에 이 세상 것을 향하는 소원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죄가 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맛있게 느끼고, 세상에 대한 소원을 따라 움직인다면 내가 주체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주체성을 막으시기 위해 선민들을 1~2년도 아니고 43년도 아닌 430년 노예 생활을 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일제 치하에서 36년간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것을 떠올리면 430년 노예 생활은 정말 엄청난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노예 프로젝트는 선민을 개조하시기 위한 어마어마한 프로젝트입니다. 그리고 본문은 이렇게 430년간 지속될 프로젝트의 성격을 규정해 주고 있습니다. 에서의 족속인 에돔이 세상에서 어떻게 번성하는지를 미리 보여주고 선민과 대비하게 하십니다. 선민이 아닌 사람과 반대된 모습을 보여주시면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가르쳐주십니다. 이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430년간 노예 신분으로 처박아두셔야만 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죄와 저주 때문입니다. 따라서 죄와 저주에 찌든 나의 상태를 모른다면 복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없습니다. 계속해서 겉돌게 됩니다. 나를 이 세상에서 제일 악하고 제일 싫어하는 존재로 볼 때에만 복음은 받아들여집니다. 이것을 철저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430년 동안 진행된 어마어마한 선민 개조를 위한 노예 프로젝트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40년간 광야 생활을 하게 되는 선민들은 430년 노예 생활의 유전자를 받은 최절정의 노예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애굽의 탄압에서 벗어나자마자 곧바로 자기가 생의 주인이 되어버립니다. 그 결과 출애굽 한 20세 이상의 장정 모두가 광야에서 죽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 죽음이 절대적 필요성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선민을 개조하는 것이 아니라 선민이라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십자가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430년 동안 노예로 살게 해도 이 세상 것을 좋아하는 입맛은 없어지지 않고 눌려있을 뿐입니다. 환경만 조금 자유로워지면 곧바로 맛있게 느껴지는 세상 것을 추구하기 위한 주체성이 살아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개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본문을 통해 알려주십니다.

이제 선민들은 노예 생활에 이어서 광야 생활과 사사 시대를 거쳐 통일왕국 시대를 지나 성군 다윗의 등장을 마주하게 됩니다만 이러한 과정 끝에 결국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이 오랜 세월 동안 선민들은 끝내 죄와 저주에 찌든 기질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세상 것을 맛있게 여겨 추구하는 주체성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죄와 저주가 싹 씻길 수 있었다면 세상 것들은 절대로 맛있어 할 수도 없고 좋아할 수도 없는 것들입니다. 마음에 담을 수 없는 배설물처럼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민들은 끝내 세상 것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삶에 주체가 되고자 했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거대한 프로젝트의 출발점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거대한 프로젝트를 움직이기 위해서 하나님이 핵심적 역할을 할 키맨으로 정하신 자가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은 두 번의 꿈을 꿉니다. 7절을 보면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라고 했고, 9절을 보면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꿈은 13년 뒤에 요셉이 총리가 됨으로써 실제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근동지역 전체가 기근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야곱의 칠십 명은 애굽으로 내려가서 요셉을 만나게 됩니다. 꿈을 꾸던 당시의 요셉은 17세였습니다. 하나님의 거대한 프로젝트가 겨우 고등학교 1학년에 해당하는 요셉의 두 번의 꿈을 통하여 점화되고 가동되기 시작한다는 점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 프로젝트는 실패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단계입니다. 선민 개조를 위한 노예 프로젝트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하면 십자가로 가서 죽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무엇이 이루어지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대해 다시는 주체성이 나타나지 않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몸을 입고 다시 태어난 나의 주체성은 오직 하나님을 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주체성의 방향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의 방향이 죽어버리고 새로운 방향인 하늘을 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주체성이 땅으로 내려와 내 몸을 장갑 삼아 이 세상을 살아가십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선민 개조를 위한 노예 프로젝트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체성의 문제입니다. 내 주체성이 삶을 향해서는 안 되고 하늘을 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전 단계의 길을 여는 노예 프로젝트는 고등학교 1학년에 불과한 요셉의 두 번의 꿈을 통해 시작됩니다. 본문에서는 요셉에 관한 직접적 묘사는 자세히 등장하지 않습니다만 곳곳의 단서를 통해 요셉이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 유추할 수 있습니다. 2절을 보면 “…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쉽게 말해 요셉이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께 고자질했다는 것입니다. 이 기록을 통해 드러나는 요셉의 인격적 특징이 있습니다.

