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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3

녹취문: 세상 현실감과 싸움을 포기말라_태승철 (삿 15:1~20)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6.06.20|조회수87 목록 댓글 1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 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세상 현실감과 싸움을 포기말라>의 줄거리 :

삼손은 혈혈단신으로 세상 현실감에 맞서 싸우다 죽는 선민의 전형입니다. 세상의 사실들은 본래 현실이 아니라 설정이고 세팅입니다. 하나님과 천국 관련 사실들만이 실제 현실입니다. 이 세상은 내가 천국 현실감을 느끼는 동안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을 그대로 이루어야 하는 극히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무대 세팅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죄와 저주에 찌든 결과 내 마음은 세팅이요 설정에 불과한 이 세상을 자꾸 현실이라고 느낍니다. 그러면 실제 하나님 관련 현실감은 선민의 의식에서 퇴색하다가 가물가물 지워지고 말지요. 그래서 평생 이 세상 현실감과 싸움을 잠시라도 놔버리면 안 됩니다. 천국은 살아 있는 동안 천국을 현실로 느끼던 사람만 들어가는 곳입니다.

 

세상 현실감과 싸움을 포기말라

 

(사사기 15:1~20)

 

14.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들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를 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그의 팔 위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그의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15.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집어 들고 그것으로 천 명을 죽이고

16. 이르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 하니라

17. 그가 말을 마치고 턱뼈를 자기 손에서 내던지고 그 곳을 라맛 레히라 이름하였더라

18.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하니

19. 하나님이 레히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 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으며 그 샘이 오늘까지 레히에 있더라

20. 블레셋 사람의 때에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

 

 

본문 중심으로 <세상 현실감과 싸움을 포기말라>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제일 큰 문제는 세상 현실감과 싸움을 진즉에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현실감과의 싸움을 포기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종교인으로의 전락을 의미하고, 실시간으로 살아계신 하나님과 더 이상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의미합니다.

삶의 현장은 가정이든지, 직장이든지, 동창과의 만남이든지, 지인과의 식사 자리든지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의 현장은 현실이 아닌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설정이고 세팅에 불과합니다. 나의 현실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싶으시다면 지금 내 마음이 무엇 때문에 만족하고 무엇 때문에 불만스러운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지금 왜 기분이 좋거나 우울하여 기쁘지 않은가를 보는 것입니다. 좋음과 싫음, 만족과 불만, 기쁨과 슬픔은 마음이 가닿는 대상으로부터 느끼는 감정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가닿는 대상이야말로 여러분의 현실입니다.

예를 들어 장사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몇 달째 장사가 안돼서 수입이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마음이 우울하고 걱정이 됩니다. 이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입을 개선하기 위하여 애를 씁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수입이 안 좋은 상태에 대해 내 마음이 가닿는 현실인 상황을 직시합니다. 쉽게 말해 ‘수입이 안 좋은 상태가 왜 나의 현실감이 되어야 하나?’라고 문제 삼는 것입니다. 장사가 안되는 상태를 문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장사가 안되는 상태에 마음이 가닿아서 그것을 현실로 느끼는 상태를 문제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이 싸움을 포기해서는 안 되고, 우리는 이것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장사가 안되는 상황을 싫어해서 걱정과 우울함이 생깁니다. 반대로 장사가 잘 되면 기분이 좋습니다. 두 경우 모두 문제입니다. 장사가 안되거나 잘되는 상태가 나의 현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하나님 관련 사실들만 현실이어야 합니다. 장사가 안되는 이 세상 삶의 현실은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설정이자 세팅입니다. 내 마음은 하나님 관련 사실들에 가닿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예수님이 나의 죽음을 대신하셨고, 나는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는 사실이 나의 현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관련 사실들이 현실이 된 상태에서는 천국을 현실감으로 갖게 됩니다. 이 상태에서 설정되고 세팅된 무대 위에서 하늘의 뜻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다른 예를 들어 봅니다. 수입이 석 달 연거푸 안 좋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수입을 개선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입이 안 좋다고 하는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설정과 세팅에서 천국을 현실로 느끼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 대답은 천국을 현실감으로 갖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또 자녀에게 문제가 생겼다면 그 삶의 현장은 설정이고 세팅이며 나의 현실이 아닙니다. 이는 곧 자녀의 문제가 내 마음의 좋음과 나쁨을 느껴야 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녀의 문제는 설정과 세팅입니다. 천국의 현실감을 느끼고, 천국으로 만족하고, 천국으로 기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무대가 됩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지 속으면 안 됩니다. 이것에 속아서 마음의 좋음과 싫음, 만족과 불만, 기쁨과 슬픔이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삶의 현장에 의해서 현실이 결정됩니다.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설정과 세팅에 불과한 삶의 현장이라는 상황에 대해 자꾸 마음이 가닿아서 현실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 현실감과 싸움이 필요합니다. 평생, 죽도록, 쉬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싸워야 합니다.

