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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공과와 설교

20191119 / 왕상 22:13-23 / 진실한 예언

작성자천성교회|작성시간19.11.22|조회수528 목록 댓글 0

진실한 예언

왕상 22: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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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신이 일러 이르되 선지자들의 말이 하나 같이 왕에게 길하게 하니 청하건대 당신의 말도 그들 중 한 사람의 말처럼 길하게 하소서

14 미가야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하고

15 이에 왕에게 이르니 왕이 그에게 이르되 미가야야 우리가 길르앗 라못으로 싸우러 가랴 또는 말랴 그가 왕께 이르되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

16 왕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몇 번이나 네게 맹세하게 하여야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진실한 것으로만 내게 말하겠느냐

17 그가 이르되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에게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자기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18 이스라엘의 왕이 여호사밧 왕에게 이르되 저 사람이 내게 대하여 길한 것을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것을 예언하겠다고 당신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19 미가야가 이르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의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

20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그를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또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21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그를 꾀겠나이다

2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이르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의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꾀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23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

왕상 22:13-23 / [하나님의 예언자 미가야] 아합의 신하가 미가야를 찾아가서 타일렀다. `예언자들이 모두 왕에게 승리할 것으로 예언하였소. 그러니 그들과 다른 말은 하지 말아주시오. 당신도 그들과 똑같이 왕의 승리를 말해 주시오' 14) 그러나 미가야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여호와께서 확실히 살아 계심을 걸고 말하지만 나는 주께서 내게 시키시는 것만 전할 수밖에 없소!' 15) 미가야가 아합왕 앞에 나아가자 아합이 물었다. `우리가 길르앗라못 성읍을 공격하는 것이 어떻겠소?' 미가야가 대답하였다. `무조건 그 성을 치십시오! 틀림없이 승리하실 것입니다. 주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넘겨 주실 것입니다.' 16) 그러나 왕이 다시 물었다. `내게 맹세코 그렇게 말할 수 있겠소? 주께서 당신에게 하신 말씀이 과연 그것이었소?' 17) 미가야가 조용히 대답하였다. `이스라엘의 군대들이 목자 없는 양 떼처럼 온 산에 흩어져 있는 장면이 제게 보였습니다. 그때에 주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에게는 이제 지도자가 없다. 전쟁은 이미 끝났다. 저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라.' 18) 아합이 여호사밧을 보고 말하였다. `내 말이 맞지 않소? 저 사람은 언제나 저렇게 불길한 소리만 합니다!' 19) 그러나 미가야는 계속 말하였다. `주께서 내게 보여주신 것을 똑똑히 들으시오. 주께서 보좌에 앉아 회의를 주재하고 계셨습니다. 주님 앞에는 좌우편으로 하늘나라의 천사들이 모두 서 있었습니다. 20) 주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누가 아합을 꾀어서 길르앗라못을 치러 갔다가 죽게 할 수가 있느냐?' 그러자 천사들이 온갖 묘안을 다 내놓았는데 21) 마침내 어떤 영이 주님 앞으로 나와 `제가 아합을 꾀어다가 죽이겠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네가 무슨 방법으로 하겠느냐?'고 주께서 물으셨습니다. 22) `제가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내려가서 아합의 예언자들이 모두 거짓말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그 영이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충분히 그를 꾀어다가 죽일 수가 있겠구나. 어서 가서 그대로 하라!' 23) 임금님, 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주께서 임금님의 예언자들에게 거짓말하는 영을 내려보내셨습니다. 주께서는 이미 임금님을 죽이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을 죽이기로 작정하시고 선지자들의 입에 거짓말하는 영을 보내셨습니다. 진리가 어둠에 의해 감추어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심판입니다. 이 어둠 속에서 아합은 자기 귀에 듣기 좋은 말만을 좇아갑니다.

 

미가야를 부르라(13-16) 아합의 신하는 미가야에게 다른 선지자들이 모두 좋은 말을 하니 왕에게 좋은 말을 해주라고 권합니다. 미가야는 신하의 주문을 단호히 거절합니다. 그런데 그가 왕께 이르되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15)를 읽으면, 미가야의 예언이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과 똑같아서 잠시 어리둥절하게 됩니다. 이 말은 아합을 조롱하여 한 것입니다. “당신이 듣고 싶은 것이 이 말 아닙니까? 어차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도 아닌데 그냥 싸우러 가십시오.”라는 말입니다. 아합도 이를 눈치채고 진실을 말하라고 재촉합니다(16).

 

미가야의 예언(17-18) 이제 미가야는 자신이 환상을 통하여 본 것을 말하는데,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흩어져서 각각 평안히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미가야의 환상은 왕의 죽음을 암시하는 목자의 부재와 평화롭게 귀가하는 백성들의 모습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아합은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미가야의 예언을 듣고도 애써 무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은 닫혀있었습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말씀이 선포될 때,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열려있습니까? 닫혀있습니까?

 

천상회의 이야기(19-23) 본문의 천상회의 장면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사용해서, 거짓된 예언을 하게 하실 수 있나 의아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일을 이루시기 위해 거짓말을 하시거나, 거짓 선지자를 사용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거짓의 배후에는 사탄이 있습니다. 사탄은 거짓의 아버지입니다. 거짓말로 꾀겠다는 한 영은(21), 히브리어로 영입니다. 정관사가 있습니다. 바로 그 영은 거짓의 영, 사탄입니다. 욥기에서도 사탄이 하나님께 나아와 욥을 시험하겠다고 허락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탄은 사람을 꾀고 넘어뜨리는 악한 영입니다. 그러나 천하의 사탄이라도 하나님의 손아래 있습니다.

