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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공과와 설교

20160330 / 사도행전 13:38-43 / 이 사람을 힘입어

작성자천성교회|작성시간16.03.29|조회수140 목록 댓글 0

이 사람을 힘입어

사도행전 13:38-43

첨부파일 새벽예배20160330.hwp


38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39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40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41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멸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일러줄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42 그들이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43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13:38-43 / 형제들이여! 들으십시오. 그분이 바로 예수입니다. 이 예수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39)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죄에서 해방되어 의롭다는 선언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이 절대로 해낼 수 없는 일입니다. 40-41) 이제 여러분은 예언자들이 `너희 유다의 반역자들아, 너희는 똑똑히 보고 또 쳐다보고 어안이 벙벙하여 서로 얼굴만 보며 기가 막히게 놀라라. 왜냐하면 내가 너희의 시대에 그토록 무서운 일을 할 것이다. 이런 일은 누가 이야기를 해주어도 너희가 믿지 않을 것이니 너희가 직접 보고 겪어야 할 것이다'라고 한 말이 여러분에게 적중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42) 그날 사람들은 회당을 나오면서 바울에게 다음 안식일에도 와서 설교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43) 회당에서 예배를 드린 많은 유대인들과 신앙이 두터운 이방인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라 나서자 두 사람은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신 자비를 받아들이도록 권면하였다.

 

이제 바울의 설교는 그 결말을 향해 달려갑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역사이며,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그의 부활이 있음을 분명히 한 바울은 설교의 결론으로 오직 죄사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주어짐을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만(38-39) 바울의 설교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얻게 되어 질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하게 성취되었고 그 결과는 그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죄사함입니다. 모세는 회당의 구성원 중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향해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 얻을 수 없는 의롭다 하심이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을 때 우리에게 주어짐을 단호하게 선포합니다.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 이 두 가지의 은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결과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4:25) 그리스도인들이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은 죄사함의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라면, 우리의 의롭다함의 은혜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사함 받았는가의 질문에는 거리낌 없이 예라고 답하지만, 의로운가의 질문에는 답변하기를 주저합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죄사함의 은혜가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듯 우리의 의롭다함도 우리 자신으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신 것을 믿는다면, 나의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부활 하셨음도 믿어야 합니다. 특히 39절의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말씀은 현재형으로 쓰여 일회적이 아닌 앞으로 올 모든 시대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구원의 원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원칙은 어제나 오늘이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좋은 반응을 얻은 바울의 설교(40-43) 바울의 설교는 회당에 모인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16절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과 같은 말로서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을 일컬음)로 하여금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이들은 다음 안식일에도 이 복음을 전해 줄 것을 바울 일행에게 요청합니다. 어떤 이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며 적극적으로 복음을 듣기도 했습니다.

 

적 용 : 죄사함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졌음을 믿으십니까? 또한 우리의 의롭다 하심이 예수님의 부활 때문임을 믿으십니까?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있기 위하여(43) 오늘 행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새로 부임한 젊은 목사가 열심히 설교를 했습니다. 많은 준비를 했고,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설교했습니다. 설교가 끝난 후 나이가 지긋한 성도가 교회의 큰 발자취에 관해 한참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목사님, 그래도 옛날에는 위대한 설교가들이 꽤 있었는데 말입니다.”라고 말하며 젊은 목사를 쳐다보았습니다. 젊은 목사는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정말 그랬지요. 그리고 그때는 위대한 청중도 있었지요.”

 

< 설 교 >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38,39절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없으면 아무도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설 수 없습니다. 예수님 없는 율법은 우리를 정죄할 뿐이며, 피의 제사만으로는 우리의 죄를 사하거나 우리 마음을 온전히 깨끗하게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99). 예수님의 구속의 은총과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아무도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의의 백성으로 살 수 없습니다(로마서 84).

40,41절 바울은 반역하는 유다를 향해 바벨론을 통한 멸망을 경고하던 하박국의 말씀(15)을 인용해서 메시아 예수님을 거절하여 멸망에 이르지 않도록 하라고 경고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게 된 자들(참조. 하박국 24)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 증거에는 이런 타협할 수 없는 엄중한 요구가 뒤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42,43절 결코 가볍게 들을 만한 말씀이 아니었는데도 회당의 청중들은 바울의 말씀을 달게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음 안식일에도 말씀을 전해달라고 간청합니다. 말씀을 향한 목마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말씀을 향한 목마름이 있습니까? 성도들의 말씀에 대한 갈증을 잘 알고 해결해주고 있습니까?

