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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

녹취문: 교회를 바라볼 때 가져야 할 시선_태승철 (창 48:1~22)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4.11.14|조회수45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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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교회를 바라볼 때 가져야 할 시선>의 줄거리 :

이제 이 세상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야곱은 또다시 새로운 발견을 합니다. 앞서서 영광의 하나님과 실시간 세상에 임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새로이 발견한 결과입니다. 즉 전에는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선민의 교회를 생각 속에서 보게 됩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에게 하나님께서 반복하여 주셨던 자손 번성과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이 얼마나 가슴 벅찬 내용인가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교회를 바라볼 때 가져야 할 시선

 

(창세기 48:1~22)

 

1. 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요셉에게 말하기를 네 아버지가 병들었다 하므로 그가 곧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이르니

2. 어떤 사람이 야곱에게 말하되 네 아들 요셉이 네게 왔다 하매 이스라엘이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

3.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4.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5.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6. 이들 후의 네 소생은 네 것이 될 것이며 그들의 유산은 그들의 형의 이름으로 함께 받으리라

 

 

본문에는 야곱이 요셉과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만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특이하게도 장자인 므낫세보다 차자인 에브라임의 이름이 먼저 언급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지 않은 부분에서는 야곱이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므낫세가 장자였기에 야곱은 오른손으로 므낫세를 축복하고 왼손으로는 에브라임을 축복해야 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가 그렇게 할 것으로 알고 아버지 오른손 앞에 므낫세를 세우고 왼손 앞에는 에브라임을 세웁니다. 이제 야곱은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손을 엇갈려서 오른손으로 차자 에브라임을 축복하고 왼손으로 장자 므낫세를 축복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오른손은 권력과 번영과 성공과 축복을 비롯한 긍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야곱은 그 오른손을 차자에게 얹어 축복합니다. 그리고 이후에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해 들어갈 때 요셉의 두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독립된 지파로 세워집니다. 결국 요셉은 다른 아들들의 두 배의 땅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내용의 본문 중심으로 ‘교회를 바라볼 때 가져야 할 시선’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야곱은 요셉을 계기로 영광의 하나님과 실시간으로 강렬하게 임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발견했습니다. 그 결과 새로운 선민의 교회를 발견합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야곱의 마음속에서 가슴 벅차게 그림 그려지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특이한 점은 출애굽 때 이스라엘 민족을 구성하게 될 열두 지파가 본래의 형태로 소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는 요셉이 포함되지 않습니다. 요셉을 빼고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독립된 지파로서 열세 지파를 이룹니다. 본문에는 언급되지 않습니다만 레위 지파도 요셉이 빠지듯이 빠집니다. 이후 레위 지파는 성전에서 일을 하는 자들로 택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요셉이 빠진 자리에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들어감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은 열두 지파를 이루게 됩니다.

다만 이것은 앞으로 약 400년 뒤에나 이루어질 일입니다. 그런데 침상에 누운 야곱이 하나님의 선민에 대한 구성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를 보고 있습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야곱의 생각 속에 하나님이 그려 넣어주시는 선민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속해야 될 교회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속해있다고 말하지만, 도대체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모릅니다. 본문은 우리가 교회를 바라볼 때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야곱은 몹시 노쇠하여 병들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요셉은 두 아들을 데리고 야곱을 병문안합니다. 요셉을 본 야곱은 다짜고짜 칠십 년 전 루스 들판에서 처음으로 만난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며 자손의 번성과 가나안 땅에 대해 약속해 주셨던 내용을 언급합니다. 4절을 보면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이제 늙고 병들어 침상에 누워 있습니다. 이러한 야곱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기억입니다. 야곱은 요셉을 보자마자 하나님께서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과 자신에게 반복하셨던 약속을 기억해 냅니다. 이와 관련해서 요셉 대신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항렬에 집어넣고 하나님이 주시기로 한 가나안 땅을 분배받게 될 것을 예언합니다. 그리고 미래의 이스라엘 민족이 어떠한 형태로 구성될 것인지를 야곱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지금 야곱은 평생에서 가장 강렬하게 하나님이 유일한 있음이며 유일한 좋음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영광의 하나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삶을 향해 실시간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렬하고도 생생하게 실감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야곱은 바로 이러한 상태에서 칠십 년 전에 만났던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합니다.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에게도 반복하여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것이 엄청난 일입니다. 이전의 야곱은 삶에 대한 주체적인 태도를 고수했습니다. 쉽게 말해 자기가 열심히 노력하고 수고하여 주어진 이 세상의 것들을 지키는 것을 인생의 본업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 시절의 야곱은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자손 번성의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야곱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던 것은 당장 주어진 것들을 지키고 증식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손이 번성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구태여 거부할 필요는 없지만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반복하여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 같게 할 것이며 가나안 땅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야곱에게 이 약속이 새삼스럽게 의미를 갖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구상 80억 사람들이 삶의 현장에서 좋음이라고 느끼는 대상은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이나 외모를 좋음으로 느끼고, 또 어떤 사람들은 돈이나 성공 혹은 합격이나 승진을 좋음으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람들로 가득한 지구라는 현장에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하나님만을 유일한 있음과 좋음으로 알며 마음에서 그 하나님을 지키는 것을 본업으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세상 사람들은 자기 삶에 대해 주인 노릇을 합니다. 자기 판단과 생각을 가지고 좋고 나쁨을 분별합니다. 자기가 노력하고 수고하여 이 세상 것들을 좋음으로 얻으려고 하는 주체적 삶을 살고 있습니다.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하나님 주권에 의해서만 살아진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삶을 대하는 자는 거의 없습니다.

