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창세기-3

녹취문: 사탄이 불어넣은 죽음의 언어 체계_태승철 (창 3:1~7)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4.04.25|조회수141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사탄이 불어넣은 죽음의 언어 체계>의 줄거리 :

전 인류가 한순간에 사탄의 언어 체계를 탑재하는 순간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어 체계를 완전히 버리고 그러므로 하나님 창조주와의 호흡 맞추기도 중단됩니다. 이 사탄의 언어 체계는 지금도 온 지구 위에서 모든 인간이 활발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니 모든 인간이 이 사탄의 언어 체계에 노예가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사탄의 언어 체계를 알아야 하나님의 언어 체계도 구별이 될 수 있습니다.

 

사탄이 불어넣은 죽음의 언어 체계

 

(창세기 3:1~7)

 

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본문은 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불행한 사건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전 인류가 한 순간에 사탄의 언어 체계를 자기 인격 안에 탑재하는 순간입니다. 나는 내 인격 안에 사탄의 언어를 탑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의 발원지인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죽음의 언어 체계를 탑재함으로써 그것은 유전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태어나서 이제까지 사는 동안 이 사탄의 죽음의 언어 체계를 통해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사탄의 언어 체계는 온 지구 위의 모든 인간들 안에서 활발하게 가동되고 있습니다. 당장 문을 열고 나가서 만나는 모든 인간들은 창세기 3장에 묘사되고 있는 사탄의 언어 체계에 인격이 장악된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판단하는 것,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모든 것은 사탄의 언어 체계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려주는 창세기는 굉장한 책입니다. 특히 1~3장은 어디에 이런 책이 있겠나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진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 생기란 나중에 이어지는 모든 이야기를 종합해 보자면 하나님의 언어 체계를 불어넣으신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지 않아서 스스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언어 체계를 갖지 않은 상태임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과 밀착하여 마음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언어 체계가 있어야 했습니다. 이로부터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으셨다는 것은 당신의 언어 체계를 불어넣으셨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언어 체계를 마음에 담고 할 일은 매 순간 하나님과 밀착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생각을 호흡하여 받아들이며 그 생각대로 판단하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렇게 살아야 할 존재가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그렇게 살아야 했던 인간의 모습이 타락하는 어마어마한 사건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언어 체계가 인간에게서 밀려나고, 사탄이 자기의 언어 체계를 인간에게 불어넣는 모습입니다. 어떤 공포 영화보다도 더 무서운 사건이 벌어지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참변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하나님과의 밀착 상태가 중단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하와를 마음에 담고 밀착하게 되었고, 하와는 아담을 마음에 담고 밀착하게 되었습니다. 참 놀랍습니다.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습니다만 11~12절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라는 하나님의 질문에, 아담은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러한 대답은 아담의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하지 못하고 하와와 밀착하였음을 잘 보여줍니다. 하와 또한 마음이 아담에게 밀착하였기에 하나님과의 사이에 틈이 생겼습니다. 사탄은 바로 그 틈으로 끼어들어 역사할 수 있었습니다. 사탄은 그 틈을 노려 자신의 언어 체계를 불어넣었습니다. 그 특징이 바로 본문에 아주 강렬하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본문을 살펴보기에 앞서 하나님의 언어 체계와 사탄의 언어 체계의 특징을 구분해 봅니다. 타락의 상태는 사탄이 자기의 언어 체계를 불어넣은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진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당신의 언어 체계를 불어넣으셨던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언어 체계를 불어넣으셨을 때의 인간은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같은 의미를 가진 언어 체계는 생각을 받아들임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과 늘 밀착된 마음 상태에서 하나님이 지금 하고 계시는 생각을 받아서 그 생각대로 살았던 것입니다.

사탄의 언어 체계가 들어온 이후에 일어난 일은 이와 상반됩니다. 사탄은 인간을 싫어하기에 인간의 마음이 밀착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마음이 붙기를 원하셨지만, 사탄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기에 인간의 마음과 붙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나님과 밀착하지 못하게 망가뜨리고자 하였습니다. 그것을 위해 자기의 언어 체계를 집어넣었습니다.

