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사사기-3

녹취문: 무시, 경멸에 긁히면 영적 바보_태승철 (삿 11:1~28)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6.06.08|조회수79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 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무시, 경멸에 긁히면 영적 바보>의 줄거리 :

하나님을 실시간 마주하고 있기는 신앙의 ABC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실제로 마주하는 중에는 그 어떤 사람도 존재감에서 하나님에 비하면 티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마주하는 자는 이미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자기 속에서 본의 아니게 무시하고 있는 셈입니다. 내가 먼저 티끌처럼 여겨야 마땅한 아무것도 아닐 존재가 나를 경멸한다고 내 마음이 긁힘을 당한다면, 그것은 신앙의 ABC를 모르는 영적 바보라서 그런 겁니다. 이런 영적인 바보는 열등감이 심리 작용의 기본 바탕이라서 조금만 무시하는 기미가 보여도 분통이 터져 억울해 돌아버립니다.

 

무시, 경멸에 긁히면 영적 바보

 

(사사기 11:1~28)

 

1. 길르앗 사람 입다는 큰 용사였으니 기생이 길르앗에게서 낳은 아들이었고

2. 길르앗의 아내도 그의 아들들을 낳았더라 그 아내의 아들들이 자라매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

3. 이에 입다가 그의 형제들을 피하여 돕 땅에 거주하매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 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

4. 얼마 후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하니라

5.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할 때에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데려오려고 돕 땅에 가서

6. 입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 하니

7.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하니라

8. 그러므로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이르되 이제 우리가 당신을 찾아온 것은 우리와 함께 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하려 함이니 그리하면 당신이 우리 길르앗 모든 주민의 머리가 되리라 하매

9.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넘겨 주시면 내가 과연 너희의 머리가 되겠느냐 하니

10.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이르되 여호와는 우리 사이의 증인이시니 당신의 말대로 우리가 그렇게 행하리이다 하니라

11. 이에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과 함께 가니 백성이 그를 자기들의 머리와 장관을 삼은지라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아뢰니라

 

 

본문 중심으로 <무시, 경멸에 긁히면 영적 바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사람이 나를 무시하거나 경멸할 때 마음이 긁히거나 상처가 되거나 반응한다면 영적인 바보라는 뜻의 제목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가장 기본 중의 기본인 ABC를 지키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일입니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데도 신앙의 기본을 모른다면 영적 바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사 입다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본문에 언급된 길르앗은 요단강 동쪽 지역입니다. 요단강 동쪽에는 제일 북쪽에 므낫세 반 지파가 있고 그 아래에 갓 지파가 있고 그 아래에 르우벤 지파가 있습니다. 이 지역을 합쳐서 길르앗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길르앗은 므낫세 반 지파에 속한 사람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이 길르앗의 아들이 입다입니다. 그런데 입다는 정실부인이 아닌 창녀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본문에서 기생이라 표현된 원문을 보면 창녀라는 뜻입니다. 길르앗이 창녀와 동침함으로써 태어난 아들이 입다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길르앗의 정실부인이 낳은 아들들은 입다를 가문의 수치로 여겨서 경멸하고 혐오했습니다. 결국 이복형제들이 주동이 되어서 입다를 므낫세 지파 경계 바깥으로 추방하다시피 쫓아냈습니다. 이들은 출신이 천한 입다에게 아버지의 유산이 할당되는 것을 아깝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입다에게 유산이 할당된다면 길르앗 가문의 사람으로 인정되기 때문입니다. 창녀가 낳은 아들이 길르앗 가문에 정식으로 인정된다는 것은 정실부인의 아들들에게 있어서는 오점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복형제들의 취지에 길르앗 장로들까지 가세합니다.