병상에 누운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곰곰이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 같게 하리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제 야곱은 새롭게 발견한 영광의 하나님과 삶을 온전히 장악하여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염두에 두고 그 약속을 떠올립니다. 그러자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 같게 많아질 후손들의 인격 하나하나가 영광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식한 상태로 살게 될 것을 생각하자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요셉이 오자마자 칠십 년 전에 받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야곱은 백삼십 년 만에 영광의 하나님을 발견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주권을 발견했습니다.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 같게 되리라는 약속에 대해 단순히 자손의 숫자가 많아질 것이라고만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그 숫자 속에 포함된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백삼십 년을 살고서야 발견하게 된 영광의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주권으로 살아갈 것이 너무나 굉장한 일로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자손의 번성이란 단순히 숫자만 늘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밀가루 반죽처럼 뭉뚱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이 영광의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주권으로만 살아지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가슴이 벅차하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앞으로의 계획을 보여주십니다. 요셉 대신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열두 지파에 들어가게 될 것을 예언적으로 가르쳐주십니다.

 

여기서 야곱이 요셉 대신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들어가리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요셉은 왜 야곱의 열두 아들의 항렬에서 빠졌을까요?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마치 훗날 레위 지파가 열두 아들의 항렬에서 빠지게 되는 것을 연상시킵니다. 요셉과 레위 지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요셉은 아들이라기보다는 그 자체로 영광의 하나님과 이 세상을 장악하고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야곱의 뼛속까지 각인시킨 계시의 사건입니다. 한편 레위 지파의 일이란 오직 하나님과 선민의 관계가 잘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오직 이것을 위해 평생을 성전에서 봉사합니다. 성전은 번제를 통하여 이 세상만 바라보고 살던 자기를 죽이고 새롭게 태어나 영광의 하나님을 발견하며, 그 하나님이 이 세상의 주인임을 인정하여 하나님의 주권으로만 살게 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성전의 의미는 예수님의 십자가 속으로 흡수됩니다.

구약의 성전 생활화가 곧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이러한 십자가 생활화와 성전 생활화를 통해서 아브라함과 이삭처럼 영광의 하나님을 마음에서 지켜내며 오직 하나님의 주권으로만 살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요셉과 레위 지파는 같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이들은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이들은 영광의 하나님과 생생하고 강렬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각인 시켜주고 인상 지어주고 잊지 않게 해주는 계시적 사건이고 이를 위해 일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아들의 항렬에서 빼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복음 방송을 듣고 십자가 생활화를 하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는 정말 부족하고 미흡하지만 여러분에게 끊임없이 영광의 하나님과 하나님 주권의 삶을 전파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열두 지파에 가나안 땅을 분배하시듯이 여러분에게 이 세상에 대한 일들을 분배하실 때 저에게는 따로 할당될 것이 없습니다. 레위 지파가 땅을 분배받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요셉과 레위 지파의 공통점이자 항렬에서 빠지게 되는 이유입니다.

야곱은 칠십 년 전에 루스 들판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건을 떠올리며 새삼스럽게 그 약속의 의미를 되새깁니다. 야곱이 백삼십 년 만에 도달한 영적 상황을 선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개별적으로 이루고 살아가는 모습을 떠올린 것입니다. 그러자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이라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십자가 복음 방송을 들으시는 2,000여 명이 지구 위에 흩어져서 사는 동안 오직 마음속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을 본업으로 여기며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만 산다고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교회의 본질적 모습을 야곱의 마음에 그려주십니다. 야곱은 이제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식하고 있는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그림을 그리듯이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장자와 차자의 서열을 바꾸어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하나님의 뜻대로 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야곱은 사람을 참 힘들게 하는 것 같습니다. 므낫세가 먼저 태어나고 에브라임이 둘째로 태어났으니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므낫세를 장자로 인정하면 이해하기 편할 것입니다. 실제로 요셉도 야곱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해서 야곱의 오른손을 므낫세의 머리로 바꿔 얹고자 하는 모습이 17~1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끝내 오른손을 차자에게 얹고 왼손을 장자에게 얹습니다.