삼손의 이야기가 바로 이것을 가르쳐줍니다. 삼손은 혈혈단신으로 세상 현실감에 맞서 싸우다 죽는 선민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삼손이 블레셋과 싸운 것은 일종의 비유입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지배하에 있습니다. 이는 곧 모든 선민이 세상의 현실감에 장악되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삼손은 이렇듯 세상 현실감에 장악된 상태에서 끊임없이 저항하는 자였습니다. 이것은 삼손이 세상 현실감에 지배된 선민 사회에 대한 저항 의식을 인격화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삼손과 블레셋의 싸움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복수의 복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삼손이 수수께끼 내기에 진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삼손의 아내는 삼손을 닦달하여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내었고 블레셋 청년들에게 가르쳐줍니다. 내기에서 진 삼손은 베옷과 겉옷 삼십 벌을 구해야 했기에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주민 삼십 명을 죽이고 옷을 빼앗아서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래도 삼손은 화가 풀리지 않았고 결혼식을 내팽개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사이에 삼손의 장인은 딸을 블레셋 남자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에 일어난 일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장인이 아내를 빼앗아 블레셋 사람에게 준 까닭에 분노한 삼손은 여우 삼백 마리를 잡아다가 두 마리씩 꼬리를 묶고 횃불을 꽂았습니다. 꼬리에 불이 붙어 난리를 피우는 여우 떼를 블레셋 곡식밭에 풀어놓습니다. 그 결과 동네의 모든 작물이 불타버렸고 블레셋 사람들은 분노하여 삼손에게 복수합니다. 이들은 삼손의 처가집에 불을 질러서 아버지와 딸을 죽입니다. 그러자 삼손은 더욱 분노하여 블레셋 사람들을 쳐 죽이고 에담 바위틈에 내려가서 숨었습니다. 에담 바위는 이스라엘 시므온 지파의 굴이 있는 지역입니다.

시므온 지파의 땅은 유다 지파 안에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블레셋 사람들은 군대를 이끌고 와서 유다 지파의 레히에 진을 칩니다. 유다 지파 사람들은 깜짝 놀라 이들을 찾아가서 사정을 물었고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요구합니다. 이에 유다 지파 사람들은 삼손을 찾아서 밧줄로 묶은 후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깁니다. 삼손은 유다 지파 사람들에게 순순히 묶여서 블레셋 사람들 앞으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갑자기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서 삼손을 묶었던 줄이 불탄 삼과 같이 끊어집니다. 그러자 삼손은 길거리에 떨어져 있던 나귀의 새 턱뼈를 줍습니다. 새 턱뼈란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축축한 기운이 남아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바싹 말랐으면 쉽게 부서질 텐데, 아직 축축한 기운이 있기에 더 질긴 상태였을 것입니다. 삼손은 이 나귀의 턱뼈로 블레셋 사람을 무려 천 명이나 죽였습니다.