결국 입다는 므낫세 지파 경계 바깥으로 피신하였습니다. 요단강이 남북으로 사해까지 흐르는데 가장 위의 므낫세 반 지파 북쪽 경계 바깥으로 나가서 이방 수리아 지역의 돕 땅에 거주하며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1절을 보면 “길르앗 사람 입다는 큰 용사였으니…”라고 했습니다. 다만 이때까지 입다는 특별한 호전성이나 야심을 보인 적은 없습니다. 자기를 쫓아내는 이복형제들에게 저항하거나 앙심을 품은 기색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순순히 쫓겨나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기드온의 아들이었던 아비멜렉과 대조적입니다. 아비멜렉은 세겜 출신의 첩에게서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기드온의 집이 있던 오브라의 부인들에게서 태어난 아들들에게 따돌림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비멜렉은 이복형제들에게 앙심을 품고 이들을 한칼에 죽이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아무리 아비멜렉이 권력에 대한 욕심이 있었을지라도 형제들과 우호적인 관계였다면 한칼에 죽이겠다는 마음을 먹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반면 입다는 아비멜렉과 거의 똑같은 대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복형제들에게나 가세해서 자신을 추방하는 길르앗 장로들에 대해서 조금도 앙심을 품지 않았습니다. 순순히 쫓겨 나가서 자신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3절을 보면 “이에 입다가 그의 형제들을 피하여 돕 땅에 거주하매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 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잡류로 번역된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무익한 사람들, 쓸모없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써 정착을 위한 여건이 없는 부랑자들을 가리킵니다.

 

한편, 4절 이후에 특이한 언급이 이어집니다. 기록상으로는 이방 땅으로 추방당하다시피 쫓겨난 입다에게 잡류가 몰려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암몬 족속이 이스라엘을 침략하려 합니다. 이때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찾아와서 장관이 되어달라고 부탁합니다. 대체 어떤 이유에서 길르앗 장로들은 입다를 찾아왔던 것일까요? 잡류가 모여서 함께 출입했다는 것은 의지할 곳 없는 부랑자들이 입다에게 와서 의탁하며 세력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세력이 커지니 주변 사람들과의 다툼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싸움에서 입다는 승승장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입다와 장로들의 대화를 보면 입다가 어떤 식으로 싸웠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9절을 보면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넘겨주시면 내가 과연 너희의 머리가 되겠느냐 하니”라고 했습니다. 입다는 잡류의 지도자가 되어서 싸움을 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적들을 자기 손에 넘겨주시는 것을 이미 경험하였습니다.

입다의 출신은 천하였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훌륭했습니다. 이스라엘 내에 입다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을 마주 보며 호흡을 맞춘 자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복형제들과 길르앗 장로들은 이러한 입다를 쫓아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소문을 듣자 하니 입다는 쫓겨난 곳에서 잡류를 이끌고 세력을 형성해서 싸움이 일어나는 족족 승리한다고 합니다. 이에 장로들은 다시 입다를 찾아와 장관이 되어주기를 부탁했던 것입니다. 입다가 하나님이 넘겨주시는 상대방을 물리쳤다는 소문이 퍼지지 않았다면 장로들이 찾아올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입다에 대한 소문이 이스라엘 내에 퍼질 정도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으로부터 입다가 독자적으로 하나님을 마주 보는 신앙을 유지하는 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길르앗 장로들이 장관 되기를 부탁할 때 입다는 곧바로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넘겨 주시면”이라고 하나님을 언급합니다. 입다가 철저하게 여호와 하나님을 마주 보며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입다는 혈혈단신으로 추방되어 이방 땅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입다에게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만이 유일한 마음의 상대자였고 의지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마주 보는 상태에서 입다의 인격이 드러납니다. 입다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결이 어떻게 특징적인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ABC가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예수님 안에서 늘 하나님을 마주 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신앙의 ABC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마주 보는 상태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하나님을 마주 보는 구원받은 상태가 이루어지면 어떤 사람으로 드러나느냐를 보여주십니다.

