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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3

녹취문: '벌레'라고 낮추어 빛을 발산하라_태승철 (삿 10:1~18)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6.06.06|조회수73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벌레'라고 낮추어 빛을 발산하라>의 줄거리 :

왕 노릇 하던 포악한 아비멜렉이 죽고 사사 돌라와 사사 야일이 이스라엘을 구원해 냅니다. 그러고 나서 이스라엘은 다시금 극심한 영적 타락으로 빠져들고 맙니다. 그런데 사사 돌라와 야일에 대한 이야기가 참으로 간단합니다. 그러나 기록이 간단하다고 내용까지 가벼운 것은 아닙니다. 이 간단한 기록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다시금 영적으로 극심한 타락에 빠져드는 이유를 제시합니다. 이 두 사사의 간단한 기록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벌레처럼 낮아져서 빛을 발산하라'라는 겁니다.

 

'벌레'라고 낮추어 빛을 발산하라

 

(사사기 10:1~18)

 

1. 아비멜렉의 뒤를 이어서 잇사갈 사람 도도의 손자 부아의 아들 돌라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니라 그가 에브라임 산지 사밀에 거주하면서

2.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이십삼 년 만에 죽으매 사밀에 장사되었더라

3. 그 후에 길르앗 사람 야일이 일어나서 이십이 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니라

4. 그에게 아들 삼십 명이 있어 어린 나귀 삼십을 탔고 성읍 삼십을 가졌는데 그 성읍들은 길르앗 땅에 있고 오늘까지 하봇야일이라 부르더라

5. 야일이 죽으매 가몬에 장사되었더라

6.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리고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

7.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블레셋 사람들의 손과 암몬 자손의 손에 그들을 파시매

8. 그 해에 그들이 요단강 저쪽 길르앗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땅에 있는 모든 이스라엘 자손을 쳤으며 열여덟 해 동안 억압하였더라

9. 암몬 자손이 또 요단을 건너서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 족속과 싸우므로 이스라엘의 곤고가 심하였더라

 

 

본문 중심으로 <‘벌레’라고 낮추어 빛을 발산하라>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나 자신을 ‘벌레’라고 낮춤으로써 빛이 발산되게 하라는 뜻입니다. 본문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에 사사가 있을 때는 평안하다가 사사가 죽고 나면 타락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주변의 이방 민족들을 몽둥이로 쓰셔서 야단을 치십니다. 이스라엘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아프셔서 또 사사를 보내 구원하십니다. 이러한 패턴이 계속되는 가운데 본문에는 이상한 느낌이 드는 부분이 있습니다.

6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리고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라고 했습니다. 바알들과 아스다롯은 가나안의 신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아람의 신들, 시돈의 신들, 모압의 신들, 암몬 자손의 신들, 블레셋의 신들도 섬겼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바알과 아스다롯만을 섬겼습니다. 아람 사람들은 아람의 신만 섬겼습니다. 시돈 사람들은 시돈의 신만 섬겼습니다. 모압 사람들은 그모스를 섬겼고, 암몬 사람들은 밀곰을 섬겼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다곤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여호와의 선민인 이스라엘은 한 번 타락하면 이 모든 민족의 신을 다 섬겼습니다. 어느 한 민족의 신을 섬겨도 문제가 될 텐데 이스라엘은 아예 만신전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이름을 믿던 사람들이 왜 이렇게 극심하게 타락하는 것일까요? 이방 민족들이 섬기는 신은 말도 못하는 거짓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기들의 신을 충실하게 섬겼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하면서 모든 민족의 신을 다 섬겼습니다. 아름다운 꽃일수록 시들면 흉하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타락할 때는 이처럼 극심한 타락상이 나타납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현상은 분명히 확인됩니다. 결국 유대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못 박아 죽임으로써 통째로 버림받았습니다. 구약에서의 타락이 계속 유지된 결과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이 세웠던 고린도 교회를 비롯해서 문제가 없는 교회는 없었습니다. 중세 때부터 기독교라는 종교가 유지된 힘은 조직이고 건물이고 관습이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똑같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개별적으로 관계를 이어가는 신앙은 이처럼 유지하기가 힘듭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사실상 개신교도 십자가 복음을 생활화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날마다 예수님과 함께 죽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십자가 복음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생활화하지 않는다면 개신교인이든 천주교인이든 동방정교 교인이든 그 어떤 이름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도 다 타락한 것입니다. 심지어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조차도 도중에 복음을 놔버리는 일은 흔하게 일어납니다.

