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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

녹취문: 내가 안 보이면 충격받는 하나님_태승철 (창 44:1~34)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4.10.31|조회수67 목록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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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내가 안 보이면 충격받는 하나님>의 줄거리 :

하나님에게 내가 안 보일 수가 있을까요? 십자가 생활화란 날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을 옷 입고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겁니다. 이때 우리는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일을 그냥 할 때도 있고 못 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나저러나 사실 그다지 심각한 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이 천국 보좌 앞에 올라와 있는 것이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은 충격을 받으십니다.

 

내가 안 보이면 충격받는 하나님

 

(창세기 44:1~34)

 

25. 그 후에 우리 아버지가 다시 가서 곡물을 조금 사오라 하시기로

26. 우리가 이르되 우리가 내려갈 수 없나이다 우리 막내아우가 함께 가면 내려가려니와 막내아우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그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음이니이다

27.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우리에게 이르되 너희도 알거니와 내 아내가 내게 두 아들을 낳았으나

28. 하나는 내게서 나갔으므로 내가 말하기를 틀림없이 찢겨 죽었다 하고 내가 지금까지 그를 보지 못하거늘

29. 너희가 이 아이도 내게서 데려 가려하니 만일 재해가 그 몸에 미치면 나의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하리라 하니

30.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31.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32.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33.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보내소서

34.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요셉은 형들과 베냐민을 만나 기쁨의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돌려보내는데 요셉은 청지기를 시켜 베냐민의 곡식 자루에 은잔을 집어넣고 도둑의 누명을 씌웁니다. 이러한 사건이 벌어지자 형제들은 요셉 앞에서 벌벌 떨었고 요셉은 베냐민을 노예로 삼겠다고 엄포를 놓습니다. 그런데 이때 유다가 나서서 베냐민 대신 자신을 노예로 삼아달라고 호소합니다. 본문의 포인트가 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본문을 중심으로 ‘내가 안 보이면 충격받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하나님에게 내가 안 보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에게 안 보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내가 안 보이게 될 때 하나님은 충격을 받으신다는 내용입니다.

 

본문은 지금으로부터 4,000전에 있었던 히브리 유랑민 가족의 형제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 일이 아무리 특별하다 한들 역사적인 이야기로만 받아들인다면 형태를 좀 달리할지라도 인류 역사 이곳저곳에서 발견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이 역사 속에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다양한 이야기들과 차별화되는 점은 바로 영원한 진리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영적 진리가 담겨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선민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또한 야곱의 열두 아들이 그렇습니다. 이후로는 모세와 다윗으로 이어지며 신약에 등장하는 사도 베드로, 스데반 집사님, 사도 바울 등 초대 교인들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또한 선민입니다. 이러한 선민의 가장 큰 특징은 오실 그리스도와 오신 그리스도와의 관계입니다. 선민이란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직면함을 유지하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 앞에는 반드시 붙어야 하는 수사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이라는 말입니다. 오실 그리스도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이고, 오신 그리스도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함이란 무조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에 내 마음이 세상에 대해 죽는 것이고 끊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민으로서 세상을 등지고 탈출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몸을 입을 때 승천을 따라 하늘 보좌 우편까지 갈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예수님과 하나님과 성령님은 서로 사랑의 교제로 일체를 이루고 계십니다. 내 마음이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까지 쫓아가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교제에 실시간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민이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이 선민이라는 말에 담긴 의미이기에 아브라함을 비롯한 구약의 사람들은 오실 그리스도를 믿은 그리스도인이었으며, 우리는 오신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로부터 선민의 특징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선민의 본업이란 야곱이 꿈에서 본 하늘로 이어진 사닥다리인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서 내 마음이 하나님 보좌 앞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교제에 참여하는 그 증거가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과 하나님 좋음을 향한 열망이 내 마음에서 활성화되는 상태로 확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선민입니다.

