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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공과와 설교

20190116 / 창 44:25-34 / 유다가 베냐민을 대신하겠다고 나섬

작성자천성교회|작성시간19.01.15|조회수513 목록 댓글 0

유다가 베냐민을 대신하겠다고 나섬

44:25-34

첨부파일 새벽예배20190116.hwp


25 그 후에 우리 아버지가 다시 가서 곡물을 조금 사오라 하시기로

26 우리가 이르되 우리가 내려갈 수 없나이다 우리 막내 아우가 함께 가면 내려가려니와 막내 아우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그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음이니이다

27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우리에게 이르되 너희도 알거니와 내 아내가 내게 두 아들을 낳았으나

28 하나는 내게서 나갔으므로 내가 말하기를 틀림없이 찢겨 죽었다 하고 내가 지금까지 그를 보지 못하거늘

29 너희가 이 아이도 내게서 데려 가려하니 만일 재해가 그 몸에 미치면 나의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하리라 하니

30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31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32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33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34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44:25-34 / 얼마가 지난 뒤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더러 곡식이 떨어져 가고 있으니 애굽으로 내려가 곡식을 더 사오라고 말씀하시더군요. 26) 그래서 그랬지요 우리가 애굽으로 내려가 곡식을 사가지고 오려면 막냇동생을 데려가야 한다고요. 막냇동생을 데려가지 않으면 애굽에서 곡식을 파는 총리 각하를 뵈올 수 없다고요. 총리 각하께서 분명히 그렇게 경고하셨다는 말씀도 덧붙였습니다. 총리 각하께서 전에 우리가 애굽에 내려왔을 때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지요. 27) 그러자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너희도 잘 알다시피 내가 그토록 사랑하던 아내 라헬이 겨우 두 아들을 낳지 않았느냐? 28) 그런데 그 가운데 한 녀석은 이미 내 곁을 떠나고 없다. 그 녀석은 밖에서 들짐승을 만나 찢겨 죽임을 당한 것이 틀림없지. 그 녀석이 집을 나간 뒤 돌아오질 않으니까 말이야. 29) 그런데 이번에는 너희가 하나 남은 이 아이마저 데리고 가겠다면 난 어쩌란 말이냐?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혹시 어떤 화라도 당한다면 이제 세상을 뜰 날도 얼마 남지 않은 내게 그런 슬픔이 또 어디 있겠느냐? 그런 슬픔을 가슴에 간직한 채 너무나 괴로워하다가 결국은 세상을 하직할 것 아니겠느냐? 그러니 얘들아, 그것만은 안 된다.' 30) 유다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토록 우리 아버지께서 이 아이를 애지중지하십니다. 그러니 설령 우리가 아버지가 계신 고향으로 곡식을 사가자고 돌아간다 해도 우리가 이 아이와 함께 오는 것을 아버지께서 보시지 못한다면 아버지께서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으셔서 곧 세상을 뜨실지도 모릅니다. 31) 우리 아버지는 머리가 하얗게 셀 정도로 나이 드셔서 이 아이와 같이 돌아가지 않으면 아버지께서 충격을 받으셔서 금방 돌아가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우리가 우리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하는거나 마찬가지이지요. 32) 제가 아버지께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이 아이를 책임지고 다시 데리고오겠다고요.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에는 목숨 걸고 책임지겠다고 말씀드렸지요. 33) 그러니 총리 각하, 제발 부탁입니다. 제가 막냇동생을 대신하여 총리 각하의 종이 되겠습니다. 그러하오니 제발 이 아이만은 꼭 돌아가게 해주십시요. 이렇게 간청드립니다. 이 아이가 우리 형제들과 함께 고향으로 올라가게 허락해 주십시오. 34) 이 아이를 두고 어떻게 우리만 고향으로 돌아가겠습니까?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만 돌아 오는 것을 보시고 충격을 받으셔서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그냥 세상을 떠나시게 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총리 각하, 하오니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두 손 모아 총리 각하께 빕니다.'

 

유다가 야곱에 대해 깊은 연민을 보이고 자신이 베냐민을 대신해 기꺼이 노예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유다의 간청은 사람의 동정심을 유발할 만큼 진지하고 진실해 보입니다.

