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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

녹취문: 가치관이 바뀌면 바람이고 신령이다_태승철 (창 42:1~25)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4.10.24|조회수70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가치관이 바뀌면 바람이고 신령이다>의 줄거리 :

믿음의 나는 가치관이 바뀐 사람입니다. 사람이 믿음 안에서 가치관이 바뀌면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는 부는 바람이 되고 신령이 됩니다. 칼로 벨 수 없고 죽일 수 없고 상해와 손해를 입힐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은 그 사람의 주변이 온통 하늘나라가 임하는 영역이 됩니다. 삶의 모든 고통은 가치, 즉 중요하고 소중한 것을 잃거나 얻지 못하게 됨을 뜻합니다. 이럴 때 가치를 잃어버림을 두려워 말고 아예 절대로 잃어버림이 없는 가치로 가치관을 바꾸시면 손해나 상실이 없는 바람이고 신령이 됩니다.

 

가치관이 바뀌면 바람이고 신령이다

 

(창세기 42:1~25)

 

1. 그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

2.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

3. 요셉의 형 열 사람이 애굽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갔으나

4. 야곱이 요셉의 아우 베냐민은 그의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생각에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5.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양식 사러 간 자 중에 있으니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음이라

6.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7. 요셉이 보고 형들인 줄을 아나 모르는 체하고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곡물을 사려고 가나안에서 왔나이다

8. 요셉은 그의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더라

9.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10.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아니니이다 당신의 종들은 곡물을 사러 왔나이다

11. 우리는 다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확실한 자들이니 당신의 종들은 정탐꾼이 아니니이다

12.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아니라 너희가 이 나라의 틈을 엿보러 왔느니라

13. 그들이 이르되 당신의 종 우리들은 열두 형제로서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 막내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

14.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한 말이 이것이니라

15. 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희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너희 막내아우가 여기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리라

16. 너희 중 하나를 보내어 너희 아우를 데려오게 하고 너희는 갇히어 있으라 내가 너희의 말을 시험하여 너희 중에 진실이 있는지 보리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과연 정탐꾼이니라 하고

17. 그들을 다 함께 삼 일을 가두었더라

 

 

