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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3

녹취문: 나실인 규정은 내 자유의 스케치_태승철 (삿 13:1~25)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6.06.15|조회수92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 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나실인 규정은 내 자유의 스케치>의 줄거리 :

나실인이 지켜야 할 세 가지 규정은 제약이나 멍에를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규정들이 담고 있는 영적인 의미를 살펴보면 내가 누릴 자유를 스케치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규정들은 예수님 믿음으로써 내가 구원을 받았을 때, 이 세상 삶에서 실제로 내게서 나타나고 표현되어야 할 자유가 어떤 것인지를 그림을 그려 보여주듯이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나실인 규정의 의미에 반하는 방향으로 내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면, 자유를 이탈하여 스스로를 얽어매는 것입니다. 이렇다면 나의 믿음과 구원받음의 상태를 반복적으로 점검해야만 합니다.

 

나실인 규정은 내 자유의 스케치

 

(사사기 13:1~25)

 

1.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시니라

2.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 중에 마노아라 이름하는 자가 있더라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더니

3.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였으나 이제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4. 그러므로 너는 삼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지니라

5.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하시니

6. 이에 그 여인이 가서 그의 남편에게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 내게 오셨는데 그의 모습이 하나님의 사자의 용모 같아서 심히 두려우므로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내가 묻지 못하였고 그도 자기 이름을 내게 이르지 아니하였으며

7. 그가 내게 이르기를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부터 그가 죽는 날까지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하더이다 하니라

 

 

7절 이후에는 남편인 마노아가 간구하여 하나님의 사자를 대면하여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자는 마노아가 번제를 드릴 때 불꽃에 휩싸여서 승천했다는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나실인에게는 세 가지 규정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자가 마땅히 누려야 할 자유를 스케치한 것입니다. 이 자유의 핵심적 특징을 스케치한 것이 나실인의 세 가지 규정입니다. 다만 본문에서는 민수기 6장에 나오는 나실인의 세 가지 규정을 다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첫 번째 규정은 포도나무의 결실과 독주를 먹지 말라는 것이고, 두 번째 규정은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규정인 시체에 접촉하지 말라는 것은 언급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두 가지 규정을 중심으로 <나실인 규정은 내 자유의 스케치>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여러분의 친구나 친척이 ‘예수님 믿는 것이 한 마디로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예수님 믿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근본적인 신앙개념을 반복해서 의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기본적 신앙개념이 우리의 생각을 올바른 방향으로 잡아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동일시를 통해 얻게 되는 구원받음은 내 마음이 하나님을 마주 보는 상태입니다. 반대로 내 마음이 하나님을 마주 볼 수 없다면 구원받음이 중단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마주하든 마주하지 않든 구원받음을 별개의 것으로 여깁니다. 마음이 사업에 몰두하고 자녀에 빠져있으면서도 구원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구원받았다면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일곱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 싸워서 이기라는 말씀이 반복되는 이유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마주 보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구원받음을 유지하는 것이라면 그 결과 이 땅에 나타나는 표시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이 땅에서 산다는 것은 죄와 저주에 짓눌려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죄와 저주의 짓눌림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이 실제로 일어납니다. 우리는 자꾸 교리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피를 흘리셨으므로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만 이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어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실질적인 죄로부터의 자유가 필요한 이유는 결국 하나님을 마주 보는 상태가 되기 위함입니다. 죄로부터 해방되었는데도 하나님을 마주 볼 수 없다면 교리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돈을 마주하고, 인생의 미래를 마주하고, 자녀의 문제를 마주하느라 하나님을 마주 볼 수 없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얻은 자유와 해방이 아닙니다.

본문에 기록된 나실인의 규정은 나실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포도주를 마시기도 하셨고,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리실 때 시체와 접촉하기도 하셨으며, 머리를 깎으셨다는 이야기는 없지만 머리를 계속 기르셨다는 이야기도 없는 것을 보면 머리를 자르셨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따로 나실인 규정을 지키시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얻게 되는 구원의 증표는 이 땅에 살면서 누리게 되는 자유로 나타납니다. 이와 관련하여 나실인의 규정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구원받은 자가 누리는 자유를 스케치하듯 보여줍니다.