결국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열두 지파에 속하게 됩니다. 야곱은 열두 지파에 도장을 찍듯이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함으로써 열두 지파에 집어넣습니다. 옛날에 노예나 가축에게는 소유를 표시하기 위해 불도장을 찍었던 것을 연상시킵니다. 야곱의 아들들에게 있어서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조카였기에 아들들의 항렬에 포함되는 것은 이상하게 여겨질 수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야곱은 차자인 에브라임과 장자인 므낫세의 서열을 바꾸어 집어넣었습니다. 본래라면 장자는 장자의 대우를 받고 차자는 차자의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것은 상식이고 관습이자 시대적 원칙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바꾼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선민이 누구냐는 이유와 관련이 있습니다. 선민은 상식이나 관습이나 규정이나 시대적 원칙을 비롯한 세상의 행동 규칙을 따라 움직이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야곱의 엇갈린 축복은 바로 이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선민이 직장을 다닙니다. 직장에 출근해서 일하고 퇴근하는 것은 일상의 루틴이자 원칙입니다. 그러나 선민은 이러한 원칙에 의해 살아가는 자들이 아닙니다. 야곱 시대에 장자가 장자의 대우를 받고 차자가 그보다 못한 대우를 받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관습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이것을 불변의 대원칙인 것처럼 따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세상에서 사람들이 정한 원칙과 규정과 상식과 습관 같은 것들을 따르게 되는 순간을 살펴보면 영광의 하나님을 마음에서 기억함이 없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식하지도 않습니다. 기계적으로 정해진 규정과 원칙과 일상의 루틴을 따라서 말하고 행동할 뿐입니다. 야곱의 엇갈린 축복은 선민은 그렇게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선민은 이 세상의 어떤 규정과 원칙과 관습과 루틴을 기계적으로 따라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선민은 언제나 하나님의 주권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직장을 다니는 분이라면 오늘도 아침 먹고 출근해서 일을 해야 하고, 오후가 되면 점심을 먹어야 하고, 저녁이 되면 퇴근해야 합니다. 이런 일들은 다 정해진 일이라 끼니때가 되면 자동으로 무엇을 먹을지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조차 하지 말라는 것일까요? 우리는 먼저 선민의 본업이 무엇인지 염두에 둘 수 있어야 합니다.

선민의 본업은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내는 것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내면 하나님의 주권이 보입니다. 그러면 이상한 일이 발생합니다. 정해져 있는 규칙과 원칙과 규정일지라도 기계적이고 습관적으로 행하게 되지 않습니다. 어제 갔던 직장을 오늘도 가는데, 기계적으로 오늘도 가야 하니까 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내고, 하나님의 주권이 세상을 지배하신다는 것을 마음에서 굳건히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 년째 다니는 직장이라도 오늘 출근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된 완전히 새로운 일이 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정한 규칙과 원칙과 규정을 기계적이고 습관적으로 지키며 사는 것은 가나안 땅의 삶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을 복지로 규정하는 핵심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만 살아지는 삶입니다. 한 지역의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만 사는 곳이 복지입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언급하신 이유는 그곳에 성전을 세우시기 때문입니다. 어디에 살고 있든지 지금 성전에서 번제가 드려지고 있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번제에서 일어나는 죽음의 의미는 영광의 세상 것을 보는 나의 죽음입니다. 주체적으로 살려고 하는 나를 죽이기 위하여 성전에서 양이 죽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성전과는 별도의 장소에서 살고 있지만 지금도 성전에서는 상번제로 어린양이 죽고 있다. 영광의 세상 것을 보고 세상을 주체적으로 살려고 하는 나는 어린양과 함께 죽었다. 그러므로 나는 영광의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만을 추구할 것이다. 이 세상의 삶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살게 된다.’라는 마음가짐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가나안 땅에 성전을 세우기로 하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가나안 땅이라는 공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도대체 무엇 때문에 가나안 땅을 고집하셨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고집하신 이유는 그 땅에 세우시기로 정하신 성전 때문입니다. 선민들이 삶의 터전에 각자 흩어져 살 때 성전을 생활화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이로부터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제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요셉 대신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열두 지파에 넣으십니다. 그리고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서열을 바꾸십니다. 이러한 일을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을 선민 열두 지파에 각인시키고자 하신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서의 삶은 가나안이라는 공간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사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이란 세상 사람들이 정한 규칙과 원칙과 규정 같은 것을 따르며 루틴한 일상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충만하게 바라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생생한 주권이 꿈틀거림을 삶에서 느낄 수 있다면 아무리 루틴한 일상이라도 지금 연결된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지금을 살되 연결된 하나님으로부터 사는 것이 가나안 땅의 삶이고 복지의 삶이라는 것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한 장소에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가 삶의 현장에서 오직 영광의 하나님을 마음에서 지켜내며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만 살아지는 자들이 교회를 이룹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해봅니다. 천 명이 예배당에 모여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 때문에 비어있는 공백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마음이 각자 자기의 삶에서 일어난 문제라든지 각자가 좋아하는 이 세상 것을 향해 뿔뿔이 흩어져 있습니다. 예배당에 육체만 모여있을 뿐입니다. 실제 삶의 현장에서는 자기가 좋아하는 세상 것을 향하여 이전의 야곱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주체적이 되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한 삶의 흐름 속에서 기도도 합니다. 이들의 모임이 과연 교회일까요? 마음이 세상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다면 몸이 모여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반면 다른 천 명이 있습니다. 이들은 한 장소에 모이지 않습니다. 몸은 뿔뿔이 흩어져 있지만 날마다 눈만 뜨면 마음이 예수님 십자가로 모입니다. 예수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직면하는 장자의 자리에 모여있습니다. 그리고 흩어져 있지만 각자가 자기 삶의 현장에서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만 살아지는 삶을 위하여 십자가 생활화에 목숨을 겁니다. 바로 이들이 교회입니다.

