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라사인들의 반응
막 5:16-20
16 이에 귀신 들렸던 자가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그들에게 알리매
17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18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19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20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막 5:17-20 / 마을 사람들은 예수께 그곳을 떠나달라고 간청하였다. 18) 예수께서 배 있는 데로 발걸음을 옮기자 귀신들렸던 사람이 자기도 따라가겠다고 애원하였으나 19) 예수께서는 허락하지 않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떤 이적을 행하셨고 어떤 자비를 베풀어 주셨는가를 이웃에게 전하라.' 20) 그 사람은 데가볼리 온 지역을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자기에게 베푸신 위대한 일을 널리 전하였다. 그리고 이야기를 듣는 사람마다 모두 놀라워하였다.
예수님께서 거라사에서 군대 귀신 들린 광인을 고쳐 주셨습니다. 본 단락은 그 과정에서 돼지 떼가 바다에 몰사하는 광경을 직접 보고, 그것을 전해 들었던 거라사인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보인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알리매(16-17) 귀신 들렸던 자가 온전해지고, 돼지 떼가 바다에 빠져 몰사하는 것을 본 자들은 그들이 본 모든 것을 동네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서 예수님께 나왔던 자들은 그 지방에서 예수님이 떠나시기를 간구했습니다. 그 지역 사람들은 심리적 공포감과 어떤 경제적 손실이 또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예수님에게 그곳을 떠나시도록 요청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귀신 들렸던 자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았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미신적인 두려움과 경제적인 이해타산으로 예수님을 붙잡지 않고 떠나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네 가족에게 알리라(18-20) 예수님은 그 동네 사람들에게 떠나달라는 요청을 받고서 다시 배에 오르셨습니다. 그때 귀신 들렸다가 고침을 받은 자는 오히려 함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고쳐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행동입니다. 곧 예수님이 원하시면 어떤 일이라도 기꺼이 하겠다는 봉사의 태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자신을 따라오지 말고 그의 가족에게로 가서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알리라고 했습니다. 똑같이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어떤 사람은 은혜를 받고, 어떤 사람은 손해를 보았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게 해 달라고 간구하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그곳에서 떠나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은 떠나달라는 그 지역 사람들의 간구는 들어주시고, 귀신 들렸었던 자의 간구는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귀신 들렸던 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말할 때 데가볼리 사람들이 놀라운 반응을 보였습니다. 데가볼리는 10개의 도시라는 뜻으로 로마가 10개 도시를 재건하고 데가볼리라고 부른 데서 유래되었습니다. 귀신 들렸었던 자의 순종은 데가볼리에 하나님의 선하심이 증거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적용: 당신은 지금 예수님을 따르고 싶은가요, 아니면 떠나고 싶은가요? 또한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에 따라 순종하는지, 아니면 주의 말씀대로 순종하는지를 살피고 함께 나누어 봅시다.
거라사인들의 반응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돼지 이천 마리를 단번에 몰사시켜버리신 예수님을 두려워하여 -그분이 혹시나 더 큰 재앙과 손실을 끼치시지는 않을까 두려워하여- 정중히 자신들에게서 떠나달라고 요청합니다. 언제든 없어질 돈과 재물과 안락함을 지키기 위해 생명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거부한 것입니다. 무지한 자들이라며 한껏 조소하던 입가에서 문득, 웃음이 사라집니다. 언제든 없어질 돈과 재물과 안락함을 지키기 위해 그분께 한 걸음 더 다가가기를 주저하고, 온전히 순종하기를 거부하며, 깊이 헌신하기를 거부하는 이 시대의 우리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표면적으로는 예수님을 거부하진 않지만, 이면적으로는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 설 교 >
돼지 2,000마리와 귀신들린 한 사람
마가복음 5:1-20 / 조상호 목사
전통적으로 대부분의 영국인들은 천주교인이거나 기독교인입니다. 주일이 되면 가족들이 성당이나 교회에 가서 미사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최근 한 설문조사에서 뜻밖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영국에서 발행하는 ‘Choices UK‘라는 잡지사는 할로윈 데이를 맞이하여 영국인 2,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하였습니다. 그 결과 응답자의 68%가 귀신의 존재를 믿고 있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응답은 55%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또 응답자의 76%가 귀신의 존재를 믿는 이유로 영화나 텔레비전의 영향을 꼽았습니다. 그러니까 현대의 영국인들은 영화나 텔레비전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을 믿는 사람보다 귀신을 믿는 사람이 13.5%나 더 많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귀신의 존재를 믿습니까? 귀신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습니까? 일반적으로 귀신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첫째로 ‘귀신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21세기 과학이 발달한 현대에 ‘무슨 귀신 신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느냐’고 하며, 귀신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그리고 귀신은 겁쟁이들이 만들어낸 상상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며, 귀신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둘째로 ‘귀신을 이길 사람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귀신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하지만 너무나 강한 존재이기 때문에 귀신을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귀신‘이라는 말만 해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고 잠을 자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은 이 두 가지 주장에 동의해서는 안 됩니다. 귀신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귀신은 존재합니다. 계시록 16장 13절과 14절을 보면,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그들은 귀신의 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무슨 영이라고 합니까? ‘귀신의 영’이라고 합니다. 또 마태복음 15장 22절을 보면,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들렸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가나안 출신의 한 여자는 귀신 들린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주님께 강청한 적이 있습니다. 또 사도행전 16장 16절에서,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귀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귀신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또 한 가지는 우리가 귀신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적이 있지만, 마가복음 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 귀신 들린 사람이 소리를 지르며 방해를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꾸짖으며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하시자, 더러운 귀신이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그 사람에게서 나왔습니다(막1:26). 또 마태복음 9장을 보면, 귀신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로부터 귀신을 쫓아내주셔서 그로 하여금 말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마9:32~33). 이 외에도 사복음서들을 보면 예수님은 수없이 많은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16:17).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에서 만난 귀신 들린 여종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게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즉시로 귀신이 여종에게서 나왔고, 그 여종은 귀신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습니다(행16:18).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귀신들을 쫓아내신 줄로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권세를 주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바다 건너편 거라사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이 거라사 지방은 역사적으로 전략요충지로 많은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는 군사도시였습니다. 또 예수님 당시 이 지방에는 축산업으로 돈을 번 부자들이 많았습니다. 갈릴리 바다를 끼고 자리 잡은 이 거라사 지방은 경제적으로 부요할 뿐 아니라,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이 거라사 항구에 예수님 일행이 도착한 후, 배에서 나오자마자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귀신 들린 사람이었습니다. 15절에서 그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원래 그는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 그가 정신이 온전해지고 나서 예수님을 따라 나서려고 할 만큼, 매우 적극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에게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소리를 지르며 성격이 포악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는 발작을 하며 닥치는 대로 물건을 던져서 부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귀신 들렸기 때문입니다. 이웃에 사는 동네 사람들이 무서워서 살 수 없다고 하소연하는 바람에, 가족들은 그를 도저히 그대로 놓아둘 수 없었습니다. 다같이 4절을 보겠습니다.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가족들은 이웃 사람들과 힘을 합하여 그를 쇠사슬로 묶고 발에 고랑을 채워 놓았습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한 번 발작을 시작하면 쇠사슬과 고랑을 손쉽게 깨뜨리는 것이었습니다. 