 

유다가 계속하여 사연을 진술함(25-29) 유다는 나이가 많은 아버지에 초점을 맞추어서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나이가 많은 아버지가 전에 가장 사랑했던 자식을 잃고 경험했던 아픔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베냐민이 애굽에 종이 되어 잡혀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떻게 반응하실지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두렵다는 점을 중점적으로 부각시켰습니다. 유다는 요셉을 설득하기 위해 아버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요셉에게는 설득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는 만일 베냐민이 형제들과 돌아가지 않는다면 유다가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충격이 아버지께 임할 것을 익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팔려온 요셉도 참으로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냈지만, 가장 사랑하던 아들이 죽은 줄로만 알고 살았을 아버지를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왔습니다. 요셉도 지난 9년 동안 마음만 먹었으면 얼마든지 연락할 수 있었습니다. 유다를 통해 자신도 불효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어떻게 아버지가 막내 베냐민만을 의지하며 살게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유다의 마음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저 요셉과 베냐민밖에 몰랐습니다. 아내들 중에서도 라헬밖에 몰랐습니다. 그리고 유다는 아버지가 했던 뼈아픈 말을 회고합니다(27-28). 장성한 유다는 아비의 마음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유다가 베냐민을 대신하겠다 함(30-34) 베냐민을 살려 아버지께 돌려보내는 일이 급선무였습니다. 유다는 다시 반복하여 베냐민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나이 많으신 아버지는 충격을 받아 곧장 돌아가실 것이라고 했습니다(30-31). 유다는 오죽하면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이 아이를 데려왔겠느냐며 제발 이 아이를 보내 주고 자기를 종으로 잡아 두라고 간곡하게 부탁했습니다(32-33). 유다는 늙은 아버지를 죽게 하는 불효를 제발 저지르지 않게 해 달라며 요셉에게 애원하고 있습니다(34). 요셉을 종으로 팔자고 제안했던 유다가 이제는 거꾸로 자기가 요셉의 종이 되겠다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유다가 요셉을 팔자고 했을 때는 아버지의 심정에 대한 배려는 없었습니다. 다만 요셉을 편애하는 아버지와 요셉에 대한 미움만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유다는 아우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아버지가 죽을 것이고 그 경우 자기는 영영토록 아버지에게 죄를 짓고 아버지는 슬피 음부로 내려갈 것이기 때문에 베냐민을 대신해서 종살이 하겠다고 자원한 것입니다. 아버지와 형제에 대한 사랑과 마음이 자기의 생명을 담보할 만큼 유다는 변했고 성장했습니다.

 

적용: 베냐민 대신 종이 되겠다고 하는 유다를 세월이 성숙하게 했을까? 나는 믿음으로 성숙하고 있는가?

 

어떤 의사가 영국의 어떤 연로한 여성 그리스도인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하나님께 5파운드를 달라고 기도하면 받게 될까요?” 연로한 그 여성은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했습니다. “선생님은 웨일즈의 왕자를 소개받으면 당장 그에게 돈을 구하실 겁니까?” 그러자 의사는 아니오, 그 사람을 좀 더 잘 알 때까지는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기도 응답을 기대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조금 안 뒤에 하나님께 이것저것을 구하려고 합니다. 진정한 기도는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변화 시킵니다. 그리고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 설 교 >

중개자 유다와 요셉의 사랑

창세기 44:17-34

'유다'(Judha)라는 이름의 뜻은 '찬양함'이라는 의미입니다. 유다는 야곱의 첫째 아내 레아가 낳은 아들 중 넷째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수록된 다윗과, 그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보면 유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1:3).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왜 장자권을 가진 르우벤과, 차자인 시므온과, 제사장권을 지닌 레위의 혈통을 이용하지 아니하시고 넷째 아들인 유다의 혈통을 선택하셨을까?"라는 의문을 품게 됩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르우벤은 서모 빌하와 간통한 사실이 있으며(3522), 시므온과 레위는 여동생 디나 때문에 히위 족속을 전멸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선 성별(聖別)의 원칙에 따라 유다의 혈통을 통하여 이스라엘 왕손을 계승케 하셨습니다.

