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제자를 세우심
막 3:13-19
13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15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16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17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18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19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막 3:13-19 / [열두 사도; 마 10:1-4, 눅 6:12-16] 예수께서 산으로 올라가 평소에 마음에 두였던 사람들을 부르셨다. 그리고 그들이 가까이 오자 14-15) 열두 사람을 뽑아 자신과 함께 있게 하셨다. 이는 그들을 세상에 내보내 말씀을 전파하게 하고 귀신 쫓는 권세도 주시려 함이었다. 16) 이때에 예수께서 택하신 열두 사람은 다음과 같다. 예수께서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우레의 아들들'이라고 부르셨던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안드레, 빌립, 바돌로매, 마태,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로마 정부를 혁명으로 뒤엎으려던 가나안 사람 시몬, 나중에 예수를 배신한 가룟 유다 등이다.
예수님은 복음 전도 사역을 위한 열두 명의 제자들을 부르시고 세우십니다. 세워진 열두 명의 제자들의 모습은 부르심이 은혜로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자들을(13-15) 예수님이 산에 오르실 때는 매우 중요한 것을 선택하기 전에 기도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눅 6:12). 누가복음에는 밤늦게까지 기도하셨다고 나옵니다. 기도를 마친 후에 예수님은 열두 명의 제자들을 세우시고, 사도라 부르십니다(눅 6:13). 예수님께서 택하신 열두 명은 ‘원하신 자들’이고 ‘부르신 자들’이며, 이 부르심 앞에 ‘순종한 자들’입니다. 제자도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들을 부르시고 택하신 이유는 복음을 선포하도록 그들을 파송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복음을 선포할 준비를 갖추기 위해 두 가지가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그들이 전해야 할 복음의 메시지를 배워야 했습니다. 또한 그들이 맞서야 하는 영적인 세력을 이기기 위해 ‘귀신을 내쫓는 권능’으로 무장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예수님과 가까이 하면서 익혀지는 것들입니다. 제자들에게 위임된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복음의 메시지와 귀신을 내쫓는 표적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보여주는 중요한 표지로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나타나야 할 표지입니다.
열두 제자들(16-19) 예수님이 세우신 열두 명의 제자들이 누구인지 그 이름이 나오고 있습니다. 사복음서에 열두 명의 이름이 동일하게 나오지 않고 각 복음서 마다 다르게 기록되기도 했습니다. 열두 명의 제자들은 시몬 베드로,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안드레와 빌립, 바돌로매(나다나엘, 요 1:45-49), 마태(세리, 레위, 막 2:14; 눅 5:27-29)와 도마(디두모, 요 11:16),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작은 야고보, 막 15:40), 다대오(유다; 눅 6:16;행 1:13), 가나나인 시몬(셀롯인 시몬, 행 1:13), 가룟 유다입니다. 열두 명의 제자들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열두 명의 사도들이 무슨 이유로 사도가 될 수 있었는지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에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선택되지 않은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한 모습이 없었습니다.
적용: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당신은 이미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모든 부르심에는 공통적인 목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나타내는 사명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앞으로 갈 길이 아득히 멀고 목적한 바에 이르기에는 아직도 먼 길이 있습니다. 그 길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는 나아갑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를 보내사 예수님의 이름으로 힘 있는 사역에 동참하게 하십니다.
< 설 교 >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라
막 3;13-15 / 강문호 목사
내가 쓴 책 <성막으로 성경을 말한다>가 쏘련어로 완역되어 출판되었습니다.
출판 기념 쏘련 목회자 쎄미나가 가라간다에서 있었습니다. 약 1000명 가량이 모였습니다. 대단하였습니다. 통역이 필요하기에 3박 4일간 하였습니다. 잊을 수 없는 흔적이 남아 있는 성막 쎄미나가 되었습니다. 카자흐스탄은 우리 나라보다 큰 데 인구는 몇 백만에 불과하였습니다. 겨울이면 영하 40도에서 50도까지 내려 갑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벌판입니다.
그 벌판을 달릴 때 빨리 가려고 혼자 자동차를 몰아 달립니다. 아직 미개발국이라 자동차 생산이 없습니다. 모두 중고차입니다. 만일 빨리 가려고 혼자 가다가 벌판에서 자동차가 고장나면 거의 다 얼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고가 겨울마다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좀 늦더라도 뒤에 오는 차를 기다렸다가 같이 가면 사고가 나도 죽을 염려가 없습니다. 멀리 가려면 두 세 대가 모여서 같이 가야 합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야 합니다.
■ 한 가지 이야기를 더 드리려고 합니다. 썬 다씽 이야기입니다. 눈이 엄청나게 많이 온 어느 날 썬다씽은 전도하기 위허여 험악한 산 길을 혼자 걷고 있었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산 넘어 동네로 복음을 전하러 가는 썬다씽의 발걸음은 사명의 발걸음이었습니다. 그 때 산 길에서 마침 모르는 이를 만나 친구삼아 같이 가게 되었습니다. 의지가 되었습니다. 가다보니 한 사람이 눈길을 걷다가 지쳐서 쓰러져 있었습니다. 썬다씽이 말했습니다. <우리 이 사람을 업고 가십시다.>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내 몸 하나 가기도 힘든 데 이 사람을 업고 가다가는 같이 죽어요.> 그리고 거절하였습니다. 썬다씽은 그가 거절한다고 죽어 가는 사람을 죽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전도자 양심에 죽는 사람을 그대로 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다가 같이 죽더라도 업고 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 사람을 등에 업었습니다. 천근만근이었습니다. 온 몸에 진땀이 흘렀습니다. 한참을 걸었습니다. 지쳐서 같이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등에 업힌 사람은 얼었던 몸이 녹기 시작하였습니다. 썬다씽의 몸이 뜨거워졌기 때문입니다. 서서히 의식이 돌아 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가다 쉬고, 쉬다가 갔습니다. 드디어 등에 업히지 않고 같이 걷게 되었습니다. 친구가 되었습니다. 한참 가다보니 한 사람이 길거리 쓰러져 있었습니다. 얼굴을 들치고 보니 빨리 가겠다며 혼자 가던 그 사람이었습니다. 이미 얼어 죽어 있어 있었습니다. 추워서 얼어 죽은 것이었습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일하실 때 제일 먼저 하신 일은 12 명 제자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혼자서도 무슨 일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내가 12 영이나 되는 천사를 동원시키지 못 할 줄 아느냐?>
12영은 12만명입니다. 예수님은 한 마디로 천사 군사도 동원시키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갈릴리 바다를 건너실 때 배가 없어도 건너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갈길리 바다를 걸어서 건너셨습니다. 어느 관광객이 갈릴리 바다에서 배를 타려고 요금을 물으니 엄청나게 비쌌습니다. 관광객이 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걸어서 건너셨구나!>
예수님은 사람의 도움없이도 하시고 싶으신 일을 다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12명 제자를 부르셔서 같이 일하셨습니다.
이유가 분명합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 온지라.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게 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함이러라>
예수님이 12명 제자를 부르신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12명 제자를 부르신 이유를 분명히 본문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1.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2. 또 보내사 전도도 하게 하며
3. 귀신을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는 12명 제자를 부르시고 예수님과 같이 일하자고 하셨습니다. 전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귀신도 내어 쫓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들에게 우리끼리 같이 가라고 명하십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예수님이 같이 있어줄 테니 예수님과 같이 일하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
처음에 제자들은 둘씩 둘씩 짝지어 같이 다니며 전도하고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후에는 12명 제자들이 모두 한 명씩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일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같이 가면 멀리 갑니다. 예수님과 같이 가면 멀리 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12 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이 멀리 갔습니다. 온 세계를 복음을 염색하였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심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오늘 제목을 다시 외치려고 합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주님과 같이 가면 됩니다.
주님같이 가면 다음과 같은 유익이 있습니다.
1. 시너지 효과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철사를 가지고 바늘을 만들면 하루 종일 25개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둘이 같이 만들면 625개를 만들 수 있습니다.
말 한 마리가 마차를 끌면 1톤을 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마리 말이 같이 끌면 5톤을 끌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10을 쫓으면 두 사람이 같이 쫓으면 20명을 아니라 1000명을 쫓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시너지 효과라고 합니다. 같이 걸으면 시너지 효과가 있습니다. 같이 한 마음으로 일하는 것은 큰 힘이 됩니다.