요셉과 형들이 치던 양들은 결국 아버지의 양이었습니다. 요셉은 ‘지금 그 자리에 아버지 야곱이 계셨더라면 도저히 행할 수 없는 행동을 형들이 하고 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모습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인격적 특징이 애굽에 팔려 가서 노예로 일하던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39장을 보면 보디발 장군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 8~9절을 보면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라고 했습니다. 쉽게 말해 보디발 장군이 있을 때 하지 못할 일이라면 보디발 장군이 없을 때에도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다만 요셉이 이렇게 행동한 이유는 단순히 주인인 보디발 장군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앞에서 형들을 고자질한 것도 단순히 아버지에 대한 효도를 다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39장 9절의 이어지는 부분을 보면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라고 이야기합니다. 요셉이 무엇을 염두에 두고 이러한 말을 했는지가 드러납니다. 이것은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께 고하던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7세 요셉은 형들과 함께 아버지의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때 요셉은 이 일을 하나님 앞에서 하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렇기에 아버지가 계실 때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은 단순히 아버지께 잘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잘못하는 것이라 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가 보디발 장군 아내의 유혹을 뿌리치면서 그대로 반복됩니다. 보디발 장군이 없다고 해서 그 아내의 유혹에 넘어간다면 단순히 보디발 장군에 대한 의리와 충성을 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향하는 것이 되어버린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요셉에게는 아버지의 양을 치게 된 것도,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일하게 된 것도 모두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진행된 일이었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요셉의 행동은 단순히 고자질이 아니라 요셉의 영성을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작 고등학교 1년짜리인 요셉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감으로 충만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이 얼마나 큰지 아버지의 존재감, 형들의 존재감, 보디발 장군의 존재감, 보디발 장군 아내의 존재감보다 더 컸습니다. 이처럼 요셉은 눈앞의 어떤 대상보다도 하나님을 더 큰 존재감의 대상으로 실감했습니다. 주체할 수 없이 큰 생선이 버둥대는 것처럼 하나님의 있음을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삶을 대하는 요셉의 태도는 전적으로 노예였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앞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상황 속에서 살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눈 밖에 나는 일은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요셉의 태도를 단순히 윤리적인 관점에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꼈던 요셉의 영적 상태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윤리관이 투철해서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께 고발하고 보디발 장군 아내의 유혹을 거부했다는 바보 같은 해석은 멈춰야 합니다. 요셉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있음입니다. 요셉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존재감이 우선이었습니다. 스스로 무슨 원칙이나 윤리관을 갖고 그에 맞춰 행동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눈치를 살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이 마음속에 ‘네가 이러면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 네가 저러면 나는 좋아한다.’라고 알려주시는 대로 행동했던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아버지 야곱에게 가축 떼를 허락하셨음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형들을 낳게 하셨음을 알았고, 자기를 낳게 하셨음도 알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아버지의 양들을 자기와 형들에게 치게 하셨음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아버지의 양을 치는 입장이었으므로 아버지가 계셨다면 할 수 없는 일을 하고자 할 수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보디발 장군의 집을 다스리게 되었기에 보디발 장군이 있었다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요구하시는 모습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요셉의 특징을 아브라함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영광의 하나님을 마음에서 지켜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전체적인 요소와 전체적인 측면을 아우르는 믿음의 본질입니다. 한편 선민을 개조하시려는 하나님이 겨냥하시는 바는 영적인 양아치가 되어서 세상 것에 맛 들이고 중독된 모습입니다. 세상 것들을 얻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주체성이 살아난 상태를 겨냥하여 쪼개고 부수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이제 선민들을 430년간 노예 생활에 처박으시고자 하십니다.

이 프로젝트를 점화시킬 수 있는 키맨을 고등학교 1학년짜리 요셉으로 정하시면서 그 마음에 은혜를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특별히 요셉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 세상의 삶을 대할 때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노예적인 신분을 지켜나가는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전면적으로 관계하는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시는 대신 요셉은 일찌감치 마음에서 노예의 신분을 유지했음을 강조해 보여주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강조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서 이루어졌던 믿음의 요소가 요셉에게 다 있고, 요셉에게서 이루어졌던 믿음의 요소가 아브라함에게도 다 있습니다. 다만 아브라함에게 특별히 강조하여 보여주셨던 부분은 믿음의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면이었습니다. 한편 요셉에 대해서는 이렇게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관계가 잘 이루어질 때 인간이 세상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보여주십니다. 삶의 모든 현장은 하나님이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주인으로 하는 노예의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요셉을 통해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죄와 저주에 찌든 상태에서 끝없이 발동하는 주체성을 죽여버리고 억제하는 선민 개조의 노예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키맨으로 요셉을 세우신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노예 프로젝트는 실패했지만,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바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내 주체성을 새롭게 바꾸시려는 하나님의 뜻과 의도가 명확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향해서는 개조가 안 되기에 죽어야만 합니다. 죄와 저주에 찌들어 있을 때 세상을 향하던 그 열정으로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돈을 벌겠다는 열정으로, 건강하고 오래 살겠다는 열정으로, 성공하고 형통하겠다는 열정으로, 사람들에게 인정받겠다는 열정으로 오직 하늘에 계신 한 분만을 추구하는 주체성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주체성이 임하는 곳입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오직 노예입니다. 본문은 선민이란 노예의 태도와 입장을 견지해 나가는 자들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한 주님께서 요한복음 5장 19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어도 이 세상을 살아가시는 방식은 오직 노예였습니다. 노예 프로젝트는 노예 생활을 시킨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노예 프로젝트에 담긴 하늘 아버지의 의도는 십자가 예수님과 함께 죽음으로써만 이루어집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향해 주체성을 다 쏟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을 향해서는 내 주체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노예로만 살아갈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럼으로써 이 노예 프로젝트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를 충족시켜 드리는 하루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을 살아야 하는 선민들을 향해 갖고 계시는 아버지의 사랑과 염려와 간절한 의도를 알았습니다. 이제 그 의도대로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게 하시고, 하나님의 의도가 충족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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