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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태초의 저주가 내 모든 문제의 근원>의 줄거리 :
현재 전 세계 기독교 종교가 범하는 가장 치명적인 오류는 전 인류와 기독교 종교인 전체가 놓여 있는 매일의 인생 판이 죄와 저주에 찌들어 있는 바탕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죄로 인한 타락과 저주받음은 오직 교리로만 공부되고 있을 뿐, 매일의 삶의 현장에서 이런 죄와 타락의 결과인 저주받음이 실제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전혀 모릅니다. 이러한 무지 속에서 과연 저주로부터의 해방인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하는 것이 과연 신뢰할 만한 것일까요?
태초의 저주가 내 모든 문제의 근원
(창세기 3:14~19)
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본문에는 하나님이 사탄과 여자와 남자에게 저주를 내리시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태초의 저주는 옛날에 끝난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삶에서 만나는 모든 문제의 근원입니다. 여기서 문제란 내게서 기쁨과 감사와 평강을 앗아가는 모든 것들을 말합니다.
지금 내게 기쁨이 없고, 감사가 없고, 평강이 깨졌다면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쁨을 없애고, 감사를 없애고, 평강을 깨뜨리는 근원은 문제 자체가 아닙니다. 따라서 그 문제를 해결해서 극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문제의 근원은 오늘 본문 말씀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탄과 여자와 남자에게 내리신 저주가 지금 내가 당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저주의 사전적 의미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저주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면 그저 ‘나쁜 것, 남이 안 되도록 비는 것’이라는 정도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단어라도 입으로 풀어서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특별히 영적인 문제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으면 은혜도 임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명확한 개념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통로가 됩니다. 이러한 일이 발생하는 이유는 우리의 인격 자체의 언어적 특성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저도 말씀을 전하면서 명확한 개념을 전하는 것에 주력하고 있기에 이와 관련된 문제를 겪으신다면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저주는 진짜 좋은 것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서 좋다고 여겨지지 않는 것은 아무리 빼앗겨도 저주가 아닙니다. 저주는 진짜 좋음으로부터 차단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축복이란 진짜 좋음을 갖도록 빌어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을 받았다는 것은 마음에 진짜 좋음을 가졌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흔히 복을 부귀영화와 연관시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복이란 마음에서의 진짜 좋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마음이 육체와 달라붙어 있는 상태에서 좋음을 추구합니다. 사탄의 언어 체계를 가지고 으레 몸으로 만나는 것에서 좋음을 찾습니다. 좋음이라는 개념은 사라지고 복이라고 하면 돈 많이 버는 것, 자녀가 융성하는 것,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 사회적으로 존귀하게 됨에 연결합니다. 이것은 아주 안 좋은 개념의 습관이 생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종교를 믿는다는 사람들에게서 쉽게 발견되는 문제입니다. 전 세계 기독교 종교의 가장 큰 오류는 본문에 기록된 하나님이 내리신 저주가 인생의 기본 판이라는 사실을 망각함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이 내리신 저주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금도 내 삶의 상황 속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에 대해서 모르기에 저주와 축복을 오해합니다. 하나님이 내리신 저주가 지금 내게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모르는데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요? 믿을 수 없는 확신입니다.
죄와 타락으로 인한 저주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모르면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얻었다는 확신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구원이란 저주가 나타나는 증상이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적어도 저주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알아야 구원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주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모릅니다. 교리 속에서 저주받았다는 이야기를 앵무새처럼 외우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도 실제 삶의 현장에서 저주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데 구원을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해서 사탄의 역할, 남자의 역할, 여자의 역할이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리신 저주는 어떻게 보면 시시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저주는 주어진 역할에서 눈에 띄는 차이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탄은 저주를 받고 난 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적대시합니다. 사탄을 제외하고 여자와 남자를 보더라도 그 역할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본문에 여자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으리라는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남자는 땅을 개간하는 노동을 하리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저주를 받기 전에도 하나님의 생각 속에서 여자는 아기를 낳도록 만들어졌고, 남자는 노동을 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이처럼 저주를 받아서 발생한 일이란 역할의 변화가 아닙니다.
