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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아도 되는 삶>의 줄거리 :
선민은 삶을 자기가 생각하면서 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생각 자체가 없이 삶이 이루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으로만 삶은 채워져야 합니다. 생각 없이 살아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하나님의 생각을 담은 명령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이 따로 있으면 절대로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 그대로 지켜낼 수가 없습니다. 내 삶에 대해서 내가 직접 생각하는 상태를 마음이 높은 것이라고 하십니다. 마음 높음과 스스로 삶을 생각함과 하나님 명령을 지키지 않음은 한 세트입니다. 복지의 삶을 멸절하는 주범이지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아도 되는 삶
(신명기 8:1~20)
1.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4.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5.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6.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본문 중심으로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아도 되는 삶>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생각을 하지 않는 것과 삶에 대하여 필요한 생각이 없는 것은 다릅니다. 내가 생각을 하지 않을 뿐이지, 생각 없이 진행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하나님이 생각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나와 하나님 중에서 하나님만 하시면 됩니다. 둘 다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주권자이시고 전지전능하신 분으로서 나를 사랑하십니다. 내가 하나님보다 나를 사랑할 수 없는 한 내가 삶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기본 중의 기본이 되는 신앙의 바탕을 깔고 본문을 살펴봅니다.
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광야 생활을 통해 선민의 마음을 낮추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마음을 낮춤으로써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의 여부를 시험하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선민들의 마음이 낮아지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고, 선민들의 마음이 높아지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명령형의 말씀을 접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명령형의 말씀이 특별히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명령이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고 내 마음이 높아졌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근본적 이유는 단순히 내가 못돼먹은 탓이 아니라 마음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높아지면 성경을 읽어도 명령형의 말씀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마음 높음이 어떤 상태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 높음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복종하라고 아무리 말해봐야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나에게 하나님의 명령이 들리지 않고 지킬 수도 없는가?’라는 질문의 대답은 내 마음이 높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마음 높음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고칠 수도 있습니다. 마음 높음 상태에 대해 설교하는 사람도 모르고 설교를 듣는 사람도 모른 채 그저 하나님의 명령만 지키라고 말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설교하는 사람도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 것이 틀림없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라면 마음 높음이 무엇이고 마음 낮음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면서도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라고 말하고 듣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은 지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란 이 세상에서 내가 들을 수 있는 말 중에 제일 좋은 말이고 제일 유익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좋자고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내게 좋고 가장 유익하기에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의 명령은 돈보다 좋고, 건강보다 좋고, 출세보다 좋고, 형통보다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높다면 이것을 하나도 지키지 못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높음이란 우리의 실생활에서 어떤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마음 높음이 무엇인지는 몸으로 마주하는 대상을 내 마음이 상대할 때 나타나는 태도로 알 수 있습니다. 몸으로 만나는 것에 소유의식을 갖고 책임감을 느낍니다. 내 마음에 든다고 느끼든 안 든다고 느끼든 상응하는 태도가 나옵니다. 이렇게 몸으로 만나는 것들을 직접 마음으로 상대하면 나타나는 일이 생각입니다. 이처럼 몸으로 만나는 대상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면 마음이 높은 것입니다.