자유라는 말은 막연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대체 무슨 자유를 얻고 누린다는 것일까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다고 하는데 결국 자유를 얻는 것이 구원받음이 아니냐? 그렇다면 구원받아서 누리는 자유는 어떤 것이냐? 당신이 삶을 살 때 이전과 비교하면 어떠냐? 구원받기 이전에는 무엇이 자유롭지 못했고, 구원받은 이후에는 무엇이 자유로워졌느냐?’라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그 대답이 나실인 규정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실인 규정에 담긴 영적 의미를 앎으로써 내가 누릴 자유를 스케치해 볼 수 있습니다. 자유의 핵심적 의미를 뚜렷하게 부각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삼손은 블레셋에 대항하는 사사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특이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5절을 보면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구원하리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기 시작하리라고 하신 것이 특이합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침략과 압제에 의해 사십 년간을 고통받았습니다. 이 시기가 언제부터 언제까지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이미 삼손이 태어나기 전부터 블레셋의 괴롭힘은 있었기에 삼손이 블레셋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는 단계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이 블레셋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것은 다윗 왕 때입니다. 사무엘 시대에 블레셋의 압제가 소강상태에 이르게 되는 커다란 사건이 있지만 결정적으로 블레셋을 완전히 정복하는 것은 다윗 왕 때에 이르러서였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블레셋의 압제가 이루어진 사십 년간은 명확하게 규정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블레셋에 대항하는 사사로 세워진 나실인 삼손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사사기에서 삼손에 대한 이야기는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삼손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자유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삼손은 우리와 같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구원 속에 있는 자유를 누림에 있어서 계속 삐걱거림을 보입니다. 삼손은 나실인임에도 잔치에 참여하여 술을 마시기도 하고, 머리카락의 비밀을 한 여인에게 누설하여 잘리기도 합니다. 최후에는 눈이 뽑히고 온몸에 쇠사슬이 묶인 채로 조롱거리가 되었다가 다곤 신전의 기둥을 뽑아서 블레셋 사람들을 몰살시키며 함께 죽습니다. 삼손의 마지막이 묶여있었다는 것은 자유의 반대되는 상황입니다. 구원받음의 자유를 부각하기 위하여 삼손을 통해 자유의 정반대되는 모습을 계속해서 스케치하듯 보여줍니다. 이와 관련하여 삼손이 나실인 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모습이 내가 구원받은 자로서 누려야 할 자유를 스케치한 내용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나실인의 어원은 히브리어 나지르(נָזִיר)입니다. 나지르는 거룩하게 구별되어 바쳐진 진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러한 나실인의 세 가지 규정은 하나님이 핀셋으로 콕 집어 선택하신 사람에게서 드러나는 삶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첫 번째는 포도나무의 결실과 독주를 마셔서는 안 되고, 두 번째는 평생 머리에 삭도를 대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세 번째는 시체와 접촉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 번째 규정은 삼손과 관련해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본문에 근거하여 첫 번째와 두 번째 규정의 의미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규정에 담긴 영적인 의미입니다. 영적인 의미를 살펴볼 때 내가 누려야 할 자유가 스케치 됩니다.

 