 

적용: 선지자 400명이 이야기를 했지만, 아합은 미가야의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었습니다. 선택은 아합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자유의지로 선한 뜻을 좇아 살도록 하셨습니다. 선과 악 중 오늘 나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부정한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은 엄중하게 꾸짖어야 합니다. 꾸짖어야 할 상대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상대방을 더욱 악화시킬 뿐입니다. 이것은 가식적이기 때문이거나 이해관계에 있는 상황일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면 악에 굴복하거나 가담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의 마음까지 타락시킬 것입니다. <관계와 신뢰에 대한 명언, 좋은 글>

 

< 설 교 >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것

열왕기상 22:13-28

본문 말씀은 아합 왕의 종말을 가져오게 할 전쟁의 기록입니다. 그는 남쪽 유대나라의 왕이자 그와는 사돈이 되는 여호사밧과 연합군을 조직하고 아람을 치기 위하여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왕이 군사를 모아 길르앗 라못 전쟁터로 나가기 직전 이스라엘에 있는 선지자를 불러 모으고 그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겠는지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게 하였습니다. 이때 아합 왕의 부름을 받고 나온 선지자가 무려 400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은 하나 같이 하나님께서 그 전쟁을 승리하게 해 주실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왕상 22;6).

그렇지만 오직 한 사람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는 전혀 다른 예언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합 왕을 죽게 하려고 왕의 마음을 충동하여 전쟁을 일으키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거기 모인 400명의 선지자들은 모두 거짓말하는 영에게 감동되어 왕의 귀를 흐리게 하는 자들이라고 폭로하였습니다(22). 한편 미가야는 왕의 부름을 받고 나오면서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고 하였습니다(14).

 

I. 선지자의 소임을 천명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면 싫어합니다. 아합 왕도 그의 권력에 아부하며 왕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선지자를 옆에 두고 있었습니다. 아합 왕의 부름을 받고 사마리아 광장에 나온 선지자는 400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은 모두 똑같은 목소리를 내며 왕의 마음을 흡족케 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에 미가야를 부르러간 사환도 이 사실을 알려주면서 선지자들의 말이 여출일구하여 왕에게 길하게 하니 청컨대 당신의 말도 저희 중 한 사람의 말처럼 길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13). 여기 대한 미가야의 반응이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는 것입니다.

 

1. 대세에 영합하지 않는 것입니다.

미가야에게 권면하는 사환은 이미 먼저 와서 왕에게 예언한 400명의 선지자는 한 목소리를 내어 길한 예언을 했다고 하였습니다. 한두 명이 아니라 400명이나 되는 많은 수의 사람들이 같은 말을 했는데 그 중에 미가야 한사람이 다른 목소리를 내어본들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혼자서 외롭게 소리 질러 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암시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미가야는 거기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선지자의 의중은 사람들의 욕구성향이나 인기에 관심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힘을 모아 주고 마음을 같이 해 준다하여도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면 그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진리 편에서 예수님의 길을 가는 사람은 외로운 소수에 불과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12:32).

 

2. 권력에 아부하지 않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을 때는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사명과 함께 엄청난 권세를 부여받게 됩니다(1:1). 이 권세는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신비로운 권세입니다(11:8). 그런데 때때로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이 권세가 세상 권세 자들과 충돌하게 됩니다. 그중에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무신론적 통치자들과 폭군에 의해서 하나님의 권세가 무시당할 때 하나님의 종들과 그 백성들은 수난을 당하게 됩니다. 이럴 때 약삭빠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을 망각한 채 세상권력에 아부하며 거기에 힘입어 편한 길을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언제나 이와 같은 심리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유혹하곤 합니다. 마태복음 4:8-9에 보면 예수님을 시험하던 마귀가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주면서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재판하던 빌라도도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줄 알지 못하느냐고 하며 타협하자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다고 하시며 이를 뿌리치셨습니다(19:10-11).

아합 왕의 부름을 받고 그에게 나아온 400명의 선지자들은 왕의 귀를 즐겁게 해주며 권력자와 함께 세상적 안일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3. 선지자의 길을 가겠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5:11-12).

예수님의 길을 가는 자 또는 선지자의 그 길을 가려는 자는 언제나 핍박과 고난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24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미가야는 저를 부르러 간 사환이 힘들고 외로운 길을 가지 말고 앞서 말한 400명의 선지자들처럼 왕의 귀를 즐겁게 하며 편한 길을 가자고 하였으나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소임을 다하며 선지자의 길을 가기 위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1:10).

 

2I. 계시에 대한 확신을 피력한 것입니다.

미가야는 먼저 와 있는 선지자들에게서 왕이 원하는 예언을 다 들었고 왕의 마음이 거기에 고무되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주권자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1. 계시와 환상의 지혜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보고 먼저 아는 자입니다. 선지자를 선견자(先見者)라고 하는 것은(삼상 9:9), ‘먼저 보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이 어린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시고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고 물었습니다(1:11). 그때 예레미야는 살구나무 가지와 또 끓는 가마가 북쪽에서 기울어지는 것을 본다고 대답하였습니다(1:11-13). 하나님께서 그 종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시고 또 마음 눈을 밝혀 주어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고 알게 하십니다(1:17-19).