예수님이 12명 제자들과 같이 일하려고 하셨습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면 됩니다. 예수님은 빨리 가려 하지 않으시고 멀리 가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2000년을 달려 왔습니다. 온 세계로 달려갔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일이 있을 때마다 같이 하면 큰 시너지 효과가 있습니다.
특별히 주님과 함께 가면 멀리 갈 수 있습니다. 시너지 효과가 어느 누구와 같이 가는 것보다 큽니다.
제자들을 부르셔서 같이 있자고 하신 말씀이 본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면 시너지 효과가 큽니다.
돌아가신 김우영 목사님이 하셨던 말씀이 설교 도중 문뜩 떠올랐습니다.
식인종들에게 선교하셨던 아셀트 선교사 이야기입니다.
아셀트 선교사는 생명을 걸고 식인종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여 주신다는 말씀 하나 확실하게 믿고 선교에 임하였습니다. 식인종들이 여러 번 아셀트 선교사를 끌고 가서 잡아먹으려고 시도하였습니다. 밤마다 기웃거렸습니다. 그런데 밤중에 찾아오기만 하면 어김없이 창칼을 들고 무서운 눈초리로 지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서워서 떨다가 그냥 가곤 하였습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식인종들이 아셀트 선교사를 낮에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낮에는 없는 데 밤이면 지키고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셀트 선교사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대답했습니다.
<우리 집에는 지키는 사람이 없습니다.>
식인종들이 말했습니다.
<거짓말 마시오.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한 두 번 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당신을 잡아먹으려고 여러 차례 왔지요. 그러나 무섭게 지키고 있는 그 때문에 접근하지 못 하고 돌아갔지요.>
그 때에 아셀트 선교사에게 떠오르는 영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쓸모 없는 죄인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지켜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저를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지키는 자가 없다고 말했던 불신앙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아셀트 선교사는 순간적으로 회개와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과 같이 가면 멀리 갈 수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같이 가십시오. 나는 설교 하러 강대상에 올라 올 때도 주님을 초청합니다.
<주님 같이 올라가시지요.>
TV 녹화를 할 때에도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입으로 소리내어 외칩니다.
<주님 같이 녹화하시지요.> 지금 설교 준비하면서도 외칩니다.
<주님 옆에 같이 계셔 주세요.>
지난 주간 시카코 중북부 목사님 수련회를 인도하고 돌아 왔습니다. 정반대 시차였습니다. 그러나 가서 내리자 말자 첫 시간을 인도하고, 마지막 시간을 빨리 끝내고 비행기를 탔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4일간 시차를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주님께 그렇게 기도하였더니 주님이 그대로 응답하여 주셨습니다. 1분도 시차를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정말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혼자 가면 빨리 가지만 주님과 같이 가면 멀리 갈 수 있습니다.
2. 같이 가면 격려가 됩니다.
홀로 가다가 절망하면 누가 위로하여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둘이 가다가 한 명이 넘어지면 다른 사람이 일으켜 줍니다. 상처가 나면 상처를 싸매 줍니다.
그렇기에 혼자가지 않고 같이 간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 4:9-12)
신학교 동창 목사님 중에 한 명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습니다. 혼자 필리핀 여행을 떠났습니다. 당뇨가 심하였던 친구인 데 혼자 가서 갑자기 저혈당이 되어 길거리에 쓰러져 버렸습니다. 말도 통하지 않습니다. 아는 이도 없습니다. 길거리에 쓰러져 있다가 간신히 누가 병원으로 옮겨 주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어떻게 하여 주지 않았습니다. 죽었습니다. 여권을 보고 대사관에서 연락하였습니다. 그래서 시신을 한국을 가지고 왔습니다. 의사가 말했습니다. <누가 옆에 있으면 안 죽습니다.>
고등학교 동창중에 윤 용일이라는 친구가 카나다 밴쿠버로 이민을 가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 곳에는 배재 동창회가 아주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끈끈한 동문의식으로 늘 서로 도와주며 외국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이 친구 사업체에 불이 났습니다. 배재인들이 돈을 모아 주었습니다. 그는 이제 완전히 이민생활이 끝난 줄로 알았는 데 동창들의 도움으로 다시 사업을 시작할 수가 있었습니다.
“저런 동문들 은혜를 갚기 위하여서라도 죽을 힘을 다 하여 일하자”라고 결심하였습니다. 슈퍼를 개업하였는데 얼마나 잘 되는 지 마트 정도의 크기였습니다. 내가 그 곳에 들렀더니 “가지고 가고 싶은 만큼 가지고 가라”라고 시원스럽게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 같이 가면서 격려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같이 가면 멀리 갑니다. 그리고 격려가 됩니다. 하물며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실 때 주님의 격려는 가장 큰 격려가 됩니다.
인생길을 걸어가다 보면 정말 어려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누구에게 말할 수 없어서 혼자 고민할 때 나는 주님의 사진 곁으로 갑니다. 그리고 주님을 물끄러미 쳐다봅니다. 그리고 애절하게 불러 봅니다.
<주님!>
주님은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내가 대신 대답합니다.
<오냐!> 나는 또 말합니다.
<주님! 주님의 종 강문호가 왔어요.> 주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여 주시면 좋은 데 아무 말 없으십니다. 내 입으로 내가 말합니다.
<그래. 왔구나! 너 무슨 문제로 고통당하는 지 내가 알지.> 그리고 내 입으로 주님이 해답을 막 말씀하여 주십니다. 내가 내 입술을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내 입술을 주장하여 주십니다. 놀라운 지혜가 나옵니다. 주님의 격려가 나옵니다.
<강 문호야! 내가 세상을 이긴 것같이 너도 세상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느니라.>
나는 이 글을 시카코에서 돌아 오는 길에 비행기에서 정리하였습니다. 주님이 격려하시는 음성을 얼마나 세밀하게 들었는지 한참 넋을 잃고 눈물을 닦았습니다.
<강 문호야! 내가 네 진심을 알아. 내가 네 중심을 알아. 네가 얼마나 갈보리 교회를 사랑하는 지 알고 있지. 전기 한 등을 얼마나 아끼고, 종이 하나 아끼려고 편지지 이면지까지 사용하는 것을 내가 보았다. 갈보리 교회를 만 명 교회로 이루려고 발버둥치는 네 심정을 내가 알지. 내가 같이 할 거야. 누가 몰라 주는 것 같아도 알아주는 이가 있단다.>
혼자 가면 빨리 가요. 그러나 주님과 같이 가면 멀리 갈 수 있습니다.
■ 나폴레옹 전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사관학교 시절이었습니다. 친구들은 그를 왕따 시켰습니다. 세 가지 별명을 불렀습니다. <촌놈! 가난뱅이, 땅딸보.>나폴레옹은 너무나 괴로워서 학교를 포기하려고 하면서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어머니의 답장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내 아들 나폴레옹아! 비굴해지지 말라. 좋은 환경에서 영웅이 탄생한 적이 없다. 네게 무서운 적이 있다. 바로 허영과 사치다. 가장 귀한 친구는 독서다. 책을 읽거라. 나는 절대 낙심하지 않는다. 너를 믿는다. 내가 함께 하마.> 나폴레옹은 용기를 얻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장군의 되었습니다.
우리 교우 여러분! 오늘 지금 이 시간 주님이 여러분에게 외치는 말씀을 나는 확실히 들었습니다.
<갈보리 성도들아! 용기를 내라. 나와 같이 가면 멀리 갈 수 있다. 어떤 문제에도 해답이 있다. 어떤 강에도 다리가 있다. 어떤 쟝글에도 길이 있다. 헤쳐 나가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주님과 같이 가면 멀리 갑니다.
3. 같이 가면 공격당하지도 않습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야 합니다. 같이 가면 격려가 되고 누가 감히 공격하지도 않습니다. 같이 있는 사람을 공격하다가는 자기가 오히려 당할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동물의 왕국을 가끔 봅니다.
사슴은 연약합니다.
사슴과 호랑이가 싸우면 백번 싸워도 백번 다 사슴이 이깁니다. 그런데 호랑이 사슴을 잡아먹으려고 할 때 숲속에 숨어 한 마리를 노립니다. 같이 있는 사슴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습니다. 홀로 떨어져서 풀을 뜯고 있는 사슴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같이 있는 사슴에게 대들면 다른 사슴들이 한꺼번에 공격하면 아무리 호랑이라도 도망치게 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늘 같이 계셨습니다. 그러면 마귀들이 공격하지 못 합니다.