또 다시 고랑과 쇠사슬로 묶어 놓았지만, 그 때마다 다 깨뜨려버렸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이렇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요? 2절에 보면, 그가 더러운 귀신에 들렸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귀신에 들리면 비참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은 부자라 할리자도, 아무리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귀신 들리면 비참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금요일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악한 마귀는 할 수만 있으면 귀신을 동원하여 사람들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오늘날 귀신들은 알코올이나 술이나 도박이나 마약, 등을 통해서 사람의 영혼을 옭아맵니다. 또한 귀신들은 대중문화를 통해서 사람들에 접근합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채팅을 하는 상대방에게 사정없이 욕설을 퍼붓는가 하면, 초코파이를 스타킹에 담아 침을 뱉고 짓이겨 더럽게 먹는 게임을 즐기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학교도 가지 않고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컵 라면을 먹으며 몇날 며칠 동안 PC방에 틀어박혀 인터넷 게임에 몰두하기도 합니다. 귀신들이 ‘자살사이트’, ‘폭력사이트’, ‘음란사이트’, ‘운세관련 사이트’ 등의 인터넷을 통해서 사람들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어제 뉴질랜드 AOG총회장이신 Ken Harrison 목사님은 14초 만에 모든 사람이 포르노 사이트에 들어갈 수 있고, 한 번 포르노 사이트에 들어가서 이상한 사진들을 보고나면, 생각 속에 그 잔상이 오랫동안 남기 때문에 음란죄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우리는 정말 무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깨어있지 않으면 음란죄를 범했던 다윗처럼 마귀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마귀의 종노릇을 하게 됩니다. 본문의 귀신들린 이 사람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귀신에 사로잡혀 스스로 절제할 수 없었습니다. 그를 묶고 있는 더러운 귀신은 그를 분노하게 하고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며 광기를 부리게 했습니다. 본문과 같은 내용이 누가복음 8장에도 나오는데, 27절 하반절을 보면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는 오랫동안 옷을 입지 않고 알몸으로 산 속과 바닷가와 거리를 돌아다녔습니다. 또한 그는 집에서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무덤에서, 다른 말로 말하면 공동묘지에서 사람들과 단절된 채, 외롭게 살고 있었습니다. 또한 5절에 보면 귀신들린 사람은 시도 때도 없이, 무덤에서나 산에서나 아무데서나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냥 혼자서 말한 것이 이니라, 있는 힘껏 cry out,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5절 하반절을 NIV 영어성경에 보면 "cut himself with stones."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그는 돌을 가지고 자기의 몸을 찢어 이곳저곳에 상처를 냈습니다. 귀신 들리면 이렇게 해도 아픈 줄을 모릅니다. 그는 사람이지만,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귀신들려 버림받은 이 사람이, 귀신들려 쓸모없는 인생을 살아가던 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다같이 6절과 7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귀신 들린 그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예수님을 보고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하며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처음 만났지만, 놀랍게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귀신같이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부르짖었습니다.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예수님은 최후의 발악을 하는 귀신을 향해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요일3:8).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귀신은 점잖게 타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귀신은 대화의 상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설득해서도 안 됩니다. 귀신은 예수님처럼 꾸짖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하는 악한 마귀를 예수 이름으로 꾸짖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미혹하고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악한 마귀를 예수 이름으로 꾸짖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꾸짖을 때, 더러운 귀신은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떠나 갈 줄로 믿습니다. 귀신을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 이름의 능력으로 꾸짖을 때, 더러운 귀신은 묶임을 받고 떠나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꾸짖으신 후, 이어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귀신은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고 대답했습니다(9절). 여기 ‘군대’라는 말은 헬라어로 ‘레기온’이라는 단어인데, 6000명으로 이루어진 군단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귀신들에 의해 지배받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지배하고 있는 수많은 귀신들을 향해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귀신들은 거라사 지방에서 내어 쫓지 말고, 산기슭에 있는 돼지 떼에게로 보내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시자, 군대귀신들은 2,000마리나 되는 돼지 떼에게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한가롭게 먹고 있던 돼지 떼들이 갑자기 미처 날뛰다가 비탈길로 내려가서 결국에는 바다 속으로 뛰어들어 다 몰사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 장면을 한 번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한 마리만 물에 빠져도 난리가 날 텐데, 20마리도 아니고 200마리도 아니고, 무려 2,000마리나 되는 돼지 떼가 바다에 빠지는 모습은 굉장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돼지를 기르던 사람들은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14절과 15절을 보겠습니다.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여러 마을에 말하니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러 와서,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거라사 동네에는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돼지를 기르던 사람들로부터 2,000마리나 되는 돼지 떼가 바다에 빠져 몰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동네에는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동네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일어났는지 궁금해서 구경하러 왔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 귀신에 사로 잡혀 옷을 벗은 채 소리를 지르며 자기 몸을 상하게 하고 무서운 힘으로 쇠사슬과 고랑을 깨뜨림으로 마을 사람들을 공포에 빠뜨렸던 그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할렐루야! 귀신이 떠나가고 그가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온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자유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주시고, 그에게 자유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비정상적인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면 정상인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묶였던 자도 예수님을 만나면 풀리는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귀신들려 버림받은 이 사람이, 귀신들려 쓸모없는 인생을 살아가던 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도 만남이 중요합니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여행을 할 때도 좋은 사람을 만나야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습니다. 이사를 가서도 좋은 이웃을 만나야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살 수 있습니다. 학교에 가서도 좋은 친구를 만나야, 학교생활이 즐겁습니다. 좋은 배우자를 만나야,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습니다. 비행기 안에서도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테러범을 만나면 목숨을 잃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만남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좋은 만남의 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세상의 어떠한 만남보다도 중요한, 예수님을 만나는 복이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주님으로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군대귀신 들려 오랫동안 고생하던 이 사람은 예수님을 만난 후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군대귀신 들렸다가 고침을 받은 그가 마을 사람들에게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자세히 설명해 주자,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께 그 지방에서 떠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귀신 들린 한 사람을 고치기 위해 2,000 마리나 되는 많은 돼지가 희생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너무나 비싼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라사 지방 사람들은 귀신들렸던 자가 귀신이 쫓겨나가고 정상적인 상태가 된 것을 보고도 주님을 찬양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보고도,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기적을 행하신 주님께 마을에 머무르시도록 요청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경제적인 손해만을 계산하고 더 이상 경제적인 손해가 생겨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오히려 예수님께 자기들을 떠나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잃은 돼지 떼만 보이고, 구원받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귀신들로부터 자유케 된 이웃보다도, 돼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사람보다는 돼지에게 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과 돼지 사이에서 굉장한 혼동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도 이런 혼동된 가치관 때문에, 한 영혼보다 돼지가 더 우대를 받고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한 영혼보다 돼지를 더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교회가 한 영혼보다도 돼지를 더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있어 무엇이 “돼지”일까요? 