그렇지만 때때로 선지자 중에는 그 보는 눈이 정확하지 못하거나 그 본 것을 바르게 판단하지 못하여 행동을 그르치는 수가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14:1).

여기 나오는 400명의 선지자들도 하늘의 환상과 계시를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그들이 받은 계시는 거짓 영들이 꾸민 거짓 계시였습니다. 22-23절에 보면 내가 나가서 거짓말 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꾀이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고 하였습니다.

 

2. 언약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깨어 있는 성도는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영혼의 감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도에게 있어서 영적인 감각이 둔하거나 계시의 분별력이 흐려지게 되면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든지 이해할 수 없으므로 혼란을 겪든지 낙심하게 됩니다(42:1-3).

아합 왕과 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갈망하여 선지자들에게 물어보았으나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예언을 해주었고 그것을 기쁨으로 받았다가 낭패를 당했습니다. 또 거기에 부화뇌동하던 400명 무리들은 신빙성이 없는 계시를 가지고 사실인 것처럼 믿고 있었습니다.

오늘도 계시의 확신도 없고 되어진 사실의 증빙도 없이 덩달아 열심만 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미가야의 경우 모든 사람이 아니라 하고 더 큰 박해가 기다리고 있어도 여호와께서 제게 말씀하신 그 사실만큼은 너무나 확실하고 변개될 수 없는 것이기에 이를 증거하며 고수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난파선에서 절망하는 승객들에게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하고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뢰성을 역설하였습니다(27:25).

 

3. 진리파수의 의지를 천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확신이 있고 또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그 내용을 전해야 되는 사명을 아는 사람은 어떤 난관이 있어도 이를 실천하고야 맙니다. 물론 아합 왕 같은 불신앙의 권력자가 버티고 있고 거기에 덩달아 춤을 추는 거짓 선지자의 무리들까지 힘을 합하고 나오게 되면 그에게 어떤 박해가 올 것은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전의 의지를 가지고 선한 싸움을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가야는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해 주신 그대로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같이 산에서 흩어졌다고 말했습니다(17). 그는 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저로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라고 말했습니다(20). 이어서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하고 낱낱이 밝혀 주었습니다(23). 이에 노발대발한 아합 왕은 이놈을 옥에 가두고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로 먹이라 하라고 하였습니다(27).

어느 때나 진리를 파수하는 사람은 이를 수행하다가 감옥에 들어가는 일을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시드기야 왕에 의하여 감옥에 갇혔고 또 시위대 뜰에 있는 구덩이에 던져지기도 하였습니다(37:16, 38: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쇠기둥과 놋성벽이 되어 후세에 증거로 삼는다고 하였습니다(1:18-19).

 

3. 역사인식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그리스도인은 올바른 사관(史觀)을 가지는 사람입니다. 역사는 도도히 흐르는 물과 같아서 임의대로 바꾸거나 역류시킬 수 없습니다. 신령한 안목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인이라는 사실과 하나님만이 선과 악의 기준이 된다는 진리를 올바로 인식합니다. 미가야가 아합 왕의 권력과 다수의 세력에 맞서면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만을 주장하는 이유도 유구한 역사의 진리를 알기 때문입니다.

 

1.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원리입니다.

옳고 그른 것의 판단은 사람의 숫자로 결정하거나 권력의 힘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때때로 인위적인 방법에 의하여 바른 것이 거짓에 짓눌리거나 비진리가 진리로 둔갑하는 경우가 있지만 결국은 참된 것과 거짓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맙니다. 역사는 사필귀정을 거울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미가야는 대세에 밀려 고생의 떡과 물을 먹을 수밖에 없었지만 주권자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신뢰하며 지켜보았습니다. 그가 아합 왕의 명에 따라 부윤 아몬과 왕자 요아스에게로 끌려가 고생의 떡을 먹고 있는 동안 그의 입을 통하여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곧 아합 왕이 아람 군사가 쏜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습니다(왕상 22:34-35). 그 순간 400명이나 되는 거짓 선지들이 예언한 말이 거짓으로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동시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그것만을 증거한 미가야의 예언은 진리로 확인되었습니다.

 

2. 순간보다 영원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미가야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파수하기 위하여 순간의 고난을 당했으나 결국 그는 말씀과 함께 영원한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순간을 살기 위해 영원을 포기하는 사람이 있고, 영원히 살기 위해 한순간의 고난을 감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에서의 경우는 한순간의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자자손손 영원히 누리게 될 장자권의 기업을 포기한 사람입니다(12:16-17).

한편 사도 바울의 경우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모든 좋은 조건들을 순식간에 배설물처럼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너무나 고상했기 때문입니다(3:8). 그는 또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고후 4:17-18).

 

3. 사람의 생애는 하나님 앞에서 평가됩니다.

히브리서 9:27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말씀하신 것처럼 죽는 것도, 심판 받는 것도 하나님만이 정하시는 주권입니다. 다만 인간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시간에 하나님께로 가야되는 것과 그리고 자기 삶의 실적을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는 다는 사실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한 일을 놓고 심판 하시는 기준을 성경에서 분명하게 제시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6:27에는 각 사람의 행한 일을 가지고 심판한다고 하였습니다. 말라기 3:16에는 하나님 앞에 있는 기념책에 수록된 내용을 가지고 평가한다고 하였습니다. 삶의 목표를 오직 하나님께 두고 있는 사람은 미가야처럼 모든 일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것에다 명줄을 걸고 사는 것입니다. 결국 그 말씀이 기준이 되어 자기 인생이 평가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사회의 점술 기승! 사술(邪術)인가 사술(詐術)인가?