십자가 복음이 왜 이렇게 내 것이 되기가 힘든 것일까요? 십자가 복음의 사실은 예수님이 나 때문에 죽으셨다는 사실, 부활 승천하셨다는 사실, 내 마음을 아버지께로 끌고 올라가서 아버지를 마주하게 하신다는 사실, 이 땅에는 아버지가 내 몸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사실들을 갖기가 힘들까요? 본문은 그 대답을 사사 돌라와 사사 야일을 통해 들려주고 있습니다. 돌라와 야일을 통하여 같은 내용을 새로운 언어로 신앙의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이스라엘이 어느 민족보다도 영적인 정조 없이 지독하게 음란하고 타락하여 만신전이 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십니다.

 

사사 돌라와 사사 야일에 대한 내용은 빈약합니다. 본문의 내용만으로는 이들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쉽게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기록이 간단할 뿐이지 그 속에 담긴 내용이 간단한 것은 아닙니다. 1절을 보면 “아비멜렉의 뒤를 이어서 잇사갈 사람 도도의 손자 부아의 아들 돌라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니라…”라고 했습니다. 돌라가 아비멜렉의 뒤를 이었다는 것은 법적으로 아비멜렉을 계승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비멜렉이 죽은 뒤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릴 자로 돌라를 세우셨다는 뜻입니다. 다만 돌라는 앞선 사사들처럼 용사와 전사의 역할로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은 아닙니다. 이전 기드온까지의 사사들이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했다면, 돌라는 내부의 요인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했습니다.