‘가치관이 바뀌면 바람이고 신령이다’라는 제목의 의미를 피부에 닿게 풀어보자면 ‘믿음의 나’와 ‘실제의 나’를 염두에 두면 좋습니다. ‘믿음의 나’는 예수님의 몸을 입은 자라는 의식을 켜놓고 사는 상태를 말합니다. ‘실제의 나’는 육체를 입은 자의 의식으로 사는 상태를 말합니다. ‘믿음의 나’로 유지될 때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가치관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가치관이란 쉽게 말해 ‘무엇이 좋은 것인가, 무엇이 소중한 것인가, 무엇이 꼭 있어야 할 것인가, 무엇이 없어지면 견딜 수 없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입은 자로서 마땅히 가져야 될 가치관은 ‘믿음의 나’입니다. 이러한 가치관으로 육체를 입은 ‘실제의 나’의 가치관을 바꾸면 바람이고 신령이 됩니다. 칼로 벨 수 없고, 죽일 수 없고, 세상 그 누구도 손해나 피해를 줄 수 없는 철갑을 두른 불사신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나는 평범한 동네 사람이고 평범한 가장이고 직장인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나’를 유지하여 믿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이제 여러분은 그 평범함을 거부해야만 합니다. 특별함을 원치 않더라도 ‘믿음의 나’가 되면 특별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특별함이 바람이고 신령입니다. 바람 같은 존재가 되고 신 같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나’가 되는 것이 믿음의 사람이자 선택받은 사람에게 필연적인 일이라면, 바람이 되고 신령이 되는 특별함 또한 필연적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몸을 입은 자로서 가치관이 바뀔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마음에 고통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불안하거나 두렵거나 걱정하며 평안이 깨질 때가 있습니다. 그 근원적 뿌리를 캐보면 전부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거나 좋아하는 것들을 잃어버리거나, 꼭 갖고 싶은데 갖지 못할 때 위기감이 생깁니다. 마음에는 고통이 느껴지고 걱정이 생기고 두려워집니다. 대부분의 두려움은 육체를 입고 있는 상태에서 이 세상 것에 대한 가치관이 작동하는 중에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이유 없는 두려움이나 걱정이나 불안을 느낀다면 육체를 입은 상태에서의 가치관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치관이 작동하는 중에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것을 얻지 못하게 될까? 갖고 있는 것을 잃거나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가치로부터 멀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예외 없이 육체를 입은 상태에서의 가치관이 작동할 때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이럴 때는 불안을 가져다주는 세상 가치관에 대한 관계를 얻거나 확보하거나 지켜서 극복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가치관을 바꿔야 합니다. ‘믿음의 나’가 가져야 할 마땅한 가치관으로 바뀌면 나는 이 세상에서 바람이고 신령이 됩니다. 바람이고 신령이기를 원하지 않아도 그렇게 됩니다. ‘믿음의 나’의 핵심은 가치관이 바뀌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소중한 대상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신령이 되고 바람이 되는 것은 싫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믿음의 나를 지켜내면 운명적으로 바람이고 신령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리키는 용어 중에 영이신 하나님을 뜻하는 루아크(רוּח)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헬라어로는 프뉴마(πνεῦμα)라고 합니다. 히브리어 루아크나 헬라어 프뉴마는 모두 바람을 뜻합니다. 우리 또한 바로 이러한 바람이자 신령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요셉은 이제 형들을 만납니다. 형들이 17세의 요셉을 애굽으로 가는 대상들에게 판 뒤로 20년 세월이 지났습니다. 노예로 팔린 요셉은 20년이 지나는 동안 우여곡절 끝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한편 형들은 심각한 흉년을 맞이하여 식량이 떨어지자 곡식을 사러 애굽으로 옵니다. 요셉은 30살에 총리가 되었고 7년 풍년이 지나 흉년의 기간을 맞이한 시점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형들에게 자기의 정체를 밝힐 때 앞으로 5년 더 흉년이 지속될 것임을 이야기합니다. 이 사이의 기간이 1년 정도 있음을 염두에 두자면 요셉이 형들과 처음 만났을 때 요셉은 38살이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이러한 만남의 자리에서 요셉은 정체를 가장하여 형들이 자신을 알 수 없게 합니다. 그리고 애굽에 노예로 팔리고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지금까지의 일들을 결산합니다. 우리는 요셉과 형들의 만남을 통해 이들의 처지에 왜 이런 현격한 차이가 드러날 수밖에 없게 되었는가를 보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요셉의 꿈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요셉은 일찍이 형들의 곡식단이 요셉의 곡식단을 둘러서 절하는 꿈을 꾸었고, 이제 형들이 곡식을 구하기 위해 요셉 앞에 찾아와 무릎을 꿇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처지는 하늘과 땅 차이로 벌어졌습니다. 이러한 결과로 이어지게 된 20년 세월을 지배하는 것은 가치관입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읽지 않은 부분을 보면 가치관의 문제를 알 수 있는 대목이 등장합니다. 요셉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형들을 궁지에 몰아넣습니다. 처음에는 아홉 사람을 삼 일을 가둬두고 한 사람을 보내 베냐민을 데려오게 했다가, 마음을 바꾸어서 한 사람을 가둬두고 아홉 사람을 보내 베냐민을 데려오게 합니다. 이렇게 요셉이 총리의 힘으로 형들을 몰아세우자, 궁지에 몰린 형들은 과거를 떠올립니다. 그 모습이 21~22절에서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 하니”라고 묘사됩니다.