 

1. 섭리 중개자 유다(37:1-28)

요셉은 야곱의 열두 형제 중 가장 총명하고 인품이 뛰어난 자였습니다. 부모로부터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가 어릴 때 꾼 꿈은 장차 오실 메시야와 일맥상통하는 꿈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사의 핵심을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왕이 되는 꿈 때문에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은 나머지 죽음의 위기에 빠진 요셉, 메시야의 꿈 때문에 유대교 지도자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십자가의 고난을 담당하게 된 그리스도, 거기에는 분명 일치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형들의 시기와 질투로 인하여 빈 구덩이에 던져 죽게 되었을 때,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은닉한들 무엇이 유익할까? , 그를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고 우리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골육이니라 하매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3726-27) 하고 설득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유다가 중개자의 역할을 감당한 장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실현되어 가다가 장애물로 인하여 막혀 버렸을 때, 그것을 터주는 역할을 중개자 유다가 하였습니다. 만일 유다의 제안이 없었더라면 요셉은 구덩이에서 죽었을 것이며,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섭리를 차단하는 결과밖에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유다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서 요셉을 구해 주는 역할을 감당했기에 요셉은 살아서 애굽의 총리가 되었으며, 이것으로 인하여 야곱과 그의 가족은 살게 되고, 이스라엘 또한 구원받게 되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사와 섭리를 가로막는 자는 사단의 권세, 즉 사망과 죄악의 권세를 따르는 자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구원사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섭리가 차단되지 않도록 구원의 역할을 감당하는 자는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2. 혈통의 중개자 유다(38:1-30)

유다로부터 이스라엘 왕손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할 때 다윗과 그의 혈통을 이어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유다 순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유다에 이르러 손이 끊어질 위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장자 엘(Er)은 대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었으며, 엘의 동생 오난은 형수인 다말과의 동침을 거절하여 예정된 왕손을 이어 주지 못했기 때문에 역시 하나님의 징계로 죽임을 당하게 되었고, 셋째 아들 또한 죽을까 하여 형수인 다말과의 동침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장손의 맥이 끊어지게 될 것을 염려한 나머지 맏자부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가 딤나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평소에 입던 과부의 옷을 벗고 면박으로 얼굴을 가리고, 딤나 성문 입구에서 기다렸다가 유다를 만나서 유인했습니다. 술에 만취한 유다는 며느리를 창녀로 오인하고 정을 통했으며, 이로 인하여 다말은 유다의 씨를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현대 가정윤리관에 비추어 볼 때 유다와 다말의 관계는 결코 있을 수 없는 불륜과 부도덕에 지나지 않지만,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흔히 있었던 근친혼 제도와 씨받이 관습에 따른다면 범죄가 아니라 혈통 계승을 위한 현명한 처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족보에는 엄연히 유다와 다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다는 끊어진 왕손의 혈맥을 이어 준 중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말 같은 죄인을 신부로 삼아서 하나님의 자녀를 생산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의 역할을 선행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희생의 중개자 유다(44:18-34), 그리고 요셉의 사랑

창세기 44장은 우리에게 무척 감동을 주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구원사의 절정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요셉이 그의 청지기에게 "양식을 각인의 자루에 실을 수 있을 만큼 채우고 각인의 돈을 그 자루에 넣고, 또 내 잔 곧 은잔을 그 소년의 자루 아구에 넣고 그 양식 값 돈도 함께 넣으라."(441-2)고 명령했습니다. 이것은 베냐민을 인질로 잡아 두기 위함이었습니다.

계획대로 요셉은 종들을 보내어 양식을 지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형들과 동생의 곡식자루를 조사하게 하고, 베냐민을 자기에게 데리고 오도록 했습니다. 베냐민은 라헬의 몸에서 태어난 동복(同腹) 형제로서 요셉의 친아우였습니다. 그를 붙잡아 두면 그를 지극히 사랑하는 아버지(야곱)가 아들을 찾으러 애굽으로 올 것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나타난 요셉의 부모를 그리는 마음과 동생을 사랑하는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자비의 계시라고 해도 틀림없습니다.

요셉은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입니다. 우리들이 요셉에게서 깊은 감동을 받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요셉의 형들에 대한 사랑에서 많은 감동을 받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사랑을 하되 끝까지 사랑합니다. 이것이 요셉의 사랑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꼭 닮았습니다.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도 그를 사랑합니다. 이는 비교적 쉽습니다.

