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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특별함과 우월감의 대결>의 줄거리 :
입다와 에브라임 지파와의 갈등이 내전 상황으로 치닫습니다. 열등감도 우월감도 아닌 입다의 특별함과 에브라임을 찌들게 했던 우월감의 대결입니다.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꼭 집어 선택하셨는데도 특별하지 않다면 정말 말이 안 되잖아요? 선택받은 자가 자기의 특별함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전혀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특별함이 삶에서 나타날 때면 어떤 양상을 띨까요? 이렇게 특별함은 당연히 열등함이 아닐뿐더러 그렇다고 우월함도 역시 아닙니다. 특별함의 본질과 그 특별함이 삶에서 나타나는 양상을 알아봅니다.
특별함과 우월감의 대결
(사사기 12:1~15)
1.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쪽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 하니
2. 입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와 내 백성이 암몬 자손과 크게 싸울 때에 내가 너희를 부르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한 고로
3. 나는 너희가 도와주지 아니하는 것을 보고 내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건너가서 암몬 자손을 쳤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겨 주셨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오늘 내게 올라와서 나와 더불어 싸우고자 하느냐 하니라
4. 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웠으며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쳐서 무찔렀으니 이는 에브라임의 말이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라
5. 길르앗 사람이 에브라임 사람보다 앞서 요단강 나루턱을 장악하고 에브라임 사람의 도망하는 자가 말하기를 청하건대 나를 건너가게 하라 하면 길르앗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네가 에브라임 사람이냐 하여 그가 만일 아니라 하면
6. 그에게 이르기를 쉽볼렛이라 발음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그렇게 바로 말하지 못하고 십볼렛이라 발음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강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 명이었더라
7절 이후에는 입다가 죽은 후 사사 입산과 사사 엘론과 사사 압돈의 이야기가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 중심으로 <특별함과 우월감의 대결>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또 다시 에브라임 지파의 고질병이 도졌습니다.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은 입다를 찾아와 암몬 족속과의 승리를 자기들의 업적으로 돌리려고 합니다. 앞서 기드온이 미디안 대군을 무찔렀을 때도 에브라임 사람들은 똑같이 따졌습니다. 사정이 좀 다른 것은 기드온이 이스라엘 지파들에 알려서 에브라임이 참여하게 된 상황은 이미 횃불 담은 항아리 전략을 통하여 미디안 군대가 혼비백산하여 도망가는 중이었습니다. 이때 에브라임은 도망가는 자들을 줍다시피 하여 두 왕을 죽였습니다. 한편, 입다의 경우는 암몬과의 전쟁 전에 에브라임 지파에게 통보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암몬을 치기 위해 참전할 것을 요청한 것입니다. 그러나 에브라임 사람들은 참전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암몬과의 전쟁이 승리로 끝나자 에브라임 사람들은 입다를 찾아옵니다. 그리고 사전에 통보를 안 해서 참전을 못했으니 입다와 그의 집안을 불사르겠다고 협박합니다. 세상에 이런 양아치가 달리 없습니다.
