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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

녹취문: 일상이 신이 내린 직장 생활인 삶_태승철 (창 41:1~57)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4.10.21|조회수88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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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일상이 신이 내린 직장 생활인 삶>의 줄거리 :

일상의 삶이 신이 내린 직장 생활이어야 하는 자들이 바로 선민입니다. 정착할 땅도 얻지 못한 채 사는 유랑민 히브리 족속의 아들 요셉이 정말 지독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억지로 인해서 초강대국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그러므로 요셉에게 애굽의 총리 자리는 문자 그대로 신이 내린 직장인 셈입니다. 이 요셉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도 일상을 신이 내리신 직장으로 사는 길을 들여다봅니다.

 

일상이 신이 내린 직장 생활인 삶

 

(창세기 41:1~57)

 

25. 요셉이 바로에게 아뢰되 바로의 꿈은 하나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

26. 일곱 좋은 암소는 일곱 해요 일곱 좋은 이삭도 일곱 해니 그 꿈은 하나라

27. 그 후에 올라온 파리하고 흉한 일곱 소는 칠 년이요 동풍에 말라 속이 빈 일곱 이삭도 일곱 해 흉년이니

28. 내가 바로에게 이르기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신다 함이 이것이라

29. 온 애굽 땅에 일곱 해 큰 풍년이 있겠고

30. 후에 일곱 해 흉년이 들므로 애굽 땅에 있던 풍년을 다 잊어버리게 되고 이 땅이 그 기근으로 망하리니

31. 후에 든 그 흉년이 너무 심하므로 이전 풍년을 이 땅에서 기억하지 못하게 되리이다

32.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니

33. 이제 바로께서는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택하여 애굽 땅을 다스리게 하시고

34. 바로께서는 또 이같이 행하사 나라 안에 감독관들을 두어 그 일곱 해 풍년에 애굽 땅의 오분의 일을 거두되

35. 그들로 장차 올 풍년의 모든 곡물을 거두고 그 곡물을 바로의 손에 돌려 양식을 위하여 각 성읍에 쌓아 두게 하소서

36. 이와 같이 그 곡물을 이 땅에 저장하여 애굽 땅에 임할 일곱 해 흉년에 대비하시면 땅이 이 흉년으로 말미암아 망하지 아니하리이다

37.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

38.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39.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40.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41.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하고

42.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43.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의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에게 애굽 전국을 총리로 다스리게 하였더라

44.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나는 바로라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이 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 하고

45. 그가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라 하고 또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그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니라 요셉이 나가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라

 

 

본문은 읽을 때마다 찌릿한 감동을 줍니다. 이제 바로가 꿈 이야기를 하고 요셉이 해석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바로가 요셉에게 ‘사브낫바네아’라는 이름을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브낫바네아는 ‘생명의 부양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에게서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낳게 됩니다. 이후 요셉은 해몽한 대로 칠 년 풍년과 칠 년 흉년을 대비하기 위한 총리직을 수행하게 됩니다. 이러한 본문을 중심으로 ‘일상이 신이 내린 직장 생활인 삶’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루틴한 일상을 살아갑니다. 다만 선민의 삶은 신이 내린 직장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비유적으로 철밥통이라는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철밥통은 안정적이고 해고의 염려가 없는 직장을 일컫습니다. 그런데 철밥통보다도 더 위에 있는 직장을 가리킬 때 신이 내린 직장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정리해고도 없고, 부도 걱정도 없고, 정년퇴직이 보장되는 공기업이나 공무원 등을 신이 내린 직장으로 칭하게 됩니다.

본문에서 감동적으로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도가 억지스러울 만큼 듬뿍 들어간 결과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에게 애굽의 총리 자리는 문자 그대로 신이 내린 직장입니다. 요셉은 가나안 변방에 살던 히브리 유랑민의 아들로서 근동 세계의 중심 국가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하나님의 억지스러움을 통하여 요셉에게 주어진 총리 자리는 바로 신이 내린 직장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이 내린 직장인으로 사는 것은 요셉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아닙니다. 선민이면 누구나 이 땅에서의 삶이 신이 내린 직장 생활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이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부러워하고 욕심내야 할 것은 요셉의 총리 자리가 아닙니다. 신이 내린 직장인의 삶을 염두에 두고 지켜나갈 수 있어야 됩니다. 신이 내린 직장인의 삶을 살 수 있다면 총리가 못돼도 상관이 없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신이 내린 직장이 맞는지 스스로 질문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직장인은 자기가 속한 직장에서 역할이 부여됩니다. 역할이 없으면 그는 직장인이 될 수 없습니다. 신이 내린 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이 내린 직장인이 되려면 역할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은 요셉이 애굽의 총리라는 신이 내린 직장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로부터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주시는지 살펴봅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다분히 너무나 농후한 의도를 가지고 역할을 만들어 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 때문에 요셉은 총리가 되었습니다. 스스로 역할을 만들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문제를 만드시고 그 문제를 해결할 사람으로서의 역할을 주심으로써 신이 내린 직장인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어떤 문제를 의도적으로 만드셨는지 생각해 봅니다.

