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둥병자 나아만 장군
왕하 5:1-14
1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2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으매 그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3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
4 나아만이 들어가서 그의 주인께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땅에서 온 소녀의 말이 이러이러하더이다 하니
5 아람 왕이 이르되 갈지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하더라 나아만이 곧 떠날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6 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 주소서 하였더라
7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와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
8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의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하니라
9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10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2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13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왕하 5:1-14 / [문둥병에 걸린 아람의 장군] 아람 왕의 군대 총사령관 나아만이 문둥병에 걸렸다. 그는 훌륭한 장군으로서 왕의 총애를 받아온 사람이었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를 도와주셔서 그가 아람에게 큰 승리를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2) 그런데 전에 아람 군인들이 기습공격을 하면서 이스라엘의 한 소녀를 붙잡아 왔는데, 그녀가 나아만의 아내 곁에서 하녀 노릇을 하고 있었다. 3) 한번은 그 소녀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우리 주인 어른께서 사마리아에 사는 예언자를 찾아가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그 어른이 문둥병을 고쳐 주실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4) 나아만은 그 말을 듣고 왕궁으로 들어가서 이스라엘 소녀에게서 들은 말을 왕에게 그대로 전하였다. 5) 왕이 대답하였다. `그러면 어서 이스라엘로 떠나게. 내가 이스라엘왕에게 친서를 써주겠네' 그는 곧 은 10달란트와 금 6천 개와 예복 열 벌을 예물로 가지고 길을 떠났다. 6) 그가 이스라엘 왕에게 가서 친서를 전하였다. 그 친서의 내용은 이러하였다. `내가 나의 신하 나아만을 왕에게 보냅니다. 그를 잘 대접해 주고, 그의 문둥병도 고쳐 주시기 바랍니다.' 7) 그러나 왕은 편지를 읽고 나서 옷을 찢으며 외쳤다. `도대체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는 하나님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어째서 저 아람 왕이 나에게 문둥병자를 보내어 고쳐 달라고 부탁을 하는가? 틀림없이 그는 나와 전쟁을 하기 위하여 시빗거리를 찾고 있는 것이다!' 8) [여호와를 섬기게 된 나아만] 아직도 길갈의 예언자 학교에 머물던 엘리사가 왕이 옷을 찢고 괴로워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전갈을 보냈다. `그 사람을 나에게 보내십시오. 그러면 그가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9) 나아만은 마차를 타고 사마리아에서 길갈로 내려와 엘리사의 집 대문 앞에 멈추어 섰다. 10) 그러나 엘리사는 그를 만나주기는커녕 다른 사람을 내보내 말을 전하게 하였다. 위풍당당한 장군을 마치 천하고 불쌍한 거지처럼 취급한 것이다. `나아만은 요단강으로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씻어라! 그러면 문둥병이 나아 살이 깨끗해질 것이다.' 11) 화가 치솟은 나아만은 당장 발길을 되돌리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그가 몸소 나와서 나를 영접하면서 자기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를 드리고 나의 온갖 상처를 어루만져서 이 문둥병을 고쳐 줄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런데 요단강에 가서 몸이나 씻으라니! 12) 다메섹에는 이스라엘의 어느 강보다 더 좋은 강들이 있지 않느냐? 레바논 산속에서 흘러 나오는 아마나 강물과 헬몬 산속에서 흘러 나오는 바르발 강물은 얼마나 맑고 시원하냐! 강물에 들어가 목욕해서 나을 병이라면 내가 거기서도 충분히 목욕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는 화를 내면서 고향으로 되돌아가려고 마차머리를 돌렸다. 13) 그러나 나아만의 부하들이 다가서며 말하였다. `만일 저 예언자가 이보다 더 어려운 일을 하라고 요구하였더라도 장군님은 틀림없이 그대로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겨우 가서 몸을 씻으면 깨끗해질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일단은 그대로 해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14) 그래서 돈 많고 권세 높은 나아만은 마음을 바꾸어 겸손히 요단강으로 내려가 엘리사가 명령한 대로 그 물에 일곱 번 몸을 씻었다. 그러자 그가 완전히 치료되어 그의 피부가 소년의 살결처럼 깨끗해졌다.
여호와께서는 나아만 장군을 통해 천지와 세계 만국의 대주재(大主宰)로서, 이스라엘의 하나님만 아니라 모든 다른 이방 나라와 민족들까지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십니다.
나아만과 나병(1) 나아만은 아람 왕 벤하다드 2세(주전 860-841)의 군대 장관으로서, 그 이름의 뜻은 우가릿어(Ugarit)로서 ‘공평한’, ‘은혜로운’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성공적이고 용감한 전사로서 많은 영화를 누렸지만 불행하게도 나병에 걸렸습니다. 이 병은 환자들을 악화시키고 결국에는 죽게 만들었지만 치료법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나병 환자를 사회에서 추방하는 이스라엘(레 13장-14:57)과는 달리 당시 아람에서는 나병 환자라도 왕과 아주 가깝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나아만의 여종과 아람 왕(2-7) 나아만에 의해 이스라엘 땅에서 사로잡혀 온 어린 소녀 하나가 그의 주인에게 이스라엘에 있는 선지자를 만나면 나병을 고침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미천한 자들을 통해서도 강하고 높은 자들에게 전달됩니다(고전1:27-28). 그래서 아람 왕은 나아만에게 이스라엘 왕에게 친서를 비롯하여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를 준비하여 보내며 나아만 장군의 나병을 치료해주도록 부탁합니다. 그렇지만 아람 왕의 서신을 받은 이스라엘 왕은 자신의 옷을 찢으며 아람 왕이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명분이라고 생각하며 큰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나병은 왕의 권력이나 귀한 선물로 치료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나아만의 회복(8-14) 엘리사는 아람 왕의 서신을 받고 고민하고 있는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만 장군을 자신에게 보내라고 합니다. 그리고 찾아온 나아만 장군을 향해 사자들을 보내어 요단 강물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 말을 합니다. 비록 나아만의 몸에 나병이 들었다고 할지라도 아람 왕의 서신과 각종 보화, 그리고 당시 대국의 장군이라는 교만한 마음으로, “내 생각에는 ...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11)라며 그를 대하는 엘리사의 태도에 노를 발하며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의 모든 강보다 낫지 않느냐”고 하며 그냥 되돌아가려 합니다. 그러나 선지자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간곡히 청하는 종들의 이야기를 듣고 요단 강에서 몸을 일곱 번 씻음으로 완전하게 깨끗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결국 나아만은 나병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으며, 구원받은 백성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적용: 나병과 같은 죄의 문제는 권력과 물질로 치료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받는 일에 걸림돌이 되는 나의 교만함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사람은 살면서 몇 번의 결정적 기회를 만나게 됩니다. 이 기회를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따라 사람의 인생은 180°달라집니다. 특히 기회라는 것은 삶의 변화와 함께 다가옵니다. 그 기회는 부담과 불편함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외면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왕의 명령을 따르듯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전적인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기 바랍니다.