이러한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의 비겁한 성향은 땅을 분배할 때부터 나타났습니다. 에브라임은 인구수에 비해 상대적으로 넓은 땅을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에게 와서 땅을 더 달라고 요구하자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지파의 지경인 숲에 사는 가나안 사람들을 물리치고 점령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에브라임 지파는 그 말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조금만 힘이 들거나 위험한 일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국가적인 업적이나 성과가 생기면 그것을 자기들의 것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결국 입다가 이끄는 요단강 동편의 길르앗 지역에 속한 사람들과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과의 전쟁이 일어납니다. 이때 에브라임 사람들은 패했고 무려 사만 이천 명이 죽임을 당합니다. 엄청난 규모의 내전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입다와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이들 사이에서 내전이 일어났을까요? 이 싸움은 입다의 특별함과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의 우월감이 충돌한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입다에 대한 내용을 읽으면서 기드온 때는 느끼지 못했던 특별함이 있었습니다. 제가 딸이 있다면 사위로 삼고 싶은 진짜 남자다운 남자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인간적 본성이 남자답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호연지기가 충만한 대장부였습니다. 너그럽기도 하고, 분노해야 할 때는 분노하고,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하기 이를 데 없는 정말 멋진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입다의 특별함이란 우월감이나 열등감이 아닙니다. 앞서 사사 돌라에 대한 이야기에서 돌라는 벌레라는 뜻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돌라는 자신에 대해 벌레라는 자아의식을 가졌지만 그에게는 특별함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특별함과 우월함을 연결해서 생각합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벌레로 여기는 자아의식을 특별함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특별함은 우월함이 아닙니다. 누구나 마음속에서는 자기 자신을 높이기 마련입니다. 자기 자신을 진심으로 벌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돌라의 자아의식은 특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창조주요 주권자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나를 콕 집어 선택하셔서 개별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선택받은 자에게 특별함이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나를 콕 집어 선택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내게서 특별함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나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창조주요 주권자 되시는 거룩하심과 위대하심을 전혀 실감하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신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못살고, 능력이 없고, 외모가 못났고, 처지가 별 볼 일 없다고 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나를 선택하심이 지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서도 입다와 같은 특별함은 나타나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을 통해 입다의 특별함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선민이라면 누구에게나 있어야 하는 특별함이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의 우월감을 배경으로 하여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입다와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이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만을 상대자로 마주 보게 하시려고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일대일로 상대하고 싶으셔서 선택하셨고, 그 대신 내 몸으로 사는 삶은 하나님의 빈틈없는 절대 주권 아래에 들어있게 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만 마주보기를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특별함의 기본 세팅입니다. 선택받은 사람들이 특별하다고 말할 때의 특별함의 기본 세팅이란 이 세상 것에 대해 관심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마주 보도록 선택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택을 위한 선택입니다. 내가 상대할 대상으로 하나님만을 선택하도록 하나님께 선택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기본 세팅에서 입다를 봅니다. 입다의 세상 조건은 무시와 경멸을 당하는 열악한 상태에서 추방까지 당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마주 보는 입다의 특별함은 어떤 식으로 나타난 것일까요? 입다의 마음에는 열등감과 상실감이 없었고 피해 의식이 없었습니다. 만약 입다가 상실감이나 피해 의식을 느꼈다면 앙갚음이나 복수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입다는 전혀 그러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길르앗 장로들이 찾아와 장관이 되어주기를 부탁하는 자리에서, 자신이 장관이 될 때 당신들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겠느냐며 상대방을 염려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처럼 입다는 상실감과 피해 의식이 없었고 뒤끝도 없었습니다. 또한 입다는 하나님을 마주보기를 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국가적인 업적과 성과가 발생했음에도 생색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있어야 하는 특별함입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상실감이나 피해 의식이나 열등감이 존재한다면 지금 하나님을 마주 보는 특별함 속에 들어가 있지 않은 것입니다. 선택받은 특별함의 특징은 열등감도 없고 우월감도 없는 것입니다. 지금 내게 주어진 세상 조건이 아무리 열악해도 열등감이 없고, 아무리 양호하더라도 우월감이 생기지 않습니다. 내 마음이 실시간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은 하나님 뿐이기에 가족, 건강, 재정 상태, 문제, 과제도 내 일이 아니게 됩니다. 이것이 선택 받은 자의 특별함입니다. 이보다 더 특별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가족이 일이고, 건강이 일이고, 재정 상태가 일이고, 문제와 과제가 일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것들을 일로 삼아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마주 보는 사람은 내 가족임에도, 내 건강임에도, 내 재정 상태임에도, 내 문제와 과제임에도 내 일이 아닌 것으로 여깁니다. 여러분은 실제로 이 특별함을 누리고 있습니까?