형들이 요셉을 판 사건을 가치관의 관점에서 생각해 봅니다. 요셉의 가치관과 형들의 가치관은 달랐습니다. 가치관의 다름이 20년을 지나오는 동안에 엄청난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형들은 기근에 쫓겨 애굽으로 와서 무릎을 꿇고 요셉은 총리의 자리에서 형들의 절을 받으며 천하에 임한 기근에서 만백성을 살리는 위치에 있습니다. 20년을 서로 다른 가치관으로 사는 동안 이러한 하늘과 땅 차이가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형들은 시기와 질투로 요셉을 팔았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편애를 받는 아들의 신분에서 처참한 노예의 신분으로 떨어뜨린다면 요셉이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이 자체가 가치관에 의한 생각입니다. 형들은 아들의 신분에서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하는 것이 견딜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들에게 노예의 신분은 나쁜 것이고 아버지 야곱의 아들이라는 신분은 월등하게 좋은 것입니다. 이것이 형들이 가지고 있던 가치관의 내용입니다. 그렇기에 자기들이 치를 떨고 싫어할 일을 강제했습니다. 가치관이 작동하는 대로 자기들이 생각하는 가장 나쁜 일, 가장 안 좋은 일을 정하고 그것을 요셉에게 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형들과는 완전히 다른 가치관을 가졌습니다. 요셉은 꿈을 꾸는 사람이었고, 양을 칠 때 형들의 잘못된 행동을 아버지에게 보고하였으며,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뿌리쳤습니다. 이러한 사건들로부터 요셉의 가치관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이 마음에서 잠시라도 잃어버리기를 두려워한 가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형들은 육체를 입고 있는 사람으로서만 생각할 수 있는 가치관을 가지고 요셉을 대했던 것과 대조적입니다.

사도행전 7장을 보면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을 돌로 치는 사람들이 생각할 때 육체를 입고 있는 가치관에서 가장 안 좋은 일이란 바로 육체를 잃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스데반 집사님의 목숨을 빼앗습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님은 전혀 다른 가치관을 보입니다. 55~56절을 보면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라고 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인자이신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나님을 보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해칠 수 없는 바람이고 신령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좋아하는 것을 위해 삽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은 24시간 돈을 생각합니다. 의식의 저변에 ‘돈을 벌고 싶다, 돈을 잃고 싶지 않다, 내게서 돈을 빼앗아 가는 자가 원수다.’라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육체를 입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가할 때는 자기에게 좋다고 여기는 것을 빼앗고자 합니다. 형들의 가치관 또한 이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들이 육체를 입고 있는 상태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것을 동생 요셉에게서 뺏고자 했습니다. 이를 통해 요셉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릴 수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형들은 모질게 마음을 먹고 요셉에게 피해와 손해와 상실을 퍼붓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바람이고 신령이었습니다. 요셉의 마음에서 가장 좋다고 여긴 가치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었습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은 절대로 돈을 잃지 않고자 합니다. 요셉은 이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절대로 하나님을 잃지 않고자 했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이 가치관의 핵심이었기에 하나님을 잃고 싶지 않아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지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존재감과 소유감을 충만하게 유지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사람은 바람이고 신령입니다. 이 세상에서 육체를 입고 있는 자들이 그들의 가치관에 입각하여 어떤 손해를 입히고 어떤 상실감을 주더라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이것이 영이신 하나님이 가치관의 핵심인 자의 특징입니다. 영이신 하나님만을 좋음이라고 여기는 자는 이 세상에서 육체로 사는 동안에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바람이고 신령입니다. 싫어도 바람이 되고, 원치 않아도 신령이 됩니다.

 

요한복음 3장 6~8절을 보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최고로 좋은 것을 찾았을 때 ‘나’라는 인격이 독립적으로 성립합니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난 사람이 어떤 사람이고, 육으로 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육으로 난 사람은 육체를 입고 있는 상태에서 좋음을 찾습니다. 어린아이는 장난감을 좋아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장난감만큼의 인격입니다. 자라면서 돈을 좋아합니다. 이제 돈으로부터 그 인격이 태어납니다. 이처럼 내가 최고로 좋다고 여기는 그것이 내 인격을 독립적으로 태어나게 합니다. 이로부터 영으로 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영이신 하나님을 최고로 좋게 여기는 상태에서 나의 인격이 태어납니다. 돈이 최고로 좋은 상태에서 인격이 태어나면 돈이 지배하는 인격이 됩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최고로 좋은 상태에서 인격이 태어나면 하나님이 지배하는 인격이 됩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 돈을 잃고 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을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잃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유지되는 사람의 특징은 바람입니다.

또 요한복음 10장을 34~35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이란 곧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모든 언어 체계는 가치관을 중심축으로 형성됩니다. 사람의 언어 속에는 그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관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은 단순히 문자를 외운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언어 체계에 담긴 핵심 가치를 나의 가치로 받아들임을 의미합니다.