< 설 교 >
한 작은 소녀가 전한 복음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는 세 사람이 대표적으로 등장을 합니다. ❶ 아람의 장군 나아만입니다. ❷ 유대에서 잡혀온 작은 소녀가 등장을 합니다. ❸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아람의 장군인 나아만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아람이 위기에 처해있을 때 그 나라를 구원한 인물입니다. 오늘 성경에 그는 아주 크고 위대한 장군이며, 왕의 총애를 받는 큰 용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 적으로 보면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돈도 있고 권력도 있고 명예도 있는 다 가진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주위에 부자인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집에서 살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사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형적으로는 그렇게 근사해 보여도 그 사람도 고민이 있고 걱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❶ 오늘 성경에 보면 “그는 큰 용사이더라. 그러나 그는 문둥병자더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문둥병은 고치지 못하는 병이고, 살지 못하는 병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에이즈와 같은 병입니다. 그런데 이 나아만은 그것을 숨기고 있습니다. 화려한 외투속에 자기의 더러운 문둥병을 감추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남에게 자기의 치부를 숨기고 살아간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작은 계집아이는 그가 문둥병자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빨래하다 보면 옷에 고름이 묻어있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문둥병은 영적으로 죄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문둥병은 전염이 됩니다. 죄도 잘 전염이 됩니다. 문둥병은 결국 그 사람을 파면으로 이끌어 갑니다. 죄라는 것은 그 사람을 결국 파멸과 심판으로 이끌어 갑니다.
문둥병 걸린 사람은 감각을 잃어버립니다. 문둥병환자들은 왜 손이 다 짤립니까? 아픔을 느끼기 못하기 때문입니다. 뜨거운 물에 넣고 손가락이 다 잘려도 아픔을 못 느낍니다. 우리가 죄에 오염 되면 양심의 가책을 잃어버립니다. 얼마 전에도 지승양이라는 어린아이가 행방불명되었을 때 옆 동네 살던 40대 아저씨가 아이를 생매장해서 죽였습니다. 죄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나아만은 겉으로 보기에는 근사하지만 깊게 죄에 오염된 문둥병 환자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다 그렇습니다. 저 사람은 무엇이 부족해서 교회에 나올까? 저런 사람은 학식이 없어 무엇이 부족해? 자식들도 잘 되었는데 무엇 때문에 교회에 나오겠어? 아닙니다. 그 사람들도 말 못하는 고통과 한숨거리가 있습니다. 여러분 누구에게든지 복음은 필요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증거 해야 됩니다. 나아만이 그렇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으로는 살이 썩어 들어가고 있습니다.
❷ 한 작은 소녀입니다. 그는 참 불행합니다. 아람사람들이 때를 지어 유대 국경을 넘어가서 유대인들을 잡아왔습니다. 작은 아이가 참하게 보이니 나아만이 자기 집에 하녀로 두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했던 소녀가 하루아침에 포로가 되어서 남의 나라에서 하루 종일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포로이고, 하녀이고, 유대 소녀이었고, 계집아이라고 불리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육체는 포로였지만 마음은 포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마음은 긍정적이었고 밝았습니다. 그녀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비록 포로이지만, 주방에서 일하는 하녀이지만,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내가 지금 어떤 처지에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병실에 있고, 내가 위기가운데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을 모시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이 소녀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주인 나아만 장군을 볼 때 “저분이 우리나라에 하나님의 종 선지자 앞에 가면 문제를 해결함 받을 수 있는데”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주님에게 가면 문제의 길이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질병도 건강의 문제도 가정의 문제도 예수그리스도 앞에 나오면 해결 받을 길이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소녀에게는 이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충만하고 풍성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포로로 끌려가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어떤 자리에 서도 그는 패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이 소녀는 주인의 신뢰를 받고 있었습니다. 끌려가서 포로로 일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일했습니다. 주인이 볼 때만 일하고 안보면 쉬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일도 맡게 되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포로이지만 너무 기특한 소녀이었습니다. 이 작은 소녀가 자기 주인의 문둥병 걸린 사실을 알고 나아만의 부인에게 “우리 장군님이 이스라엘에 가면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있는데 그 하나님의 사람에게 가면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만약에 이 소녀가 믿을 수 없는 소녀라면 아무도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녀가 믿을 수 있는 신실한 소녀이고, 신뢰감을 주었기 때문에 남편에게 이야기 하고, 남편이 왕에게 이야기해서 은과 금을 가지고 이스라엘에 갔습니다. 우리 교회 교우들도 여러분의 직장에서 가정에서 신뢰받는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거짓말 잘하는 사람을 누가 믿겠습니까? 요즘 전도 방법을 관계전도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의 관계를 통해서 전도를 합니다. 실제로 교회에 등록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하면 그중에 86%가 아는 사람들의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왔다고 합니다. 가족이나 친척이나 직장동료나 동리사람이나 아는 사람을 통해서 전도를 받았지 모르는 사람을 통해서 전도를 받은 것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모르는 사람에 의해서나 문서나 방송을 통해서 전도 받은 것은 14%에 불가합니다. 우리가 우리와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면 전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은 소녀는 아주 신뢰감을 주었던 여인입니다. 특별히 요셉이 애굽에 노예로 끌려갔을 때 열심히 일하고 보디발에게 신뢰감을 줍니다. 그러니 시위대장 보디발이 요셉을 많은 종들 중에서 발탁을 해 자기 재산을 관리하는 총무로 삼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자리에 있더라도 늘 신실하신 사람이요 믿음을 주는 사람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은 이 소녀는 타인의 아픔에 대한 동정심이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고통당할 때 자기가 아픈 것 같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남이 슬퍼하면 나도 같이 슬퍼하고 누가 기뻐하면 나도 같이 기뻐하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그런 사람이 좋은 전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남은 슬퍼하는데 기쁘고 노래가 나오면 곤란합니다. 남은 망해 가는데 나는 찬송이 나온다면 곤란합니다. 남이 슬퍼하면 내 마음도 슬픈 것입니다. 남이 기뻐하면 나도 내일처럼 좋아해야 합니다. 우리는 좋은 심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긍휼이 여기는 마음입니다. 비록 자기는 포로이지만 자기를 잡아온 이 장군의 고통에는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우리 장군님이 이스라엘에 가면 병을 고칠 수 있는데” 이것이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잘 사는 것 같아도 고민이 있고 고통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예수 믿지 않고 살면 마지막에 종말이 올 것이라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가나안 농군학교를 만든 김용기 장로님이 한번은 이런 경험을 하였습니다. 추운 겨울에 많은 훈련생이 들어와서 훈련을 받는데 한밤중에 불이 났습니다. 닭장에 500마리의 닭이 있고, 옆에 토끼장에 앙고라토끼가 200마리가 있었습니다. 그곳에 불씨가 날아와 불이 났습니다. 닭장과 토끼장이 바람이 불어 타오르는데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뜨거운 불덩이가 왔다 갔다 합니다. 토끼들이 불덩이가 되어서 뛰어다니고 닭들이 불덩이가 되어서 왔다 갔다 하는데 손을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도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누구도 말할 것 없이 예배당으로 들어와서 그 모습을 보고 흐느껴 웁니다. 김영기 장로님이 그렇게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믿지 않고 죽어가는 불쌍한 영혼들의 종말입니다. 지옥 불에 떨어져서 뜨거운 폭탄이 되어서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십시오. 저것이 우리가 당할 모습입니다.” 많은 예수 믿지 않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곳에 천명을 이끄는 조폭 두목이 들어왔다가 그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아 신학교에 가서 지금은 목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장소에서 그것을 보았던 한 유명한 대학을 나와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대학생이 “내가 검사, 판사가 되어서 무엇을 하겠나?”라고 말하고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겠다고 하며 그곳에 살았습니다. 그리고 김용기 장로님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한 영혼의 종말을 볼 수 있을 때 아픔을 느낍니다. 돈이 많으면 무엇을 합니까? 지옥을 가는데, 아무리 좋은 차를 타고 가면 무엇을 합니까? 지옥을 가는데. 그것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그래서 복음을 증거 해야 합니다. 타인의 아픔을 보고 동정심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3절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주모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이 작은 소녀에게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우리 주인이 하나님의 종 앞에 있으면 병을 고칠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확신을 가지고 그 소녀는 그 사실을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도 믿음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확실히 믿을 때 남에게 증거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 5일마다 시골에 장이 서면 약장사가 옵니다. 그들은 약을 너무 잘 팝니다. 그 약은 제대로 된 약이 아니라 밀가루 반죽해서 염색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먹으면 만병통치약이라고 말합니다. 위장병, 암, 관절, 골수가 다 낳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골 할머니들은 그 말을 믿고 20만원, 30만원 주고 약을 꼭 삽니다. 여러분 가짜 약을 팔면서도 진짜처럼 파는데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 하는데 확신이 없습니까? 예수님 앞에 나오십시오. 당신의 문제가 해결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의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당신의 가정이 바뀔 수 있습니다. 여러분 따라해 보십시오. “인생의 방황은 하나님을 만나면 끝나고, 신앙의 방황은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난다.” 그렇습니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나가십시오. 방황하는 인생은 하나님을 만나면 그 방황이 끝이 납니다. 신앙의 방황은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이 납니다. 이 확신을 가지십시오.