입다는 바로 이러한 특별함을 뿜어내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의 유일한 일은 하나님을 마주 보는 것입니다. 그일 외에 무엇도 내 일이 아닙니다. 가족도, 건강도, 돈 문제도 내 일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사는 특별함이 있습니다. 소극적으로 표현하자면 예수님 안에서 선택받음은 돈을 잃어도 되는 특별함입니다. 건강을 잃어도 되는 특별함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을 잃고 건강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잃어도 괜찮습니다. 성공과 형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공과 형통이 없으면 불행해하지만, 우리는 성공과 형통이 없어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는 특별함이 있습니다. 하나님만 계시면 되는 특별함입니다.
내게 하나님을 마주 볼 수 있게 하는 길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다 없어도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하는 특별함의 내용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특별함이 없기에 돈이 있어야 하고, 건강이 있어야 하고, 성공하고 형통해야 행복해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세상 사람들의 삶의 조건과는 무관한 삶을 사는 특별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마주 보는 특별함에서는 이러한 특징이 뿜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잃으면 다 잃는 것입니다.
반대로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은 아예 없는 존재로 치고 살아갑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조차도 실제 살아계신 하나님을 실시간으로 마주보기를 제쳐놓고 종교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이름만 부릅니다. 이들은 괜찮을지라도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실시간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마주 보고 있지 않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특별함입니다. 이러한 특별함을 좀 드러내면서 살자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구분이 되지 않는 특별함이 없는 상태로 살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지금 말씀드린 모든 것들은 나를 특별한 존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 특별함의 뿌리는 하나님을 마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은퇴 없이 24시간 365일 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마주 보는 자에게는 눈앞의 과제조차도 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마주 봄으로써 내 마음이 충분히 만족하고 기쁘면, 그 기쁨의 힘으로 하나님께서 과제를 해나가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특별함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선택받은 자들 중에서 우월감이라는 돌연변이를 가진 자들이 나타납니다. 그 대표가 바로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실시간으로 마주 보는 특별함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특별히 세상 것을 많이 주시기를 바라는 기대 위에서 월등함과 우월감을 갖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다. 그러면 선택받지 않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세상 것을 많이 가지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 것을 기준으로 선택받지 않은 사람들보다 우월감을 갖습니다. 이것이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에게 있던 돌연변이 변태적 우월감입니다.
이 월등함과 우월감의 뿌리는 이미 요셉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야곱은 열두 아들 중에서도 요셉을 특별히 사랑했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로서 야곱의 가족 칠십 명을 애굽에 데려와서 이백오십만 명이 되도록 여건을 만든 주인공입니다. 그렇게 번성한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한 뒤에 가나안을 정복할 때도 에브라임 출신의 여호수아가 앞장을 섰습니다. 요셉에게는 므낫세와 에브라임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에브라임이 유독 우월감을 갖게 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을 하는데 손을 엇갈리게 합니다. 오른손을 둘째인 에브라임에게 얹고, 왼손을 첫째인 므낫세에게 얹었습니다. 이것은 장자와 차자의 위치가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 또한 에브라임 지파의 우월감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에브라임 지파가 우월감을 가지면서 나타난 특징은 탐욕입니다. 에브라임은 기드온 때 국가적인 공로를 자기 것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이러한 성향은 입다 때에도 나타납니다. 이러한 우월감의 특징은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공로를 자기들의 것으로 끌어당기는 탐욕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선택하심에 특별함을 유지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선택하셨기에 세상에서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조건을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잘못된 돌연변이 변태적 우월감은 항상 탐욕으로 나타납니다. 모든 공로가 자기들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여긴 것입니다.