조덕영 목사/ 참기쁜교회, 한국창조과학회 전 대표간사

오늘날 초능력을 믿는 사람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예언자 중 진 딕슨이라는 여자가 있다. 그녀는 19세기말, 미국의 위스콘신주에 있는 한 조그마한 마을에서 핀커드라는 사람의 딸로 태어났다. 그가 예언이라는 초능력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한 집시 여인으로부터 수정 구슬을 선물 받은 이후부터라고 한다.

그가 맞추었다는 유명한 예언 중에는 중국이 공산화가 될 것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1944년에 주장한 예언이었는데 실제로 중국은 1949년에 공산화가 되었다. 1961년에는 미국의 유명한 배우 마릴린 먼로의 자살을 예언하여 아주 유명해지게 되었다.

또한 그녀는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과 인도의 마하트라 간디, 인도수상 네루의 죽음도 예언하였다고 알려진다. 소련이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 것이라는 것도 그가 맞추었다고 전해진다. 오늘날 진 딕슨보다 더 권위 있고 잘 알려진 예언자는 없다.

그녀는 ?나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위하여 나에게 예언의 은사를 주셨다고 믿는다. 나는 그분의 뜻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거침없이 이야기하는가 하면 ?이사야와 세례 요한을 통하여 역사 했던 영이 이제는 나를 통해서 역사한다?고까지 하였다. 하나님은 그녀에게 2037년까지 일어날 세상의 일들에 관하여 계시하였다는 주장도 폈다.

그렇다면 이렇게 세상의 커다란 사건들을 연달아서 예언한 그녀는 성경에서 말하듯 정말로 진실한 예언자요 선지자였을까? 그녀는 줄곧 자신의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영적인 분별력이 없는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그대로 믿는 경향도 있다.

성경에 보면 과거부터 하나님의 예언자라고 자처하는 거짓 선지자들은 어느 시대에나 많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성경 예레미야 2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너희가 헛된 예언을 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듣지 말라?고 경고하는 말씀이 나온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사람을 속인다고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신다.

예레미야 28장에 보면 하나님이 택하신 선지자였던 예레미야도 진실과 거짓을 잘 구별하지 못하여 거짓 선지자 하나냐의 말을 듣고 그를 피해 도망간 것을 볼 수 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하나냐가 거짓 선지자임을 알 수 있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예언이나 능력을 구별할 수 있는 첫번째 기준은 무엇일까? 아주 간단한 한 가지 방법이 있다. 거짓을 포함하고 있는지를 분별하는 것이다. 진 딕슨의 경우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예언이라는 것들이 별로 놀랄 만한 것도 아니며 지극히 상식적인 예측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녀는 앞으로 일어날 어떤 비극적 사실에 대해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더욱이 그녀는 자신이 한 예언의 내용을 훗날에 바꾸기도 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엉뚱한 사람이 20세기말이 되기 전에 세상의 종교를 하나로 묶을 것이라고도 하였다. 그런데 20세기는 이미 끝나 버렸는데도 그런 조짐은 조금도 보이지 않고 있으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20세기 세상에서 가장 뛰어났다는 이 예언자의 말이 얼마나 실수투성이였는지 금방 알 수 있게 된다. 대표적인 그녀의 그릇된 예언들을 몇 가지 알아보자.

 

1. 그녀는 제3차 세계대전이 1954년에 일어난다고 주장하였는데 아직까지도 그런 상황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2. 베트남 전쟁이 1966년에 끝날 것이라고 예언하였는데 이 전쟁은 1975년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3. 19681019, 딕슨은 케네디 대통령의 부인 재클린이 재혼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바로 그 다음날 재클린은 그리스의 선박 재벌 오나시스와 결혼하여 큰 망신을 당하였다.

4. 1970, 딕슨은 쿠바의 독재자 카스트로가 곧 물러나서 쿠바를 떠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는데 지금까지도 카스트로는 세계 최장의 독재자로 남아 쿠바를 지배하고 있다.

5. 러시아가 인간을 최초로 달에 착륙시킬 것이라는 예언도 하였으나 미국이 그보다 먼저 1969년에 최초로 유인 우주선을 달에 착륙시켜 딕슨을 부끄럽게 만든 예언이 되어버렸다. 러시아는 아직도 달에 사람을 착륙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들 예언 중 몇 가지는 확률이 반반이나 되는데도 딕슨은 거듭해서 실수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통계적으로 잘 분석한다면 딕슨보다는 보통 사람들이 위에 예로 든 것들을 더 잘 예측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직도 오늘날 세계 제1의 예언자로 추앙 받고 있으니 이들 점쟁이들의 예언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무 맹랑한 것인가!

진 딕슨 여인을 포함하여 모든 점쟁이들의 특징은 살인이나 홍수, 자살, 화재 등과 같은 불길하고 비극적인 사건들을 주로 예언한다. 이에 대해 하나님의 일과 악령의 일을 잘 구별하는 신학자요 목사인 독일의 쿠르트 코흐 박사는, 이런 신비술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므로 복된 소식보다는 불길한 것들을 전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불길한 예언들조차도 거짓이 많이 섞여 있는 것이다.