이로부터 선악과를 따 먹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사탄이 넣어준 언어 체계를 가지고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하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탄은 이렇게 망가진 모습을 멀리서 구경하며 조소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과 붙기를 원하신 것처럼 사탄은 인간의 마음과 붙기를 원치 않습니다. 오직 인간이 하나님을 등지는 것을 원할 뿐입니다. 다시 말해 사탄은 인간이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기를 원했지 자기를 경배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우리 같은 존재의 경배를 받아봐야 사탄에게는 이득 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유명 강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강의를 예찬합니다. 그런데 유명 강사를 예찬하는 모든 사람들이 죄와 저주에 찌든 자들입니다. 죄와 저주에 찌든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 마음이 똑같이 죄와 저주에 찌들었기 때문입니다. 유명 강사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좋아하고 예찬하기를 바랄지는 몰라도 사탄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습니다. 사탄은 사람들이 자기를 좋아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오히려 좋아한다고 하면 기분 나빠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그렇기에 벌레 같은 사람들을 깨끗하게 만들어 가면서까지 오라고 부르시고 밀착하기를 원하십니다. 독생자까지 희생시킬 정도로 바보 같은 하나님이시기에 그렇게 우리를 끌어안으려고 하시는 것이지, 사탄은 절대로 더럽고 무식하고 어리석고 한심한 인간들의 마음을 갖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사탄은 우리와 같이 호흡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저 죽음으로 달려가는 언어 체계를 집어넣고 멀리서 구경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바보처럼 사탄이 넣어준 언어 체계를 내 것으로 만들고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사탄의 언어 체계로 판단하고 생각하는 존재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사건은 스스로 생각하는 주체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어떤 언어 체계로 생각하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사탄은 바로 그 언어 체계를 넣어준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해로부터 ‘타락은 어떤 상태인가? 선악과를 따 먹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사탄이 개입했다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동서남북 교회의 모임에서 내 입으로 말할 때 이런 포인트를 기억해서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습니다.

 

사탄은 정말 머리가 좋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서울대 수석 합격자보다 10배는 더 좋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전에 세일즈맨이라면 ‘에스키모인들에게 냉장고를 팔 수 있어야 하고, 사막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히터를 팔 수 있어야 한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사탄이 한 일이 이와 닮았습니다. 사탄은 낙원인 에덴동산에 사는 여자로 하여금 부족한 것을 발견하게 합니다. 이러한 사탄의 언어 체계는 어떤 상황에서도 부족함을 발견하게 하는 족집게의 지혜라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이 얼마나 교활한지는 하와에 대한 질문에서 잘 드러납니다. 1절을 보면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에 대한 하와의 대답이 2~3절에 기록되었습니다.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라고 합니다. 사탄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습니다. 에덴동산은 아담과 하와가 일년내내 돌아가며 먹어도 다 먹지 못할 과일나무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단 한 문장으로 그 많은 나무 열매를 하와의 의식에서 싹 사라지게 만듭니다. “참으로 너희에게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는 말을 들은 하와는 자기도 모르게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의 나무에 의식이 꽂히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 질문과 대답에서 하와의 마음에는 사탄의 언어 체계가 훅하고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와가 사탄에게 넘어간 것은 하나님과 밀착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와의 마음이 아담과 밀착하는 동안 하나님과 밀착 관계는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틈을 타고 사탄의 언어 체계가 들어오고 말았던 것입니다. 기가 막힐 일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진 낙원은 부족함이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이러한 낙원에서조차 부족함을 느끼게 만듭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사탄의 언어 체계를 자기 것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된 인류는 사탄의 족집게 지혜를 물려받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부족함과 결핍과 모자람과 없음을 족집게로 집어내듯이 발견해 내는 탁월한 지혜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혜는 나를 죽음으로 이끌고 가는 지혜입니다. 죽음의 지혜를 가진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물론 인간은 모자람과 결핍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자람과 결핍은 오직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가동되어야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과 밀착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조금이라도 틈새가 벌어지면 곧바로 모자람과 결핍을 느낌으로 다시 하나님과 붙으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서만 느껴야 하는 모자람과 결핍을 눈에 보이는 삶의 환경에서 가동되도록 방향을 바꿔버렸습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 먹고 사탄의 언어 체계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사탄의 언어 체계를 스스로 가동함으로써 도사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솔로몬처럼 부귀영화가 발에 채는 상황 속에서도 인간은 부족함을 느낍니다. 재벌 총수는 부족함을 느끼지 못할까요? 재벌일지라도 가난한 사람들이 느끼는 부족함의 정도보다 1도 모자라지 않는 부족함을 느끼며 삽니다. 그 이유는 마음에 사탄의 언어 체계가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정작 사탄은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 거짓 언어 체계를 불어넣어 주었을 뿐입니다.