나에게 잘해 주는 데 잘해주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나에게 잘해주고 나에게 친절히 대해 주는데 어떻게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요셉의 사랑은 그런 사랑의 차원을 뛰어 넘습니다. 요셉의 사랑은 상대방의 태도나 조건에 따라 사랑하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혹 나에게 손해를 끼치고, 원수같이 대했을지라도 용서하고, 사랑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요셉에게서 배우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열심히 봉사도 하고, 헌신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속에 갈등이 있습니다. 사랑하면서도 고민하며 괴로워합니다. 우리에게 용서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바라기는 요셉을 통해 우리의 이런 모든 것들이 치유되고 회복되기를 소원합니다. 사랑은 회복을 가져옵니다.(21:15~)

우리들이 성경속의 요셉을 보면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교훈 받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대상과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가 상대방이 누구인지 따지면 사랑하기 어렵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대상이 누구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나의 사랑이 필요한지가 중요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의 반응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반응에 상관없이 내가(내편에서) 사랑하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른뺨을 치면 왼 뺨을 돌려대고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주고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갑니다. 이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그냥 사랑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세월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세월이 지나도 사랑이 변치 않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어야 진정한 사랑입니다. 요셉의 사랑이 그러했습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은 끝까지 변함이 없으십니다(13:1, 13:8). 우리들은 이 주님의 사랑, 요셉의 사랑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사랑을 하려면 우리에게 성령이 오셔야 합니다. 로마서 55절에 보면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마음에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우리)사랑은 바닥난 사랑입니다. (우리)힘으로 진정한 (아가페의)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하고 싶어도 안됩니다. 주의 성령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성령의 기름을 부어 주셔서 우리들이 이런 복된 (진정한, 아름다운)사랑을 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사랑은 언제나 우리를 승리로 이끕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4:8). 그리고 사랑만이 상대방을 변화 시킬 수 있습니다. 내 지식으로 안됩니다. 용서와 사랑만이 상대방을 변화시킵니다. 오늘 본문(44:18~)에 보면 요셉의 형들이 놀랍게 변화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동생(요셉)을 종으로 팔았던 형들이었는데, 이제 20년 전의 그 형들이 아닙니다. 형들이 변화된 것을 보면서 우리들도 희망을 갖게 됩니다. 우리들도 과거와 상관없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주님이 우리()를 만지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결국에는 예수님의 마음을 닮게 하십니다(32~34). 우리는 여기(본문)에서 예수님의 멋진 예표를 발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피흘리시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유다는 베냐민을 대신하여 종이 되겠다고 자청했습니다. 이 일은 바로 예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유다의 마음 역시 자비와 사랑으로 넘치고 있었습니다. 만일 고국에 있는 아버지가 막내 아들 베냐민이 인질로 잡혀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마음이 괴로워서 견딜 수 없을 것을 알고, 자신이 동생 대신 인질이 되겠다고 자원했습니다.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께 도로 올려 보내소서. 내가 어찌 아이와 함께하지 아니하고 내 아비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비에게 미침을 보리이다"(44:33-34).

부모, 형제를 위하여 종이 되겠다는 희생의 마음, 대신 죽는 한이 있더라도 형제를 구하겠다는 결심, 자신의 목숨보다 이웃의 생명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랑, 결국 요셉은 유다의 호소를 듣고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능히 대답하지 못하는지라"(45:3).

이상과 같이 유다는 생명의 대를 이어 주는 중개자였으며, 하나님의 섭리의 맥을 이어 주는 중보자였는가 하면, 하나님과 인간의 단절을 이어 주는 중개자였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은 이 땅위에 하나님의 섭리가 막히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실현되도록 중개자 역할을 담당하는 일입니다.

요셉은 형제들이 자기를 미워했는데, 자기 동생 베냐민도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지 않나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유다의 말을 듣는 중에 아버지 야곱을 사랑하고 자기 동생 베냐민을 사랑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얼마나 마음에 감동이 되었는지 요셉이 신하들을 다 내보내고 형들 앞에서 방성대곡을 하니 애굽 사람들에게도 들리고 바로의 궁중에도 들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형들의 말이나 태도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주로 대변을 유다가 했습니다.

 

유다는 책임을 질 줄 알았습니다.(33~34)

유다의 말은 책임을 지겠다는 말입니다. 요즘 무책임한 성도, 무책임한 공무원, 무책임한 지도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직분을 소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좋은 일은 먼저 하려고 하고 책임질 일은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려고 합니다. 책임질 사람이 없는 단체, 사회, 국가는 후진성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선진국가는 자기의 책임을 분명히 지는 사람들이 사는 사회입니다.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중개자가 되시시기 바랍니다.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고 책임을 지는 사람이 됩시다. 유다가 요셉을 감동케 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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