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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날 위해 하나님이 억지 부리시는 이유>의 줄거리 :
하나님이 나에게 주고 싶으신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도저히 그 것을 받아 누릴 수준이 안 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 좋은 것을 내게 주시기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기필코 내가 그 좋은 것을 받아 누리게 하시려는 의지를 굽히지 않으십니다. 주권자의 고집을 부리십니다. 바로 여기서 하나님의 억지가 벌어집니다. 무리수를 두게 되십니다. 이 하나님의 억지가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집니다.
날 위해 하나님이 억지 부리시는 이유
(창세기 40:1~23)
1. 그 후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그들의 주인 애굽 왕에게 범죄한지라
2. 바로가 그 두 관원장 곧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3. 그들을 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가두니 곧 요셉이 갇힌 곳이라
4. 친위대장이 요셉에게 그들을 수종 들게 하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 그들이 갇힌 지 여러 날이라
5. 옥에 갇힌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 두 사람이 하룻밤에 꿈을 꾸니 각기 그 내용이 다르더라
6.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의 빛이 있는지라
7. 요셉이 그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신하들에게 묻되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
8.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20. 제 삼일은 바로의 생일이라 바로가 그의 모든 신하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 때에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그의 신하들 중에 머리를 들게 하니라
21.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은 전직을 회복하매 그가 잔을 바로의 손에 받들어 드렸고
22. 떡 굽는 관원장은 매달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함과 같이 되었으나
23.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억지란 어디를 봐도 될 수 없는 일을 무리하게 기어이 해내려는 고집입니다. 하나님이 왜 억지를 부리실까요? 하나님은 내게 주고 싶으신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선민인 나는 하나님이 주고자 하시는 것을 받아 누릴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누리기에는 내 수준이 너무 동떨어져 있습니다. 해당 사항이 전혀 없고, 받아 누릴만한 요소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 수준에서 하나님이 주시려는 것의 맛을 알아서 누리고 즐기는 것은 무리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극복이 불가능해 보이는 거리와 차이를 무시하고 기필코 그것을 내게 주시려고 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억지가 발생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 싶으신 그것을 곧바로 주신다면 다 낭비가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려는 것을 받아서 누릴 수 있는 자가 전혀 아닌데 하나님은 꾸역꾸역 주시려고 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이 억지를 부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민인 나를 향하여 부리시는 억지가 본문에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나를 향해 억지를 부리시는지 그 내용을 들여다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주권자로서 주시고 싶은 것이 있다면 우리 수준에 맞는 것을 주시면 될 것입니다. 몸이 아파서 쩔쩔매는 사람에게 건강을 주시면 됩니다. 여유 있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는 그 수준에 맞게 돈 좀 주시면 됩니다. 그냥 순리대로 우리 수준에 맞게 주시면 우리는 그 맛을 느끼며 아주아주 좋아할 것입니다. 우리가 좋아해서 펄펄 뛸만한 것들은 얼마든지 널려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굳이 당신이 주고 싶은 것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받아봤자 맛도 모르는데 굳이 주셔서 맛을 알게 하시겠다고 하시기에 억지를 부리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갑니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에 먹고 사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본적인 은혜 이외의 영적인 은혜라고 할 만한 은혜도 있습니다. 영적인 은혜는 다 억지 은혜입니다. 우리 상태로는 하나님이 주시려는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체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굳이 주시겠다고 하시니 억지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존재감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러던 중 누명을 쓰고 투옥되어 옥살이를 합니다. 그런데 이때 궁정에서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범죄하여 노여움을 사서 요셉이 갇힌 감옥에 들어옵니다. 이들은 바로의 최측근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술을 따라 바로의 손에 들려주던 신하이고, 떡 맡은 관원장은 바로의 식탁에 앉아서 바로가 먹는 것을 권장하고 보살피고 관리하는 신하입니다. 이들보다 바로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신하는 없습니다. 바로의 총애를 받는 총리가 있었다 하더라도 물리적으로는 이들 관원장보다 더 가까이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감옥에 들어와서 꿈을 꿉니다. 그리고 요셉은 꿈을 해석해 주는데 그 해석대로 이들의 인생과 운명이 갈리게 됩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재등용되고 떡 맡은 관원장은 목 베임을 당해 죽게 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포인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히브리 유랑민의 아들로서 노예로 팔려 왔다가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꿈을 해석하는 사건을 통해 술 맡은 관원장의 기억 속에 요셉의 존재가 담기게 됩니다. 다만 술 맡은 관원장은 복직한 후에도 당장 요셉을 기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요셉이라는 존재는 술 맡은 관원장의 기억 속에 담기게 되었고 재등용된 이후 바로가 꿈을 꾸었을 때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계기가 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요셉이 총리에 오르는 길이 열립니다.