여자의 경우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해서 임신하고 아기를 낳는다면 에덴동산의 삶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하지 못하여 가장 좋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임신하고 아기를 낳는다면 저주받은 것입니다. 남자의 경우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한 상태에서 노동을 하면 에덴동산의 삶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하나님과 떨어진 상태에서 다른 것과 밀착하여 노동을 하면 저주받은 것입니다. 저주란 결국 역할의 변화가 아니라 가장 좋으시고 유일한 좋음인 하나님을 잃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여자에게는 출산, 남자에게는 노동으로 대표되고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하는 일은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을 할 때 하나님을 잃은 상태에서 하는 것이 저주받음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뱀, 즉 사탄에게 내리신 저주를 살펴봅니다. 14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뱀은 생물학적으로는 흙을 먹지 않습니다. 흙을 먹으리라는 말씀은 인간의 언어로 영적인 사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 상태가 어떠하며, 우리 인생에 끼어든 사탄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배로 다니리라’는 말씀에 담긴 의미를 누가복음 2장 14절과 비교해 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이란 요한계시록에서 본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와 대비되는 땅이란 피조물의 세계입니다. 다시 말해 배로 다니는 상황이란 유일한 좋음인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물론 성경에는 하늘과 구분되는 개념으로 음부나 깊음이 등장할 때도 있습니다만, 여기서 배로 다닌다는 말씀은 마치 하나님께서 사탄을 바닥에 내팽개치시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사탄에 대해 ‘너는 유일한 좋음인 나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바닥에 내쳐진 존재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흙을 먹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또한 좋음과 연관된 표현입니다. 하나님께는 좋음이 있고, 예수님께도 좋음이 있고, 우리 인간에게도 좋음이 있듯이 사탄에게도 좋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게 창조하셨던 것과 같습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창조 전에도 예수님을 좋아하셨고, 예수님은 하나님을 좋아하셨습니다. 이처럼 좋음을 추구해야 하는 상황에서, 사탄은 유일한 좋음인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바닥으로 내쳐집니다. 다시 말해 최고로 나쁨에 거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흙을 먹는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사탄이 원하는 좋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대적함이 사탄에게는 가장 좋은 일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낙으로 삼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에게 내린 저주입니다. 사탄은 유일한 좋음인 하나님으로부터 바닥에 내쳐졌습니다. 그리고 유일한 좋음인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바닥을 배로 기어다니며 자기의 좋음을 추구하였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하나님 대적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로부터 사탄의 언어 체계를 가진 사람들은 사탄의 유전자적 특성을 드러냅니다. 좋음을 찾는 마음을 자꾸만 땅에 붙이려고 합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이 땅에 대해 죽으셨습니다. 땅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이 많은 곳이므로 죽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땅에 대해 죽고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땅에 마음을 붙이는 것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치솟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믿습니다.
이로부터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가 15절에서 이어집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은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뱀은 예수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먼저 인간의 인격성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하여 저주에 처하기도 전에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명령을 지키지 못할 것을 아셨습니다. 이것은 기계적 명령이 아니었기에 자발적인 인격체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결단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습니다. 인간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에 참여할 수 있는 인격체가 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을 등장시키신 이유조차도 인격체인 인간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인격적이고 자유로운 존재로 만드시기 위해 사탄의 개입을 허용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사탄을 두신 것이나 타락의 여지를 남겨두신 것은 모두 인간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독립적 인격체가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선악과를 따 먹지 않는 결단을 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좋아하고, 스스로 하나님과 호흡을 맞춰갈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한 능력은 없더라도 그렇게 하고 싶어하는 결심은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인격적 존재로 대우하시려면 적어도 사탄의 시험을 이길 수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사탄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할 것도 아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실 것을 계획하십니다. 그것도 사탄이 처음 유혹했던 여자의 몸을 통해서 보내시기로 하십니다. 이러한 바탕에서 여자의 후손에 대한 말씀이 등장한 것입니다.
사탄은 자신이 땅에 떨어진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땅으로 끌어내리고자 합니다. 땅의 것을 좋아하여 땅에 마음을 붙이게 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여자의 몸을 통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땅에 마음을 붙이고 사탄을 따르는 사람들 중에서, 예정하신 사람들을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들로 회복시켜 나가시겠다는 것입니다. 15절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엄청난 선언입니다.
한편 16절에서는 여자에 대한 저주가 이어집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 저주는 역할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16절 말씀을 보면 이것이 무슨 저주의 내용인가 싶습니다. 사람들은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한다는 말씀이 저주라고 생각합니다. 저주를 받지 않았다면 아기를 낳을 때도 해산의 고통이 없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해는 번역이 정확하지 않음에서 비롯됩니다. 임신하는 고통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이차본(עִצָּבוֹן)이라는 단어입니다. 이차본은 동사 아찹에서 나온 말로써 ‘새기다, 각성시키다’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임신하는 고통’이란 ‘임신을 통해 마음에 깊이 새기게 될 것이다’라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임신이 저주로 언급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자가 임신을 하면 마음에는 태아가 새겨지게 됩니다. 모든 의식이 태아에게 쏠리게 되는 것입니다. 태아에 대해서 밝히 보고 태아를 잊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이 저주인 이유는 마음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을 새기기 때문입니다. 모든 의식이 태아를 향하는 동안 유일한 좋음인 하나님을 완전히 잃는 것입니다. 본래 사람이 마음에 새겨야 할 대상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임신하고 아기를 낳는 일도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된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물론 해산에 수반되는 육체의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본문에서 말하는 저주란 단순히 육체의 고통이 아닙니다.