 

입다의 형제들은 입다를 경멸하고 무시했습니다. 또한 길르앗 장로들까지 가세하여 입다를 추방하다시피 내쫓았습니다. 그러나 입다는 이러한 상황에서 아비멜렉과 같은 태도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무시와 경멸에 마음이 긁히는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입다가 먼저 무시하였기 때문입니다.

입다는 자신을 창녀에게서 태어난 자식이라 비웃는 형제들을 마음에서 무시했습니다. 우리 또한 마음속에서 비중 있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나를 무시하고 경멸한다면 마음은 긁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내가 안중에도 두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그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입다의 태도를 아비멜렉과 비교해 보면 입다는 자신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형제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칠십 명의 형제들에게 따돌림을 받자 앙심을 품었습니다. 이것을 평생 간직하다가 형제들을 몰살하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입니다. 막내인 요담만 숨어서 목숨을 부지했을 뿐 나머지 형제들은 전부 아비멜렉의 앙심에 몰살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입다는 자신을 쫓아낸 사람들을 잊고 자기 생활을 해나갔습니다. 입다가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창녀가 낳은 아들이라고 무시하는 사람들을 마음에서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마주 보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을 마주 보는 사람에게는 하나님보다 더 큰 존재감의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사람에게 무시나 경멸을 당할지라도 마음이 긁히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나를 무시하기 전에 내가 그 사람을 무시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조금도 비중 있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기에 그가 나를 무시할지라도 나는 마음이 긁히지 않습니다. 반대로 내 마음이 어떤 사람에 의해 긁힘을 받았다면 내가 그 사람을 그만큼 소중하게 생각하고 귀하게 생각하고 비중 있게 생각한다는 증거입니다. 그의 존재감을 크게 느끼기에 그가 나를 무시하고 경멸할 때 마음이 긁히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에 십자가 복음 방송을 듣는 자매님이 강릉을 방문하셔서 집사람과 셋이 대화를 했습니다. 이분의 사연을 소개해 봅니다. 어릴 때부터 알던 동네 오빠가 단독 주택에 보증금 2천만 원을 받고 20년을 살게 해주었습니다. 가족과 함께 이 집에서 잘 살았는데, 집주인이 돌아가시면서 집이 아들에게 유산으로 넘어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들이 이제 집을 팔겠다고 나가라고 합니다. 20년이 넘도록 집 걱정 없이 살다가 갑자기 살 곳을 찾아야 했습니다. 이분에게는 세 명의 자녀가 있는데 첫째는 독립을 했고 둘째 딸과 셋째 아들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이제 보증금 2천 만원으로 서울에서 집을 구하기가 어려워 겨우 월세로 이사를 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특이한 경험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이 27살인데 부모님과 함께 살며 직장을 다니고 있는데 아들의 표정이 뭔가 마음에 걸렸다고 합니다. 남의 집이긴 했지만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집 걱정 없이 잘 살아왔습니다. 이제 60이 넘은 어머니 아버지가 겨우 2천만 원으로 서울에서 집을 구하려 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아들이 보며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런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나 싶어서 표정이 좋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사사 돌라의 이름이 벌레라는 뜻이라고 했는데 아들이 어머니를 바라보는 눈빛이 마치 벌레를 보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아들이 그럴 리가 있겠느냐고 말씀드렸습니다만 더 중요한 것은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왜 그것이 마음에 걸렸느냐는 것입니다. 아직도 마음에서 아들의 존재감이 큰 것 아니냐고 말씀을 드렸더니, 대답하시기를 아들에 대해서 죽은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존재감의 문제입니다. 아들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감을 마주 보고 있기 때문에 아들의 존재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에게는 지금 하나님을 마주 보고 있다는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2천만 원밖에 없지만 하나님을 가지고 있다는 기쁨으로 압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들의 눈초리에서 무시하고 경멸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는 것은 자격지심이 생긴 것입니다. 아직도 마음 한편에는 아들이 엄청난 존재감을 내뿜으며 비중 있는 존재로 살아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사람의 무시와 경멸이 마음에 긁힘이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존재감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존재감을 더 크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알아야 십자가 죽음은 세밀해질 수 있습니다. ‘나는 자녀에 대해 죽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분명히 죽은 부분이 있습니다. 진로 문제나 그밖에 자잘한 사항들에 대해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끄시겠지.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라고 여기며 자녀에 대해 기대하지 않는다든지, 자녀의 형통을 바라지 않는다는지 하는 식으로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하지도 못했던 상황에서 여전히 자녀가 비중 있게 살아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신앙의 기본이 아직 충실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입다의 인격적인 특징은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사람에게서 그대로 보여야 합니다. 입다가 이방 땅 돕에 머무는 동안 잡류가 모여들었습니다. 자기들끼리 보아도 기분이 나빴을 것 같습니다. 서로 패배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방 땅에 괜찮은 사람들이면 좋았을 텐데, 아마도 이스라엘에서 머물 수 없는 사람들이 입다에게 모였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랬어도 입다는 전혀 열등감을 갖지 않았고 어떤 무시나 경멸에도 마음에는 긁힘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입다가 하나님을 마주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입다의 세력이 생기면서 주변의 압력이 가해지자, 하나님께서는 대적들을 입다에게 넘기셨습니다. 입다는 이러한 일들을 경험하며 살 정도로 여호와 하나님을 마주 보았습니다. 하나님과 호흡이 맞았던 것입니다.