타락 전의 인간은 하나님의 생각을 호흡하면서 그때그때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타락하여 스스로 생각하는 주체가 되었습니다. 사탄의 언어 체계를 가지고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부족함입니다. 인류가 사용하는 언어 안에서 바람, 소원, 희망, 꿈, 비전과 같은 단어는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듣기에는 좋지만, 사탄의 언어 체계에 기반한 부족함에 대한 인식에서 생겨난 단어들입니다. 희망이라는 말이 좋아 보여도 희망이 이 세상에 국한되어 있는 한 사탄의 언어 체계에 속한 것입니다. 꿈이나 비전이라는 말이 멋져 보일지라도 눈에 보이는 이 세상 안에서 이루고 싶어 하는 일이라면 모두 다 우리를 죽음으로 끌고 가는 사탄의 언어 체계 속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부족함을 집어내는 능력이 얼마나 특별한지 사람들은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서도 부족함을 집어냅니다. 미래에 생길 부족함을 예상하면서 지금을 살아갑니다. 무슨 일을 할 때도 이 일이 다 끝났을 때 부족함이 생기지 않게 하려고 준비하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당연한 것 같고, 마땅한 것 같고, 치밀한 것 같고, 주도면밀해 보일 수 있으나 실은 사탄의 죽음의 언어 체계를 따르는 것입니다.

타락하기 전 인간은 지금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하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시키신 일의 결과가 부족함이나 넘침으로 끝날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에서 기쁨을 얻고자 하지 않고, 하나님과 밀착한 상태에서 기쁨을 누립니다. 본래 인간의 삶이란 하나님과 밀착한 상태에서 생긴 기쁨을, 하나님과 호흡하면서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표현하며 흘려보내는 과정입니다. 만나는 모든 대상에 하나님을 만난 기쁨으로 적셔가는 것입니다. 내가 한 일의 결과를 통해 기쁠 것이냐 만족할 것이냐를 따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사람은 사탄의 언어 체계에 기반한 족집게 지혜를 통해 현재는 물론이거니와 미래에 대해서조차 부족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 잘못한 일이 있다면 십자가에서 죽으면 됩니다. 그런데 과거의 부족했던 일을 끌어안고 지금도 괴로워합니다. 혹은 분노하고 억울해합니다. 이것은 모두 사탄의 언어 체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잘난 사람이 아닙니다. 누구나 과거에 잘못이 있습니다. 과거에 억울한 일을 당했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억울한 일을 당하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과거의 일을 끝까지 붙잡고 괴로워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고 이제 하나님과 호흡을 맞춰서 다시는 그러한 일이 없도록 정신 차리면 될 뿐입니다. 과거를 생각할 때 여전히 화가 치밀어 오른다면 마음에 사탄의 언어 체계를 받아들였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언어를 호흡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밀착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생각으로 이끌려지는 삶의 환경에서 부족함, 결핍, 모자람을 집어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며, 사랑하셔서 나와 관련된 모든 일을 생각하시고 이끌고 계십니다. 그리고 내 마음이 그러하신 하나님과 밀착되어 있어서 하나님이 기쁨입니다. 이러한 삶에서 부족함을 집어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사탄의 언어 체계가 들어오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분명하고, 보고 계심도 분명하고, 알고 계심도 분명하고, 사랑하셔서 나와 관련된 모든 일을 생각하시고 이끄심도 분명한데 이상하게 자꾸 부족함을 느낍니다. 이렇게 되어야 좋겠고, 저렇게 되어야 좋겠다는 바람이 계속해서 생겨납니다. 하나님과의 밀착이 분명하다면 시편 23편 1절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다윗의 노래 외에는 다른 말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하나님과 호흡을 맞춰,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서 사는 사람이 부족함을 느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세상에서 느끼는 부족함이란 실제 부족함이 아닙니다. 사탄의 언어 체계가 내 안에 들어와서 일으키는 망상이고 환각일 뿐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자면 ‘내가 돈이 없는 건 분명한 사실인데? 내가 건강이 안 좋은 건 분명한 사실인데? 아이들이 형통하지 못한 건 사실인데? 남들이 갖고 있는 명품이 없는 건 사실인데? 내 외모가 못생긴 건 사실인데?’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외에도 삶의 부족함을 느끼게 하는 이유는 다양할 수 있습니다. 배우자는 못돼먹었고, 자녀는 말썽이고, 부모님은 물려준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사실로 느끼고 부족함의 이유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탄의 언어 체계가 여러분 마음에 들어와서 환각 증상을 일으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밀착하고 하나님과 호흡하면 스데반 집사님처럼 돌에 맞아 죽는 상황에서도 부족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하나님과 밀착하고 하나님의 언어 체계로 호흡하면 몸이 돌에 맞아 죽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부족함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돌에 맞아 죽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을 정도로 편안한 상황에서도 다양한 부족함과 많은 결핍을 느낍니다. 이러한 부족함과 결핍은 모두 내 속에 들어온 사탄의 언어 체계가 만든 환상이고 환각이고 망상입니다.