많은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생각합니다. “만약에 전도했다가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 아이고 창피해!” 그렇게 생각하고 전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마음에 감동이 있을 때 입을 열어서 복음을 증거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으면 문제가 해결되어집니다. 사업도 잘되고 병도 고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작은 소녀는 마음만으로 믿지 않았습니다. 말로 표현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표현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부부간에 아무리 마음속으로 사랑해도 표현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상대에게 전달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도자는 입을 열어야 합니다. 무엇이든 말을 여십시오. 좀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저희 교회 한번 나와 보십시오.” 표현해야 합니다. 성경에서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우리 교회 교우들은 벙어리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작은 소녀는 이렇게 실천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❸ 이스라엘 왕 여호람을 살펴봅시다. 이 왕은 불신자와 같습니다. 그는 거룩한 땅에 살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이 작은 소녀는 이방 땅에 살았지만 너무나 믿음이 충만합니다. 오늘 본문 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내가 어찌 하나님이관대 능히 사람을 죽이며 살릴 수 있으랴 저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 보내어 그 문둥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로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 줄 알라 하니라.” 여러분 이 왕을 보십시오. 아람의 장군 나아만이 아람왕 벤하닷의 친서를 가지고 수백명의 신화를 거느리고 많은 금, 은 보화를 가지고 찾아왔습니다. 그 편지를 보고는 기절을 합니다. “아니 내가 신도 아닌데 이 사람의 문둥병을 고치라는 말이냐! 내가 어떻게 죽은 사람을 살릴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이것을 할 수가 없다. 이것은 필시 우리에게 빌미를 주어서 우리를 공격하려는 저들의 의도가 아닌가?” 그렇게 속단을 합니다.
왕은 불안해하고, 염려하고, 근심을 합니다. 아마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약 이 왕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다면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얼마든지 오너라. 하나님의 종 엘리사에게 가면 되느니라.” 그렇게 말하면 됩니다. 이렇게 믿음 없는 사람은 어려운 일을 당하면 당황해 하고 불안해하고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모셔 두고도 그분께 도움을 청하지 못합니다. 여기에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는 속단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 어려운 일이 생겼다고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축복의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방의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을 고침 받으면 하나님이 얼마나 높임을 받으시고, 다른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얕볼 수가 없게 됩니다.
이스라엘 왕은 자신만을 바라보고 환경만을 바라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물질의 문제가 있습니까? 물질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인생의 문제가 있습니까? 우리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실 하나님께 그 문제를 가지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능력이 부족하십니까? 능력의 근원이신 하나님 앞에 구하십시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여호람은 불신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이때에 엘리사가 사람을 보내서 그를 내게 보내라고 말합니다.
오늘 이 세 사람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가까우십니까? 우리는 작은 소녀처럼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두 가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❶ 작은 자의 큰 영향력입니다.
오늘 이 소녀는 아주 작은 보잘 것 없는 계집입니다. 돈도 없고, 권세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소녀이지만 오늘 가장 큰 일을 했습니다. 그가 복음을 증거함으로 장군의 마음을 움직였고, 왕의 마음을 움직이고,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이 나아만 장군이 이제 엘리사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종 엘리사에게 갔더니 엘리사가 밖에 나오지도 않습니다. 자기 하인들을 시켜서 “여보시오. 들어 올 것도 없고, 저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담그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화가 났습니다. 사람이 오면 좀 나와 보던지, 안수를 해주던지, 환부를 살펴보던지 나오지도 않고 요단강에 씻으라는 말에 화가 나서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부하들이 “장군님! 여기까지 왔는데 더 어려운 일을 시켜도 해야 되는데 이정도도 못합니까? 속는 셈 치고 한 번해 봅시다.” 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에 몸을 담글 때 그 더러운 문둥병이 낳고 어린아이처럼 깨끗해 졌습니다. 나아만이 너무 좋아 덩실 덩실 춤을 춥니다. 엘리사를 찾아가서는 그가 가져간 모든 것을 선물로 주려고 했더니 엘리사는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나아만은 이스라엘의 흙을 퍼가지고 가서 이 흙을 보면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겠다고 합니다. 이방 장군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그 소문이 많은 나라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한 작은 소녀의 이야기가 얼마나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되었습니까? 작은 것이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고린도전서 1장 2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에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패하려 하신다.” 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약한 자들을 불러서 강한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국 땅에 120년 전에 복음이 들어왔는데 처음부터 크고 권세 있는 자들을 위해서 복음이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멸시받는 어린아이들에게 먼저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교회가 세워지면 교회학교를 통해 먼저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남자보다는 여자가, 부자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먼저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통해서 이 땅에 얼마나 많은 교회가 세워지고, 얼마나 많은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까? 여러분 작은 소녀 얼마나 보잘 것 없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입을 열어 복음을 증거 할 때 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그 작은 소녀보다 훌륭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입술을 열어 복음을 증거 할 때 위대한 역사가 일어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전도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입을 열면 한 가정이 바뀔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증거 할 때 한 민족이 변화 될 수 있습니다. 어떤 동네나 그 동네에 교회가 세워진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한번 오세운 권사님 댁에 심방을 갔을 때 권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용인에 어떤 동네인데 아무도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버님이 처음 예수님을 믿고 조그마한 장소에서 사람들을 전도해서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짓고 전도사님을 모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전도사님이 누구냐 하면 오병직 전도사님이십니다. 그 교회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그 지역 사람들이 그 교회를 통해서 복음을 듣고 있습니다. 오세운 권사님 말씀에 이 집이 예수님 믿는지도 모르고 시집을 왔는데 아버님이 장로님이셨고, 주일이면 교회 가는 것이 너무 좋았다고 합니다. 한사람에 의해서 복음의 역사가 한 동네가 변화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작은 소녀의 영향력이 너무나 큽니다. 그 후로 200년 후에 아람이 망하고 앗수르가 등장합니다.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하나님이 선지자 요나를 보냅니다. 요나가 그곳에서 회개하라고 외칠 때 이미 그곳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그 외침을 듣고 무릎을 꿇고 베옷을 입고 회개하면서 금식을 했습니다. 이 작은 소녀에 의해서 이미 아람 땅에 복음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때 보면 광야에서 빌립집사가 에디오피아에서 온 내시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그가 돌아가서 에디오피아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아프리카에서 가장 먼저 복음을 듣게 된 지역이 에디오피아입니다. 그 빌립집사의 전도가 한 민족을 바꾸어버렸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입술을 열 때 한 가정, 한 민족, 한 가문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복음전도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교회 교우들이 입술을 열 때 놀라운 복음의 능력을 행사 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무엇으로 평가를 받겠습니까? “내가 얼마나 복음의 영향력을 행사했는지, 너를 통해 몇 영혼이나 하나님 앞에 나왔느냐?”를 가지고 하나님이 평가하실 것입니다. 비천한 영혼이지만 큰 영향력을 행사하실 것입니다.