한편 이러한 복음의 전체적 과정을 염두에 둘 때 궁금한 점이 생깁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살다 보면 오히려 올라가지 못할 때가 더 많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하늘에서는 내 마음이 있어야 될 자리가 비어있는 상태입니다. 이 모습을 보실 때 하나님은 어떤 마음을 가지실까요?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든 올라가지 않든 목석처럼 가만히 계실까요? 올라오면 올라왔나보다 하시고 안 올라오면 안 올라왔나보다 하시며 넘어가실까요?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직면해야만 된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로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까? 반대로 하나님은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어떤 심정으로 대하고 계실까요?

 

본문에는 유다에 의해 막내아들 베냐민에 대한 아버지 야곱의 사랑이 절절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대할 때 이것이 유다의 관점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야곱은 형들과 함께 베냐민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때 야곱은 “내가 자식을 잃으면 잃으리로다”라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이때 야곱은 자식을 잃어버림 다시 말해 자식의 없음을 마음에 받아들인 상태였습니다. 다만 이러한 사정을 알리 없는 유다의 눈에는 야곱의 마음에서 일어난 하나님과의 관계의 변화까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유다는 요셉을 노예로 팔자고 제안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제안으로 인해 요셉은 애굽으로 팔려 갔습니다. 그리고 유다는 아버지가 요셉을 잃고 어떤 고통을 겪으며 지냈는지를 보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다는 다른 형제들보다 더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유다가 보기에 요셉을 잃은 아버지의 삶은 불행했습니다. 그나마 베냐민을 붙잡고 연명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본문에서는 바로 이러한 유다의 관점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실제로 아버지 야곱의 베냐민에 대한 사랑이 어떻게 변한 것과는 별개로 유다의 눈에 비친 아버지 야곱과 베냐민의 관계가 가르쳐주는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 야곱과 베냐민의 관계는 이미 짐승에 찢겨 죽었다고 여긴 요셉과의 관계와도 연관성이 있습니다. 유다가 보기에 아버지는 요셉을 잃고 불행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이제 베냐민까지 잃는다면 아버지는 더는 견디지 못하고 죽으리라 여겼던 것입니다. 이러한 유다의 관점이 중요한 포인트가 됩니다. 유다의 눈에 비친 아버지가 베냐민을 향해 가졌던 사랑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27~29절을 보면 야곱이 요셉을 잃어버렸다는 고통을 아직도 안고 있음이 표현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30~31절을 보면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유다는 아버지의 생명과 베냐민의 생명이 하나로 묶여 있고, 막내 베냐민이 없는 것을 보면 아버지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유다가 보고 있는 아버지의 베냐민 사랑이었습니다.

사실 베냐민은 애굽의 총리 집에서 은잔을 훔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청지기를 시켜 베냐민의 곡식 자루에 은잔을 넣으라고 상황을 설정합니다. 요셉은 같은 어머니 라헬에게서 태어난 동생을 곁에 두고자 이런 일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결국 베냐민은 은잔을 훔쳤다는 누명을 썼고 요셉은 베냐민을 노예로 삼겠다며 형제들에게 으름장을 놓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다가 나서서 아버지 야곱의 생명이 막내 베냐민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다고 이야기하며, 아버지를 살려주시는 셈 치고 베냐민을 가나안 집으로 보내달라며 간청을 합니다. 그 대신 유다는 자기가 애굽에 남아서 총리의 노예가 될 것을 자청합니다.