몸부터 시작해서 몸으로 만나는 대상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마음이 높아진 상태입니다. 우리가 몸으로 어떤 대상을 만날 때는 그 대상이 사람이든 사건이든 상황이든 문제든 물건이든 항상 창조주요 하나님과의 삼각구도 안에서 만나게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시기에 나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이러한 삼각구도는 형성됩니다. 이로부터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이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사람보다 더 먼저 실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항상 삼각구도 안에서 하나님과 몸으로 만나는 대상을 마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 내가 몸으로 만나는 대상의 창조주요 전지전능하신 주권자이십니다. 따라서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몸으로 마주하는 대상에 대해 내가 생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산다고 말씀드리면 ‘별 바보 멍청이 같은 소리를 다 들어보겠네!’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서양 철학의 근본 사상처럼 여겨집니다. 17세기 이후에 대두된 합리주의는 생각함의 능력을 근간으로 일어난 일종의 정신 사조입니다. 이러한 철학적 이야기를 접어두고서라도 당장 우리가 사는 모습만 봐도 생각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생각함이란 신앙의 기본에서 벗어나는 일이고 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창조주요 전지전능하신 주권자이십니다. 우리의 삶을 있게 하시고 이끌어 가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몸으로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하든지 항상 삼각구도 안에서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신 인격체로서 나 자신과 내가 마주하는 대상에 대해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을 제쳐두고 내가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생각은 무시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마음 높음의 상태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높아질 수 있습니다. 대통령이 높다, 장관이 높다고 말하지만 우리의 마음 높이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삶에 어떤 문제가 터졌는데 그 문제를 내가 생각하는 순간 나는 하나님보다 높아진 것입니다. 내가 생각함이란 하나님을 제쳐버릴 정도로 내 마음이 높아진 증거입니다. 몸으로 만나는 사람과 사건과 문제와 물건들에 대해 내가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은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제쳐버리는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삶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는 자들은 출세해서 높아지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 높아질 수 없을 정도로 이미 높아진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명령이 들릴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아예 하나님을 제쳐놓고 하나님을 찾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제쳐놓고 내가 생각해서 하나님보다 높아졌습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대로 말하고 기도하고 간구합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이 내 명령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삼각구도를 염두에 두자면 내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신앙의 기본입니다. 생각을 전혀 안 하고 살아야 한다고 하니 사람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신앙의 기본이기에 지켜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내몸이 누구를 만나든 무엇을 하든 항상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전혀 생각하지 않는 낮은 마음이 될 수 있을까요? 말씀드렸듯이 삼각구도에서 하나님은 내몸으로 만나는 대상에 대해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십니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먼저 보고 하나님 눈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눈치를 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함부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내가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제쳐놓고 주권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할 수 없어서 하나님을 먼저 보면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이제 나는 하나님 편이 되어 그 생각을 받아서 그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생각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생각의 기능은 하나님의 생각을 받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위해 사람에게 생각의 기능을 주셨습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내 삶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천국 보좌에 계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은 내 삶에 대해서 쓰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생각하는 대상입니다. 하나님을 직접 생각하는 일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몸으로 만나는 대상을 내가 생각한다면 문제가 생깁니다.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그 대상을 생각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제쳐놓는 것이고 하나님보다 높아진 것입니다.
TV에서 대통령과 각 부처 장관들의 국무회의 생중계를 보았습니다. 장관은 대한민국이라는 5천만 명으로 이루어진 나라의 살림을 맡은 자로서의 의견이 있습니다. 장관이 생각을 말하면 대통령은 그 이야기를 듣고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면 장관은 대통령의 생각을 듣고 자기 부처로 가서 실무자들에게 전합니다. 직급이 낮을수록 생각의 폭은 좁아집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자가 아니라 윗사람의 생각을 듣고 지키는 자가 됩니다.
장관은 각 부처에서 가장 높은 사람입니다. 어린 시절에 고인이 되신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내무부 장관이라고 부르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집안일은 어머니의 생각대로 움직여지는 것이기에 아버지도 집안일에 대해서는 어머니의 생각을 받아들일 뿐 따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여야 합니다. 예를 들어 건강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건강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내 삶에 대해 보건복지부 장관이 된 셈입니다. 건강이라는 부분에서 마음이 높아진 것입니다. 최종적인 결론을 내는 입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재정 문제를 스스로 생각한다면 내 삶에서 경제기획부 장관이 된 셈입니다. 사업 문제를 스스로 생각한다면 내 삶에서 중소기업청 장관이 된 셈입니다. 자녀의 교육 문제를 스스로 생각한다면 내 삶에서 교육부 장관이 된 셈입니다. 각 부처에서 가장 높은 자가 장관이듯이, 내 마음이 삶의 각 방면에 대해 높아진 것입니다. 최종적으로는 내가 대통령처럼 각 방면의 생각들을 모아서 결론을 내리며 삶을 이끌어 갑니다.
이렇게 스스로 생각을 하는 동안에 바깥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은 하나도 들리지 않습니다. 내가 스스로 삶에 대해서 생각을 하는 마음이 높은 상태에서는 성경을 읽어도 내 생각에 맞는 부분만 걸러서 집착하게 됩니다. 내 생각에 맞는 구절만 크게 보이고, 다른 구절들은 다 제쳐놓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의 번제를 통하여 싫든 좋든 성경의 매장을 함께 공유하면서 지나가는 절차가 굉장히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야만 내 생각, 내 입장, 내 기준과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싫든 좋든 다 해야 하기에 마음대로 건너뛸 수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마음의 높음과 낮음의 차이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내몸으로 만나는 대상에 대해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은 신앙의 기본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는 내가 몸으로 만나는 대상을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생각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신앙의 기본을 무시한다면 내가 하나님 대신에 창조주요 주권자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삶에 대해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내 생각의 기능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생각하는 일에 다 써야 합니다.