저주받기 전이나 저주받은 후나 여자가 아기를 임신하고 낳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저주인 이유는 아기를 낳고 어머니가 되면서 여자의 마음이 하나님 대신 자녀와 밀착하기 때문입니다. 자녀와 밀착한 상태에서 살아가야 하기에 남편을 필요로 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상황 자체는 저주받기 전과 후가 똑같습니다. 아기 낳고 남편과 함께 삽니다. 그런데 내면의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마음이 하나님 대신 아기에게 밀착합니다. 하나님을 잃는 것이 진짜 저주입니다.
우리는 저주를 가난한 삶이나 육체의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여자가 해산할 때의 고통을 저주라고 여기기에 성경 번역에서도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여자가 아기를 가졌을 때 마음에는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할 정도로 그 아기가 깊이 새겨집니다. 해산의 고통이 저주가 아니라 자녀 때문에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상황이 벌어지기에 저주입니다.
17절 이하에는 남자에 대한 저주가 이어집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여자의 마음이 아기와 붙는다면, 남자의 마음도 아내와 아기에게 붙습니다. 노동의 이유가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남자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노동을 하는 것은 얼핏 당연한 것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이것은 당연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타락 이전에도 아담이 노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가족에게 밀착된 상태가 아닌 유일한 좋음인 하나님과 밀착되어 있었습니다. 노동을 해도 마음에 기쁨이 가득한 상태에서 했던 것입니다. 아내를 봐도 하나님과 밀착해서 봅니다. 자녀를 봐도 하나님과 밀착해서 봅니다. 하나님 때문에 생겨난 기쁨을 아내와 자녀에게 쏘는 삶이 본래 남자의 모습이었습니다. 노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 때문에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생긴 기쁨으로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에덴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타락하였고 하나님과 밀착은 깨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기쁨이 없는 공허한 상태에서 마음이 하나님 대신 가족에게 달라붙습니다. 그리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허리가 휘도록 일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 대해 이야기하실 때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여기서도 오해가 발생합니다. 여기서 수고함이라고 번역된 원문을 보면 콧김이 나오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날씨가 추울 때 짐승들 코에서 콧김이 나오는 모습을 연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자기가 먹고 살기 위해서, 짐승처럼 헐떡거리며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18~19절을 보면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아담은 사탄의 언어 체계를 가지고 자기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좋다고 여기는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원하는 일이 안 이루어지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가시덤불과 엉겅퀴처럼 계속 솟아납니다. 그 가시덤불과 엉겅퀴와 싸웁니다. 바라지 않는 일들을 막으려고 노동합니다. 바라지 않았던 일이 결국 일어나면 그것을 해결하려고 노동합니다. 매일 가시덤불과 엉겅퀴와 싸우며 살아갑니다. 사탄의 언어 체계에서 하나님의 생각과 구분되는 좋고 나쁨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좋다고 여겨지는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라지만 실제로는 악착같이 나쁜 일만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탄의 언어 체계에서 나쁜 일입니다. 언어 체계만 바뀌면 이 세상에서 나쁜 일이 아닌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나쁜 일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일부러 땅에서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하심으로 아담이 괴로워하게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이끄시는 삶은 다 똑같습니다. 문제는 아담이 사탄의 언어 체계를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좋고 나쁨을 구분하게 하는 사탄의 언어 체계에서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모든 일들은 다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인간관계가 못마땅하기에 남편과 아내가 제일 많이 싸웁니다. 자녀와의 관계가 못마땅합니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마음에 드는 일이 하나도 없어서 매일 우울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이 방해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기가 생각하는 나쁨입니다. 사탄의 언어 체계를 갖고 있는 한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여깁니다.
다윗은 시편 23편 1절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노래했습니다. 다윗의 삶에는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없었기에 이러한 노래를 불렀던 것일까요? 일어나면 안 좋다고 여기는 일이 없었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제일 잘 났다고 자부심을 갖게 했던 셋째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쳐들어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여자들을 백주에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범합니다. 다윗은 아들을 피해 피신을 가야만 했습니다. 사울에게 쫓기던 시절에는 십 년 동안 광야에서 도망자 생활을 합니다. 사탄의 언어 체계를 가지고 본다면 다윗의 인생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다윗은 부족함이 없다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언어 체계를 가지면 사탄의 언어 체계에서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보이는 일들이 다 사랑이고 은혜였음을 알게 됩니다.