이것은 참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당시 초강대국 애굽을 중심으로 보자면 가나안 땅은 이역만리 떨어진 변방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가나안 땅 유랑민의 열한 번째 아들입니다. 그런데 이 요셉의 존재감이 초강대국 애굽의 일인자인 바로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 최측근인 술 맡은 관원장의 기억 속에 담겼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바로에게 요셉의 존재를 배달하는 택배 기사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바로는 꿈을 꾸게 되는데 애굽의 점성가나 술사들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하여 고뇌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술 맡은 관원장은 기억 속에 담긴 요셉의 존재를 의식의 전면으로 끄집어 올립니다. 그리고 바로에게 요셉에 대한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유랑민의 아들 요셉이 초강대국의 일인자 바로와 대면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억지입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도 보통 사람들은 재벌 회장님의 얼굴 보기도 어렵습니다. 개인적으로 회장님을 만날 이유를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한국 시골에 사는 한 청년이 미국 백악관의 대통령과 대면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불가능합니다. BTS가 백악관에 가서 바이든 대통령을 만날 때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아미라 불리는 수많은 팬들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BTS가 지구 위에서 발휘하는 영향력이 어마어마하기에 백악관의 바이든 대통령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백악관에서 바이든 대통령을 만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히브리 유랑민의 열한 번째 아들 요셉과 초강대국 애굽의 일인자 바로가 대면해야 될 이유를 만들어 내십니다. 이러한 과정은 순리적이지 않고 억지스럽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상식과 규칙과 예상과 기대와 바람의 한계를 뛰어넘는 무리수를 행하십니다. 무리한 일을 해내려는 고집으로 억지를 부리십니다. 가나안 땅에서 정착하지도 못하는 히브리 유랑민의 열한 번째 아들이 초강대국 애굽의 바로를 대면할 여지는 없을 것입니다.
요셉이 바로를 만나게 되는 과정을 떠올려 봅니다. 각각의 단계가 정말 백만분의 일의 확률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양을 치기 위해 세겜에서 도단으로 옮겼습니다. 이때 요셉이 형들을 찾아가게 되었고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다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팔아버리고자 합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애굽으로 가던 대상들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건이 맞물릴 확률은 그야말로 백만분의 일입니다.
이렇게 노예로 팔려 간 요셉은 하필이면 애굽 왕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 집에서 일하게 되는데 이 또한 백만분의 일입니다. 보디발은 왕의 친위대장이기에 감옥이 있습니다. 요셉이 누명을 쓰고 그 감옥에 갇힐 확률이 몇 프로입니까? 그렇게 요셉이 갇혔을 때 바로에게 범죄하여 노여움을 사서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을 만납니다. 요셉이 이들을 만날 확률이란 얼마나 될까요? 또 이들이 감옥에서 요셉만 해석할 수 있는 꿈을 꿀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요셉은 꿈을 해석함으로써 술 맡은 관원장의 기억 속에 남게 됩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의 최측근의 자리에 복귀했을 때는 이제 요셉의 존재를 바로 앞에 드러낼 타이밍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바로는 아무도 해석할 수 없는 꿈을 꾸었고 이를 계기로 요셉은 바로 앞에 서게 됩니다.
요셉의 삶에서는 확률적으로 극히 희박한 일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파격적 억지로 일어난 일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억지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일인지하 만인지상 총리의 자리까지 끌어올리십니다. 이러한 과정은 순리적이지 않고 억지입니다. 인간의 상식과 기대와 예상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규칙도 없고 인간의 기준을 중심으로 보자면 공평하지도 않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술 맡은 관원장이나 떡 맡은 관원장이 꿈을 꾼 것은 그들의 인생에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꿈을 꾸었기 때문에 재등용되고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애초에 그렇게 되도록 주권적으로 결정해 놓으셨습니다. 이들이 꿈을 꾼 이유는 오직 요셉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술 맡은 관원장으로 하여금 요셉을 기억하게 하시고자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꿈을 꾸지 않았어도 불과 삼 일 후면 복귀했을 것이고, 떡 맡은 관원장 또한 굳이 죽는다는 해몽을 받지 않더라도 죽을 것입니다. 이들이 꿈을 꾼 것은 요셉을 기억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요셉은 모든 기독교 종교인들이 이상적으로 바라는 인간상이었습니다. 요셉이 총리가 되는 과정은 그야말로 통쾌한 쾌거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요셉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는 부모님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유행도 이제 시들해졌습니다. 인생에 한 번쯤 요셉과 같은 파격적인 쾌거가 일어나기를 바라면서 살아봤자 그런 일이 주어지지도 않고, 또 아이에게 요셉의 이름을 지어줘봤자 요셉에게 일어난 일들과 비교하면 사소하고 보잘것없고 비참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어느덧 요셉의 이야기는 성경 속에 박제된 생명력 없는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더는 요셉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사람이 없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일종의 전설이 되었습니다.