이 모든 상황은 요셉의 작위적인 설정 때문에 벌어졌습니다. 다만 이것이 모두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들이었음을 염두에 둘 때 우리는 보다 깊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작위적으로 이 상황을 설정했지만 다른 형제들 입장에서 이것은 실제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적 설정에 의해 이루어진 이 상황은 복음과 관련된 한 측면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역할극이 됩니다. 이런 영적인 측면을 본문에서 발견할 수 없다면 본문은 인류 역사 속에 다양하게 존재하는 집안 이야기로 끝나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설정하셨고 당사자들도 모르게 복음의 한 측면을 말해주는 역할극이 되어버립니다. 이 역할극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나를 예정하시고 선택하셨으며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교리로 알고 있고 입술로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교리로 아는 것과 실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교리적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이 내게 갖고 계신 사랑을 실감하는 것에 비해 너무나 미약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교리적 가르침 속에 하나님의 사랑은 박제될 수 있습니다. 내가 실감할 수 있는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단순한 이야기를 우리가 실감할 수 있도록 번역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 번역을 위해서 유다의 눈에 비치는 아버지 야곱과 베냐민의 관계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시점에서 야곱이 베냐민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유다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다의 입을 통해 베냐민에 대한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묘사함을 통해 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한 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야곱은 아들들이 애굽으로 갈 때 베냐민을 딸려 보냅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들들이 애굽에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뛰어나가 맞이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들 틈에서 베냐민이 보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유다는 이때 아버지가 받을 충격을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가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유다는 요셉을 노예로 팔자고 제안한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리고 형제들은 양을 잡아 그 피를 채색옷에 묻혀서 아버지께로 가져갑니다. 이때 야곱은 분명히 요셉에게 입혔던 채색옷은 있으나 정작 요셉이 없는 상황을 마주하게 됩니다. 유다는 이때 아버지가 받은 충격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그 충격으로 인해서 아버지의 삶 전체가 불행해졌음을 보아왔습니다. 유다는 요셉을 노예로 팔자고 제안했기에 다른 형제들보다도 더 큰 죄책감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유다는 요셉의 부재가 아버지를 얼마나 불행하게 했는지를 보았습니다. 유다의 눈에 아버지 야곱은 끝내 요셉을 잃는 충격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아버지가 숨을 쉴 수 있는 유일한 보루가 있다면 베냐민이었습니다. 요셉과 베냐민은 야곱이 사랑했던 아내인 라헬의 두 아들이었습니다. 유다가 보기에 요셉이 죽었다고 믿는 아버지는 남은 베냐민을 붙잡고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애굽에 다녀온 뒤로 다시 식량을 사러 갈 상황에서 유다는 아버지를 설득해야 했습니다. 이때 유다는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못한다면 평생 죄인이 될 것을 맹세합니다. 죄인이 된다는 것은 아버지 앞에서 떠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다는 이러한 각오로 맹세하여 아버지를 설득했고, 야곱은 내가 자식을 잃으면 잃으리라는 결심에 이르게 됩니다.