이처럼 삼손은 끊임없이 블레셋과 싸웁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삼손은 끝까지 혼자였습니다. 유다 지파 사람들은 블레셋의 요구대로 삼손을 붙잡아 넘겨주었습니다. 그리고 블레셋 사람들이 과연 삼손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예의주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삼손이 몸의 밧줄을 끊더니 나귀 턱뼈로 블레셋 사람들 천 명을 죽입니다. 유다 사람들은 이 광경을 지켜보면서도 한 명도 삼손을 돕지 않았습니다. 한 명도 가세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죽인 후에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습니다. 18절을 보면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삼손이 이렇게 부르짖자 하나님께서는 레히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셔서 물이 솟아 나오게 하심으로 그것을 마셨습니다.

 

여기서 유다 지파 사람들의 성향을 알 수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11절을 보면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 하니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들이 내게 행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행하였노라 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유다 지파 사람들은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상황을 당연시하고 있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기존에 보여왔던 태도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타락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방 족속의 지배 아래로 던지셨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탄압 때문에 괴로워서라도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회개했습니다. 그런데 블세셋과의 관계에서는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지배 아래에 던지셨는데 이스라엘이 회개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오히려 유다 지파 사람들은 삼손을 향해 블레셋 사람이 다스리는 줄 모르냐며 따집니다. 삼손 너 때문에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와서 다 죽게 생겼다며 삼손을 탓했던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 너를 원하니 순순히 잡혀줄 것을 요구합니다. 유다 지파 사람들은 블레셋의 지배에 순응하고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 ‘블레셋이 지배하면 어때? 하루 세 끼 먹고 살면 되는 거지.’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유다 지파에 국한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전역에서 삼손 홀로 블레셋에 대항하여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삼손은 블레셋과 싸우고 또 싸웠습니다. 블레셋도 삼손에게 복수를 하겠다며 삼손을 찾아다닙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싸움이 멈추지 않습니다. 본문은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지배했던 것처럼 선민 모두를 지배하는 세상 현실감과 혈혈단신으로 싸우는 선민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에게 삼손처럼 싸울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 족속인 블레셋의 지배가 상징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현실로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과 천국을 현실로 생각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이 세상의 상황과 사실들만 현실로 느낍니다. 그런 세상 현실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실상은 세상 현실감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세상 현실감의 지배를 받으면서 천국 현실감, 하나님 현실감은 정말 눈 씻고 찾아봐도 흔적이 없는 상태입니다. 세상 현실감에 찌들고 정복되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종교입니다. 유다 지파 사람들은 지금 종교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종교가 하는 일이란 유다 지파 사람들이 한 일과 같습니다. 유다 지파 사람들이 삼손을 묶어서 블레셋에 바쳤듯이, 종교는 한 사람이 종교인이 되면 그를 묶어서 세상의 현실감에 바쳐버립니다. 하나님 잘 믿으면 세상에서 성공하고 형통하고 만족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신앙의 목표를 세상의 성공과 형통과 번영으로 묶어버림으로써 세상 현실감에 장악되어서 하나님을 찾게 만듭니다. 이것이 한 사람을 세상 현실감에 바치는 종교의 모습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와 저주에 찌들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몸이 살아있는 한 속에서는 세상 현실감에 대한 바람이 끊임없이 나타납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것들을 현실로 느끼려 합니다. 죄와 저주가 작동하는 동안에는 이러한 성향이 중단 없이 일어납니다. 이로부터 싸워야 할 필요성이 생깁니다. 그런데 선민이라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 싸움을 포기하고 맙니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다 지파 사람들은 세상 현실감에 찌든 이방 족속인 블레셋의 지배에 대해 완전히 순응하고 있었습니다. 세상 현실감이 삶의 기본 판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마음을 세상에 밀착시키게 되었습니다. 세상 삶의 현장을 현실감으로 느껴서 좋고 나쁨을 느낍니다. 세상 삶의 현장에서 만족과 불만족을 느낍니다. 세상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로 기뻐하거나 걱정합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을 어쩔 수 없고 당연하다며 묵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선민의 싸움을 포기한 모습입니다.