만약 우리가 한 영혼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우리의 “돼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에게는 돈이 돼지일수도 있고, 어떤 분에게는 시간이 돼지일 수도 있고, 어떤 분에게는 취미생활이 돼지 일수도 있고, 어떤 분에게는 가족이 돼지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그 “돼지”를 바다 속에 집어넣으면서까지 한 영혼을 구원하기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2,000마리나 되는 많은 돼지 떼를 희생시키셨습니다. 요즘 돼지 한 마리에 얼마 정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만약 100Kg 돼지 한 마리 값이 뉴질랜드 달러로 500불이라고 한다면 총 얼마가 됩니까? 100만 달러나 됩니다. 이 금액을 한화로 대충 계산해도, 무려 7억원이나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7억 원에 해당하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경제원칙에 어긋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의 행동은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많은 효과를 얻으려는 경제원칙과 분명히 맞지 않습니다. 사실 성경을 보면, 이 외에도 경제원칙에 맞지 않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두 렙돈을 드린 가난한 과부가 많은 돈을 드린 다른 부자들보다, 더 많이 드렸다는 말씀은 도저히 경제논리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99마리의 양을 들판에 놓아두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선 목자의 이야기는 도저히 경제논리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경제논리 보다 생명논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16장 2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그렇습니다. 천하보다도 귀한 것이 목숨인 줄로 믿습니다. 온 천하를 다 주어도 한 생명과 바꿀 수 없는 줄로 믿습니다. 한 영혼의 가치는 온 천하보다 귀한 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는 오는 8월 첫째주일에 창립14주년을 맞이하여 ‘홈컴밍데이’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당일에 믿지 않는 사람을 초청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합니다. 아직까지 <2007년도 태신자 작정카드>를 내지 않으신 분들은 집으로 가기 전에 꼭 카드를 제출해주시기 바랍니다. 제출하시면 제출하신 명단에 기록된 분들의 초청을 위해서, 그리고 초청된 분들이 주님을 영접하고 구원될 수 있도록 중보할 것입니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도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으로 꼭 <2007년도 태신자 작정카드>를 제출해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그 어떠한 것들보다도 영혼을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으로 ‘홈컴밍데이’에 동참하여, 영혼 구원의 역사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얼마 전 한 미국행 비행기가 인천공항을 이륙한 후 급히 선회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유는 비행기에 탄 한 아이가 고열로 인해 위급했기 때문입니다. 비행기에 탑승했던 한 의사분이 급히 병원에 가지 않으면, 아이가 매우 위험하다고 말했습니다. 그 비행기의 기장은 고민 끝에 인천공항으로 회항하기로 결단을 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비행기가 이륙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비행기에는 엄청난 양의 항공연료가 가득 실려 있어서 안전한 착륙을 보장할 수 없었습니다. 그 비행기 기장은 비행기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엄청난 양의 기름을 하늘에 버리고 인천 공항에 무사히 착륙했습니다. 엄청난 물질적 손해가 났습니다. 이 뿐 아닙니다. 비행기가 인천 공항에 다시 착륙했다가 기름을 주유한 후 다시 이륙했기 때문에, 미국 도착시간을 맞추지 못해 어려움을 겪은 많은 승객들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장이 인천공항에 회항했기 때문에 위험했던 그 아이는 무사히 생명을 건질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장은 많은 사람들의 칭찬과 격려를 받았습니다. 저는 그 비행기의 기장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참으로 귀한 결정을 내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경제논리로 보면, 아이가 죽든지 말든지 그냥 미국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생명논리로 보면, 인간의 생명이 돈보다 귀하기 때문에 그 기장처럼 인천공항에 회항해야 합니다. 바로 이 모습이 주님의 모습입니다. 우리 주님은 항상 경제논리로 보지 않고, 생명논리로 보시는 줄로 믿습니다. 사람들은 사람보다 물질에 관심이 있지만, 우리 주님은 물질보다 사람에게 관심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사람들은 한 영혼보다 돼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주님은 돼지보다 한 영혼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거라사 지방에 큰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그곳에 가셨지만,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는 수없이 그곳을 떠나셔야 했습니다. 그때 귀신이 쫓겨나가고 제정신으로 돌아온 그 사람이 예수님과 동행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다같이 19절을 보겠습니다.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주님과 동행하고자 했던 그 사람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집으로 돌아가 가족에게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베푸신 큰 구원의 은혜를 간증하라는 것입니다. 귀신 들렸다가 구원받은 이 사람을 보십시오. 2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친족들에게만 고하라고 했는데, 그는 거라사 뿐 아니라 데가볼리 전 지방을 돌아다니며 주님의 역사를 증거하자, 모든 사람이 놀랐다고 합니다. 여러분! 귀신들렸다가 구원받은 이 사람처럼, 주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아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간증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간증을 하면 간증을 들은 사람이 예수 믿고 구원받을 뿐 아니라, 간증을 하는 본인에게도 은혜가 배가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은혜를 가슴에 묻어 두는 사람은 점점 그 은혜를 소멸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체험했다면 간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복음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거룩한 영향력을 미치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복음으로 데가볼리에 사는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한 이 사람처럼, 복음으로 이 땅 크라이스트처치, 남섬과 북섬과 전 뉴질랜드와 모든 열방과 나라를 깜짝 놀라게 하는 역사를 일으키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큰 일을 행하시는 예수님
막 5:1-20 / 조상호 목사
어떤 교회 옆에 술집이 성업 중에 있었습니다. 교회가 그 술집이 문을 닫게 해 달라고 열심히 기도를 했습니다. 소문이 술집에까지 알려지자 교회와 술집은 관계가 매우 악화되었습니다. 그런데 때가 갈수록 술집영업이 안됩니다. 급기야 술집은 문을 닫았고, 화가 난 술집주인이 목사와 장로들을 고발했습니다. 술집이 망한 원인은 교회가 기도했기 때문이라는 이유였습니다. 판사 앞에 술집주인과 교회대표들이 나란히 섰습니다. 술집주인은 한결같이 우리가 망한 것은 당신들의 기도 때문이었다고 주장합니다. 교회대표들은 무엇이라고 방어했을까요? 우리가 기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설마 기도한 것 때문에 망했겠느냐?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판사의 판결이 났습니다. “술집이 기도 때문에 망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기이한 것은 목사, 장로보다 술집 주인이 믿음이 더 좋은 것은 어찌된 일이냐?”라고 반문했다고 합니다.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만 과연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보다 믿음이 더 좋은 경우가 있습니다.
사탄의 세력이 존재한다고 믿는 믿음! 그 믿음은 아마도 세상 사람들이 더 깊은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단의 존재에 대해서 성경만큼 확실하게 가르치는 책이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것이 확실한 진리인 것처럼 사탄과 그 졸개들인 귀신이 존재하는 것도 분명합니다. 성경은 예수님과 사탄의 충돌을 여러 번 증언하고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사람이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을 하고,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나이다.”(시 8:5-6)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인간은 다른 만물과 같은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다른 피조물들을 발아래 다스리는 영광과 존귀를 주셨음을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이 왜 천사의 자리에서 악마의 자리로 타락할 수 있을까?” 오늘 본문이 그 사실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 거라사의 귀신들린 자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를 건너 거라사 지방에 이르자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하며, 쇠사슬과 고랑으로 매어 놓아도 소용없이 괴상한 소리만 질러대는 광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이렇게 황폐화된 것은 그가 귀신들렸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의 지혜서인 탈무드에는 귀신들린 사람의 특징을 네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유의해서 보실 것은 이러한 탈무드에서 말하는 특징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1. 한 밤중에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밤중에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분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낮에 열심히 다니시고 밤에는 일찍 집에 들어가시고 일찍 주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낮에 활발하게 활동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것도 정오였습니다. 베드로도 정오에 기도하다가 고넬료를 만나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아침에 요한계시록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주로 낮에 계시를 받았고 활발하게 활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귀신은 밤을 좋아합니다. 귀신이 내린 병을 신병이라 하는데 신병에 걸려서 무당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결같이 낮에는 멀쩡하다가 밤만 되면 부스스 일어나서 어디론가 끌려간다는 겁니다. 밤새 해매고 다닙니다. 이처럼 귀신은 어두운 것, 죄악된 것을 좋아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병리적인 사회를 보십시다. 얼마나 밤의 문화가 발달되었는지 모릅니다. 흥청망청 모조리 밤의 문화들로 인해서 흐느적거리고 있습니다. 밤에 이루어지는 일 치고 별로 좋은 일없고, 더구나 거룩한 일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분명히 바로 보아야 합니다.
