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사사기-3

녹취문: 내 마음의 독립문과 독립기도_태승철 (삿 16:1~3)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6.06.22|조회수68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 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내 마음의 독립문과 독립기도>의 줄거리 :

영적인 독립 정신이 약화 되거나 죽어버리면 내 마음 안에서는 믿음도 죽고 구원도 죽고 천국도 죽습니다. 이 세상으로부터의 독립 정신이 믿음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공백의 채움이 절대 필수적인 마음이 존재감과 만족감의 충만을 추구할 때 반드시 이 세상으로부터는 독립하여야 합니다. 마음이 세상에 갇혀서 접촉하는 대상에 의존된 상태에서 느낌과 기분이 롤러코스터를 타듯 살면 그 자체로 여전히 세상의 식민지 상태인 겁니다. 나를 가두고 있는 세상의 포위망을 뚫고 나와 독립해야 합니다.

 

내 마음의 독립문과 독립기도

 

(사사기 16:1~3)

 

1. 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2. 가사 사람들에게 삼손이 왔다고 알려지매 그들이 곧 그를 에워싸고 밤새도록 성문에 매복하고 밤새도록 조용히 하며 이르기를 새벽이 되거든 그를 죽이리라 하였더라

3. 삼손이 밤중까지 누워 있다가 그 밤중에 일어나 성 문짝들과 두 문설주와 문빗장을 빼어 가지고 그것을 모두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가니라

 

 

본문 중심으로 <내 마음의 독립문과 독립기도>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다 아시는 대로 현재 서대문 독립공원 안에 독립문이 있습니다. 원래는 홍제동을 지나서 무학재를 넘어오면 서대문 쪽으로 들어오는 곳에 독립문이 있는데, 그 자리가 중국 청나라 사신들을 맞이하는 영은문 자리였다고 합니다. 사신이 가져다주는 은혜를 영접하는 문이라고 해서 영은문(迎恩門)이라 불렸습니다. 사대주의 정신이 깊이 뿌리박힌 의미가 들어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1897년에 서재필 등이 이끄는 독립협회가 주동이 되어 모금을 해서 새롭게 지은 문이 독립문입니다. 독립문은 청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를 끝내고 전 세계에 조선이 완전히 자주독립국임을 선언한다는 의미가 있었고, 국내적으로는 우리 민족의 독립 정신을 고취하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독립문은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모방해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한편, 우리 의식 안에서도 역사적 유적으로서가 아니라 오늘도 내일도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은 계속 통과해야 하는 독립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독립문을 통과할 때는 독립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독립문을 통과할 수 없고 그럴 수 없다면 영적인 독립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본문에는 삼손이 블레셋의 가사에 갔을 때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손은 가사에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습니다. 이 부분만을 보면 나실인이 어떻게 이방인 기생에게 들어갈 수 있느냐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삼손의 이야기에서 윤리적 측면만을 주목한다면 삼손의 이야기 전체가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놓치게 됩니다. 삼손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지만 성경이 이러한 사실을 말씀으로 기록한 것에는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의도를 놓치지 않으려면 삼손의 문제에 윤리적 기준을 들이대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삼손의 이야기 전체는 특별한 주제를 던지시는 하나의 비유와도 같습니다. 삼손이라는 인물이 살았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성경은 이러한 삼손의 이야기를 비유적으로 말씀화 했습니다. 비유적인 의미를 가짐으로써 우리에게 전하시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 메시지란 앞서 말씀드린 대로 교인의 자유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교인의 독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우리가 삼손의 이야기가 전달하는 자유를 누리고 있는가에 대해 점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삼손의 이야기를 바르게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삼손이 들어간 가사는 가드, 아스돗, 아스글론, 에글론과 함께 블레셋의 5대 도시였습니다. 이 중에서도 가사는 특별히 강력하게 요새화된 도시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삼손의 고향인 소라에서는 무려 57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입니다. 삼손은 어떤 이유에서 이렇게 먼 곳까지 걸어서 이동했던 것일까요? 이것은 블레셋 성읍들 중에서도 가사가 가장 강력한 요새라는 것을 염두에 둔 행동입니다. 가장 강력한 요새인 가사에서 삼손을 통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를 보는 것이 본문이 기록된 이유입니다.