본문은 히브리 유랑민 집안의 열한 번째 아들을 지금의 미국 같은 초강대국 애굽의 일인자 앞에 직면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억지스러움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여전히 살아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청년 요셉이 애굽의 바로를 만나게 되는 일보다 더 억지를 부리심으로써 주어지는 것을 받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에 살던 요셉이 애굽의 바로와 직면하는 것과, 이 세상에 마음을 붙이고 뒹굴며 죄와 저주 속에서 건달과 양아치처럼 살던 우리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과 어느 것이 더 불가능하고 억지스러울까요?
바로는 초강대국 애굽의 일인자이지만 하나님은 지구와 우주를 창조하신 주권자요 우주적 권세의 일인자이십니다. 문제는 나의 상태입니다. 나의 마음은 이 세상에서 가족을 좋아하고, 건강을 좋아하고, 사업을 좋아하고, 승진을 좋아하고, 돈을 좋아하고, 온갖 것을 좋아하느라 찌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더럽고 추악하고 부패한 마음은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상태의 수준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상황과 수준에 있는 나에게 당신을 누리고 즐길 수 있기를 기대하시고 당신을 주시겠다고 억지를 부리십니다. 천국에서 하나님은 ‘나는 태승철에게 나를 주고 싶다.’라고 말씀하실 때 주님과 모든 천사들이 ‘아버지! 태승철에게 하나님 자신을 주신다니 무리입니다. 억지 좀 그만 부리세요. 저 사람이 어떻게 아버지를 맛보고 누리고 즐길 수 있다고 그렇게 아버지를 주시겠다고 고집을 부리십니까?’라고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너희들 말이 맞아. 태승철에게 나를 주겠다는 마음을 접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자꾸만 나를 좋아하고 누릴 수 있게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못 견디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은 이 하나님의 억지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애굽의 바로와 대면하게 하시려고 수많은 억지를 부리셨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팔게 하십니다. 하필이면 그때 애굽으로 가는 대상들이 지나갑니다. 그리고 바로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의 집에 팔리게 하십니다. 누명을 쓰게 하신 후에 감옥에 갇히게 하시고, 이후에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도 갇히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들이 꿈 꾸게 하시고 요셉이 해석하게 하신 후에 술 맡은 관원장을 복귀시키셔서 요셉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바로에게 애굽의 누구도 해석할 수 없는 꿈을 꾸게 하시고 요셉을 부르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억지로 가득한 과정이 우리에게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도저히 하나님 자신을 복으로 누릴 수 없는 수준 이하의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주시겠다는 억지를 부리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억지 때문에 주님이 나서십니다. ‘아버지! 도저히 태승철에게 아버지를 주시겠다는 억지스러운 마음을 누그러뜨리실 수 없다면 제가 세상으로 내려가겠습니다. 제가 육체를 입고 내려가서 세상에 찌들어 더럽고 추악하게 살고 있는 태승철의 마음을 꺼내 올려서 아버지 앞으로 데려오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가 억지를 포기하지 않으므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아버지와 하나 되어 복을 누리고 계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것 자체가 억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억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지금의 상태로는 아무리 예정하시고 선택하셔도 도저히 아버지를 대면하여 누릴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나와 함께 죽자.’라고 부르십니다. 이 십자가의 죽음도 억지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죽음보다도 더 큰 억지가 나타납니다. 죽은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억지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승천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술 맡은 관원장과 같은 역할을 하십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담고 바로 앞에 서듯이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몸 속에 나의 마음을 담고 아버지께로 가십니다. 이러한 과정은 요셉이 바로를 직면하는 사건보다 백 배, 천 배, 만 배는 더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하면서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감을 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매일 반복하는 십자가 생활화는 실로 엄청난 하나님의 억지입니다. 히브리 유랑민의 열한 번째 아들 요셉이 초강대국 애굽의 일인자인 바로와 직면하여 총애를 받는 총리가 되는 것보다도 열 배, 백 배, 천 배는 더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매일 같이 순간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하여 아버지께로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요셉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억지스러움이 백 배, 천 배 가동되어서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하여 우리 마음이 하늘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술 맡은 관원장의 역할을 하십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의 존재를 기억에 담고 바로의 측근 자리로 복귀했듯이,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을 담고 하나님의 장자의 자리로 끌고 가십니다.