2002년 우리 나라는 월드컵공동개최와 중요한 선거를 잇따라 맞게 된다. 수많은 점쟁이들과 심지어 승려와 기독교 점쟁이(?)들까지 합세하여 온통 이 나라가 역술인들의 예언이 난무하는 혼탁한 지경에 이르고 있다. 서울의 점집들은 말할 것도 없고 삼각산, 계룡산과 대구 팔공산 등의 자락에는 온통 점을 치려는 사람들과 치성을 드리는 사람들이 꾸준히 늘고 있다는 소식이다. 더구나 언론들은 무분별하게 이들을 취재하고 나섬으로써 이들의 활약상(?)을 크게 부추기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의 점은 정확한 걸까? 지난 해 국내 유명역술인들의 예언을 보면 2001년 새로운 강력한 정당이 7개 새로 생긴다거나, 현대 그룹의 상승, 김정일의 남한 방문 등이 있다. 유명 역술인들이 자신 있게 말한 중요한 예언들이 모조리 엉터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명성황후를 주신(主神)으로 모시고 있다는 S씨는 ?박찬호의 20승 목표달성이 무난하다?고 예언했으나 박찬호는 15승에 머물렀다. 다시 한번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된다는 예언이나 경의선 개통, 이산가족 서신 왕래 자유화, 개별방문 등의 예언은 모두 희망사항이 되어 버렸다. 가능과 불가능만을 놓고 하는 예언일 경우 그 확률은 50%나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조리 빗나갔으니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성경은 참 선지자를 이렇게 구별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18:21~22).

즉 성경은 누구든지 단 한번만이라도 그릇된 예언을 한다면 그는 바로 거짓 선지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참 선지자는 미래를 예언하는 데 있어 어떤 실수도 범하지 않았음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유명한 예언자들의 예언을 1년에 두 번씩 싣는 미국의 <내셔널 인콰이어러>지라는 잡지가 있다. 그 잡지에서 1976년부터 1979년까지 가장 유명한 10사람의 예언의 적중률을 조사한 보고서가 있었는데 364개의 예언 중 틀린 예언이 360, 맞은 예언이 4개에 불과하였다. 즉 적중률이 1.1%였다.

성경은 능력이나 예언에 대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과 악령이 조종하는 것 두 가지가 있다고 가르친다.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있어 예언의 빗나감은 곧 죽음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목숨을 걸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선포하였으나 능력이나 예언은 사랑과 공의와 절제와 겸손함으로 행해져 결국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악령이 조종하는 능력이란 항상 하나님의 영광이나 섭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별 쓸모가 없는 하찮은 예언들이거나 자기 자신을 높이는 데 사용되고, 더욱이 속임수와 거짓예언을 동반한다. 바로 앞에서 알아본 것처럼 오늘날 초능력이 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나 신비주의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그런 현상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제 너는 젊어서부터 힘쓰던 진언과 많은 사술을 가지고 서서 시험하여 보라 혹시 유익을 얻을 수 있을는지, 혹시 원수를 이길 수 있을는지, 네가 많은 무략을 인하여 피곤케 되었도다. 하늘을 살피는 자와 별을 보는 자와 월삭에 예고하는 자들로 일어나 네게 임할 그 일에서 너를 구원케 하여 보라. 보라, 그들은 초개같아서 불에 타리니 그 불꽃의 세력에서 스스로 구원치 못한 것이라. 이 불은 더웁게 할 숯불이 아니요 그 앞에 앉을 만한 불도 아니니라?(47:12~14).

또한 레위기(19:31)나 신명기(18:9-12)에도 하나님께서 이들을 얼마나 혐오하시는지를 알려주고 경고하고 있다.

어떤 신통한 노 승려의 경우 그를 만나려고 정치인들이 줄을 서는 가운데 가톨릭을 믿는 정치인과 기독교 초신자, 심지어 기독교 장로인 정치인까지 줄을 섰다는 소식이다. 정치인들이 한번만 꼭 만나고 싶다는 이 노 승려를 만났던 성남의 어느 국회의원이 그를 만난 후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점괘를 받았던 적이 있다. 갑자기 그의 선거 운동을 돕기 위해 무당들이 모여들었다. 자기들이 모시는 신께서 이 출마자를 도우라는 명령을 내렸단다. 이들의 도움으로 당선되었다는 간증(?)은 시사하는 바가 너무 크다.

올 한해 그리스도인들은 제발 점치는 일만큼은 하지 말았으면 한다. 더구나 예수이름으로 점치는 사람들은 더욱 가증한 사람들임을 잊지 말자. 하나님이 가장 진노하시는 일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일인 것이다.

(월간 <교회와신앙> 20022월호)

 

 

 

 

 

내부의 거짓, 도래하는 진실(김윤동)

예레미야 28:1-11

본문에 나오는 예레미야의 목에는 지금 나무 멍에가 채워져 있습니다. 멍에란 것이자발적으로 멘다면 그것은 멍에가 아닐 것입니다. 메고 싶어서 멘 게 아니라, 야훼 하나님이 시켜서 어쩌다보니 메어져 있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메라고 하여 멘 멍에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생각나는 그런 것들이 하나씩은 있지요. 예레미야는 오늘 왜 멍에를 메고 있는 것일까요? 바로 앞장에서 예레미야에게 멍에가 메어진 상황이 나옵니다.

