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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공과와 설교

20191226 / 왕하 13:1-9 / 북 이스라엘 왕 여호아하스

작성자천성교회|작성시간19.12.25|조회수465 목록 댓글 0

북 이스라엘 왕 여호아하스

왕하 13:1-9

첨부파일 20191226.hwp


1 유다의 왕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의 제이십삼 년에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칠 년간 다스리며

2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가고 거기서 떠나지 아니하였으므로

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노하사 늘 아람 왕 하사엘의 손과 그의 아들 벤하닷의 손에 넘기셨더니

4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학대하므로 여호아하스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셨으니 이는 그들이 학대받음을 보셨음이라

5 여호와께서 이에 구원자를 이스라엘에게 주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아람 사람의 손에서 벗어나 전과 같이 자기 장막에 거하였으나

6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여로보암 집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그 안에서 따라 행하며 또 사마리아에 아세라 목상을 그냥 두었더라

7 아람 왕이 여호아하스의 백성을 멸절하여 타작 마당의 티끌 같이 되게 하고 마병 오십 명과 병거 열 대와 보병 만 명 외에는 여호아하스에게 남겨 두지 아니하였더라

8 여호아하스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과 그의 업적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9 여호아하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사마리아에 장사되고 그 아들 요아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왕하 13:1-9 / [이스라엘 왕 여호아하스] 유다 왕 요아스 23년에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17년 동안 다스렸다. 2) 그러나 여호아하스는 여호와의 마음에 들지 않는 악한 일을 하였다. 즉 그는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백성을 꾀어 섬기게 한 우상숭배에 빠져서 음행과 술수를 저지르고 거기서 떠나지 않았다. 3) 여호와께서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분노하셨고 여호아하스가 다스리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아람 왕 하사엘과 그의 아들 벤하닷이 와서 그들을 정복하고 다스리게 하셨다. 4) 그러나 여호아하스가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간구하자 주께서는 아람 왕에게 시달리며 고생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시고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5)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방자를 보내 주셔서 그들은 아람의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되어 전과같이 평화스럽게 살 수 있었다. 6)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은 여전히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이 만연시켰던 우상숭배와 음행이 빠져서 다시 죄를 지었다. 그들은 사마리아에 있는 아세라 여신상을 치우지 않고 여전히 범죄하였다. 7) 그러자 마침내 하나님의 분노가 폭발하여 아람 왕 하사엘이 이스라엘 군대를 완전히 진멸하고 길바닥의 먼지처럼 짓밟았다. 마침내 여호아하스에게 남은 군대는 겨우 전차 10대와 전차병 50명과 보병 1만 명뿐이었다. 8) 그 밖에 여호아하스의 행적과 업적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왕들의 궁중일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9) 그가 죽자 시신은 사마리아에 장사되었고 그의 아들 요아스가 그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되었다.

 

북 이스라엘의 왕들은 하나같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가고 그 길에서 떠나지 아니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왕들이 얼마나 백성들을 잘먹고 잘살게 해주었는지는 평가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후의 아들(1) 북 이스라엘의 11대 왕인 여호아하스는 예후의 아들입니다. 예후는 아합을 죽이고 왕의 자리에 오른 사람입니다. 예후 왕조는 예후로부터 시작해서 여호아하스, 요아스, 여로보암 2, 스가랴까지 모두 다섯 명의 왕을 배출했습니다. 예후 왕조가 다섯 대까지만 이어질 것이라는 것은 앞서 하나님께서 예후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왕하 10:30-31). 이 말씀을 잘 해석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문자대로만 해석한다면 예후의 후손이 아무리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산다 하더라도 예후의 집안은 스가랴 이후에는 왕을 배출할 수 없다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역사 예정론입니다. 역사 예정론은 역사를 닫혀있는 것으로 봅니다. 이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보겠습니다(18:7-10).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신다는 것은 역사가 닫혀있지 않고 열려있다는 의미입니다. 나라나 개인의 역사는 열려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선택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순간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여로보암의 죄(2)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열 지파를 이끌고 북이스라엘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절기 때가 되면 남 유다만이 아니라 북 이스라엘 백성들도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 여로보암은 단과 벧엘에 각각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금송아지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신 너희의 신이라고 말합니다. 여로보암의 죄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제사장을 레위 자손이 아닌 다른 지파 사람들을 자신의 마음대로 세웠습니다. 여호와 신앙을 무너뜨린 것이며, 여로보암의 이름이 죄의 길에 대한 대명사가 되도록 했습니다.