성경 66권을 통째로 다 외워도 얼마든지 육체를 입은 사람으로서의 가치관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성경 구절을 외우는 것과는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성경 구절을 하나도 못 외워도 말씀을 형성하고 있는 핵심 가치관을 내 가치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태를 신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곧 ‘믿음의 나’가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내가 죽었음을 고백합니다. 이것은 육체를 입은 ‘실제의 나’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실제로 나의 육체가 죽은 것은 아님에도 죽었다고 말하는 이유는 육체를 입은 나에 대해 의식을 주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몸을 입은 나에 대해서만 의식을 줍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에서 죽은 상태란 육체를 입은 ‘실제의 나’가 살아서 움직일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는 것입니다. ‘실제의 나’는 없어지는 게 아니라 활성화되는 기회를 주지 않는 상태를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입은 나에게 의식을 켜놓음으로써 예수님의 몸을 입은 믿음의 나로서만 살아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몸을 입은 나는 어쩔 수 없어서라도 부활과 승천을 따라 올라가 하나님을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의식에서 육체의 몸을 입은 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몸을 입은 자라는 의식을 켜놓는 ‘믿음의 나’가 유지되면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고 하나님에 대한 소유감을 갖게 됩니다. 영이신 하나님만이 나의 유일한 가치가 되십니다. 이렇게 거듭난 자가 바람이고 신령이 됩니다. 세상에서 육체를 입은 자들이 가하는 어떠한 손해나 상해의 의도에도 베이지 않고, 죽지 않으며, 손해나 상실을 입지 않습니다.

 

이렇게 바람이 되고 신령이 되는 것은 우리의 내적인 면에서만 이루어지는 변화가 아닙니다. 형들은 자신들의 가치관에서 가장 안 좋은 상황을 요셉에게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내적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의 존재감과 소유감을 충만히 가지기 위하여 몸부림을 쳤습니다. 이러한 요셉은 바람이고 신령입니다. 형들의 의도가 날 선 칼이 되어 요셉의 생애를 향해 가해졌지만, 요셉은 바람이기에 벨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요셉의 바람과 신령의 상태는 단지 내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영이신 하나님만을 유일한 좋아함의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뜻과 계획이 추진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어떤 치명적인 위해를 받을지라도 1cm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이 이루어지는 길에서 바람이자 신령이 된 사람을 한치도 벗어나게 할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영이신 하나님만이 유일한 좋음으로 가치관을 확립하고, 오직 하나님의 존재감과 하나님의 소유감을 충만하게 하는 것을 본업으로 삼고 유지해 나간다면, 지구상의 80억 인구가 나를 대적하더라도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1cm도 벗어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무섭고도 어마어마한 일이 가치관 하나를 바꿈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무엇이 좋은가?’라는 질문은 삼척동자도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나의 가치관을 드러냅니다.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에는 세상 것이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우리 마음에 불안과 염려가 생기고 걱정이 생기고 평안이 깨지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육체를 입고서 이 세상 것에 대해 갖게 된 가치체계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내가 좋아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빼앗길 수 있다는 걱정을 하는데 그것들을 유지하려고 해서는 안 되고 가치를 바꾸어야만 합니다.

가치를 바꾸려면 육체를 입은 ‘실제의 나’에서 머물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여겨서 이제 육체를 입은 ‘실제의 나’라는 자아의식을 꺼야 합니다. 실제로 내 육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의식을 끄는 것입니다. 내 의식이 켜져야 할 대상은 예수님의 몸을 입은 ‘믿음의 나’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입었기에 내가 하늘에 올라가 마주할 수 있는 상대는 하나님뿐입니다.

 

실제로 삶에서 나를 못마땅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육체를 입고 있는 삶에서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 빼앗아 가는 사고나 문제나 어려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가치의 문제입니다. 원수는 내게서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가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육체를 입은 원수가 내게서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가고자 한다면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를 바꾸면 됩니다. 육체를 입은 나로서 육체를 입은 원수에게 대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가 붙잡을 수 없는 다른 가치관으로 바꿔야 합니다. 세상 가치관을 지키려 해서는 안 됩니다.