오늘 읽은 본문 28장에 한 장 앞선 27장에서는 이 멍에에 대한 강력한 야훼의 촉구가 등장합니다. 야훼는 예레미야에게 나무 멍에를 메는 상징행위를 명령합니다. 이 멍에는 곧 바벨로니아 왕 느부갓네살 왕에게 부여된 야훼 자신의 멍에이며, 이것을 메지 않는 민족이나 나라가 있으면, 전쟁과 기근과 염병으로 처벌해서라도 바빌로니아 왕에게 복속시키겠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곧 패망하고 말 것이며, 어떤 예언자나 점쟁이가 만약 바빌로니아에게 망할 일은 없을 것이다, 반드시 이스라엘이 승리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바로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2717절에서 야훼는 자기만을 섬기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빌로니아왕을 잘 섬기라고까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까지의 전형적인 예언자라면 더 이상 하나님 섬기기를 미루지 말아라, 우상을 척결하고 하나님만 섬기도록 해라. 야훼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다른 나라를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이게 모름지기 야훼의 예언자였을 것입니다. 왜 야훼는 바빌로니아 왕을 섬기도록 예레미야에게 신탁을 내렸을까요?

예레미야를 설명하고 있는 여러 단어가 있겠는데요. 일단 여호야킴과 시드키야 치하에서 주로 활동했던 유다국의 예언자라는 점입니다. 시드키야가 유다국의 마지막 왕이니, 엄청나게 격동의 시기를 살아갔던 사람이지요. 요시야의 개혁과 또 그의 죽음 이후에,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그리고 시드키야 이렇게 네 명의 왕이 세워지고 끌려가고 다시 옹립되는 것을 반복하면서 하룻밤 사이에 세워졌다가도 하룻밤 사이에 무너지는 허무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이런 와중에 신탁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일 겁니다. 아침과 저녁으로 달라지는 상황 속에서 말을 전하는 예언자라는 직분은 그만큼 아침부터 저녁까지 예민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냐와 예레미야의 싸움

본문으로 돌아와서 예레미야 28장에서는 하나냐라는 또다른 예언자가 등장합니다. 기브온 사람 앗술의 아들이라고 하는 예언자입니다. 이 하나냐는 야훼의 신탁을 전하는 아주 일반적이고 전형적인 공식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라고 전합니다. 이건 내 생각인데,” 라고 머뭇거림이 없이 권위있는 예언자들의 신탁인 것처럼 천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냐는 실망스럽고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 상황에 매우 고무적인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야훼가 바빌로니아 왕의 멍에를 꺾었다고 말이죠.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이 이 유다국으로부터 빼앗아간 모든 것이 야훼에 의해 돌려올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고 유다 백성들의 마음 속에 있었던 비운의 왕’, ‘끌려가버린 왕여호야김도 돌아올 것이고, 모든 포로들이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약소국이었던 유다국과 유다 백성들, 그리고 심지어 시드키야 왕까지 그런 상황을 얼마나 고대했겠습니까? 사실 이런 메시지는 요시야왕이 전투에서 패배하고 죽은 이후부터 이어져 온 암하아레츠들의 오랜 염원 중 하나였을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언자 예레미야가 등장합니다. 바로 한 마디로 그 말에 아멘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정말로 바라오!’ 라고 이야기합니다. 나무 멍에를 맨 체 바빌로니아왕에게 무릎을 꿇고 납작하게 엎드릴 것을 촉구한 예레미야로서는 보통 자존심이 상한 일이 아닐텐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는 자기의 메시지와 정반대로 희망찬 내일을 이야기한 하나냐 앞에서 자신 또한 야훼의 신탁이 아니었으면 그런 희망의 메시지를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투로 담담하게 말을 이어갑니다. “주께서 그렇게만 하여 주신다면, 오죽이나 좋겠소? 나도 그렇게 되기를 정말로 바랍니다.”라고요. 하지만, 하나냐에게 예언자란 모름지기 어떠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합니다.

고대로부터 있어왔던 수많은 예언자들은 대단했던 왕국들, 제국, 그리고 민족들에 맞서 전쟁과 기근, 그리고 염병이 닥칠 것을 예언했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언자는 대단했던 제국의 안녕을 빌어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제국들이 원하는 말이란 무엇입니까?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다! 앞으로는 어떤 나라도 우리 제국을 넘보지 못할 것이다. 물질적 번영과 풍요로움은 영원할 것이다. 라는 말들이죠. 하지만, 예언자들은 어떠했느냐? 목에 칼이 들이닥치는 상태에 있더라도 재앙을 이야기하고, 사람들이 절대 오기를 바라지 않는 기근과 염병을 예언했다는 것입니다.

이건 예언자가 기층 민중들이 정말로 전쟁, 기근, 염병으로 멸망하기를 바라서가 아니지요. 어느 시대든 권력은 폭주하였고, 권력에 의해 신음하는 자들이 있고, 어느 권력이든 배제와 차별의 패러다임으로 통치가 이뤄지고 있음을 고발하고 그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제동을 걸기 위해서는 그들이 말하는 영원한 평화, 영원한 번영이란 말이 얼마나 허튼 말인지를 고발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엄중하게 9절을 내뱉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읽으면서 제가 가장 오랫동안 눈길이 머물렀던 구절이기도 한데요. 우리 함께 읽어보면 좋겠습니다.

평화를 예언하는 예언자는, 그가 예언한 말이 성취된 뒤에야, 비로소 사람들이 그를 주께서 보내신 참 예언자로 인정하게 될 것이오.”