큰 구렁이가 병아리를 잡아먹으려고 따라갑니다. 잡히면 한 입에 들어갑니다. 병아리가 도망치다가 엄마 품속으로 쏙 들어갑니다. 그러면 구렁이는 감히 덤벼들지 못 합니다. 어미 닭은 새끼를 보호하려고 생명을 걸고 싸우기 때문입니다. 죽을 줄 알면서도 덤빕니다. 무섭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덤비면 그 어떤 적도 벌벌 떨게 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과 함께 한 제자들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같이 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과 떨어지면 사고가 납니다.
주님과 같이 걸어가는 길은 멀리 가는 길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으면 공격을 막아 주십니다.
■ 어떤 목사님께서 부흥회를 인도하시러 여수행 기차를 탔습니다. 잠을 자려고 하였지만 잠은 오지 않고 옆 노인에게 전도하라는 성령의 감동이 자꾸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서로 말문을 연 후 예수를 믿으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노인은 화를 내면서 말했습니다. <이제 보니 예수쟁이로구만. 내가 뭐가 답답해서 예수를 믿어> 그래도 전도를 계속하자 노인은 순찰중인 안내원을 불렀습니다. <이봐요. 내 돈 내고 편히 가려고 일등칸에 탔는데 이 예수쟁이가 날 보고 자꾸만 지옥에 간다고 공갈을 하니 더는 못 참겠소. 차비를 물어주든지 이 예수쟁이 입을 막아 주든지 하시오> 창피를 당한 목사님이 얼굴을 숙이고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자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이 소주를 사오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까는 미안했소. 소주나 한 잔 하며 이야기 하십시다>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할아버님. 그렇게 술만 좋아하시면 지옥 갑니다.> 그러나 노인은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쯤 흘렀습니다. 얼마 전 호통을 치던 안내원이 목사님께 다급하게 달려와 물었습니다. <아까 그 노인을 아시나요?> <아니요 모르는 분인데 그냥 전도를 했지요?> 안내원이 말했습니다. <그 노인은 술에 취해서 화장실로 갔어요. 승강구에서 시원한 공기를 마신다고 하다가 비틀거리더니 떨어져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십시오. 그러나 멀리 가려면 우리 같이 가야 합니다. 특별히 주님과 같이 가야 합니다. 그러면 멀리 갈 수 있습니다. 그려면 시너지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격려하여 주십니다. 주님이 공격을 막아 주십니다.
■ 마지막으로 얼마 전 전라도 광주에서 일어났던 사건 하나를 소개합니다.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 네 명이 엘레베이터를 탔습니다. 그런데 고장이 나서 그 속에서 67시간을 갇혀 있었습니다. 4명은 잠바 두 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추웠습니다. 그래서 꼭 끼어 안고 잠바를 덮고 추위를 견디고 살았습니다. 같이 살아야 합니다. 서로 어울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12제자를 불러 세우신 목적
박성복 목사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꼭 원하는 제자를 택할 때에 얼마나 신중을 기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6장 12절에서 1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의 어느 산인지는 몰라도 그 산에 올라가셔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신 후에 열두 제자를 불러 세웠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제자를 세울 때에 밤이 맞도록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밤이 맞도록 기도를 하고 원하는 제자를 세울 때에 그 속에 가룟 유다도 들어 있습니다. 가룟 유다를 생각하면서 “이 제자를 분명히 열둘에 넣어야 되는데”라고 하면서 주님이 얼마나 신중을 기했을까요? 얼마나 고심이 있었을까요? 제가 바꾸어서 생각을 해봤습니다. 저 같으면 저 사람은 아닌데 라고 하면서 택한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6장에 보면 산에 가셔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신 후에 열두 제자를 불러 세웠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께서 산에 오르신 후에 자기가 원하는 제자를 불렀다고 그랬습니다. 오늘 여러분, 이것이 구약을 완성하는 역사에 들어와서 주님이 자기가 원하는 제자를 불러 세우시는데 이는 뿌리는 종을 세우는 중입니다. 그러나 오늘 여러분들은 정말로 거두어들이는 시대에 꼭 주님이 원하는 종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여기에 ‘불렀다’라고 하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는 그 부른 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초대했다는 겁니다. ‘무엇 때문에 저 사람을 불렀는지? 꼭 그가 할 일이 무엇인가?’ 이 모든 것을 주님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부른 것입니다. 제가 늘 얘기하지요? 만약에 예수님이 예루살렘 공회원들 중에서나 어떤 문벌가나 재벌가나 유명한 정치인들을 불러서 제자로 삼았더라면 예수님을 대접하는 수준이 달랐을 겁니다. 벌써 그 레벨이 다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르실 때에 재벌가도 부르지 않고 부유층도 부르지 않고 유명한 정치인도 부르지 않고 유명한 종교인도 부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 평범한 서민이며 생활전선에서 일하는 사람들중에 주님이 불러서 제자로 삼았습니다. 그중에서 제일 주님이 거론을 많이 한 제자가 누구냐 하면 갈릴리 어부들입니다. 갈릴리 어부들은 첫째로 베드로와 그 형제 안드레와 요한과 그의 형제 야고보가 갈릴리 어부출신입니다. 그다음에 유대계에서 제일 욕하고 세금쟁이로 아주 손가락질 받는 세리 마태를 주님은 제자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독립운동가 열심당원 가나안 사람 시몬도 불렀습니다. 나머지 다섯 사람은 잘 알려지지는 않고, 부르기는 했습니다마는 갈릴리 지역 주민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중에 남쪽 사람이 한 사람이 있는데 가룟 유다입니다. 다 그 지역 주변에 사는 사람들을 제자로 불렀는데 남쪽 지역에서 제자 삼아 불러올린 사람은 가룟 유다 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마음에 고심이 되었을까요? 그가 원하는 자 중에 가룟 유다를 넣었기 때문에 제가 이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주님은 원하는 자를 왜 열둘을 부른 것일까요? 그 이유는 구약의 역사는 신약의 모형입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의 그 후손들이 애굽에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찾아갈 때에 광야라는 거친 들을 거쳐야 됩니다. 광야라고 하는 그 모래언덕을 넘어야 됩니다. 거기는 아름다운 도로도 없고 나무 그늘도 없고 쉬어갈 만한 장소도 없기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구름을 덮지 않으면 그늘이 없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밤에 불을 비춰주지 아니하면 방향을 잃을 정도로 험난한 길을 거쳐서 약속의 땅을 밟게 됩니다. 그래서 야곱의 12아들에서 12지파가 나옵니다. 구약은 모형이기에 야곱의 열두 아들의 이스라엘은 모형적인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나 신약에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를 통하여 주님의 피를 가진 백성이 현대판 광야 길인 이 세상을 통과할 때 주님이 이모로 저모로 도와주시고 그 약속의 천국을 가도록 역사해 주시는데 이것이 오늘날 영적 이스라엘의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오늘날에도 주님이 원하는 자를 선택하여 사용하시게 되는데 여러분이 분명히 주님이 원하는 종이 되기를 바랍니다. 왜 주님이 이렇게 원하는 종을 선택할까요? 여러분, 여기 보면 ‘자기가 원한다’고 되어 있어요. 주님이 원하는 자를 불렀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열둘이냐 라고 하는 것은 구약에 12지파가 고향을 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 야곱의 열둘은 모형이고 신약의 열둘은 성취인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의 열둘이 가는 가나안도 모형이고 신약의 12사도가 중심하여 가는 천국은 성취인 것입니다. 그래서 모형과 성취를 여러분이 잘 아셔야 됩니다.
