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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3

녹취문: 아무것도 ‘개의치 않음’의 언행_태승철 (삿 14:1~20)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6.06.18|조회수78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 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아무것도 ‘개의치 않음’의 언행>의 줄거리 :

삼손은 ‘개의치 않음’의 전형적인 인물입니다. ‘개의치 않음’은 삶의 골칫거리를 잘 처리하고 해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골칫거리를 전혀 괘념치 않는다는 뜻입니다. 즉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라면 충분히 신경이 쓰이고 골치 아플 일인데 그 일이 어떤 사람 안에서는 전혀 신경 쓸 거리로 여겨지지를 못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개의치 않음’의 상태에서는 내 안에서 발생한 생각이 외부의 환경적 요인에 의해서 전혀 찌그러지거나 왜곡되거나 변형됨이 없이 본색 적으로 나타납니다.

 

아무것도 개의치 않음의 언행

 

(사사기 14:1~20)

 

1.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고

2. 올라와서 자기 부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맞이하여 내 아내로 삼게 하소서 하매

3. 그의 부모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의 딸들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맞으려 하느냐 하니 삼손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 하니라

4. 그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5. 삼손이 그의 부모와 함께 딤나에 내려가 딤나의 포도원에 이른즉 젊은 사자가 그를 보고 소리 지르는지라

6.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니 그가 손에 아무것도 없이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는 것 같이 찢었으나 그는 자기가 행한 일을 부모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더라

7. 그가 내려가서 그 여자와 말하니 그 여자가 삼손의 눈에 들었더라

8. 얼마 후에 삼손이 그 여자를 맞이하려고 다시 가다가 돌이켜 그 사자의 주검을 본즉 사자의 몸에 벌 떼와 꿀이 있는지라

9. 손으로 그 꿀을 떠서 걸어가며 먹고 그의 부모에게 이르러 그들에게 그것을 드려서 먹게 하였으나 그 꿀을 사자의 몸에서 떠왔다고는 알리지 아니하였더라

 

 

우리가 읽은 1~9절 이후에 삼손이 딤나의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블레셋의 결혼 풍습으로 신랑의 들러리가 필요했기에 삼손은 딤나의 블레셋 청년 삼십 명을 초청합니다. 그리고 삼손은 이들과 하지 않아도 될 내기를 합니다. 수수께끼를 낼 테니 맞추면 베옷과 겉옷을 삼십 벌씩 주고, 맞추지 못한다면 베옷과 겉옷 삼십 벌씩을 삼손에게 줘야 했습니다. 삼십 명의 블레셋 청년들은 신부를 압박하고 협박하였고, 신부는 삼손을 달달 볶아서 수수께끼의 답을 말하게 합니다. 이들은 사자 시체에 꿀이 있었던 사건을 알아내었고, 결국 삼손은 내기에 져서 이들에게 베옷과 겉옷 삼십 벌씩을 주게 되었습니다. 이에 삼손은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강도처럼 블레셋 사람 삼십 명을 죽이고 옷을 빼앗아서 줍니다. 그렇게 하고도 화를 참지 못한 삼손은 신부에게로 가지 않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에 블레셋 신부의 아버지는 딸을 블레셋 청년에게 줘버립니다. 이러한 본문의 내용을 보자면 과연 이것이 사사 삼손에게서 일어나는 일인가 싶습니다. 본문 중심으로 <아무것도 ‘개의치 않음’의 언행>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삼손이 보인 ‘개의치 않음’을 앞서 기드온 때 언급했던 ‘어쩔 수 없음’과 ‘못할 게 없음’과 비교해 봅니다. ‘어쩔 수 없음’은 싫고 답답하고 불안하고 두려워도 꼼짝 못 하는 상태입니다. 반대로 간절히 원하고 바라고 가지고 싶은 것이 있어도 손끝 하나 꼼짝할 수 없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실제로 하나님과 마주 보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대해 ‘어쩔 수 없음’이 반드시 임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도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임을 고백합니다. 반면 ‘못할 게 없음’은 내 오감으로 느끼는 만족과 기쁨을 위해서 무엇인가 하고 싶은 욕구대로 다 하는 상태입니다. 욕구를 제어하거나 방해하거나 정지하기 위한 장치가 아예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원수로 행함입니다. 그 결과는 기드온이 멸문지화를 당한 것처럼 멸망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삼손에게서 드러나는 ‘개의치 않음’이란 무엇일까요? 어떤 생각이 떠올라서 그 생각대로 말하고 행동하려고 할 때, 대부분의 사람은 마땅히 신경 써야 할 여러 사항과 조건들이 있습니다. 마음에서 떠오른 대로 다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보통이라면 신경 써야 할 마땅한 사항이나 조건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를 ‘개의치 않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신경을 쓰지 않고, 괘념치 않고, 아무 상관이 없어 합니다.