요셉은 바로의 꿈을 듣고 칠 년 풍년 뒤에 칠 년 흉년이 따라올 것을 해몽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대로 이 해몽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총리가 된 요셉은 칠 년 풍년 동안 매년 곡식의 오 분의 일을 거두게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장면을 보면 주권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너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도 좀 억지를 부리신다는 느낌이 듭니다. 칠 년 풍년과 칠 년 흉년을 계획하시지 말고, 십사 년 동안 평년작을 이루게 하셔도 좋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십사 년 동안 평년작을 이루시게 되면 요셉의 역할이 없습니다. 이것은 요셉의 역할을 만드시려고 칠 년 풍년 칠 년 흉년의 계획을 세우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문제를 발생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을 요셉에게 주십니다. 이로부터 요셉이 애굽의 바로에 의해 총리가 되게끔 이끌어 가십니다. 내가 신이 내린 직장인이 되는 방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칠 년 풍년과 칠 년 흉년의 공식을 따라 문제를 만드심으로써 내게 역할을 주십니다. 만약에 주권자 하나님께서 아무 문제도 없이 내 일상을 인도해 가신다면 나에게는 역할이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신이 내린 직장인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이 믿음의 나를 찾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하여 세상에 대해 죽습니다. 육체를 입고 있는 나의 삶을 더 이상 진행하지 않고, 예수님의 몸을 입은 믿음의 나를 찾아서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직면하는 상태를 유지해 갑니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의 몸은 여전히 땅에 있습니다. 이 몸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기능과 혼연일체가 되어 있습니다.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육체로 이루어진 체계를 이용하십니다. 이로부터 역할이 주어지고 신이 내린 직장인으로 산다는 이야기도 가능해집니다. 말씀드린 대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간 뒤에도 우리 몸은 여전히 세상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 몸을 움직이는 삶은 요셉이 총리가 된 것과 같은 과정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요셉의 삶은 우리에게 가장 뚜렷하게 제시된 신이 내린 직장인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신이 내린 직장이 아니라 이 세상이 허락한 직장과 역할을 찾아서 일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육체를 입고 있는 나로 살고 있기 때문에 육체로 만나게 되는 관계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관계 속에서 자기의 역할을 찾습니다. 그런데 관계 속에서 역할을 찾는 모습을 보면 공식이 똑같습니다. 먼저 이 세상에 대해 소원과 바람을 갖습니다. 그러면 지금으로부터 소원이 이루어지는 지점까지 거리가 생기게 됩니다. 이제 그 거리를 없애는 것을 자기 역할로 삼습니다. 그 역할을 감당하며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직장인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이든지 주부든지 남편이든지 아내든지 아버지든지 어머니든지 형제든지 자매든지 상관 없습니다.

직장인들이 월급을 받으려면 사장님이 원하는 목표치를 이루는 것을 역할로 삼게 됩니다. 결국 직장인이란 문제를 해결해서 사장님이 원하는 목표 지점에 도달하게 만드는 역할을 부여받은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직간접적으로 세상에 대해 소원과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주어지는 역할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누구도 참된 의미에서의 신이 내린 직장에서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선민은 다릅니다. 선민은 신이 내린 직장에서 사는 자들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선민의 본업이 소개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냈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여러분도 스스로 답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은 스스로 생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존재의 있음을 필요로 합니다. 다시 말해 나는 다른 존재의 존재감을 가짐으로써 안정적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다른 존재에 의존하는 상태입니다. 이로부터 영광의 하나님의 의미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이란 내 마음이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존재감을 느끼지 않고 오직 하나님에 대해서만 존재감을 느끼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을 바탕으로 내가 존재할 때 진정한 평안이 생기게 됩니다.