나실인의 첫 번째 규정은 포도나무의 결실과 독주를 금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좋고 나쁨의 느낌과 관련이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통해 좋음과 나쁨을 느낍니다. 자녀에게 좋다고 여겨지는 일이 벌어지면 부모의 마음도 좋음을 느끼고, 자녀에게 나쁘다고 여겨지는 일이 벌어지면 부모의 마음도 나쁨을 느낍니다. 다른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식을 하는 사람들은 주가가 올라가면 마음의 좋음을 느끼고, 주가가 내려가면 마음의 나쁨을 느낍니다. 비유적으로 이것은 다 독주에 취한 상태입니다. 독주를 마시지 말라고 하신 규정의 영적인 의미를 들여다보면 우리가 몸으로 세상을 살면서 느끼는 좋음이나 나쁨은 다 취한 상태에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술을 마시면 위로 들어간 알코올이 흡수되어 혈관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이렇게 온몸이 술기운에 장악되어 휘청거리게 되는 것을 취한다고 합니다. 이로부터 취하지 말라고 하신 나실인의 첫 번째 규정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세상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육체의 오감으로 만나는 대상들에 대해 좋고 나쁨을 느끼는 상태가 바로 취한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청년이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좋음을 느끼고, 그 여인과 결혼하기를 소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것에 마음이 취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무척 싫어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다 취한 상태에서 살아갑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조차 마찬가지입니다. 뉴스에서 어떤 소식을 들으며 좋고 나쁨을 느끼고, 삶에서 일이 잘되기를 바라고, 사업이 잘 되는 상황을 좋아하며 바라는 것은 다 세상에 취해서 나타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오감을 통해 만나는 것들에 좋음이나 싫음을 느끼는 것은 마치 술을 마시면 알코올 성분이 혈관을 타고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일단 세상에서 오감을 통해 좋음이나 싫음을 느끼게 되면 내 생각, 감정, 의지가 그러한 느낌에 의해 좌우됩니다. 술에 취한 사람이 알코올 때문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리고 비틀거리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서울대에 합격을 하자 기분이 너무 좋습니다. 이 좋음이 나의 생각, 감정, 의지를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갑자기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한턱을 내고 싶어집니다. 아들 합격의 좋음이 내 생각, 감정, 의지 안으로 들어와서 친구들에게 비싼 음식을 먹여가면서까지 아이 자랑을 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서울대 합격이라는 술에 취한 상태입니다. 다른 예로 사업이 잘 되어서 흑자를 보니 기분이 좋습니다. 기분이 좋은 이유는 사업의 흑자가 술이 되어서 내 생각, 감정, 의지라는 혈관 안으로 들어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일이 사업의 흑자라는 술에 취해서 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좋음과 싫음을 느끼는 처소입니다. 마음에서 만족감과 기쁨을 얻고자 하는 것 자체는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마음이 세상 안에 갇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육체의 오감을 통하여 만나는 대상들로부터 좋음과 싫음을 느끼고 이로부터 만족과 기쁨을 얻고자 합니다. 나실인의 첫 번째 규정인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라고 하신 것은 바로 이러한 모습을 금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절대로 내 마음이 좋음이나 싫음을 느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자면 ‘세상에 살면서 어떻게 좋음과 싫음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가?’라고 질문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실제로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사랑에 빠진 남녀가 있습니다. 서로에게 완전히 사로잡혀서 그야말로 취한 상태입니다. 이렇게 한 사람에게 빠지자 다른 이성에게 좋음이나 싫음을 느끼지 않습니다. 아예 상관조차 하지 않습니다. 남자 친구가 너무 좋습니다. 마음이 완전히 남자 친구에게 사로잡혔습니다. 남자 친구의 좋음이 내 마음에 충격이 될 정도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어떤 남자를 만나도 이성으로서의 좋고 싫음의 느낌이 없습니다. 이것은 열애 중일 때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바둑이 너무 좋습니다. 마음에서 바둑의 좋음이 충격적으로 다가오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 사람에게 다른 여가나 취미 활동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고 여겨서 좋음과 싫음의 느낌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어떤 대상이 충격적으로 좋으면 그 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좋음과 싫음의 느낌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이로부터 육체의 오감으로 만나는 대상에 대해 좋음과 싫음을 느끼지 않는 방법도 알 수 있습니다. 그 대상이 자녀든 성공이든 돈이든 좋고 싫음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나실인의 첫 번째 규정의 취지입니다. 이것을 불가능하다 생각하고 그러한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여긴다면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고 하는데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면 나실인의 첫 번째 규정을 적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싫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음의 충격이 아니더라도 삶에는 커다란 변수나 문제가 발생해서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몇 년 전에 병원에서 CT 촬영을 했을 때 의사가 70~80%는 폐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 말을 아내에게 전하자 아내는 무척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일이 너무 크게 느껴지자 다른 일에는 좋음과 싫음을 느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좋음의 충격이든 싫음의 충격이든 사람은 일단 무엇인가에 충격을 받으면 다른 일에 대해서는 좋음과 싫음의 느낌이 죽어버립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좋음에 충격을 받으면 세상에 대한 좋음이나 싫음의 느낌이 죽어버립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진정한 자유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구원받음이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죽음은 곧 세상에 대한 자유입니다. 세상에서 좋음과 싫음을 느끼는 것은 죄와 저주 아래 있는 것입니다. 돈을 벌었다고 좋아해도 자유가 없는 얽매임이고, 돈을 못 벌었다고 싫어해도 자유가 없는 얽매임입니다. 돈이 벌리거나 안 벌리거나 예수님을 믿어서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간 사람은 하나님의 좋음이 날마다 충격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에서 돈이 잘 벌려도 좋음이 아니고 안 벌려도 싫음이 아닙니다. 이렇듯 돈에 대한 좋고 싫음의 느낌이 작동할 여지가 없는 것이야말로 예수 믿어 구원받은 자의 자유입니다.