2. 무덤에 산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무덤은 굴처럼 생겼습니다. 그 속에 시신을 넣어 두는데 그 속에 들어가 함께 자는 것입니다. 죽은 시신과 함께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시신은 절망을 의미합니다. 더 이상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귀신의 특징입니다. 귀신은 우리들로 하여금 자꾸만 낙심하게 만듭니다. 절망하게 만듭니다. "나에게 더 이상 소망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러기에 유명 연예인이 자살하고 재벌들도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려 자살하게 만듭니다.
성도 여러분! 자꾸만 낙심이 되고 절망 가운데 빠지게 될 때에는 그것이 귀신의 소행임을 분명히 아시고 믿음 가운데 말씀으로 이기고, 기도로 이기면서 소망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늘 함께 계심을 믿으셔야 합니다.
3. 옷을 찢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아름다운 것을 모르는 실로 난처한 모습입니다. 요즘은 일부러 옷을 찢어서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옛날에는 없이 살아서 무릎에 구멍이라도 나면 창피하였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습니다. 멋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이 많이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성매매특별 방지법이 제정되었지만 아직도 성을 상품화해서 그것을 사고파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귀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이 최소한으로 갖추어야할 예절과 도덕을 파괴하고 양심을 마비시키며 쾌락 그 자체가 삶인 양 만들어 결국은 파멸로 전락시키는 수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끄러운 것을 모르고 아름다운 것을 모르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4. 선물을 주면 곧 부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치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선물이라는 것은 보내는 사람의 마음과 사랑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받자마자 부수어 버린다는 것은 고마운 것을 고마운 줄 모르고, 사랑을 받아도 그것이 사랑인 줄 모르고, 도무지 어떤 것도 가치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이런 말을 쓰는데 한 번 더 깊이 생각해야 하는 말입니다. 인간은 인간이지 동물 중에 하나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영혼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영혼이라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귀신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그 가치를 모릅니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육신의 향락을 즐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귀한 선물인 영혼을 귀한 줄 모르고, 구원의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고 사는 것이 귀신들린 사람의 삶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밤의 문화, 어두운 죄악의 문화가 확장되고 있습니다. 소망보다는 절망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무엇이 부끄러운 것인지, 또한 어떤 것이 아름다운 것인지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내 영혼의 가치가 얼마나 고귀하고,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구원의 가치를 모르고 그것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이요, 귀신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주장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나타난 거라사의 귀신들린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①무덤사이에서 살았습니다.
무덤의 죽음, 이런 것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 다시 말하면 ‘Identify’(동일시하다) 시키므로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는 것이 귀신의 전략입니다.
②무서운 힘을 가졌습니다.
쇠사슬로도 그를 묶어둘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그를 제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이 가진 그 초자연적인 힘은 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힘이 아니라 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힘이었습니다. 힘을 가진다는 것이 언제나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거라사의 광인은 쇠사슬과 고랑으로 손발을 묶어 놓아도 그것을 끊어 버릴 정도의 초인적인 힘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힘으로 결국 제 몸을 상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이 인간됨에 있어 중요한 것은 자제력이라고 할 것입니다. 자제력은 제동장치와 같은 것이어서 인간의 생명을 지켜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광인은 이런 제동장치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사단이 하는 짓입니다.
미국의 전 대통령인 클린턴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는 28세의 떠돌이 아버지와 20세의 식당 종업원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불행한 환경을 딛고 학문적으로는 세계 최고의 명문 예일대학을 나왔고, 하버드대학을 나온 미모의 여인 힐러리와 결혼을 하였으며, 권력으로는 미국뿐 아니라 세계를 다스리는 막강한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역대 미국 대통령 중에 가장 머리가 좋은 사람이며, 아칸소라는 작은 주가 다시 낼 수 없을 것이라는 대통령직을 쟁취한 능력의 사람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에 대해서 20년 간 그를 곁에서 지켜보았던 한 친구는 “무절제와 방탕으로 얼룩진 토요일 밤을 보낸 후, 주일 아침이면 경건하고 책임감 있는 크리스천으로 변하는 이중인격자”라고 지적했습니다. 그와 스캔들을 일으킨 르윈스키는 방송 인터뷰에서 “클린턴은 종교적 신념으로 자제하려 하지만 결국은 굴복하고 말았다.”고 클린턴의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약점을 철부지 처녀가 지적하고 있었습니다. 클린턴으로 하여금 종교적 신념으로도 자제할 수 없게 하였다는 것은 지성도 권력도 심지어는 종교적 신념도 사단의 유혹 앞에서는 무력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역사는 이러한 자제력을 상실한 광인들로 말미암아 엄청난 상처를 입었습니다. 정치적 폭력을 일삼은 네로, 히틀러, 스탈린 등은 역사의 광인들입니다. 그들은 역사에 상처를 주었을 뿐 아니라 결정적으로 제 몸을 상하게 하는 비극으로 인해 자신마저도 망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③밤낮으로 무덤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를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게 하였습니다.
거라사 광인은 괴성을 질러댔다고도 합니다. 소리는 메시지를 담아야 합니다. 그런데 메시지가 없는 소리는 괴성이요, 들을 사람 없는 무덤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은 미친 사람이 하는 짓입니다. 현대인 중에서도 괴성을 지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정치인, 언론인, 심지어는 설교도 그렇습니다. 메시지도 없고 청중도 없습니다. 요즘은 소리 없는 괴성도 많이 있습니다. 소위 사이버 공간에서 펼쳐지는 온갖 악의 퍼레이드는 이 시대가 낳은 또 하나의 괴성입니다. 우리의 고통은 괴성 가운데 작아지는 참 의미 있는 소리를 발견하는 데 있습니다. 엘리야가 시내산 동굴에서 하나님을 발견했을 때 결코 괴성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세미한 음성 속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은 것입니다. 교회가 괴성의 장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도록 예배당은 정적을 회복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④귀신의 특징은 그가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는 사실입니다.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영적 존재의 특성을 인간보다 확실히 알았다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그가 아는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그의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사단은 그 존재 자체가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7절을 봅시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사단을 변화시키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사단의 꾀임에 빠져 사단의 종이 되어버린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과 사단은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인생도 예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인생! 참으로 비참한 인생입니다
이 귀신들린 거라사 광인의 모습에서 현대인의 타락한 인간상을 발견합니다. 사람들이 거처할 곳은 가정입니다. 가정의 생명은 사랑과 순결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랑과 순결이 사라진 가정을 무덤이라 말합니다. 사람들은 지금 무덤과 같이 사랑과 순결이 사라진 가정에서 살고 있는 광인이라는 것입니다. 가정을 상실케 한 것은 사단이고, 사단의 무기는 타락과 이기주의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한 소망은 없습니다.
2. 치유하시는 그리스도
오늘 본문을 보면 현대인의 영적 무능력에 비해 귀신의 반응은 얼마나 민첩한지를 보여줍니다.