입다처럼 하나님을 마주 봄이 이루어지면 타인의 무시나 경멸에 마음이 긁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객관적인 출신 성분조차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 마주 보는 하나님으로부터 생각과 말과 행동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입다의 몸은 창녀가 낳았어도 입다의 인격을 구성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은 하나님이 낳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마주 보며 하나님과 호흡을 맞추는 자들은 매일매일 하나님이 낳으신 자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앙의 ABC가 충족될 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천국에 올라가 하나님 마주보기를 지속하는 신앙의 ABC가 미치는 파급효과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마주 보는 자는 본의 아니게 사람을 무시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마주하기에 사람이 작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사람을 대할 때 삶의 현장에서는 어떤 태도가 나타날까요? 입다는 장관이 되어달라는 길르앗 장로들의 요청에 대해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넘겨 주시면 내가 과연 너희의 머리가 되겠느냐”라고 되묻습니다. 이것은 계약서에 확인할 수 있도록 내용을 기록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입다는 오히려 상대의 자존심을 염려했습니다. 자기가 당한 무시와 경멸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자존심을 염려했던 것입니다. 이 구절을 풀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나를 창녀에게서 낳은 아들이라고 무시하며 오점으로 여겼다. 그래서 나를 추방했지만 나는 받아들였다. 나는 하나님만 계시면 되기에 상관 없다. 그런데 내가 다시 돌아가서 장관 자리에 있게 되면 당신들 마음이 편하겠느냐? 내가 당신들의 머리가 되는 것을 견뎌낼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입다는 비아냥대거나 조롱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에게 장관 자리를 요청하는 자들의 자존심을 생각해 준 것입니다. 입다는 자신을 쫓아냈던 자들의 무시와 경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럴 수 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다만 내가 장관 자리에 서면 당신들의 마음에 긁힘이 없겠는가?’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길르앗 장로들은 상황이 다급했기에 자존심을 따질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10절에서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이르되 여호와는 우리 사이의 증인이시니 당신의 말대로 우리가 그렇게 행하리이다 하니라”라고 대답합니다.