‘못할 게 없음’과 ‘개의치 않음’의 차이를 생각해 봅니다. ‘못할 게 없음’은 욕구가 발생했을 때 방해나 제어나 정지를 위한 장치가 없음으로부터 나타납니다. 기드온이 왕과 같은 위치에 있을 때는 욕구를 방해하거나 제어할 장치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로부터 기드온에게서는 ‘못할 게 없음’의 태도가 나타났습니다. 한편 삼손에게서 드러나는 ‘개의치 않음’은 성격이 다릅니다. 어떤 욕구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말하고 행동하지 못하게 하는 제어나 중지나 방해의 장치들이 엄연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뛰어넘어서 행동하는 태도를 ‘개의치 않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손은 ‘개의치 않음’의 전형적인 인물입니다. ‘개의치 않음’은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받은 자가 누리는 자유가 실제 삶에서 활성화된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어쩔 수 없음’의 단계에서 ‘개의치 않음’의 단계로 진입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같으면 마땅히 신경 써야 할 조건, 사항, 상황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혹은 내가 말하고 행동한 것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나 평가나 결과를 생각하게 됩니다. ‘개의치 않음’은 이렇게 고려되어야 할 사항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입니다. 마땅히 신경 써야 할 조항과 사안들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생활화를 한다면 이러한 태도가 나타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의치 않음’이란 상당히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반드시 ‘개의치 않음’의 상태가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사 삼손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하시려는 내용이 바로 ‘개의치 않음’입니다. 저는 삼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참 이해하기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삼손은 나실인입니다. 보통의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율법과 규례가 주어졌습니다. 나실인은 율법과 규례 이외에도 지켜야 할 일이 있습니다. 포도주와 독주를 마실 수 없고, 머리를 깎을 수 없고, 시체와 접촉할 수도 없습니다. 나실인에게는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율법과 규례 위에 이러한 규정이 보태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삼손의 행동을 보면 이처럼 자유분방한 사람은 달리 없어 보입니다.

삼손은 거침없이 블레셋 땅으로 갑니다. 당시 블레셋은 이스라엘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괴롭히고 강탈하고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블레셋에 의한 우울감에 빠져있었습니다. 이처럼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주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삼손은 블레셋 땅을 다니다 만난 여인과 결혼을 하겠다고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러한 삼손을 곱게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선교사가 이슬람 지역으로 들어가서 이슬람 여인과 결혼을 하면서 기독교 예식대로 하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혹은 사람들의 왕래가 가능한 가운데 남한 사람이 북한으로 들어가서 개성에 있는 아가씨와 결혼을 하겠다는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볼 것이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습니다. 심지어 삼손의 부모도 이스라엘에는 여자가 없느냐며 삼손을 말립니다. 삼손은 굳이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짓누르는 블레셋 땅에 들어가서 여자를 구하고, 블레셋의 방식대로 결혼을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삼손이 블레셋이라는 존재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정말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4절을 보면 “그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그렇게 하도록 생각을 주셨고, 삼손은 그 생각이 자기 속에서 떠오르자 개의치 않고 블레셋 여인과의 결혼을 실행에 옮깁니다. 블레셋에 들어가서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그 생각을 중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어림도 없는 일인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삼손은 개의치 않고 이 일을 실행에 옮깁니다.