아비멜렉의 뒤를 이었다는 언급이 시사하는 대로 돌라는 아비멜렉 때문에 벌어진 이스라엘 내부의 혼란상을 정리한 인물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아비멜렉으로 인해 내전이 발생했습니다. 세겜 사람들의 도움으로 아비멜렉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겜에서 아비멜렉에 대한 반역이 일어났고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 뒤로 외부 불량배 가알이라는 사람이 또다시 세겜을 선동하여 아비멜렉에게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아비멜렉이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천 명의 세겜 사람이 불타 죽었습니다. 또 아비멜렉은 망대로 도망한 세겜의 잔류 사람들을 태워죽이려다가 한 여인이 던진 맷돌 위짝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후 이스라엘은 극심한 혼돈에 빠졌습니다. 이 혼돈을 안정과 질서로 바꾼 사람이 사사 돌라입니다. 돌라는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용사나 전사가 아닌 행정가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돌라를 어떤 방식으로 쓰셨고, 돌라는 어떤 준비를 했기에 사사로 세움을 받았을까요? 이에 대한 이야기가 이스라엘이 왜 이렇게까지 타락했는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에는 돌라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등장하지 않습니다만 돌라라는 이름 자체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앞서 아비멜렉의 뒤를 이었다는 표현이 등장한 것은 아비멜렉과 돌라를 비교해 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은 ‘나의 아버지는 왕이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나는 왕의 아들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한편 돌라라는 이름은 특이하게도 ‘벌레’라는 뜻입니다. 돌라의 아버지가 무슨 생각으로 아들에게 이러한 이름을 지어주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돌라의 이름은 그의 행적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사야 41장 14절을 보면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야곱이 지렁이 같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지렁이 같기 때문에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돌라에 대해서도 생각해 봅니다. 돌라라는 이름은 ‘나는 벌레다’라는 자아의식을 갖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다시 말해, 돌라는 자기를 지극히 낮은 자로 여겼던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뒤를 이었다는 표현으로부터 둘을 비교하자면 돌라는 아비멜렉과는 정반대의 태도를 지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이복형제 칠십 명을 한 칼에 죽여서 피바람을 일으키고서라도 자기가 왕이 되어야 마땅하다고 여겨서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왕이다.’라는 이름 그대로의 행보를 보였던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아버지가 죽으면 당연히 내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돌라는 자신을 인간으로도 취급하지 않고 벌레로 여길 정도로 인간 사회 안에서 자기를 낮은 자로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 ‘나는 벌레 같은 자다.’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단순히 자기를 낮춘 것이 아니라 낮아진 자아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낮아진 자아의식은 사회적 열등감이나 집안의 부족함 혹은 능력의 부재 때문에 갖게 된 것이 아닙니다. 돌라는 하나님 앞에서 낮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졌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낮은 자의 자아의식을 갖는다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는 곧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시고 거룩하신 주권자라는 사실을 강렬하게 의식하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의 주권자로서 참새 한 마리까지 주관하시는 유일한 주체이시며 전지전능하심을 코앞에서 의식하는 사람은 어떤 자아의식을 갖게 될까요? 인간이랍시고 생각하고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 있음을 염두에 둔다면 생각 하나 말 한 마디를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몸의 세포 수까지 주권적으로 주장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셔서 내 죽음의 시간을 아시고 죽기까지 이루어질 삶의 모든 일을 알고 계시고 계획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 인류학이 규정하는 인간의 장점 같은 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강렬하게 의식하면 의식할수록 인간으로서 가진 장점이 활용될 가능성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라는 인간에게서 아무 소용도 없는 인간 됨의 특징을 다 제거하면 남는 것은 벌레와 다름 없습니다. 그저 덩치 큰 벌레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돌라의 이름에 담겨 있는 자아의식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5장 19절에서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인간 사회 속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처하셨음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이 가장 낮아지실 수 있었던 이유는 인류 전체 중에서 코앞에 계신 하나님을 가장 강렬하게 의식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면 의식할수록,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끼면 느낄수록, 하나님을 실감하면 실감할수록 사람은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그 어떤 장점도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는 내 뜻과 내 의지를 따라 활용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인간적 특징을 다 제외한 존재가 나라면, 나는 덩치 큰 살덩어리 벌레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아비멜렉은 이복형제 칠십 명을 다 죽여서라도 왕이 되어야 한다고 자기를 높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알았지만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하나님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인간 사회 안에서 자기를 높이고자 합니다.

 