 

아람 왕 하사엘과 벤하닷(3-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노하셨습니다. 아람 왕 하사엘과 벤하닷의 손에 이스라엘을 넘기셨습니다. 고통 중에 여호아하스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의 죄는 떠나지 않았습니다(6). 아람의 공격으로 나라는 점점 약해져 갔습니다. 여호아하스는 그의 통치 현장이 하나님의 손에서 기울어져가고 있음을 깨닫고 돌이키지 않은 채로 그의 생을 마칩니다.

 

적용: 여호와께서 보시고 여호와께서 노하시며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여호와께서 구원자를 주시는 분임을 알고 신뢰하며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길을 걸어갑니다. 어떤 이들은 걸어가고 어떤 이들은 달려간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인생의 길은 어디를 바라보고 누구를 따라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여호아하스와 요아스의 인생의 길은 어디를 바라보고 누구를 따라갔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길에서 어디를 보고, 누구를 바라보고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 설 교 >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말씀:열왕기하 13:1-13

지난 시간에 우리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죽자 그의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고 우상숭배의 길로 행하는 유다 왕 요아스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왕 여호아하스와 요아스가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이 말씀을 통해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계시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보면 남 유다의 왕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 23년에 북 이스라엘은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이 되어 17년을 다스립니다. 그런데 그 왕에 대한 평가는 한마디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행한 악은 북 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간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은 언약을 배반함으로 반역으로 인해서 그 왕조가 다섯 번이나 바뀌었습니다. 여호아하스는 열한 번째 왕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왕들이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못했다고 했는데 도대체 여로보암의 죄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열왕기상 12:25-33절을 보면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고 거기서 살며 또 거기서 나가서 부느엘을 건축하고 그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숭배함이더라. 저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팔월 곧 그 달 십 오일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 지은 산당의 제사장은 벧엘에서 세웠더라. 저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 곧 팔월 십오일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절기로 정하고 벧엘에 쌓은 단에 올라가서 분향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여로보암은 자신이 통치하고 있는 북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제사하러 갔다가 르호보암에게로 갈 것이 두려워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섬기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유사 종교를 만들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찾아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자기에게로 향하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죄는 사울 왕에게서도 보게 됩니다. 블레셋이 쳐들어왔을 때 사무엘은 사울 왕에게 자신이 올 때 까지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적은 쳐들어왔고 백성들은 도망을 가고 있는데 사무엘은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순간 마치 그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사무엘이 나타났습니다.

사무엘상 13:8-15절을 보면 사울이 사무엘의 정한 기한대로 이레를 기다리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사울이 가로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번제 드리기를 필하자 사무엘이 온지라. 사울이 나가 맞으며 문안 하매 사무엘이 가로되 왕의 행한 것이 무엇이뇨. 사울이 가로되 백성은 나에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은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치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 하고 사무엘이 일어나 길갈에서 떠나 베냐민 기브아로 올라가니라. 사울이 자기와 함께 한 백성을 계수하니 육백명 가량이라고 했습니다. 여로보암의 죄와 사울의 죄가 같습니다. 백성들의 흩어짐을 면하기 위한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백성들이 뭉쳐지기를 원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제사도 지내고 성전도 만들고 여호와 신앙과 비슷한 행위를 한 것입니다. 말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지만 결국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여로보암의 죄입니다.