우리는 세상 것에 취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 것의 좋음과 세상 것의 싫음이 충격이 되면 마치 알코올이 혈관으로 흐르듯이 내 생각, 감정, 의지 안으로 흘러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생각, 감정, 의지의 움직임을 결정합니다. 나실인의 첫 번째 규정은 이러한 취함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남편이 싫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싫음에 의해서 취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좋음의 느낌이 작동하면 안 됩니다. 좋음의 느낌이 작동하기에 싫음의 느낌도 작동합니다. 좋지 않음이 곧 싫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취하지 않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떨어지면 안 됩니다. 십자가에서 떨어지면 자유는 없어집니다. 십자가에서 떨어지는 즉시 마음에서는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손으로 만지는 대로, 입이 먹는 대로 좋음과 싫음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세상에 얽매이고 맙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자는 세상을 살면서 어떤 좋음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좋음에 충격을 받아 세상 것에 대해서 좋음과 싫음이 표현되지 않는 자유의 상태에서는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에서 나오는 감사로 표현됩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좋음도 없고 싫음도 없습니다. 다만 이전에 좋았던 일도 이전에 싫었던 일도 다 하나님의 좋음의 충격 안에서 감사로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 좋았던 일에 대해서 지금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좋음의 충격 아래서 감사하게 되고, 이전에 싫었던 일에 대해서도 하나님 좋음의 충격 아래서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구원받음에서 오는 진정한 자유입니다.

 

나실인의 두 번째 규정은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임의적 해석을 자제하기 위해 머리에 관련된 예수님의 말씀을 참고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36절에서 맹세에 대해서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머리카락이지만 나는 주권이나 권력이나 소유권을 갖고 있지 않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마태복음 10장 30~31절에서는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권자로서 내 머리털까지도 다 관심하고 계시고 생각을 갖고 계시고 계획과 뜻을 갖고 계시기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머리에 대한 언급들을 염두에 두고, 나실인의 두 번째 규정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평생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고 하신 규정은 쉽게 말해 하나님이 나의 머리라는 뜻입니다. 생각하고 뜻하고 계획하는 것이 주체성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이 머리라는 것은 나의 유일한 주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는 삶에 대해 생각도 뜻도 계획도 가질 자격이 없는 자라는 것이 나실인의 두 번째 규정에 담긴 영적 의미입니다.

몸이 살아있는 한 머리카락은 자랍니다. 머리카락이 자라지 않는다면 죽은 시체입니다. 삭도가 언급된 이유는 머리카락이 자라기 때문입니다. 평생 자라다 보면 머리카락이 땅바닥에 끌릴 것입니다. 여기서 자람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몸이 살아 있으면 내 몸의 생명력이 계속 머리카락으로 들어갑니다. 삭도를 대지 말라고 하신 것은 머리카락이 생명력을 받아들이며 자라나는 상황을 내 삶의 주변에 적용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 내 몸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존재들은 사람이든 상황이든 문제든 어떤 것이든지 간에 그것들은 다 머리카락으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몸이 살아있는 동안에 생명력이 들어가면서 머리카락이 계속 자라는 것처럼, 나와 내 주변의 모든 대상 안으로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주체적인 생각과 관심이 주권적으로 흘러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의 배우자는 머리카락으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내 머리카락에 생명력이 들어가서 자라고 있는 것처럼, 지금 배우자에게는 지속해서 하나님의 주체적인 생각과 관심이 주권적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체적인 생각과 관심이 주권적으로 들어간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내가 생각하고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주체성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각한다고 다 생각대로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는 세상에 대해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인 된 권리가 없기에 생각에 머물 뿐입니다. 생각함이란 주체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주체성이 있어서 생각하고 뜻하고 계획한다 하더라도 나는 이 세상 현실에 대해서 주인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내 생각대로, 내 계획대로, 내 뜻대로 이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따라서 나의 주체성이란 이 세상에 대해서는 가짜 주체성이고 필요 없는 주체성입니다. 주권이 있어야 주체성이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뜻하고 계획하는 주체성을 발휘합니다. 이것이 죄악의 상태입니다.