또한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은 지독할 정도로 비겁한 모습을 보입니다. 조금이라도 자기의 힘이 들어가거나 위험한 일을 맞이해서 처리해야 되는 경우에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습니다. 다 된 밥만 찾습니다. 일찍이 땅을 분배할 때 유다 지파의 경우는 85세 된 갈렙이 앞장서서 헤브론 산지를 정복하였습니다. 그러나 에브라임 지파는 더 많은 땅을 요구하면서도 자기 경내의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기드온 때 전쟁에 참여한 것도 이미 혼비백산하여 도망가는 미디안 군인들을 줍는 일에 참여한 것이었습니다. 입다가 암몬 족속과의 싸움에 참여할 것을 요청하자 참여하지도 않았으면서, 이긴 후에는 왜 부르지 않았냐고 거짓말을 하면서 입다와 입다의 가문을 불사르겠다고 협박합니다.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은 비겁하고 무도한 양아치들이었습니다. 탐욕스러움과 비겁함에서 나온 이들의 갑질은 도를 넘었습니다. 자기들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서 뒤늦게 입다를 불태워 죽이겠다고 한 것은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월등함과 우월감에 찌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다 나라가 망한 것도 결국 우월감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유다 지파가 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에브라임 지파의 우월감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메시아가 오면 이 땅의 모든 타민족을 짓누르고 위에 서서 우월감을 만끽할 수 있는 상태가 될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은 로마에 의해 멸절당하고 맙니다. 본문에서 에브라임 지파 사람 사만 이천 명이 죽임을 당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한편, 멋진 사나이 입다가 죽은 뒤에 세 명의 사사에 대한 이야기가 짤막하게 이어집니다. 돌라와 야일의 이야기가 짧게 기록된 것과 같습니다. 입다를 잇는 사사는 입산입니다. 9절을 보면 “그가 아들 삼십 명과 딸 삼십 명을 두었더니 그가 딸들을 밖으로 시집 보냈고 아들들을 위하여는 밖에서 여자 삼십 명을 데려왔더라…”라고 했습니다. 입산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특별한 방식으로 삼십 명의 아들과 삼십 명의 딸을 결혼시킵니다. 삼십 명의 아들은 전부 다른 지파에서 아내를 얻게 합니다. 그리고 삼십 명의 딸은 전부 다른 지파에서 남편을 얻게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결혼은 자기 지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기에, 입산의 자녀들의 결혼은 무척 특별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레위 지파를 제외하면 열한 지파입니다. 레위 지파의 여자를 며느리로 삼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남자는 성전 일을 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열두 지파를 염두에 두고 삼십 명의 아들과 삼십 명의 딸을 생각해 봅니다. 평균적으로 한 지파에 다섯 명씩 며느리로 삼든지 사위로 삼든지 하게 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선민이 세상을 살 때 에브라임 지파와 같은 우월감을 절대로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들어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인구가 얼마나 되었을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이때는 가나안 정복 이후 300년이 흐른 시점입니다. 내전으로 인해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사만 이천 명이 죽을 정도였으니 인구도 상당히 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입산의 아들과 딸이 한 지파에 다섯 명씩 결혼으로 연관이 됩니다. 한 지파당 다섯 집안씩 입산의 가문과 연결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전체가 입산의 아들딸을 인연으로 하여 서로 연관을 맺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선민 전체가 빈틈없는 그물망처럼 연결된 상태입니다. 이렇게 연결된 그물망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한 사람도 더 우월하거나 더 열등한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라도 빠지면 전체 그물망에 구멍이 생깁니다. 이는 곧 하나님이 보실 때 누구도 우월감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입산의 아들딸 육십 명이 다른 지파의 사람들과 결혼함으로써 이스라엘 내에는 인연으로 인한 관계가 생겼습니다. 무관한 사람 없이 하나의 연결망에 포함된 것입니다. 매듭 하나만 빠지거나 찢어져도 연결망에 구멍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매듭과 코를 이루는 연결고리로써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소중하지 않은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민 각자와 개별적으로 마주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안에는 위층이 있고 아래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로 다 연결돼 있는 그물망 같은 구조로서 하나님의 선택은 다른 사람 위에 한 사람을 세우는 식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입산이 아들딸 육십 명을 다른 지파와 결혼시켰음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입산 뒤에는 사사 엘론이 나옵니다. 엘론이라는 이름은 상수리나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엘론의 행적은 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죽어서 아얄론에 장사되었다는 것뿐입니다. 여기서 아얄론도 상수리나무라는 뜻으로써 엘론과 의미가 같습니다. 