이로부터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결국 베냐민의 곡식 자루에서 은잔이 발견되었고 유다의 걱정대로 베냐민이 사로잡히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만약 이대로 돌아간다면 아들들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아버지가 뛰어나왔을 때 베냐민이 없는 것을 보고는 그대로 돌아가실 상황이었습니다. 요셉의 채색옷만 있고 정작 요셉은 없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형제들 중에 베냐민이 보이지 않는다면 아버지가 어떤 충격을 받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유다는 아버지가 분명히 돌아가실 것이라 여기고 베냐민 대신 자기가 노예가 되겠다고 나섭니다. ‘총리시여, 베냐민이 돌아가지 못하면 우리 아버지는 죽습니다. 제발 우리 아버지를 살려주십시오. 아버지의 생명과 막내 베냐민의 생명은 붙어있습니다. 베냐민 대신 제가 당신의 노예가 되겠습니다.’라고 애원했던 것입니다. 유다의 표현 속에 나오는 베냐민을 향한 아버지 야곱의 사랑이야말로 선민인 나 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닥다리인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이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유다의 호소에서 드러난 아버지 야곱이 막내 베냐민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누가복음에서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과도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늘로 가지 못하는 이유는 마음이 이 세상 것에 묶여서 노예처럼 속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베냐민을 기다리는 야곱의 마음,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이 곧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되면 되고 아니면 만다는 심정으로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르려 하는 경우가 있을지 모릅니다. 하늘에 올라가지 못한 시간에 대해서도 대단히 심각하게 여겨서 반성하고 회개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이것이 무척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지 못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는 우리의 빈자리만이 남게 됩니다. 하나님은 천국에서 어떤 심정으로 이 빈자리를 바라보실까요? 다른 형제들은 다 돌아왔는데 베냐민만 돌아오지 못한 상황의 야곱의 심정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고, 요셉의 채색옷은 돌아왔는데 요셉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받았던 야곱의 충격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유다는 아버지 야곱과 베냐민을 보고, 아버지 야곱과 요셉의 관계를 봅니다. 야곱은 요셉을 잃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선민이 타락하여 죄와 저주에 정복되기 이전에 본래의 나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본래의 나를 잃은 것에 대해 아무런 의식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이 요셉을 잃어버린 충격과 고통을 안고 살아가듯이, 죄와 저주가 없었다면 지켜졌을 본래의 나를 잃으신 것에 대한 아픔을 갖고 계십니다. 베냐민이 이역만리 떨어진 애굽으로 가야만 했던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과 멀어진 ‘실제의 나’를 바라보시며 ‘믿음의 나’가 되어 돌아오기만을 바라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눈 떠서 의식이 깨어있는 동안 매일매일 내 마음이 하늘에 올라와 있는지 보고 계십니다. 베냐민이 애굽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듯이 내 마음이 하늘에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하루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지 못한 채 마쳐진다면, 하늘에서는 나의 빈자리만이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그럴 때 아버지에게 가해지는 충격은 베냐민이 돌아오지 않을 때 야곱이 받을 충격과 같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바로 이러한 아버지와 베냐민의 관계를 보고 있습니다. 이 위치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유다는 아버지 야곱의 생명과 베냐민의 생명이 붙어있다고 보았습니다. 베냐민을 보지 못하면 아버지는 죽는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나와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의 관계를 옆에서 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지금 말씀을 전하고 듣는 중에도 하나님을 실감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 하나 없다고 충격을 받으신다고? 하나님이 나 때문에 요셉을 잃은 야곱의 심정이 되신다고? 하나님이 하늘에 나의 빈자리를 베냐민의 빈자리처럼 여기신다고? 설마 그렇게까지 하나님이 나를 생각하실까?’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이 땅에 오셔서 저주를 받으시고 인간에게 가해질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예삿일이 아닙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나에 대해 갖고 계신 사랑이 어떤 것이기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독생자가 이 땅에 내려오셔서 이러한 고통을 당하고 못 박히셔야만 했던 것일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신이십니다. 그 예수님이 받은 모욕과 고통의 크기를 생각해 보면 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유다는 아버지가 요셉이 없어진 충격으로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보았기에 베냐민까지 없어진다면 아버지가 죽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유다의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야곱이 베냐민을 사랑하듯이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사랑하고 계신다고 예수님이 보셨습니다. 유다는 베냐민의 죗값을 떠안고 노예가 되고자 자처했습니다. 반드시 베냐민을 돌려보내서 아버지 앞에 세우고자 했습니다. 유다의 심정으로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고자 하십니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한 적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셨습니다. 내 생명과 아버지의 생명이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여기시며,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면 하나님이 받으실 충격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셔서 나를 베냐민처럼 여기시며 아버지께로 돌려보내시고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은 상투적이고 기계적으로 이야기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은 실로 엄청난 일입니다. 본문은 이 엄청난 일로 표현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가 실감할 수 있도록 번역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다가 보는 아버지와 베냐민의 관계가 예수님이 보시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내 마음이 하늘에 올라와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충격받아 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실 것이기에 예수님이 땅에 내려오셔서 내 죗값 때문에 십자가를 지시는 고통을 자처하셨습니다.