사도 바울처럼 몸이 아파도 하나님의 사랑이고 은혜입니다. 사업이 안 돼도 사랑이고 은혜이며, 누가 이유 없이 미워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사랑이고 은혜입니다. 그런데 사탄의 언어 체계에서 보면 이러한 일들은 모두 가시덤불이고 엉겅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힘들게 살아라! 망해버려라!’라고 저주를 내리시지 않았습니다. 이 저주에서 역할이 바뀐 것이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본문에 나열된 저주들은 전부 자초한 일의 결과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인생은 원래 힘든 거야. 누구나 다 그래. 오늘은 술 한 잔 먹고 잊어버리자.’라고 말합니다. 정말 웃기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괴롭게 살 필요가 없게 만드셨습니다. 돈이 없거나, 자녀가 말썽이거나, 배우자가 못되게 굴지라도 그것은 괴로운 인생을 살 이유가 아닙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되어 있기만 하면 괴로운 인생을 살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의 인생을 에덴동산으로 만들어 주셨다는 사실을 명약관화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언어 체계를 받아들였기에 인생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가득 차 있는 곳으로 보일 뿐입니다. 저주를 자초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격이 못돼서 우리를 잘못되게 하시려고 저주를 내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병이 났어도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인도하시고 허락하신 상황이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오래 사는 것이 마냥 좋은 일이 아닙니다. 사업이 잘되기만 하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닙니다. 사탄의 언어 체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좋게 여겨질 뿐입니다.
사람이 저주의 판 속에 살게 된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떨어진 상태에서 사탄의 언어 체계를 갖고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 저주임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저주를 내리셔서 사람이 힘들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잘못된 이해를 해왔습니다. 하다못해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할지라도 그 상태를 유지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 상태를 자연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인생에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생기고 원치 않는 일들이 생기는 것을 싸워서 이기고 극복하고 쟁취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에 이래도 모순이고 저래도 모순입니다.
우리는 타락하기 이전이나 이후나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문제는 사탄의 언어 체계입니다. 타락하기 이전에는 하나님과 밀착한 상태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에덴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후에는 하나님과 밀착하지 못함으로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이 지옥이 되었습니다. 노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밀착하여 노동을 한다면 에덴의 삶이고, 하나님과 떨어져서 노동을 하기에 저주의 삶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기쁨과 감사와 평강이 없다면 어떤 문제 때문일까요? 그 원인을 눈에 보이는 문제 속에서 찾으려 한다면 오답이 나옵니다. 전문가에게서 답을 얻으려 할지라도 오답일 수밖에 없습니다. 기쁨과 감사와 평강이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저주를 내리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저주받음 속으로 들어간 결과를 알려주십니다. 저주를 자초한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신학에서는 15절의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라는 말씀을 태곳적에 선언된 원시 복음이라 부릅니다. 사탄의 모든 언어 체계는 우리 마음을 땅으로 끌어당깁니다. 사탄이 배를 땅에 붙인 것처럼 사람의 마음을 땅에 밀착시키고자 합니다. 사탄의 언어 체계를 가진 사람들은 땅에 밀착된 언어를 가지고 좋고 나쁨을 따집니다. 주님은 땅에 밀착된 나를 죽이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나의 마음이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아버지와 밀착할 수 있도록 부활하여 하늘로 치솟아 오르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저주의 현장에서 복음이 선포되었고, 사탄을 따라 땅에 붙은 마음을 가진 자들은 땅을 떠나 하늘로 치솟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은 바로 이러한 복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오늘도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과 하나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본문에서 언급된 저주를 완전히 극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임신하여 낳은 아이가 마음에 새겨지듯이 우리 마음에 새겨지는 일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에 새겨지고, 여러분 마음이 각성하여 바라보고 있는 대상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면 바로 저주입니다. 그 저주의 상태는 여러분에게서 기쁨과 감사와 평강을 빼앗아 가는 모든 문제의 근원입니다. 노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새겨지고 하나님을 각성하는 상태에서 노동을 한다면 에덴의 삶이 됩니다. 반대로 이 세상 문제가 마음에 새겨지고, 가족에게 각성하는 상태라면 모든 노동의 현장은 지옥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가르쳐주신 저주의 상황을 불을 보듯 명확하게 알게 하시고, 그러므로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을 붙잡고 이 저주의 상황으로부터 분명하게 떠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