생각할수록 어찌 보면 애매한 말이기도 하면서 아주 무거운 진실을 담고 있는 말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에 있는 8절과 비교한다면 이렇게 이야기해야 할 것도 같습니다. “선배 예언자들은 모름지기 참 선지자란 전쟁과 기근, 염병을 예언해서 엄중하게 왕과 백성을 꾸짖어야 한다고 가르쳐왔소. 하지만, 당신은 평화와 희망을 이야기하다니! 거짓 선지자인 것이 틀림 없소!”라고 해야 대구가 이뤄질 것 같은데요. 예레미야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평화를 예언하는 자는, 그가 예언한 말이 성취되어야만 그 때서야 사람들이 인정해줄 것이오. 라고 이야기합니다. 평화를 이야기하려면, 희망을 말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엄중한 진실의 무게를 감당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성서해석에서는 이 두 구절을 오로지 평화와 축복만 이야기하는 거짓 선지자와 재앙을 이야기하여 회개를 촉구하는 참 선지자의 대비를 말하려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지만, 저는 그렇게 읽지 않았습니다. 8절에 나오는 선지자라는 단어와 9절에 나오는 선지자의 원문도 똑같은 나비(nabi)’를 쓸 뿐더러 오히려 두 구절은 선지자론에 대한 연결로 읽어야 더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8절과 9절을 연결하여 제가 첨언을 하여 읽어보면, 선지자는 재난, 재앙을 이야기해왔다. 하지만, 더 나아가 그 재난 이면에 있는 야훼의 진정한 뜻, 평화를 논하는 것은 더 많은 것이 요구된다. 이렇게 읽을 수 있겠습니다. 재난을 예언하는 것은 어떤 자연적인 징조나 국제적인 정세, 그리고 사회의 움직임을 읽을 수 있다면 어느 정도는 그 예측이 가능할 것입니다. 재난을 이야기하는 선지자는 모든 것에 한 마디씩 거드는 비평가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자기 지식을 자랑으로 내세우는 사람들, 곧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 우리 사회의 불안한 요소는 이러저러한 것이다, 여기저기서 비롯된 것이라고 떠드는 사람들 말고! 진짜 평화라는 진실을 말하려는 사람들은 그 말이 성취된 후에야 평가를 받을 만큼의 아주 요원한 일이다. 그걸 감당할 수 있겠느냐?’라는 말로 저는 읽습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 시절부터 활약했던 아주 오래된 예언자였습니다. 하나냐라는 선지자도 얼마만큼의 명망을 얻었던 선지자였는지 모르겠지만, 예레미야는 앞부분에 나온 것처럼 가족들에게도 버림을 받고, 살해의 위협을 넘기는 등 수많은 고초를 겪으면서 그날까지 살아 남은 선지자였습니다. 한편으로는 아무렇게나 외치는 타 선지자에 대한 연민이었을 수도 있고, 아주 칼날 위를 걷는 듯이 예민하고 엄중한 진실을 다루는 선지자가 대중의 지지와 환호를 한 몸에 얻기 위해 희망과 평화를 마구잡이로 선포하는 선지자를 향해 우아하지만 단호하게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10절에서 하나냐는 결국 이런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경청하지 않았습니다. 더 자극적이고 강도 높은 퍼포먼스를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메어 주신 예레미야의 목에 있던 나무 멍에를 자기가 꺾어 버렸습니다. 지금 메시아를 보내주어서 바로 문제를 해결해도 모자랄 판에 패배주의가 웬 말이냐! 하면서 말이죠. 대중들은 열렬히 환호했습니다. ‘진실이라고는 하지만, 보고 있기에는 너무나 불편했던 눈엣가시 같았던 그 야훼의 멍에가 파괴되어버렸습니다.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결국 하나님은 하나냐의 이 행동과 말에 분노하였고, 결국 예레미야에게 나무 멍에가 아닌 쇠멍에를 다시 메게 한 후, 하나냐에게는 죽음의 처벌을 내렸습니다.

 

거짓과 진실의 문제

 

이 본문을 통해 거짓과 진실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연구소는 지난 5, 한국민중신학회와 공동으로 탈진실 post-truth 시대, 개신교는 어떻게 혐오를 생산하는가?” 라는 맑스코뮤날레 발표를 진행했고, 그 후속으로 진행했던 탈진실시대, 역사적 진실은 어떻게 생산되는가?” 하는 역사 강좌도 잘 마쳤습니다. 한국 신학과 한국 교회의 이상한 징후들을 오랫동안 관찰하고 이상징후를 포착해 오던 연구소는 혐오담론을 생산해내는 페이크뉴스에 관한 의제를 이미 2017년부터 제시하기도 했고, 지금도 그 문제를 탐구중입니다.

유독 진실과 거짓, 참된 것과 허위의 문제를 탐하는 분야가 바로 종교인데, 거기에다 역사적으로 이단과 정통의 갈등이 여느 종교보다 첨예했던 기독교, 개신교라서 그럴까요? 최근 한국의 교회들을 중심으로 하는 극우세력들은 동성애, 이슬람, 난민, 북한, 정치권 등과 관련한 가짜 뉴스를 생산해내는 공장의 진원지로 밝혀지기도 했고 지금도 그 상황은 진행중입니다.