돌라처럼 자기를 낮추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하나님께서 창조적으로 계획하신 바를 마음대로 이루실 수 있는 하나님의 활동 공간이 생깁니다. 돌라가 사사로서 한 일이란 자기 자신을 벌레로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살아계신 주권자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 됨의 특징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쓸데없기에 자기를 벌레로 보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벌레처럼 여기고 자기를 낮추면 하나님이 활동하실 수 있는 공간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공간에 오셔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몰아내십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의 창조적인 뜻과 계획을 이루실 자유로운 활동 공간을 확보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면 됩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할까요?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가 영적으로 죄인이 된 내가 죽는다는 것에 사회적인 의미를 붙입니다. 인간 사회에서 내가 가장 낮은 자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는 인간 중에 가장 낮은 자의 자리이자 가장 가치 없는 자의 자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강도이자 불량배였던 바라바보다 못한 수준으로 취급을 받으셔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빌라도가 바라바를 놔줄지 예수님을 놔줄지 물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라바를 선택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바라바보다 못한 자로 버림받으셨기에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의식이란 인간 사회 안에서 누구를 만나든지 마음으로는 내가 가장 낮은 자라는 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실제 몸은 왕이라도 마음은 노비처럼 낮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실제 몸은 노비라도 마음은 왕처럼 높을 수도 있습니다. 인간 사회 안에서 실제로 내 몸에 주어진 지위가 어떻든지 내 마음은 예수님처럼 낮아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바라바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셔서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기에 나는 예수님과 연합해야 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이 바라바보다 낮은 취급을 받으셨고 내가 예수님과 연합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기에, 나는 누구를 만나든지 무조건 그보다 낮은 사람이라고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내 앞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천국은 물리적 공간이 아닌 영적 공간입니다. 내 마음에서는 물리적인 몸보다도 영적인 천국이 더 가까운 곳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가까이에 계신 하나님을 실감하면 실감할수록 나는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나를 낮아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죄와 저주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앞에 모시고 있을 때 마땅히 취해야 할 낮아짐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인간 사회 안에서 어떤 사람을 만날 때 내가 그 사람의 의식이나, 그 사람의 태도나, 그 사람의 마음가짐보다 더 낮은 곳에 있음을 인정한다면 십자가 죽음의 생활화가 무르익은 상태입니다. 이스라엘이 타락한 이유도 이로부터 찾을 수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눈앞에 계신 분으로 의식하면서 나를 낮추지 않습니다. 내가 벌레에 불과한 존재라는 것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온갖 민족의 신들을 섬기는 혹독하고 참혹한 타락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사사 야일은 어떤 인물일까요? 야일도 정보가 부족한 것은 마찬가지지만 특징이 있습니다. 4절을 보면 “그에게 아들 삼십 명이 있어 어린 나귀 삼십을 탔고 성읍 삼십을 가졌는데…”라고 했습니다. 야일에게 아들이 삼십 명이 있었다는 것은 아들 칠십 명을 두었던 기드온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삼십 명의 아들들이 어린 나귀 삼십을 탔고 성읍 삼십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묘사를 보면 야일의 가문이 이스라엘 내에서 엄청난 부를 축적한 집안이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러한 의미에서 아들 삼십 명과 어린 나귀 삼십과 성읍 삼십을 언급한 것이 아닙니다.

아비멜렉의 뒤를 이어서라는 말이 야일에게도 적용할 기준을 제공합니다. 기드온과 아비멜렉을 야일과 아들들과 비교해 보라는 것입니다. 앞서 본 8장 30절을 보면 “기드온이 아내가 많으므로 그의 몸에서 낳은 아들이 칠십 명이었고”라고 했습니다. 아들이 칠십 명 있었음을 언급하며 아내가 많았다는 사실도 같이 언급됩니다. 그런데 정작 칠십 명의 아들들은 아비멜렉과 막내 요담을 제외하고는 익명으로 처리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은 모든 이복형제를 살해하는데 막내 요담만이 숨어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기드온의 아들들이 다 죽었다는 것은 많은 아내를 얻는 과정이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서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일찍이 기드온이 횃불을 담은 항아리 전략으로 미디안을 물리칠 때와는 다르게 하나님이 지시하는 바를 따라 아내를 얻었던 것이 아님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원래 ‘없음’이 마땅한 존재들이 태어났기에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의 악함을 통해서 이들을 없애버리신 것입니다. 이처럼 기드온이 아내가 많아서 칠십 명의 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굉장히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습니다.

한편 야일도 삼십 명의 아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기드온 정도는 아니지만 삼십 명이나 되는 아들을 낳으려면 야일도 적지 않은 아내를 두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언급되는 분위기가 기드온과는 다릅니다. 어린 나귀 삼십을 탔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지체 높은 사람들이 나귀를 탔습니다. 특히 어린 나귀를 탔다는 것은 평화를 의미합니다. 이는 곧 야일에게 아들이 삼십 명이나 있었지만 이들은 기드온의 아들들과는 다르게 권력을 향한 야심 때문에 갈등이나 충돌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읍 삼십도 야일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권력을 이용해 땅을 욕심내어 소유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왕과 같은 위치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야일의 아들들이 각각 성을 가졌다는 것은 모두 다 자기의 한계와 분수를 알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전체를 통치하겠다고 나섰던 아비멜렉과 같은 마음을 가진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기드온도 많은 아들을 두었고 야일도 많은 아들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두 집안의 분위기는 전혀 다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기드온은 미디안 전쟁 이후에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과 특별 대우에 중독되면서 ‘어쩔 수 없음’의 상태를 벗어나 ‘못할 게 없음’의 상태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눈이 보기에 좋은 느낌을 따라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며 살게 된 것입니다. 오감의 좋은 느낌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야일의 삼십 명 아들들은 모두 자기 분수를 알고 형제들 간에 평화와 화목을 이루었습니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야일의 이름에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야일이라는 이름은 ‘빛을 비추는 자, 빛을 발산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빛을 발산함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기드온의 횃불을 담은 항아리 전략을 떠올려 봅니다. 내 몸이 가는 곳마다 나의 생각, 나의 뜻, 나의 의지가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계획이 표현되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나를 통해 이 세상에 표현되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의지와 생각이 바로 빛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에서 생각하고 계획하고 뜻하는 대로 움직이는 어둠의 상태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횃불을 담은 항아리 전략처럼 내가 가는 곳에서 하나님의 뜻이 나의 뜻을 제치고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나의 생각을 제치고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나의 계획을 제치고 나타납니다. 이렇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과 생각과 계획이 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일의 이름에 담겨 있는 본문의 의도입니다.