❷ 복음은 희망을 준다는 것입니다.
절망 속에 있던 나아만이 이 작은 소녀의 이야기를 듣고는 마음에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왕의 허락을 받고 이스라엘로 갔습니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절망이 희망으로 변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가 열왕기하 7장에도 나옵니다. 사마리아성이 포위 되어서 다 굶어 죽게 되었는데 성 밖에 있는 문둥병자 4명이 어차피 굶어 죽느니 적진에 가서 먹을 것 좀 얻어먹어야겠다는 생각에 성 밖으로 갔더니 적들이 다 도망가고 텅 비어 있습니다. 실컷 먹고 나니 성안이 생각이 납니다. 성안에는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가고 있고, 아이를 잡아먹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문둥병자들은 말합니다.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리면 우리에게 벌이 임할 것이다. 어서가 이 사실을 고하자.” 달려가서 이 기쁜 소식을 전하니 성안에 사람들이 큰 기쁨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이 복음을 전할 때 이 복음은 많은 사람의 영혼을 변화시키고 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습니다. 복음은 살리는 소식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선물합니다. 여러분 사람들에게 선포하십시오. 예수님께 나오십시오. 교회로 나오십시오. 그곳에 해결의 길이 있습니다. 그곳에 변화의 길이 있습니다. 우리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네가 걸을 수 있다. 너도 고침 받을 수 있다. 너의 병이 나을 수 있다. 너의 인생이 회복 될 수 있다.” 누구든지 변화 될 수 있고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희망을 주는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를 통해서 전해져야 합니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오.” 로마서 10장의 말씀입니다. 만약 작은 소녀가 전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나아만이 그 소식을 들을 수 있었을까요? 이 나아만이 자기 처지만 비판하고 살아간다면 되는 일이 있었을까요? 그가 이스라엘에 있는 하나님의 종을 소개했기 때문에 나아만이 치료받고 이 계집아이에게 얼마나 고마워했을까요? 아마 이 소녀를 풀어주었을 것입니다.
복음은 전해져야 합니다. “전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오. 듣지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오. 믿지 못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오.” 그렇습니다. 누군가 전해야 합니다. 바로 여러분에게 복음 전파의 사명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말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깁니다. 나아만이 무슨 믿음이 있었나요? 작은 소녀로부터 그 소식을 듣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왕의 허락을 받고 사마리아까지 가서 엘리사 선지자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복음 전도의 사명이 우리 어깨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너희에게 화가 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 “하나님! 나도 꼭 전도하겠습니다.” 바로 이것이 여러분의 확신이요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진정한 실존
<공공의 적>이라는 영화를 보면 살인사건이 발생합니다. 경찰이 수사하는 과정에서 피해자의 아들을 질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물론 질문을 하는 경찰도 민망합니다. 피해자의 아들은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형사 한 명이 우연히 볼펜을 떨어뜨려서 그것을 주우려고 책상 아래로 고개를 숙이는데 피해자의 아들이 다리를 떨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러면서 그 아들을 용의자로 지목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우는 사람이 다리를 떨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다리를 떤다는 말은 지루하다는 말이고 현재 상황에 몰입하고 있지 않다는 얘기이고 진실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결국 그 아들이 연기를 하고 있었고 그 아들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밝혀냅니다.
담배를 피우는 분들에게는 죄송한 말씀인데 담배를 피우는 사람의 모습이 불량하게 보이는 이유는 삶에 가득 찬 지루함의 모습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의 무관심한 눈초리 때문에 그렇습니다. 프랑스어로 에누이 실존적인 지루함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커피를 마시는 사람도 마찬가지이고 스마트폰에 고개를 푹 숙이고 걸어가는 사람도 비슷합니다. 현대인은 지루합니다. 현대인은 항상 무료합니다. 그 인생에 가득 찬 지루함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에는 사람이 진정하게 실존하고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차라리 화가 나서 흥분하는 모습이 돌부처처럼 무뚝뚝한 모습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차라리 그게 본 모습입니다. 그 사람의 참 모습을 거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그 사람을 경험할 수 있고 그 사람의 참된 모습을 엿볼 수가 있고 그 사람과 가까워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소위 망가지는 모습을 우리 사회가 강요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 사람의 참모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주로 술을 많이 마신다든가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무릅쓸 때 그렇게 해서 망가진 모습을 연출하면 사람들이 좋아하고 그 사람을 친하게 생각합니다. 왜 청소년들이 욕을 합니까. 욕은 당연히 나쁜 언어습관입니다. 그걸 알면서도 왜 욕을 하려는 감정을 갖느냐. 그게 자신의 진실을 말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말로는 나타낼 수 없는 자신의 진실을 말하고자 하는 본능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점잖음으로 나타낼 수 없는 진실 · 감정 · 간절함 때로는 분노를 욕을 통하여 나타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모습에서 언제 진실한 모습을 포착할 수 있느냐.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가 물에 빠질 때, 그게 베드로의 참모습입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이것은 점잖은 베드로도 아니고 거룩한 베드로도 아니고 진짜 인간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그것은 연기가 아닙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연기하지 않습니다. 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베드로의 모습. 위기 앞에서 허둥지둥하는 베드로. 그것이 그의 한계요 그의 참모습이었던 것입니다. 또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이기 전에 좌우를 살펴보는 모습. 사람은 죽여야겠고 그것을 숨겨야겠고……. 이런 데에서 우리는 신앙인이 어떤 사람인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참된 모습은 정돈된 모습이 아니고 멋있어 보이지도 않습니다. 유일하게 항상 진실하게 실존하셨던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순간이든 삶에 전적으로 관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무관심하다든가 지루하다든가 관망하는 태도를 가지신 적이 없어요. 예수님은 그냥 길을 걸어가는 순간에도 그의 옷에 손을 대는 사람이 나음을 얻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어느 한순간도 예수님은 공회전하는 순간이 없었어요. 자동차에 엔진을 걸어놓고 서 있으면 공회전이라고 하지요. 엔진은 돌아가는데 앞으로 가지 않는. 예수님에게는 공회전하는 순간이 없었어요.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과 교류하셨고 항상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놓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공회전하는 순간이 많습니다. 우리가 항상 성령 충만하지 못하는 이유가 아마 거기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의 대부분의 순간은 무관심하고 인생을 관망하다가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만 집중합니다. 그때가 진정 실존의 순간입니다. 진정한 실존의 순간은 주로 위기로써 찾아옵니다. 예수님 양편의 강도가 바로 그런 위기를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인생의 마지막 기회를 앞두고 있습니다. 더 이상의 기회는 없습니다. 더 이상의 시간은 없습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숨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그들은 연기할 수 없습니다. 절박한 순간입니다. 최후의 위기의 순간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도 한 명은 예수님을 욕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면 우리를 구원하라’ 그런데 한 명은 예수님에게 간구합니다. ‘주님 나라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이들이 이런 위기의 순간까지 오게 된 것은 자기들의 잘못입니다. 좀 더 일찍 정신을 차렸더라면 이러한 경험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들이 이러한 위기를 당했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가까이 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그 기회가 한 사람에게는 멸망으로 가는 기회가 되었고 한 사람에게는 영생으로 가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나아만 이 사람은 나름대로 사회지도층이고 그 밑에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어른이고 점잖은 사람이고 많은 것을 이룬 사람이고 사람들에게 명성과 존경의 대상입니다. 11절까지는 나아만이 점잖습니다. 