마음에는 또 한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마음은 비어있기 때문에 채움으로써 만족을 얻으려고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비어있게 만들어졌기에 채워지려는 욕구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마음을 좋은 것으로 채우고자 합니다. 영광의 하나님이란 내 마음을 오직 하나님의 좋음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만을 열정적으로 소망하는 상태가 됩니다.

아브라함이 보여준 선민의 본업이란 바로 이렇게 하나님 존재감의 충만함과 하나님 좋음의 충만함을 열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의 몸을 입고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서 하늘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럴 때 내 본업은 충실하게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는 몸이 움직여야 되는 일들이 발생합니다. 직장인으로서, 단체에 소속된 사람으로서, 가족으로서 몸은 움직여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몸이 움직여야 할 때 마음이 육체를 입은 ‘실제 나’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소원하고 바람을 갖는 중에 자기 역할을 찾아냅니다. 마음과 육체가 붙어버린 ‘실제의 나’는 마귀에 의해서 타락과 저주받은 상태입니다. 내가 세상에 대해서 소원과 바람을 갖고 이로부터 과제와 역할을 찾는 것은 마귀가 내린 직장을 사는 것입니다. 반면 아브라함의 자손인 선민들은 본업에 충실한 자들입니다. 이 세상을 향하여 소원이나 바람을 갖지 않습니다. 바랄 수 있고 소원할 수 있는 모든 인격적 기능은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집중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소원과 바람이 없기에 나의 역할을 찾아낼 수도 없습니다.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이 사장님의 바람을 이루려 하는 것은 월급에 대한 바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역할에는 직간접적으로 소원과 바람이 관여되어 있습니다. 소원과 바람이 있기에 스스로 역할을 만들지만, 이것은 마귀가 내린 직장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백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면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만을 열정적으로 소망하게 됩니다. 그럴 때 이 세상에 대해서는 소원이나 바람이 없기에 스스로 역할을 만들어 낼 수도 없습니다. 이 상태에서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보여주신 칠 년 풍년과 칠 년 흉년의 공식을 따라 우리 몸이 움직여야 하는 상황을 만드십니다.