문제는 이 부족함을 진심으로 느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어서 나는 진짜 불행할 수밖에 없다.’라는 마음은 환각에 빠져서 사탄의 언어 체계를 가지고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하는 주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앞선 설교에서 하나님이 생각하신 것을 이루시는 창조의 공터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곳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사탄의 언어 체계를 가지고 스스로 생각하는 자가 될 때 바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곳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탄의 언어 체계는 반드시 삶의 어떤 조건에서도 부족함을 집어내는 족집게의 지혜를 줍니다. 하나님과 마음이 밀착해서 하나님의 생각을 호흡하는 사람은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지만, 사탄의 언어 체계가 들어와 있는 사람은 아무 문제가 없는 상황에서도, 혼자 부족함과 결핍과 모자람을 느끼며 괴로워합니다. 이 일은 이루어졌으면 좋겠고, 저 일은 안 이루어졌으면 좋겠고, 이 사람은 있었으면 좋겠고, 저 사람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하는 동안 완전히 탈진한 상태에서 황무지 개간의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 7절을 보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밝음이란 주로 지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철학(哲學)에서도 밝을 철(哲)자를 쓰고, 제 이름에도 지혜를 보고 진리를 보라는 의미에서 밝을 철(哲)자를 썼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옳음과 진리를 보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서 내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판단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이제까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유일한 좋음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과의 밀착 상태가 끝나고 사탄의 언어 체계가 들어오자, 이로부터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서 내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려내게 되었습니다.

사탄의 언어 체계를 따르는 사람은 솔로몬과 같은 환경이 주어지더라도 눈에 보이는 상황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려내 계속해서 부족함을 느낍니다. 반면 하나님과 마음이 밀착하여 하나님을 유일한 좋음으로 여기는 사람의 경우는, 스데반 집사님이나 사도 바울처럼 온갖 고난으로 점철된 인생일지라도 부족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지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그 병에 ‘사탄의 사자’라는 별명을 붙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과 마음이 밀착하자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고 느꼈습니다. 병에 걸린 것이 빠지면 하나님의 은혜가 족한 게 아니었습니다. 병까지도 하나님의 은혜의 족함이었던 이유는, 그 병이 사도 바울 속에 있는 죄와 저주의 체질을 알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사탄의 언어 체계를 사용하고 싶어 하는 죄와 저주에 찌든 체질을 알기 때문에, 몸이 아픈 것까지도 하나님의 은혜가 완벽하게 이루어지기 위한 필수 조건임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과 마음이 밀착하여 하나님의 언어 체계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부족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몸이 아프기 때문에 부족함을 느끼고, 돈이 없어서 부족함을 느낀다면 모두 사탄의 언어 체계가 만들어 낸 망상에 시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서 내게 좋고 나쁨을 가려내서 부족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사탄의 언어 체계의 특징은 부끄러움과 열등감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판단하고 가려내기 때문에, 내가 갖지 못한 좋은 것을 남이 가졌을 때 열등감을 느끼고 수치심을 느낍니다. 욥은 하나님이 허락하심 가운데 사탄에 의해 이 세상의 모든 가치를 다 잃게 됩니다. 욥기 1장 21절을 보면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알몸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 것들 중에서 좋다고 여기는 가치가 하나도 없는 상태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 먹고 눈이 밝아졌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서 좋고 나쁨을 판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을 유일한 좋음으로 여겼기에, 눈에 보이는 것들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이 없었고 좋음과 나쁨과는 무관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밀착한 상태에서 유일한 좋음인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기쁨으로 눈에 보이는 것들을 적셔나갔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탄의 언어 체계를 통해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려내게 되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아무리 옆에 계셔도 소용 없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좋다고 여기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 대한 수치심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소형차를 타는 분이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를 데리러 갔습니다. 그런데 다른 부모들은 외제 차를 몰고 왔습니다. 내가 타는 국산 소형차가 초라해 보이고 어쩐지 부끄러움이 생깁니다. 이것이 사탄의 언어 체계가 돌아갈 때 생기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원하는 이유는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어깨 펴고 자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수치스러움의 반대가 자랑스러움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탄의 언어 체계가 들어와서 속이 텅텅 빈 상태입니다. 속이 비었기에 거지 근성이 나타납니다.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것들을 가지면 잘난 줄로 압니다. 반대로 눈에 보이는 것들을 못 가지면 부끄러운 줄 알고 수치스러워합니다. 이상한 것을 좋아하고 그것이 없으면 부끄러워하는 영적인 변태입니다.