그런데 11절에 그가 엘리사 선지자의 집 문 앞에 섰을 때 그는 엘리사가 버선발로 뛰어나와서 영접할 줄로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직접 나오지 않고 다른 사람을 보내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그면 몸이 깨끗해집니다 라고 말을 하는 순간에 나아만의 뚜껑이 열렸습니다. 열을 받은 것입니다. 화를 냅니다. 그가 말하기를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 지금까지는 점잖은 사람이었는데 그가 냉대를 당한다고 생각하니까 흥분하고 화를 내고 돌아가려고 하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엘리사가 의도한 대로 된 것입니다. 엘리사가 일부러 이렇게 한 것입니다. 일부러 나아만을 화내게 만든 것입니다. 그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 하나의 테스트입니다. 일반 목회자라면 엄두도 못 냅니다. 교인 잃을까봐.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종만이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정중한 만남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정중한 만남은 진실을 드러내기가 힘듭니다. 맞선이 어려운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맞선. 선남선녀가 옷을 잘 입고 좋은 커피숍에 나와서 서로 공손하게 대화합니다. ‘취미가 무엇입니까? 아버님은 무얼 하십니까?’ 이런 식으로. 그래서는 가까워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왜 맞선이 효과가 없느냐. 그런 상황에서 만나서 대화하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화를 냈기 때문에 나아만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화를 내는 순간에 나아만이 진실해진 것입니다. 더 이상 경건한 척 하는 것도 아니고 또 거룩한 척 하는 것도 아니고 또 인품이 있는 것처럼 보일 필요도 없고 화를 내는 순간에 나아만은 진실한 나아만의 모습을 보이게 된 것입니다. 영국의 설교자 스펄전은 나는 화가 나면 설교를 더 잘한다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화를 내면 설교를 더 잘 할 수 있다는 얘기냐. 그러면 앞으로 설교할 때마다 화를 내면 되겠네요. 그게 아니지요. 사람이 화를 낼 때 그의 감정이 최대로 작동합니다. 영혼이 최대로 작동합니다. 더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펄전이 역설적이지만 나는 화를 낼 때 설교를 더 잘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나아만이 이 순간에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합니다. 만약 여기에서 화를 내지 않으면 사람도 아닙니다. 나아만이 화를 내는 이유는 자기가 기대했던 것과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여러분이 기대하는 것과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셨다면 진지하게 신앙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자기가 인생에 기대하는 것과 인생이 그를 위하여 베푸는 것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아직 철이 들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은 발견합니다. 내가 기대한 것과 인생이 나에게 주는 것이 다르다는 사실, 내가 결혼할 때 남편에게 기대했던 것과 진짜 남편이 내게 주는 것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지요. 아내도 그렇고.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하나님에게 기대했던 것과 하나님이 내게 역사하시는 방법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같다면 그건 하나님이 아닙니다.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당신의 생각이 다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것을 깨닫고 받아들일 때 사람이 철이 들고 신앙인의 신앙이 성숙해지고 영혼이 성숙해 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진실된 만남은 충돌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가 염려해야 될 것은 문명의 충돌이 아니고 하나님과 사람의 충돌이에요. 예수님 좌편 강도는 예수님과의 만남이 충돌을 가져왔어요. 우편 강도에게만 그것이 은혜가 되고 구원이 되고 낙원을 허락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충돌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예사롭게 생각한 것입니다. 신앙은 서비스업이 아닙니다. 고객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서비스업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비위를 맞춰주는 곳이 아니고 성도를 섬기지만 서비스업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가장 솔직한 방법으로 반응했습니다. 화를 냈습니다. 이것이 나아만에게는 위기요 기회의 순간인데 그 옆에 바른말을 해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종들이 뭐라고 말하느냐면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홀로 할 수 없는 이유는 바른말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바른 말은 듣기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른 말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위기의 순간에 자신의 분노든 자신의 자존심이든 자신의 상한 마음에 치우치지 않고 중심을 찾고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우리 옆에서 진실 된 말을 해 줘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들을 수 있을 때 우리에게는 축복이 되는 것이고 그것을 거부하면 우리에게 그 기회는 떠나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본질은 나아만이 문둥병에서 낫느냐, 낫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의 기분이나 비위나 이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건 비본질적입니다. 기분이 나쁘다고 평생 문둥병으로 살다 죽겠습니까. 기분이 나쁘다고 천국가기를 거부하겠습니까. 기분이 나쁘다고 굴러들어온 복을 발로 차겠습니까. 그렇게 할 수 없지요. 지금이야말로 정말로 인생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판단해야 되는 순간인 것입니다. 나아만이 이 순간에 철이 든다면 큰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이 기회를 발로 차버리면 그는 영원히 문둥병자로 살다가 죽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사 선지자는 일부러 이러한 힘든 선택의 순간을 그에게 안겨준 것입니다. 진실한 실존 이것은 철학적인 표현이지만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실제 모습보다 더 거룩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교양, 우리의 점잖음 이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에 도달할 때에 우리의 진짜 모습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모습을 유도하십니다. 그것이 필요하다고 보시기 때문에.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진정한 대화를 통해서 한계에 찬 우리의 본 모습을 발견함으로써 우리는 두 가지를 발견하는데 첫째는 나는 애초에 왜 병들었는가, 둘째는 나는 지금 어떻게 나을 수 있는 가를 깨닫습니다. 나아만은 이 순간에 내가 애초에 왜 병이 들었을까, 그의 인격적인 결함, 그의 인생의 결함에서 평생 그를 괴롭히는 원인을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지금 어떻게 하면 나을 수 있는 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당황할 때 몰입할 때 굳게 닫아두었던 영혼이 노출되고 이제 비로소 하나님의 진리가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순종으로 은혜의 문이 열린다
우리가 한 사람에 대해서 평가를 할 때 많은 이력과 경력들이 따라 붙습니다. 본문에 소개되고 있는 나아만이라는 사람에게도 다양한 수식어들이 나열되고 있습니다. 그는 아람 왕의 총애를 받은 군대장관일 뿐 아니라 전쟁 영웅이고 국가 공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부와 권력, 명성을 다 가진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왕하 5:1)」 자신이 가진 수많은 것들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결정적인 결함이 그의 인생을 어둡게 했습니다. 사실, 부분이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일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우리 삶의 허약성입니다. 아무리 행복의 조건들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한 가지 불행한 조건 때문에 행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정적인 한 가지 결함, 이것이 문제입니다. 인간이 누리는 행복은 쉽게 흔들릴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은 있는데 건강이 없고, 어떤 사람은 건강은 좋은데 인간관계가 흔들립니다. 성공은 했는데 주변에 사람이 없거나, 인기는 있는데 미칠 정도로 외롭기도 합니다. 사람들에게는 늘 결함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있다” “나는 모든 것이 완전하다” 인간에게 그런 순간은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졌는데 한 가지의 결함이 지배할 때 불행은 한순간에 찾아옵니다. 나아만 장군을 보면 그렇습니다. 사실 그는 성경에 언급될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이방 나라 아람 왕의 군대장관이고, 당시에 아람은 이스라엘과 적대 관계에 있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의 환경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무엇보다 그는 성공한 사람으로, 스스로의 삶에 만족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방의 군대 장관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장면이 감동적으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몇 가지 단계를 통해서 찾아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의 은혜에 연결될 수 있는 고리는 결함 때문이었습니다.