제가 금요일 안동에서 모임이 있어서 갔다가 왔는데 제가 너무 피곤하고 힘들다고 했더니 “목사님은 운전하라고 안 합니다. 차가 앞에 갖다 댈 테니까 앉아서 갔다 오기만 하면 된다”고 해서 제가 이제 어른이 되고, 또 증경 노회장이 되다 보니까 안 갈 수가 없어서 갔다왔는데 가서 보니까 참 잘 왔다 싶어요. 그래서 이런저런 이야기중에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제자를 뽑을 때에 지식층도 재벌가도 귀족도 안 뽑고, 아주 말도 잘 못하는 사람들, 그저 먹고살기에 급급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제자로 뽑아서 같이 있고 싶어 했다고 하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왜 주님이 그들과 같이 있어야 되느냐면 훈련 때문입니다. 제가 이번에 목사님들하고 이런저런 대화를 하고 있는데요 엊그제 페루에서 우리 한국에 유명한 사람들이 그곳서 헬기 타고 시찰하다가 산에서 충돌해서 죽은 사람들이 있지요? 한국에 최고의 엘리트인데 그중의 한 사람이 영동교회 교인이에요. 그래서 그 담임 목사가 “하, 목사님 나이 마흔아홉 살에 인천공항 화물터미널로 시신이 오는데 너무 안타까워 못 보겠더라”고 해요. 여러분, 마흔아홉살의 성도인데 대한민국에 최고의 엘리트인 그 시신이 비행기에서 화물터미널로 하얀 보자기에 뒤집어 씌워져서 내리는데 그 가족이 어떻겠으며 목사가 어떠했겠느냐고 하는데 제가 그 소리를 딱 들을 때, “주님, 우리 교회에 그런 유명한 인물 없어서 좋습니다”라고 마음속으로 그랬습니다. 기절할 것 같더라고 해요.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그래서 저희가 이런저런 얘기 하다가 ‘왜 주님이 좀 골치 아픈 것들 잡아가지 꼭 이 땅에 필요한 사람 잡아가느냐?’고 막 그러니까 골치 아픈 사람 잡아가면 거기도 골치 아프니까 아예 쓸 만한 사람 골라가서 그렇다고들 하면서 한 바탕 분위기를 바꿔보기도 했었습니다. 여러분, 그런 말을 들을 때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내가 그랬다면 어떻게 되며 여러분의 식구가 그렇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살아도 그만, 죽어도 그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이 아니라 외국까지 가서 그 아까운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그랬으니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그만 생명이 끊어지는 것은 간단해요. 그런데 교회가 초상이 나고, 나라가 초상이 나고, 가정은 말할 것도 없고, 애가 둘이라는데 참으로 가슴 아프더라구요. 그러다가 어느 목사님이 “우리 교회의 장로님이 방송국을 하고 있는데”라고 하는 그 소리를 들을 때에 제 눈이 번쩍했습니다. 방송을 하루 하는데 1억씩 준답니다. 그런데 방송국에서 하는 얘기가 방송국을 운영하기 위해서 1억씩 받고 그 사람을 설교를 시키는데, 과연 한국 기독교인들이나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저 소리를 듣고 감동 받아서 예수를 믿겠느냐면서 전혀 저것은 아니라고 하고 싶어도 그 돈 때문에 아주 골드 아워에 그 사람 설교를 내보낸다면서, 가슴이 미어진다 그래요. 지금 기독교 방송을 듣는 한국 교회가 얼마나 많은데 저렇게 알맹이 없는 설교를 저렇게 해 가지고 듣는 사람이 마음에 감화 감동을 받고 뒤집어지겠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그 가슴을 치면서 그 분 설교를 내보낸다는 거예요. 진짜 들어야 할 설교들이 있을 텐데 그걸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젠 부흥 강사 시대도 지나갔고, 모여서 영적 훈련 한다고 막 혈안 칠 때도 지나갔고, 그룹 집회도 지나갔고, 다 지나가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고 할 때에 저는 “맞아! 그렇지”라고 하면서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기독교가 속수무책이다라고 하는데, 그 말을 하는 분이 학자요, 교수입니다. 제가 가만히 그 소리를 듣고는 거기에서는 제 얼굴 색깔이 제 색깔로 돌아왔어요. 이제 그 이유가 뭔지 알겁니다. 아까는 49살짜리가 정말로 우리나라 엘리트가 죽었다고 할 때에 나도 가슴 아픈데 당사자들은 얼마나 하겠는가?라는 생각을 하니 얼마나 가슴이 아픕니까? 그 담임 목사님이 말하는데 비행기가 12시 반인가 오더랍니다. 페루에서 오는데 조용히 비행기가 내리니까 하얀 것에 우리 한국 사람들 시신이 씌워져서 내리는데, 그 목사님은 자기 교회 시신이 오니까요 가슴이 철렁하더라면서 그런 소리를 들을 때는 숙연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저는 우리 교회를 생각해 봤습니다. 그 목사님은 자기 교회에 변호사가 스물 몇 명이 있고, 판사가 몇 명이 있다고 하는데 저희 교회는 변호사 변자도 없고, 판사 판자도 없고, 정말로 나는 자랑할 거리가 없지만 말씀 만큼은 확신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기독교 방송국에서 탄식을 하고 있고, 학자들이 탄식을 하면서, 이제 기독교에 뭐가 나와야 되는데 안 나온다는 거예요. 나올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나 저는 속으로 그랬습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동쪽에서 빛이 올 것이다” 이것이 뭐냐면 어두워 질 때 반드시 말씀의 빛이 뜨거든요. 창세기를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고 하다가 빛이 나오더라구요. 창세기에 분명히 그랬습니다. 그래서 점점점 교계가 어두워지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고 했듯이, “세상이 혼돈 할 때에 정말로 영생의 빛이 나오겠구나!”라는 확신을 더욱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방송국 사장이 탄식을 한다는 소리를 들으니까요 ‘하! 그렇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이젠 신학교 교수나 박사라고 해도 도저히 성도들에게 먹혀 들어가지 않고, 이걸 해봐도 안 되고, 저걸 해봐도 안 된다는 겁니다. 이제는 이런 시대도 지나가고, 저런 시대도 지나가고, 이제는 기독교에 어떤 이변이 일어나야 되는데, 칼빈도 25살 때에 혁명이 일어나서 종교 개혁이 일어났다면, 오늘날도 그런 사람이 하나 나와야 되는데, “이제 암담하다”는 소리를 들을 때에 저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면서 생각해 보니 우리 동인교회 성도들 중에 재벌가도 없고 유명한 정치인도 없고, 그저 평범한 서민들로 어렵고 힘들게 생활하는 사람들이 우리 동인교회에 와 있는 줄 알지만 말씀만은 소망이 넘치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 왜 주님이 원하는 자를 이렇게 열둘을 불렀느냐면 구약의 열둘이 신약에도 열둘이 나왔습니다만 오늘 여기에 보면 예수님이 원하는 자로 가룟유다까지 들어왔는데, 밤새도록 기도하는 중에 이 자를 안 택할 수는 없었던 것은 그가 예수를 파는데 결정적으로 한 번 써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전혀 얼굴색 붉히지 아니하고, 그 원하는 자 중에 넣어서 3년 동안 훈련을 시켰습니다. 가룟유다도 전도에 나갔을까요 안 나갔을까요? 마태복음 10장 보면, 둘씩, 둘씩 보낼 때에 가룟 유다도 전도에 나간 것입니다. 이는 가룟유다의 종말까지는 전도에도 나갔다고 보게 되는데, 주님은 그 모든 것을 아시면서 딱 덮어 버리고 원하는 자 중에 넣어서 부르셨는데, 밤이 맞도록 기도할 때에 그 기도가 어떻겠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싫으면 싫은 것이 얼굴에 나타나고 좋으면 좋은 것이 얼굴에 금방 나타나지요? 그런데 주님은 그걸 다 덮어 가면서 열 두 제자를 뽑을 때에 여기에 넣어서 불렀습니다. 왜 이렇게 뽑아서 불렀냐면 영적 이스라엘을 세우기 위해섭니다. 구약 야곱의 열 두 지파는 육적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영적 이스라엘을 세워 현대판 광야 길을 걷게 하기 위해서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 피를 뿌려서 고향가게 했듯이, 주님 자신의 피를 가진 백성들을 현대판 광야 길을 거쳐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그 성취하는 선구자 열둘을 뽑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뿌리는 역사입니다. 큰일을 앞에 놓고 스승과 제자가 3년 동안 이렇게 같은 솥에서 밥을 먹고 같이 움직이면서 왜 이렇게 합니까? 왜 이렇게 해야 됩니까? 이 분들은 성경 지식이 없습니다. 이 분들은 한 번도 설교해본 자도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정한 훈련과 일정한 교육을 시켜야하기에 미리 뽑아서 훈련을 시겼던 것입니다. 여러분, 봐보십시오. 무조건 성경을 바로 들어간다고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교육을 시키고 일정한 훈련을 시켜서 그 훈련 받고 교육 받은 몸에 성령이 들어가니 정말로 유명한 설교가 그 입에서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성경 지식이 있는 바리새인 교인이나 율법 학자를 부르지 아니하고 성경 지식이 없는, 생활전선에서 밥 먹고 살기 어려워하며 그저 날마다 날마다 생활하는 그 사람들을 불러서 교육시키고 훈련시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분들은 재능도 없습니다. 말 잘하는 재주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훈련을 시킬 수밖에 없지요? 그래야 또 사상 교육이 됩니다. 절대 이 역사는 사상 교육이 안 들어가면 안 됩니다.