내가 배우자를 보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생각과 관심은 배우자에게 임하고 있습니다. 배우자의 몸과 삶과 죽음까지도 다 책임지시는 주권자인 하나님의 주체적인 생각과 관심이 지금 계속 흘러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배우자에게만 국한되는 일이 아닙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대상은 머리카락으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주체적인 관심과 생각은 계속해서 내 주변의 모든 대상들에게로 흘러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로부터 머리카락을 자르지 말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변에 있는 모든 대상과의 관계에서 살아갈 때, 머리카락 한 가닥에 불과한 그 어떤 존재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주권적 흐름을 끊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모로서 자녀를 볼 때 이대로 두었다가는 큰일이 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녀의 상태는 하나님의 주체적인 관심과 생각이 주권적으로 임하는 중에 일어난 것입니다. 주인이신 하나님의 권리는 주권적으로 계속 흘러 들어가는 중입니다. 나실인의 두 번째 규정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주체적인 관심과 생각을 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요즘 이재명 대통령이 열흘 가까운 기간 동안 유럽 순방을 하고 있습니다. 어제 뉴스를 보니 이탈리아에 국빈으로 방문했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이탈리아의 찬란한 문화를 보여주는 건물들의 모습을 비춰주는 가운데, 중세를 연상하게 하는 기마병들에 의한 의전 행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으로서는 무척 낯선 광경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걷는 것, 서는 것, 방향을 정하는 것, 인사를 하고 받는 것 등 어느 것 하나도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안내하는 대통령이나 총리가 지시하는 대로만 움직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한 모습을 보자니 국빈으로 의전을 받는 것이 아니라 마치 수갑을 채워서 구속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국빈 대우라고 해서 마음대로 하게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시장 상인들과 소탈하게 어울리던 모습을 보이던 대통령이 외국에서 국빈 대우를 받으면서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걷는 것, 서는 것, 인사하는 것, 인사받는 것, 동서남북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정하는 것 어느 것 하나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머리카락을 자르지 말라는 나실인의 두 번째 규정에 담긴 참 의미입니다.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주체적인 생각과 관심은 주권적 권리를 따라서 나와 내 몸을 둘러싼 모든 사람과 상황과 사건에 다 흘러 들어가고 있습니다. 머리카락에 생명력이 들어가서 자라는 것처럼 계속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는 꼼짝할 수 없습니다. 꼼짝 못 함에서 오는 자유를 느껴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스스로는 꼼짝도 못 하는데 비실비실 웃음이 나오면서 통쾌하고 시원합니다. 이것이 구원받음의 자유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스스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상태가 참 자유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아무것도 못 하는 이유는 나와 내 주변에 하나님의 주체적 관심과 생각이 주권적으로 흐르지 않는 대상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 참 자유입니다. 이 자유를 주시려고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마주 보는 구원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마주 봄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이 땅에서 진정한 자유들을 실제로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좋음에 충격을 받은 자에게는 이 세상에서 좋음도 싫음도 없습니다. 또 내 몸으로부터 시작해서 나를 둘러싼 모든 주변의 대상들에게로 하나님의 주체적인 생각과 관심이 주권적으로 흐르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꼼짝도 못 합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 당신이 원하시는 일들을 해나가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나실인의 규정은 예수님 믿음으로 얻게 된 구원받은 자로서 누려야 할 자유를 스케치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실인의 규정을 통하여 스케치한 이 자유가 우리의 삶에 넘쳐나도록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하나님을 마주 봄이 유지될 수 있도록 은혜 내려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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