그에게 나병이 없었다면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었을텐데 그 한 가지 결함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15절을 보면 나아만이 치유를 받고 난 다음, 대단한 고백을 합니다.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이방의 군대 장관의 입술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선포되고 있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결함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연약함이 없으면 하나님이 부르셔도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문제 안에 하나님의 숨은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있는 어떤 결함을 통해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고 세상적으로 모든 것이 다 잘 되고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를 부러워하지만, 그런 상태는 하나님의 은혜와는 거리가 멉니다. 어려움이 하나도 없는데 누가 하나님을 찾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연약함을 통해서 나를 부르십니다. 그 결함을 통해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끄십니다.
사도 바울도 약함 때문에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립니다. 그 매달림을 통해 마지막까지 승리의 완주를 할 수 있었고, 바울이 바울 되게 했던 힘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매달리다 보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러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난이나 문제들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우리의 연약함, 결함, 부족함, 문제, 고통을 통해서 찾아옵니다. 평소 같으면 나아만 장군이 어린 노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겠습니까?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평소에는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지 않습니다. 또 무엇인가를 이룬 성공한 사람이라면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아만에게 찾아온 결함은 어린 여종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이게 만들었습니다. 약한 상태가 축복이 됩니다. 약함이 은혜의 통로입니다. 결함이 풍성함으로 가는 기회가 됩니다. 내가 약할 때 겸손해지고 절박해집니다. 그때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있는 결함에 대해서 감사하십시오. 약함 때문에 하나님을 찾고, 약함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약함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내 안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나에게 찾아온 결함은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가는 통로가 됩니다. 오늘 나아만은 이 결함 때문에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던 인생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찬양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도 어떤 결함으로 하나님을 만났을 것입니다. 저의 경우에도 우리 집안은 기독교와 전혀 상관이 없는 집안이었습니다. 절을 소유한 절집이었고, 아버지는 주지였고, 목탁 소리가 익숙했습니다. 그런데 실패와 아픔이 고리가 되어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저도 제가 이렇게 설교하고 있는 것이 참 신기합니다. 여러분의 삶에도 결핍이나 문제가 있다면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통로가 될 것입니다. 문제를 그냥 문제로만 보지 마십시오. 자세히 보면 문제 안에 하나님의 선물 상자가 담겨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은혜는 의외의 사건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3절에 보면 한 어린 소녀가 등장합니다. 전쟁으로 이스라엘에서 붙잡아 와서 나아만 장군의 아내의 몸종으로 삼은 보잘 것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소녀가 나아만 장군을 살릴 복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문제의 답을 아주 가까운 곳에서 찾게 하십니다. 집에 있던 보잘 것 없는 노예 소녀가 문제를 푸는 길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누가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로 보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뜻밖의 사람이나 방법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됩니다. 문제를 푸는 길은 의외의 사건과 만남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전혀 생각하지도 않은 일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가 쉽게 알아차릴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1절을 자세히 보면 나아만의 문제와 해답이 같이 주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였음이라” 이스라엘과 아람과의 전쟁에서 아람이 이기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가시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셨다는 뜻이지만, 전쟁의 승리로 잡아온 소녀 속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던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아만의 가정 안에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심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통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찾아올 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측하지 않았던 길로 인도하실 때도 많습니다. 평소에는 우리가 무시하고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던 일들, 어떤 관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찾아올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아주 가까운 곳에 내가 손을 내밀기만 하면 닿을 수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말씀해주십니다.
3. 하나님의 은혜는 자기의 생각과 감정을 뛰어넘을 때 찾아옵니다.
소녀가 전해준 말을 믿고 나아만은 이스라엘로 떠났습니다. 아람왕의 총애를 입은 사람답게 자기가 낫게 될 경우에 보답할 답례품들을 가지고 거창한 행차를 했습니다. 그런데 도착해보니 선지자 엘리사는 보이지도 않고 사람을 보내어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는 말만 전했습니다. 나아만은 버럭 화를 냅니다. 자신의 행차에 이스라엘 전체가 환영해줄 줄 알았고, 선지자가 나아와서 자기의 상처에 손을 얹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할 줄 알았습니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왕하 5:11)」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나아만의 생각일 뿐이었습니다. 엘리사는 그가 이스라엘 국가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나라의 최고 군대 장관이 아니라 나병환자로 취급했습니다. 나아만은 자존심을 생명처럼 붙들고 살아왔으며 어디를 가나 환대를 받았던 사람인데 완전히 묵살을 당하고 전혀 인정을 받지 못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비록 나병에 걸리긴 했지만 그는 자존심이 죽지 않은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인간의 모습입니다. 자신의 치명적인 결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것으로 꽉 차 있습니다. 죽고 사느냐의 문제 앞에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인간적 체면을 붙들고 있습니다. 인간의 교만은 쉽게 고개를 숙이지 않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분노하면서 그곳을 떠나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지금 나아만에게 중요한 것은 병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환대하지 않는 것은 핵심 주제가 아닙니다. 메신저가 누구인가보다 중요한 것은 메시지입니다. 오늘도 설교를 들을 때 설교를 하는 메신저가 누구인가보다 메시지 자체가 더 중요합니다. 교회에 처음 나왔을 때도 중요한 것은 메시지입니다. 예배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데, 그것보다 엉뚱한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해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나아만은 지금 자신이 여기에 온 목적을 잊어버렸습니다. 환대가 없는 것 때문에 화가 나서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아람의 장관으로 온 것이 아니라 환자로 왔습니다. 얻고자 하는 것은 치료입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교만입니다. 교만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병보다 더 무서운 병이 교만이라는 병입니다. 나아만은 나병이 나을 수 있는 치료 직전에 와 있습니다. 요단 강에서 일곱 번 목욕만 하면 분명히 낫습니다. 죽을 병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절호의 순간이 바로 앞에 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의 말만 따르면 됩니다. 그런데 교만한 마음이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는 복음이 없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교만 때문에 사람이 죽습니다. 길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있지만, 교만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합니다. 나아만이 요단 강에 들어가 목욕을 하려고 하면 화려한 훈장과 계급장이 있는 옷을 벗어야 합니다. 옷을 벗고 들어간다는 것은 계급장을 뗀다는 말입니다. 나아만에게는 계급장과 훈장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별 훈장들을 다 달고 다닙니다. 일생 동안 쌓아온 자존심들은 아무도 못 건드립니다. 훈장이 달린 군복을 입으면 어깨에 힘이 들어갑니다. 교회에 와서도 은혜를 받으려고 하면 그런 것들을 다 떼야 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데”, “이래 봬도, 왕년에” 교회를 옮겼다면 처음 믿는 마음으로, 이전 교회에서의 직분을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다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순종하려고 하면 세상의 자랑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 선다는 것은 벌거벗는 것입니다. 내가 허물과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존심을 꼿꼿이 세우고는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나에게는 소망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냥 죄인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여야 할 만큼 끔찍한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십자가도 받아들이고 내 자존심도 살리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겉으로 나를 포장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간판이나 계급, 세상의 명예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세상은 인간의 자존심을 기가 막히게 세워줍니다. 현대의 상업주의는 VIP 제도를 만들어서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들어줍니다. 나아만 장군에게 필요한 것은 요단 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한 번은 확실하게 나의 죄인 됨을 정직하고, 분명하게 인정하고 자신을 드러내야 합니다. 내가 자랑하던 의의 옷들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자기 자랑을 모두 내던지고, 나의 자존심이 완전히 깨어지고 부끄러움을 감수하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 앞에 서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냥 내가 인간적으로 자랑하고 있는 화려함을 입고 살다 죽을 것인지, 아니면 부끄럽지만 내가 붙들고 있던 옷들을 과감히 벗고 십자가 앞에 나아가 살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나아만이 계급장이 주렁주렁 달린 옷을 입고 그냥 아람으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자존심 상하지만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든지 결정을 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도 이런 것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때에는 우리의 자존심이 상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면 확실하게 나의 교만이 무너지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한 번은 혹독한 과정을 통과해야 합니다. 지금 나아만은 굉장히 중요한 시점에 왔음에도 자기의 감정, 자존심을 움켜쥐고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받느냐 못 받느냐의 기로에 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에는 거칠게 몰아가시며 온전히 순종하여 무릎 꿇게 하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 엘리사는 멋집니다. 일국의 장관이 왔는데도 쳐다보지도 않고 요단 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만 했습니다. 한번만 해도 낫게 할 수 있었는데 일곱 번 씻으라고 한 것은 완전한 순종을 요구한 것입니다. 확실히 죽으라는 것입니다. 한두 번으로는 우리의 자아가 쉽게 죽지 않습니다. 인간의 고집이 얼마나 센지 모릅니다. 자기 생각, 자기 이론들이 완전히 죽어야 합니다. “내 생각에는”이 사라져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수이며 하나님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일곱은 하나님의 사역을 의미합니다. 일곱은 인간의 타협을 거부하는 숫자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인간의 생각을 섞어 넣거나 자기 마음대로 적용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순종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언제나 부분적인 순종 때문이었습니다. 반쪽 순종, 부분적인 순종은 불순종입니다.