 

너무 교회에서 새로운 것만 추구하려고 하다가 이단에 빠집니다. 성경 말씀에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성경 말씀은, 신약 성경은 이천 년, 구약 성경은 삼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읽고 연구하고 가르치고 설교했기 때문에 새로운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하는 그릇, 표현하는 방식은 달라질 수 있지만 그러나 그 내용은 여전합니다. 이천년 전이나 천 년 전이나 오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이에요. 반대로 이단은 화끈하고 뭔가 새로운 것이 있는 것 같은데 거기에 미혹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여기에 그리스도가 있다 저기에 그리스도가 있다고 할 때 따라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말세에 많은 이단이 거짓 이적을 행하고 믿는 사람이라도 미혹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단일수록 안 믿는 사람보다는 이미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을 표적으로 삼을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미혹하는 차원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얻어야 되는데 그 지혜는 결국 성경 말씀과 성령으로부터 말미암습니다.

 

마귀가 하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들어보면 씨 뿌리는 사람이 나가서 씨를 뿌렸을 때 길가에 떨어진 씨앗은 뿌리자마자 새가 날아와서 먹어버렸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새가 뜻하는 것은 마귀에요.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날아와서 그것을 먹어버리려고 합니다. ‘저건 목사의 개인 의견일거야. 저것은 하나의 철학일 뿐이야. 저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래서 그 말씀이 내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그 말씀의 능력을 내가 경험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게 마귀가 하는 일이에요.

 

중세에 기독교가 타락했을 때 성경말씀을 사람들이 알아듣는 언어로 번역하는 일을 누가 가로막았는지 아십니까? 가톨릭교회가 체계적으로 그것을 금지했습니다.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은 라틴어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라틴어를 배울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성경뿐만 아니라 예배 집전까지 라틴어로 할 것을 고집했습니다.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도 못했고 예배를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해하건 이해하지 못하건 가톨릭교회는 라틴어로 모든 것을 집전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신앙이 자라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 중에 그 지역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을 가톨릭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해서 화형을 시켰습니다. 틴데일 같은 사람이 그런 경우입니다. 그는 라틴어 성경을 영어 성경으로 번역하다가 이단으로 몰려서 화형을 당했습니다. 교회사에는 그런 아주 이상한 과거가 있습니다. 사람이 성경을 읽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다면 무엇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 제일 먼저 한 일 중에 하나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 그것이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과 맞물려서 불처럼 성경말씀이 퍼져하면서 영적부흥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영적인 부흥은 하나님의 말씀과 비례한다고 보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널리 퍼져갈수록 부흥이 일어나고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쇠하면 그것은 영적인 쇠퇴를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녀들의 신앙이 자라기를 원한다면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귀중히 여기는 법과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법과 묵상하는 법과 하나님의 말씀에서 인생의 해답을 찾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되고 부모가 먼저 그렇게 하는 본을 보여주어야 됩니다. 자녀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수학, 논술을 가르치고 이것저것을 가르치는 그 열심만큼이나 그들의 영혼과 정신과 가치관과 도덕과 참된 인생의 방향을 심어주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상식으로 그것을 할 수 있습니까? 내 도덕 수준으로 그것을 할 수 있습니까?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아주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자기 자신을 PR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있는 예수님, 그 안에 계신 성령의 주시는 감동과 지혜를 전할 때 거기에 힘이 있고 생명이 있고 그것을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사람들의 믿음이 자라게 하시고 사람들이 거듭나고 회개하고 또 문제가 해결되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방법은 소위 디지털 시대라고 하는 지금이나 과거나 마찬가지에요. 사람의 믿음을 돕는 방법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기도, 말씀을 전하는 것, 성령을 의지하는 것, 이 방법은 예수님이 사용하셨던 방법인데 그것은 이십 일 세기의 우리도 똑같이 사용합니다. 디지털 시대라고 해서 이것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인류의 문화, 기술, 과학은 굉장히 발전했지만 사람의 신앙을 돕는 방법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이천년 전에 사용하셨던 방법을 오늘날 우리도 똑같이 사용합니다.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방법입니다마는 그러나 인터넷, TV를 통해서 설교든 예배를 접할 수 있지만 그것이 교회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입원을 하면 인터넷 설교가 여러분을 심방해 줍니까? 자녀가 결혼할 때 TV 설교자가 주례를 해 줍니까? 아니에요. 성경말씀에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에 장로들을 청하여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병들었을 때 누가 찾아가느냐? 교회의 장로, 감독, 목회자가 찾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친히 기름을 바르고 주의 이름으로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야 되는 것은 이천년, 삼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 오시는 날까지 이 방법은 여전히 효험이 있고 이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성경 말씀을 평이하게 가르치고 또 전하고 묵상하고 연구하는 방법 외에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방법이 없습니다. 중세의 교회 개혁자들은 말씀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 성도들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하는 것은 반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배당 안에 십자가를 포함해서 시각적인 것을 다 제거했습니다. 그래서 예배당에는 의자와 강대상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보고 믿는 것이 아니고 듣고 믿는다는 취지에 의한 것입니다. 사람이 듣고 믿는 것이기 때문에 보는 것은 필요 없고 오히려 그것은 사람의 영혼이 아니라 감각에 어필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만 치운 것이 아니고 파이프 오르간을 비롯한 예배당의 악기를 다 제거해서 찬송 부를 때 악기 없이 불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세요? 악기라는 것은 사람의 영혼보다는 감정에 어필하기 때문에 엉뚱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그들의 영혼을 감동시키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고 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데 음악이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심지어 화음을 넣는 것조차 금지할 때가 있습니다. 화음을 넣으면 음악이 아름다워지지요. 그런데 교회 개혁자들은 그 아름다움까지도 사람들의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고 오히려 영혼에 어필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지나친 면이 없지 않지만 그러나 그들의 취지를 이해할 수 있고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 하나로 족하다고 믿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사람을 거듭나게 하고 사람을 구원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 말씀만으로 족하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에 비교하면 이러한 개신교의 전통을 생각할 때 요즘 우리나라 개신교의 소위 열린 예배니 엔터테인먼트 위주의 예배는 너무 극단적으로 반대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각적인 효과를 아주 극대화하는데 여러분, 유치부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그렇게까지 하지 않습니다. 유치부 아이들을 이해하게 하기 위해서 인형극도 하고 그림도 보여주지만 그것은 그 아이들이 언어의 훈련이 아직 안 돼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다 큰 어른을 데려다가 말씀만으로 그들이 변화 받는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에 별의별 시각적인 효과를 동원해서 화려하고 재미있는 엔터테인먼트 위주의 예배를 드려야만 사람들이 믿음을 가질 수 잇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바울이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서 -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이라는 말이 등장한 것입니다. 이들은 유대인이고 안식일에 모였습니다. -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더니 그들이 요청하기를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이지만 첫 번에 다 믿은 것이 아니고 이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한 번 더 듣고 싶다, 한 번 더 해달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말씀을 되풀이 하실 때가 있었지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이것은 예수님이 말을 더듬은 것이 아니고 반복한 것입니다. 반복의 필요성을 보여준 것입니다.