알아도 성경 안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만약에 성경 안다고 불렀다면 율법 학자가 부름을 입어야 되겠지요?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순종하기를 좋아하고, 아무리 서민이지만, 아무리 나타낼 것이 없지만 주님 앞에 부름을 입은 자가 복을 받고 선구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도 내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아, 나 같은 게, 나 같은 가정주부가, 나 같은 직장 직원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이 쓰시기로 하셨다면 훈련 시켜서 그 그릇을 분명히 쓰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늘 얘기하지요? 모세가 바로 왕궁에서 교육받고 40살이 되어서 힘이 넘치고 지식이 충만했을 때 모세를 썼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집니다. 젊었기 때문에, 배웠기 때문에,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세를 미디안 광야에 보내서 40년 동안 늙혀 버렸습니다. 거기서 찌들었습니다. 거기서 울었습니다. 거기서 약한 자가 강하게 만들어졌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 쓴 거와 같이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성경의 전문 지식과 상식이 없더라도 하나님께서 동인교회에 오게 하시고, 또 이 방송을 듣게 하고, 하나님이 훈련을 시키시는 줄 믿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몸을 빌려서, 여러분의 입을 빌려서 쓰실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다 압니다. 내가 이 세상 떠나고 나면 나의 모든 직책을 이들에게 맡겨야 하기에 3년 동안 훈련 시켰지요? 이는 같이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여러분, 마지막 추수 때의 신원의 종들도 주님이 같이 있게 하기 위해서 부른다면 영원히 같이 있게 됩니다. 이 분들은 헤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제 역사함으로 주님을 맞으면 영원히 주님과 같이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또 여기에 예수님이 두 번 째에 무슨 말씀을 하셨냐면 14절 하반 절에 보면 “보내어 전도를 하기 위함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보내어 전도’라고 하는 것은 알리는 거죠? 전하는 거지요? 그런데 이는 뿌리는 역사 아닙니까? 제가 이제 앞으로 세상 얼마 남지 않은 거 같아서 지난번에 한 설교라도 또 읽어가면서 중요한 부분은 재정립해서 알려드릴 거 같습니다. 오늘 여러분, 내일이 6.25가 난지 62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제가 오늘 6.25 설교를 딱 잡아 얹었다가 오후 예배 때에 하기로 하고 오전엔 “주님 앞에 부르심을 입은 자”에 대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왜 12제자를 부르신 목적이 뭔지, 열 셋도 되야 되고, 열 하나도 될수 있는데 왜 열둘일까? 구약은 모형이요, 신약은 성취이기 때문입니다. 모형이 가나안 간 것과 같이 실제 그대로 현실로 성취가 되는 천국 가는 길이 오늘 우리들의 길이라고 하는 성경의 핵심을 이제는 가르쳐 줘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 동인교회의 목사가 됐다거나 장로가 됐다고, 권사가 됐다고만 하지 말고 동인교회 교인이라면 공 예배에 신경 쓰세요. 반드시 하나님이 부릅니다. 이제 가급적이면 공 예배 신경을 써야 되요.
우리가 여기에서 “주님, 저를 쓰렵니까? 저를 신원의 날에 쓰시렵니까?”라고 하면서, 우리가 훈련 받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면 주님이 왜 그들을 쓰시게 되었는지도 알아야 됩니다. 사도로 부르신 둘째 목적은 일정한 교육을 받은 다음에 그들을 전도자로 파송하기 위해서입니다. 왜냐면 주님이 없을 때에 당신의 일을 맡겨줘야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뭐냐면 알파 때의 역사인데, 예수그리스도를 모시고 훈련받은 그들이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어 이제 주님의 일을 대행해야 되기 때문에 훈련시키고 전도 파송을 합니다. 여기 예수께서 “보내사”라고 그랬습니다. ‘보낸다’는 것은 파송이거든요. 십자가 복음을 마음 밭에 뿌리기 위하여 보낸 겁니다. 사도행전 1장 8절 보면 “너희는 예루살렘 떠나지 말라.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유다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내 증인이 좀 되어 달라”는 부탁을 하시고 승천하시면서 “너희들이 본 그대로 다시 오겠다”고 하셨는데 이제 올 때가 꽉 찼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먼저는 파송하기 위해서라고 했는데 뿌리기 위해서라는 겁니다. 이제는 우리가 거두기 위해서 나가야 됩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현실의 환경이 여러분을 괴롭힌다고 해서 거기에 주눅 들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훈련시키는 과정은 절대 냉정합니다. 하나님이 훈련시킬 때 얼마나 냉정한가를 보십시오. 그저 정답게 찾아와서 순간 순간을 늘 위로하면 좋겠건만 훈련받을 때는 버린 것 같이 해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쓰실 때는 그 훈련받은 몸, 연단 받은 몸, 그저 쓰라림을 겪은 몸, 그 몸을 빌려 쓰시는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0장 1절에서 12절 내용도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열둘을 불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더러운 신에 감동된 자가 많이 있습니다. 제가 어제 저녁에 한강변에 운동을 좀 하려고 나가보니까 아따 참 자전거 붐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저희 집사람보고 ‘우리도 자전거 있으면 좀 설치면 좋겠다’라고 얘기하면서 가는데 어떤 정다운 부부가 유모차에 아기를 가운데 앉히고 둘이서 끌고 가면서 인도로 못 가고 자전거 도로 가는데 한 20대 후반쯤의 애가 가면서 하는 소리는 차마 제가 강대상에서 못할 소리입니다. 우리 집사람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모르지만 어찌나 더러운 욕을 해버리는지 그 부부가 어이가 없어하면서 “설마 우리가 그런 욕 당할 사람이 아니겠지?”하면서 뒤를 돌아보니까 아무도 없고 우리가 있거든요. 그러나 우리는 그 자전거 도로에 안 갔어요. 그런데 앞에 싹 가더니 또 돌아보고 욕을 바가지로 퍼 붓고 가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아무 소리도 못하고 너무나 어이가 없어 하더라고요. 나 같으면 한 소리 했을 겁니다. 그런 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다니 그들은 아마 예수님 다음 가는 분들 같아요. 젊은 사람이 그렇게 몹쓸 더러운 욕을 하는데 그 소리를 듣더니 그냥 그 위 인도로 아주 길이 나빠도 올라가더라고요. 참으로 험상 궂은소리를 하고 가더라고요. 그 똑같은 소리를 두 번하며 가는데 분명히 나이를 보니까 젊은 자예요
여러분, 어제부로 우리나라 국민이 5천만을 돌파했지요? 아따, 참으로 딸은 잘 낳아야겠더라고요. 뉴스 보니까 5천 번째 낳은 자식이 딸이더라고요. 여러분 봤지요? 그런데 그 딸이 행운이라고 하지만은 살아가면서 이 축복을 받아야 행운이지요. 5천번째라는 것을 찍어가지고 간호사가 딱 매주더라고요. 그 5천 번째도 그 숫자에 안 들어간 5천 번도 또 있을 겁니다. 그게 다 광고가 붙어서 5천 번이지 광고 안 붙은 5천명도 많이 있어요. 이제 갓 태어난 애들까지 5천만의 대한민국 국민이 하나님의 신이 건드리지 아니하면 마귀의 악령의 신이 건드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제가 얘기하지요? 사자나 짐승들은 천년 전이나 이천년 전이나 오천년 전의 똑같은데 사람은 더욱 악해지는 것이 뭐냐면, 주님 오실 때는 악해지고 사나워진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는 사람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자기가 자기 단속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그런 시대가 와 있습니다.