1.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6절)
이 귀신은 멀리서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자기 보다 더 강력한 분이 나타났음을 보고 달려와 절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도 굴복치 않던 악한 귀신이 예수님이 등장하자 달려와 절했습니다. 능력자인 예수님을 알아본 것입니다. 그리고는 소리쳤습니다.
2.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7절)
이 귀신의 소리치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귀신이지만 얼마나 정확하게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귀신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임을 외쳤습니다. 귀신에게도 지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그 다음 예수님에 대해서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는 것입니다. 영적 존재이기에 영의 세계를 잘 알았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도 예수님이 누군지 몰랐을 때입니다. 물론 귀신의 이 고백은 신앙적이 고백이 아니라 두려움과 공포의 탄식입니다.
3.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7절)
왜 이런 고백을 했습니까? 예수님의 등장 그 자체가 이 귀신을 두렵고 떨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또 이 귀신을 향해 던졌던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가 고문이요, 위협이요, 고통입니다. 여기 '괴롭게 마옵소서!'라는 말은 영어로는 '고문'한다는 말입니다(NIV). 예수님의 말씀에 이 귀신이 얼마나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4.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8절)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사람을 만나면서 지체 없이 귀신을 향해 명령하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예수님은 귀신이 인간을 괴롭게 하고 황폐케 하는 것을 한시도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이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잘못된 것으로부터 인간을 회복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바로 앞 장, 4;35-41절을 보면 인간을 괴롭히는 자연계를 다스리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풍랑이 불어와 제자들이 탄 배를 뒤집어 업으려 할 때 일어나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영계를 다스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자연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인간을 괴롭게 하고 인간의 삶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바로잡아주려 오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속박된다고 생각합니다. 또 예수님이 내 인생을 예수님 맘대로 주장할 것 같아 자신의 삶을 내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내 삶에 많은 손해가 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을 풍성하고 유익하게 해주시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우리 삶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제거하고 필요한 것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지금도 여러분의 삶을 방해하고 위협하는 모든 것을 없애주시기 원하십니다. 이 일은 예수님 만이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예수님이 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귀신과 인간을 구분해서 대했습니다. 명령할 때도 귀신을 향해 명령하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아 나오라" 귀신과 귀신들린 사람을 구별하셨습니다. 인간은 귀한 존재요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을 누릴 자이기 때문에 인간을 다룰 때는 함부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데가볼리 사람들은 이것을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귀신들린 인간을 귀신 그 자체로 취급해서 상대를 안 해버렸습니다. 인간이 고통 중에 있는 인간을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귀신은 저주하시고 좇아내셨지만 인간은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분별력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비록 귀신들린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창조되었기에 인간은 귀중한 것입니다. 귀신에 의해서 많은 부분이 망가지고 부셔졌지만 아직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이 그 안에 남아있는 한 하나님은 버리지 않습니다. 마찬가지 우리의 상태, 환경이 어떻든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라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 우리는 사랑 받기 충분한 사람이고, 예수님은 이런 나를 돕기 위해 오신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5. "네 이름이 무엇이냐? 군대니이다."(9절)
군대라는 말은 “레게온”이라는 말인데 로마 군대의 군단을 의미합니다. 당시 로마의 1개 군단 병력은 6천명의 보병, 120명의 기병과 지원특수부대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약 6천 마리의 귀신이 들어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엄청 센 귀신이 붙은 것입니다. 이렇게 센 귀신들이 붙었으니 누가 해보겠습니까? 누가 이 사람을 자유케 하겠습니까? 아무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6천 마리의 귀신들도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 앞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6천 마리의 귀신들이 나가버렸습니다. 능력 있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 앞에 '많은 숫자'라는 것은 무의미 한 것이었습니다.
이 절망과 무기력의 현장에 예수님이 등장하면서 상황은 급반전합니다. 기세당당하던 귀신은 무서워하고 예수님은 권위를 가지고 귀신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귀신이 예수님께 하는 하소연을 들어보십시오.
7절, 나를 괴롭게 마소서
10절, 이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마시기를 간절히 구하더니
12, 이에 간구하여 가로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지금 이 장면은 예수님과 귀신이 대화하는 장면입니다. 여러분이 주의 할 것은 이 때 귀신들린 사람이 말한 것이 아니라 이 사람 안에 있는 귀신이 말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귀신이 그 사람의 입을 빌려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예수님께 말하고 있습니다. 귀신은 생각보다 영리하고 영악합니다. 자신의 정체를 숨길 줄도 알고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귀신은 변신의 천재입니다. 불리하면 자신의 모습을 바꿔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합니다. 본문에서도 보시면 미친 듯이 무덤사이에서 날뛰던 이 귀신이 예수님이 등장하자 당장 달려와 엎드려 절하며 사정하고 있습니다. 저자세로 나옵니다. 그리고는 이제 예수님께 사정하고 있습니다. 귀신은 강한 자에게는 사정하지만 약한 자에게는 강하게 나갑니다.
특히 본문에서 주목할 것은 12절입니다. "이에 간구하여 가로되 우리를 돼지에게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귀신들 스스로 자기들을 돼지에게 들어가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하고 있습니다. 어디로 들어가는 것도 귀신들 맘대로 못하고 예수님의 허락을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돼지에게 들어가고 싶어 했을까요? 그것은 마귀와 돼지가 서로의 성향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더러움'입니다. 2절, 8절, 13절에서 귀신을 말할 때 항상 '더러운'이라는 단어가 들어갑니다. 귀신은 더러운 존재요, 더러운 일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성향과 돼지의 성향이 같습니다. 자기 똥에서 뒹굴고 그것을 몸에 묻히고 삽니다. 씻어줘도 그때뿐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두 가지를 가르쳐줍니다.
❶ 귀신은 더러운 상태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어떤 더러움에 있으면 귀신이 그 사람에게 다가옵니다. 귀신이 머물기에 가장 좋은 상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더러운 생각, 더러운 마음, 더러운 욕심, 더러운 습성에 빠지면 귀신이 들리기 쉽습니다. 가룟 유다는 마귀가 들어가자 예수를 팔 생각을 했습니다. 반대로 사람이 거룩한 생각, 아름다운 생각, 깨끗한 생각을 하면서 거룩한 삶을 살면 귀신은 다가오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쓰십니다.
❷ 귀신이 들어가면 사람이 더러워집니다.
멀쩡하던 사람도 귀신이 들어가면 더러운 생각, 행동, 습성에 빠져들게 됩니다. 여기 본문의 귀신들린 사람은 귀신이 들어가면서 옷을 벗고 자신의 몸을 학대하며 무덤사이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우리의 더러운 부분을 씻어주고 거룩케 만들어 주십니다.
3.거라사 광인의 사명
예수님과 귀신이 만난 결과는 무엇입니까? 15절을 보십시오. 귀신은 떠나고 이 사람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아있습니다. 세 가지로 회복된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옷을 입었다는 것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릴 줄 알았다는 것이요, 더러움에서 깨끗함으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정신이 온전하였다는 것은 무질서에서 질서를, 자기포기에서 자기회복을 했다는 말입니다. 앉아있다는 말은 삶의 방황이 끝나고 안정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귀신의 만남을 통해 귀신은 떠나고 한 인간의 황폐된 삶이 회복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둠의 권세와 싸우고 귀신들과 싸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 싸움을 통해 망가진 영혼들이 회복되어 하나님의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끝없는 중보기도를 통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을 선포함으로, 사랑의 섬김을 통해 우리는 마귀의 권세와 싸워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관심은 고침 받은 후, 거라사 광인의 변화된 삶의 모습입니다. 그는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져서 앉아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인간성이 회복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이 나의 삶의 원리가 되게 할 때에 일어나는 가장 확실한 변화는 나로 하여금 사람이 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수치를 알아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져 삶의 논리를 찾습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떠한 행동을 해야 하는지, 보람과 가치의 중요성이 무엇인지를 알게 합니다. 그리고 무덤 사이를 뛰어다니는, 행동만 있고 사고가 없는 사람이 이제는 자리에 앉아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인간회복의 모습입니다.