 

세상 현실감과의 싸움은 죽을 때까지 평생 지속되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은 우리에게 삼손처럼 혈혈단신으로 고군분투하라는 하나님의 요청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세상 현실감과의 싸움을 놓지 말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멈추는 이유를 보면 결국 세상 현실감과의 싸움에서 손을 놓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가족의 상황을 신경 쓰다 보면 가족의 상황에 대해 좋고 나쁨을 느끼게 됩니다. 이럴 때 내 마음에서 천국 현실감이 퇴색되고 가물가물 꺼져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천국 현실감을 회복하기 위하여 세상 현실감을 느끼는 나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여기는 싸움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싸움이 중단되어 버리면 십자가 생활화의 의미를 모르게 됩니다.

십자가 생활화의 의미는 세상을 현실로 느끼는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세상 현실감과의 싸움입니다. 사업이 안 되는 것은 나의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설정이고 세팅입니다. 사업이 안 되는 상황에서 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행하면 됩니다. 사업이 안 되는 상황에 마음을 붙여서는 안 됩니다. 사업에서 마음을 떼고 천국에 마음을 두어서 천국 현실감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업이 잘 되든 안 되든, 돈이 벌리든 벌리지 않든, 몸이 아프든 건강하든 그 상황은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세팅이고 설정입니다. 나는 그 세팅과 설정의 무대 위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행하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천국 현실감이 있어야 합니다. 천국 현실감을 가지려면 하나님을 마주 보면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이 나의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강조한 것처럼 내가 예수님 안에 들어 있는 상태가 나의 현실이 됩니다. 천국이 내 마음이 머무는 집으로서의 현실이 됩니다. 이처럼 천국 현실감을 가지게 되면 이 땅에서 설정되고 세팅된 삶의 현장에서 내가 무엇을 행해야 될지를 알게 됩니다.

본문의 기록대로 삼손은 나귀 턱뼈로 혼자 천 명을 죽입니다. 일부터 천까지 숫자를 세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여야 했으니 엄청난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 지파 사람들은 삼손이 혈혈단신으로 싸우는 광경을 빤히 보면서도 한 사람도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싸움이 홀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예를 들어 주차장에 차가 가득하고 손님이 많이 들어가는 식당이 있다면 맛집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예배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 더 진리를 말할 것 같다는 느낌을 갖고 신뢰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 현실감과의 싸움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너 홀로 싸우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특별히 설정하고 세팅한 삶의 현장이라는 무대에서 홀로 싸워라. 홀로 싸우되 끝까지 싸워라. 중단하지 말고 싸워라.’라는 메시지를 던져주십니다.

 

물론 이 싸움을 하다 보면 지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들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들이 현실로 느껴집니다. 아내를 보는 동안에 나도 모르게 아내가 현실로 느껴집니다. 각종 삶의 상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머니에 대해, 형제들에 대해서 그렇습니다. 십자가 복음 가족들이 강릉에 와서 하는 이야기를 듣거나 메일이나 전화로 대화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러한 일들이 나의 현실이 되어버립니다. 뉴스를 봐도 내용 하나하나가 다 마음에 와닿기 마련입니다. ‘나라가 이러면 안 되는데. 우리나라가 걱정이다. 저 사람은 왜 저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루를 살다 보면 세상 현실감과의 싸움은 멈추지를 않습니다. 삼손이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인 것처럼, 내 마음이 가닿으면서 현실감을 느끼게 하는 대상을 천 개는 죽여야 하루가 끝납니다. 내 마음에서 느끼는 세상 현실감과의 싸움에는 어떤 사람도 참여해서 도와줄 수 없습니다. 결국 삶의 현장에서 싸우는 사람은 나 자신입니다. 죽을 때까지 혼자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못합니다. 지쳐서 포기해 버립니다.