4.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나아만은 결국 엘리사의 말에 순종했습니다.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왕하 5:14)」 아주 간단합니다. 말대로 했더니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대로 하기가 어렵습니다. 문제는 14절까지 오지 못하게 방해하는 교만과 고집, 내 생각입니다. 순종의 자리까지 나가기가 어렵지만 순종하기만 하면 확실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순종하기만 하면 간단하게 문제가 해결됩니다. 우리의 인생이 복잡해지는 것은 내 생각이 많고 자아가 죽지 않아서 내 마음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아주 간단합니다. 순종만 하라, 그러면 그다음은 내가 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순종의 테스트만 통과하면 그다음은 일사천리입니다. 인생의 해답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문제를 푸는 열쇠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성경에서 일어난 기적들을 보면, 모두 동일하게 심플한 방법으로 일어납니다. 문제는 우리가 못 풉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푸시는데 그 방식은 우리의 순종을 통해서입니다. 겉으로 보면 물에 들어가는 것과 나병이 낫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내 생각을 내려놓고 순종했더니 낫는 것입니다. 간단합니다. 특이한 방법이 아닙니다. 가나의 혼인집에서 예수의 어머니가 종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물이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습니다. 심오하게 고민해야 하거나 복잡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과도한 방법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단순한 순종입니다.
모든 길은 순종을 통해서 열립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우리는 순종하는 삶이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가장 쉽게 그리고 축복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순종입니다. 삶이 굉장히 어려운 것 같지만, 오늘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 앞에 순종하는 것이 쉽게 사는 비결입니다. 하라고 하시면 하고, 하지 말라고 하시면 안 하면 됩니다. 사랑하라면 사랑하고, 섬기라면 섬기고,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는 것입니다. 순종하려고만 하면 그 다음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진리는 어렵지 않습니다. 어려운 것은 내 자아, 내 생각, 내 이론, 내 자랑이 어렵게 합니다. 가장 지혜롭고, 가장 효과적이고, 가장 능력 있고, 가장 빠른 길은 순종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 결함이 주어질 때 거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연결되는 축복의 기회가 됩니다. 결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은 의외의 일이나 만남을 통해 뜻밖의 은혜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어떤 것도 소홀히 여기면 안 됩니다. 원수라도 우리를 돕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삶에 진지한 태도를 의미합니다. 또한 내가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사실은 거추장스러운 옷, 십자가 앞에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옷을 벗어 던지고 온전히 순종하면 오늘도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과 은혜들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첫째도 순종, 둘째도 순종입니다. 그리스도가 순종하심으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신 것처럼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과 기적을 누리는 삶을 살기를 축원합니다.
내 생각과 불순종 / 노경모 목사
헨리 & 리처드 블랙커비가 쓴 「하나님 음성에 응답하는 삶」이란 책에서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내가 처음 집례한 장례식은 어린 꼬마의 장례식이었다. 우리 교회 한 부부의 첫 아이였고, 조부모에게는 첫 손주였다. 어느 날 그 집에 심방을 가서 보니 그 아이는 부모의 말을 대놓고 무시했다. 오라고 하면 갔고, 앉으라고 하면 일어섰다. 부모는 그런 행동을 나무라기보다는 그저 귀여워했다. 하루는 그 집 앞마당 문이 열려 있었다. 그 딸아이가 마당을 빠져나가 길 쪽으로 가는 것이 부모 눈에 띄었다. 저쪽에서 차 한 대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딸아이는 주차해 둔 두 대의 차 사이로 빠져나가 도로 쪽으로 달려갔다. “안돼! 돌아와!” 부모가 다급한 목소리로 어린 딸에게 외쳤다. 아이는 잠깐 서서 부모를 보고 씩 웃더니 다시 돌아서서는 달려오는 차 쪽으로 곧장 뛰어들었다. 차는 아이를 세차게 들이받았다. 아이의 죽음 앞에서 터져 나오는 부모의 통곡은 그야말로 단장(斷腸)의 비애였다. 그것은 한 아이가 부모 말에 순종하도록 훈련되어 있지 않아서 일어난 비극이었다. 나는 그 사건을 통해 큰 교훈을 얻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분의 음성이 들릴 때 반드시 즉각 순종하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음성을 알아듣고 그분께 순종하는 것이 바로 생명이다!
이 끔찍한 순간을 목격하고 장례식을 집례한 블랙커비 목사님이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 분께 순종하는 것이 바로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순종을 가르치지 않으면 재앙과 화를 당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순종을 잘 배워서 순종하게 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고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이 그 사람을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미련한지 아세요? 자기가 죽는데도 불구하고 고집피우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당신은 담배를 계속 피우면 폐암으로 죽게 됩니다.’ 라는 의사의 준엄한 경고와 책망에도 불구하고 계속 담배를 피우다가 죽은 사람들이 꽤나 많습니다. ‘술 먹고 운전하면 큰 일 납니다.’ 라는 경고를 무시하고 음주 운전하다가 자기만 죽은 것이 아니라 타고 있던 사람들, 상대편 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까지 죽인 끔찍한 사건들이 종종 일어나고 있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 상류에서 사람들이 배를 타고 놉니다. 그런데 배가 점점 하류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배를 타고 노는 사람들은 전혀 그것을 못 느끼고 놉니다. 그런데 멀리서 이 모습을 바라본 사람이 외칩니다. ‘당신들 배가 폭포로 점점 내려가고 있어요 빨리 나오세요’ 소리를 고래 고래 지르지만 뱃놀이 하는 사람들은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저 미친 사람, 이 뱃놀이가 얼마나 재미있는데.. 배가 하류로 내려간다고 정신 나간 소리를 하고 있어, 배가 그대로 있는데..’ 하면서 계속 배를 타고 놉니다. 점점 배가 하류로 내려가더니 순식간에 물살이 빨라집니다. 그제서야 큰일났구나 깨닫고 배를 저어 밖으로 나오려고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끔찍한 사고가 일어나고 맙니다.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아만’이란 사람은 아람 나라의 군대장관입니다. 이 당시 군대장관이면 왕 다음의 사람입니다. 그러니깐 2인자입니다. 그러나 군대장관이면 뭐 합니까? 문둥병자인데. 그 살이 썩어가고 있습니다. 문들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는 드디어는 비참한 인생의 최후를 맞이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 희망적인 소식이 들립니다. 이스라엘에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있는데 그 선지자한테 가면 문둥병을 고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대감과 희망을 갖고 찾아갑니다. 그런데 엘리사 선지자라는 사람이 얼굴도 안보이고 사환을 보내어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면 회복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나아만은 문둥병자입니다. 그대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일 곱 번이 아니라 70번을 씻으라고 해도 씻어야지요. 낫는다고 하는데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안 나아도 본전 아닙니까? 이방나라인 아람의 군대장관 까지 엘리사 선지자가 고쳐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뭘 귀찮게 고쳐줍니까? 이스라엘을 괴롭힌 아람 나라인데, 그냥 보내버리면 되는 거지.. 그러나 이스라엘 왕의 부탁도 있고 그 생명이 불쌍해서 고쳐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말을 잘 들어야지..