그리고 또 인상적인 사건은 삼손이 수수께끼 내기를 한 것입니다. 삼손은 부모를 졸라 결혼을 하러 부모와 함께 딤나로 향합니다. 이때 딤나의 포도원에 이르렀는데 젊은 사자 한 마리와 마주하게 됩니다. 젊은 사자가 삼손을 향해 포효하자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했고 삼손은 사자를 맨손으로 찢어 죽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사자의 시체에 벌떼와 꿀이 있습니다. 삼손은 이 꿀을 먹고 부모에게도 드렸습니다. 이후 딤나에 가서 혼인 잔치를 하는데 블레셋의 풍습에 따라 삼십 명의 블레셋 청년들을 들러리로 세웠습니다. 이때 삼손은 안 해도 될 수수께끼 내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입니다.

 

삼손에게서는 기드온과 같은 영웅적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블레셋 군대를 한데 모이게 하시고는 삼손에게 영을 부어주셔서 횃불이 든 항아리 전략 같은 특별한 지혜를 주심으로 그들을 전멸하도록 하신 것이 아닙니다. 삼손은 분명히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이기기는 했으나 이 승리는 블레셋의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세력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습니다. 결국 삼손의 사역은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다스린다는 기본 바탕이 유지되는 가운데 블레셋의 세력을 전혀 꺾지 못했습니다. 다만 자기와 이해관계에 있는 블레셋 사람들을 그때그때 주관적인 기분에 좌우되어 충동적으로 죽였을 뿐입니다.

본문을 보면 수수께끼 내기에 진 삼손이 베옷과 겉옷 삼십 벌을 구하기 위해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삼십 명을 죽였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블레셋 땅에서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빼앗은 옷을 다른 블레셋 사람들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삼손은 블레셋에서 결혼을 하고자 합니다. 이처럼 삼손은 블레셋이라는 족속과 나라가 이스라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삼손은 삼십 명을 죽이고 강도짓을 해서 블레셋 내에서는 적색 수배령이 내릴 판이었으나 개의치 않습니다. 그리고 혼자 화가 나서 씩씩거리다가 결혼조차 때려치우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결국 삼손의 장인이 될 뻔했던 블레셋 사람은 딸을 다른 남자에게 줘버립니다.

이처럼 삼손은 주관적으로 감정에 치우쳐서 충동적 행동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점은 어떤 사사에게서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성령이 임하셨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사자를 찢어 죽일 때도 성령이 강하게 임하셨고, 수수께끼 내기에 져서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블레셋 사람 삼십 명을 죽일 때도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셔서 한 일이 고작 사자와 싸워 이기고 강도짓을 한 것이라니 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삼손은 최후의 순간조차 특이합니다. 삼손은 다곤 신전의 기둥뿌리를 뽑아 지붕이 무너져서 삼천 명을 죽이고 자기도 죽습니다. 이렇게 삼손 평생 죽인 블레셋 사람의 숫자가 육천 명이 되지 않았습니다. 엄청난 숫자지만 블레셋의 세력을 꺾는 일에는 아무 효과가 없었습니다.

블레셋은 삼손 이후에도 건재했기에 사울 왕 시대에도 블레셋과의 대립은 계속됩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웠던 것이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싸움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사실상 삼손이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관계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사사 삼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삼손의 이야기는 비유적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블레셋을 신경 썼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블레셋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삼손을 비유로 우리에게서 나타나야 하는 ‘개의치 않음’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이 세상 조건과 여건이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삼손과 같은 ‘개의치 않음’을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속에서 발생하는 생각이나 외부의 조건을 개의치 않고, 신경 쓰지 않고,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도대로 행하는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개의치 않음’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마치 비유처럼 삼손의 이야기를 기록하신 것입니다.

삼손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하여 극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봅니다. 직장 상사가 나를 너무 괴롭히고 매사에 모욕감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자 직장 상사를 죽여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실행에 옮길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직장 상사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은 해도 책임져야 하고 신경 써야 할 일을 생각하며 실행에 옮기지는 않습니다. 살인자가 되면 감옥에 들어가서 평생을 썩어야 합니다. 또 가족들은 주변으로부터 살인자의 가족이라는 눈총을 받을 것입니다. 아이들도 책임져야 합니다. 설령 사람을 죽일만한 상황이라도 실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처럼 신경 써야 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극단적인 예를 비유적으로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삼손은 그것을 실제로 해버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너에게 직장 상사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났으면 어떤 것도 개의치 말고, 어떤 조건이나 사항도 신경 쓰지 말고 죽여라.’라는 것이 삼손에게 임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삼손에게 성령이 임하셔서 나타난 일이란 삼십 명의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옷을 강탈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상황만을 보면 성령이 임하셔서 하시는 일이 어떻게 이런 일일 수 있는지 의아합니다. 다만 우리는 여기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를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삼손을 통해 보여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바로 ‘개의치 않음’입니다.