내 마음에 세상 현실감을 느끼게 하는 대상들은 매일 천 번이라도 등장할 것입니다. 내 마음에 좋고 나쁨을 느끼게 하고, 만족과 불만을 느끼게 하고, 기쁨과 걱정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내 마음에 이러한 느낌을 가져다주는 대상이 나의 세상 현실감이 되어버린 것들입니다. 그러한 대상에 대해 내 마음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천 번 죽여야 합니다. 삼손은 나귀 턱뼈로 천 명을 죽였습니다. 나귀 턱뼈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매일 천 개의 세상 현실감을 갖게 하는 대상들을 죽여야 합니다. 이 싸움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

중동 지역, 소아시아 지역, 북아프리카 지역에는 사도 바울이 세웠던 굴지의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들이 다 이슬람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삶의 현장을 설정과 세팅으로 여기지 않고 현실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일을 현실로 받아들이자, 눈에 보이지 않는 천국 사실들은 현실감에서 완전히 퇴색해서 가물가물하게 꺼져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세상 현실감이 장악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계속 부르더라도 종교만 남게 됩니다. 중세 기독교의 모습이 바로 그러했기에 종교 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지금 개신교의 상태도 마찬가지입니다. 삼손이 블레셋과 끊임없이 싸우듯이 세상 현실감과 끊임없이 싸우는 교인들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내 마음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은 자다. 세상은 내 마음의 현실이 아니다.’라는 의식이 중단된 자는 천국에 못 갑니다. 천국을 지금 당장 현실로 느끼는 자만이 몸이 죽어서도 천국으로 가는 겁니다. 몸이 살아있는 동안에 세상만 현실이었습니다. 마음이 세상에 가닿아서 세상만을 현실감으로 느꼈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예수를 구주로 고백했다고 해서 죽은 후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혈혈단신으로 내 속에서 느껴지는 세상 현실감과 싸우는 일은 너무 힘듭니다. 삼손이 하나님께 목말라 죽겠다고 부르짖었던 것과 같습니다. 동시에 이것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갈증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내려다보시는데 아무리 봐도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습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을 현실로 느끼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조차도 전부 세상 현실감에 찌들어 있고 세상 현실감의 지배 아래에서 살고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지배를 삶의 기본 바탕이자 상수로 인정하고 살았던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의 눈앞에 보이는 가족은 현실적 대상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직장이나 사업장은 현실적 대상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몸도 현실적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으로부터 현실감을 느껴서는 안 됩니다. 몸이 아프더라도 내 마음은 천국 현실감을 느껴야 합니다. 몸이 아픈 상황에 대해서 어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느냐를 알고 행하면 됩니다. 돈이 안 벌리고 자식이 형통하지 못한 것도 다 설정이고 세팅입니다. 여기에 내 마음을 붙이고 좋다 나쁘다 할 일이 아닙니다.

자녀가 형통하든 불통하든 설정이고 세팅이며, 돈이 벌리든 안 벌리든 설정이고 세팅입니다. 여기에 마음을 붙이고 좋네 나쁘네 하면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세상일을 현실감으로 느끼며 좋고 나쁨의 느낌을 가질 때마다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삼손이 나귀 턱뼈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였듯이, 내 마음이 세상 현실감을 느끼는 대상에 대해 하루에 천 개씩 죽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사람에게 갈증을 느끼시며 찾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다.

 

세상 현실감과의 싸움은 세상 문제와의 싸움에 우선해야 합니다. 세상 문제는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설정이자 세팅입니다. 내가 싸워야 할 것은 세상 문제가 아니라 세상 현실감입니다. 내게 주어진 세상 문제는 설정과 세팅으로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것입니다. 내가 세상 현실감과 싸울 때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이 바꿔 가실 것입니다. 그렇기에 세상 문제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현실로 느끼는 현실감과 싸우시기를 바랍니다. 이 싸움은 끝까지 혼자서 해나가는 것입니다. 다만 저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설정과 세팅 가운데 혼자 싸우는 일을 돕기 위하여 아침마다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몸이 죽을 때까지 하루에도 수백 번씩 천 번씩 들어오는 세상 현실감을 마주할 것입니다. 삼손이 나귀 턱뼈로 블레셋 사람 천명을 죽였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루에 천 개의 대상씩을 죽여나가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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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에스더54 | 작성시간 26.06.2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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