구약에서 계속 성전이 강조되기에 우리는 성전에 모이는 자들이 이스라엘이고 선민이라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 모이는 절기는 일 년에 세 번뿐입니다. 그 외에는 다 흩어져서 살았습니다. 성전에서는 날마다 일 년 된 어린양을 바치는 상번제가 드려집니다. 흩어져 있는 자들은 이 성전의 상번제를 기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듯이 이들은 성전의 상번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상번제를 기억함이란 곧 영광의 세상 것을 바라보는 내가 죽었음을 인정하며, 양의 죽음을 나의 죽음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내 마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 대해서만 주체적으로 활동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주권만이 내 삶을 이끌어 가심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 선민입니다.

야곱은 바로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 같은 후손들이 영광의 하나님을 마음에서 지켜내고 각자가 자기 삶의 현장에서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만 살아지는 삶의 모습을 봅니다. 요셉처럼 삶의 현장 구석구석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만 채워지는 삶을 산다고 생각하니 보통 일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아브라함처럼 이삭처럼 처음부터 마음에서 지켜내고, 요셉처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만 살아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야곱은 백삼십 년 만에 이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우리도 그것이 칼로 무 자르듯이 쉬운 일이 아님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림 그리시는 선민의 교회는 어떤 모습인가를 알 필요는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야곱의 마음속에 교회 모습을 그림 그리시며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요셉이 오자마자 야곱은 칠십 년 전에 루스 들판에서의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침상에 누운 야곱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침상에 누운 야곱의 마음에 선민의 교회 모습을 그림 그려주고 계셨습니다. 야곱은 선민들이 어떻게 열세 지파가 되었다가 열두 지파로 될 것이며, 그들이 어떻게 가나안 땅에서 살게 될 것인가, 어떻게 하나님의 주권을 기억할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서열을 바꾸고, 이들을 열두 아들의 항렬에 포함합니다.

 

열두 지파에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들어간 것에는 하나님의 주권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절대적인 규정과 원칙과 정해진 틀보다 하나님의 주권이 우선이라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서열을 바꾸고, 요셉을 빼고 요셉의 두 아들을 항렬에 집어넣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야곱에게 그림 그려주시며 우리에게 교회를 바라보는 시선을 제시하십니다. 여러분이 각자 생활 현장에서 십자가를 생활화할 때만 교회에 속한 자가 된다는 것을 이 시선이 있으면 알 것입니다. 생활 현장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고,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만 사는 삶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교회 밖으로 나간 것입니다.

예배당에 모여야 교인이 아닙니다. 삶의 현장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삶이 유지되는 것이 교인이며 그러한 사람들 전체가 교회입니다. 우리 역시 이 하나님의 꿈을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간구하기는 이러한 선민이자 교인들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 같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야곱의 침상에서의 생각을 화폭으로 삼으시고 그림 그리신 가슴 벅차고 웅장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혼란하고 진리가 가려져 있는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윤곽을 드러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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