가사에 들어간 삼손은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됩니다. 가사 사람들은 삼손이 왔다는 이야기를 듣자, 하늘이 준 기회로 알고 성문 근처에 몰래 숨어있었습니다. 삼손이 나타나면 습격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삼손은 기생집에 들어가서 하룻밤을 새우지도 않고 밤중에 나옵니다. 본문을 보면 매복하고 있던 블레셋 사람들과 싸웠다는 이야기는 없지만 정황상 싸워서 이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손은 강력한 요새인 가사의 성문 문짝들과 양쪽 기둥과 빗장까지 통째로 뽑아버립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부 어깨에 메고 헤브론 산지에 가져다 둡니다. 가사에서 헤브론까지는 62킬로미터에 해당하는 거리입니다. 삼손은 이렇게 먼 거리를 성의 문짝들을 들고 이동했던 것입니다.

당시 성이 요새가 되기 위한 삼대 요소는 성곽과 성문과 해자입니다. 해자란 적들이 성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성벽 주위를 둘러싼 인공적 도랑입니다. 그리고 요새가 되기 위해서는 성문을 특별히 육중한 나무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성문 바깥쪽에는 어떤 공격에도 버틸 수 있도록 쇠나 청동을 덧입혔습니다. 가사는 블레셋 성읍 중에서도 요새로 알려진 곳이었기에 이곳의 성문이 얼마나 대단했을지는 쉽게 짐작이 갑니다. 그런데 삼손은 이 성문을 통째로 뽑아서 62킬로미터를 이동합니다. 영화에서 보는 슈퍼맨이나 할 일을 해버린 것입니다. 삼손같이 괴력을 발휘한 인물은 달리 존재하지 않습니다.

삼손은 강력한 요새에 갇혀서 독 안에 든 쥐의 상황이 된 것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여리고 성 정탐 때 기생 라합이 정탐꾼 두 명을 창문 바깥으로 밧줄을 내려서 도망하게 했던 것과는 분위기가 전혀 다릅니다. 삼손은 철통같은 요새의 성문을 통째로 뽑아서 어깨에 메고 62킬로미터를 걸어서 헤브론에 가져다 놓습니다. 삼손은 본래 단 지파의 소라 출신입니다. 단 지파는 지중해 연안 쪽에 있어서 남동쪽으로는 유다 지파와 붙어있고, 동쪽의 요단강 쪽으로는 베냐민 지파와 붙어있습니다. 삼손은 가사의 성문을 뽑아서 고향인 단 지파가 아닌 유다 지파의 헤브론으로 가져갑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헤브론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무덤이 있었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정신적 고향으로 여겨졌습니다. 또한 여호수아 시절에 땅을 정복할 때 갈렙이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라고 외치면서 산지에 살던 거인 족속을 몰아내고 차지한 승리와 정복의 땅이기도 했습니다. 헤브론은 가나안 족속 중에서 가장 강력하다고 여겨졌던 거인 족속을 무찌르고 얻은 땅이었기에 정복 정신과 독립 정신을 떠올릴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것은 서재필 등이 독립문을 세우며 조선이 청나라와 같은 거인국에 지배되지 않는 독립국임을 선언한 것과 같습니다. 갈렙은 ‘우리는 거인족들이 지배하는 땅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는 자주정신, 독립정신, 정복정신의 아버지였습니다. 이 갈렙이 정복한 땅이 바로 헤브론이었습니다. 삼손은 이러한 정신이 깃든 헤브론에 마치 독립문을 세우듯이 가사의 성문을 가져다 놓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로부터 삼손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땅 중에서 하필이면 유다 지파 헤브론에 성문을 가져다 놓은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삼손이 이러한 행동을 한 것에는 유다 지파의 영향이 컸습니다. 앞서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잡아 죽이겠다고 왔을 때, 유다 지파 사람들은 블레셋의 요청을 따라 삼손을 포박하여 넘겨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삼손에게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라고 따졌습니다. 삼손이 이러한 유다 지파의 땅에 블레셋에서 가장 강력하다고 하는 철통같은 요새인 가사의 성문을 통째로 뽑아다 놓았습니다.