내가 엄마라면 몸을 움직여야 할 다양한 상황이 있습니다. 자녀들을 위해 옷을 사야 합니다. 밥을 준비해야 합니다.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만을 소원하고 있다면 자녀에 대한 소원을 가질 수 없게 됩니다. 자녀에 대한 소원이 없는데도 자녀를 위해 해야 할 행동의 필요가 생깁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칠 년 풍년과 칠 년 흉년의 공식을 따라서 내게 문제를 제시하시고 내게 역할을 제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밥을 지어서 자녀에게 먹이더라도 내 본업에 충실하지 않고 육체를 입은 나로 살 때는 마귀의 직장인으로서 내가 역할을 찾은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 마음이 육체와 붙어있는 상태에서 내가 소원하는 상태로부터 역할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타락과 저주에 빠져있는 상태에서 세상을 향해 소원하는 중에는 그 소원이 만들어 내는 역할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마귀가 내린 직장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똑같이 자녀를 위해 밥을 하더라도 신이 내린 직장인으로서 살 수 있습니다. 나의 소원과 바람이 전부 하늘에 계신 하나님뿐이어서 마음이 하나님에 대한 열망으로 충만한 상태로 유지된다면, 자녀를 위해 밥을 하는 상황도 하나님이 나를 위해 만드신 문제가 됩니다. 칠 년 풍년과 칠 년 흉년의 공식을 따라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만드신 문제를 풀어내는 역할을 하기에 똑같이 밥을 해도 신이 내린 직장에서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 본업에 충실할 때 이 세상에 대해 소원과 바람이 없어집니다. 그럴 때 이제까지 살아온 모든 루틴한 일들의 의미는 달라집니다. 나는 스스로 역할을 찾을 수 없지만 하나님이 내가 행해야 될 일들을 만들어 내십니다. 이제부터 신이 내린 직장인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요셉은 애굽 전역에서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으로 충만했습니다. 하나님이 첫 번째 존재감의 대상이었기에 그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우고자 욕구했습니다. 마음속에서 있다고 느끼는 대상이 하나님뿐이기에,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대상도 하나님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존재감에 휩싸여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요셉에게 아무도 손댈 수 없는 칠 년 풍년과 칠 년 흉년의 문제를 주십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선민에게 부여하시는 신이 내리는 직장 생활인에 대한 두 번째 특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꿈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에 대하여 생각과 감정과 의지로 받아낼 수 있는 전매 특허권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바로가 요셉에게 총리의 자리를 제안하는 장면은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39~40절을 보면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라고 했고, 44절에서는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나는 바로라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이 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 하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문제를 만드시면서 요셉에게 역할을 주셨습니다. 이제 요셉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바로의 말은 요셉에게 지시하거나 충고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심지어 히브리 유랑민의 아들 30세 청년 앞에서 바로조차도 명령하거나 지시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요셉이 역할을 수행해 나갈 때 이 세상에서는 아무도 충고하거나 지시하거나 제한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꿈을 해석해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요셉의 지혜를 은사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총리 자리에 서기 전에도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이야기가 아니면 이 세상의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겠다는 용기와 결단을 갖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요셉이 해몽해서 하나님의 뜻을 해석한 것을 지혜의 은사를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지혜의 은사가 왜 주어졌는가에 대해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하필 요셉만 하나님이 이 땅에서 하시려는 일에 대해 들을 수 있고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일까요? 요셉의 마음에는 ‘나는 앞으로 인생을 살아갈 때 겪게 될 문제에 대해서 그 누구에게도 묻지 않을 것이고 그 누구의 지시를 따르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 뜻대로 할 것은 더더욱 아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움직일 것이다.’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지혜 이전에 요셉에게 있었던 용기이자 결단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무슨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문제를 해결할 답을 얻기 위하여 어떻게 하십니까? 책을 읽습니까? 전문가를 찾아갑니까? 몸에 조금만 이상이 느껴지면 당장 의사에게 달려갑니까?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어마어마한 용기와 결단을 가지고 ‘내 생애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나는 하나님에 의해서 들려지는 지시 이외에는 따르지 않겠다. 내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기능에 내려오는 하나님의 지시가 아니라면 움직이지 않겠다.’라고 여겼습니다. 이러한 용기와 결단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행하실 일들을 꿈으로 보여주시기도 하셨고 다른 사람의 꿈을 해석할 수 있게도 해주셨습니다.

요셉은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지혜를 은사로 받기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면 절대 듣지 않겠다는 용기와 결단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사람이기에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도 움직이셨습니다. 그렇기에 바로조차도 요셉이 총리로서 나라를 다스릴 때 왕인 자신도 지시하지 않겠음을 밝힙니다. 이제까지 해온 대로 하나님께만 지시를 받아가며 일할 것을 부탁했던 것입니다.

왜 우리는 요셉처럼 하나님의 뜻을 알아듣지 못할까요? 요셉에게는 은사로서 특별한 하나님의 선물이 주어졌는데 우리에게는 그러한 은사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몸이 움직여야 할 상황에서 요셉과 같은 모습을 보인 적이 없습니다. 요셉은 심지어 총리가 되어서도 왕의 지시가 아닌 하나님의 지시를 듣고자 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이러한 용기와 결단이 없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이러한 모습을 보였기에 하나님은 요셉 앞에서 바로를 기게 만드십니다.

바로는 자신의 꿈도 해석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꿈의 내용을 알았습니다. 요셉이 아니었으면 나라가 망할 뻔했습니다. 칠 년 풍년이 일어나는 동안 흥청망청 즐기다가 칠 년 흉년 뒤에는 멸절할 것이 뻔합니다. 이러한 해몽을 듣고서 바로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셉이 하나님이 지시한 것 외에는 움직이지 않겠다고 용기를 가지고 결단했기에 하나님은 꿈을 해석할 지혜도 주셨고 바로가 알아서 기게 만드시기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본업을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육체를 입고 있는 실제의 내가 죽었다고 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실제의 나’는 죽지 않았습니다. 실제의 나는 계속됩니다. 계속되는 ‘실제의 나’라는 바탕 위에서 ‘믿음의 나’가 태어나는 것이기에 이것을 속인다고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서 ‘실제의 나’가 끝났다고 착각합니다. 실제로는 육체를 입은 나를 나라고 생각하며 살면서도 입으로만 ‘나는 예수를 믿어서 세상에 대해 죽었다. 이전의 나는 죽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점을 제대로 인식하지 않으면 믿음은 없습니다. ‘실제의 나’는 계속됩니다. 계속되는 바탕 위에서 ‘믿음의 나’로 빠져나와야 합니다. 그렇기에 속인다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에서 하나님을 유일한 대상으로 상대하다 보면 이 땅에서는 소원과 바람이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소원입니다. 이제 내 앞에 있는 배우자나 자녀들도 하나님이 만드신 문제가 되고 역할이 됩니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주권자이십니다. 나와 가깝고 친한 전문가보다도 하나님은 나에게 더 가까이 계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지시와 하나님의 음성만을 듣겠다는 용기 어린 결단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지시를 내리시지 않는다면 별다른 행동 없이 그대로 간다.’라는 정도의 결단을 해야 합니다.