이전에는 이것이 바로 진실!”이라고 이야기하면 모두가 그 곳을 주목했습니다. 그 진실이라는 것의 실체를 모두가 인정하던 시기가 있었지요. 이 세상의 진실이 탄압받고 매맞고 혹독한 고문을 당하던 그 시절에는 반드시 진실은 승리한다.’ 이 한 마디를 붙들고 하루하루를 견디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진실의 위상이 엄청나게 추락했습니다. 정보는 과거에 비해 기하급수적인 속도로 공개되어 가고 있고, 누군가에 의해 독점되거나 엘리트들에 의해 과점되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정보와 진실이 공유라는 깃발을 향해 전진 또 전진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진실의 위상이 이렇게 추락한 것을 한탄하고 다시 진실의 위상을 복원하자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애초에 진실이란 건 없었던 것이니 다 허무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둘 모두 우리의 길은 아닙니다.

진실은 구성된다는 게 진실입니다. 진실이라고 이름 붙일만한 뭔가의 동일체, 그러니까 뭔가 우리가 떠올려볼 때, 마치 무흠하고 순수하게 결정체로 존재하는 보석의 원석 같은 것이 진실이 아니라, 다양한 사건과 문화 속에 놓여져 담론의 각축장 안에서 때로는 휩쓸리고 때로는 깎여 나가고 때로는 윤색되고 심지어 궤도에서 이탈되어버리는 것이 진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진실을 우리는 금과옥조처럼 집안에서 가장 안전한 어느 금고 같은 장소에 묻어 둔다던가, 또는 신전의 가장 중심에 놓고 숭배하는 행위는 진실을 더 훼손시키는 일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나냐는 왜 실패했습니까? 첨부터 거짓을 의도해서 그렇습니까? 거짓 선지자가 되기로 마음 먹고 세상에 복수하기 위해 그런 희망을 말했던 건가요? 아닙니다. 진실의 본질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의 보통 생각들을 그저 대변하였기 때문에 틀린 방향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내부의 논리 안에서만 상상하고, 내부의 이익 안에서 말을 짜맞추었기 때문입니다. 내부에 아첨하기 위해서는 말을 맞추어야 하는데, 그 함정에 하나냐는 휩쓸리고 말았습니다. 말이란 것은 희한하게도 그 내부의 논리의 정합성만 따르면, 그 말 자체는 화려하고 유려해질지라도 대개는 진실에서 멀어져 갑니다. 사회 일반 시책 또는 정책의 장에서도 말의 앞뒤만 따지고 불순물처럼 보이는 것들을 제거하는 논리의 합만 추구하게 되면 그 말을 둘러싼 갖가지 삶의 정황들이 제거되고, 감춰진 진실은 잘려나가기 마련입니다.

, 내부에 갇히면 희한하게도 맞는 말은 하면 할수록 결국 진실이 아닌 말로 변합니다. 왜냐하면 진실은 하나의 얼굴이 아니라, 다양한 진실들의 각축이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곳에 놓여 있어야 할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고인 물은 썩고, 흐르는 물만이 그 청정도를 유지하듯, 진실이 굳은살처럼 굳어지면, 한 달란트 받은 종이 그 소중한 것을 땅에다 묻어버려서 그것이 전혀 흐르지 않게 된 상태가 되면, 누구도 하나냐처럼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자기의 길을 갔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말의 권위를 획득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내 말이 무조건 맞아!” 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순간까지 지식을 얻고 자리를 얻고 자본을 얻으면 되는 것인가요? 물론 그런 방도들도 궁리해야겠지요.

그러하지만 그 모든 노력에 앞서 저는 오늘의 본문 속에서 그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11절에서 하나냐 선지자와 설전을 마치고, 수모를 겪은 예레미야의 마지막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자리를 떠났다. 라고요. 개역개정과 영문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길을 갔다. 두 말은 일맥상통합니다. 그 자리를 떠나는 것과 자기의 길을 가는 것은 한 행동이면서 두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신탁을 전하고도 또 모진 말과 수모를 겪은 예레미야는 회한에 잠긴 것 같습니다. 이 일을 계속 해야 하나, 내 신탁이 잘못된 것일까, 이 깊은 어둠은 또 언제 끝이 날까 하고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그렇게 떠났고 다시 자기의 길을 갔습니다.

3시대 그리스도교연구소는 아직도 그 깊은 밤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려고 합니다. 여기다!라고 결론 내리지 않고, 언제든 어디서든 모두라는 이름으로, 또는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배제되고 차별받는 사람을 찾고 또 찾겠습니다. 예레미야의 말처럼 평화를 예언하는 자는 그 말이 이루어진 이후에야 그것이 하나님의 말이었던 것을 인정받는다는 그 말을 붙들며 그 때를 인내하고 기다릴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최근에 읽었던 <기다리는 사람은 누구나 시인이 된다>라는 책의 문장을 인용하며 마치겠습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시간을 살고 느끼고 체화하고 좋든 싫든 시간을 자기 존재로 떠안아야 한다. 그러는 동아나 그는 평정심을 잃고, 서성거리고, 시계를 흘끔거리고, 무언가를 골똘히 쳐다보기도 한다. 기다리는 이의 마음은 늘 그렇게 동요한다.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꿈들과 가능성, 그리고 각자가 기다리는 그 진실이 완전하게 보여지고 도래하고 꽃피는 그 날까지 늘 흔들리며, 늘 동요하는 저와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출처: https://minjungtheology.tistory.com/1147 [웹진 <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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