이 광인은 배를 타고 떠나시는 예수님께 함께 있기를 간구했습니다. 가장 바른 신앙인의 모습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사는 것이 불편한 사람은 떳떳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불편함보다는 함께 살 때 임하는 임마누엘의 축복이 큰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함께하기를 구하는 고침 받은 사람에게 예수님은 사명을 주셨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막 5:19). 고침 받은 자가 해야 할 사명은 주의 일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군대귀신 들린 자를 고쳐 주신 사건은 어마어마한 기적입니다.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사”어떤 사람이 군대 귀신을 쫓아낼 수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만이 이런 일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이제 거라사의 광인에게는 귀한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주님이 자신을 어떻게 불쌍히 여겨주셨는가를 친속에게 고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아들이라도 그 부모는 떳떳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고 불편을 주었습니다. 그런 아들이 정상인이 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누가 정상인이 되도록 회복시켜 주었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일을 멸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거라사의 광인 같은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니 이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도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큰일을 행하시는 메시아이십니다. 큰일을 행하시는 주님을 증거 하는 증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물질이냐? 사람이냐?
조상호 목사
옛날 중세 영국에 원수지간인 두 가문이 있었습니다. ‘캐퓰리트 가문’과 ‘몬테규 가문’이었습니다. 이 두 집안은 철천지원수로 맺어진 가문이어서 누구든 서로 만나기만 하면, 피를 뿌리며 싸움을 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문의 아들과 딸이 그만 서로 사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원래 맹목(盲目)적인 것입니다. 여기서 맹목이라고 하는 말은 눈이 먼다는 뜻입니다. 영어로 blind love 라고 하는데, 눈 먼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사랑에 눈이 멀면 원수고 뭐고 간에 무조건 좋아진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국경도 없는 눈먼 사랑이라지만, 집안의 반대가 하도 심하다 보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구한 연인들은 끝내 자신들의 사랑을 포기하기 않았습니다. 두 사람이 얼마나 서로를 사랑했던지, 급기야는 사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얼음처럼 차갑던 두 원수 집안은 이 두 청춘 남녀의 뜨거운 사랑 앞에서 어색한 화해를 하게까지 됩니다. 이 애절한 사랑의 이야기가 서양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랑의 이야기인데, 바로 그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작품, <로미오와 줄리엣>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이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를 좋아할까요? 사랑을 위하여 목숨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분명 목숨입니다. 그런데 그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행한 위대한 사랑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를 좋아하고, 그 이야기를 아름답게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아름답습니다. 그 중에서도 목숨을 건 사랑의 이야기만큼 아름다운 이야기는 이 세상에 별로 없습니다. 물론 목숨을 건 사랑 이야기는 단지 남녀의 사랑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 자식간의 사랑도 있고, 친구와 친구 간의 사랑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빼놓고서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의 그 어떠한 사랑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옛날 어느 나라의 한 장관이 팔레스틴을 여행하다가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귀국 후에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여러 사람에게 전도하였습니다. "예수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나는 그 예수를 믿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나서 그 장관을 시험하기 위해 그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여봐라! 하나님이 만왕의 왕이시라면 말 한 마디만으로도 모든 인생을 구원할 수 있을 터인데, 무엇 때문에 친히 사람의 몸을 입었는고? 그대는 말할 수 있겠는고?" 그 장관은 하루만 시간을 달라고 왕에게 청했고, 의기양양한 왕은 흔쾌히 허락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장관은 곧장 재주가 빼어난 목수를 불러, 왕의 외아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목각 인형을 만들게 하고 인형에 아름다운 옷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왕자의 유모에게 가지고 갔습니다. 그 장관은 왕자의 유모에게 날이 밝으면 자기가 지시하는 한 다리위에서 그 목각인형을 안고 있다가, 자신이 신호를 하면 그 목각인형을 다리 아래로 떨어뜨리라고 했습니다. 이윽고 다음 날이 되었습니다. 장관은 왕과 함께 다리 밑의 한 배에 앉아 있다가 유모에게 신호를 보냈습니다. 그러자 유모는 실수인 척하면서 일부러 인형을 다리 위에서 떨어뜨렸습니다. 왕은 깜짝 놀라 물로 뛰어내리려고 했습니다. 그 장관은 만류했습니다. "폐하! 친히 내려가실 필요가 없습니다.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리십시오." 하지만 왕은 "안 된다. 안 돼. 내가 구하러 가겠다. 다른 사람은 마음이 안 놓여! 난 저 아이의 아버지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제야 그 장관은 자초지종을 모두 털어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왕의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인류를 지으신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물에 빠져 죽게 되었는데, 어찌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를 받아들여야만 죽음에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왕은 감동을 받고 하나님을 믿게되었다고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말 한 마디로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는 그럴만한 충분한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2,000년 전에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직접 내려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를 대신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2,000년 전 당시 인간이 고안해 낸 가장 잔인한 상형방법인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우리의 생명을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친히 인간이 되어 내려오셨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친히 저주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에서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관심은 생명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어떠한 투자를 하더라도, 어떠한 비용이 들더라도,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원하시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원리들과 다른 점입니다. 세상은 어떤 원리가 통용되고 있습니까? 시장 경제논리로 모든 것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상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익이 된다고 판단되면 시행을 하지만, 손해가 난다 싶으면 포기해 버리는 경제논리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전혀 다릅니다. 주님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세상의 원리와 전혀 다른 원리들이 적용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그 유명한 잃은 양의 비유가 나옵니다. 제가 3절부터 6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이것은 세상의 원리와 완전히 반대되는 원리입니다.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한 마리가 소중합니까? 아흔아홉 마리가 소중합니까? 당연히 한 마리 보다 아흔아홉 마리가 더 소중합니다. 어린 소년부 어린이들에게 물어봐도 아흔아홉 마리가 더 소중하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놓아두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산으로 들로 헤매고 다녔습니다. 정신 나간 목자가 아닌 이상, 이것은 있을 수 없는 행동입니다.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으려다가, 잘못하면 사나운 짐승들의 공격을 받아 남아있는 아흔아홉 마리까지 잃을 수도 있습니다. 설령 아흔아홉 마리를 잃지 않는다 할지라도,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고 나서 동네 사람들을 불러다가 잔치를 했다면 또 얼마나 많은 돈이 들겠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한 마리의 양 값보다 더 많은 돈을 들여야 잔치를 배설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이 비유를 하시면서 아흔아홉보다 잃은 양 하나를 더 귀하게 더 여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손해 보는 장사를 즐기시는 주님을 세상의 경제원리를 가지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거라사 지방에 가셨을 때, 귀신들린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마을 변두리 공동묘지에서 살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힘을 합쳐 그를 제어하기 위해 쇠사슬과 쇠고랑을 채웠지만, 그가 얼마나 힘이 세던지 손쉽게 쇠사슬을 끊고 쇠고랑을 깨뜨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흉악하게 귀신들린 그 사람 때문에 불안해서 살 수가 없었습니다. 날마다 귀신 들린 그 사람이 지르는 고함 소리 때문에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님께서 그 마을에 도착하셨습니다. 귀신 들린 그 사람은 갑자기 주님께 달려왔습니다. 6절과 7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지금 귀신들린 사람이 주님께 달려와 절한 것은 그 마을에 들어오시는 주님을 환영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그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을 향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주님을 찬양하고 공경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지극히 높으신 주님께서 더러운 거라사 지방에 들어오시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에 주님께서 들어오시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갖은 말을 동원해서 아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귀신의 이 말에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8절과 9절을 보겠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여기 ‘군대’라는 원래 뜻은 로마 군대에서 사용되는 ‘레기온’이라는 단어로서, 군단을 가리킵니다. 당시 약 6,000명 이상의 군인들이 모여 1개 군단을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귀신의 이름이 ‘군대’라는 말은 귀신이 용맹스러운 해병대나 공수부대와 같은 군대라는 말이 아니라, 6,000마리나 되는 엄청나게 많은 귀신이 그 사람을 억누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가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쇠사슬로 묶어 놓아도 손쉽게 풀어버리고, 쇠고랑으로 묶어 놓아도 금방 끓어버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슈퍼맨이어서가 아니라, 6,000 마리나 되는 귀신의 힘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군대 귀신을 그 사람에게서 나오게 할 뿐 아니라, 거라사 지방에서 완전히 좇아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군대귀신은 거라사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말라고 주님께 간절히 간청을 했습니다. 그래도 주님의 태도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귀신은 작전을 바꾸었습니다.