삼손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너도 알고 나도 알듯이 가사는 블레셋의 5대 성읍 중에 가장 철통같은 요새이다. 그런데 내가 그 가사의 성문을 통째로 뽑아서 너희들 앞에 갖다 놓았다. 이 문을 보면서 블레셋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할 수 없느냐? 블레셋의 다스림을 자연스럽고 마땅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기치를 떨치고 일어나서 블레셋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정신을 가질 수는 없느냐?’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위해 삼손은 철통같은 요새인 가사의 성문을 뽑아서 유다 지파의 중심지인 헤브론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의 독립 정신을 고취하는 상징물로 삼도록 한 것입니다. 삼손이 가져다 놓은 가사의 성문은 독립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대문 독립 공원에 있는 독립문을 만들 때의 취지와 똑같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삼손은 가사의 성문을 통째로 뽑아서 헤브론에 가져다 놓은 것입니다.

 

한편, 우리는 이러한 사건이 전달하는 영적 메시지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마음이 세상에 갇힌 상태를 당연하게 여기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가운데 삶의 현장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현장에서 마음의 좋고 나쁨, 즐거움과 괴로움, 만족과 불만족, 기쁨과 걱정 사이에서 롤러코스터를 탑니다. 이것은 매우 당연하게 여겨지는 일이기에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이상하게 들립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이러한 질문 자체를 미친 소리로 여길 것입니다. ‘삶의 현장을 살다 보면 사람의 마음이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고, 안정감을 느끼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고, 스트레스 받을 때도 있고 스트레스가 풀릴 때도 있다. 이것이 삶이지 않느냐?’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렇게 사는 것이 맞습니까? 이것은 마음이 세상에 갇힌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삼손이 철통같은 요새인 가사의 독 안에 든 쥐의 신세가 되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갇힌 상태를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은 마음이 세상에 갇힌 상태를 당연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업이 잘 되면 마음이 기쁩니다. 이것은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은 만족과 기쁨을 느끼고자 합니다. 이러한 마음이 언제까지 만족과 기쁨을 위하여 세상을 의존해야 할까요?

우리 마음은 영원히 삽니다. 문제는 이러한 마음이 세상에 의존적인 상태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조선이 명나라나 청나라에 의존했던 것과 같습니다. 기쁨과 만족을 위하여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세상 것들에 의존하는 상태입니다. 언제까지 세상에 대한 사대주의에 빠져 있을 것입니까? 세상에 의존적인 만큼 마음은 세상에 강력하게 갇혀 있습니다. 삼손이 철통같은 요새인 가사의 성에 갇혀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우리의 상태를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인은 세상 의존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만져지는 삶의 현장이나 대상의 상태에 따라 마음의 기분과 느낌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교인은 그럴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영적 싸움입니다. 우리는 이 싸움에서 지면 안 됩니다.