그런데 누가 이런 죄에서 떠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이 땅의 교회들이 온갖 전도방법을 개발하고 교회 부흥을 말하지만 결국은 목사나 교인들이 자기를 중심으로 모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우리 안에는 없습니까? 우리 안에도 동일하게 여로보암의 마음과 사울의 마음이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면서도 우리 마음속 한 구석에는 여로보암과 사울의 마음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못하면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망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다시 보면 여호와께서는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못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노를 발하사 늘 아람 왕 하사엘의 손과 그의 아들 벤하닷의 손에 붙이셨다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늘 아람 왕 하사엘과 벤하닷에게 붙이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로보암의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4절을 보면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학대하니 여호아하스가 여호와께 간구합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학대받음을 보시고 그 간구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구원자를 이스라엘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아람 사람의 손에서 벗어나 예전과 같이 장막에 거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여호아하스가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못할 때에 아람을 통하여 고난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고난을 당하자 그제서야 여호아하스가 여호와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호아하스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붙들어주셨다는 뜻입니다. 여호와께서 붙들어주신다는 이름을 지은 사람은 그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면 그의 아버지 예후가 자기 아들을 여호와께서 붙들어 주기를 원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붙들고 계시기에 죄에 대하여 책망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간구하자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시고 구원자를 보내어 주셔서 아람의 손에서 벗어나서 자기 장막에 거하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6절을 보면 저희가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여로보암 집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좇아 행하며 또 사마리아에 아세라 목상을 그저 두었더라고 합니다. 여호아하스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이러합니다. 살만하니까 또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런 그들을 어떻게 하십니까? 7절을 보면 아람 왕이 여호아하스의 백성을 진멸하여 타작마당의 티끌 같이 되게 하고 마병 오십과 병거 십승과 보병 일만 외에는 여호아하스에게 남겨두지 아니하였더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못하는 여호아하스와 그 백성을 아람을 통해 징치하셨습니다. 아람 왕이 여호아하스의 백성을 멸절하여 타작마당의 티끌 같이 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너희가 원래 땅의 티끌임을 알라는 사랑의 매를 드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못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강제로 떠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왕에게 마병 오십 명과 병거 열대와 보병 만 명 외에는 남은 것이 없습니다. 적이 이들마저 진멸하지 않는 이유는 이렇게 남겨둠으로 그들로부터 조공을 받는 것이 더 유익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역사도 여호와 하나님의 일하심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일하심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하심으로 그들이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이라는 이름의 뜻은 백성의 수가 많다는 뜻입니다. 백성의 수가 많게 하려고 여호와께로 가지 못하게 하고 가짜 여호와께로 이끈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죄에서 돌이키게 하시려고 백성들의 숫자들을 줄여버리시는 것입니다. 힘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의지해야 할 것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늘 환난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의지해야 하는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세상의 힘을 의지하게 않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의 언약을 의지하여 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오늘 본문 8-9절을 보면 여호아하스의 남은 사적과 모든 행한 것과 그 권력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여호아하스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사마리아에 장사되고 그 아들 요아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고 합니다. 결국 여호아하스가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러면 여호아하스가 지옥에 갔습니까? 이 여호아하스가 바로 우리라고 보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도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을 여호와께서 어떻게 이끌어 가십니까? 환난을 당하게 하시고 힘을 다 빼 버립니다. 이렇게 되는 자들이 여호와께서 붙들어 주시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가 복된 자입니다.

오늘 본문 10-13절을 보면 유다 왕 요아스의 삼십 칠년에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 륙년을 치리하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좇아 행하였더라. 요아스의 남은 사적과 무릇 행한 일과 유다 왕 아마샤와 싸운 권력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요아스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이스라엘 왕들과 함께 사마리아에 장사되고 여로보암이 그 위에 앉으니라고 합니다. 여호아하스가 죽고 그의 아들 요아스가 왕이 됩니다. 남 유다의 왕도 요아스이고, 북 이스라엘의 왕도 요아스입니다. 동명이인 입니다. 북 이스라엘의 요아스 왕이 16년간 다스리는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합니다. 그 죄는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한 것입니다. 이 요아스가 죽고 나자 그 아들 여로보암이 북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이 왕이 여로보암 2세입니다. 요아스가 여로보암을 존경하니 자기 아들에게 이와 같은 이름을 붙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 번이나 나오는 말씀이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못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자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겠습니까?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 언약의 신실함을 위하여, 곧 자기 아들의 희생의 공로를 위하여 이들을 붙들고 가시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13:22-23절을 보면 여호아하스 왕의 시대에 아람 왕 하사엘이 항상 이스라엘을 학대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을 인하여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풀어 긍휼히 여기시며 권고하사 멸하기를 즐겨 아니하시고 이때까지 자기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셨더라고 합니다. 여호아하스가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로인해 아람 왕이 쳐들어와서 괴롭게 하자 기도하였습니다. 이에 여호와께서 구원자를 보내어 주셨습니다. 그로인해 잠시 백성들이 자기들의 집에서 살게 되지만 다시 여로보암의 죄로 돌아갑니다. 이처럼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못하는 여호아하스를 왜 구원하여 주시는 것입니까?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 때문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는 구약을 율법으로 봅니다. 그러나 율법의 수건이 걷어지면 구약에서도 복음을 보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3장에서 새 언약의 일꾼이란 모세의 수건이 벗겨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새 언약으로 보니 구약에서도 복음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5절을 보면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성령으로 된 것은 육체의 능력인 율법의 행함이 아닌 복음을 듣고 믿는 믿음으로 된 것입니다. 이러한 예를 아브라함을 통하여 말씀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복음을 들었다고 합니다.