그런데 죄악된 인간의 본성이 아주 고약한 것 같아요. 말을 잘 안들어요. 죽어라고 안 듣습니다. 고침을 받는다면 무슨 일을 다 시켜도 해야지요. 자존심이 망가지고 체면이 망가져도 고침을 받는데 무엇을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나아만은 도리고 화를 냅니다. 그리고 돌아가려고 합니다.
본문 11절에서 12을 읽어 볼까요?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화가 나서 떠나려고 합니다. 떠나가도록 놔두지.. 그냥 문둥병 속에 죽어가도록 내버려두지.. 참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시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아만의 종들을 통해서 나아만을 살리십니다. 13절 봅시다.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요단강에 가서 몸을 씻으라고 하는데 그것도 못하십니까? 그것보다 더 어려운 일을 시켜도 하는 것이 당연하시 않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훌륭한 종들입니다. 우리들에게 이런 바른 말을 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달콤한 말 좋은 말만 해주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마십시오. 도리어 그들은 문제해결을 위해서 도움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들 더 꼬이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망하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하면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최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뭐 어려운 것 시킵니까? 우리가 할 수 없는 고통스럽고 힘든 일을 시킵니까?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하는 것처럼 능히 할 수 있는 것을 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그냥 하면 되는건데, 이렇게 순종하지 못하게 막는 고약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바로 ‘내 생각’입니다. 11절을 누가 한 번 읽어 보세요.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내 생각’이 나오죠? 누구의 생각이지요? 나아만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내 생각’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엘리사 선지자가 나아만 장군에게로 나아와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엘리사의 손을 문둥병의 환부 위에 놓고 흔들어 고치는 것을 말합니다. 이건 순전히 나아만 자기의 생각입니다.
이 나아만의 자기 생각이 자칫 나아만을 평생토록 문둥병자로 살게 하게 하는 주범이 될 뻔 했습니다. 나아만의 자기 생각이 나아만 자신을 망하게 만들 뻔 했다는 말입니다. ‘내 생각’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 올뻔 했나를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자꾸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순종하지 않고 내 생각을 들이댑니다. ‘내 생각에는’. ‘내 생각으로는’.. 정말로 고약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아만의 생각이 얼마나 문제가 있었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첫째, 교만입니다.
11절에,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라는 말씀이 나오지요?
자기는 큰 나라 아람의 군대장관인 자기가 왔는데, 작은 나라 이스라엘의 엘리사라는 사람이 황급히 영접하러 달려 나와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 교만이 나아만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것을 막을 뻔 하였고 평생 죽을 때 까지 문둥병자로 살도록 할 뻔 했습니다. 우리도 교만을 내려 놓아야 순종을 할 수 있습니다. 이 교만이 계속 우리 속에 존재하고 있으면 우리는 그냥 망하게 됩니다.
■ 어느 연못에 오리 두 마리와 개구리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여름이 지나자 연못물이 말라 이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로 하고 「이주방법」을 고안해 냈습니다. 그것은 날 수 있는 오리가 양쪽에서 막대기를 물고, 그 가운데를 개구리가 물어 「비행」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떠나기 전 이들은 누구든지 절대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고 약속했습니다. 이들이 공중을 날 때 이것을 본 농부가 『누가 저런 생각을 했을까?』라고 감탄했습니다. 그러자 개구리가 대꾸했습니다.『내가 했지』
그렇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라고 잠언 16장 18절에서 말씀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2. 자기의 행동 습관입니다.
11절에,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자세는 이방신에게 제사하고 이방신을 부를 때 하는 행동 습관입니다. 그리고 이방종교에서 병을 고친다고 할 때 행하는 주술적인 행위입니다. 나아만은 엘리사 선지자가 자기에게 이렇게 해 줄 알고 기대했습니다.
나아만은 이방신을 섬기는 이러한 종교적 행위가 습관화 되어 있었습니다. 엘리사도 이대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 이방신이 나아만의 병을 고쳤습니까? 이런 주술적인 치료 행위가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쳤습니까? 그러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나아만은 지금 이방신을 믿는 행동 습관을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잘못된 언어 습관, 행동 습관, 자세 등을 고집하거나 괜찮다고 우긴다면, 그 사람은 절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다 하나님 앞에서 내려 놓아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3. 자기의 지식입니다.
12절을 읽겠습니다.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아람 나라에 있는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매우 깨끗하고 아름다운 강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강들은 그냥 깨끗한 강입니다. 지금 나아만은 그냥 목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두 강이 요단강 보다 깨끗하다고 아는 이 지식이 지금 나아만의 지유와 회복을 막고 있습니다.
요단강은 진흙 색깔을 띄고 있는 혼탁한 강입니다. 그러나 나아만에게 있어서 이 강은 순종으로 인해 치유의 강으로 변하는 은혜의 강이 될 수가 있습니다.
자기 얄팍한 지식을 들이 밀게 되면 그 사람은 절대로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는 고린도전도 1장 25절의 말씀을 아시지요?
우리가 아무리 똑똑하고 날고 뛰어도 우리는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유한하고 무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어떻게 감히 따라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의 지식을 다 내려놓고 ‘네’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나아가야 치료가 일어나든지 회복이 되든지 문제가 해결되든지 하지 않겠습니까?
분노하고 되돌아가려고 했던 나아만 장군은 종들의 충고를 듣고 엘리사의 말대로 요단강으로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었습니다. 순종했습니다. 하여튼 순종했습니다. 기분 나빠도 이해가 안 되어도 순종했습니다. 이것이 그에게 축복을 가져왔습니다. 치유와 회복을 가져왔습니다. 이 치유와 회복이 정말로 놀랍습니다. 누가 14절을 읽어 주세요.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하여튼 순종했더니 그의 살이 어린아이의 살 처럼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완전한 치유입니다. 넘치는 회복입니다. 그는 육신적으로만 치유받은 것이 아닙니다. 근간 다른 사람들의 싸늘한 눈길과 자기만의 근심과 염려와 절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회복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당당하게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고, 군대장관의 일을 떳떳하게 감당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무엇으로 치유되고 무엇으로 회복되고 무엇으로 응답되고 무엇으로 문제 해결되고 무엇으로 형통하고 번창하기를 원하십니까? 바로 순종입니다. 순종만이 그 열쇠입니다.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