이 삼손의 이야기는 삼손을 모방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 신경 쓸 대상이었던 블레셋을 삼손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계신 것입니다. 삼손은 블레셋 땅에서 블레셋 사람 삼십 명을 죽여서 옷을 강탈해서 다른 블레셋 사람들에게 줘버립니다. 삼손이 블레셋을 신경 쓰는 사람이었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블레셋은 지금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개의치 않음’이 무시무시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개의치 않음’의 1단계는 내 속에서 발생하는 생각, 감정, 의지를 여과 장치 없이 왜곡하거나 변경하지 않고 그대로 말과 행동으로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개의치 않음’이고, 구원받은 자가 누리는 자유의 핵심입니다. 이대로 해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본문이 삼손을 통해 가르쳐주는 것은 이렇게 ‘개의치 않음’의 태도가 나타날 수 있을 정도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극단적인 예로 직장 상사를 죽이고 싶은 생각이 떠올랐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개의치 않고 그대로 행해도 될 정도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다시 4절을 보면 “그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삼손이 블레셋 땅에 내려가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겠다는 생각은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게 하시려는 하나님께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일단 삼손이 블레셋에 내려가서 결혼을 하게 되면 삼손의 마음이 블레셋 사람과 이해관계에 얽히게 됩니다. 이해관계에 얽히게 되니까 블레셋 사람에 대해서 어떤 생각과 감정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럴 때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족속임에도 불구하고, 블레셋 사람들에 대해서 느끼는 것을 그대로 다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틈을 타서 블레셋을 치기 위하여 삼손을 블레셋으로 보내 결혼시키는 일을 이끄셨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개의치 않음’을 보여주시는 것에 있습니다. 삼손의 이야기 전체는 구원받은 자의 자유가 주제입니다. ‘개의치 않음’은 ‘어쩔 수 없음’의 단계를 지난 후에 이루어지는 구원받은 자의 자유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세상에 대해 어쩔 수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어느 정도로 하나님을 만나야 하느냐면 이 세상에서 ‘어쩔 수 없음’의 단계에서 벗어나서 ‘개의치 않음’의 단계로까지 하나님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본문 4절에서 삼손이 블레셋에 가서 블레셋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생각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극단적인 예를 들어 직장 상사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떠올랐다면 삼손처럼 그대로 행할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을 마주 보고 하나님과 친해지라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과 친해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음’의 단계에서 철저하게 세상에 대해 죽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과 철저히 마주 보고 친해진다면 이 세상에서는 그 무엇에도 ‘개의치 않음’이 나타납니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그대로 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떠오르는 생각대로, 떠오르는 감정대로, 떠오르는 의지대로 해 나갈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생각은 외부적인 사항에 의해 변형되고 왜곡되고 찌그러지기 마련입니다. 나를 너무나 괴롭히고 모욕하는 상사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할지라도 여러 가지 이유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죽이고 싶다는 마음을 변형하고 왜곡해서 표현합니다. 속으로는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면서도 그러한 마음을 뒤틀고 왜곡해서 겉으로는 친절하고 순종적인 모습을 보이고자 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라는 사과로 표현합니다. 본문은 이렇게 외부적인 요소에 의해 변형되고 왜곡되는 것은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삼손을 통해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웃 사랑, 상대방에 대한 배려, 누구를 만나면 오직 그 사람만을 위해서 산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러한 이웃 사랑, 상대방에 대한 배려나 친절, 상대방에 대한 온유함 등은 변형되고 왜곡된 마음에서 나타나야 하는 일이 아닙니다. 떠오르는 대로 아무런 여과 장치 없이 개의치 않고 행동을 했더니 ‘그게 사랑이네, 그게 배려였네, 그게 친절이었고, 그게 온유함이었네!’라고 말할 수 있게끔 되어야 합니다. 내 속에서는 강퍅한 마음이 들어서 꿀밤이라도 때려주고 싶은데 참고 억누르고 사랑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상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상태가 아닙니다. 떠오른 생각이 있으면 개의치 않고 말하고 행동했는데 그것이 사랑이고 배려인 것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이러한 ‘개의치 않음’이 나타날 수 있어야 합니다. 신경 쓰고, 괘념하는 것은 ‘개의치 않음’의 모습이 아닙니다. 개의(介意)는 끼어들 개(介)에 뜻 의(意)를 씁니다. 외부적인 사항들이 내 생각에 끼어드는 것이 개의입니다. 나를 너무나 괴롭히는 직장 상사를 죽이고 싶은데 그럴 수 없습니다. 직장 상사를 죽이면 살인자가 되고 평생을 망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외부적인 사항들이 내 생각에 끼어들어서 행위를 막습니다. 반면 ‘개의치 않음’이란 내 속에서 떠오르는 그 생각과 감정에 외부적 요인이 끼어들어 오는 것을 차단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서 생긴 대로 본색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아무것도 개의치 않아도 될 정도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개의치 않음’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절대로 예수님의 십자가 바깥으로 나가면 안 됩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죽어야 하고, 반드시 하나님을 마주 봐야 하고, 반드시 하나님과 친해져야 합니다. 어느 정도로 친해져야 되느냐면 모든 생각, 모든 감정, 모든 의지를 개의치 않고 본색적으로 말해도 될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과 친해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봅니다. 예수님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 군중들이 몰려왔습니다. 이들은 쉽게 말해 다 초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앞에 모인 군중들에게 십자가는 우리처럼 교리로 배운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십자가에 매달려 북어처럼 바싹 말라 죽은 사람들을 실제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면 나를 따를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신 것입니다.