지난 시간에 이 세상은 내 마음이 가닿아서 좋고 나쁨을 느끼는 현실이 아닌 설정이고 세팅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기에 세상 현실감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수십 번 수백 번 말씀을 들으며 이 사실을 알고 있어도 마음이 세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이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삼손이 성문을 뜯어낸 것처럼 세상 현실감의 구멍을 뚫고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세상 현실감의 포위망을 뚫고 나오게 하는 독립문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 세상의 대상들을 현실로 느끼며 포위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포위망은 견고한 요새인 가사와도 같습니다. 그러나 삼손이 가사의 성문을 뜯어버렸듯이 세상 현실감에 구멍을 뚫는 사건이 있습니다. 이 독립문의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삼손이 가사의 성문을 통째로 뜯어서 유다 지파의 요충지인 헤브론에 가져다 놓음으로써 이스라엘의 독립 정신을 고취하게 한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예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십자가를 통해 세상 현실감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독립의 염원을 가지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돈이 안 벌리는 상황입니다. 이럴 때 마음에 걱정이 생깁니다. 그러나 본래 돈이 안 벌렸다는 상황은 설정이고 세팅일 뿐, 내 마음이 접촉해서 느낄 현실이 아닙니다. 다른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에는 자녀 문제, 건강 문제, 직장 문제를 비롯한 다양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마음이 닿아서 좋고 나쁨의 느낌을 받습니다. 문제 때문에 걱정하고 우울해합니다. 이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멈춰 서서 내가 지금 세상 현실감에 매여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아직도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 세상에 의존되어 있구나. 세상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라는 독립의 염원을 가지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볼 때는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독립의 염원을 가지고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직도 마음의 기쁨과 만족이 세상에 의존되어 있는 상태를 문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무슨 일이 안 되면 슬프고, 우울하고, 걱정이 되고, 화나고, 불만하고, 불평합니다. 이러한 느낌이 드는 것은 마음이 세상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의존 상태를 보았다면 독립의 염원을 가지고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독립의 염원을 가지고 십자가를 바라볼 때는 반드시 기도가 필요합니다. 이른바 독립 기도입니다. 내용을 보자면 주기도문의 첫 번째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시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하신 내용을 삶의 현장으로 가져와서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의 기도는 골방에 들어가서 하세요. 그런데 삶의 현장에서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기도를 쉬게 되면 반드시 우리 마음은 가사와 같은 세상 현실감의 요새 속에 갇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세상 현실감에 갇히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지는 상황과 대상에 따라 느낌과 기분의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요동칠 수밖에 없고 좌충우돌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세상에 있으면 안 됩니다. 세상에 갇혀서는 안 됩니다. 마음은 하늘에 있어야 합니다. 하늘과 세상 중에 마음은 하늘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마음이 있으면 갇힌 것입니다. 하늘에 있어야 집에 있는 것이고, 해방된 것이고, 독립된 것이기에 마음은 땅에 있으면 안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기쁨과 만족으로 채워지고자 24시간 무엇인가를 빨아들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세상에 갇히면 좌충우돌하면서 부딪히는 대로 느낌을 받아들입니다. 좋든 나쁘든 세상에 갇혀서 느끼는 것이라면 똑같이 얽매여 있는 것입니다. 자유가 없는 것이고, 독립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럴 때 독립의 염원을 가지고 독립 기도를 하며 십자가를 보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항상 하는 기도이고, 쉬지 않고 하는 기도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쉬지 않고 몸으로 사는 삶의 현장에서 세상의 대상들을 접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든 상황이든 물건이든 그것이 무엇이든지 내가 세상의 대상을 몸으로 접하며 움직일 때마다 마음은 빨려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대상에 의존된 상태, 묶인 상태, 예속된 상태에서 느낌과 기분을 받습니다. 그렇기에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독립 기도를 어떻게 드려야 할까요? 우리 마음은 다양한 문제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그 대상은 돈일 수도 있고, 건강일 수도 있고, 자녀일 수도 있고, 직장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돈을 대표로 삼아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예수님! 지금 제 마음이 돈에 붙잡혀 있습니다. 돈 때문에 제 마음의 기분이 좌우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돈에 묶여버린 상태에서 악하고 무력한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자입니다. 그래서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만 바라봅니다. 지금 돈에 매인 저를 위해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음을 믿습니다. 지금 돈에 묶인 제 마음에 주님의 십자가 죽음이 역사해서 저도 죽은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여기까지가 땅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대해 독립 염원을 가지고 하는 기도의 내용입니다.