그래서 첫째로 예수님 때처럼 마지막 때도 귀신 쫓아내는 일이 있는데 귀신 들려도 표가 나는 사람도 있지만 멀쩡한 사람도 귀신 들린 사람 많습니다. 주님이 그 귀신 병균을 뽑아내도록 제자들에게 파송하면서 모든 병을 고치도록 합니다. 이는 어떤 영적인 병이든 육적인 병이든 모든 병을 치료해주신다는 것이고, 그리고 모든 약한 것도 고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사도들이 가면서 모든 병든 것도 고치고, 모든 약한 것도 고친다고 했는데 이 ‘약한 것’이 뭔가 싶어서 찾아봤더니 ‘마음이 연약하고, 우유부단한 사람, 여자같이 약한 자’인데 그런 성격도 바꿔놓겠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라”고 그랬습니다. 마태복은 24장 보면 뭐라 그랬습니까? “이 천국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0장에 마지막에는 “너희는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에게도 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마태복음 10장은 은혜시대 역사가 아닙니다.
사도행전 1장은 은혜시대 역사라면 마태복보음 10장은 은혜시대가 아니요. 왜? 이방의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의 길로도 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백성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가라고 했을까요? 그래서 유명한 학자의 주석을 찾아봤습니다. 도대체 이 분들은 뭐라고 말했는가하고 봤더니 그것은 복음 역사를 하기 위해 연습하는 과정이라고 해놨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주여, 무슨 연습을 그리 합니까?”라고 했어요. 오늘 여러분, 저는 그 방송국 이름은 여러분에게 말 안하겠습니다. 그 방송국 사장이 하는 말이 “한국교회에서 내 놓으라 하는 사람의 설교 한 번 들어보세요. 알맹이가 없어요. 우리 방송국에서 돈 1억을 받기 때문에 설교를 시키는데 알맹이가 없다”고 하면서 “이래가지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탄식하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소리를 듣고, 제가 속으로 그 방송 사장님이 조금만 기다려 보시면 “당신네 방송을 내가 빌려 쓰던가, 안 빌려 쓰면 동인 방송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 보십시오. 알맹이가 이제 나갈 겁니다”라고 제가 마음속으로 그랬다니까요.
오늘 여러분, “천국 복음을 전파하면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라고 했는데, 이미 예수님 오실 때부터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는 전파의 역사가 지금 이어져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여러분, 뭐라고 그랬습니까? “사마리아나 이방의 길도 가지 말고 차라리 잃어버린 양을 찾아가라”고 하면서 “전대 주머니에 동이나 은이나 금이나 아무 돈도 가지지 말고, 두벌 옷도 가지지 말고 가라”고 했습니다. 제가 이번에 태국의 산족들에게 갔다 왔지만 아무리 산족들이라도 어린애들에게 돈 줘 봐요. 그 아무것도 모르는 그들도 사탕하고 돈 주면 돈만 뺐지 사탕 안 받아요. 세상이 그리 되어버렸습니다. 이번에 제가 목요일 날 태국서 온 한 목사님과 일행을 만났는데 그들이 한국 음식을 잘 못 먹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참 잘 잡수어요. 점심엔 식당에 가서 많은 음식을 먹었는데 또 교회에 와서 우리 교회 이해선 권사보고 또 해봐라 그랬더니 이걸 다 잘 먹어요.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전도하러 갈 때 왜 돈 한 푼,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두 벌 옷도 가지지 말고 가라고 합니까? 전도 한 번 가보십시오. 외국 가보십시오. 참으로 못사는 나라 가면 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기지요? 그런데 주님은 가져가지 말라고 하거든요. 이거는 뭐냐면 마지막 신원의 날에, 천국복음을 전하러 갈 때는 이젠 오지에 가는 게 아니라 이미 예수 믿는 사람을 찾아서 천국을 소개시키러 가야 된다는 것이고, 가서 천국 복음을 전하면 반드시 너를 섬길 자가 있을 것이다라는 겁니다. 그리고 “만약에 받아들이지 않으면 먼지까지 털어버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은 은혜 시대 말로는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마지막 주님 복음 전파하기 위해서 미리 연습을 시키는 과정이라고 주석을 해 놨으니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여기 “보낸다”다고 했는데 원래 “사도”라는 말은 “보냄을 받는다”는 단어로 “아포스토로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복음을 전하러 보내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16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는 얼마나 주님 오실 때가 악한 세상인지 양을 이리 가운데에 보낸것 같다고 했는데 이리의 밥이 양이라는 말입니다. 양은 보호 색깔도 없고, 양은 싸울 무기도 없습니다. 그 양은 반드시 목자가 없으면 죽습니다. 그런데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낸다는 말은 죽을 확률이 낮다? 높다? 높다는 말 아닙니까? 그래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했는데, 뱀은 사계절을 압니다. 아무리 추워도 봄이 되면 나오고 아무리 따뜻해도 가을되면 들어갑니다. 계절을 압니다. 그리고 뱀은 첫째 사계절을 알고 둘째, 하루의 천기를 압니다. 해가 쨍쨍 떠도 비 올것 같으면 구멍에서 안 나와요. 그럼 이것이 뭐냐면 우리는 주님 오실 때를 알라, 계절을 알라는 말입니다.
하루의 천기를 보듯이 오늘 시대의 흐름을 잘 보라는 겁니다. 그리고 뱀은 귀가 없습니다. 귀가 없는데도 잘 듣습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냐면 귀가 없어서 들을 수가 없지만은 혀 바닥이 음향을 탐지합니다. 그래서 낼름 낼름 하고 혀를 내미는 것은 음향을 탐지해서 소리를 듣는 겁니다. 혀가 음향에 민감해서 계속해서 혀를 내미는데 뱀은 혓바닥으로 소리를 듣는다는 겁니다. 이해가 됩니까? 그리고 뱀은 절대로 창자가 곧습니다. 그래서 절대로 뱀은 뒤로 못 나갑니다. 이것은 “너희가 진리를 위해서 살되 절대 죽어도 진리의 길에서 뒤로 물러 가지 말라”는 말이거든요. 뱀의 창자가 곧습니다. 이 뱀이 지구상에 2700종이 있습니다. 그리고 북극과 남극에만 살지 않고, 어디든지 서식하고 있는 것이 뱀입니다. 그리고 뱀은 음식을 탐하지 않습니다. 주 1회만 먹어도 뱀은 충분히 살고요 때에 따라서는 월 1회를 먹어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너희도 어디 가서 과식하지 말고 뱀같이 지혜로우라”는 말인데 우리 사람이 장수하는 데는 과식을 안해야 된다고 하죠. 우리는 배의 70%만 담으면 되는데 120%를 담는답니다. 그러면 120%를 담아 축 처져서 음식을 소화시키는데, ‘헤헤헥’ 그러는데 이게 위에 부담을 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뱀은 주 1회 먹어도 살고 월1회를 먹어도 산답니다. 그래서 ‘뱀 같이 지혜로워라’고 했고 그 다음에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했는데 비둘기는 온유합니다. 그래서 “너희가 아무리 거친 소리를 들어도 온유하게, 사랑스럽게 평화롭게 대해 주도록하라”는 겁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10장 아닙니까?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정말로 우리는 예수님 앞에 이제 다가오는 신원의 날, 즉 추수하는 날에 주님의 마음에 드는 자를 뽑을 때에 여러분과 제가 뽑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소원
박지온 목사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으면 되는 것처럼 아무리 연약하고 힘이 없어도 하나님께 붙어 있으면 결국 열매가 맺힙니다. 예수님께서 어쩌다가 실수로 제자들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원하셔서 부르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창세 전에 작정하시고 때가 되매 우리를 교회의 지체로 불러주셨습니다. 몸의 지체는 모두 같지 않지만, 어느 하나도 없으면 안 됩니다. 교회의 힘은 지체로서 하나가 될 때 나오고, 흑암 세력이 틈타지 못합니다. 교회 안의 모든 지역과 기관들이 지체 사상을 가져야 합니다.
1. 하나님은 우리 개인이 구원받기를 소원하십니다.
① 오직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옵니다.
② 하나님은 우리 개인의 사상과 생각의 뿌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내려지기를 원하십니다.
③ 예수 그리스도로 뿌리가 내려질 때 흑암 세력이 물러가게 됩니다.
④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대로 마음에 뿌리가 내려져 기도할 수 있는 훈련이 되어져야 합니다.
⑤ 먹어도 먹어도 맛있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역사입니다.
⑥ 건강하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밥을 매일 가져다 주어도 먹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⑦ 건강한 사람은 매일 같은 밥을 먹어도 맛이 좋습니다.
⑧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때마다 새 힘을 얻는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⑨ 예수 그리스도로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예수님이 늘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확인되는 것입니다.
⑩ 어똔 상황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⑪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심을 확인할 때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⑫ 하나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하십니다.