11절부터 13절까지를 보겠습니다.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이에 간구하여 가로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사람의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예수께서 명령하시자, 귀신들이 그 사람들에게서 나와 2,00마리나 되는 수많은 돼지 떼에게로 들어갔습니다. 귀신들린 온 돼지 떼들이 미친 듯이 비탈길을 내리달아 갈릴리 호수에 빠져 몰사 당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6,000마리나 되는 수많은 귀신들에 의해 점령당했던 그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으로 치유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돼지를 치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곧장 마을에 들어가 이 모든 사실들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마을에서는 나리가 났습니다. 2,000마리나 되는 돼지가 죽음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큰 손해를 입은 온 마을이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돼지 2,000마리가 죽음으로 인해 발생된 경제적 손실을 따지기 위해서 주님께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온 마을을 공포에 떨게 했던 귀신들린 사람이 치유된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이 정상으로 돌아와 이제는 더 이상 공포에 떨지 않고 평안히 살 수 있게 된 것은 잊은 채, 돼지 2,000마리가 죽은 것을 따지기 위해서 주님께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알지 못했단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왜 이러한 역사를 일으키고 계시는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조선 왕조 500년이 우리 민족 역사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 한 가지만 말해보라고 한다면, 두말 할 것도 없이 세종 대왕이 한글을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민족이 고유한 자기 말과 글을 갖지 못하면, 고유한 문화와 전통과 역사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고유한 언어가 없으면 그 민족은 소멸되어 버리거나, 아니면 다른 민족에 동화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1446년 9월에 반포된 훈민정음의 중요성과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랄 것입니다. 그래서 매년 10월9일, 바로 오늘을 한글날로 정해 기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글이 처음 만들어 질 때, 순탄하게 진행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일반 백성들은 한글에 대해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았고, 이미 한자에 능숙하던 지배계층 가운데 오히려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능수능란하게 한자를 구사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 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공공연히 한글 만드는 것을 반대했을 뿐 아니라, 세종 대왕에게 한글 만드는 일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그 반대론자들의 우두머리 격이었던 최만리는 1444년 2월20일에 다음과 같은 요지의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감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우리는 예로부터 대국 중화의 제도를 본받아 실행해왔습니다. 그런데 그와 아무 관련이 없는 새 글자를 만드는 것은 학문에도, 정치에도 아무 유익함이 없는 줄로 압니다. 더구나 글자 제정은 의견을 두루 청취하면서 시간을 두고 가부를 논해야 마땅한데도, 너무 성급하게 발표했습니다. 혹시라도 중국 측에서 시비를 걸어올까 두렵습니다. 주변국들이 제 글자를 가지고 있다 하나 그들을 모두 오랑캐들일 뿐입니다. 우리가 중화의 은혜를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족에 합류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더구나 한자를 익혀야 쓸 수 있기에 오히려 학문에 도움이 됩니다. 만약 관리들이 쉽게 언문만 익히게 된다면, 결국에는 한자를 아는 이가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 할 일이 태산같이 많은데 어찌하여 급하지도 않는 언문 익히기 부담을 주시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언문이 비록 유익하다 할지라도 한낱 기예에 불과합니다. 학업에 정진하고 정신을 연마해야 할 어린 왕자들과 유생들이 시간을 허비해 가며 익히기에 몰두한다면, 이는 크나큰 국가적 손실입니다. 감히 고하오니 부디 헤아려 주시옵소서.”
여러분, 500년이 지난 오늘날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의 판단이 매우 잘못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최만리는 학자로서, 특히 말년에는 부정부패를 일삼지 않고 정직하게 많은 업적을 세워 청렴결백한 재상의 모델로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인생에 수치스럽고 불명예스러운 오점을 찍고 말았습니다. 그는 우리나라보다 중국을, 세종대왕보다 중국의 황제를 더 염두에 두었습니다. 그래서 훈민정음을 만드는 것을 극구 반대했습니다. 만약 그가 심중에 중국보다 우리 민족을 더 우위에 두었더라면,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 역사입니까? 무엇을 염두에 두느냐, 무엇에 더 큰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사람보다 물질을 더 중요시 여기는 사람은 어떻게 행동합니까? 구두약과 인쇄용 잉크에 사용되는 발암물질이 섞인 색소를 아무렇지 않게 고춧가루에 섞어 팔기도 합니다. 썩지 않고 오래 보존하기 위하여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농약 섞인 물로 콩나물을 기른 후 유명한 백화점에 내다 팔기도 합니다. 이처럼 돈에 눈이 어두워진 사람은 남이야 어떻게 되든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근사하고 웅장하게 지은 지 몇 년 안 된 한 백화점 건물이 하루아침에 폭삭 주저앉아 버린 적이 있습니다. 바로 삼풍백화점 사건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나중에 조사한 결과, 설계상의 문제가 있었고, 값싼 바다모래와 같이 쓸 수 없는 자재를 사용했고, 매장을 넓히기 위해 무리한 증축을 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또 더 기가 막힌 것은 사고의 위험을 보름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며칠 전부터 붕괴의 징후가 보였고 당일 아침에는 5층 바닥이 솟아오르고 지붕이 내려앉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백화점의 사장도 와서 보고 갔고, 그 후에 간부회의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그토록 위험한 상황에서 아무런 조치도 없이 고객을 대피시키지 않고, 영업을 계속하라는 지시를 했다는 것입니다. 하루에 벌어들일 돈 때문에 무너져 내리는 건물에서 장사를 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건물은 무너져 내렸고 천여 명의 직원과 손님들이 콘크리트 철근 더미에 묻혀 더러는 죽고, 수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잘못된 건축공법이 삼풍백화점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돈에 대한 과도한 욕심이 삼풍백화점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보다 물질을 더 소중하게 여겼던 삼풍백화점의 회장과 그의 가족들이 1,000여 명의 생명을 콘크리트 더미 속에 묻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명예도 한 순간에 추락해버렸고, 목숨처럼 여기던 재산도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죄 값을 받기 위해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옛날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돈을 잃은 사람은 조금 잃은 것이다. 건강을 잃은 사람은 많이 잃은 것이다. 인격을 잃은 사람은 다 잃은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돈은 필요합니다. 몇 주 전에 말씀 드린 것처럼 돈 많이 버십시오. 그러나 돈 자체를 인생의 목표로 삼지는 마십시오. 