 

한편, 입다의 태도는 암몬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마주 보는 입다에게 암몬은 대적으로써 무찌를 대상이지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입다에게는 하나님이 적들을 넘겨주셨기에 잡류를 이끌고도 모든 싸움을 이겼던 기억이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넘겨주시려는 뜻이 있느냐 없느냐는 것이지, 암몬 족속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입다는 하나님을 마주 보고 있었기에 그 마음에서 암몬 족속의 존재감은 티끌같이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입다의 마음에서 암몬 족속에 대한 무시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 길르앗 장로들은 암몬 족속에게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자존심을 다 내팽개치고 자신들이 내쫓았던 입다를 찾아와 장관이 되어달라 부탁합니다. 이렇게 무서운 암몬 족속이 입다에게는 무서운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입다의 마음속에서 암몬 족속은 무시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입다는 이렇게 마음에서 무시되는 암몬에 대해서도 단순히 싸워서 죽이고 이기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입다는 전쟁을 하기에 앞서 암몬 족속에게 사자를 보내 담판을 지으려고 합니다. 싸움 없이 갈등 상황을 종료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입다가 암몬에게 전한 내용 자체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 담판을 펼치는 입다의 논리입니다. 입다가 펼친 논리의 근거는 하나님이 주권자시라는 것입니다. 입다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땅을 우리 땅이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게 아니다.’라는 논리를 갖고 있었습니다. 입다에게 있어서 세상일을 할당하시는 것은 결국 주권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요단강 동편 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할당하신 땅이니 암몬 족속이 물러가기를 바란다는 말을 합니다.

입다가 이러한 담판을 제시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입다의 마음에서는 하나님의 존재감에 의해 암몬 족속이 무시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암몬 족속에 대한 태도는 무찔러 죽이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쉽게 말해서 ‘가능한 너희도 살아날 수 있는 기회를 붙잡아야 되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너희를 넘기시는 뜻이 분명히 있는데, 너희는 전쟁이 일어나면 다 죽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제공하겠다.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을 인정하여 요단강 동편 길르앗 지역이 이스라엘 땅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물러간다면 죽이지 않겠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진정한 이웃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마주 보며 좋아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사람의 존재가 완전히 무시되는 마음 상태에서만 이웃 사랑은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심정으로 이웃을 관계하고 배려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의 무시와 경멸 앞에서 마음에 긁힘을 당한다면, 하나님을 마주 보며 전심을 다하여 애착을 쏟아붓는 상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애착을 쏟아부어서 사람을 완전히 무시한다면 어떤 사람의 경멸과 무시도 내게 긁힘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를 무시하는 사람의 자존심을 먼저 염려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심지어 마땅히 죽어야 할 대상들을 향해서도 끝까지 그들이 살아날 기회를 제공하려는 애틋한 사랑의 마음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십자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 관계함으로써 그 하나님의 크심을 느끼는 만큼 여러분 안에서 사람이 무시되기를 바랍니다. 설령 아들이 나를 벌레처럼 보더라도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부터 오는 무시와 경멸로 느껴질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에 아무런 자극도 줄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이 크게 느껴지면, 나를 경멸하듯 바라보는 아들을 향해서도 하나님의 심정으로 사랑을 베풀 수가 있습니다. 물론 앞서 예시로 들었던 아들이 정말로 어머니를 경멸하는 마음을 가졌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머니 자신이 아직도 아들을 크게 생각하면서 본의 아니게 열등감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예수님 안에 들어가 하나님을 마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은 천국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이 누구의 자식이고 어떤 신분이든지 우리의 마음과 인격은 천국에 있는 상태에서 땅을 시작해야 합니다. 아무쪼록 오늘도 천국에서 태어난 자로서 땅을 사는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문제에 대하여 온전한 자유를 누리면서 하나님의 심정으로 사람을 배려하고 사랑할 수 있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에게서 절대로 이탈되지 않으므로 신앙의 ABC인 하나님 마주 보기를 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끊임없이 사람과 부딪히며 살아야 하는 현장에서 긁힘도 없고, 억울함도 없고, 앙심도 품지 않는 자유로움에서 오직 하나님의 심정으로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