히브리어의 특징은 자음만으로 글자를 씁니다. 그리고 의미에 따라 점으로 된 모음을 추가합니다. 그렇다면 상수리나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앞서 선민은 하나로 연결된 자들로서 우월하고 열등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엘론이라는 이름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매듭이자 고리인 선민 각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상수리나무처럼 땅에 박혀서 자기 자리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모세와 같은 자리가 될 수도 있고, 납달리 지파의 이름 없는 가문의 가정주부의 자리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자리든 상수리나무와 같이 그 자리에 박힌 자로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는 곧 세상에서 맡은 역할이 선민의 특별함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민의 특별함은 내가 개별적으로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마주 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이것에 특별함이 있는 것이지 세상에서 내가 어떤 일을 하느냐 어떤 사역과 사명을 띠고 임무를 수행하느냐는 것은 우월함과 열등함의 근거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상수리나무가 땅에 박혀 있듯이 그렇게 나의 위치를 지키면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의 위치를 지킬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마주 보면 됩니다. 하나님을 마주 보고 있으면 자리를 옮겨야 할 때 하나님이 옮기십니다. 그런데 에브라임 지파 같은 경우에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성과를 보고 업적을 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게 마땅히 주어졌어야 되는 것이라고 고집을 하고 양아치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또 마땅히 해야 할 일임에도 조금 힘들거나 위험하다고 여겨지면 뿌리칩니다. 이처럼 에브라임 사람들은 자기 위치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마주 보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실시간으로 마주 보고 있으면, 내게 주어지는 일에 위험이 섞여 있든, 힘든 일이든 그것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마주 보고 있으면 그렇게 힘들고 위험한 일을 해서 성과가 나타났더라도 그것을 내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사사 압돈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압돈이라는 이름은 봉사자라는 뜻입니다. 14절을 보면 “그에게 아들 사십 명과 손자 삼십 명이 있어 어린 나귀 칠십 마리를 탔더라…”라고 했습니다. 특이하게도 서로 세대가 다른 아들들과 손자들이 언급됩니다. 이들이 모두 어린 나귀를 탔다고 했습니다. 이는 곧 할아버지 압돈의 세대와 아들 세대와 손자 세대의 관계가 화목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이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어린 나귀는 전쟁이나 다툼이나 충돌과 갈등이 없는 평화적 샬롬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평화적 샬롬의 상태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봉사자를 뜻하는 압돈의 이름에서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선민 전체는 하나로 연결된 유기적인 관계로서 우열이 없는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과 개별적으로 관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상수리나무의 태도를 보입니다. 하나님을 마주 보고 있으면서 내게 허락된 삶의 자리를 지킵니다. 멋대로 자리를 옮기거나 불평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땅에 서 있는 것처럼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마주 보며 내 자리를 지키면서 하는 일은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입니다. 그 일이란 내가 아닌 내 주변의 사람들을 위한 봉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압돈의 이름에 담겨있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삶에서 특별함이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9절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마주 보면서 내 자리를 지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게 시키시는 일과 내게 주신 위치를 지켜서 행동을 합니다. 그 모든 행동은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봉사가 됩니다. 바로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에게서 나타나는 특별함의 양상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선택하셨으니 어떻게 특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 특별함이 나타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오늘도 두 주먹 불끈 쥐고 24시간 깨어 있는 상태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놓치지 않음으로써,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를 마주 보기가 중단 없이 이루어지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내 말 한마디, 내 행동 하나에 특별함이 배어 나오되 우월감이나 열등감으로부터 온전히 해방된 삶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