2. 하나님은 교회가 공동체로 세워지기를 소원하십니다.
①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하나가 되기를 소원했습니다.
②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③ 하나님 앞에서 중심으로 양심껏 일하고 싶어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④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⑤ 각 영혼 속에 구원이 뿌리내리는 목적을 향해서 나아가지 않는 모든 곳에 흑암이 틈타게 됩니다.
⑥ 구원을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 순간에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고, 영생을 얻으며 심판에 이르지 않습니다.
⑦ 잠깐 사는 세상에서도 더 잘 살려고 좋은 나라의 영주권을 얻기 위해 애써서 노력합니다.
⑧ 지옥의 저주와 고통을 알고 하늘나라의 영광을 안다면, 생명을 걸고 저주와 고통에서 빠져나오려고 해야 합니다.
⑨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흑암에 뒤덮여 도무지 알지 못하여 저주와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⑩ 오직 성령이 임하셔야지만,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⑪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잡고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지극한 은혜입니다.
⑫ 비록 이 세상에 있지만 우리는 하늘의 영광 속에 있습니다.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는 목자와 양의 관계입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목자를 따르며, 목자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부터 하나님은 승리로 완전히 책임지십니다. 이 사실이 마음속에 심어지면 어떤 문제가 와도 흔들리지 않으며, 흑암이 우리를 쓰러뜨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구원 받은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주권 속에 세워지는 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사도들처럼
막 3:14 / 강성찬 목사
사도(Apostle)라는 말은, [파견된 자], [사자]라는 뜻의 히브리어 [샬리아(shaliach)]에서 유래하고, 헬라어의 [아포스톨로스(apostolos)의 동의어입니다. 그 뜻은 [전권이 위탁된 자]로서 일정한 사명을 위해 권위자로부터, 대표자로서, 사자로서 [파견된 자]입니다.
신약의 [사도]도,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사도로 부르고 있습니다(히 3:1, 요17:18참조). 그러나 제한적인 의미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직접 선택되고, 복음을 전하는 권위가 맡겨져 파견된 자를 가리키는 말로 이른바 12제자가 12사도입니다(마10:2-4,막 3:14-19,눅 6:13-16, 행 1:13).
12라는 수는 이스라엘의 12지파에 관계하는 것으로, 예수는 그것을 고려하여, 12를 택하신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다가 그 수에서 탈락한 때, 맛디아가 뽑혀, 12중에 넣어 그 수가 채워졌습니다(행 1:15-26). '열둘'이라는 숫자가 신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어 하나님의 통치가 성취되는 새 이스라엘의 상징합니다(마 19:28).
주님은 주님이 원하시는 자를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제자 됨의 자격은 인간 편에서의 자격이나 소원에 있지 않고 전적으로 주님의 원을 따라 결정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명의 제자를 세우심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습니다. 먼저는 주님께서 지상에 계시는 동안 함께하기 위함입니다. 이 기간은 주님께로부터 훈련을 받는 기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전도하기 위함입니다. 전도함에 따르는 귀신을 내어쫓고 병을 고치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초대교회는 제자들에 의해 건설되어 구속 사업이 계승되었습니다. 우리도 모두 이 일에 부르심을 받은 자들로서 주님께 충성해야 합니다.
금년 우리의 표어가 ‘전도인의 직무를 다 하자’이며 이 달의 목표는 ‘12사도처럼 전도하자’입니다.
말로 전도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마 10:5-7).
복음 전파자는 그저 목적 없이, 하는 일 없이 돌아다니거나 자기 일을 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에게는 예수께서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 가운데서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천국의 도래 선포, 곧 구원의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지금 하나님에서 인류 구원을 위한 구원의 손길을 주셨으며 그 손길을 받아들이면 구원을 받고 받아들이지 아k니하면 심판과 멸망에 이른다는 것을 말로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롬 10:13-17).
■ 어느 햇빛 밝은 날 아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빨래를 하던 한 주부의 일손을 멈추게 했다. 그녀가 대답하며 문을 열었을 때 거기에는 측은하게 보이는 나이 많은 방랑자가 먹을 것을 구걸하며 서 있었다. 몇 분이 지나자 그 노인은 며칠 동안 먹어보지 못했던 푸짐한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 친절한 주부는 육신을 위한 음식보다 노인에겐 더 필요한 것이 있음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 노인이 집을 나설 때 그녀는 전도지를 주며 꼭 읽겠다는 약속을 받아두었다. 이내 그녀의 기도가 노인의 뒤를 따라갔 다. 나중에 그 노인은 전도지를 읽고 죄책감과 절망감에 빠지게 되었다. 눈앞에 지난날의 과거가 행진하며 지나갔다. 상습적인 술주정꾼, 도박꾼인 그는 젊었을 때 소도시 위스콘시에 있는 극장에서 일하다가 지방 공연 극단의 일원이 되었다. 그 후 운 좋게도 아르헨티나로 내려가 바나나 무역업에서 좋은 직업을 갖게 되었으며, 술이 그를 사회의 밑바닥으로 끌어내릴 때까지 거기서 그 일을 했다. 직업을 잃어버린 그는 바다로 나가 극동의 항구들을 드나들다가 몇 년 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해병대에 지원했다. 하지만 그의 형편없는 행동은 그를 제대시켜 삼류쇼로 돌아가게 했으며, 음주와 싸움은 교도소에 빈번히 드나들도록 만들었다. 그는 참으로 타락하고 낙담하고 절망에 빠진 노인이었다. 과거의 생각에서 천천히 깨어난 노인은 한 남자가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남자는 노인에게 노인의 구주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알고 계시냐고 물었다. "나는 그분을 찾고 있는 중이오." 노인은 이렇게 말하며 자기가 읽었던 전도지를 주머니에서 끄집어냈다. "그렇다면 마침 잘 오셨군요." 그 남자는 조그만 교회의 목회자였으며 노인은 바로 그 교회 예배당 뜰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는 노인을 예배당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었으며, 잠시 후 그 80세 된 노인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었다.(회심)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말하여 전하라는 명령대로 말로 전했습니다. 우리도 사도들처럼 말로 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삶 가운데서 전도해야 합니다
초대교회와 사도들의 삶을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47)고 합니다
전도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빛이 되고 소금이 되고 향기가 되고 편지가 되는 삶 속에서 무언의 행동으로 선행이 나타나야 합니다.
초대 교회의 분위기는 총독이었던 플리니우스(Plinius)가 트랴안(Trajan) 황제에게 보낸 서신에서 잘 나타나있다 합니다. 즉 그는 박해로 인해 비밀리에 모이는 기독교 공동체를 은밀히 조사해 본 후 '그들은 법 이상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라고 보고함으로써 초대 교회 기독교인들의 영적, 윤리적 삶이 칭송받을 만했음을 로마의 정치가로서 입증시켜주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 충만한 성도는 세상의 법을 초월해서 살게 되므로 온 백성의 칭송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선행이 복음 전도에 큰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 1921년 매우 악명 높은 싱싱 교도소에 루이스 로웨스라는 사람이 교도소장으로 부임해 왔습니다. 그의 부인 캐더린 로웨스는 세 명의 어린 자녀를 키우는 젊은 주부였습니다. 주위 사람 모두가 그녀에게 교도소 담장 안에는 애초부터 일절 발을 들여 놓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하지만 캐더린 로웨스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처음으로 교도소 농구 대회가 열렸을 때 그녀는 그곳으로 갔습니다. 세 명의 귀여운 아이들을 데리고 체육관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재소자들과 함께 스탠드에 앉았습니다. 그녀의 시각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내 남편과 나는 이 사람들을 보살펴 줄 것이고, 따라서 이 사람들은 나를 보살펴 줄 것이다. 그러나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녀는 재소자들과 얼굴을 익혔으며, 그들의 신상 명세서를 읽었습니다. 또한 살인죄로 수감된 한 재소자가 장님인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찾아갔습니다. 그의 손을 잡고 물었습니다. "점자를 읽을 줄 알아요?" 그는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에게 점자책을 읽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몇 해 뒤 그 장님 재소자는 자신을 변화시켜 준 그녀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중에 캐더린은 감옥 안에서 귀머거리 재소자를 발견했습니다. 그녀는 수화를 배우기 위해 학교에 다녔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캐더린 로웨스가 1921년부터 1937년 사이에 싱싱교도소에 다시 부활해 온 예수의 화신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녀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가 죽은 다음날 아침 교도소장 루이스 로웨스는 근무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다른 간수가 대신 그의 임무를 맡았습니다. 금방 교도소 전체에 그녀의 사망 사실이 전해졌습니다. 이튿날 그녀의 시신은 교도소에서 1km 떨어진 교도소장의 사택으로 옮겨졌습니다. 대리로 교도소장을 맡은 고참 간수가 이른 아침 산책을 하다가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난폭하고 험상궂기로 소문난 죄수들 모두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교도소 정문에 모여 있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간 임시 교도소장은 그들의 눈에 슬픔과 애도의 눈물이 어려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들이 얼마나 캐더린 로웨스를 좋아했는가를 알았습니다. 임시 교도소장이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좋소. 여러분, 가도 좋소. 하지만 오늘 밤 안으로는 모두 돌아와야 하오." 그런 다음 그는 교도소 문을 열었습니다. 죄수들이 행렬을 이루어 경비원도 없이 1km의 거리를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캐더린 로웨스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들 모두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교도소로 돌아왔습니다. 20년이 지나 로웨스가 교도소장을 정년 퇴임할 무렵에는 싱싱 교도소는 인도주의가 실천되는 장소로 크게 달라졌습니다. 이 교도소의 관리 체계를 연구한 사람들은 그 중대한 변화는 모두 루이스 로웨스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하지만 로웨스 자신은 그러한 변화에 대해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모든 것은 나의 아름다운 아내 캐더린 덕분입니다. 캐더린은 지금 싱싱 교도소의 담장 밖에 묻혀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빛이 되고 소금이 되고 향기가 되고 편지가 되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딤전 3:7)의 삶을 살 때 전도의 길이 열매맺게 될 줄 믿고 사도들처럼 삶 속에서 전도합시다.