우리가 몸을 입고 사는 세상의 상황 속에서 가나안의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는 것과 같은 일이 쉽사리 일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굳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막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이 일어나거나 말거나 우리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는 것 정도를 대단한 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그런 종류의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라면서 살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으니 부질없는 일로 알고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이 총리가 된 것은 동화 속에 나오는 전설 같은 이야기라고 치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생각은 잘못되었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는 일보다 천 배, 만 배는 더 억지스러운 사건이 바로 우리에게 일어났기에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대단치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장자의 자리에 서서 ‘아버지! 저 왔어요.’라고 말하는 것이 더 대단한 일입니다. 마음이 육체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 세상 삶의 현장을 떠나서 예수님의 몸을 입고 아버지께 가는 상황이야말로 요셉이 총리가 되는 것보다도 천 배, 만 배 더 억지스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 아버지의 억지를 실현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굳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죄인으로 십자가에서 죽은 것보다 더한 억지는 세상천지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나에게 주시고 내가 하나님의 좋음을 누리고 즐기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은 이러한 억지를 부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에게 주어질 수 있는 가장 치욕적이고 모욕적인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억지가 현실이 되게 하시기 위해 주님도 억지를 부리셨습니다. 부활하시는 억지, 승천하시는 억지를 통해서 우리는 요셉이 총리가 되는 것쯤은 일도 아닌 것으로 느낄 정도의 일을 날마다 경험하고 누리고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불가능해 보이는 억지를 부리셨는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총리가 된 요셉은 애굽 전역에서 바로의 존재감보다 하나님 아버지의 존재감을 우선시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있음에 대한 존재감은 요셉 한 사람의 마음에서만 유지되었습니다. 애굽 전역에서 아버지를 직면하여 존재감을 느끼며 아버지의 좋음을 유지해 갔던 자는 요셉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향해 억지를 부리시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복으로 누리고 맛을 알게 하시겠다는 이 억지를 실현하시기 위해서 주님은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라는 억지를 이루셨습니다. 이 억지를 생활화하는 우리에게는 사명이 있습니다. 오늘 이 지구에서 대체 몇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의 있음에 대한 존재감을 마음에서 지켜낼 수 있을까요? 내가 하나님의 존재감을 지키고, 여러분이 하나님의 존재감을 지켜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요셉이 애굽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을 지켜내지 못했다면, 애굽에 있는 사람들의 의식에서는 하나님이 없는 게 됩니다. 오늘도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을 마음에서 지켜내지 못한다면, 이 지구 위에 있는 사람들의 의식에서는 하나님의 있음이 없는 게 됩니다.
하나님 있는 지구를 만들 것인가, 하나님 없는 지구를 만들 것인가는 여러분에게 달렸습니다. 기독교 종교인 중에서 몇 사람이나 가정과 직장에서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을 지켜낼 수 있을까요? 우리가 지켜내야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을 지켜냄으로써 이 지구가 하나님 있는 지구가 됩니다. 내가 속한 직장이 하나님 있는 직장이 됩니다. 나를 위해 하나님이 부리신 억지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이 나를 위해 부리신 억지가 굽혀지지 않고 누그러뜨려지지 않도록 주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은 아버지의 나를 향한 억지가 실현될 수 있도록 하신 억지였습니다. 죄와 저주에 찌듦이 너무나 깊은 나에게 최고의 은혜로 주시고자 이루신 억지입니다.
이 하나님의 억지스럽고 파격적인 은혜를 누리고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사명이 있습니다. 애굽 전역에서 오직 요셉만이 마음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을 지켜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있음과 하나님의 좋음을 마음에서 지켜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지독하게 죄와 저주에 찌들어 하나님이 주시려는 사랑과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당신을 주시고자 하심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라는 억지는 이러한 하나님의 억지를 이루시기 위해 일어난 현상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렇게까지 우리를 위해 억지를 부리시는 바람에 주님까지 이 세상에 내려와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겪는 억지를 부리시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억지를 부리셔야 했던 우리를 향하신 아버지의 간절한 사랑의 마음을 한시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미력이나마 언제 어디서나 아버지의 존재감과 아버지의 좋음을 마음에서 지켜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