이것은 모두 선악과를 따 먹고 스스로 생각하는 자가 되기 위하여 사탄의 언어 체계를 채택한 것입니다. 스스로 생각함이란 하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만이 스스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닙니다. 인간 본연의 모습이란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과 마음이 밀착해서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움직여 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기쁨의 강물로 만나는 모든 대상을 적셔갈 수 있습니다. 어차피 내게 좋은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라면 돈이 있고 없고는 나의 기쁨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언어 체계를 채택한다면 눈에 보이는 것 중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리게 됩니다. 그것들이 없으면 큰일 나는 줄로 알고 창피해합니다.

 

외제 차 못 탄다고 창피하다는 생각을 해보셨다면 그러한 생각을 한 자신을 창피하게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병이 난 상황이 모자란다고 생각하셨다면 그러한 생각을 한 자신이 모자란 상태입니다. 돈이 없다면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건강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없습니다. 건강이 좋은 것이라는 말은 사탄의 언어 체계가 만든 망상이고 환각입니다.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치신 이유는 하나님을 알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너희가 보듯이 나도 인간인데 내 안에는 하나님이 들어와 계신다. 너희도 나처럼 하나님과 밀착하라.’라는 것을 알리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치유 역사의 궁극적인 목적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정말로 유일한 좋음이라면 눈에 보이는 상황에서 돈이 없고, 건강하지 못하고, 자녀가 형통치 못하는 것이 나쁨이나 부족함의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유일한 좋음이라면 하나님과 마음이 밀착한 상태에서 생기는 기쁨의 강물로 무능한 남편, 까탈스러운 아내, 공부 못하는 자녀들, 돈이 없는 상황, 병든 상황을 적셔가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는 상황에서도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는데, 굳이 사탄의 언어 체계를 받아들여 스스로 생각하는 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흉내를 내며 이토록 괴로운 삶을 살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삶에서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이 있다면 사탄의 언어 체계에 의한 환상이고 망상이고 환각 증세가 나타나고 있는 중입니다.

부족함이 느껴질 때마다 환각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부족함이 느껴지는 것은 사탄의 언어 체계가 작동 중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는 십자가에서 곧바로 죽어야 된다.’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대로 방치한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끊임없이 떠오르는 환각에 짓눌려 죽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울해지고, 의기소침해지고, 주저하게 되고, 열등감과 수치심에 빠지고, 굴욕감에 절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마음이 들 때는 얼른 십자가에서 죽어서 사탄의 언어 체계가 만들어 내는 환각의 세계로부터 탈출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서 하나님과 밀착하는 일에 죽어라 온 힘을 다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내게 모자란 것은 하나님과의 밀착뿐입니다. 내게 부족한 것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는 죽음입니다. 우리는 오직 십자가로부터 하늘을 향해서만 부족함을 느끼고 소망과 희망과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하루 종일 이 말씀을 가지고 적용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다음 말씀이 진행될 금요일까지 이틀을 사는 동안에 내가 적용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은, 오늘 들은 이 말씀 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전해진 이 말씀이 완전히 내 것이 될 때 사탄의 언어 체계에는 치명적 타격을 가하게 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탄의 언어 체계를 십자가로 처리함으로써 잃어버린 하나님의 언어 체계를 회복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