이렇게 땅에서 일어나는 상황과 연관된 기도를 드린 다음에는 ‘주님!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 그 옛날 제자들의 마음을 이끌고 천국으로 올라가셨듯이, 제 마음을 지금 돈으로부터 온전히 독립시켜 주셔서 아버지 앞으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주님을 옷 입고 주님과 함께 아버지를 마주하며 천국에 머물게 해주시옵소서. 아버지와 천국이 저의 진정한 현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의 한 가지 예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기도에 어떤 핵심적 취지가 담겨 있는지를 여러분은 아십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차피 채움을 추구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마음이 세상에 갇혀 있다는 것은 마치 조선이 명나라나 청나라에 의존했던 것처럼 세상 현실성에 의존하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세상에 갇히면 몸으로 만나는 대상으로부터 좋고 나쁨을 느끼게 됩니다. 기뻐하기도 하고 걱정도 하며 우여곡절을 겪습니다. 우리는 이 상태를 포착해야만 합니다.

물론 우리의 힘으로는 이 상태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내 마음이 지금 돈에 묶여 있고, 자식에 묶여 있고, 건강에 묶여 있고, 미래에 묶여 있고, 어떤 물건에 묶여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는 나의 처지를 고백해야만 합니다.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을 아는데, 내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음을 고백하며 주님의 십자가를 보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 마음의 독립문입니다. 세상 대상들은 마치 나를 둘러싼 요새와도 같습니다. 십자가를 보는 것은 나를 둘러싼 세상 현실감이라는 요새를 뚫는 일입니다. 삼손이 가사의 성문을 통째로 뽑아버린 것과 같습니다. 십자가는 나를 둘러싼 세상이라는 구멍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의 포위망 바깥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싸움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을 때까지 중단되어서는 안 되는 싸움입니다.

십자가라는 구멍을 통해 마음이 세상 현실감의 바깥으로 나갔다면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을 옷 입고 하늘로 올라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의 마음을 이끌고 가시자, 오순절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은 하늘로 올라갔기에 더 이상 땅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의 마음이 없는 자리에 하나님의 마음인 성령이 내려오실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인 성령이 내려오실 수 있을 정도로 우리 마음이 완전히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서 머물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쉬지 않고 이 기도를 해야 합니다.

 

삼손이 가사의 성문을 뽑아 유다 지파의 헤브론에 가져다 놓은 사건에는 독립의 염원을 가지고 십자가를 봐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나의 처지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하나님! 제 마음이 지금 세상에 붙잡혀 있습니다. 붙잡혀 있는 상태에서 나는 어쩔 수 없는 존재입니다.’라고 고백하여 주님의 십자가 죽음이 세상에 붙잡혀 있는 내 안으로 들어와 역사할 수 있기를 간구합니다. ‘세상 현실감에 대한 완전한 죽음이 이루어짐으로써 해방되고 독립되고 자유롭게 예수님을 옷 입고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 아버지와 천국을 현실로 느끼게 해주세요. 천국이 나의 참다운 현실이 되게 하시고, 천국으로부터만 아버지로부터만 내 마음이 기뻐하고 만족하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쉬지 않고 이루어져야 합니다. 오늘 해서 잘 넘어갔다면, 내일 또 해야 합니다. 내일 했다고 모레는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쉬지 않고 해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세상 대상들에 포위된 내 마음이 독립의 염원을 가지고 바라볼 대상입니다. 이렇게 바라볼 때 주님의 십자가 죽음이 내게 역사합니다. 주님의 부활 승천의 과정이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과정이 되게 해달라고 쉬지 않고 기도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그 진정한 자유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교인의 자유는 독립 투쟁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되 항상 독립의 염원을 가지고 바라보게 하시며, 독립의 기도를 쉬지 않고 함으로써 진짜 독립이 이루어지는 자유를 만끽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