계속해서 갈라디아서 3:6-14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내용을 이렇게 신약까지 연결하면 구약에서도 왜 인간이 은혜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여기서 인용한 모든 내용들이 다 구약의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못하는 그 죄, 그 저주를 누가 대신 받으신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복이며, 오늘날 이방인인 우리도 받는 복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이 놀라운 복음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만 오롯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21절을 보면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덧입은 것은 오직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우리의 죄를 뒤집어 쓰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덧입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찬양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날 수 없음을 알게 하시고 겸손히 주님 앞에 나아가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믿음으로 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멸망의 자식들이 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의 언약에 참예하는 복된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구원자를 주시는 하나님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열한 번째 왕이었던 여호아하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17년간 왕위에 있었던 그는 그 전후의 모든 왕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죄를 범하게 한 첫 임금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가고 거기서 떠나지 않았습니다(본문 2). 이에 노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아람 왕 하사엘의 손과 그의 아들 벤하닷의 손에 넘기셔서 학대를 받게 하셨고(본문 3-4), 그러자 여호아하스는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했으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구원자를 주셔서 아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다시 평화롭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본문 4-5). 그 구원자가 누구였는지 기록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구원자가 엘리사였으리라는 것이 우세한 견해이지만 다른 사람으로 보는 견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자가 누구였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호아하스의 간구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여로보암 집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사마리아에 아세라 목상을 그냥 두고 우상을 숭배하기를 계속했다는 것입니다(본문 6).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람 왕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에 마병 오십 명과 병거 열대와 보병 만 명 외에는 남은 것이 없을 만큼 그들을 거의 멸절시켜 타작마당의 티끌 같이 되게 하셨습니다(본문 7). 이 이야기는 우리가 사사기에서 줄곧 보아온 이스라엘 백성의 전형적인 역사의 반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외적의 침략과 압제와 수탈을 당하게 되고, 견딜 수 없어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한 지도자를 세워 외적을 물리치게 하셔서 자유와 평화를 되찾게 해주시고, 이스라엘은 또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함으로써 다시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하곤 한 역사입니다.

 