주님의 능력을 힘입고 전도해야 합니다(행 4:1-2, 7-20)
이스라엘의 최고 법정 산헤드린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공회의 결정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사도들의 단호한 태도는 실로 대담한 도전입니다. 이런 태도를 취할 수 있었던 용기가 생긴 근거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주님 주시는 능력을 확신함으로부터 나온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앉은뱅이가 일으킴을 받는 표적을 통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심을 직접 확인하였고, 또한 부활하신 주님께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있으리라"(마 28:20)고 하신 약속의 말씀을 믿었기에 이처럼 대담한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믿고 확신하며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의식이 사도들에게 용기를 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임재해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과연 너희 말을 순종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옳은지 판단해보라고 한 것입니다.
타협할 수 없는 사도들의 확고 부동한 입장을 공회 앞에 재천명하며 목격자로서 보고들은 것을 증언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보고 들은 것'이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만에 살아나신 부활 사건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사도들은 인간의 권위와 하나님의 권위가 충돌할 때 자신들이 보고 듣고 확신하는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는 편을 택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능력을 힘입고 생명을 건 각오를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른 열두 사도의 라이프 스타일(Life Style)은,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히11:38)라고 귀결지을 수 있습니다. 열두 사도의 여행 중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과 순교형태에 대해서는 전해져 오는 일화들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데, 그 전승들에 엇갈리는 부분들도 있으나 사도들의 최후는 일맥상통합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처형되었습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최초로 순교 당했습니다(행 12:2). 요한은 도미니안 황제 아래서 박해를 받을 때 끓는 가마솥에 던져졌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나 후에 밧모섬(요한계시록을 쓴 장소)으로 유배되었다가 에베소로 와서 자연사했습니다. 안드레는 그리이스의 밧드라에서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빌립은 소아시아에서 교수형, 또는 십자가에 처형되었거나 돌로 맞아 죽음을 당했고, 바돌로매는 아르메니아에서 살가죽이 벗겨진 채 참수 당했습니다. 마태는 에디오피아에서 칼로 살해됐고, 도마는 인도에서 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작은 야고보는 예루살렘 탑에 던져져서 돌과 곤봉에 맞았으나 살아났다가 톱에 잘렸고, 유다(다대오)는 메소포타미아에서 화살에 맞아 죽었습니다. 셀롯 시몬은 페르시아만 근처에서 폭도들의 습격을 받아 살해당했습니다. 맛디아는 유대인들에게 직접적으로 칼에 찔렸거나, 도끼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이들의 순교는 오직 주의 능력을 힘입고 복음을 전하는 열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주님의 능력은 언제 어디서나 능력으로 역사합니다.
오혜령 씨는 연세대를 나오고 그리고 이화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던 분으로 '성야'라고 하는 희곡을 발표해서 데뷔를 했고, 그 후로 작가로 배우로 방송인으로 또 수필 작가로서 활동을 아주 활발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숱한 소녀들의 편지나 엽서에 그녀의 글귀가 인용될 정도로 사랑 받는 작가였습니다. 그는 미션 스쿨을 다녔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나 흔히 똑똑한 지성인들이 잘 빠지는 예수님이 살아 계심을 안 믿으려 하고 신앙생활은 인생의 실패자들이나 매달리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곁길로 가는 교만과 자기 과신 때문에 예수 없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지금부터 한 20여 년 전 위암과 임파선 암을 진단 받고 3개월 시한부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날마다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매일 달력의 숫자에 빨간 색연필로 빗금을 쳐나가면서 죽을 날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예정된 죽음의 날자가 며칠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물만 먹어도 토하고 혈변을 보는 고통은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매주마다 꽃을 보내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날도 희망을 버리지 말라는 메모와 함께 백합 50송이를 보내왔습니다. 그는 반시간 가까이 꽃에 얼굴을 파묻고 가만히 있었다고 합니다.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갑자기 그녀의 목덜미를 낚아채는 강한 손길을 느꼈습니다. 순간 그는 정신없이 방바닥에 나동그라졌습니다. 직감적으로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를 찾아 오셨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반사적으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왜 죽음의 한복판에까지 따라 오시는 것입니까?' 그 말을 내 뱉고 나자 그 동안 주님을 나 몰라라 하면서 마음대로 살았던 자기 죄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어디서부터 회개해야 할지 몰라 눈물만 쏟았습니다. 며칠동안 화선지에 붓글씨로 자기 죄를 회개했습니다. 수십 개의 양초가 녹아내릴 때까지 회개하고 또 했습니다. 그렇게 회개하기를 반년 가까이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날도 기도와 찬양을 하며 예배를 혼자 드리고 있었는데 온몸의 오한이 덮쳐 왔습니다. '이제 죽는 시간이 다가 왔구나.' 죽음을 예감했습니다. 너무 추워서 이불깃을 잡아당기는데 겨드랑이에 잡히던 임파선 암 덩어리가 만져지지 아니하는 것이었습니다. 어깨에 복숭아씨만 하던 멍울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또 복수로 차 올랐던 배가 꺼져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살아 계신 주님이 자기를 찾으신 것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지금 그는 경기도 어느 조그마한 마을에서 버림받은 노인들을 돌보는 평화의 집을 경영하며 지금도 그는 하루 9시간을 기도하는 시간에 바친다고 합니다.
그가 쓴 ‘당신 없는 인생은 빈 그물이었습니다’라는 글 가운데 한 구절입니다
"당신 없는 생의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물고기가 잡히기를 바랐던 지난 나날들은 죽은 시간이었습니다. 오 주님, 이제 당신께서 그물을 채워 주소서. 그러면 저는 비로소 살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자리에 서 계신 부활의 주님, 당신 없이 한평생 수고해 보아야 우리 인생은 빈 그물이옵니다. 비록 저희 인생의 가장자리에 서 계신 당신을 지금 당장 알아차리지 못한다 하더라도 저희의 계획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당신께 대한 신뢰 속에서 새로 시작하려는 각오가 설 때 저희 행위에 방향과 성취가 부여됩니다. 당신은 가장자리에 계시지만 늘 저희에게 그물을 이렇게 혹은 저렇게 던지라고 분부하고 계시기 때문이옵니다. 날마다 호숫가에서 저희를 기다리시는 당신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주님은 빈 그물만 올리는 우리의 삶에 현장에 오시어서 그물 가득 차는 능력을 베푸십니다. 베드로의 생이 그랬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로 부름 받았으나 물고기도 잡지 못하는 실패한 자리에 있었으나 주님의 능력을 힘입을 때 삼천명 오천명 회개시키는 전도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우리도 사도들처럼 주님의 능력을 힘입고 전도할 때 초대 교회처럼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는 역사가 함께 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