앞서 본업에 충실할 때 세상에 대한 소원과 바람이 없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소원과 바람이 없기에 내 역할을 만들지 못합니다. 내 몸이 움직여야 하는 모든 상황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내 앞에 제시하신 문제들이고 내게 허락하신 역할들이 됩니다. 그리고 이 역할을 행함에 있어서 전적으로 하나님 한 분만의 지시를 따르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 되는 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플 때도 의사를 찾아가지 말라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나는 내 몸을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몸을 건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라는 역할을 스스로 부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마귀가 내린 직장에서 사는 것이 됩니다. 내 마음은 건강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을 챙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간구하는 본업에 충실한 상태라면 몸이 아픈 것에 대해서는 역할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몸이 아플 때 하나님이 의사를 찾아가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먼저 본업에 충실하게 되면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모든 문제는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문제입니다. 이로부터 역할을 찾고 수행함에 있어서 하나님께 묻는데 마음속에서 병원을 가라는 지시를 주신다면 가면 됩니다. 가지 말고 조금만 버텨보라고 하신다면 버티면 될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육체를 입은 실제 나의 상태를 유지하면서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착각합니다. 육체를 입었기 때문에 이 세상에 대한 소원이 생깁니다. 소원이 생기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마음이 비어있도록 지어졌기에 채움에 대한 소원은 꼭 생깁니다. 문제는 육체를 입고 있는 바람에 세상에 대한 소원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마귀가 내린 직장을 살면서 하나님을 찾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럴 때 신이 나에게 내린 직장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신에게 직장을 내리는 꼴이 됩니다. 내 소원과 관계된 역할을 하나님께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인간인 내가 내린 역할을 행하는 직장인이 되셔야만 합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착각하는 종교인들로 온 세상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일 날 소리입니다. 마귀가 내린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내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하여 하나님에게 역할을 부여하는 것을 기도라고 생각한다면 망조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고 본업에 충실하다면 세상에 대한 소원이나 바람은 없습니다. 내 몸이 움직여야 하는 모든 상황에서 내가 무엇인가를 이루겠다고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내 몸을 움직이라고 역할을 제시해 주시는구나. 칠 년 풍년 칠 년 흉년의 공식을 따라서 내게 역할을 제시해 주고 계신다.’라고 여기게 됩니다. 이럴 때 내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오직 하나님의 지시만 따르겠다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요셉은 바로의 신하이면서도 바로조차도 제치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 역할을 위해서 지시할 자는 누구입니까?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께 지시받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여러분의 뜻대로 할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지시임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존재감으로 충만하고 하나님의 좋음으로 충만하다면, 여러분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떠오르는 모든 아이디어는 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먼저 본업에 충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으로 충만하고 하나님의 좋음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이것이 확실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 없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이야기는 전부 거짓말입니다. 가장 위험한 거짓말은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세상에 대한 소원과 바람이 여전히 득실거린다면 그것은 무조건 거짓말입니다. 이것이 고쳐지지 않는다면 귀신 들린 것입니다.

 

아무쪼록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여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 본업에 충실한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이 땅에서는 하나님이 칠 년 풍년 칠 년 흉년의 공식을 따라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시는 문제에서 여러분의 역할을 찾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역할을 수행해 나감에 있어서 내 마음이 본업에 충실하여 하나님의 존재감 충만과 하나님 좋음의 충만을 확인하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따라 행동하며 신이 내린 직장 생활을 날마다 이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서 직업이 있든 없든, 직장이 있든 없든, 무조건 우리의 일상은 신이 내린 직장인의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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