우리에게 이미 익숙해진 평범한 역사이야기이지만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끊임없는 배은망덕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입니다. 여호아하스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첫 왕 여로보암의 죄를 그대로 따라간 자였습니다. 여로보암의 죄가 무엇이었습니까? 무엇보다도 우상을 만들어 세우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우상을 섬기게 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에게서는 쉽게 떠나면서 우상숭배의 죄로부터는 좀처럼 떠날 줄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그것 때문에 이방족속의 침략과 압제와 약탈을 당해야 했고 그 고통을 견딜 수 없어서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했으면서도 그들 땅에 아세라 목상을 그냥 두고 우상숭배를 계속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여호아하스와 이스라엘의 간구가 당장 힘든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일시적으로 행하는 것임을 하나님께서는 아시면서도 그 간구를 들어주시는 것을 봅니다. 이스라엘에 친히 벌을 주시고도 거기서 그들을 빨리 풀어주지 못하셔서 그들이 살려달라고 간구하기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4-5절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학대하므로 여호아하스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셨으니 이는 그들이 학대받음을 보셨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에 구원자를 이스라엘에게 주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아람 사람의 손에서 벗어나 전과 같이 자기 장막에 거하였다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을 간구하는 이에게 구원자를 주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옛 이스라엘에게만 그렇게 관대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그러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우리에게 큰 위로와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후에도 또 죄를 짓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다 아시면서도 우리가 구하면 우리에게 구원자를 보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니 우리가 먼저 구하기도 전에 구원자를 보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자로 미리 보내주신 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그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형언할 수 없는 은혜의 증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그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비할 데 없는 관대와 인내의 증표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께 세세무궁토록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 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독생자를 주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유일하신 아들을 내놓으신 사랑이야말로 모든 사람의 이해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의 백성을 위해 못 하실 것이 하나도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아하스 같은 자의 간구를 들어주시는 일 정도는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원을 간절히 구하는 이들에게 얼마나 놀라운 일을 행하셨는지를 성경은 수없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간청을 들으시고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려는 뜻을 몇 번씩이나 돌이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뜻을 여러 번 돌이키시는 것이 하나님께 있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을 정복해가던 여호수아가 숫적으로 압도적인 가나안 연합군과의 싸움을 단 하루에 끝내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완승을 거두기까지 해가 중천에 머물고 달도 움직이지 않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 요청을 들어주신 하나님이십니다(10:12-14). 해와 달이 움직이지 않으려면 그것들과 함께 맞물려 운행되는 모든 천체가 다 멈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행하셨습니다. 남왕국 유다의 왕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지만 그가 하나님께 울며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눈물을 보시고 삼 일만에 그를 다시 일으키시며 그의 수명을 15년이나 연장해주실 뿐 아니라 그 치유의 약속의 징표로서 해시계의 그림자가 십도를 뒤로 물러나게 해달라는 요구를 들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해와 달이 운행을 중지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지만 반대 방향으로 운행한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죽을 병에 걸려 절망하는 한 사람에게 회생의 확신을 주시기 위하여 그 엄청난 일을 감행하신 하나님이십니다(왕하20:1-11).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를 세 가지 비유로 설명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비유가 의 비유입니다(15:3-7). 어떤 목자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라도 잃으면 그는 아흔아홉 마리 양을 들에 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며, 찾아내면 즐거워서 어깨에 메고 집에 돌아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기를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한다는 비유말씀입니다.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시면서까지 죄인 한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비유입니다. 두 번째 비유는 의 비유입니다(15:8-10). 동전 열 드라크마를 가진 여자가 있는데 그 동전 중 하나라도 잃으면 그 여자는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다가 찾아내면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기를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하리라는 비유입니다. 그까짓 작은 동전 한 닢 때문에 온 집안을 다 뒤지며 찾을 사람이 어디 있으며 또 그것 하나 찾았다고 이웃친구들을 다 불러 모으고 잔치를 베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무리해 보이고 손해 볼 일조차도 마다하지 않으신다는 비유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비유가 그 유명한 의 비유입니다. 소위 로 더 알려진 그 이야기를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죄인인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고 무한한 사랑을 말하는 비유로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비유말씀들을 통해 설명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친히 당신의 몸으로 실행하시며 증언하셨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당신과 동등한 하나님의 자리에서 사람의 자리로, 종의 자리로 내려 보내신 일이야 말로 가장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사람이 당하는 가장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운 십자가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것도 참으로 그 어떤 일보다 크고 놀라운 사건인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 태양계 안에서의 움직임의 이변 같은 것은 비교도 될 수 없는 이변인 것입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질서가 뒤엎어지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그런 불가능한 일조차도 마다하지 않고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우리가 부르짖으면 언제나 우리에게 필요한 구원의 손길을 펴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가집시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못 하실 일이 하나도 없으신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위로를 받읍시다. 그의 그 사랑의 온전한 실현으로서 이미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소망과 위로를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의 인내와 용서의 은혜가 크고 놀랍다 하드라도 끝이 없는 것은 아님을 또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내와 용서의 은혜가 크면 클수록 마지막 하나님의 진노는 더욱 클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내와 용서의 은혜가 오래 가면 오래 갈수록 마지막 하나님의 진노는 영원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내와 용서의 은혜를 남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대단히 어리석고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의 날은 언제 닥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대림절 첫 주일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자를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더욱 튼튼히 하고 하나님께서 이미 보내신 세상의 유일하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확신 가운데 기다리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에 모든 소망을 두며 거기에서 위로와 기쁨과 새 힘을 얻는 믿음의 자녀다운 삶을 바르게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새 달은 또한 우리에게 이 나라를 이끌어갈 지도자를 뽑는 달입니다. 정치적 빈사상태에 빠진 이 나라, 경제적 한기에 시달리는 대다수의 국민과 중소기업들, 거짓과 부패와 불신으로 가득 찬 이 사회, 이념과 가치관과 삶의 방식에서 양극화의 수렁에 빠진 이 민족을 살려낼 구원자를 세워야 하는 달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하나님께 구하면 정말 이 시대에 이 나라를 분열과 대립과 침체와 퇴행으로부터 구해낼 지도자도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잃지 말고 믿음으로 이 나라를 치유하는 우리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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