돈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는 돈이라는 가치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치를 돈에서 하나님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의 나’의 모습을 보일 때 돈 문제는 더 이상 나를 베는 칼이 아닙니다. 돈 문제 앞에서 나는 바람이 되고 신령이 됩니다. 자녀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 문제도 결국 따져보면 세상의 가치와 연결됩니다. ‘자녀가 이렇게 살다 보면 돈을 못 버는 사람이 될 것이다. 사회에서 제구실 못 할 것이다.’라는 걱정에서 비롯됩니다. 우리가 걱정하는 70~80%의 문제는 결국 돈 아니면 건강입니다. 내가 가진 핵심 가치를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적용해서 문제의식을 느끼는 것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상태에서 느끼는 남편의 문제란 결국 남편이 돈을 못 버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육체를 입은 자로서 대응해서는 안 됩니다. 가치관을 바꾸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문제는 전혀 달라집니다. 돈 문제, 건강 문제, 자녀 문제, 배우자 문제, 직장 문제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치관을 바꾸면 나는 세상의 모든 문제 앞에서 바람이 됩니다. 그 어떤 문제나 방해나 처지나 여건도 영이신 하나님이 루아크로 표현된 바람이 된 사람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그 어떤 계획도 1cm도 벗어남 없이 다 이루어짐을 의미합니다.

나의 진짜 원수는 ‘실제의 나’입니다. 육체 입은 나를 의식해서 산다면 평안과 행복과 항상 기쁨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 ‘실제의 나’를 죽여야만 합니다. 외부의 원수는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돈 문제, 건강 문제, 자녀 문제, 배우자 문제를 비롯한 모든 문제는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내가 바람이 되면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바람이 된 나를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실 때 1cm의 오차도 만들지 못합니다. 진짜 문제는 육체를 입은 나를 유지하고자 하는 상태입니다.

 

형들은 요셉을 팔았습니다. 그러나 형들은 요셉이 하나님의 존재감과 소유감을 지켜내는 바람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결국 팔았고 팔림을 통해 헤어지게 된 형들과 요셉은 20년 만에 만나게 됩니다. 형들은 여전히 육체를 입은 자로서 ‘실제의 나’를 유지하는 가치관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팔린 자로서 하나님의 존재감과 소유감을 지켜내려는 가치관을 붙잡고 살았습니다. 그 결과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졌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애굽 전역은 물론이고 가나안 땅에도 미치게 됩니다. 이것이 주기도문에서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기도가 이루어지는 모습입니다. 요셉 한 사람이 총리 자리에 섬으로써 이제 애굽은 바로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권이 요셉을 통해 땅으로 내려오기 시작해서 근동 지역 전체를 끌어안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 하나를 바꿈으로부터 이러한 차이가 발생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여기에 있습니다. 좋아하는 것 하나를 하나님으로 정해놓고 그 하나님의 존재감과 소유감을 지켜내기 위하여 죽어라 십자가를 붙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붙잡아야만 육체를 입은 ‘실제의 나’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제의 나’는 내 생애의 유일한 원수입니다. 육체를 입은 실제의 나로 살고 있는 상태가 나의 유일한 대적입니다. 그 외의 외부적으로 나에게 발생하는 문제, 사건, 과제, 대적, 원수는 예수님 십자가 붙잡고 ‘믿음의 나’가 되어서 영이시고 바람이신 하나님만을 유일한 좋음으로 여길 수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존재감과 소유감이 내 마음에서 사라질까 전전긍긍하면 다 사라지고 맙니다. 나는 바람이고 신령이기 때문입니다.

좋아하는 것 하나를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좋아하려면 반드시 십자가 예수님을 통과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몸을 입어야만 하나님을 실제로 좋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입고 좋아하는 대상을 하나님 한 분으로만 정하는 가치관의 변화를 통해서 세상에 대해 바람이고 신령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무엇을 좋아하는가에 대한 한 가지 질문에 대해 영이시고 바람이신 하늘에 계신 하나님 한 분뿐이라고 대답할 수 있기 위하여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믿음의 나’를 지켜나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어떤 처지에 처하든지 바람이고 신령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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