돈은 우리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돈은 다만 우리의 목표를 이루는데, 도움을 주는 도구일 뿐입니다. 사람에게는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다. <존슨 앤 존슨>(Johnson & Johnson)은 1886년에 로버트 존슨이라는 사람이 설립하였습니다. 그는 ‘고통과 질병의 경감’이라는 이념을 내세웠습니다. 그런데 이 회사에 유명한 한 일화가 있습니다. 1982년 <존슨 앤 존슨> 회사에서 만든 타이레놀 병에 누군가가 시안화물을 넣어 시카고 지역에서 7명의 사망자를 내게 되었습니다. <존슨 앤 존슨>사는 사건이 시카고 지역에서는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즉각 전 미국 시장에서 타이레놀을 회수했고, 전 국민에게 위험을 알렸습니다. 그런데 그 비용이 무려 1억 달러나 들었을 뿐 아니라, 2,500명의 인력이 동원되었습니다. 후에 워싱톤 포스트지는 이 사건을 통해 <존슨 앤 존슨>는 비용이 들더라도 옳은 일이라면 반드시 한다는 기업 이미지를 소비자에게 심어 주는데 성공했다고 보도했습니다. 결국 이 일로 <존슨 앤 존슨>사는 국민들에게 더 큰 신뢰를 얻어 오히려 기업이 번창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보다 물질을 소중하게 여겼던 <삼풍백화점> 주인들은 물질을 다 날려버렸지만, 물질보다 사람을 소중하게 여겼던 <존슨 앤 존슨>사는 오히려 물질을 더 많이 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물질보다 사람을 중요시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보다 물질을 더 중요시하고 있습니까? 주님과 같은 사람들입니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거라사 지방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사람보다도 물질을 더 우선시했습니다. 영혼구원보다도 경제논리를 우선시했습니다. 돈이 그들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자기 마을에서 떠나 줄 것을 간청했습니다(17절). 왜냐하면 예수 안에는 자기들이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돼지 2,000 마리를 몰사시켰다면, 다음에 그보다 더 심각하고 두려운 일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웃이 귀신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어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보다는, 단지 돼지 떼를 잃었다는 경제적 손실 때문에 주님을 배척한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경제적인 손실을 보고 싶지 않아서 주님에게 자기들의 마을에서 떠나줄 것을 간청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그 목적을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틈만 나면 말씀을 가르치시고 복음을 증거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을 본 사람들이 흥분할 때, 예수님께서는 다른 마을로 가셔서 그곳에서 다시 복음을 증거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최고의 관심은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혼구원이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인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거라사 지방의 마을 사람들처럼 사람의 영혼보다도 돼지 떼에 관심 있는 것은 아닙니까? 베드로처럼 물고기 잡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삭개오처럼 자신의 호주머니만 채우려는 사람은 아닙니까? 서두에서 말씀드렸지만, 주님께서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도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소자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말라, 소자 중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16:26)고 하시며, 한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한 것임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경제를 구하기 위해 오시지 않고,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돈 벌기 위하여 오시지 않고,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오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은과 금을 주는 곳이 아니라, 생명의 복음을 주는 곳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교회는 은과 금을 쌓아 놓는 곳이 아니라, 은과 금을 가지고 사람을 살리고 영혼을 살리는 곳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수많은 돼지떼보다 귀한 것이 사람의 영혼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돼지 떼가 죽었다는 것만을 문제 삼았던 거라사 지방의 사람들과 같이, 돈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자리에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 물질보다 사람의 영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단의 정체와 결과
막 5:15-20 박지온 목사
사단의 정체를 알아야 영적 싸움이 됩니다. 싸울 때에 대상을 모르고 싸우는 일은 미친 짓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신앙 생활의 싸울 대상이 어떤 정체를 가진 자인지를 알아야 싸워서 이길 수 있습니다. 신앙 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영적 싸움입니다. 기도의 응답도 영적 싸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또한 낙심하지 않고 싸우기 위해서는 우리의 신분을 확인해야 합니다.
1. 사단의 정체
① 사단은 타락한 천사요, 귀신은 사단을 따르는 타락한 천사들입니다.
② 사단의 전진 기지는 마음과 생각입니다.
③ 사단은 마음과 생각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④ 하나님도 평안으로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참으로 치열한 전투장입니다.
⑥ 사단이 마음과 생각을 틈타려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조용히 기도하십시오.
⑦ 사단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빼앗아서 우리의 인생을 파멸시키려고 합니다.
2. 사단이 어떻게 틈타 들어옵니까?
① 요나가 하나님을 피하려고 했을 때,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어서 탔더니 함께 배를 탔던 모든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② 사단의 통로가 열려 있는데도 잘 되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③ 사단의 통로가 열려 있을 때는 한 대 얻어터져서 돌이킬 수 있는 것이 오히려 다행한 일입니다.
④ 첫째로, 사단은 우리 자신도 모르게 틈타 들어옵니다.(마12:43)
⑤ 사단이 물 없는 곳을 찾아 다녔다고 했는데, 이것은 은혜를 받지 못하면 다툼이 생긴다는 것을 뜻합니다.(마12:43)
⑥ 은혜가 떨어지면 사람을 만날 때 짜증부터 나고, 사건이 생기면 다툼부터 일어납니다.
⑦ 다툴 때마다 귀신들이 계속 틈타 들어와서 점점 상황이 더 악화되어, 항상 성질부터 내게 됩니다.
⑧ 짜증이 날려고 할 때마다, 조금만이라도 영적 진리를 생각해 보면 사단을 이길 수 있습니다.
⑨ 둘째로, 사단은 우리가 신앙 생활에 나태를 부릴 때 틈타 들어옵니다.
⑩ 사단은 물 없는 곳으로 다니다가 쉬기를 구하는데, 이것은 신앙 생활의 나태를 뜻합니다.
⑪ 사람들이 잘 때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뿌린다고 한 것처럼 신앙 생활에서 나태할 때 사단이 뿌려놓은 가라지만 가득하게 됩니다.
⑫ 셋째로, 사단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 확립되어 있지 않을 때 틈타 들어옵니다.
⑬ 귀신이 다시 돌아왔을 때 빈 집이어서 더 많은 귀신들을 데리고 왔는데, 이것은 주인이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⑭ 내가 어떤 문제와 상황 속에 있더라도 나는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인해야 합니다.
⑮ 복음 없이 열심히 하는 모든 것은 종교에 불과하고, 거기에는 재난과 재앙이 따를 뿐입니다.
3. 사단이 틈타 들어오면 어떠한 결과가 생깁니까?
① 한 번 받은 상처에 집착하게 됩니다.
② 좋지 않은 경험을 절대로 잊지 못하게 됩니다.
③ 마음과 생각이 질병에 매여 나약해집니다.
④ 이해할 수 없는 충동적인 말과 행동이 나옵니다.
⑤ 무엇이든지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⑥ 무엇이든지 된다고 장담하는 황당한 말을 합니다.