이로부터 하나님께서 굳이 마음을 낮추는 훈련 장소로 광야를 택하신 이유도 알 수 있습니다. 2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행동을 해야만 합니다. 행위를 해야만 합니다. 움직이지 않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생각하면서 움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움직여도 생각이 없어야 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생각이 들립니다. 이처럼 움직여야 할 때 하나님의 생각이 들리면 반드시 지키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서 나를 향한 명령이 나오고 있는 상태이기에 하나님의 명령이 들리지 않고 튕겨 나갑니다. 이런 일을 위해서 광야를 택하신 이유는 광야가 사람의 마음을 낮추기 위한 가장 적절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 한가운데 머물러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에 벗어나려는 시도를 할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광야 안에 갇히다시피 한 상태에서는 자기의 삶을 위해 자기 힘으로 무엇인가를 할 가능성 자체가 없습니다.
죄적 체질을 가진 사람은 자기의 삶을 이끌어 가고자 스스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광야는 무엇도 생각할 수 없는 장소입니다. 250만 명이 광야에 나왔는데 물이 없고 양식이 없습니다.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광야에서는 그 무엇을 시도해 볼 수조차 없습니다. 생각조차 불가능합니다. 물 문제와 양식의 문제를 위해서 생각할 수 있어야 시도가 가능한데, 애초에 시도의 가능성이 제로이기에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 없이 사십 년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목말라 죽은 사람도 없고, 배고파 죽은 사람도 없고, 신발과 옷이 해어진 사람도 없습니다. 광야는 죽음의 땅인데 정작 광야 때문에 죽은 사람은 없습니다.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은 자기 삶에 대해 생각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어떻게 살아갈까, 미래가 어떻게 될까, 노후가 어떻게 될까 아무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사십 년을 살았는데 삶에 무엇인가가 부족해서 일이 안 되거나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광야를 택하신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낮추시기 위해서입니다. 마음을 낮춤이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몸으로 만나는 대상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생각만이 내 삶으로 들어와서 진행되고, 하나님의 생각만이 명령의 형태를 띠고 내게 들려옵니다. 그 명령을 따라서만 움직이며 살아갑니다. 가라 하면 가고, 서라 하면 서고, 천막을 치라 하면 치고, 상번제를 드리라고 하면 드립니다.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만 하면서 삽니다. 이와 같은 광야 사십 년은 생각하지 않고도 살 수 있다는 것을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온 세상 선민에게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의 삶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의 과거를 생각해 보면 너무나 많은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렇기에 믿은 지 10년, 20년, 30년, 40년이 되었어도 가나안 땅의 삶을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3절을 보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떡을 먹어야 삽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 떡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속에 들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떡을 찾고자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중에 들리는 말씀 속에는 떡도 있고, 물도 있고, 옷도 있고, 신발도 있고, 미래도 있고, 전쟁의 승리도 있고 다 있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아무것도 없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계실 뿐이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 속에는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을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아무것도 없는 무(無)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직 말씀 하나로 무로부터 천지를 다 불러내어 있게 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말씀에는 대표성이 있습니다. 삶에 필요한 모든 일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물이 있어야 사는 것이 아니다, 공기가 있어야 사는 것이 아니다, 돈이 있어야 사는 것이 아니다, 건강해야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는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깨닫고 또 깨닫게 하시는 과정이 광야 사십 년 생활이었습니다.
여러분의 형편은 어떻습니까? 무엇인가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무엇인가가 많습니까? 적습니까? 하지만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생각에서 나옵니다. 내 삶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생각이 밖으로 나와 말씀이 되십니다. 그리고 말씀 속에는 내 삶에 필요한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약속해 주고 있습니다. 사십 년 광야 생활을 통해서 확증해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요 주권자로서 내 삶을 생각하시는 것도 믿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면 안 됩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안에 내 삶에 필요한 것이 다 있으므로 너는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편 7~10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땅에는 물론 시내과 분천과 샘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우물을 파야 하는 곳도 있을 것이며 아예 물의 근원이 없는 곳도 있을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해서 다 아름다운 곳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실 객관적으로 보자면 가나안 땅보다 비옥한 곳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제가 살아보았던 미국이나 캐나다나 독일이 그러하고 TV에서 덴마크나 네덜란드나 중국이나 일본 등에서 농업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면 가나안 땅은 비옥한 축에도 들지 못합니다. 저의 아버지 말씀이 만주 땅이 얼마나 비옥한지 무를 심으면 어깨에 짊어져야 할 정도로 크게 자라고, 남한의 배보다도 더 달았다고 하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어떤 이유에서 가나안 땅에 대해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와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고, 철과 동 같은 지하자원까지 풍부한 곳임을 이야기한 것일까요?