 

여러분도 당장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고 낙심하면 안 됩니다. 당장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는다고 낙심하면 안됩니다. 일단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들어 놓으세요. 예수님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여섯 개의 돌 항아리, 여섯은 인간의 숫자입니다. 돌 항아리는 인간을 뜻합니다, 사람은 토기와도 같기 때문에. 그러므로 여섯 개의 물 항아리에 물을 채운다, 물은 성경 말씀을 상징합니다. 물을 사람 속에 가득 채워 놓으면 예수님이 어느 순간에 그것을 포도주로 바꾸십니다. 포도주가 뜻하는 것은 성령이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에 가득 채워 놓으면 적절한 순간에 예수님이 그것을 성령과 은혜로 바꾸셔서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하고 믿음의 능력을 경험하기도 하고 거듭나고 사람이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변화시키시는 분은 예수님이지 우리 자신이 아니에요.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더 나은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그릇에 말씀의 물을 가득 담아 놓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이 그것을 성령으로 바꾸셔서 거듭나게 하시고 은혜를 경험하게 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빌리 그래함 목사는 만약 사람들이 주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자신의 죄를 용서해주셨다고 하는 감격 속에서 살아간다면 세계 정신병원 환자의 90%, 깨져가는 가정의 90%, 그리고 부정적인 사회문제의 90%는 당장 해결된다고 확언했습니다. 이는 구원받은 감사와 감격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에게 큰 도전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도 구원받은 감사와 감격이 뜨거웠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박해하던 죄인 중에서도 괴수인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사, 복음전도자로 세워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받은 은혜 그대로를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이 은혜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사도 바울은 전도여행의 위험과 수고를 기꺼이 감수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생명조차 아끼지 않았습니다(20: 24). 실제로 바울은 생사를 넘나드는 매질과 돌팔매질을 당했어도 복음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청년 바보 의사라는 책에 안수현이라는 젊은이가 나옵니다. 그는 유명한 의사도 아니었고, 의학계에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33세에 세상을 떠나자 조문객 사천여 명이 줄을 잇고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환자의 생명을 자기 생명처럼 귀히 여기고 사랑했던 그의 언행이 사람들의 마음에서 마음으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던 것입니다. 더불어 그는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전도하기에 힘썼습니다. 예수님처럼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어놓았습니다. 안락한 삶을 버리고 병든 사람들의 육신을 치료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위해 바보처럼 헌신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닮은 그를 바보 의사라고 불렀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언제 하나님이 부르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은 오늘도 구원받은 감격 속에서 영혼구원을 위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어려워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충성하여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전도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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