 

본문은 사사 돌라와 야일을 합쳐서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계획이 나를 통해 나타날까요? 돌라는 자기를 낮췄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돌라의 주변을 다스리시며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몰아내셨습니다. 한편 야일 또한 돌라와 같은 자세를 취했을 때 야일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났습니다. 돌라는 자기를 낮췄더니 돌라의 주변을 하나님이 질서로 다스리셨습니다. 야일도 돌라와 같이 자기를 낮췄더니 하나님의 뜻이 자기를 통해 나타났습니다. 여러 아내를 얻은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서 아들 삼십 명이 태어났고, 그 아들들이 어린 나귀를 타고 다니며 서로 화목하고, 자기들의 한계와 분수를 알아서 왕이 되겠다고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야일의 이름이 의미하는 대로 하나님의 빛이 비추었던 것입니다.

내 주변이 하나님에 의해서 다스려지기를 원하신다면 나를 낮추어야 합니다. 나를 낮출 때 내 몸은 하나님의 빛을 발산하는 횃불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지켜질 수 있습니다. 인간 사회라는 삶의 현장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의식하며 나를 낮추려면 아비멜렉처럼 다른 사람 위에 높아지고 싶은 나를 철저히 죽임으로써 벌레로 취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살아있는 몸이지만 벌레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식함으로써 생각하는 능력, 감정의 능력, 의지의 능력, 판단의 능력, 미래를 계획하는 능력을 비롯한 모든 인간적인 능력을 완전히 제거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이제 이 세상에 남아있는 몸은 벌레에 불과하다.’라는 의식으로 자기를 낮추면 하나님께서는 내 주변에 역사하실 것입니다. 또한 내 생각과 감정과 의지 안으로 하나님의 생각, 감정 의지가 들어오면서 빛을 발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야일처럼 아들 삼십 명이라는 다산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옳은 일입니다.

성경은 풍요와 다산을 금기시 하지 않습니다. 다만 기드온의 경우처럼 풍요와 다산이 나를 ‘어쩔 수 없음’에서 벗어나게 하여 ‘못할 게 없음’으로 밀어 넣는 것을 경계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풍요로울 수 있고 다산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풍요와 다산에 대한 내 마음의 태도는 물과 기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과 기름이어서 ‘어쩔 수 없음’에 계속 갇혀 있고, 나를 벌레로 보는 자아의식이 유지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자아의식이 유지되면 하나님의 뜻대로 풍요로울 수도 있고 다산일 수도 있습니다. 풍요와 다산에 대한 세밀한 경계를 분명히 깨닫고 나를 끝없이 낮추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이란 나를 낮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생각이라는 빛을 비추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돌라처럼 십자가에서 죽은 자이기 때문에 몸은 살아 있어도 나를 벌레로 여기게 하시옵소서.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활동 공간이 확보되는 삶을 살게 하시며, 그렇게 함으로써 나 자신도 하나님의 생각과 뜻과 계획을 빛으로 발산하는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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