저도 목회를 했지만 목사님들은 말씀을 전할 때 교인들을 신경 쓰기 마련입니다. ‘초신자에게는 이렇게 말하면 너무 강하겠지. 실족하여 예배당에 나오지 않겠지.’라고 신경을 쓰며 말씀을 조절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는 군중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으셨습니다.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이런 말과 행동을 하면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할까? 나를 어떻게 볼까?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라는 것에 대해 상관이 없으셨습니다. 하나님과 친해지면 내 속에서 떠오르는 것을 그대로 말하고 행동하는데 그 결과가 무섭지 않고, 두렵지 않고, 전혀 신경이 쓰이지도 않게 됩니다. 내가 신경을 안 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신경이 안 쓰이게 됩니다.

삶에는 골칫거리로 여겨지는 뜨거운 감자 같은 일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친해지다 보면 그 골칫거리를 잘 해결하겠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각종 일들이 골칫거리로 등극하지 않습니다. 내 마음 안에서 신경 쓸 거리로 올라서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전혀 골칫거리가 없는 사람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삼손의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 블레셋으로부터 해방한 사건이 아닙니다. 블레셋의 지배를 기정사실로 둡니다. 그런데 삼손은 이러한 상태에서 블레셋 사람이나 블레셋의 지배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을 합니다. 본문은 제멋대로 행동하는 삼손을 비유로 삼아 신앙인의 자유와 ‘개의치 않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은 삼손이 한 행동을 그대로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삼손이 블레셋이라는 환경 속에 갇혀 있었으면서도 블레셋을 골칫거리와 뜨거운 감자로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말하고 행동했다는 것을 보여주시면서 ‘너희도 삶의 주변의 모든 상황을 개의치 말고 떠오르는 말과 행동을 할 준비를 하라. 그러면 내가 너희 속에 내 생각과 내 감정과 내 의지와 내 뜻과 계획을 불어넣어 주리라.’라는 메시지를 주십니다. ‘어쩔 수 없음’에서 ‘개의치 않음’으로의 전환이야말로 구원받은 자가 삶에서 보여야 할 자유의 핵심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말씀으로 나누는 이 자유가 진정으로 실제 삶의 현장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내 안에서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그대로 말하고 행동함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 ‘개의치 않음’의 상태로 살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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