죗값이란 세상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세상에 붙잡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돈의 노예가 되고, 건강의 노예가 되고, 가족의 노예가 되고, 명예와 인기와 자존심의 노예가 되고, 온갖 것들의 노예가 되어서 묶여 있는 바람에 하늘로 올라가지를 못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라는 칼로 세상에 붙은 우리의 마음을 잘라내시기 위하여 죽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유다가 어떻게 하든지 베냐민을 아버지께로 돌려보내려고 했듯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든지 나를 하나님께로 돌려보내고자 하십니다.

 

본문은 유다의 눈에 비친 아버지 야곱이 가진 베냐민에 대한 사랑을 보여줍니다. 아무쪼록 성령님을 통해 이 사건을 하나님이 가진 나에 대한 사랑으로 실감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유다는 아버지 야곱이 베냐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베냐민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충격을 받아 죽을 것임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 접목해서 묵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에는 이러한 묘사가 참 많습니다. 그 장면을 나에게 적용하면 복음을 받아들이고 생활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야곱이 염소의 가죽을 입고 에서를 흉내 내어 아버지 이삭을 속였던 사건입니다. 이때 이삭은 야곱의 음성을 듣고 에서가 아님을 눈치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끝내 자신이 아버지의 장자 에서임을 주장합니다. 이렇게까지 아버지를 속일 수 있는 담대함은 염소의 가죽을 입은 것에 기인합니다. 우리가 ‘실제의 나’를 등지고 ‘믿음의 나’를 주장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의 몸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실제의 나’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나를 속이고, 다른 모든 사람을 속이면서까지 ‘나는 예수님의 몸을 입은 하나님의 장자’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 때문입니다. 야곱이 염소의 가죽을 입고 아버지 이삭 앞에서 자신이 장자 에서임을 주장한 것처럼 예수님의 몸을 입었음을 주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실제로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볼 때 육체를 입은 ‘실제의 나’로 대할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이 나를 보고 ‘당신은 내가 보는 대로 육체를 입은 자’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더라도 육체를 입은 자로 생각하며 나를 대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럴 때 나는 사람 앞에서 모든 생활 현장에서 염소의 가죽을 입고 선 야곱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입은 것은 염소의 가죽 대신에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의 몸을 입은 자임을 주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당신들이 보는 대로 육체를 입은 자가 아니다. 나는 예수님의 몸을 입은 자다. 그러므로 당신들과 함께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을 추구하고 말하는 자가 아니다. 내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직면하는 자’라는 의식을 켜고 주장하고 의도적으로 강하게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면 ‘믿음의 나’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대로 나에게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들들이 돌아왔는데 그중에서 베냐민이 보이지 않는다면 야곱이 받았을 충격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요셉의 피 묻은 채색옷은 돌아왔는데 정작 요셉은 없는 상태를 맞이하는 야곱의 충격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해서 하나님 앞에 보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받으실 충격이 어떤 것인지를 본문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다의 입을 통해서 베냐민이 없을 때 아버지가 받을 충격이 묘사되었습니다. 베냐민인 내가 천국의 보좌 앞에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이 받으실 충격은 이와 같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입장에서 나와 하나님의 관계를 보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베냐민인 나의 마음을 아버지 앞으로 끌어가시고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 아버지 앞에 계십니다.

우리는 베냐민을 못 보는 야곱의 충격을 다시는 아버지께 안겨 드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그리스도의 연쇄 과정을 따라 보좌 우편까지 이르러 하나님을 직면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 마음이 아버지 앞에 보이지 않음으로 아버지가 받으실 충격이 어떤 것인지를 본문을 통해 알았습니다. 요셉을 잃었을 때 야곱이 받은 충격, 베냐민을 잃는다면 야곱이 받을 충격이 바로 하나님이 느끼실 충격임을 성령을 통하여 내 뼈에 새길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단 한 시도 아버지의 충격을 잊지 않게 하시며 아버지를 봐서라도 우리 마음이 주님 따라 하늘로 올라가 머물기를 목숨 걸고 유지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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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푸초 | 작성시간 24.11.02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복음을 읽고 들으면서 가슴이 메어 짐니다.....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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