우리는 이러한 말씀에 담긴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9절을 보면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중동 땅이 그렇게 부족함이 없는 땅이 아닙니다. 물론 석유가 발견되기도 했지만, 당시로서는 모세가 말하는 것처럼 정말로 부족함이 전혀 없는 땅은 아니었습니다. 북아메리카의 비옥한 농토나 아르헨티나 브라질의 초원 지대에 비하자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란 선민의 마음 상태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선민으로서 어디에 살든지 마음이 높지 않고 낮다면 삶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삼각구도 안에서 마음이 언제나 하나님께 가서 붙은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편이 되어서 몸으로 만나는 대상에 대해서 하나님이 갖고 계신 하나님의 생각에 동의하고, 그 생각을 받아들이고, 그 생각대로 움직입니다. 이처럼 내가 하나님 편이 될 수 있다면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마음이 낮은 상태입니다. 그러면 지금 내게 주어진 이 삶의 상황은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 됩니다.
여러분이 지금 돈이 없을 수도 있고, 병이 났을 수도 있고, 자식이 말썽일 수도 있습니다. 삶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마음이 낮아서 삼각구도 안에서 오직 하나님의 생각만을 받아서 살 준비가 되어 있다면 삶은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아름다운 땅이 됩니다. 비유적으로 말해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는 땅이고, 밀과 보리와 소산지와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이며, 먹을 것이 모자람이 없고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입니다. 이것은 내 마음이 낮기만 하면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제쳐놓고 내 몸으로 만나는 대상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입장만 고수하면 내게 주어져 있는 삶의 상황은 7절부터 10절에 묘사된 대로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 됩니다. 본문은 이점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내 마음이 낮아져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마음이 낮아지지 않으면 내가 생각합니다. 내몸으로 만나는 대상에 대해 내가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제쳐놓았다는 증거입니다. 종교는 내가 생각하는 높은 자가 된 상태에서 하나님을 부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이 내 명령을 지켜야 됩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생각이 끊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집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당신의 생각으로 내게 허락하신 삶이 아름다운 땅이 될 수가 없습니다.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 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부족하게 느껴집니다.
솔직하게 여러분의 마음을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인가가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그 이유는 마음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몸으로 만나는 상황을 여러분 스스로가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낮으면 주어진 상황을 부족하게 느끼지 않습니다. ‘뭐가 이렇게 부족함이 없지? 이건 좀 이상하지 않나?’라고 느낄 정도가 됩니다. 지금 상황이 바뀌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낮출 수 있어야 합니다. 몸으로 만나는 상황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려는 나를 십자가에서 죽입니다. 삶에 대해서 생각이 날 때마다 죽이고 또 죽여서 광야 사십 년을 연출합니다. 그렇게 해서 아무것도 내가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내기 위해 십자가를 꼭 붙잡고 아예 생각 자체가 삶을 향해서는 작동하지 않게 만듭니다. 그러고 보면 삶이 완벽하다는 사실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은 자입니다. 몸으로 만나는 세상 삶에 대해서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 모든 사안에 대하여 하나님의 아이디어가 떠오름을 체험하실 수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지 않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생각이 주어지면 하나님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삶을 살다 보면 어디를 봐도 부족함을 찾아낼 수 없는 이상한 상황이 내 앞에 펼쳐집니다. 아무쪼록 주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몸으로 만나는 삶에 대해 죽음으로써 절대 마음이 높아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 생각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향해 다 쏟아부어야 합니다. 그렇게 마음이 낮아져서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님 십자가를 통해서 마음이 낮은 자로 유지되게 하시며, 그럼으로써 내몸으로 사는 삶이 누구를 만나든, 어떤 상황을 대하든, 어떤 문제 앞에서든 부족함이 없는 땅으로 변화되어 이어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